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삼성병원] A씨는 간만에 서점을 찾았다. 책과는 담을 쌓고 살던 그는 최근 직장에 여유도 좀 생겼고, 직장 상사들이 독서를 권유하여 큰 맘을 먹어 본 것이다. 서점에는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A씨를 유혹한다. 대부분 성공하는 법과 부자 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고, 요즘 인기 있다는 인문학에 대한 책들도 많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결국 A씨는 몇 권의 자기 계발서를 사 가지고 나왔다. 이 책을 읽으면 나도 성공할 수 있겠다 생각하니 빨리 집에 가서 책을 펼쳐 보고픈 욕구가 생기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에게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2시간이 주어졌다. 당신은 이 시간 동안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사우나를 찾을 수도 있고, 낮잠을 잘 수도 있다. 영화 한 편을 볼 수도 있고, 하릴없이 소파에 밀착하여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허투루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하는 당신은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하고 싶다. 이 자투리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란 과연 무엇일까.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일생을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고민하고 연구하여 온 결과 드디어 자신이 일생 동안 성찰하고 발견하여 온 것을 하나의 책으로 펴 내었다. 그 주제는 과학일 수도 역사일 수도 철학일 수도, 아니면 요리 방법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한 권의 책에는 소위 그 사람의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다. 고로 그 책을 내가 읽는다는 것은 몇 시간을 투자하여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활동이다. 또한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의 결과물과 가치관을 큰 노력 없이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이다. 수십 년을 살아온 한 사람의 가치관과 노력의 결과물을 몇 시간의 투자를 통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가치 있는 게 어디에 있겠는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비용과 시간 대비 가장 유익하고 효과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시절은 언제일까. 아마도 한참 공부하는 학창 시절이 아닐까 한다. 수없이 마주치는 교과서와 참고서는 다 책이다. 책으로 하루를 열고 책으로 하루를 마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이 책을 다소 비자발적인 태도로 읽는다는 것이고, 또한 그 내용에 크게 흥미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 재미있게 학문을 하는 몇몇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책들을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자유시간을 주어보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운동장에 나가서 공을 차고, PC 방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려 하지 않겠는가. 여가 시간에 평소 읽고 싶었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며 책에서 즐거움을 찾는 학생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또 하나의 문제로는, 학생들은 시험을 친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 우리가 무엇을 배울 때는 호기심을 가지고 즐겁게 배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평가 받기 위해서는 이 내용을 외워야 하고, 주관식이 나와도 쓸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처음 공부할 때는 나름 재미있었지만 한 번 공부한 것을 다시 공부해서 암기하기까지의 과정은 지루하고 따분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것이 재미가 아닌 곤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책 자체가 힘겨워진다. 책만 봐도 노이로제가 찾아오며 책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 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평가 받기 위한 책 읽기' 가 학생 때의 지상 과제가 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결국 우리가 책을 가장 편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시기는 학교를 나와 사회에 진출한 이후의 시기가 될 것이다. 내가 딱히 시험을 치르기 위해 책을 읽는 것도 아니니 책 읽기는 훨씬 편하고 부담이 없어진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을 보면 우리 사회인들은 다른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어서 내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책으로 받는 이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서점에서는 자기계발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놓치지 않으며 성공한 CEO의 리더십 배우기 및 원활한 의사 소통하기 등의 주제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목록이 되고 있다. 부자가 되는 법,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 등이 다들 '나를 읽으면 널 성공하게 해줄게' 유혹하면서 나를 부르고 있다. 학생 때 영어, 수학, 과학의 교과목들이 성인이 되어 자기계발, 부 축적하기, 인격 수양 등등의 주제로 바뀌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만화나 잡지를 읽는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기도 한다. 그게 무슨 독서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책에서 실질적 이득을 기대하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책 열심히 읽고,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책 열심히 읽어서 부자 되고 싶고, 대인관계 원만하고 좋은 리더가 되고 싶은 우리 성인들의 모습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아무런 사심 없이 책 읽기 자체를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걸까. 책 읽기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건지 아쉽다. 독서가 우울증이나 정신건강에 좋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구절을 찾아 낼 거야'하고 덤비면서 책을 읽는다면 그러한 독서는 나를 더 우울하고 초조하게 만들지 않겠나.
대부분의 사람은 배우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어 한다. 노인 분들이 컴퓨터를 배우려 하고, 영어를 배우려 하는 것은 그러한 배움의 활동 자체가 진정 즐겁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책 읽기가 인생의 즐거움이 되려면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그 자체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세상은 넓으며 우리는 평생을 공부해도 이 방대한 세상의 눈곱만큼 알아갈 뿐이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소설이나 서사적 이야기들에서 평소 느끼지 않던 강한 감정의 동요를 느껴보는 것. 책 읽기의 의미를 그런 데서 찾아보면 어떨까.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서 내가 책을 읽는다면 그 책 읽기는 나에게 기쁨과 이완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런 사심 없이 책 내용 자체에 몰두해야 그러한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옛 선비들은 책을 읽고 학문에 몰두하는 것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학문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요, 즐거움을 주는 활동이었다. 우울이 만연하고 스트레스는 더 커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나에게 항상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당신은 책을 읽기 위해 체육관에 갈 필요도 없고, 큰 돈을 들일 필요도 없으며, 별다른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다른 인생을 대리경험 하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낀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큰 아군을 얻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다들 바쁘지만 하루 20분 책 읽을 틈이 없겠는가. 당신이 TV를 끄고 대신 책을 읽는다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신의 자녀도 자연스럽게 책 읽기를 가까이 할 것이다. 즐거움도 얻고 자녀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니, 님도 보고 뽕도 따니 이보다 더 이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칼럼니스트 : 전문의 이승민(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Daum 라이프에 인기리에 연재됐던 정신건강 시리즈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행복한 직장 생활을 위한 마음건강 지침서!
출처 : 오늘 내게 인생을 묻다
저자 : 강북삼성병원, 삼성스포츠단
출판사 : 서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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