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3당 합당과 민자당의 등장 이후, 한국사회는 망국적인 "지역주의"가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러므로 90년대 이전과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공학(혹은 공작)은 명확한 차이점을 보이게 됩니다. 그전에는 도시는 민주와 개혁을 부르지는 야당의 보루, 농촌은 수구/메국적 여당의 보루라는 뚜렷한 특징을 보이지만, 그 이후에는 민주/개혁이냐 수구기득권이냐의 구별은 무의미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주의를 90년대 이후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은 상당한 설득력과 타당성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지역주의를 지역감정으로 보면서, 그것이 소수 기득권층이 다수의 민중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공작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놓치게 됩니다.
지역주의는 어디에나,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지역주의라는 것이 단지, 지역색 정도로 자연스럽고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부터 망국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와 양상을 가집니다. 그러한 단계에서 볼 때에도, 정론직필 님이 "게시글"에서 지적한 3당 합당 이후에 발생하였다는 지적도 논리적 타당성이 있지만, 그 논리만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원인도 그뿐이며 주로 거기에서 찾기만 하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조선의 건국 이래, 통치술 가운데 하나가 지역차별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국가/사회 전체에서 서로 반목하고 감정이 상하고 다투고 등을 돌리게 만들고, 제국주의 지배자들은 중재자로 등장하는 것이 제국주의의 주요 통치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어느 지역으로 이사가면, 반드시 먼저 그 지역 소사를 찾아보고 살펴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제는 식민통치를 하면서 행정제도를 몇 차례에 걸쳐 개편합니다. 군청과 도청의 공무원 제도와 비교하면 일제는 수직과 수평에 걸쳐 한국사회를 갈라놓습니다. 즉, 서서히 지역간 감정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들고, 부딪히게 만들고, 다투게 만들고 격돌하게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지역주의를 만듭니다.
그 일제치하의 친일관리들과, 만주국 관리들이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를 주도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 치밀성을 확인해보고 싶다면, 조석필씨가 저술한 <태백산맥은 없다>를 읽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한반도의 산천경계에 관한 우리 민족 고유의 지식과 이해가 일제에 의해 어떻게 강제적으로 개편되고 강요되어, 결국 우리의 사회적 삶을 어떻게 "보이지 않게" 파탄나는 인식구조를 만드는가를 절묘하게 간파한 책입니다.
저는 긴 역사적 관점에서, 악의적 통치자들은 어떻게 지역감정을 교묘하게 유발시키는지를 이해해야, 기득권 세력의 교활함을 이길 수있다는 점에서 지역감정은 매우 깊은 뿌리가 있다고 보고, 통치자들의 상황과 악의, 그리고 통치술에 따라 지독하게 격화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주/개혁 대 수구/매국이라는 프레임이 붕괴되고, 이를 대처할 효과적인 프레임을 생산하여 제공하지 못한 탓에 지역구도라는 보다 단순하지만 파멸적인 프레임에 갇혀서 한국 정치가 발전동력을 상실히게 되었다는 정론직필 님의 지적은 상당히 근거가 있습니다만, 저는 지역감정은 그 뿌리가 지역차별에 있고, 통치계급의 교묘한 작위에 의해 오랫동안 형성된다는 점을 약간 덧붙이고 싶을 뿐입니다.
아래에 호남차별의 개념들이 이미 18세기에 지금과 거의 동일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연구논문입니다. 이 논문의 결론에 저는 100%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논문에서도 간과한 것이 서울 대 호남이라는 구도에서, 그러면 "서울"은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일지라도 집권세력의 활동무대라는 점에서 순수 서울 태생도 있지만 상당수는 향촌에 근거지를 둔 출세한 양반들과 중인들, 관리들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권력에 다가가는 출세란 '서울"로 진출하는 상경이고, 권력기반을 상실하면 '낙향'합니다. 조선 후기의 당쟁 혹은 붕당정치도 상당히 지방색을 가지고 있고, 어떤 지방을 근거없이 배척하는 성향이라면 지역차별은 이미 존재하였고, 지역감정은 배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논문에서 연구대상인 18세기 호남 사람은 호남인들은 지리멸렬하여 세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미 희망을 읽어버렸고 구심점을 마련하여 굳게 결속을 지킬 이유를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김대중과 그 이후 호남세력이 다른 점이라고 보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미욱한 사람이 부질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 같으나 혹, 여러분들의 인식지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사설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넓은 아량을 기대합니다.
