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라다크가 불행해진 이유는… 행복을 찾는 사회는 무엇인가

2014. 5. 5. 12:52경제/오래된 미래 _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가 불행해진 이유는…“소비문화의 압박”

등록 : 2012.12.04 19:34 수정 : 2012.12.04 22:54

 

지난달 30일 대전시 유성구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행복한 삶: 경제적 가치를 넘어’ 국제콘퍼런스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대표, 카르마 치팀 위원장, 박진도 원장,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고승희 책임연구원. 충남발전연구원 제공

한겨레경제연·충남발전연
국제콘퍼런스
‘행복한 삶 : 경제적 가치를 넘어’

우리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서 있질 못하고 타박타박 걸어 올라간다. 편하자고 만든 걸 온전히 향유하지 못하는 건 마음의 ‘속도계’가 조급하게 길들어진 때문이리라.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속도와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는 세상에서 행복은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충남발전연구원(원장 박진도)과 한겨레경제연구소는 ‘행복한 삶: 경제적 가치를 넘어’를 주제로 행복의 조건을 찾아보는 국제콘퍼런스를 지난달 30일 대전에서 열었다. 토론회에는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원제: Ancient Futures)로 잘 알려진 행복경제학의 전도사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생태와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ISEC) 대표, 부유하지 않아도 국민의 행복도가 높은 나라 부탄의 국민총행복위원회(GNHC) 카르마 치팀 위원장, 삶의 질 연구의 권위자로 일본 내각부 소속 웰빙측정위원회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고승희 충남발전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이 참석했다.

 

 

 


 

행복으로 가는 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대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대표

 

“물질적 성장은 고립과 불안 높여
서구 도시문화 노출된 주민들
열등감 느끼며 불행하기 시작
지역화가 경제·환경 공생방도 ”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중류사회 붕괴가 일본 불행 시작
소득격차 커지며 빈곤층은 물론
소득상위계층도 불행하다 느껴
행복 가꾸려면 각종 격차 줄여야”

 

 

카르마 치팀 위원장

 

“전통계승도 행복의 밑거름
행복하려면 자존감 필요한데
이는 문화에서 나오는 것
가족·이웃 위해 시간 써야”

 

 

야마우치 나오토 위원장
올 한해 우리 사회를 잘 보여준 ‘열쇳말’을 꼽아본다면 ‘피로사회’도 포함될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가 쓴 <피로사회>는 올 3월 출판된 지 한 달 반 만에 철학책으로는 이례적으로 1만5000부가 팔려나갔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살기 피로하다고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뿐 아니다. 지난 30여년간 시장의 원리가 세계화, 개방화, 민영화의 깃발 아래 우리 삶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시장의 미덕인 ‘무한경쟁’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끝없이 ‘자기계발’로 내달렸다. 그런데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1 대 99의 격차, 불안정한 일자리, 금융-재정위기와 함께 극도로 피곤하고 우울해진 우리 모습이다.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우울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방에 박혀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젊은이들이 늘어만 간다.

 

