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G 크리슈나무르티 - 깨달음은 없다
저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고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죠. 저의 이야기가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작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려 놓은 장막을 걷어 내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상상 속에만 있는 경지를 좇아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막을 수 있겠죠.
제가 묘사하는 이 상태는 저의 상태도 신을 깨달은 사람의 상태도 아닙니다. 돌연변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의 상태입니다. 여러분의 자연스러운 상태죠. 무언가에 도달하려는 마음과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노력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스스로의 방식에 따라 드러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의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의 경험에 의거하여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경험의 영역에도 들어 있지 않죠. 자연스러운 상태가 일어나는 데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그저 일어나죠. 타인과의 의사소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도 않죠. 자기가 기능 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현실이 됩니다. 저의 설명과 자신이 기능 하는 방식을 비교해 보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런 비교를 멈추었을 때 자신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말에도 귀기울이지 않겠죠.
저는 여러분에게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죠. 가르침이라는 말은 이 일에 부적당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가르침이란 어떤 것입니까? 방법, 체계적인 프로그램,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새로운 사고방식.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기능하는 지를 묘사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기능하는 방식입니다. 생각이 꾸며 놓은 가면만 벗겨지면 말이죠.
자연스러운 상태는 자신을 깨달았거나 신을 깨달은 사람들의 상태가 아닙니다. 성취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고 애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고 있는 이 상태입니다. 삶의 기능적인 활동력입니다. 제가 말하는 삶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감각이 생각의 간섭 없이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감각의 일에 억지로 끼여들어 참견을 합니다. 생각은 감각의 운동목표를 가리켜 줍니다. 그리고 감각을 이용해서 생각은 연속성을 갖게 되죠.
우리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종교에서 말하는 황홀, 지복, 축복감 같은 것과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경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거짓된 이야기를 하고 있죠.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체험을 찾아 헤맨 사람은 아마 종교적인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이런 체험을 일으킵니다. 그런 체험은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크리슈나 의식, 부처 의식, 예수 의식. 모두 남의 길에서 헤매 다니며 겪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은 시간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시간을 넘어선 것은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손에 쥘 수도 담아 둘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들어 둘 수도 없죠. 남들이 다닌 길로 가서는 아무 곳에도 다다를 수 없습니다. 저 너머에도 오아시스는 없죠. 신기루에 갇혀 버리고 말죠.
이 상태는 우리의 육체적 상태입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어느 날 빠져들었다가 다음날 깨어나는 기묘한 심리상태가 아닙니다. 생각은 세포 하나 하나까지 침투해 들어가 간섭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상태가 일어나면 모든 세포, 모든 내분비선, 모든 신경조직이 폭발을 일으킵니다.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연금술적인 전환이죠. 그러나 이 상태는 LSD같은 화학약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 것은 경험이죠. 이것은 경험이 아닙니다.
깨달음(enlightenment)이란 과연 존재할까요? 순수하게 물리적인 과정은 존재합니다.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는 전혀 없죠. 눈을 감으면 눈꺼풀을 통해 빛이 들어옵니다. 눈꺼풀에 가려있어도 빛이 보입니다. 마치 이마에 구멍이 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빛은 통과하는 그런 구멍이겠죠. 인도에서 그 빛은 금색입니다, 유럽에서는 푸른빛을 내죠. 목뒤에도 빛이 통과하는 그런 구멍이 있습니다. 마치 두개골의 앞뒤에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습니다. 내부에는 이 빛만 있습니다. 구멍이 있을 부분을 가리면 더 이상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완전한 어둠이죠. 이 빛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기능을 돕지도 않죠. 그저 거기에 있습니다.
