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성공, 어떻게 가능했나?
-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성장 과정
장석준(당 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소련과 동유럽이 흔들릴 무렵부터 사람들은 고개를 북유럽 쪽으로 돌렸다. 스웨덴이라는 낯선 나라 이름이 오르내렸다. 동시에 이제는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의 새로운 깃발이라는 풍문이 흘러 다녔다. 최근에는 심지어 자유주의 정치인인 노무현을 지지지하는 사람들까지도 수많은 변명 중의 하나로 사회민주주의를 입에 담고는 한다.
하지만, 정작 사회민주주의의 모범 국가라고 하는 스웨덴의 현재가 있기 위해 이 나라 노동자?민중이 어떠한 고된 여정을 걸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또한 이 나라 노동계급운동이 과연 판에 박힌 ‘사회민주주의’의 이미지와는 과연 얼마나 같은 것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념의 말(馬) 바꿔 타기 외에는 별다른 진지한 논의가 없다. 이번에는 그 스웨덴의 노동자정당, 사회민주당의 역사를 살펴보자.
오직 보통선거권 쟁취를 향해
그림 ) 스웨덴 노동운동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팔름
19세기 후반에만 해도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산업화가 원숙기에 달한 1870년대에 스웨덴에서는 인구의 70% 이상이 농민이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이 나라의 빈농들은 이웃 나라 덴마크로, 머나먼 미국으로 떠났다. 덴마크의 사회주의 작가 마틴 넥쇠의 소설을 영화화한 <정복자 펠레>는 무작정 덴마크로 흘러 들어온 가난한 스웨덴인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펠레는 나중에 성장해서 덴마크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된다).
이런 스웨덴도 1880년대부터 서서히 산업화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물론 이와 함께 노동운동도 성장하기 시작됐다. 1881년 재단사 아우구스트 팔름이 ?사회민주주의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공개적인 사회주의 선동을 시작했다. 그 내용은 대체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3년 뒤인 1884년에는 <사회민주주의연합>이라는 사회주의자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다음해에 <조치알 데모크라텐(사회민주주의자)>이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그리고, 다시 4년 뒤인 1889년에는 이 조직을 골간으로 <사회민주노동당(SAP)>이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스웨덴 사회민주당 100여년 역사의 시작이다.
이 당에도 창당 당시부터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존재했다.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악셀 다니엘손의 그룹은 상대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선거 참여를 긍정했으나, 선거 참여의 기본 의의는 선거를 통해 부르주아 지배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고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부지방에 기반을 둔 얄마르 브란팅의 그룹은 보통선거권의 쟁취를 중요하게 여겼고, 선거를 집권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다.
창당 당시부터 SAP의 노선을 주도한 것은 사실상 브란팅의 노선이었다. 그는 이미 창당 3년 전인 1886년, 예블레 노동자클럽에서의 연설 ?왜 노동운동은 사회주의적인 것이어야 하는가??를 통해 당 강령의 윤곽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 핵심은,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분명히 하되, 스웨덴과 같은 후진국에서는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전까지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한시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SAP는 보통선거권과 8시간 노동제의 쟁취를 놓고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인 자유당과 협력했다. 여기에는 자유당 당수 칼 스타브와 브란팅이 웁살라대학 동창 사이였다는 야사(野史)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좌파인 다니엘손 등은 이러한 당 노선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가? 36세로 요절하기까지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투사 다니엘손은 브란팅의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였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역사적 선택이 벌어진다. 1891년의 옥중서신에서 다니엘손은 브란팅의 의회주의 노선을 승인했다. 이 글에서 다니엘손은 사회주의 운동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근본 모순, 즉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목표’와 노동계급의 당면 요구라는 ‘현실적 운동’ 사이의 긴장을 직시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한 해결책으로,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SAP의 사회주의 선전 활동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노동계급의 당면 요구들을 내걸고 제도 정당으로 활동하는 길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다니엘손의 주장에 그다지 새로운 점은 없다. 이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카우츠키주의(강령과 현실 운동 사이의 긴장의 ‘통합’이라기보다는 ‘봉합’)의 스웨덴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가 1897년에 작성한 SAP의 최초의 공식 강령(그 전까지는 당내의 이견 때문에 강령을 채택하지 않았다)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 강령을 판박이한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스웨덴 노동계급의 당은 독일의 형제당에 비해 한 걸음 앞서 있었다. 독일에서는 18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논쟁을 통해 분명해진 사회주의 운동의 모순(‘목표’와 ‘운동’ 사이의 긴장)이 스웨덴에서는 이미 1890년대 초반에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당내 좌파 지도자인 다니엘손은 ‘투항’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게 개혁주의와 의회주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자신은 “내키지 않는 의회주의자”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덕분에 SAP는 브란팅의 지도 아래 일단 보통선거권 쟁취라는 전략적 목표에 일로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선거권 쟁취라는 전략 목표를 지향한다는 전제 아래, 정치총파업 등의 과감한 전술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직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정치총파업 전술이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기 전인 1902년에 이미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3일간의 총파업을 주도했고, 1905년과 1907년에도 정부에 총파업을 경고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회주의 노선에 종속되는 제한적인 대중투쟁 전술이었다.