이 콘퍼런스에서 토론자들이 한목소리로 강조한 행복의 조건은 물질과 정신적 만족의 조화다. 경제성장으로 소득이 늘어나는 것도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이론은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소득이 늘어도 행복이 같이 늘어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대략 분수령이 되는 소득수준이 1인당 2만7000달러 정도라 하니, 한국이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카르마 치팀 위원장
야마우치 위원장은 “1980년 초에 일본인의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가장 높았으나 그 뒤로 1인당 국민소득(GDP)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음에도 체감하는 행복은 감소하거나 정체했다”며 “조사를 해 보면 행복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건강, 가정, 소득, 정신적 휴식, 친구, 일, 자유시간의 순이어서, 경제적 측면 못지않게 비경제적 요인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안정감은 행복과 직결되는 정신적 만족이다. 사람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이 잘 잡혀 있고 스스로에 대해 만족할수록 안정적이며, 오히려 독립적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의 폭넓은 유대감이 중요할 뿐 아니라 자연과도 연결돼 있다는 걸 느끼며 살아야 한다고 토론회에 모인 행복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매진하는 물질적 성장은 행복보다는 오히려 고립과 불안을 높인다. 노르베리호지 대표가 <오래된 미래>에서 묘사한 40년 전 티베트 고원의 작은 마을 라다크는 처음에는 “자부심이 확고하고 강건”하며 “미소가 입 주위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1975년 이후 서구의 세련된 도시문화에 노출되면서 자신들의 음식, 의복, 집 그리고 언어까지 비교를 하고 열등하다 느끼며 불행해하기 시작한다.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글로벌 소비 문화 아래서 모두가 이런 심리적 압박의 희생자라고 밝힌다. 세계 어디를 가나 정상 체형의 여성조차 자신의 외모에 불안감을 느껴 죽음을 무릅쓴 단식을 감행한다. 아시아의 여성들은 서양인 비슷하게 성형수술을 하는 게 유행이다.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현실에서 소비는 더 극심한 경쟁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고, 아이들은 더 고립되고 불안해하며 불행해진다. 그래서 더 미친 듯 소비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유대감 속에서 행복을 가꾸려면 우선 소득, 지위, 기회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 위화감이 큰 곳에서 배려와 공감이 자라나기 어렵다. 야마우치 위원장은 일본이 1980년대 이후 빈부격차가 확대되며 ‘1억 총 중류사회’가 붕괴된 게 오늘날 일본 사회의 우울함을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그는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빈곤하다 느끼는 사람이 먼저 불행해졌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소득 상위계층 역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됐다는 것”이라며 “소득격차가 확대되면서 모두 불행해졌다”고 말한다.

 

서구화의 ‘쓰나미’에 쓸려가지 않고 전통을 계승해 문화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도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 부탄의 치팀 위원장은 “행복하려면 자존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깊이 내려가면 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수천년간 전승된 부탄인으로서의 애정, 공경, 부모에 대한 태도 같은 게 자아의 바탕이 된다”고 말한다.

 

부탄은 ‘대가족’을 이런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로 보고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해체되지 않도록 정책적 노력을 기울인다. 치팀 위원장은 “가족, 이웃, 동료와 함께하기 위해 가장 가치있는 자원인 시간을 써야 한다”며 “하루를 3분해 적어도 8시간을 가족이나 공동체와 보내고 기부나 명상을 통해 활력을 얻도록 하는 게 부탄의 행복정책”이라 말한다.

 

하지만 지구화한 생산과 소비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강력한 원심력이다. 이런 힘에 대항하는 구심의 에너지가 필요한 데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이를 지역화에서 찾는다. 그녀는 지역화란 “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가능한 한 줄이고 기본적인 필요를 가까운 곳에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는 소비자는 슈퍼마켓 소비자보다 열배나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며 지역공동체와 지역경제를 강화하는 것이 심리적, 사회적, 환경적 안정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밝힌다. 그렇다고 국제무역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기업들이 어느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소속돼 그 사회의 규칙을 따르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물론 이런 노력이 쉬운 일은 아니다. 박진도 충남발전연구원장은 “충남이 추구하는 ‘내발적 발전’은 기본적으로 지역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성장제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주민들은 행복이나 공동체적 가치, 환경적 가치를 고려하자고 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비판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노르베리호지 대표는 이에 대해 “초국적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가 문제라는 생각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며 “성장제일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런 성장이 사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지역화가 경제와 환경이 동시에 사는 길이란 것을 납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bhlee@hani.co.kr

 

 


 

행복을 정책결정 잣대로 삼는 리더십 필요

 

GDP 대체하는 다양한 행복지수들

 

석학들 모여 ‘행복지수’ 개발 시도
일본 국민 ‘웰빙 측정’ 정책 반영
충청남도서 행복지수지표 개발중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우리의 물질적 삶을 측정하는 대표적인 지표다. 하지만 지디피 성장률은 우리의 행복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기에는 아주 둔탁한 잣대다. 태풍이 휩쓸어 한 도시가 쑥대밭이 됐을 때 집을 새로 짓고 끊긴 도로를 복구하면 지디피 성장률은 올라간다. 이처럼 성장률이 높아지는 과정에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나 환경오염, 자원고갈 같은 외부효과를 지디피는 계산하지 않는다.