이 상태는 비지식非知識의 상태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벽에 걸린 시계를 삼십 분 정도 바라보고 있어도 몇 시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시계라는 것도 모르죠. 내면에는 놀라움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의 존재가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가 되죠. 이 상태는 경탄의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죠. 제가 배운 모든 지식은 필요하지 않으면 배후에 남아 있습니다. '풀린 상태'이죠. 누군가 저에게 시간을 물으면 지식은 쏜살같이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대답을 하죠. 그리고 저는 다시 비지식의 상태, 경탄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여러분은 내면에 언제나 존재하는 평화를 알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평온을 찾으려고 기울이는 노력은 여러분의 내면에 더 많은 갈등을 만듭니다. 여러분은 평화에 대해 말하고 생각을 조용히 시키고 스스로 매우 고요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폭력이죠. 평온해 지는 연습은 필요 없습니다. 침묵을 수련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도자들은 생각이 죽어 버리는 것이 진정한 침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침묵은 폭발적인 것입니다. '나는 이제 평화를 얻었어. 나는 침묵을 경험했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그 에너지와 생명력은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스스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자신의 모습에 깨어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느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느낌과 다를지도 모릅니다. 사실 느낌이란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가슴샘에 가해지는 자극이죠. 가슴샘은 갈비뼈 아래에 있는 내분비선입니다. 가슴샘은 어린 시절에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사춘기가 되면 활동을 멈춘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면 이 가슴샘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곳을 통해 느끼게 되죠. 느낌은 그저 자극입니다. 좋거나 싫은 것으로 번역되지 않죠. 외부에 움직임이 있으면 -시계추가 흔들린다던지, 새가 하늘을 가로지른다던지 - 그러한 움직임도 가슴샘으로 느낍니다. 우리의 전존재가 외부의 움직임과 함께 움직이고 떨립니다. 거기에 분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날아가는 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죠. 거기에 '나'란 없습니다. 대상도 없고요. 무엇이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것이 느낌이란 것도 모르죠.
애정(affection)이라는 말은 주위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일정한 정서가 자기에게서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죠. 자연스러운 상태는 아주 예민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예민함은 감각의 물리적인 예민함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친절이 아닙니다. 이제 '다른 사람'이란 없습니다. 분리가 없죠. 그래서 느껴지는 더 큰 연민이 남습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나'라던가 '생각', '자아'라는 것들이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는 여러 가지 감각들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움직이는 것일까요? 지휘자가 있는 걸까요? 감각들은 서로 따로 활동합니다. 감각들 사이의 빈틈을 이어주는 중재자가 있죠. 바로 생각입니다. 생각은 감각들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연속된 자아'라는 환상을 심어 놓습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감각들이 받은 정보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재자가 없습니다. 각각의 감각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독립적으로 기능합니다. 감각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일시적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중재자는 없습니다. 그저 일시적으로 조화의 상태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연속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필요한 일을 해내면 감각들은 다시 서로 떨어집니다. 언제나 이런 식이죠. 일단 연속성이라는 환상이 사라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죠. 여러분은 경험의 틀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것은 사고의 틀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 상태는 경험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느낌'이라도 전달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되질 않는군요.
제 몸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생각에 때묻지 않은 원초의 의식입니다. 중재자가 없으면 감각은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감각을 해석하는 번역이 이루어지질 않죠. 감각은 그저 감각으로 남습니다. 그것이 감각이라는 것조차 모르죠. 저는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저의 눈은 말하는 사람의 입을 쳐다보죠. 입이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귀는 소리의 울림을 받아들입니다. 그 두 가지의 사실을 연결시켜서 그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리는 프로그램이 제 안에는 없습니다. 샘이 솟으며 물소리를 내는 것을 보아도 그 두 가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저의 발을 내려다보아도 '나의 발'이라는 판단은 들지 않죠. 저는 걸으면서 움직이는 저의 발을 봅니다. 우습죠? 저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언지 모릅니다. <br/><br/>사람의 눈은 매우 예민한 카메라와 같습니다. 생리학자들은 대상에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을 자극하고 그 감각이 뇌의 시각신경세포로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시각의 기능은 순전히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초점을 맞춘 대상이 눈 덮인 산봉우리인지 쓰레기통인지 눈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눈은 아무런 구별 없이 대상을 봅니다.
눈을 조작하는 카메라맨이 있죠. 그러나 눈에게 그냥 맡겨 놓아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항상 움직이며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죠. 움직이는 것들이며 빛이며 색을 봅니다. 보는 '나'는 없죠. 산이며, 꽃이며, 소가 저를 봅니다. 의식은 마치 거울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비춥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해 해석을 내리지 않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면 분리는 없습니다. 그것과 나 사이에 거리는 없죠. 방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를 센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갑작스러운 위험이 닥치기 전에는 눈이 깜빡이지 않습니다. 외부의 사물이 항상 주의를 끌기 때문입니다. 눈이 피곤해지면 육체의 메카니즘이 연결을 끊습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침침하죠.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계속 뜨고 있으면 안구는 마르고 눈이 멀게 됩니다. 그래서 눈의 바깥쪽에 있는 눈물샘이 활성화되죠. 여러분의 경우에는 눈물을 흘릴 때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눈물샘에서 항상 눈물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기쁨의 눈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성한 것이 아닙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연습을 한다고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상하게 만들뿐이죠. 정신병원에는 눈을 깜빡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병의 증상이죠. 약간의 운과 이상한 우연에 의해 자연스러운 상태에 들면,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을까요? 아니면 대상에 있는 것일까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름다움은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산을 보고 멈춰 서서 시를 쓰지는 않습니다. 제가 걷고 있을 때 빛이 바뀌어서 산이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것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주의를 집중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빛에 변화가 생긴 것이죠. 아름답다는 인식은 들지 않습니다. 빛이 변하기 전보다 선명해졌습니다. 의식이 대상의 크기만큼 확대됩니다. 그리고 폐가 깊은숨을 들이쉬죠. 이것이 프라나야마(호흡수행법)입니다.