의회주의,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하지만, 브란팅과 SAP의 의회주의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의회주의이면서도 그것은 의회주의‘만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브란팅의 개혁주의 노선은 J. 조레스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이 선거와 의회를 통한 집권을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노동계급의 성장에는 ‘양육’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교육’이 아니라 ‘양육’이라는 표현을 썼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력으로 기존 권력을 무너뜨린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노동계급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존 지배세력을 능가하는 조직적?지적?도덕적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교육과 훈련의 과정을 브란팅은 ‘양육’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지배를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은 그들의 적보다 조직적?지적?도덕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투쟁과 노동조합투쟁에서, 그리고 우리가 어렵게 건설한 협동조합운동에서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자기희생, 지적 능력, 지식, 그리고 성숙함을 손아귀에 움켜쥘 때 가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은 분명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주의적 투쟁방식을 통해 부르주아사회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개혁을 추동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브란팅. 이병천?김주현 엮음,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75쪽에서 재인용.
브란팅이 보기에, 이러한 노동계급의 단련을 위해서는 의회 정치를 통해 지금 이 사회 내에서 노동계급 활동의 지반을 확보해야 하고 일련의 개혁을 통해 이를 확장해가야 한다. 일회성 대중 봉기만을 추구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의회정치적 투쟁이 제공해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전 노동계급을 교육시키고 조직한다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 따라 선택한 의회주의이기 때문에 이는 제도정치활동에 완전히 종속되지만은 않는 또 다른 차원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선거에서 수를 불려가기 위한 의원단 활동이 당 활동의 전부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노동계급 대중 자신의 능력을 제고하는 활동이 당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다.
단순히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환상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탄압국면에서도 사회생활 전반에 걸친 확고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종국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 - 사회민주노동당 신문 <자유> 1918년 7월 2일자. 위의 책 145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활동은 구체적으로 ‘노동자코뮌’이라는 독특한 당 지역조직을 통해 나타났다. 노동자코뮌은 이탈리아의 ‘노동회의소’와 유사한 지역 노동자 단체들의 연합이었다. 노동자코뮌에는 SAP 지부들, 노동조합의 지역조직들뿐만 아니라 자유교회운동(국교회에 반대하는 진보적 개신교 운동), 금주운동 등의 당대의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까지 결합했다. 본래 SAP에는 독자적인 지역조직들이 있었다. 그러나 SAP는 1901년부터 아예 지역조직들을 없애고, 노동자코뮌이 당의 기초단위 역할도 겸하는 것으로 당헌을 바꾸었다.
노동자코뮌은 이탈리아 노동회의소의 ‘노동자회관’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집’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민중의 집 사업 중 단연 으뜸은 교육?문화활동이었다. 민중의 집에서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오는 스웨덴 노동자교육협회(ABF)의 노동자 강좌뿐만 아니라 노동조합학교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학습모임들이 열렸고, 당과 노동조합의 잡지사, 신문사들이 입주해 있었다.
지방에서 노동자코뮌이 단순히 정치적 활동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조직들은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며 각종 문화적 행사를 주도하였다. 노동자코뮌은 ‘민중의 집’을 설립하였으며, 이 안에 영화관, 도서관 등을 설치하였고, 문학강좌도 개설하였다. 민중의 집 수는 1890년에 2개, 1900년에 22개, 1905년에 53개 그리고 1910년에는 112개로 각각 증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자들, 특히 노동조합원들이 민중의 집이라는 문화적 공간의 활용을 통하여 사민당에 대한 정체감을 확고히 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공공영역으로 기능하였다. - 안재흥,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 안병직 외 ?유럽의 산업화 노동계급? 401쪽에서.
