경제 정의와 프란치스코 교황

2014. 8. 2. 08:43종교/영성의 세계에서

경제 정의와 프란치스코 교황

경동현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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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20  16:5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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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년 동안 중국의 군사적 점령, 통치하에서 티벳 민중은 온갖 억압을 당하면서도 티벳 문화를 훼손하지 않고 잘 유지해왔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불어닥친 소비문화는 티벳 전통문화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단 10년 만에 말이다.”

티벳 망명 정부의 첫 직선 총리인 삼동 린포체가 남긴 말이다.

그의 말은 소비문화로 상징되는 소위 신자유주의 세상이 물리적 탄압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데 얼마나 큰 유혹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물질만능의 신자유주의의 유혹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탐욕이 아닌, 사랑과 환대가 선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어온 세계 경제의 근본적 위기 상황은 시장만능주의의 카지노식 돈벌이 경제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금융위기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자본의 지배자들은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임기응변식의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사태의 근본을 더욱 흐리게 만들고 근본 처방을 지연시켜 주가와 환율 등락에 우리네 삶의 행복을 저당 잡힌 상황으로 몰고 간다.

 

오늘날 세계가 처한 경제위기의 해법은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하는 것으로는 어림없어 보인다. ‘너도 올라갔으니, 나도 올라가겠다’는 식은 참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의 세계 경제위기는 우리가 누린 풍요 때문에 일어났다. 이는 지구가 갖고 있는 복원력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원을 소모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경기순환을 예측한 ‘쥐글라 사이클’로 유명한 프랑스 경제학자 클레망 쥐글라가 “불황의 유일한 원인은 바로 번영”이라고 말한 이유다. 진정한 대안은 ‘네가 올라간 곳이나 길이 잘못되었으므로 나는 전혀 다른 길을 찾겠다’는 사고의 전환에서 가능하다.

 

가톨릭 사회교리를 살펴보면 시장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한 비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기보다는 이윤, 세계화, 개발, 성장의 ‘과잉’에 대한 문제 제기들이 주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바티칸이 시장주의를 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가 나오기도 한다.

 

2009년 발표된 전임 교황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 대해 세르주 라투슈는 “바티칸은 시장주의를 섬긴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3호, 2010)는 기고문에서 전임 교황이 놀랄 만큼 성장주의에 경도돼 있다고 지적했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주요 원리들인 인간 존엄성, 공동선, 보조성, 연대성의 원리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 사회교리에 사용되고 있는 ‘발전’, ‘개발’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탐욕은 선’이라는 명제를 앞세워 발전, 개발을 외쳐온 시장만능주의의 근본적 위기 앞에서 교회의 자기 관점이 요청되는 이유이다. 이 관점은 시장만능주의 흐름과 무관치 않은 교회 현실에 대한 자기 성찰을 전제할 때 생겨날 수 있다.

 

마태 복음 20장 전반부는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포도원 주인처럼 너그러운 고용주는 거의 없거나 지극히 드물다. ‘탐욕은 선’이라는 주류 경제의 입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탓이다.

 

그런데 이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영감을 얻은 존 러스킨(1819~1900)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맑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에서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사랑’이라는 주장을 한다. ‘탐욕’과 ‘이익’을 가장 큰 변수로 고려할 뿐 인간의 일할 권리, 생존할 권리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돌아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를 두고 너무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봄 새로 탄생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와 발언들은 이러한 이상이 꼭 불가능하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라 생각한다. 그의 구체적인 발언과 행보를 살피는 것으로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으면 한다.

 

   

▲ 지난 3월 13일,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가 성 베드로 성당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해방신학과 교황

새 교황이 선임된 이후 교회 안팎에서 나온 여러 반응을 살펴보면 우려보다는 기대와 희망이 많은 듯하다. 첫 남미 출신, 첫 예수회 출신, 1200여 년만의 비유럽권 출신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Mario Bergoglio) 추기경은 교황 즉위 미사에서 ‘프란치스코’를 따라 ‘가난한 자의 교황’이 되겠다고 12억 가톨릭 신자와 132개국 대표단, 32개국 대통령 앞에서 선언했다.