하는 것처럼 구석에 앉아서 한쪽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쉬고, 다른 콧구멍으로 내쉬는 것은 프라나야마가 아니죠. 프라나야마는 언제나 일어납니다. 호흡이 변하면서 의식은 다른 곳으로 옮겨갑니다. 소의 울음소리, 자칼의 울음소리. 언제나 움직이죠. 아름답다고 정해 놓은 것에 매달려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한 곳만 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입니다. 청각을 혼자 놓아두면 들리는 것은 소리의 진동뿐입니다. 이야기는 여러분 속에서 한번 반복됩니다. 마치 소리가 울리는 방 같습니다. 감각은 이런 식으로 기능합니다. 그저 여러분이 밖에서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할 뿐이죠. 정확하면 말하자면 여러분은 그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죠. 여러분은 언제나 자신의 해석만 듣습니다. 여러분이 듣고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소리일뿐이죠. 그 진동이 고막에 닿고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됩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해석을 합니다. 듣고 있는 것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죠. 다른 사람과의 관계유지를 위해서 그래야 합니다. "여기 돈이 있어요. 당근 좀 주세요." 이 정도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전부입니다. 나눌 수 있는 의사소통의 전부이죠.
해석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의 지식구조가 그 언어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상관없이 모든 언어는 같은 소리로 들립니다. 다른 것은 음절간의 간격이나 어조뿐입니다. 언어들은 서로 다른 멜로디를 지니고 있습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후천적으로 습득된 취향일 뿐입니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어떤 종류의 소리는 육체에 해를 끼칠 수도 있죠. 몇 데시빌 이상의 소음은 신경계를 괴롭히고 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음악이나 시나 언어에 대한 찬미는 모두 문화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관념의 작용은 촉각에도 참견을 합니다. 여러분은 몸에 닿는 모든 것을 해석해 내죠. '단단하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차갑다' '축축하다' '건조하다' 등등. 여러분은 깨닫지 못하지만 여러분의 육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사고의 작용입니다. 사고의 작용이 없으면 육체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육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육체는 다른 사람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따로 떨어져 있는 닿는 점들만이 존재합니다. 생각에 의해 함께 엮이지 않은 접촉의 자극만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주변의 사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육체는 다른 것들과마찬가지로 감각의 조합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여러분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 이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몇 시에 잠자리에 들던지 네 시간을 잡니다. 그리고 완전히 깨어서 아침까지 누워 있죠. 저는 자리 위에 무엇이 누워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왼쪽으로 누워 있는지 오른쪽으로 누워 있는지도 모르죠. 몇 시간이고 그렇게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새소리나 다른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가 제 안에서 메아리칩니다. 저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습니다. 그게 무언지 모르죠. 이불 속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의 형태는 거기 없죠. 그곳에는 닿는 점에 대한 주시만 있습니다. 육체가 침대와 이불에 닿아 있는 접촉, 그리고 몸이 서로 닿아 있는 접촉 그런 접촉에 대한 자각만이 존재합니다. 닿아 있는 점들의 감각만이 있고 육체의 나머지 부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력 때문일 약간의 중량감이 흐릿하게 있죠. 이런 개개의 현상은 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육체를 바라보아도 닿는점들과 제가 눈으로 보는 것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그 닿는점들과 제 육체의 형태를 연관시키려고 한다면 아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연결을 끝내면 이미 육체는 각각의 다른 닿는점들로 돌아가 있겠죠. 그 연결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망고주스가 어떤 맛인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망고 주스 맛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맛보았던 경험을 자신이 다시 만들어 냅니다. 저는 그런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지식이 다시 살아나, "그래, 바로 이것이 망고 주스의 맛이야"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망고 주스를 직접 혀로 맛보아야만 합니다. 보거나 냄새를 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취향이나 입맛이 바뀌었다는 뜻은 아니지요. 시장에 가면 저절로 전에 좋아했던 물건들로 손이 갑니다. 그러나 제가 하지도 않은 어떤 정신적인 경험을 꾸며댈 수는 없으니, 있지도 않은 음식을 갈망할 수는 없지요. 우리의 일상에서 후각은 미각보다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지닙니다. 후각기관은 냄새를 향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관념의 간섭이 없을 때 냄새는 후각에 대한 자극일 뿐입니다. 소똥의 냄새와 값비싼 프랑스 향수가 차이가 없습니다. 코를 한번 문지르고 지나갈 뿐이죠.