그림 ) 브란팅을 기념하는 석상
더욱 흥미로운 것은 SAP가 의식적으로 노동자코뮌을 통해 당과 노동조합의 경계를 허무는 전략을 펼쳤다는 점이다. 사실 SAP는 창당 당시부터 노동조합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노동계급의 대표체로서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노동조합의 성장을 흰 눈으로 바라본 독일 사회민주당의 경우나 노동조합운동 측에서 당에 대해 의식적인 거리 두기를 한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우와는 달리, 스웨덴에서는 당이 노동조합의 성장을 적극 지원하는 입장을 보였다. 1898년에 노동조합총연맹(LO)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SAP가 사실상 비공식적인 노동조합 전국조직의 역할을 떠맡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노동조합운동이 제 발로 서기 시작하자 당은 노동조합운동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당 지도부와 노총 지도부 사이의 의식적인 분리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부 단위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의 실험이 진행됐다. 스웨덴의 당과 노동조합은 모든 조합원이 최소 2년 동안 노동자코뮌 회원으로 의무 가입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에서 말한 대로, 당의 독자적 지역조직들을 없애고 노동자코뮌을 당 지역조직으로 인정한 것이다. 결국 중앙 수준에서는 당과 노동조합의 분리가 추진된 반면, 지역 수준에서는 오히려 당과 노동조합의 경계가 사라진 셈이었다. 애초 창당 당시부터 수많은 직업별 노동조합들이 SAP에 집단 가입해왔으나(창당 2년만인 1890년에 이미 71개의 직업별 노동조합이 집단 가입했다), 20세기 벽두의 이 결정을 통해 ‘당원’과 ‘조합원’의 차이는 더욱 희미해졌다.
SAP는 바로 이러한 실험을 통해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과 노동조합의 현실 ‘운동’ 사이의 융합을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조직 생활을 통해 실현하려 했다. 물론 이는 둘을 서로 만나게 하는 제3의 축을 전제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코뮌의 교육?문화활동이었다. 만약 이 축이 없었다면,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비슷하게 조합원의 집단가입제도를 채택한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운동의 현재 수준에 제한되는 ‘이념 없는’ 노동자정당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노동자 교육?문화운동이 이뤄짐으로써 오히려 일반 조합원이 사회주의 이념에 접근하고 결국 당 강령의 정신이 더욱 공고해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는, “당과 노동조합, 노동자문화운동이 노동계급운동의 세 축”이라던 A. 그람시의 주장을 이미 20년도 더 전에 실천해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공 뒤의 위기 - ‘목표’ 없는 정당
스웨덴 노동운동은 착실한 성장을 거듭했다. 1907년에는 전체 노동자의 48%가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조직률이었다. 또한 기존의 숙련 노동자들과 새로 등장한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조장된 다른 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당과 노동조합운동 모두에서 숙련 노동자들과 미숙련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이 의식적으로 추진되었다. 새로 등장한 산업별 노동조합을 통해 미숙련 노동자들도 SAP에 집단 가입하기 시작했다.
SAP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당의 당면 목표인 보통선거권 쟁취를 향해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1907년 SAP의 보통선거권 쟁취 총파업 경고에 대해 우파 정부는 일단 남성 보통선거권만을 인정해준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브란팅이 이끄는 당 지도부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911년 총선에서부터 남성 노동자?농민 전체가 선거에 참여하게 됐다. 그리고, 1914년 총선에서는 드디어 SAP가 원내 제1당으로 부상했다.
당시의 정치구도를 보면, 보수우파의 대표자인 보수당은 유럽의 전운(戰雲)을 배경으로 군비 확충을 통한 국방력 강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SAP와 또 다른 부르주아 정당인 자유당은 대외중립을 통한 안보정책을 대안으로 주장하면서 보통선거권 확대?왕권 축소 등 민주화에 주력하자고 맞섰다.
양 세력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스웨덴은 1차 대전 내내 중립을 견지했다. 중립국 스웨덴은 오히려 전쟁 덕을 봤다. 교전국들을 상대로 한 수출산업이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1차 대전의 비극과 러시아 혁명이 몰고 온 사회적 격동은 스웨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스웨덴의 이웃인 핀란드에서 러시아혁명의 직접적 영향 아래 혁명이 벌어지자 스웨덴에서도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이 폭발했다.
