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해적당 당원은 주로 ‘괴짜들(geeks)’이다. 해적당은 뿌리가 온라인 세상이기 때문에 중립성(neutrality)과 같은 기술 현안에 지나치게 힘을 쏟는 경향이 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선거에서 해적당의 득표율은 미미하다.
해적당이 한국에 출범한다면 유럽의 원조 해적당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 생각에 해적당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기술 세상의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해 집중하지도 않을 것 같다. ‘한국형’ 해적당은 아마도 ‘현실 세계’ 속의 정치 조직일 것이며 주류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선거에 후보도 내보낼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가장 슬픈 현상 중 하나는 극단적인 하향식 구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무력감이다.
내 의견은 국민 스스로가 하향식 ‘대인(大人·big man)’ 리더십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하향식 리더십에서는 진정한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한국 정치에는 ‘우리를 구원할 사람’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기억하는 노년층 유권자들은 아무것도 안 따지고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방식은 다르지만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안철수와 사랑에 빠졌고 또 사랑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토크콘서트에 가고 진보적인 문화비평가나 유행의 첨단을 걷는 교수들의 글을 읽는다. 매일 이들이 한 말을 소셜 미디어로 전파한다. 나는 이렇게 반응하고 싶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의 생각은 뭡니까?”
실망으로 가는 확실한 길인 영웅 만들기보다는 아이디어, 토론, 그리고 민주주의 그 자체를 떠받드는 것은 어떤가. 미래에 한국을 휩쓸 정치적 현상의 주인공이 어떤 개인이 아니라 인터넷 기반 조직이 아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떤 이념이나 지역이 아니라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 같은 토론의 장으로서 출범하는 그런 조직 말이다. 내용이 간단한 창당 헌장은 ‘1인 1표’를 보장할 것이다. 참여도와 능력에 따라 지도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인데, 그들 또한 다수결에 입각한 의사결정이라는 제한을 받을 것이다. 공직에 출마할 후보는 당연히 1인 1표 원칙에 따라 해당 선거구에 사는 당원들이 선출할 것이다.
한편 오프라인에서는 지역별로 커피숍이나 홀 같은 곳에서 ‘살롱’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이 끝난 다음 저녁에 토론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며, 차례차례로 자신이 선택한 이슈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토론에는 단 두 가지 규칙이 적용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이다. 지역당의 지도자들 또한 이런 모임을 통해 떠오를 것이다. 이 모든 게 실현되지 않더라도, 자기 생각을 소통시키기 위해 토론회에 가는 게 토크콘서트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이런 하의상달식 대중 정당인 해적당은, 적어도 초기에는 한국의 모든 분야를 다스리는 끼리끼리 네트워크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일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국민이 진짜로 바라는 것을 반영한 정책이 나오고 진심으로 그 정책을 실행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한국만큼 인터넷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게 스며든 나라는 없다. 또한 한국만큼 부패와 무능력과 아이디어의 빈곤 때문에 국민이 실망하는 나라도 없다. 흔히 듣게 되는 이야기는 한국에는 진정한 보수 혹은 진보가 주류 정치 세계에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해적당이 한국에서 성공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나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해적당이 현실 정치에서 성공한다면 원래의 이상과는 얼마간 멀어진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해적당이 기성 정당에 압력을 넣어 국민이 바라는 것을 더 잘 반영하게 하고 보다 투명하고 책임성 있는 정치를 하도록 만들 것이라는 것을.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