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이 된 신부 정호경
낮은 곳에서 생활공동체를 일구었던 진짜 신부,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들과 더불어 농민운동했던 투사 신부, 그리고 스스로 농부가 되었던 정호경
루도비꼬 신부의 첫 평전이다. 농민과 같이 춤추고, 짓밟히고, 갇히고, 결국 농부가 되었던 정호경 신부의 삶, 나눔과 섬김의 생활공동체운동을
선구적으로 주창하며 실천했던 사제의 생각과 이야기가 담담하게 담겨 있다.
저자 : 한상봉
서강대학교 사학과, 같은 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 천주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원,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간사,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사무국장, 격월간 잡지 ‘공동선’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인터넷신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편집국장으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지상에 몸푼 말씀〉 상하권, 〈연민〉,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 〈내가
너희에게 그랬듯이〉, 〈가족을 위한 축복기도〉, 〈생활 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너에게 가고 싶다〉 등이 있다.
기획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제1조)”으로 설립된 공공법인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이를 세계에
알려 전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밤 열 시가 되자, 강당에서는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고, 성탄 퀴즈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나왔던 퀴즈문제 가운데 정호경은 이것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기 예수님이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지?”하는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정호경이 대답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시려고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정호경을 바라보았지만, 정 원장은 정호경을 힐끗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대답했다. “그날 밤 예수님의
부모님께서 주무실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그 말이 맞다고 판결해 주었다.---p.38
정호경 신부는 특별히 농촌교회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데, 교회공동체는 예언자적 외침과 아울러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 삶을 통해 생활 속에서 거듭나는 ‘사랑과 해방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초대교회 공동체를 참고해 공동경영, 공동생산, 공동활용, 공동분배 등의 협업을 고민하면서 고귀한
사랑과 자기 비움의 정신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농민사목 방안으로는 다음 열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p.107
정호경 신부에게는
농민이면 농민...밤 열 시가 되자, 강당에서는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진동하고, 성탄
퀴즈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나왔던 퀴즈문제 가운데 정호경은 이것을 또렷이 기억했다. “아기 예수님이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지?”하는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정호경이 대답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시려고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정호경을 바라보았지만, 정 원장은 정호경을 힐끗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대답했다. “그날 밤 예수님의 부모님께서 주무실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그 말이 맞다고 판결해 주었다.---p.38
정호경 신부는 특별히 농촌교회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데, 교회공동체는 예언자적 외침과 아울러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 삶을 통해 생활 속에서 거듭나는 ‘사랑과 해방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초대교회 공동체를 참고해 공동경영, 공동생산, 공동활용, 공동분배 등의 협업을 고민하면서 고귀한 사랑과 자기 비움의
정신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농민사목 방안으로는 다음 열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p.107
정호경 신부에게는 농민이면 농민이지
신자농민과 비신자 농민이 따로 없었다. 삶의 모습이 복음적인지가 더 중요했다. 정 신부가 농민회 전국지도신부로 있을 때 늘 자리를 지켜 주었던
정성헌 사무국장도 본래 신자가 아니었다. 정 신부의 전임이던 이종창 신부가 교리공부도 하지 않은 정성헌을 속전속결로 세례를 주었으나 정성헌
아오스딩은 그 후로도 교리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농민회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정호경 신부가 아직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 겸
사목국장으로 일할 때였다. 안동 마리스타수도원에서 정호경 신부가 미사를 집전한 적이 있는데, 영성체 시간에 정 신부가 성체를 내밀며 “그리스도의
몸!” 하자, “아멘”이라 답해야 할 순간에 “예!”라고 답했다. 기도 시간에는 정성헌에게 기도를 하라고 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나름
절실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서 “이상 끝입니다.” 하니,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 정호경 신부는 “그래, 기도는 그렇게 하는 거야”하고
칭찬해 주었다. 격식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p.143
집을 짓는 동안에도 농사는 계속되었지만, 집을 다 짓고 나자
농사에 더욱 신명이 돋았다. 정호경 신부가 지은 집을 구경도 할 겸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 해에 천 명에 이르기도 하고, 어느 해는 700여 명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집에 와서 놀다 갈 생각이면 헛짚은 것이었다. 정 신부의 집에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밭일을 해야 했고, 노동 후에
찾아온 저녁에야 여유롭게 술 한 잔 걸치며 정담을 나눌 수 있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게 정호경 신부의 지론이다 보니, 마음이
있어도 밭일이 두려워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p.173
길을 떠나기 이틀 전인 2008년 12월 1일에 정호경 신부는
유서(遺書)를 새로 작성했다.
