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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라는 종교"--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

이런저런 이야기/책 속에 길이 있다

by 소나무맨 2014. 5. 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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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교’를 비웃다

등록 : 2014.05.11 20:32수정 : 2014.05.1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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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교양 잠깐독서

자본이라는 종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1만1000원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로 잘 알려진 폴 라파르그의 노작이다. 장인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지적했지만, 사위는 ‘자본이 곧 종교’인 세상을 현란한 필치로 질타한다.

 

라파르그는 “사회주의가 유럽과 미 대륙 유산 계급의 정신적 평화를 교란할 정도로 크게 진전”된 시대를 상정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겁을 먹은 “자본가들이 하수인들과 함께 런던의 대회장에 모여 사회주의의 불길한 성장을 저지할 최고의 수단”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이 내린 결론? 시대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 곧 ‘자본’을 유일한 전지전능한 신으로 떠받드는 ‘자본교’를 창시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지배자, 자본을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이익과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어 나신 신용을 믿으니, 둘 다 자본인 주님에게서 나시고 자본인 주님과 한분이시나이다….” 무릇 종교에는 교리와 제례가 따르는 법. 라파르그는 신흥 ‘자본교’의 뼈대를 세우기 시작한다. 자본교에 입문하려는 노동자를 위한 교리문답과 자본교의 ‘선민’이자 ‘제사장’인 자본가를 위한 성무일도서(교회의 전례서), 잠언과 기도문, 자본에 대한 찬양까지. 짤막한 소책자에 ‘신’의 영역을 탐하는 돈과 자본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빼곡하다. 지난 1997년 라파르그의 또 다른 대표작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옮긴이가 책 말미에 덧붙인 ‘라파르그 약전’도 흥미롭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저자소개

1842년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혼혈로 태어났다.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여 의학을 공부해 의사로 일하면서 아나키스트 성향의 프루동주의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제1인터내셔널의 프랑스지부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865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마르크스,엥겔스와 친분을 맺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라파르그는 1882년에 파리로 돌아가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새로 설립된 프랑스 노동자당을 지도했다.그는 이때 의사로서의 일을 중단했고,이후 죽는 날가지 프랑스 노동자당의 대표적인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으며.정치활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됐다.
1911년 69세가 된 라파르그는 노쇠함으로 인해 인생을 바쳐 운동에 더 이상 기여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와 동반자살을 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목차

ㅣ옮긴이 서문ㅣ자본주의는 정치경제학이 아니다. 종교이자 신앙이다

01 런던 대회

02 노동자들의 교리문답_일상생활 지침서

03 자본가들의 성무일도서
신-자본의 본질
자본의 선민
자본가의 의무
잠언
최후의 말

04 자본가들을 위한 기도
투자자의 기도
사도신경
기도문(아베 미제리아)

05 돈을 찬양함

06 파산한 자본가 욥의 애가

07 매춘부에 관한 설교

ㅣ폴 라파르그 약전ㅣ

 

 

 

최근작 : <자본이라는 종교>,<게으를 수 있는 권리>,<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총 10종 (모두보기)
소개 :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 1842년에 쿠바에서 혼혈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의과대학을 나와 잠시 의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일생 동안 주로 사회주의 정치활동에 헌신했다. 1865년부터 5년간 런던에 체류하면서 마르크스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1868년에 마르크스의 둘째 딸인 라우라 마르크스와 결혼했다. 그 뒤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파 지도부를 구축하는 활동을 벌였고, 1879년에 설립된 프랑스 노동자당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투옥됐으며, 1891...
최근작 : <인문의 스펙을 타고 가라> … 총 36종 (모두보기)
소개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하고 동대학원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그람시와 함께 읽는 문화: 대중문화/언어학/저널리즘>,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근대의 서사시: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까지>, <하늘에서 본 지구>(공역),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이 있다.

― ‘게으를 수 있는 권리’의 저자가 던지는 우리 시대에 대한 근본적 물음.
‘민주화/근대화’ 또는 ‘진보/보수’의정치적포즈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궁극적 욕망, 맹목적 신앙은 무엇인가?