저의 이야기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앉아서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생각을 해보고 대답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공을 던지면 공은 튀어 나가겠죠. 그 튀어 나간 공을 여러분은 '대답'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는 스스로를 표현하죠. 저는 제가 말하는 것이 무언지 모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저의 말을 기록하는 것 제가 보기에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것, 이 자연스러운 상태만이 살아 있습니다. 저한테 잡힐 수도 없는 것이고 여러분이 떼어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꽃처럼. (이런 정도의 비유밖에는 할 수 없군요) 꽃이 피어납니다. 꽃이 피어 있는 한 그곳에는 다른 곳에 없는 향기가 감돌고 있겠죠. 여러분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죠. 지나가던 암소가 먹을 수도 있고, 낫에 베어질 수도 있겠죠. 그렇지 않으면 시들어 떨어질 겁니다. 그렇게 끝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없죠. 여러분은 그 향기를 간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대용물 뿐입니다. 화학적인 향기죠. 살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과 가르침을 간직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 상태는 동시대의 가치와 동시대의 표현만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상태에 들어와도 개성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결국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는 컴퓨터 같은 것이니까요. 여러분이 지금 변화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사실 자기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입니다. 개성은 남습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 든 사람이 분노나 개성에서 벗어나길 기대하지 마세요. 영적인 겸손을 기대하지 마세요. 어쩌면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거만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아무도 손대지 못한 곳에서 삶을 만졌으니까요. 그러므로 이 상태에 든 사람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그의 시대에 걸맞은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 여러 명이 나타나도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우리는 다 깨달았다! 이제 같은 편이다."하고 외치지 않죠.
인간에게는 의식주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일을 해서 얻던지 다른 사람에게 얻죠. 이것만이 필요하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기본적인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이라는 표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이 노이로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섹스도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일까요? 섹스는 관념에서 나옵니다. 육체에는 섹스가 없습니다. 성기가 있고, 남성과 여성간에 호르몬의 균형이 다를 뿐입니다. "나는 남자다. 저기 여자가 있다. 매력적인 여자다" 머리가 말합니다. 성적인 느낌을 몸에 전달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이거 성적인 느낌이다." 그 다음에 선동을 합니다. 이 머리의 선동 없이 섹스는 불가능합니다. "그냥 보는 것보다 저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이 더 즐거울 거야. 손잡는 것보다 키스하는 게 더 즐거울 거야. 키스하는 것보다 포옹을 하는 게.." 계속되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머리의 선동이 없습니다. 선동 없이 섹스는 불가능합니다. 육체에 있어 섹스는 폭력입니다. 평소에 평화로운 유기적 질서를 유지하는 육체에 섹스는 과도한 긴장을 부과하고 해소시킵니다. 여러분에게는 쾌락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육체에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섹스를 억압하거나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는 이 상태에 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신에 대해 생각하는 한 여러분은 섹스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독신을 지키는 종교적인 구도자에게 여자 꿈을 꾸는 지 물어 보십시오. 성적인 경험은 여러분의 삶에서 직접 경험에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경험들은 간접경험이죠. 다른 사람의 경험입니다. 왜 이 둘레에 수많은 금기와 관념들을 갖다 붙입니까? 왜 섹스의 즐거움을 망가뜨리죠? 저는 성에 탐닉하거나 여러 사람과 섹스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금욕과 절제로는 한가지도 이룰 수 없습니다.
만약 누가 이 방 바깥으로 나가면 그 사람은 저의 의식에서 사라집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왜 여기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작업에 필요한 연상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들어 있을 공간이 없습니다. 저의 감각기관은 지금 제 앞에 있는 것들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과의 접촉이 아니라 이 방안에 있는 것들과의 살아 있는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감각행위와 완전히 조율되어 있다면 내일은 무엇을 먹느냐 하는 불안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나, 진리, 실체에 대한 억측이 들어갈 공간도 없겠죠. 이 상태는 전지(全知)의 상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영원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질문이 멈춘 상태입니다. 그런 질문은 유기체가 기능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질문이들지 않습니다. 유기체의 기능 방식은 그런 질문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두지 않습니다.