즉위 이후 몇 달간의 활동만으로도 그는 교황직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 그가 보여준 교황직 수행의 스타일 변화였다. 예를 들어 이전의 교황들처럼 교황궁이 아니라 영빈관인 성 마르타의 집에 묵으면서 교황청을 방문하는 각국의 주교와 사제를 격의 없이 만난다거나 매일 아침 성 마르타의 집에서 즉흥 강론을 하는 등 직접적인 방식으로 교황 직무를 수행하면서 평신도들과 미디어를 매혹시키고 있다.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그의 행보는 그의 고향인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오랫동안 고난과 희망의 땅이었다.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천명하고,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민중교회와 해방신학을 발전시키며 ‘정의로운 신앙’을 부추겼다. 교황은 추기경 시절 해방신학에 대해 “절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그가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은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교황 즉위 이후 해방신학자들이 그에 대해 비판보다는 희망을 강조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레오나르도 보프의 경우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교회 쇄신 프로젝트라고 판단한다. 또한 취임사에서 새 교황이 사랑으로 다스리고, 하느님 백성을 중심에 놓는다고 천명한 점, 남반구 출신이라는 점 등을 들어 새 교황이 교황청을 개혁하고, 행정을 분권화하며, 교회를 새롭고 믿을만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대는 콘클라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선을 도운 해방신학의 지지자 우메스 추기경의 입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그는 브라질의 유력한 일간지인 <폴랴 데 상파울루>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7년 브라질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제5차 총회에서 초안 작성을 함께하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감동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한편으로 새 교황도 해방신학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해방신학을 ‘역사적 단계’ 또는 ‘과거’라는 말로 상대화하고, 현 시점에서 새롭게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위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 ‘경제 독재’(the dictatorship of the economy)나 소비지상주의적 가치관의 확산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한편, 전세계적인 빈곤 해소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한 8인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교회 개혁 위원회의 구성, 돈세탁 의혹을 받아온 바티칸 은행 조사특위 구성과 같은 행보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적 토양에서 생겨난 그의 체험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 성 마르타의 집에서 열린 미사에서 강론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갈무리 youtube.com/vatican)

 

자기 쇄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근원적 희망

‘세계 정의’를 주제로 다룬 세계주교시노드(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총회 문헌 38항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가 정의를 증거해야 한다면, 교회는 먼저 사람들 앞에서 감히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 눈에 정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교회 안에서의 행동 규범, 교회 재산, 그 생활양식 등을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종교를 떠나 일반 상식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많은 이가 동의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본다. 정의라는 표현 대신 ‘예수의 가르침’이나 ‘경제 정의’로 바꿔 읽어도 좋을 듯하다. 이런 관점에 동의한다면 교회 안의 상황을 성찰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시장만능주의의 영향으로 갈수록 개인의 고립화, 원자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신앙에서도 사회적 차원의 기능이나 역할보다는 개인에게 위로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신앙이 인기를 끄는 탓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복음은 현실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없는 현실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내적 평화’를 주어 현실을 버텨내는 역할로 기대된다.

 

지난해 주교회의 미디어팀에서 발표한 최근 7년간 7, 8월 피정 통계에 따르면, 전국 교구 주보에 안내된 휴가철 피정 프로그램 수는 6년 사이 3배가량 늘었으며, 피정의 집 숫자도 약 1.5배 증가했다. 가장 크게 증가한 유형은 성인 신자를 위한 가톨릭 영성 피정과 청년 수도생활 체험 피정이다.