//뱀발// 촌민들은 자신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여당을 저토록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까닭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가장 간단한 설명이 '세뇌'인데 실제로는 충분한 설명이 못됩니다. 이것이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는 무지렁이 촌로라고 해서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세계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습니다. 촌로들이 누구의 말은 따르지만 누구의 말은 따르지 않느냐는 점에서, 일단 저는 "통치 프리미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집권자니까 일단 따라야 한다"라는 사고방식인데 함께 살면서 관찰해보면 나름 이해가 되기는 합디다. 현철한 분의 지적을 기다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http://blog.daum.net/ikdominia/167
아래는 이지양의 논문 <호남선비 황윤석이 본 호남차별 문제> 중 일부이다. 이 논문은 동양한문학연구 제27집에 실린 것으로 호남 선비인 황윤석의 <이재난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재 황윤석은 10세부터 63세로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53년간 거의 매일 꼼꼼하게 일기를 쓴 조선의 선비이다. 이 일기 모음이 <이재난고>이다. 18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18세기는 영정조 재위기간이었다. 영조는 1724~1776년까지, 그리고 정조는 1776~1800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이재난고가 보여 주는 18세기의 지역감정과 전라도 차별의 모습을 정리하면 이런 것이었다.
첫째, 18세기 가장 심하게 차별받은 곳은 당연히 전라도였다. 둘째, 당시 전라도 차별은 주로 서울이 전라도에 대해 하던 것이었다. 셋쌔, 영정조 당시 반역향으로 찍힌 곳은 전라도였다. 넷째, 영남인은 전국적으로 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나 전라도는 완전한 지리멸렬의 상태였다. 다섯째, 전라도에 대한 서울의 평은 믿을 수 없다는 그 뒤통수 기질에 대한 것이 주류였다는 점에서 현재와 아무 것도 다르지 않다.
하나하나 살펴 보자.
1. 조선 후기 전라도 차별의 실상 황윤석은 전라도에 있을 때는 호남 차별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한양에 출입하면서 이 점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그의 1759년 일기에 명확한 호남차별에 관한 체험이 처음 등장한다. 차별의 내용과 원인은 아래에 따로 기술한다.
호남차별에 관한 두 번째 그의 일기 기록은 5년 후인 1764년 5월 20일자의 것이다. 이 날 황윤석은 서울 선비 김원행과 만났는데, 김원행이 영호남을 비교하는 일화가 실려 있다.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박찬혁이란 선비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바탕이 돈실하니 영남 사람인 듯하다. 장래에 큰 일이 있으면 그것을 해낼 듯하다. 호남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속임수가 많다고들 하는데, 나는 군과 홍생 이외는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바탕이 돈실하여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곧 영남 사람이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당시의 세평이었던 거다. 반대로 전라도는 <속임이 많다>라고 하여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믿을 수 없고 뒤통수 친다는 전라도에 대한 평판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런 평가 속에서 전라도는 당시 조선에서 완전히 내버려진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18세기 전라도 차별의 이유
첫째, 사박(사기치고 경박함), 즉 속이고 뒤통수치는 기질 둘째, 변괴가 많다. 셋째, 반역향이다.
(1) 전라도 차별의 가장 핵심적 문제는 그 기질에 대한 것이었다. 전라도는 사박(詐薄), 즉 속이고 경박하다는 것이 온 세상의 평가였다. 이는 완전히 반대의 기질을 가진 영남인과 특별히 비교되었다. 경상도는 질각근중(質慤謹重), 즉 진실하고 순박하며 무게가 있는 사람들이라 하여 최고의 호평을 받았지만 전라도는 부박하며 사박함, 즉 경박하고 속임이 많다는 악평을 듣고 있었다. 속임이 많다는 전라도에 대한 이야기는 고서의 그 어디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황윤석 역시 전라도에 부박하고 분열된 기풍이 있음을 인정한다. 또한 전라도에 잡술류가 많다는 말도 일기에 등장하는데, 이는 성호이익의 기록과도 완전히 같은 것이다. 즉, 성호 이익은 전라도에 대해 <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方士)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18세기 조선인들이 전라도인에 대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인식한 것 역시 그 뒤통수 치고 믿을 수 없는 기질이었다. 1770년 6월 17일 일기에 황윤석은 당시 현실이 상하가 모두 전라도인에 대해 <속이고 경박하여 등용할 수 없다>는 평을 내리고 있었음을 말한다.
(2) 전라도 차별의 둘째 이유는 변괴가 많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변괴란 것은 지진같은 천재가 아니라 흉한 범죄 등의 인재가 많다는 의미이다. 왜냐면 황윤석이 그 항변으로 하는 말이란 것이, 전라도에 흉역한 종자들을 많이 보낸 탓이라거나 원래 전라도인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변명 등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 점에 대해 전라도가 깔보였던 탓도 있다고 보고, 역시 차별 받는 지역이지만 영남은 전혀 그런 평을 받지 않는 원인을 아래와 같이 분석하여 쓰고 있다.