 

이런 지디피의 결점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가깝게는 2008년 경제위기가 일어나자 프랑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후원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 장폴 피투시 등의 석학이 모여 지디피를 대체할 ‘행복지수’ 개발을 시도한 것이 예이다. 이 작업은 란 책으로 국내에도 소개가 됐다.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인구 60만명의 작은 나라 부탄은 40여년 전부터 국민의 행복을 측정하는 독자적인 지표 개발을 추진했다. 2008년에는 이렇게 만든 지표로 국민총행복(GNH)을 측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정책을 수립·집행하고 있다. 부탄의 지엔에이치 지표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사회 및 경제적 발전’, ‘문화 보존 및 진흥’, ‘환경보호’, ‘굿 거버넌스’(활기찬 민주문화를 말함) 등 4개 축을 중심으로 해서 9개 부문 33개 지표로 이루어져 있다. 2년에 한번 지엔에이치 지수를 측정하는데, 2010년 측정된 지수는 1점 만점에 0.743으로 건강, 생태학적 다양성, 공동체, 문화 등은 우수하게 나온 반면 교육과 거버넌스는 그렇지 않아 이쪽에 정책 역량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부탄 정부는 어떤 정책을 입안할 때 국민총행복 평가를 실시해 시행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치팀 위원장은 “외국자본이 투자를 제안해도 곧바로 승인하지 않는다. 국민총행복위원회를 열어 개인, 지역,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평가 한 뒤에야 개방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20~30대 3명 가운데 1명이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고, ‘외롭다’고 답하는 15살 학생의 비율이 선진국 중 가장 높게 나오는 등 사회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2009년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국민의 웰빙을 측정해 이를 국가정책에 반영하기로 결정했고 2010년 말 내각에 행복 문제 전문가를 중심으로 웰빙측정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가 만든 웰빙 지표는 지속가능성에 바탕을 두고 사회경제적 조건, 건강, 관계성 등 객관적 지표를 측정하는 한편 행복감 등 주관적 웰빙도 측정을 한다. 야마우치 위원장은 “최근 선거철에 일부 현의 지사가 자기 지역을 행복 수준이 가장 높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했다. 앞으로는 행복을 정책 결정의 잣대로 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는 충청남도가 행복을 정책 수행의 잣대로 삼기 위해 충남발전연구원(충발연)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충발연은 행복지수를 산정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하고, 도민들을 설문 조사해 조사의 영역과 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지표 안에는 교육, 환경, 문화 및 여가, 건강 및 보건, 가족 및 공동체, 일자리 및 소비, 주민 참여 외에도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같은 주관적 행복 영역도 포함된다.

 

박진도 원장은 이런 행복지표를 개발하는 것은 충남이 추진하는 ‘내발적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며 “내발적 발전은 지역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로서 세계와 관계 맺기에 나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1992년 발간 이후 세계 50여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헬레나 호지가 1975년 언어 연구를 위해 인도 북부의 작은 마을 '라다크'에 들어가 서구세계와는 다른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화롭고 지혜로운 모습을 담았다. 서구 문명이 평화로운 라다크 마을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낱낱이 기록한 인류·사회학적 보고서다.

