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8. 15:16ㆍ이런저런 이야기/책 속에 길이 있다
이스터 섬(Easter Island)
300만년 전 화산 폭발로 생겨나 70여개의 크고 작은 분화구가 남아 있고, 거석문화와 폴리네시아 유일의 문자가 있었던 섬으로 1888년에 칠레령이 된, 안면도 크기의 작은 섬. 칠레 본토에서 3790㎞ 떨어진 섬의 공식 이름은 이슬라데파스쿠아. 그러나 이 섬의 원주민들은 라파누이(Rapa Nui), ‘거대한 땅’이라 부른다. 가장 흔하게는 이스터섬(1722년, 네덜란드 탐험가가 상륙한 날이 부활절이었기 때문이다)이라고 불리는 곳이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이 섬이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 물론 거대한 모아이 석상 때문이다. 섬에는 서 있는 모아이 288개, 채석장의 모아이 397개를 비롯해 총 887개의 모아이(moai)상이 남아 있다. 부족장이나 중요한 인물의 몸을 상징하는 모아이는 항상 바다를 등지고(단 한 곳만 예외다) 마을을 품어 안는 위치에 세워진다. 마을과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섬 주민들이 오랫동안 신성한 산으로 여겨온 라노 라라쿠 산은 바로 모아이를 만들던 채석장. 이곳에 있는 ‘자이언트’라 불리는 모아이는 키가 21.6m에 무게가 160t 이상에 이른다.
미완성으로 누워 있는 이 거대한 모아이를 보고 있자면 이 섬의 멸망을 둘러싼 제레드다이아몬드의 주장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최근에는 다른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섬의 문명붕괴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유럽인들의 원주민 노예화와 폴리네시아에서 건너온 쥐떼의 극성이 이 섬을 황폐화시켰다는 이론이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간에 라파누이는 여전히 신비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 거대한 석상을 어떻게 바닷가로 옮겼을까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여서 외계인 제작설까지 등장했었다.
(글 : 경향신문 기사 일부 발췌 / 사진 : trasyy.livejounal.com)
이스터 섬의 종말 제리드 다이어먼드
|
제리드 다이어먼드 (Jared Diamond) - 저널리스트. 이 글의 출전은 과학잡지 Discover 1995년 8월호이다. |
이스터 섬 사람들은 단 몇세기만에 숲을 박살내고, 그들의 작물과 짐승들을 멸종시켰으며, 복잡하게 얽힌 자신들의 사회구조가 혼돈과 카니발리즘으로 뒤덮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우리들도 이들의 경험을 따르려는 것인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미스터리들은 사라져버린 문명이 남긴 것일 것이다. 마야의 크메르나 아나사지 유적을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문을 갖게 된다. 저런 구조물을 세웠던 사회들이 왜 사라져버렸을까? 문명의 소멸은 다른 동물, 예를 들어, 공룡의 멸종과 같은 사건보다 훨씬 우리에게 인상적이다. 사라진 문명의 모습이 아무리 이국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구성원은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들 역시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될지 그 누가 알 것인가? 어쩌면, 언젠가는 뉴욕의 초고층 빌딩들도 그 흔적들만 남아서 잡초들에 뒤덮이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앙코르왓트나 티칼 사원들처럼 말이다. 그런 모든 사라진 문명들 중에서 이스터 섬의 초기 폴리네시아 사회는 그 불가사의함과 고립성에 있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한다. 그 불가사의함은 섬에 서있는 거대한 석상들과 황량한 땅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그 문명을 이룩했던 사람들과 연관되어 더욱 확대된다. 폴리네시아는 우리에게 이국적인 낭만의 궁극적인 이미지로 남아서 모든 이들이 그리는 낙원의 모습과 연결된다. 이스터 섬에 대한 나의 관심은 30여년 전에 콘-티키로의 여행을 기술한 도르 하이어달의 유명한 책을 읽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내가 이스터 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영웅의 여행담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힘든 조사와 분석의 결과였다. 나의 친구이자 고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스테드만은 여러 명의 동료 연구자들과 이스터 섬에서 그 곳에서 살았을 동식물들을 조사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업은 우리들에게 매우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 되었다. 이스터 섬은 그 면적이 겨우 64평방마일로,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인간 거주지이다. 이 태평양 상의 섬은 가장 가까운 대륙--남아메리카--으로부터 2,000마일 떨어져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살 수 있는 섬--피트칸 섬--으로부터도 1,400마일 떨어져 있다. 