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둔 커피 있나요?”
허름한 행색의 한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묻는다. 카페 직원은 “있다.”고 대답하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어준다. 남자는 커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랜다. 불가리아의 카페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외상도 아니고 맡겨둔 커피라니, 이게 무슨 일일까.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 누군가 미리 지불해둔 커피 값으로 노숙자나 어려운 이웃이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말한다. ‘착한기부커피’, ‘커피기부운동’ 으로 불리는 ‘서스펜디드 커피’는 약 100년 전 이탈리나 남부 나폴리 지방에서 ‘카페 소스페소’라는 이름으로 전해오던 전통에서 비롯됐다. 시대가 풍족해져 점차 사라진 이 전통이 최근 유로존의 위기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자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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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 ‘서스펜디드 커피 네트워크’라는 페스티벌 조직이 결성되며 본격화 된 후 현재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세계 전역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불가리아에는 150여개의 카페가 동참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카페 스타벅스도 도입을 고려하는 중이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누군가를 위해 미리 계산해두는 사람들이 생겼다. 지난 2013년 5월, '미리내'라는 이름으로 기부를 맡겨둘 수 있는 가게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경남 산청 1호점(후후 카페)'을 시작으로 개인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던 가게들까지 합류해 쉴 새 없이 늘어난 ‘미리내 가게’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미리내 운동’으로 명칭도 바꿨다.
미리 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떡볶이 2인분이랑 김밥 한줄 주시구요, 만두 1인분은 미리내로 할게요.” 만두 1인분은 쿠폰에 적고 한꺼번에 계산을 한다. 가게 밖 알림판에는 기부 내용이 적힌다.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쿠폰으로 먹으면 된다. 쉬운 기부라는 인식에 미리내 동참 인증 샷이 더해져 SNS를 통해 젊은 층의 진심을 움직이고 있다.
서울 시설관리 공단이 운영하는 서울시청 지하도 상가 내 가게 세 곳도 미리내 가게로 새단장을 하는 등 8개월 만에 전국각지에 미리 낼 수 있는 가게가 160여개가 됐다. 참여하는 가게의 형태도 다양하다. 대부분 제과점, 음식점, 카페, 호프집이지만 그 외에 슈퍼, 반찬가게, 중고가전, PC업체, 미용실처럼 실용적인 나눔과 공방, 체육관 등 이색적인 나눔도 있다.
부평의 ‘UCM(이웃사랑)’은 봉사단체로는 처음 미리내 운동에 참여했다. 도배, 장판 등이 가능한 기술자들이 재능기부로 어려운 이웃의 집을 수리해주는 일을 하는 단체이다. ‘UCM’으로 신청해 집수리를 받고 비용을 지불하면 그 비용으로 다시 어려운 이웃의 집을 수리해주는 나눔에 동참할 수 있다. (문의: 032-521-3309)
인천에는 ‘UCM’을 포함해 인천논현역 앞의 통만두와 메밀소바가 맛있기로 소문난 ‘청실홍실’, 계산동의 ‘계양산 칼국수’, 구월동 ‘로시난테’ 카페, 서구 ‘뚜레주르’, 무의도 ‘실미원 농장’ 카페까지 총 6개 가게에 파란 딱지가 붙었다. 그 중 ‘계양산 칼국수’는 ‘UCM’ 대표 송의섭 씨 사촌 형인 송장섭 씨 부부가 운영하는 곳. 어쩌다가 형제가 나눔을 실천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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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섭 씨 부부는 얼마 전까지 부천에서 편의점을 운영했다. 건물주와 임대료 문제로 인해 힘들게 가게를 접으며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한다. 평소 음식 솜씨를 살려 국수집을 열기 위해 인천으로 온 뒤에야 겨우 추스를 수 있었다.
하얀 벽, 테이블과 의자, 카운터, 정수기, 주방, 아담한 가게 안엔 꼭 필요한 것뿐이다. 4개월 전, 가게를 막 오픈했을 때는 손님도 좀 있고 배달도 많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지금은 날씨만큼 이나 꽁꽁 얼어붙은 경기로 한산하다. 송장섭 씨는 다른 일을 하고 가게는 아내 권순자 씨가 전부 맡아서 하고 있다.
밀가루 반죽과 육수는 물론, 얼마 안 되지만 고명과 밑반찬 모두 그녀의 손을 거친다. 면을 뽑아내는 손길이 조금 서툴러도 정성스럽다. 당근과 달걀지단, 김가루가 전부인 국수 한 그릇을 담아내기 위해 그녀는 작은 주방 안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어차피 큰 돈을 벌 생각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문을 연 가게이다 보니 메뉴도 음식도 간단하다.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수제비, 손만두 등 가격은 모두 3,000원에서 4,000원. "정말 싸게 판다고 생각했는데 인천에는 더 싸게 파는 곳도 많아서 놀랐어요."라며 웃는 권 씨. 저렴하게 팔지만 맛에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 달 전쯤, 남편의 사촌 동생 송의섭 씨의 권유로 미리내 운동을 알게 됐다는 부부는 사실 평소 기부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막상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니 작은 기부라도 누군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망설임 없이 동참하기로 했다.
시작은 했지만 아직 큰 변화는 없다. '미리내'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한다. 쑥스럽기도 하고 요즘 다들 어려우니 기부를 권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래도 미리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참여가 조금씩 이어지고 있어 반갑다. 미리내 간판을 달자마자 한 중학생 친구가 인터넷에서 봤다며 1,000원을 기부하고 갔다. "어른들도 하기 쉽지 않은데 자기 용돈에서 기부를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죠. 미리내 운동에 동참하길 잘 했다고 생각해요." 지난주엔, 서울에서 전화가 한 통 왔다. 방문하고 싶다며 정확한 위치를 묻는 전화였다. 5명의 친구와 함께 방문한 서울 손님은 국수를 먹고 수제비 두 그릇을 미리 내고 갔다.
장사가 잘 안되지만 예전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경기가 어려워도 꾸준히 남을 돕는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 권순자 씨는 마음이 놓인다. 올해 희망사항을 물었더니 "뻔하죠 뭐. 가게 형편이 좀 나아졌으면 싶고, 작은 가게지만 이 공간에서 미리 내는 사람, 먹고 가는 사람, 그래서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라고 답한다. 그녀의 희망을 이뤄주고 싶어 쿠폰 두 장을 적고 국수 한 그릇 값과 함께 계산을 했다. 꼭 필요한 누군가 맛있는 국수 한 그릇에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길 바라면서.
인천시 계양구 경명대로(계산동) 1079번길 5 / 032-322-7449 / 9시~2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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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운동'을 두고 일부에서는 악용하는 사람이 생기거나 업체의 홍보수단이 되지 않겠냐는 걱정이 들린다. 하지만 그저 믿고 남을 위해 선뜻 내 지갑을 여는 사람들이 더 많다. 순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하는 ‘미리내’, 아무리 반짝이는 별도 혼자서는 은하수를 이룰 수 없다. 신뢰와 나눔으로 반짝이는 인천, 더 따뜻한 세상을 위해 우리도 커피 한 잔, 국수 한 그릇 값을 미리내보는 것은 어떨까. (미리내 홈페이지 http://mirinae.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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