 

참여자의 관점에서 여름휴가의 선택 항목에 피정이 추가된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고독과 피곤에 찌든 현대인의 영적 갈망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해법이 아닌 응급 처방식 해법은 종교 의례를 소비상품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종교의례가 소비상품으로 다뤄질 때 피정 참가자는 늘지 몰라도, 예수의 삶을 따라 삶이 변하는 신자들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자기 쇄신을 촉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황은 4월 14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주일 미사 강론에서 가톨릭교회가 신뢰를 회복하려면 교인 모두가 행동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바티칸의 자기 쇄신과 관련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월 26일 바티칸 은행을 조사하는 교황 직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소식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를 두고 <로이터> 통신은 “교황 취임 후 수십 년 동안 가톨릭교회를 당혹스럽게 했던 문제에 대처하려는 가장 과감한 조치”라고 전했다.

지난 3월 교황 선출을 전후로 차기 교황이 누가 되든 ‘바티칸 은행의 실제 주인’으로 불리는 국무장관에 이탈리아 추기경 세력을 등에 업은 이가 되면 바티칸 개혁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바티칸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망은 교황청은 이미 거대한 관료 조직으로 변질돼 교황은 ‘얼굴마담’이고 국무장관이 관료조직화된 교황청의 실세라는 시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일단 교황의 의지는 단호해 보인다. 그동안 추문이 끊이지 않았던 바티칸 은행에 대한 조사위원회 출범과 관련해 <로이터> 통신은 ‘바티칸 소식통들을 취재한 결과, 교황은 바티칸 은행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심지어 폐쇄까지도 결정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교황은 이에 앞서 지난 4월 13일 추기경 8인으로 구성된 조언단을 구성해 본격적인 교회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전반적인 교회의 운영과 바티칸의 관료주의 개혁에 관해 조언할 이들 조언단의 첫 회의는 10월 초에 열렸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8명의 자문위원회 추기경들과 10월 1일부터 사흘 동안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사진 출처 / 교황청 유튜브 동영상 youtube.com/vatican 갈무리)

 

세계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난 6월 20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로마 회의 참가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교황은 국제적 금융 투기와 부패가 수백만 명을 굶주리게 한다며 금융위기를 빈곤층 지원 중단의 변명으로 삼아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론에서 “현재 식량 생산 수준이 전세계 사람들을 모두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하지만 아직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거나 죽어가고 있고, 이는 수치스런 일”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단순히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만족하는 빈민들과 부자들 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구의 생산물로부터 혜택을 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근시안적인 경제적 이익이나 세상 사람 다수를 배제하는 소수 권력자의 사고방식에도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작금의 위기가 현상적으로는 경제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위기라는 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 강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강론에서 “투자한 돈이 조금 손해를 보면 마치 큰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를 걱정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굶어 죽어도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의 위기”라고 말한다. 이 위기에서 교회도 예외일 수 없기에 그의 메시지는 자기 쇄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근원적 희망의 메시지로 읽힌다.

나가며

그동안 위기에 대한 분석과 비판의 말들은 사실 교회 안에서도 차고 넘쳤다. 하지만 해법과 대안을 찾아가고 공감을 끌어내는 면에서 어떤 결실을 맺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말은 많은데 실천이 없는 세상이다. 머리는 엄청난데 몸과 손발이 작동을 못한다. 행동 없는 믿음, 실천 없는 기도, 증거 없는 삶, 희생 없는 제사가 꽹과리처럼 요란하다. 어려운 것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자기 쇄신을 위한 작은 노력과 실천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근원적 희망의 길은 시작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를 두고 ‘전통을 무시한다’, ‘말이 너무 많다’는 등 숨죽인 불평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 자신은 그런 불평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엇인가 잘못하는 것이 낫고, 교회는 조심스레 만들어진 계획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의 성령께서 움직일 공간을 남겨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에 기반해 경제 정의를 촉구하는 교황의 메시지는 나와 우리를 포함한 교회 자신과의 투쟁이요, 수행의 풀무질이어야 하지 않을까!


경동현
(안드레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기사 제휴 / ‘영성생활’ 제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