양희승 옮김, 364쪽, , 중앙북스

 

세계화× 지역화○…'오래된 미래' 호지 가로되
등록 일시 [2012-11-29 15:04:58]       최종수정 일시 [2012-11-29 15:08:19]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로 주목 받은 미국의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66)가 '행복의 경제학'을 펴냈다.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생태적 지혜를 통해 1000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한 '작은 티베트' 라다크가 서구식 개발로 환경파괴와 사회적 분열을 겪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를 통해 현대 산업사회 경제모델이 기존의 사회와 가치관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전했다. 지향해야 할 미래상을 제시했다.

'행복의 경제학'에서는 비판의 논지를 좀 더 날카롭게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세계화 모델은 끝내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가장 끔찍한 위협은 '세계화'라고 지적한다. 세계화의 핵심은 '기업과 은행이 글로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실물과 금융 거래의 규제를 푸는 것'과 '초국적 기업들이 지배하는 단일 세계시장의 출현'이다.

초기의 제국주의적 식민지화 단계, 식민지 개발의 시기를 거친 현재의 세계화는 거대 초국적 기업들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의 비호 아래 '자유무역'의 영역을 거의 끝없이 확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초국적 기업들은 점점 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정부 통제, 기업 정책 지시, 개인의 세계관을 형성시키는 데까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호지는 '행복의 경제학'에서 세계화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들을 파헤친다. 세계화가 우리를 얼마나 불행하고 불안하게 만들어왔는지, 천연자원을 얼마나 낭비하며 기후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는지, 빈부의 격차를 어떻게 심화시키고 있는지를 꼼꼼한 연구사례들로 실증한다.

극소수 부유층을 위해 기능하는 글로벌 경제와 신자유주의가 세계의 환경과 사회구조, 문화를 파괴하고 있는 현장도 포착해 정리한다. 그 과정에서 WTO와 IMF가 어떤 식으로 경제 식민지화를 실행하고, 환경과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며 지속 가능한 해법을 저해했는지도 까발린다.


호지는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탈출(Break Away)' 전략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모델에서의 탈출, 대규모의 중앙 집중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세계 시민이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양한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지역 공동체를 대안으로 꼽을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지역화'라는 주장이다.

지역화는 자연과 사회를 파괴시키고 있는 경제적 논리들을 그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다. 즉,경제활동을 인간적·생태학적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지역적 조건에 맞춰 다양한 생산품을 내고, 공동의 가치와 삶의 양식을 공유하며, 타인과 경쟁하고 자원을 착취하기보다는 화합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설명이다.

호지는 "세계화는 이제부터 새롭게 구축돼야 하고, 자기 의존적인 지역적 생태 공동체들이 많이 생성돼야 한다"면서 "이러한 공동체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만이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준 위기와 붕괴를 넘어 지속 가능한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이다."

'행복의 경제학'은 호지가 제작·공동연출·내레이션을 맡아 지난해 개봉한 동명 다큐멘터리 영화를 바탕으로 했다. 인도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 미국 환경운동가 빌 매키번, 일본 슬로라이프 운동가 쓰지 신이치 등이 세계적 위기의 원인과 대안을 이야기하는 영상물이다.

"지역화가 세계 경제 위기 해결할 대안"

신간 '행복의 경제학'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간담회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스테디셀러 '오래된 미래'로 유명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국제생태문화협회(ISEC) 대표는 29일 "세계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대안은 지역화"라고 강조했다.

신간 '행복의 경제학'(원제: The Economics of Happiness) 발간을 기념해 내한한 호지 대표는 이날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간담회를 하고 "현재 세계 경제는 생산과 소비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며 "빈부격차가 커지고 에너지는 더 많이 사용되며 낭비, 오염, 실업 문제, 재정 불안 등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경고했다.

호지 대표에 따르면 글로벌 경제 문제는 각국 정부가 교역과 금융 활동 규제를 완화한 데서 비롯했다.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은행에 대한 규제가 약해지면서 작은 기업과 개인들이 무너져내린다는 것이다.