육체는 자기를 회복시키는 비범한 메카니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감각은 항상 최고조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이 피곤해지면 육체는 죽음을 거칩니다. 정신적인 죽음이 아니라 실제로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루에 몇 번씩 일어나기도 합니다. 죽음을 거칠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덮쳐 옵니다. 처음에는 마취제를 맞은 듯한 기분입니다.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심장의 고동이 느려지죠. 손과 발이 얼음처럼 차갑게 되면서 온몸이 시체처럼 경직됩니다. 온몸의 에너지가 한곳으로 모입니다. 매번 다르게 나타나고 48분에서 49분 정도 계속됩니다. 사고의 흐름은 계속되지만 생각을 읽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의 마지막에 완전한 멈춤이 있습니다. 사고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얼마나 오래 끊어지는 지는 모릅니다. 이것은 경험이 아닙니다. 끊어져 있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적 사고나, 의식적인 존재의 일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죽음에서 돌아오게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에 의지를 가질 수 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끊어짐'이 지나면 사고의 흐름은 멈춘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둔감함이 사라지고 선명한 느낌이 되돌아옵니다. 경직되었던 육체는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고 스스로 근육을 폅니다. 그 움직임은 하타 요가보다는 중국의 태극권과 유사합니다. 아마 스승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그런 움직임을 익혀서 수백 가지의 동작을 만들어 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깨어날 때 저의 움직임을 지켜본 사람들은 마치 갓난아기의 움직임 같다고 합니다. 이 '끊어짐'은 감각과 내분비선과 신경계에 완전한 회복을 가져다줍니다. 감각은 다시 최고조의 상태로 활동합니다.
죽음의 맛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태어났습니까?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시작되는 곳과 끝나는 곳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경험할 수 있죠. 그러나 자신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심리적인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경험의 구조는 경험하지 않을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소멸까지도 지휘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 들지 몹시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느낌이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경험을 미리 알기 위해서는 참고로 할 비슷한 과거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탄생도 기억할 수 없죠. 따라서 미래에 비존재非存在가 되었을 때의 느낌이 어떨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삶을 알고 있는 한, 자신도 알고 있고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영원의 느낌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의 구조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상상을 시작합니다. 천국, 환생, 영혼의 윤회. 여러분이 생각하는 환생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맛볼 수 있나요? 만질 수 있습니까? 저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천국으로 향합니까? 무엇이 있나요. 두려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꿈은 왜 꾸는 것일까요? 감각을 조종하는 자아라는 것이 있어서 보이는 것은 무엇이다, 들리는 것은, 느껴지는 것은 무엇무엇이라고 일일이 해석을 하고 또 '이것은 아름답다. 여기를 봐라. 저것은 추하다. 보지 말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통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카메라는 항상 돌아가고 모든 것은 기록됩니다. 조금 더 오래 보건 잠깐 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쉬고 있을 때 사고가 수동적이 되면 이런 것들이 올라옵니다. 이것 조금, 저것 조금. 그래서 모자이크를 만들죠.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감각을 조종하는 자아가 없으면 '나는 잤다. 꿈을 꾸었다. 지금은 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도덕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따라야 할 행동수칙이 아닙니다. 유혹을 억누르는 것도, 증오나 분노, 욕망, 폭력을 억누르는 것도 아닙니다. 행위를 먼저 문제삼고 나중에 도덕적 문제를 만듭니다. 이 상황에 책임이 있는 것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삶은 행위입니다. 문제삼지 않는 행위가 도덕입니다. 행위를 문제삼는 것은 삶의 표현을 파괴합니다. 사고의 방어적인 운동 없이 삶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은 지켜야 할 자아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가면을 쓰거나 사회가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저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드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복을 원합니다. 영원히 행복해지거나 최소한 이 순간만이라도 행복해 지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일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어떤 것을 바랍니다. 변화가 일어나기를 그래서 완벽해지기를 바랍니다. 노력을 하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사회는 여러분 앞에 '완벽한 인간'이라는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어느 사회에 태어났던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범과 전통이 주어집니다. 주어진 수행을 마치면 성자들의 경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을 통제하려고 애씁니다. 생각마저 통제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부자연스러운 어떤 것이 되려고요.