스웨덴 왕실과 보수당은 혁명에 직면하기보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립’을 용인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막아보려 했다. 1917년 가을 자유당과 SAP의 연립정부가 출범했다. 수상은 자유당의 닐스 에덴이었고, SAP의 브란팅이 재무상으로 입각했다. 그리고, 다음해 국왕은 임시의회를 소집하여 여성에게도 보통선거권을 인정하는 헌법 개정을 단행했다. SAP가 전략적 목표로 삼았던 보통선거권 쟁취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림 ) 얄마르 브란팅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은 분당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자유당과의 연정에 반발하여 당 청년조직을 중심으로 집단탈당사태가 벌어졌다. 이들 청년좌파는 당시 막 진행되던 러시아혁명에 공감과 연대를 표시하면서 새로운 좌파정당 <사회민주주의좌익당>을 창당했다. 만 명의 당원과 15명의 의원이 이 새 당으로 이동했다. 사회민주주의좌익당은 8% 정도의 결코 적지 않은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당에서 다시 공산당이 떨어져 나오면서 SAP 왼쪽의 정치공간은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혼돈에 휩싸이고 만다.
1920년 5월 브란팅은 드디어, 비록 소수파 정부이긴 하지만, SAP 단독 집권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창당 30여년만에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보통선거권 쟁취라는 목표는 이미 완수했다. 당 내외적으로 천명해온 그 다음 목표는 바로 사회주의 강령의 추진, 즉 주요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사회화 정책이었다. 하지만, SAP는 원내에서 여전히 자유당과의 협력에 의존해야 했다. 자유당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 과연 사회화 정책을 추진하는 게 가능할까?
SAP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당들과 마찬가지로 우선 <사회화위원회>와 <산업민주주의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스웨덴 현실에 부합하는 사회화 정책을 찾겠다며 토론과 연구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는 사회화위원회의 세미나 대상으로 왜소화됐다. 세미나의 결과물이 늦게 나오면 나올수록 SAP는 보통선거권 쟁취 이후 별다른 개혁의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알리바이를 연장할 수 있었다. 당원들이 “도대체 언제 사회화 정책이 시작되는 건가?” 하고 물으면, 당 지도부는 “사회화위원회의 성과를 기다려보자”고 답할 뿐이었다.
브란팅 정부가 감행한 가장 의미 있는 개혁은 대외 중립 정책을 계속 유지하고 군축을 단행한 것이었다. 이로써 SAP는 보수당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 평화?중립의 전통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이는 또한 브란팅의 최후의 업적이기도 했다. 그는 1925년 의회에서 군축 선언을 통과시킨 것을 끝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그를 떠나보낸 당은 침체와 위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 당의 혼란과 무능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당시의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SAP는 균형재정을 이뤄야 한다는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집행했다. 유럽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는 어차피 미래의 어느 때에 붕괴할 것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 노동자정당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이해에 피해를 입히는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균형재정을 달성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회민주당이 추진하는 제반 개혁도 이러한 소극적 재정정책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현재’ 이들이 집행하는 경제?사회정책과 ‘미래’의 사회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었다. 최소한 정부 정책에 관한 한 사회민주주의는 또 다른 이름의 ‘시장자유주의’였다.
스웨덴의 경우 이러한 무능은 더욱 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수출산업의 호황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내내 스웨덴에서는 실업난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실업률이 한 번도 10%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고, 한때는 LO 조합원의 1/3이 실업자 신세였다. 하지만, ‘민주화’는 이미 이루었지만, ‘사회화’는 먼 미래로 연기한 이 정당, 사회민주노동당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1920년대 자유당과의 협력기간 동안 SAP는 ‘이념 없는 정당’이었고, ‘방향을 상실한 정치세력’이었다.
‘개혁주의’를 넘어선 ‘개혁’
그림 )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사진은 그를 기념하는 대회 포스터.