대안으로 지역화와 다양성을 강조했다. 똑같은 제품을 서로 낭비하면서 생산할 것이 아니라 문화와 종의 다양성을 중시하고, 문화생태학이 정한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화의 핵심은 농산물 직거래와 다양한 작물 재배다.

"생산과 소비의 거리를 좁히면 많은 파괴를 막을 수 있어요. 농부들도 더 다양한 작물을 기를 수 있죠. 그렇게 되면 공해가 줄어들고 야생동물의 서식 공간이 늘어나며 오히려 생산성도 더 커집니다. 지역화된 식량 운동을 위해 법, 의학, 공학 등을 공부한 '새로운 농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무엇보다 각국 정부가 함께 모여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지 대표는 책과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지난해 개봉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에서는 미국, 일본, 인도 등의 환경운동가들이 세계적 위기의 원인과 대안을 이야기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며 "지역화를 고양하고 정치적 변화에도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영화 제작 이유를 설명했다.

또 도시 거주자의 비율이 높은 한국의 지역화 방안에 대해서는 "서울을 더 크게 가도록 놔둘 것인지 규모를 줄일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라며 "일본에서 작은 경작지에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해 성공한 예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ISEC를 통해 생태 다양성과 공동체를 강화해온 그는 '라다크 프로젝트' 등 유명한 생태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다. 대안적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바른 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에 이어 최근에는 일본의 고이 평화상을 받았다.

 

 

cool@yna.co.kr

 

 

세계화를 버리고 지역화 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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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넘게 평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해온 인도 북부의 오지 라다크. `작은 티베트`라 불리던 이곳은 1975년 인도 정부의 개방정책에 따라 외국 관광객들에게 개방됐다. 하지만 곧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서구 문화와 가치관에 의해 마을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1975년 언어 연구를 위해 이 마을에 들어간 헬레나 노르베라 호지(66)는 라다크가 개발과 환경 파괴로 인해 무너지고 공동체가 분열되는 과정을 책으로 기록했다. 저생산체계 구축과 느림의 철학으로 살아가던 라다크인들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되묻는 `오래된 미래`(1992년)는 서구 산업사회에 경종(警鐘)을 울린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라다크를 떠난 뒤 국제생태문화협회를 설립하는 등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인 그가 신간 `행복의 경제학`(중앙북스)의 발간에 맞춰 방한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꼬집고 이를 극복할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대안의 핵심은 `지역화`다. 29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지역 식품, 지역의 기업과 은행, 지역화된 에너지 시스템, 생태적인 삶이 숨쉬는 지역 공동체를 통해 설사 효율성이 떨어져 경제규모가 줄어들더라도 미래를 위해 `지역화`에 기반을 둔 대전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화를 통한 브레이크 없는 성장전략은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키고, 더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낭비와 오염만 증가시켰다고 꼬집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실업이 늘어나고, 재정 불안도 커지며 정부는 더 가난해지고만 있다는 것이다. `지역화`는 경제가 성장하면 행복도 성장한다는 신앙에 대한 반격이다. 그는 "우리가 체인형 대형마트가 아닌 지역 상점에서 물건을 사면 3배나 많은 돈이 지역경제에 머문다"면서 "이는 지역경제 일자리와 세금을 늘리고 이런 문화에선 상인과 주민 간 대화도 10배나 많아진다. 이는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닌 인간 본연의 속도를 되찾는 것"이라고 했다.

서두에서 그는 농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농부들이 대규모 농장에서 단일 작물을 경작하는 대신 나무, 덤불, 초목, 동물 등 다양한 것들을 작은 경작지에서 기르게 되면 이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1000배까지 증가할 수 있다"면서 "놀랍게도 이런 모델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더 의미있는 노동을 만든다"고 했다.