아열대에 위치함으로써--적도를 가운데 두고 휴스턴과 정 반대의 위도에 있다--기후가 온난하고, 화산섬이기 때문에 그 토양이 비옥하다. 이런 축복받은 환경에서라면 이론적으로는 지상 낙원 같은 곳이었을 것이며, 또한 고립되어 있어서 다른 세계의 문제들 때문에 골치 아플 필요도 없었으리라. 섬의 이름은 네덜란드의 탐험가인 야콥 로게벤이 1722년 부활절 날(4월 5일)에 처음 발견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지어졌다. 로게벤의 섬에 대한 첫 인상은 낙원이라기보다는 불모지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 우리는 이스터 섬이 모래 섬이라고 생각했다. 말라버리고 탄 식물 줄기들과 짚더미를 모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버려진 것 같은 모습은 빈곤과 황량한 인상을 주었다." 로게벤이 본 것은 10피트를 넘는 나무나 넝쿨 하나 없는 초지였다. 오늘날 식물학자들은 이스터 섬의 식물들 중에서 그보다 높은 종류의 식물을 단지 47종만 발견했다. 그 중에서도 단지 두 종류만이 나무이고 또 두 종류만이 관목이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로게벤 일행이 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서늘하고 축축하며, 바람이 많은 이스터 섬의 겨울 날씨를 견디기 위해 불을 지필 만한 땔감을 구할 수가 없었다. 섬에는 또 곤충보다 큰 동물이 없었다. 도마뱀이나 새, 작은 뱀 같은 것이 전혀 없었고, 가축으로는 오직 닭만 있었다. 18-19세기의 유럽 탐험가들은 이스터 섬의 인구를 2,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는 섬의 토양의 비옥함을 감안했을 때에 적절한 숫자였다. 1774년에 섬에 도착한 제임스 쿡 선장은 섬의 주민들이 폴리네시아인들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쿡과 동행한 타히티인이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인들이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는 민족이라는 명성과는 달리, 로게벤이나 쿡이 만났던 섬사람들은 헤엄치거나, 로게벤이 묘사하기로는 "썩 볼품없는 엉성한" 카누를 타고 그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이 이용하고 있었던 배는 "많은 작은 판자들과 나무껍질 속을 잘 꼰 실로 묶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틈 사이를 막을 지식과, 특히 재료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카누들은 물이 새기 쉬웠고, 그런 이유로 그들은 배를 타고 있는 동안 내내 물을 퍼내야 했다." 그 카누들은 길이가 단지 10피트 정도로 두 명만을 태울 수 있을 만한 크기였는데, 그나마도 온 섬 전체에 겨우 서너척 정도만 보였다. 그런 엉성한 배로 폴리네시아인들은 가장 가까운 섬으로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해안에서 멀리까지 고기잡이를 하러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로게벤이 만났던 섬 주민들은 다른 세계에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그 이후의 많은 조사에도 불구하고 섬사람들이 외부와 접촉을 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스터 섬의 어떠한 산물도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 없었고, 섬에도 원주민들이나 이후 방문하게 된 유럽인들이 가져온 것이 아닌 어떠한 외부의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터 섬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260마일 떨어진 산호초 '살라 이 고메즈'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곳은 물론 물이 새는 그들의 카누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대체 섬사람들의 조상은 어떻게 그 먼 산호초까지 갈 수가 있었으며, 또 애초에 어딘가로부터 이스터 섬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스터 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해안을 따라 있는 거대한 돌받침 위의 거대석상으로, 한 때 200개가 넘는 석상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700개의 제작 도중의 석상들이 채석장이나 그곳으로부터 세워질 장소로 이동하는 길 위에 버려진 채로 있었는데, 마치 석공들이나 인부들이 일하는 도중에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춘 것 같았다. 서 있는 대부분의 석상들은 최대 33피트의 높이와 82톤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채석장으로부터 멀게는 6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한 것이었다. 반면 버려진 석상들은 그 길이가 최고 65피트에 무게가 270톤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돌받침 역시 거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500피트의 길이에 10피트나 되는 높이, 석상을 안치시킨 판은 무게가 10톤이나 되었다. 