1. 내가 의식을 잃으면, 병원의 억지 인공조치(인공호흡기 설치 따위)를 하지 말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도록 해 주십시오. .........
8. ‘남은 돈(우체국 701136-02-006915)’이 있으면, 사망신고 전에 찾아 장례비로
쓰고, 혹시 남으면 배고픈 이들에게 주십시오(카드는 내 지갑에 있고 비밀번호는 1010입니다).
9. 생전에 알게 모르게 ‘도움과
깨우침’을 주신 많은 분들과 온갖 것들에게 감사합니다.
10. 생전에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11. 모든
생명이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일하며 정을 나누고 사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경쟁의 문명은 공멸(共滅)입니다. 상생의 문명만이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 ---p.206
정호경 신부를 다시
만나다
우리시대, 귀감을 얻다
멘토가 유행하기 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은 스승이나 귀감이었다.
귀감(龜鑑)이란 말은 어려운 한자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나 행동이 찾기 어려워진 탓에 쓰임도 줄었을 것이다. 스승이라는
말이 소원해진 것도 사표의 실종과 연관 있을 것이다.
정호경 신부가 선종한 지 두해가 되어가는 즈음,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일구어
왔던 그의 삶의 이야기가 평전으로 우리에게 왔다. 귀감과 스승이라는 말에 제대로 어울리는 삶의 여정이 담담하게 담겼다.
낮은 곳에서
생활공동체를 일구었던 진짜 신부, 농민들의 운동을 이끌고 조직했던 투사 신부, 그리고 스스로 농부가 되었던 정호경 루도비꼬 신부.
정호경
신부에 대한 첫 평전인 이 책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더불어 산다는 것, 예수를 따른다는 것, 제대로 노동하며 제대로 말하며 사는 것, 진짜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다 고개 숙이게 된다. 물에 비추어 자신을 살피는 거울보기, 그러다 찬물에 번쩍 세수를 하고
싶어진다.
입으로는 나라를 들었다 났다 하면서도 정작 삶에선 겉멋 들어 비움과 결기를 잃은 사람들, 남 탓하며 쉽게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정호경 신부의 삶은 얼음장 깨치는 소리다. 또 예수를 믿되 예수의 삶과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 나무랄 데 없는 종교인이되 공동체를 잊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호경 신부의 삶은 머릿속까지 찌릿한 회초리다. 소탈해서 더 커 보이는 여여한 귀감이다.
농민과 같이 춤추고,
짓밟히고, 갇히고, 결국 농부가 되었던 사제
그는 ‘노동하는 예수’를 따랐던 신부다. 탄탄한 영성이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실천으로 피어나는지를 증언하는 참 종교인의 모범이기도 하다. 그는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서럽고 한 맺힌 형제들인’ 농민들의
삶으로 기꺼이 막걸리와 함께 걸어 들어갔다. 농민운동 조직인 가톨릭농민회를 만드는데 그보다 헌신적인 사람은 없었다. 10년을 넘게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로 활동하며 농민들의 투쟁에 그리고 농민 생활공동체운동의 버팀목이자 지도자였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에
참여하고, 1977년 안동교구 사제단의 긴급조치 해제 요구 기도회를 주도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이어 1979년 8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회원...정호경 신부를 다시 만나다
우리시대, 귀감을 얻다
멘토가 유행하기 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은 스승이나 귀감이었다. 귀감(龜鑑)이란 말은 어려운 한자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나 행동이
찾기 어려워진 탓에 쓰임도 줄었을 것이다. 스승이라는 말이 소원해진 것도 사표의 실종과 연관 있을 것이다.
정호경 신부가 선종한 지 두해가
되어가는 즈음,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일구어 왔던 그의 삶의 이야기가 평전으로 우리에게 왔다. 귀감과 스승이라는 말에 제대로 어울리는 삶의
여정이 담담하게 담겼다.
낮은 곳에서 생활공동체를 일구었던 진짜 신부, 농민들의 운동을 이끌고 조직했던 투사 신부, 그리고 스스로 농부가
되었던 정호경 루도비꼬 신부.
정호경 신부에 대한 첫 평전인 이 책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더불어 산다는 것, 예수를 따른다는 것,
제대로 노동하며 제대로 말하며 사는 것, 진짜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다 고개 숙이게 된다. 물에 비추어 자신을 살피는
거울보기, 그러다 찬물에 번쩍 세수를 하고 싶어진다.