포복절도! 이 짧은 소책자는 ‘성경’의 형식을 빌린 풍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본질을 명쾌하게 폭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생전에 라파르그의 이 풍자 글이 두 사람의 출판된 글보다 훨씬 더 많이 판매된 사실은 그의 이러한 글쓰기 형식이 당대의 대중에게서 열렬한 호응을 받았음을 반증해준다. 불과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이 풍자는 거의 3,000페이지에 달하는 마르크스의 <자본>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의 살아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자본을 잉여가치의 착취라는 과학적 관점에서 분석하지만 그의 사위인 라파르그는 자본을 종교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원래 religion의 어원은 ‘하나로 묶는다’는 뜻인데, 마르크스는 자본이 인간을 나누고 가르고 투쟁하도록 만든다고 본다. 하지만 라파르그는 자본이 인간을 돈에 묶고,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을 종교의 대상으로 신앙화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부정적’ 탈종교화에 주목한다면 라파르그는 ‘긍정적’ 종교화에 주목하는 셈이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축인 노동에 대해서도 대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데, 마르크스가 노동을 기본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면서 자본주의적 왜곡을 비판하는 데 반해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라파르그는 최소 노동을 강조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의 종교와 관련해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상부구조의 일부로 보며 “종교는 아편”이라고 주장하지만 라파르그는 자본의 바로 현대적 종교라고 주장한다.
물론 20세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승리로 인해 라파르그의 ‘무정부주의’는 비주류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나 사회주의의 패배는 21세기 들어 라파르그의 주장을 다시 현실로 호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21세기에 들어 완전 부활한 자본주의는 단순히 정치경제(학)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 현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어 21세기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브 잡스는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기까지 하다. 또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가 실제로는 ‘묻지 마 자본주의’라는 것은 세 살배기라도 아는 진실이다.
하지만 자본의 이러한 종교화 현상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극심한 곳 중의 하나가 한국임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최근의 <세월호> 사건마저 모든 것을 돈으로만 바
라 보는 맹목적 자본 숭배에 대참사의 본질이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즉 돈만 되면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짓을 저지르면서 마치 못된 신자가 모든 것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듯 책임은 ‘자본’ 탓으로 돌리는 병폐가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닐까?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신념’은 민주화 등의 정치적인 것이거나 ‘진보/보수’의 사회 제도를 둘러싼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지구화의 가속화와 ‘실용 정부’ 등은 우리의 신념을 점점 더 ‘돈’으로 축소시켜 왔다. 이런 점에서 이 소책자의 풍자는 우리에게 현실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또 다른 시선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풍자일 뿐이라고? 풍자는 문명의 전환을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에 대한 촉구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모색하는 탈자본주의의 모색


19세기 문명의 위기를 진단한 니체는 그에 대한 극복의 논리를 초인에서 그리고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서, 20세기 말의 탈근대 철학은 ‘포스트주의’에서 찾았다. 하지만 라파르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직 생산적인 삶만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식의 잔혹한 생존의 경제를 절대적 명령으로 생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살만한 것이 되려면 삶은 즐거워야 한다.” 라파르그의 이러한 말은 그의 풍자가 단순히 현실을 ‘삐딱하게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함축한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을, 마르크스는 ‘즐거운 노동’을 이야기하지만 라파르그는 ‘즐거운 삶’을 이야기한다. 아마 이러한 점에서 라파르그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이 책은 노동은 거의 탈-노동 수준에 이르고 자본은 종교화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소위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무런 단서도 보이지 않는 듯이 보이는 우리 현실에서 자본과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해볼 수 있는 ‘문명 진단서’의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주의가 전혀, 심지어 사회주의에 의해서도 극복되지 않은 것은 왜일까? 베버의 주장대로 자본주의가
종교와 혼연일체가 되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라파르그의 주장대로 자본주의가 종교이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는 자본 ― 노동 ― 신앙(신념)의 관계와 관련해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고
있다. 이 세 가지 각각 뿐만 아니라 이 셋의 관계 모두 라파르그 말대로 ‘즐거움’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과연 그것이 즐겁다는 말은 거의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물론 자본주의적 쾌락이 진정한 ‘즐거움’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이 노동과 무관함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아무튼 21세기 인류의 과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실패한 자본 ― 노동 ― 신앙(신념)의 관계의 새로운 모색이라면 라파르그의 이 풍자서는 다른 어느 책보다 더 자극적인 고민의 출발점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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