로게벤은 곧 석상의 존재가 제기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석상들의 모습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기계구조를 만들 수 있는 큰 통나무도 없을 뿐 아니라 튼튼한 줄을 만들 재료조차 없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거대한 것들을 세울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게벤은 섬사람들이 수레바퀴나 짐을 끌 만한 짐승, 그리고 그들 자신의 근육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에너지원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일 법도 했다. 대체 그들은 무슨 수로 그런 석상들을 몇마일이나 옮길 수 있었단 말인가. 일으켜 세우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더욱 불가사의한 점은 1770년 당시에만 해도 석상들은 서 있었는데, 1864년경에 이르러서는 섬사람들 스스로 석상들을 모두 끌어내려버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그런 것들을 만들었던 것인가? 석상들은 로게벤이 1722년에 처음 보았던 섬 사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단지 그 석상들의 숫자와 크기만으로도 2,000명보다는 훨씬 많은 수의 인구가 섬에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또한 사회는 매우 조직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스터 섬의 자원들은 섬 전역에 걸쳐서 흩어져 있다. 석상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바위는 이스터 섬의 동북단에 가까운 라노 라라쿠에서 구할 수 있고, 몇몇의 석상들을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관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붉은 돌은 남서 내륙의 푸나 파우에 있다. 돌을 조각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은 대부분 북서쪽의 아로이에서 출토된다. 또 경작하기에 좋은 땅은 남쪽과 동쪽에 있으며, 고기잡이에 가장 적합한 지형은 북부와 서부의 해안이다. 각처에서 자원을 수집하고 분배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정치적 조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조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며, 이런 황량한 땅에서 어떻게 그런 조직사회가 가능했을까? 이스터 섬의 미스터리는 250여년 동안 많은 추리와 가설들을 만들어냈다. 많은 유럽인들은 '야만인'에 불과하다고 알려졌던 폴리네시아인들이 그런 석상들이나 아름답게 장식된 돌 받침들을 만들었으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1950년대에 하이어달은 대서양을 통해 유럽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인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폴리네시아를 식민지화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이어달의 뗏목여행은 선사시대의 대양항해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는 외계 생명체의 지구 방문 사실을 믿는 스위스 작가 에리히 폰 데니켄은, 이스터 섬의 석상들은 외계 생명체들이 초현대적 도구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들이 이스터 섬에 조난했을 것이며, 후에 결국 구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이어달이나 폰 데니켄은 모두 이스터 섬의 사람들이 아메리카로부터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아시아인들로부터 비롯된 전형적인 폴리네시아인들이며, 그들의 문화--석상들도 포함하여--또한 폴리네시아 문화를 기원으로 한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무시했던 것이다. 특히 이스터 섬의 주민들은 하와이 제도나 마르케산 등 동폴리네시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단어들의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그들이 A.D. 400년부터 고립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의 낚시 바늘이나 조각 도구는 마르케산의 초기 유물들과 흡사하다. 작년에 12구의 이스터 섬의 유골에 대한 DNA검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 그들은 확실한 폴리네시아 사람들로 판명되었다. 섬사람들은 바나나, 타로토란, 고구마, 사탕수수, 종이뽕나무와 같은 전형적인 폴리네시아 작물--대개 서남아시아에서 비롯된--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가축인 닭도, 최초의 이주민들의 배로 같이 들어오게 된 쥐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폴리네시아의 것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아시아인들의 것이었다. 