우리는 모두 '사고의 영역'안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자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죠. 생각만 존재하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차적인 사고를 만들었습니다.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읽고 있습니다. 삶을 조종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 안에 사고의 2차적인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나'라고 부르죠. 자신 안에 일어난 사고의 운동은 삶의 운동과 평행 되어 있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죠. 결코 삶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삶을 이 떨어져 있는 사고의 평행운동으로 끌어들입니다. 스스로를 삶에서 단절시킵니다.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연스러운 상태는 '사고가 없는 상태-무심의 경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빈약하고 무기력한 인도 문화가 퍼트린 낭설입니다. 육체가 죽기 전까지, 그것도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사고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사고로 꽉 차 있지는 않습니다. 생각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돌아갑니다. 더 이상 생각을 읽고 있는 '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남의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죠.
사고의 평행적인 운동을 본 일이 있습니까? 영어 문법책을 보면 '나'라는 것은 주어로 쓰이는 단수 대명사라고 나와 있죠. 그런 것을 알고 싶은 것은 아닐 테죠. 자신이 '나'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본 일이 있습니까? 그것을 집어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금 보세요. 느껴 보세요. 만져 보세요. 그리고 저에게 말해 보십시오. 어떻게 보았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문제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라고 부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그것이 눈을 속이는 분열을 했고, 주체와 객체로 나뉘었습니다. 그 분열을 통해 연속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 안에 있는 분열적인 성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연속성만이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하거나, 영적이고 신성하며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로 변화하고 싶어하는 한 '나'는 계속될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머물지 못합니다. 떠나가 버리죠.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저는 실제적인 목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보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이 다르지 않다" 이런 식의 언급으로 무엇을 할 겁니까? 이렇게 무의미하고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문장을 처리하는 데 어떤 수단을 쓰십니까? 생각하겠죠. 생각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말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해석해 냅니다. 다른 모든 것을 해석하듯이 말이죠.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파악해 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을 멈춘 그곳이 바로 제가 묘사하고 있는 곳이죠. 이해하려고 애쓰고,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런 작위가 없는 상태. 그 상태가 제가 말하는 그 상태입니다.
피안이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주변의 일상사가 재미없어서 '피안'이며 '초시간의 상태' '신' '진리' '실체' '브라만' '깨달음'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다닙니다. '피안'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저 너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들은 것뿐입니다. 그것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그런 세계를 그려봅니다. 여러분의 '피안'은 그것에 대한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지식 그대로 경험하게 되겠죠. 지식이 경험을 만들어 냅니다. 경험은 지식을 더욱 보강하고요.
여러분이 무언가 알고 있다면 그것은 '피안'이 아닙니다. 무언가 경험했다면 그것은 '피안'이 아닙니다. 피안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라는 운동은 그곳에 없습니다. 이 운동의 멈춤이 아마 '피안'일 것입니다. 피안은 결코 '나'에 의해 경험될 수 없습니다. '나'가 없는 상태이니까요. 왜 경험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려고 노력하십니까? 여러분은 끊임없이 자신이 보는 것을 인식하려고 합니다. 그러치 않으면 자아가 설 곳이 없으니까요. 여러분이 감각의 정보를 해석하는 동안에는 '나'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방이란 것을 인식하죠. 관념은 해석을 해대면서 감각을 간섭합니다. 관념은 왜 간섭하는 걸까요? 그 간섭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사물을 보는 그 순간 '가방'이라는 단어가 안에 떠오릅니다. 가방이 아니면 의자, 난간, 계단. 혹은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머리가 백발이구나' 끝이 없죠. 항상 머리 속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립니다. 아니면 다른 것을 하죠. '지각하겠다. 사무실에 늦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감각이 지금 이 순간 기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합니다. 여기에 있는 것이 모든 것입니다. '가방'이라는 단어는 지금 보고 있는 것과 우리를 분리시켜 놓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일을 멈추면 그 둘 사이에는 빈 공간이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나'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생각이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계속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사고와 경험의 집합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자기의 생각을 '생각해 내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느낌을 '느끼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환상입니다. 저는 그것이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은 환상이 아니지요.
여러분의 '기분'은 더욱 복잡합니다. 그러나 같은 과정이죠. 왜 스스로 나는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합니까? 누구를 질투하고 있다, 성적 욕망에 시달린다고 말합니까? 저는 만족이나 불만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에 기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의를 내립니다. 우울함, 불행, 행복감, 질투, 욕망.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 감각을 해석하는 어떤 것을 실제로 존재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방'이나 '벤치' '계단' '난간' '전구' '분노' '행복감' '질투' 등등입니다. 여러분은 뇌세포를 쓸데없는 활동에 쓰면서 기억 세포가 항상 활동하게 합니다. 그런 작업은 뇌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합니다. 여러분을 소모시킬 뿐이죠.