<영남의 풍속은 굳세고 강직하며 과감하여, 뜻이 있더라도 깨뜨릴 수 없는 일이 많고, 호남의 풍속은 들뜨고 조급하며 가볍고 물러 터져, 그 뜻을 둔 일이 또한 혹 쉽게 교란되니, 이것이 시론이 영남을 두려워하고 호남을 깔보는 까닭이다.>
황윤석은 이런 이유로 영남 사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음에도(이는 오류이다. 이인좌는 충청도 청주 사람) 영조가 영남 문관에게는 이런 일에 구애됨이 없이 실직을 제수하라 했으며, 또 태인 사또 김이신이 영남 사람은 국문을 당해도 잘 굴복하지 않지만 호남 사람은 쉽게 굴복하여 유죄를 자백하는 나약한 기질이 있다는 말도 했다 한다.
(3) 호남 차별의 세번째 이유는 역적이 많기 때문이라 한다.
즉, 당시에도 전라도는 완전히 반역향으로 찍혀 있었던 것이다. 영조 당시 영남이 반역향으로 인식되었다는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전라도에 반란 많다는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조작해서 만들어낸 평 따위가 절대 아니라는 거다. 황윤석은 이에 대해 역적이 많이 나온 지역을 따지면 응당 서울만한 곳이 없으며, 충청에도 몽학, 유진, 탁, 인좌 같은 무리가 나주의 두서너 흉얼(凶孼)보다 열배 쯤 되는데도 서울처럼 등용해 주고, 영남 역시 인홍이나 희량의 무리가 있었지만 오히려 충청과 비교해도 더욱 취할만하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한다. 황윤석이 반역 제일 많은 곳으로 지목한 곳은 서울이고 다음으로 충청이었다. 영남도 두엇 언급하지만 요즘 전라도인들이 경상도에 제일 반역 많았다고 떠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호남 차별이 주로 한양에서 행해져 그런 건지 서울을 제일로 꼽고 있다. 아무 데나 감정 안 좋은 지역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이때나 저때나 마찬가지인 것인가. 황윤석의 말에서 보듯, 당시 영호남이 정권에서 소외되고 있었지만 그 양상은 두 지역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황윤석은 영남은 정권에서 소외되었더라도 자부심을 가지고 단결했으나 호남은 기가 꺾이고 분열된 채 지리멸렬하게 소외되었다는 점, 게다가 더 큰 문제로서 호남인들이 철저하게 자기부정에 젖어 들어가고 있음을 전한다. 황윤석은 그 해결책으로 호남의 인물이나 사적을 도학, 문장, 충효, 정열로 하나하나 편집하여 책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전라도 차별의 양상과 내용은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았고, 그 믿을 수 없는 뒤통수 기질과 반역적 기질을 이유로 한 것이었으며, 그 대립 지역도 특히 서울과 전라도간의 문제가 핵심이었다. 전라도 인성에 대한 악평은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시점부터 이어져 온 전국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을 뿐 그 누구의 조작이나 음모 따위로 생긴 일이 결코 아니었고, 지역감정의 양상도 원래 호남대 비호남으로 유구하게 존재해 온 것임이 분명한 역사인 것이다.
18세기는 노론 집권기로서 통상 영남이 차별받았던 것으로도 이야기 되는 시기이다. 즉,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충청도에서 발발해 삼남 일대에 퍼지고, 그 결과 영남은 반역향으로 몰려 평영남비란 것이 세워졌으며, 그래서 경상도가 이 시기에는 과거도 보지 못해다는 등의 이야기가 떠돌기도 한다. 그러나 영남은 서울을 제외한 지방 중에서 조선 전 시기를 통해 단 한 번도 과거 합격률이 1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는 유일한 지역이었기에(http://blog.daum.net/ikdominia/48) 이는 사실이 아니며, 게다가 영남이 호남 및 서북 지역 등과 함께 관직 임용에 있어서 다소의 어려움을 겪었을지라도 그 인품에 있어서는 돈실하고 강직하며 순박하고 과감하다는 등 전국적으로 최고의 찬사를 받던 지역이었음이 이 일기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에 반해 당시 전라도는 관직임용에서 영남보다 더더욱 심한 차별을 받은 데다 그 인간성에 대해서 마저 등용의 장애 원인으로까지 작용할 만큼 더없는 극악평을 받고 있었던 지역인 것이다. 어느 시기의 어떤 자료를 보더라도 영남은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전라도는 최악의 평가를 받았음이 이재난고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되는 대목이다.
호남대 비호남의 지역감정이나 전라도 인성 차별의 역사가 경상도 탓이라거나 박정희 탓이라는 헛소리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개소리임을 모두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뱀발/ 위 논문의 중간에 나오는 대목, 황윤석은 이런 이유로 영남 사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음에도(이는 오류이다. 이인좌는 충청도 청주 사람) 영조가 영남 문관에게는 이런 일에 구애됨이 없이 실직을 제수하라 했으며 이 대목에서 이인좌를 영남사람이라고 황윤석이 오해하였다고 논문저자는 괄호 안에서 설명하는데 호남사람 황윤석은 영조의 지시로 인해 착각했고, 영조가 이런 지시를 한 것은 이인좌가 실제로는 충청도 청주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범 영남계로 분류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옳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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