그 이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환상으로 가득 찬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지만, 결국 체계적인 연구는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고고학, 꽃가루 분석, 그리고 고생물학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현대 고고학의 이스터 섬에 대한 발굴은 1955년 하이어달의 탐험 이후 계속되어왔다. 탄소 방사성 동위원소 조사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인간의 흔적이 나타나는 연대는 A.D. 400년에서 700년 사이였는데, 이는 언어학자들이 주장하는 400년이라는 이주 시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석상을 세우는 작업이 가장 활발했던 것은 1200년으로부터 1500년 사이인데, 그 이후에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지의 밀도는 많은 인구를 암시한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7,000명 정도로 추정하지만, 많게는 20,000명을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섬의 넓이와 그 토양의 비옥함으로 볼 때 결코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남아있는 섬사람들을 동원하여 어떻게 석상들이 조각되고 세워진 것인 지를 알아내려 했다. 20명이 단지 조각칼만을 이용해서 완성된 석상 중 가장 큰 것과 같은 석상을 일년내에 완성할 수 있었다. 튼튼한 줄을 만들 만한 충분한 재료가 갖추어지자 많아야 몇백명 정도의 힘으로도 석상을 나무 썰매 위에 옮겨서 세울 위치까지 나무로 만든 선로 등을 이용하여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줄은 하우하우라고 불리는 보리수와 비슷한 종류인 섬의 작은 나무를 이용하여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무는 현재 이스터 섬에서는 극히 희귀하다. 석상을 끌기 위해서는 수백야드의 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이스터 섬이 지금처럼 황량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화분(花粉)을 분석하는 기술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늪이나 연못의 퇴적층을 조사하는 것인데, 물론 가장 최근의 퇴적물들은 위에, 그리고 오래된 것일수록 밑에 쌓여있다. 각 퇴적층의 정확한 연대는 탄소 방사성 동위원소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고 나면 힘든 작업이 시작된다. 수천, 수만가지의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일일이 조사하여, 그것들을 헤아리고, 각각의 꽃가루들의 종류를 이미 알려진 현대의 식물종의 그것과 비교하는 작업이다. 이스터 섬에 대한 조사는 현재 뉴질랜드 매시대학의 존 플랜리와 영국 헐대학의 새라 킹이 수행했다. 플랜리와 킹의 고된 노력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이 이스터 섬의 과거에 존재했었음을 밝혀냄으로써 보상받게 되었다. 이스터 섬은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오기 적어도 30000년 전, 그리고 이주 초기에는 황폐한 땅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에 울창한 아열대 숲이 초지 위에 펼쳐진 곳이었다. 숲에는 데이지 나무, 줄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하후하우 나무, 그리고 땔감으로 사용하기에 좋은 토로미로 나무 등이 있었다. 숲에서 가장 흔한 나무는 소나무 종류였는데, 지금은 이스터 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무였다. 이 소나무는 너무나 흔해서 조사를 위해 수집한 퇴적물의 바닥에는 그 화분(花粉)으로 가득했다. 이 이스터 섬의 소나무는 지금도 남아있는 칠레의 소나무와 유사한 종류의 것으로, 칠레 소나무는 82피트의 높이에 직경은 6피트나 되기도 하는 것이다. 키가 크고 쭉 뻗은 이스터 섬의 소나무는 석상들을 이동시키고 세우는 데나 커다란 카누들을 만드는 데에 이상적인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또한 중요한 식량 공급원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칠레 소나무의 경우 식용의 열매뿐만 아니라 그 수액(樹液)으로 설탕, 시럽, 꿀 그리고 술까지 만들어 먹는다. 이스터 섬의 사람들은 소나무 시럽 말고 또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뉴욕 주립박물관의 데이비드 스테드만은 최근의 발굴을 통해서 이스터 섬의 동물계 또한 지금과 비교하여 놀라운 것이었음을 밝혀냈다. 처음 스테드만은 이스터 섬에 대해서 다른 폴리네시아 유적의 발굴 경험을 토대로 예상하였다. 대개의 폴리네시아 유적에서는 생선이 주요한 식량으로 나타나서 고대의 쓰레기 더미의 90% 정도를 생선의 뼈가 차지했다. 그러나 이스터 섬의 경우에는 주변의 수온이 너무 낮아서 어류가 좋아하는 산호초가 발달하지 않았고, 언덕들이 해안을 차지하고 있어서 고기잡이가 용이하지 않은 자연조건을 갖고 있었다. 발굴 결과 이스터 섬의 초기(900년-1300년) 쓰레기 더미에서는 생선의 뼈가 전체의 4분의 1도 채 안되었다. 그 대신에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 돌고래의 뼈였다. 다른 어떤 폴리네시아 유적에서도 식량 쓰레기 더미에서 돌고래의 뼈가 1% 이상 출토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에서는 새나 포유동물로 동물성 식량을 삼았다. 지금은 멸종되어버린 뉴질랜드의 모아(moa)나 역시 사라진 동물인 하와이의 날지 못하는 기러기 등이 그 예들이다. 