그는 지역화를 통해 공동체도 재건할 수 있다고 했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지역 주민들 간의 유대관계가 개선되면 치유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지역화를 통한 경제는 사람을 더 인간답게 만듭니다. 상호의존성도 증대되죠. 아이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이들은 주변으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자의식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경제학`은 그가 직접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토대로 쓰인 책이다. 2011년에 개봉한 이 영화에서 그는 인도의 반다나 시바, 미국의 빌 매키번 등의 환경운동가들과 세계화로 인한 위기의 원인과 대안을 이야기해 미국과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슬기 기자]


 

'오래된 미래' 헬레나 호지 "세계화 대신 지역화"

최종수정 2012.11.29 17:12기사입력 2012.11.29 17:10

 

 

'행복한 경제학' 출간 기념 방한 기자간담회서 "경제성장의 대안은 '세계화'가 아닌 '지역화'"라고 강조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많은 사람들이 '세계화' 외에는 다른 경제성장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경제성장의 대안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지역화'이다."

신간 '행복한 경제학'발간을 기념해 내한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국제생태문화협회 (ISEC) 대표가 2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제는 새로운 경제성장의 길로 '지역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화' 대신 '지역화'로 방향 전환해야= 지난 1992년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우다'를 펴내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호지 대표는 신간 '행복의 경제학'에서 비판의 논지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냈다.

호지 대표는 "그간 경제학자와 인류학자,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세계화'과정을 연구한 결과, 모든 국가가 경제 성장을 위해 '세계화'전략을 택함으로써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에너지 낭비와 환경오염이 더욱 늘어나게 됐다"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교역과 금융에 대한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서 은행과 다국적 기업들에게 더 많은 힘을 주었기 때문" 이라고 비판했다.

전작 '오래된 미래'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상으로 '개발 이전의 생태적 공동체 '를 제시했던 호지 대표는 '행복한 경제학'을 통해서 세계화 전략의 대안으로 '지역화'를 꼽았다. 그가 주장하는 '지역화'란 자연과 사회를 파괴시키고 있는 경제적 논리들을 반대방향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경제활동을 인간적, 생태학적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

호지 대표는 "지역화는 국가 간 교역을 없애야 한다거나 국제적인 협력을 감소시켜야 한다는 게 아니라 보다 책임 있고 보다 지속가능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집 가까이에서 생산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서 오히려 세계적 차원에서의 협력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역화'란 국제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과거 국가들이 협상테이블에서 교역과 금융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기로 결정했다면 이제는 다시 규제하도록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미 시작된 '지역화'의 물결, 변화는 가능하다= 호지 대표는 "현재의 방식을 합리적이고 생태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이미 아래로부터 '지역화'에 대한 많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며 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지역화 운동의 핵심으로 꼽았다.

그는 "생산과 소비의 거리를 좁히면 많은 파괴를 막을 수 있다"며 "농부들은 더 다양한 작물을 기를 수 있게 되고, 공해는 줄어들고 야생동물의 서식 공간이 늘어나며 생산성도 더욱 커진다"고 설명했다.

지역화는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를 살려 지역사회를 재건하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호지 대표는 "체인으로 운영되는 마트가 아니라 지역 상점에서 제품을 구입하면 3배 이상의 자금이 지역 내에 머물게 된다"며 "지역경제의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결속력도 높아져 인간적인 상호작용이 활발해진다"고 말했다.

호지 대표는 "경제성장을 위해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문과 방송에서는 매일 우울한 소식만을 보여주지만 지금도 전 세계에서는 지역화를 향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단순히 이상이나 아이디어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전 세계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활동들을 책에 담았다"며 "이 책을 통해서 희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호지 대표는 마지막으로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들의 인식을 제고, 이해도를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상미 기자 ysm1250@

 