이렇게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자신에게 무언가 일러두어야 할 때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항상 자기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혼자 소리내어 중얼거리는 사람과 여러분의 차이는 단지 여러분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정신과 의사에게 가게 될 것입니다. 의사도 여러분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쉬지 않고 대화하는 거죠. '가방' '빨간 가방', '강박적인', '발작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욕망', '벤치', '난간', '마티니'. 그리고 여러분을 소파에 눕히고 도와준다면서 변화시키려고 애쓰겠죠.
왜 기분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합니까? 왜 해석을 합니까? 이것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지 않으면 '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내려다보는 것은 '나'를 겁나게 합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것은 모두 낡은 것입니다. 남의 것이죠. 평화, 행복감, 침묵, 축복, 황홀, 기쁨. 여러분은 이미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복의 상태에 들었다거나 거대한 침묵을 경험했다는 것은 단지 여러분이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뿐입니다. 경험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신비한 것도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닙니다. '벤치', '가방', '빨간 가방' 이런 것이 지식이죠. 지식이란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 사람도 다른 누구한테 받은 것이죠.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 앞에 놓여 있는 벤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여러분은 자신의 지식만 경험합니다. 모든 지식은 외부의 매개체를 통해 들어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속한 사회의 관념을 사고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느낌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의 경험을 경험합니다. 새로운 경험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 그리고 여러분은 그런 관념의 산물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말하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사고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남에게서 들은 것뿐입니다. 어떻게 무언가 할 수 있겠습니까? 만들 수 있습니까? 조절할 수 있습니까? 멈출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언제나 이것을 가지고 무언가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이 좋은 생각만 하고 나쁜 생각은 버리라고 말하니까요. 생각은 생각입니다.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길 원하고 있다면 계속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은 사고의 운동이 있다는 뜻이죠. 움직이는 팽이를 팽이채로 쳐서 계속 돌 수 있는 힘을 더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각은 자연스럽게 활동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감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기 때문이죠. 왜 무언가를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나'라고 부르는 것이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그치지 않게 방어하고 있습니다. 사고는 바로 이 방어의 메카니즘입니다. 사고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 '나'를 지킵니다. 생각에서 나온 모든 것은 파괴적입니다. 결국 여러분을 파괴할 것입니다.
사고의 반복적인 기능이 여러분은 소모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겠죠. 어떻게 보면 그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질문입니다. 저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은 사고의 움직임에 동기를 부여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너무 강한 상대입니다. 사고는 수 백만 년 동안 움직여 왔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무력합니다. 그리고 그 무력함을 의식조차 못합니다.
마인드 컨트롤을 수련해도 '나'는 거기 있습니다. 그 수련을 통해 지속되죠. 명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명상한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요? 아무도 명상을 하지 못합니다. 그가 정말 명상을 했다면 그는 정신병원에 가 있을 겁니다. 일상의 모든 일에 깨어 있으려는 수련을 한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 있음과 '나'는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생동안 단 일초라도 깨어 있었다면 '나'라는 연속성은 퍽 깨졌을 겁니다. 경험구조의 환상은 박살이 났을 겁니다. '나'는 무너지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합류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다면 '나'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것이죠. 그저 자기가 아는 낡은 것을 경험한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들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도 모릅니다. 세포에 씌어 있는 지도 모르죠. 원인이 없습니다. 하려고 마음먹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끌어올 수 없죠.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했더니 이 상태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의사전달을 못한다면 어느정도는 확실합니다. 육체에는 대체수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고의 경험구조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자기 방식으로 육체를 떠맡습니다. 육체의 기능은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만 제외하고는 사고가 끼여들지 못합니다. 권투경기에 비교하자면 여러분은 수건을 던져야 합니다. 완전히 무력하게 되세요. 아무도 여러분을 돕지 못하고, 자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상태에 흥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유일한 관심거리는 '나'를 지속시키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차원에서, 다른 시선으로라도 '나'라는 것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딱 질색입니다. 자연스러운 상태는 여러분의 '나'를 해치워 버립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해치우죠. 높은 자아, 낮은 자아, 영혼, 아트만, 의식, 무의식. 모두 해치웁니다. 여러분은 가까이 다가섭니다. 그리고 말하죠. '시간이 좀 필요해'. 이제 명상이 재미있어 집니다. 스스로에게 말하죠. '내일 깨달을 거야'. 이 구조는 시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간 속에서 기능하죠. 그러나 시간을 통해 끝나진 않습니다. 지금 깨닫지 못하면 내일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달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을 왜 알아들으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능하는 것과 제가 기능하는 방식을 연결 지으려고 애쓰는 것은 쓸모 없는 헛수고입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아닙니다. 의사소통이 필요하지도 않죠.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을 때, 궁금한 것이 없을 때 그때 이해한 것입니다. 끝이 난 거죠. 여러분은 이곳을 나갈 것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설명하는 어떤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죠. 깨달음에 대한 어떤 질문도 하지 않겠죠.