또 다른 섬에서는 대개 개나 돼지 같은 가축들을 기르고 있었다. 반면에 이스터 섬에서는 돌고래가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동물--사람은 제외하고--이었을 것이다. 이스터 섬에서 발견된 보통의 돌고래들은 그 무게가 165파운드까지 나가기도 했다. 돌고래들은 대개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기 때문에 낚싯대나 해안에서 창 따위로 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바다 한 가운데에서 지금은 사라진 소나무로 만든 튼튼한 배를 타고 작살을 이용해서 사냥했을 것이다. 스테드만은 또한 초기 이주민들이 돌고래 이외에 바닷새들을 먹었음을 밝혀냈다. 새들로서는 이스터 섬은 고립되어 있고, 맹금류가 없었기 때문에 번식지로서는 이상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스터 섬에서 번식한 수많은 새들 중에는 알바트로스, 부비, 군함새, 풀머갈매기, 슴새, 프라이언, 바다제비, 제비갈매기 그리고 열대조 등이 있었다. 적어도 25종의 새들이 이스터 섬에서 번식을 했으며, 이곳은 폴리네시아뿐만 아니라 전 태평양에서 가장 큰 바닷새들의 번식지였을 것이다. 바닷새들뿐만 아니라 육지의 새들도 초기 이스터 섬 사람들의 식량이 되곤 했다. 스테드만은 적어도 6종류의 새들의 뼈를 발견해냈는데, 그 중에는 올빼미, 왜가리, 앵무새 그리고 뜸부기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새들뿐 아니라 초기 이주자들과 같이 들어온 쥐들도 주요한 동물성 식량이 되었다. 이스터 섬은 전체 폴리네시아 사회들 중에서 유일하게 그 유적지에서 생선뼈보다 쥐들의 뼈가 많이 나오는 곳이다. (물론 당신은 쥐를 먹을 만하지 않은 짐승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전쟁 중의 식량 배급 시절에 실험용 쥐를 요리해 먹은 영국인 생물학자의 요리법을 기억하고 있다.) 돌고래, 바닷새, 육지의 새 그리고 쥐가 전부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바다표범의 서식지이기도 했다는 증거가 뼈 더미에서 나왔다. 이런 모든 음식들이 섬의 울창한 숲에서 구한 땔감으로 불을 피운 부엌에서 요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1600여년 전, 폴리네시아 동부로부터 오랜 항해 끝에 처음 이스터 섬에 발을 들여놓은 폴리네시아인들이 보았던 섬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은 원시 그대로의 낙원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가? 꽃가루와 뼈들은 우울한 답을 내놓고 있다. 화분(花粉) 분석에 의하면, 처음 인간이 이주해 온 지 불과 몇세기 지나지 않은 800년경에 이미 이스터 섬의 숲은 파괴일로에 있었다. 나무를 태운 숯이 퇴적층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동시에 소나무나 다른 울창한 나무들의 화분은 점점 감소하거나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에 목초의 화분이 점점 많아졌다. 1400년경에는 결국 소나무가 멸종했다. 이는 인간들이 나무를 너무 많이 베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금은 각처에서 번성하고 있는 쥐들이 그 번식을 막았기 때문이다. 섬의 동굴들에 남아있는 솔방울들은 모두 쥐들이 갉아먹어서 싹을 틔울 수 없는 상태였다. 하우하우 나무의 경우에는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가 극적으로 감소하여 줄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졌다. 하이어달이 처음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거의 다 죽어가는 토로미로 나무 한 그루만이 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 조차도 이제는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곳의 식물원에서 토로미로 나무가 자라고 있다.) 15세기는 이스터 섬의 소나무가 멸종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숲이 사라진 시기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정원을 만들기 위해 숲을 없앴다. 카누를 만들고, 석상을 이동시키고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땔감을 얻기 위해서 나무를 베었다. 또한 쥐들이 그 씨앗들을 먹어버리고, 나무들의 번식을 도울 새들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전체적인 상황은 전면적인 것으로, 숲 전체가 사라지고, 그 숲을 이루던 나무들이 모두 멸종한 것이다. 섬의 동물계의 파괴도 숲의 파괴와 같이 극단적이었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종류의 내륙새들이 멸종했다. 심지어는 조개류마저도 과도하게 채취되어 결국 조개들 대신에 바다 달팽이들로 만족해야만 했다. 고대 쓰레기더미에서 돌고래의 뼈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1500년경이다. 배를 만들 만한 나무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에 누구도 돌고래 사냥을 할 수가 없었다. 