 라다크왕국의 심장 레팔레스수직의 성벽으로만 남은 옛 왕국의 위엄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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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11.08  17: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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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레팔레스. 9층 높이의 이 오래된 성은 건축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를 넘어 라다크로 들어오던 날, 눈 아래 펼쳐진 첩첩의 설산을 보며 마음속에서는 두 생각이 갈등을 하고 있었다. ‘조금 어렵더라도 육로를 이용해 오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휙 지나버리고서야 어찌 히말라야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비행기로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저 험한 산길,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설산을 구비구비 갔었다면 레에 도착하기도 전에 질려 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느 쪽 생각에도 온전히 손을 들어줄 수 없어 이랬다, 저랬다하고 있는 사이 비행기는 레 상공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비행기 타고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포탈라궁이 모델로 삼은 웅장함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둥지를 틀고 있는 녹색의 도시 레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기 전까지 고갯길의 땅, 해발3500m의 아득한 도시 레의 이미지는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었다. 하지만 상공에서 바라본 레는 히말라야의 한 자락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이미지는 기억 속에 각인되어 지금까지도 ‘푸른 도시 레’로 남아 있다. 비행기에서 보았던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른 것은 레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고성, 레팔레스에 올라서였다.


레팔레스는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의 옛 영광을 말해주는 거대한 추억이다. 라다크왕국의 수도였던 레에서는 도심 곳곳 어디에서나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레팔레스와 눈을 맞출 수 있다. 가파른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레팔레스는 먼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도시의 이정표기도 하다.


레팔레스는 1553년 체왕 남걀왕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레팔레스를 완성한 이는 그의 조카이자 라다크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던 셍게 남걀왕이었다. 라다크왕국 전성기, 그 화려했던 시절의 결정체가 바로 레팔레스였다. 레팔레스는 건축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반세기즘 후에 건축된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궁이 바로 레펠레스를 모델로 했다 하니 당시 라다크왕국의 국력과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일이다. 포탈라궁과 비슷한 모습이어서 ‘소 포탈라’라 불리는 애칭도 레팔레스로서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남겨두었다가 맨 마지막에 먹는 어린아이처럼 라다크 여정의 끝자락에서 레팔레스로 향한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험준한 바위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레팔레스로 향하는 길은 역시나 비탈진 산길이다. 그나마 입구까지 도로가 놓여있어 차를 이용할 수 있다. 산길을 타고 오르다보면 아래로 구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흙벽돌을 쌓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이겨 바른 라다크의 흙집들. 얼핏 보아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문마다 드리워진 커튼과 여기저기 쌓여있는 땔감용 나무, 그리고 옹색한 살림살이들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좁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이 구시가지의 모습은 수 백 년 전이나 지금이 별다르지 않을 듯 하다. 레팔레스 입구에 도착하니 시가지가 온전히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은 산비탈을 따라 흙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올드타운, 그러나 오른쪽엔 시가지 너머로 푸른 나무들이 담장처럼 둘러쳐져 있어 왼편의 풍경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는 레팔레스는 가까이 와서 보니 더욱 웅장하다. 9층 규모의 높이를 자랑하는 레팔레스는 땅에서 솟아 오른 듯 위로 향하는 수직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도시 전체를 압도하는 느낌이다. 온통 바위뿐인 산비탈 위에 어떻게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쌓아 올렸을까. 전성기에 달했던 라다크왕국의 국력과 강력했던 왕권의 위엄이 고스란히 성벽에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위용에 압도당하는 것도 잠깐,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레팔레스를 소개하는 간단한 안내판 하나와 입장권을 파는 조그만 매표소만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나마 1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질 않는다.


텅 빈 성안엔 불빛조차 없어

 

 

 

▲ 레팔레스에서 내려다보이는 레 시내. 흙집이 즐비한 구시가지 우측으로는 푸른 숲이 펼쳐져 있다.

 


“1834년 왕족들이 스톡팔레스로 쫓겨난 이후 레팔레스는 버려진 궁전이 되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줄곧 비어있어서 궁 안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최근 들어 일부 복원공사를 하고 있긴 하지만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정도입니다.”