여러분이 찾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슨 괴상한 주문을 외워서 무아의 경지로 변형을 이루고 싶습니까? 아름다운 꿈을 꾸며 성스러운 땅을 걷고 싶습니까?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노력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선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도 줄 수 없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지혜가 스스로 표출되도록 놓아두는 사람이 자연인입니다.
U.G 크리슈나무르티, 그는 누구인가?
'마음은 신화에 불과하다.'라는 책의 첫 장에 나와있는 포기선언문을 읽어본다면 당신은 U.G 크리슈나무르티에게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가르침에는 아무런 판권도 없다. 재생산을 해서 배포하건, 임의로 해석하건, 또는 왜곡하고, 편한대로 편집하건 당신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심지어는 판권을 주장해도 좋다. 여기엔 나의 허락은 물론 어느 누구의 동의도 받을 필요가 없다."
이 파격적인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어리둥절한 웃음을 짓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이 그 다음에 그가 말하는 바를 읽을 준비를 갖추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영혼의 테러리스트'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관념들, 신, 마음, 영혼, 깨달음, 종교, 인류, 가슴, 사랑, 인간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 체계를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에 대해 전혀 다른 청사진을 내놓는다. 그 결과 우리는 머리 속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경험한다.
한번이라도 이 괴상한 사내를 만난 사람들은 뭔가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불가사의한 마력에 이끌리게 된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와 몇 분동안 이야기한 뒤에 가슴 전체가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거나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는 희망이나 사랑, 평화, 또는 영적인 구원 따위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불같은 언어는 우리를 산산조각 내버린다. 그는 찾아온 사람들의 기를 꺾어놓는가 하면 때로는 정중하게 내쫓아 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도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상가로 주목받는다. 최근에 출판된 그의 일대기는 아홉 달 동안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류에게 줄 아무런 메시지도 없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독특한 마력에 이끌려 그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든다. 하지만 이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모임도 개최하지 않으며, 강의나 수련 코스를 제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명상법도 없고, 만트라도 없다. 사무실도 없고, 비서도 없으며, 전화나 팩스도 없고, 고정적인 주소도 없다. 그에 대한 신화는 날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그는 몇 명의 친구와 함께 머물거나 작은 아파트에 세들어 산다. 그러나 그가 어디 쯤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군중들이 모여들기 전에 그는 언제나 한발 앞서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뉴욕, 런던, 봄베이, 방갈로르, 시드니, 오클랜드, 북경 등 세계 도처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의 재산은 작은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이며 옷차림은 아주 평범해 보인다. 그는 두달 이상 한 곳에 머무는 법이 없다.
그는 구루 계의 하워드 휴즈와 같은 인물이다. 불가사의한 마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으면서도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은둔자이다. 그토록 철학을 극렬하게 부정하면서도 철학자로 유명해진 예는 일찌기 없었다. 그토록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이 사람이 이토록 인구에 희자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코 대중 강연을 하지 않는 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 추종 세력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런 조직도 없는 구루가 어떻게 이토록 미디어의 촛점을 받는 것일까?
그는 인도에서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는 구루이지만 그를 어떤 범주에 한정하여 정의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종종 그는 '안티 구루(the anti-guru)', '언 구루(the un-guru)',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 선각자(the seer with no solutions)', '격분한 성자', '사념을 부숴버리는 사상가', 또는 그와 이름이 비슷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에 빗대어 '안티 크리슈나무르티'라고 불린다.
출처:www.zen.co.kr
원문 : http://blog.naver.com/mybin99/20016250381
꽃 심고 도망가고...도시에 나타난 수상한 사람들--- 게릴라 가드너 (0) | 2014.05.18 |
---|---|
물향기 수목원 경기오산 에서 (0) | 2014.05.16 |
숲이 질병을 치료한다 | (0) | 2014.05.11 |
새만금수목원‘국립’빠졌다 (0) | 2014.04.21 |
충북도의회, 전국 첫 ‘학교숲 조례’ 통과 (0) | 2014.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