이스터 섬과 섬 해안의 작은 섬들에서 번식하던 바닷새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동물성 식량이 감소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닭을 키우는 데에 집중하였는데, 닭은 예전에는 주식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만 먹는 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가장 커다란 고기 덩어리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었는데, 후기의 쓰레기더미에서 사람 뼈는 매우 흔하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에 팽배한 카니발리즘(식인풍습)은 언어에 그 흔적이 남아있어서, 적을 향한 가장 모욕적인 말은, "너의 엄마 살이 이빨 사이에 끼었다"일 정도였다. 이 새로운 고기를 익혀 먹을 불을 때기 위해서 섬사람들은 사탕수수, 풀 따위를 사용했다. 이런 모든 증거들의 줄기는 결국 한 사회의 쇠퇴와 멸망이라는 지점을 향하고 있다. 최초의 폴리네시안 이주자들은 비옥한 토양, 풍성한 식량, 풍부한 건축재료, 충분한 영역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섬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은 번성했고, 또 그 수가 계속 늘어났다. 몇세기가 지난 후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조각한 것과 같은 석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석상들은 점점 거대해지기 시작했고, 또 10톤이나 되는 붉은 관(冠)들이 석상들에 씌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그 관(冠)들은 서로 다른 씨족집단간의 부와 권력의 경쟁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이전보다 더 큰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오늘날에도 내가 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헐리우드의 거물 영화인들이 허세로 가득 찬 저택들을 지음으로써 그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타이쿤 마빈 데이비스는 50,000평방피트짜리 저택을 지어서 다른 사람들을 눌렀는데, 곧 애런 스펠링이 56,000평방 피트의 저택을 지어서 그를 이겼다. 이스터 섬의 붉은 관(冠)들이야말로 그런 모든 건축물이 상징하는 바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스터 섬에도 자원을 재분배하고 지역의 경제를 통합하기 위한 복잡한 정치조직이 존재했다. 이스터 섬의 인구는 계속 불어나서 점차 숲이 재생산되는 속도보다 빨리 나무들을 베어내는 상황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벤 자리에 정원을 만들고, 나무들로 불을 때고, 카누를 만들고, 집을 짓고 그리고 석상을 옮겼다. 숲이 사라지면서 석상을 옮기고 세우는 데에 필요한 통나무와 줄이 떨어지게 되었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개울과 샘이 말라버렸고, 불을 지필 나무도 없어졌다. 새들, 조개류 또 바닷새들이 사라지면서 식량을 구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바다에 타고 나갈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무들이 없었기 때문에 고기잡이가 점점 줄었고, 돌고래도 식탁에서 사라졌다. 숲이 사라지면서 비와 바람에 토지가 침식되거나 바짝 말라서 토양의 양분이 고갈되었고, 그 결과 작물의 생산량도 줄었다. 닭고기와 사람고기는 이전의 다양한 식량들의 극히 일부분만을 대신할 수 있었다. 남아있는 조각상의 야윈 뺨과 다 드러난 갈빗대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렸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잉여식량이 고갈되면서, 복잡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이스터 섬의 족장, 관리 및 성직자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살아 남아있던 섬사람들은 이스터 섬에 도착한 초기의 유럽인들에게 중앙의 권력을 대신한 지역적인 혼란과 전사계급이 세습되는 족장들의 지위를 대신한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1600년에서 1700년에 이르는 전사계급의 전성기에 그들이 남긴 칼자국들이 아직도 섬 도처에 남아있다. 1700년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여 이전의 4분의 1에서 10분의 1 사이에 머물렀다. 적들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동굴에서 생활했다. 1770년경에는 서로 적대적인 씨족들이 상대 집단의 석상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1864년에 이르러서는 그 마지막 석상이 무너졌다. 이스터 섬의 문명의 쇠퇴를 생각하면 우리 모두 같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왜 그들은 그들 행위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고, 너무 늦기 전에 그만두지 않았을까? 대체 마지막 나무를 베어 넘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나는 재난이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 아주 서서히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는 수백개의 석상들을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섬의 숲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우 천천히, 수십년에 걸쳐서 사라졌다. 