 


가이드는 굳이 레팔레스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며 일행을 만류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 꺼림칙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성 안에서 한 외국인 청년이 나온다. 그에게 결정권을 주겠다는 심정으로 안의 사정을 물어보니 대답이 간단하다. “Nothing!” 아무것도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도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자 디지털카메라로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다. 온통 컴컴한 계단과 아무것도 없이 텅빈 방, 그리고 어설프게 벽에 걸려 있는 몇 장의 흑백사진뿐이다.


사진 속의 모습이 티베트왕국조차 포탈라궁을 지으며 모델로 삼았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웠던 레팔레스의 현실인가 싶어 망연자실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라다크에 도착한 첫 날, 우뚝 솟은 레팔레스를 올려다보며 이곳이 라다크의 심장임을,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음을 새삼 느끼며 얼마나 가슴 설랬는지.  레 시가지를 오갈 때 마다 시선을 사로잡는 수직의 아름다움에 끌려 단박에 뛰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달래며 라다크기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고이고이 아껴두었던 레팔레스였다. 그런 레팔레스의 초라한 속사정 앞에서 한동안 할 말을 잊는다.


아쉬운 발길을 그냥 돌리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언덕 위로 펄럭이는 타르초가 보인다. 레팔레스가 자리하고 있는 바위산 정상에 서 있는 승리요새와 남걀체모 곰파다. 승리요새는 16세기 라다크왕국이 발티 카슈미르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워졌고 곰파는 그보다 앞선 15세기에 건축된 사원이다. 레팔레스의 아쉬움을 곱씹으며 바위산 기슭을 따라 30여분 정도 숨 가쁘게 올라가니 작은 곰파의 입구다. 곰파 안에서는 3층 높이의 미륵불이 엷은 미소로 거친 산길을 올라온 이들을 위로해준다. 레팔레스에서 보았던 시가지가 좀 더 넓은 시야로 눈에 들어온다. 이래저래 맥이 풀려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아 한 눈에 들어오는 레를 하염없이 굽어본다.

 

 

 

▲ 레팔레스에서 올려다 본 남걀 체모 곰파(좌). 레팔레스 입구. 들어 가는 이도, 나오는 이도 없는 쓸쓸한 명승지(우),

 


황폐해진 레팔레스, 껍데기만 남아있는 과거의 영광을 혹자는 오늘날의 라다크에 비유하곤 한다.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라다크는 이미 레팔레스의 속살처럼 사라져가고 있는 과거의 추억이라는 것이다. 레는 이미 시장경제의 수중에 떨어졌고 시가지의 주요 상권은 서쪽의 카슈미르를 비롯해 외지에서 들어온 장사꾼들이 장악하고 있다. 전통적인 농업 공동체의 모습은 구세대에게나 적용될 뿐 라다크의 젊은이들은 고등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고 더 좋은 직장을 위해 라다크를 벗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과 힌두교도의 숫자가 점점 늘어가고 요즘에는 기독교의 유입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니 라다크에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라다크를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래된 미래가 모두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이 라다크의 현실이라면 굳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올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동안의 여정 속에서 보았던 라다크의 표정은 모두 퇴색해버린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었을까.


오래된 미래는 어디에 머무는가


낯선 이방인에게 불쑥 사과를 내밀던 어린 사미니 스님의 손,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던 시골 마을의 소녀, 희박한 공기에 숨을 헐떡이던 일행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노스님, 그리고 따듯한 차 한 잔을 건네며 남은 여정의 평안을 빌어주었던 어느 이름 모를 노인의 미소까지. 그것들은 분명 살아있는 라다크의 오늘이었다. 라다크가 품고 있는 오래된 미래는 허물어져가는 레팔레스가 아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었던 그 꾸밈없는 미소와 거칠지만 따뜻한 손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물음과 대답 속에서 맴돌고 있는 사이 오늘 하루도 변함없이 달려온 라다크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