입으로는 나라를 들었다 났다 하면서도 정작 삶에선 겉멋 들어 비움과 결기를 잃은
사람들, 남 탓하며 쉽게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정호경 신부의 삶은 얼음장 깨치는 소리다. 또 예수를 믿되 예수의 삶과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 나무랄 데 없는 종교인이되 공동체를 잊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호경 신부의 삶은 머릿속까지 찌릿한 회초리다. 소탈해서 더 커 보이는 여여한
귀감이다.
농민과 같이 춤추고, 짓밟히고, 갇히고, 결국 농부가 되었던 사제
그는 ‘노동하는 예수’를 따랐던
신부다. 탄탄한 영성이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실천으로 피어나는지를 증언하는 참 종교인의 모범이기도 하다. 그는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서럽고 한 맺힌 형제들인’ 농민들의 삶으로 기꺼이 막걸리와 함께 걸어 들어갔다. 농민운동 조직인 가톨릭농민회를 만드는데 그보다
헌신적인 사람은 없었다. 10년을 넘게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로 활동하며 농민들의 투쟁에 그리고 농민 생활공동체운동의 버팀목이자 지도자였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에 참여하고, 1977년 안동교구 사제단의 긴급조치 해제 요구 기도회를 주도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이어 1979년 8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회원이었던 오원춘씨 납치사건에 항의하다 두 번째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농민사목’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씨를 뿌리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 모범으로나 그는 진정한 목자였다. 천주교가 갈라진 손마디 농부들의 친근한
벗이 된 데는 그의 헌신적인 발품과 소탈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 오래 ‘입품, 글품’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땀 흘러 일하는
‘일품’으로 살고 싶습니다.”라는 뜻을 밝히고 남은 생 20여년을 농사꾼으로 살았다. 1992년부터 봉화군 비나리 마을에서 4년에 걸쳐 집을
손수 짓고 2천 평이 넘는 땅에 유기농 농사를 지었다. 틈나는 대로 성경구절을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해 〈전각성경, 말씀을 새긴다〉도 내고,
〈반야심경〉, 〈장자〉, 〈우파니샤드〉 등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다양한 경전들을 손수 해설하며 책을 내기도 했다.
몸 저 눕기 전 묵상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도보순례를 떠나기 전 11개 항목의 유서를 정리하였다. 자신의 은행통장 비밀번호와 함께 남은 돈의 용처까지 일러두며 온전한
‘비움’이 되어 떠났다. 그의 유서 마지막은 이렇게 맺는다. “모든 생명이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일하며 정을 나누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경쟁의 문명은 공멸입니다. 상생의 문명만이 구원의 길임을 믿습니다.”우리 시대가 다 덤벼들어 끌어안고 가야 할 간절한 화두다.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다
정호경 신부는 농민들과 함께 진정한 생활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이 책의
부록에 실은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농민사목〉과 〈생활공동체운동-인간, 사회의 동시적 해방을 위하여〉는 정호경 신부의 생각이 잘 나타난 글들로
지금 읽어도 여전히 새롭고 놀랍다.
그가 소망한 것은 구원이었다. 그는 사제였고 응당 종교적 구원을 추구했으되, 개인과 사회를 아우르고,
교회와 교회밖 세상을 아우르고, 개개인의 굴레와 세상의 죄를 동시에 구원하기를 원했다.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를 하면서 비신자를 거리낌 없이
회원으로 받아들인 것, 제도교회의 거창함에 날선 비판과 함께 진정한 공동체 모범으로 공소공동체 활성화를 호소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생활공동체운동을 설파하면서, 우리를 둘러싼 안팎의 장애로 소유욕·지배욕·복수심·죄책감 등과 같은 내 안의 굴레와, 독점과 억압의
구조악같은 세상의 죄, 이런 이중굴레와 대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는 이러한 안팎의 이중굴레를 깨고 ‘밥
제대로 먹기 나눔’과 ‘말 제대로 하기 섬김’을“스스로, 함께,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여전히 우리들 숙제로 남겨져 있다. 그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되지만, 누룩처럼 확산되게” 생활공동체를 만들자고 호소한 공동체운동의 선구자였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에
혼신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평전을 기획 지원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지원을 받아 출간되었다. 이 책의 ‘기획’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명시한
이유다. 표지그림은 정호경 신부와 인연이 깊었던 이철수 화백이 고심 끝에 골라 보낸 그림을 썼다. 책이 나오는데 정호경 신부의 삶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애쓴 천주교 안동교구 관계자들, 가톨릭농민회 여러분들의 도움이 컸다. 화보로 실린 사진들도 이 분들이 간추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