어쩌면 전쟁이 석상을 옮기는 작업을 방해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석상을 완성하고 나니까 섬의 줄이 동이 났을 수도 있다. 벌목의 위험을 경고하려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조각가나 관리 또는 족장들과 같이 계속 숲을 벌목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자들에 의해 억압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나무를 베는 곳에 일자리가 있다!" 라고 외치는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벌목회사들은 이러한 오래된 전통의 최신판일 뿐이다.) 숲의 면적이 점차 줄어드는 사실을 알아채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올해는 이곳의 나무들을 베었지만 저 뒤의 숲에서 또 새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지 않은가. 단지 나이든 노인들만이, 그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함으로써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나와 내 아내가 30년 전의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면 8살짜리 내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의 자손들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점점 나무들이 없어지고, 작아지고, 그리고 덜 중요한 것이 되어갔다. 마지막 남은 소나무가 쓰러질 무렵에는 이미 소나무는 섬의 경제생활에서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어린 소나무 묘목들과 덤불뿐이었다. 아무도 마지막 한 그루의 소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이스터 섬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하다. 이스터 섬은 지구의 축소판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점점 증가하는 인구 때문에 자원이 부족해져 가고 있다. 이스터 섬의 사람들이 바다로 날아갈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주로 도망할 수 없다. 만일 지금껏 우리가 해왔던 대로 계속한다면, 내 아들이 지금의 내 나이쯤이 될 무렵에는 세계의 주요 어장들과 열대우림, 화석연료와 많은 토양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매일 우리는 신문에서 기아와 결핍으로 고통받는 나라--아프가니스탄, 라이베리아, 르완다, 시에라리온, 소말리아, 옛 유고슬라비아, 자이레--들의 소식을 접한다. 그런 나라들에서 군인들이 경제권을 장악했다거나 중앙정부가 지방 세력들에게 항복했다는 소식들을 말이다. 핵전쟁의 위험이 점차 사라지면서 단 한방에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들의 의식을 전환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위기는 이제 매우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수정을 위한 행동은 정치, 경제 지도자들과 그 유권자들의 이익에 가려서 억압되고 있다. 사실 매년 아무런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는 점은 그들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해가 지나면 지구상에는 작년보다 조금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전해보다 조금 적은 자원이 남아있는 것이다. 눈을 감거나 절망적으로 포기하기는 쉬운 일이다. 불과 수천명의 이스터 주민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파괴하는 데에는 단지 석기로 된 도구와 근육의 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수십억의 사람들이 금속기구와 기계를 가지고 그들보다 더한 짓을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스터 섬에는 다른 멸망한 사회에 대한 역사도 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정보, 즉 과거의 역사가 있다. 내 아들 세대를 위한 나의 가장 큰 희망은, 이제 이스터 섬과 같은 사회들의 운명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디스커버(Discover)> 1995년 8월호) |
'이런저런 이야기 > 책 속에 길이 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서삼경 [四書三經]을 읽다 (0) | 2014.01.13 |
---|---|
마음을 잡는자, -- 징기스칸의 재해석 -서정록 (0) | 2014.01.11 |
녹색평론이 권하는 책-- 농부시인의 행복론,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0) | 2013.12.28 |
경제민주화를 위한 한미FTA 재협상 핸드북--녹색평론 (0) | 2013.12.28 |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녹색평론 (0) | 2013.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