새로운 길은 도전으로부터 나왔다. 그 도전을 이끈 사람은 1919년 당대회 이후 당내 좌파의 지도자로 부상한 재무장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였다. 그는 당 청년조직 출신이었으나 1917년 분당 사태 당시 일단 당에 잔류하는 길을 선택했다. 1919년 당대회에서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분명히 한 ?예데보리 강령 초안?을 제출했다. 그 3대 원칙이란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계급의 당명 요구를 충족하는 것과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당 정책 수립의 기본 목표다. 2.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은 부의 공평 분배를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 3. 생산과 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대안이 제출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의 당면 개혁 정책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러한 낯선 사고는 브란팅 등 당 지도부의 격렬한 비판을 야기했다. 후에 비그포르스는 당시 자신이 “사회를 전복하려는 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비그포르스 사상의 핵심은 ‘당면 개혁 정책’과 ‘대안 사회의 건설’ 사이에 만리장성을 긋는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론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미 진보적 역량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의식적 노력 없이는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없다. 좌파정당의 개혁 정책은 바로 이러한 제도를 뜯어고치는 의식적 활동이어야 한다. 개혁은 자본주의의 틀에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핵심에 손을 대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개혁’은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던 ‘점진적 혁명’과 유사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개혁론은 이후 등장하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구조개혁’ 전략과도 맥이 닿는 것이었다.
그럼 실업대란에 처한 스웨덴의 상황에서 SAP가 착수해야 할 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비그포르스는 당시 영국의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국가의 경제개입을 주장하고 자본주의 소유권에도 손을 댈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하는 데 주목했다. 어찌 보면 이들이 동시대의 사회민주주의자들보다 훨씬 ‘좌파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주목한 사회적 자유주의자들 중의 한 명이 바로 J. M. 케인즈였다.
그림 ) 페르 알빈 한손
비그포르스는 우선, 스웨덴의 자유주의자들도 과연 영국의 수정자유주의자들에게 동조할지를 일단 시험해보기로 했다. 1928년 그는 재무장관으로서 의회에 강력한 상속세 법안을 제출했다. 참으로 난데없는 도발이었다. SAP의 오랜 파트너인 자유당은 그를 ‘미친 재무장관’이라고 부르며 완강히 반대했다. 결론은 분명했다.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이 아니라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서만 진지한 개혁이 착수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상속세법 사태 직후 열린 그 해의 당대회에서 비그포르스는 이제 자유당과의 협력을 끝내고 최소한의 당 강령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을 때 정권을 담당하자는 안을 제출했다. 브란팅의 후계자인 페르 알빈 한손 등 당 지도부는 처음에 이 제안에 반대했으나, 당대회 과정에서 비그포르스안이 극적으로 통과됐다. 당은 정부에서 철수했다. 당은 불만에 찬 민중들의 광야로 돌아왔다. SAP의 한 시대가 이렇게 해서 끝났다. ‘타협의 정치’에서 이제 ‘대결의 정치’가 시작됐다. 그리고 바로 이 선택이 스웨덴의 오늘이 있게 하고, SAP를 역사의 승리자로 만들었다.
1931년에 세계경제공황이 스웨덴에도 확산됐다. 스웨덴 수출산업의 상징이던 이바르 크로이거의 자살사건은 스웨덴 자본주의를 이끌던 수출재벌들의 몰락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크로이거 사건을 계기로 자유당과 재벌들 사이의 정경유착이 드러남으로써 자유당은 일대 위기를 맞이했다. 가뜩이나 실업난으로 고통받던 노동자?민중에게 세계대공황은 재앙이었다.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가 분출했고, 군대가 동원됐다. 급기야 아달렌이라는 한 지방도시에서 군대의 발포로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SAP와 공산당은 즉각 공동전선을 형성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1932년 총선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SAP는 이 총선에서 공공사업에 대한 획기적인 지출을 공약했다. 국가가 경제활동에 전면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비그포르스는 이를 ‘계획경제의 도입’이라고 규정했다. SAP 자신에 의해 먼 미래의 과제로 치부된 ‘사회화’ 대신에 이제 ‘계획경제의 도입’을 통하여 실업 극복 등 노동계급의 당면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대안 사회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겠다는 것이었다.
이 총선에서 SAP는 비록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새로 14석을 확보하고, 처음으로 4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SAP만의 소수 정부가 출범했다. 이 정부는 ‘투쟁의 정부’라 불렸다. 다시금 재무장관으로 입각하게 된 비그포르스는 “지금 나는 기꺼이 투쟁하기를 원하며 또 통치하기를 원한다. 나는 17년 동안 이 두 가지를 마음속 깊이 간직해왔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 정부가 사회민주당 장기 집권의 첫 출발이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페르 알빈 한손 수상이 이끄는 새 정부는 약속한 대로 도로 건설 등 대대적인 공공사업에 착수했다. 그와 함께 주택 건설 보조금, 실업보험, 국민연금, 노동시간 단축, 신혼부부?육아 수당, 2주 유급휴가 등 복지국가의 기초가 된 사회개혁들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당을 대신하는 새로운 연합 대상이 등장했다. 1차 대전 후 새로 등장한 농민정당인 <농민동맹>이 그들이었다. 이 당은 농산물 가격 보장을 전제로 SAP의 재정확장정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치세력이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제압하는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자계급 주도의 노농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1933년, 드디어 SAP와 농민동맹 사이에 역사적인 협정이 맺어졌고, 연정이 출범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그람시가 그토록 열망했던 노농동맹의 스웨덴식 실현이었다.
자본가들 내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헤게모니를 상실한 수출 재벌들 대신에 내수부문 자본가들이 스웨덴경영자단체(SAF)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내수부문 자본가들의 주도로 SAF와 LO 사이에 대타협이 이뤄졌다. 1938년 두 단체의 대표들 사이에서 역사적인 ‘살췌바덴 협정’이 체결됐다. 스웨덴 자본가들은 SAF와 LO의 중앙교섭을 받아들였다.
SAP의 의석은 계속 증가했다. 1938년 총선에서는 드디어 단독 과반수 확보에 성공했다. 농민동맹과의 연정은 거의 75%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SAP의 득표율은 1940년 총선에서 53.8%라는, 좌파정당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수준으로까지 치솟았다. 한손 수상은 스웨덴을 ‘민중의 가정’으로 만드는 게 SAP의 목표라고 선언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스웨덴은 이렇게 그 첫 걸음을 뗐던 것이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약속 ― ‘끊임없는 개혁’
스웨덴 경제는 1933년 초부터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연 SAP의 재정확장정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2차 대전을 앞둔 유럽 각국의 군비경쟁으로 인해 스웨덴이 다시 수출 호황을 맞았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계속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SAP의 과감한 개혁 정책 덕분에 스웨덴에서는, 경제위기를 틈탄 극우 파시스트 세력의 성장이 미연에 차단됐고, 지금까지도 굳건히 지속되는 노동계급의 헤게모니가 다져졌다는 것이다.
물론 유독 스웨덴에서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체제의 긴장과 대결로부터 한 발 비껴날 수 있었던 스웨덴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덕분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예를 들어 비슷한 노선을 취하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전쟁과 국내외 파시즘의 압박에 결국 굴복해야만 했던 데 반해,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오히려 전쟁 덕분에 호황을 맞이하고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성취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도 이 나라 노동운동의 적절한 주체적 선택이 없었다면 그 이점을 그 정도로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스웨덴 노동계급의 성취가 사회민주주의의 주 내용으로 알려져 있는 ‘타협의 정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의식적으로 단절한 ‘대결의 정치’의 산물이라는 역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계급타협체제라는 것은 그 역사적 대결의 성과물일 따름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비그포르스는 이후에도 대결의 정치가 중단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세의 전과(戰果)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더 높은 수준의 공세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끊임없는 개혁’, 그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미뤄두었던 과제, 소유의 사회화와 작업장 민주주의로까지 이어져야만 한다.
실제로 SAP는 1950년대까지 부유세 실시, 보충연금기금 도입 등 개혁정책을 지속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가 주장한 높은 수준의 개혁은 1970년대에야 또 다른 세계경제위기 정세 속에서 현안으로 등장했다. 비그포르스의 후계자 루돌프 마이드너의 ‘임노동자기금안’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복지국가가 스웨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비그포르스의 ‘끊임없는 개혁’도 아직 그 여정이 끝난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다.
* 참고할만한 책들
- A. 스터름달, ?제11장: 스웨덴 노동운동의 성공?,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황인평(황광우) 옮김, 풀빛, 1983.
- 신정완, ?제2장: 임노동자기금 논쟁 이전의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경제이념 및 경제?사회정책의 발전과정?, ?임노동자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여강, 2000.
- 안재흥, ?제4장: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 안병직 외,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 까치, 1997.
- 이병천?김주현 엮음,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스웨덴의 경우?, 백산서당, 1993.
- 이헌근, ?스웨덴 사회민당의 정강정책 변화 연구?,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 조기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연구: 그 성취와 한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1994.
- 조행복,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실업정책 1918~1934?,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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