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selfgo.org/news/photo/201312/543_3458_336.jpg) |
|
▲ 토론 : 백준기 (한신대 교수 / 코리아컨센서스 소장) | 일본 정상국가론의 배경과 실상: '전후로부터의 탈각'이 의미하는 것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부교수)
1. 2013년 여름: 일본 참의원 선거의 의미
지난여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대승했다. 반면 자민당에 대항할 민주당은 참패하여 다른 꼬마 야당들과 비슷한 소수 정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일본정치에서 일강다약(一强多弱) 구조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써 다음 국정선거가 예정된 2016년까지 아베 총리는 안정된 정치적 기반을 배경으로 3년의 장기집권이 가능해졌다.
이번 선거는 참의원 선거 치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변 국가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그것은 일본이 선거 후에 과연 헌법을 개정해서 국방군을 보유하는 국가로 거듭날 것인지 여부에 대한 관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난 해 연말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정원 480명 중에 294석을 얻어 과반수를 차지했으며, 헌법개정에 적극적인 일본유신회와 다함께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개헌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의석을 훌쩍 넘겨버린 터였다. 이에 이어 참의원에서도 개헌파가 정원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면 아베 총리는 본격적으로 개헌에 착수할 것이라는 관측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있었다. 자민당 1강구도 속에서 이미 선거 전부터 자민당의 승리가 점쳐지고 있었으나, 문제는 그 승리의 크기였다.
선거전 초반에는 자민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었다. 자민당에 대한 기대가 아베노믹스의 성공에 대한 염원임을 잘 알고 있던 아베 총리는 선거전 초반 경제문제에 집중해서 선거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시일이 지나면서 아베 총리는 개헌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이와 때를 같이해서 자민당에 대한 지지가 미미하나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자민당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하면서 자민당의 ‘압승’ 예상에서 ‘대승’ 예상으로 승리의 크기가 조정되었다. 결국 자민당은 단독 과반을 가능하게 할 71석에서 6석이 모자란 65석을 차지했고, 공명당과 함께 연립 여당의 과반에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일본유신회와 다함께당의 의석수를 합쳐도 3분의 2 의석에 미치지 못함에 따라 참의원에서의 개헌 발의는 어렵게 되었다.
일본 국민은 이번 참의원 선거를 통해 일본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되어 온 중참의원에서의 여야 역전현상을 종식시키고 여당에게 안정적 정국운영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해 준 대신,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아직 허락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낮은 투표율에서나마 일본 국민의 균형감각이 발휘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자민당이 주장하는 제9조의 평화조항 개정에 반대하고 있으며, 자민당 내에서도 개헌의 속도에 대해 신중한 의원들이 있어서 아베 총리가 참의원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개헌 정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은 빗나간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베 총리가 개헌이라는 과제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은 헌법 개정이 필요없는 집단적 자위권의 보유를 위해 움직일 것이며, 다음으로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법의 정비에 나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신념의 정치인이라서가 아니다. 국가의 군대, 즉 국방군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한 평화헌법 하에서 전개되어 온 전후 일본의 국가 그 자체가 근대국가의 상식에서 볼 때 불완전한 것이며, 영토성과 폭력성을 핵심 속성으로 지니는 근대국가의 맨살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는 최근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일본 국민이 이를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전후 국가, 그것을 일단 ‘기지국가’로 명명해 두자.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후로부터의 탈각’이 일본 국민에 먹혀들어가는 것은 ‘평화국가’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인식이 일반에 퍼지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일본이 ‘평화국가’였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일본의 좌와 우를 떠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의 이상을 존중하고 ‘평화국가’의 길을 걸어 왔기에 일본의 성공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냉전기의 일본에 관해서 말하자면 옳아 보인다. 반면 탈냉전 이후 일본의 국제적 위상 저하를 ‘평화국가’ 외교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는 일본인들은 ‘평화국가’의 부정적 유산에 주목한다.
어쨌든 좌우를 막론하고 일본인에게 전후 일본은 ‘평화국가’인 것이다. 한편이 ‘평화국가’를 계승되어야 할 자산으로 보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이 그것을 부정되어야 할 유산으로 보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듭 말하지만 일본인에게 전후 국가는 ‘평화국가’로 존재해 왔다. 과연 이러한 인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2. <코쿠리코 언덕에서>: '전후사'의 은유
2011년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196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일본 전후사에 각인되어 있는 한국전쟁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은 여 주인공 소녀의 아버지가 한국전쟁과 관련된 모종의 해상활동에서 희생되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피해자로서의 일본' 이미지를 한일관계에까지 확대 적용한 것 같아 불편하고 불쾌할 수도 있는 이야기 전개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의도는 다른 데 있어 보인다. 그의 진의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필자는 그가 일본 전후사에 각인되어 있는 한국전쟁을 소환함으로서 평화헌법을 내세운 '전후' 일본이 결코 '전쟁'의 현실에서 비켜서 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는 21세기 초 동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나름의 의견 제시인 듯하다. 마침 21세기 들어 동아시아에서는 영토성과 폭력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맨살이 드러나고 있으며, '전쟁과 국가'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근대국가는 전쟁 속에서 태어났다. 국가는 전쟁의 부산물이면서 전쟁의 주체로서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자원동원체제로 스스로를 최적화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전쟁 지도자들이 목표로 삼았던 '고도국방국가'는 그 극단적 표현이었다. '고도국방국가'는 패전 후 연합국에 의한 점령 개혁을 거치면서 해체되었고, 신헌법 제정을 계기로 일본은 전쟁과 군비를 부인하는 '평화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의 미군기지와 생산시설이 전쟁의 현실에 깊숙이 말려들어갔고, 일본은 '평화국가'의 이상과는 괴리된 '기지국가'의 현실을 수용하고 강화와 독립을 달성하게 되었다. '기지국가'의 모습으로 변형된 전후 국가 또한 '전후의 전쟁들'에 대응해서 형성된 자원동원체제의 기본 속성을 내재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코쿠리코 언덕' 위에서 먼 바다를 내다보는 소녀의 아버지는 이를 상징하는 존재였으며, 일부의 정치인들이 '전후의 탈각'을 대놓고 외치기 시작한 일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넌지시 던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전후'의 시대는 과연 어떠한 시대였는가? 일본에서 '전후'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45년 7월 26일, 미영중 3국의 공동선언으로 제시된 '포츠담 선언'에는 군대의 무조건 항복과 민주화, 전범 처벌, 군대의 무조건 항복 등이 항복의 조건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 이를 무시했던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 통보했다.
이후 일본은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국의 점령 통치를 받게 되는데, 포츠담 선언에 제시된 두 가지 목표가 일본의 점령 개혁의 중심축이 되었다. 비군사화(demilitarization)와 민주화(democratization)의 영문 첫글자를 따서 2D정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연합국 정부의 점령 하 개혁정책을 통해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핵심 가치로 하는 '전후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1946년 11월 3일에 공포되고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된 전후헌법이었다. 대표적 '전후 지식인'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가 전후헌법을 읽고 '전전(戰前)'과의 단절을 체감했다고 한 것처럼, 많은 일본인들이 전후헌법의 공포에서 비로소 '전후'의 시대가 새로 열린 것을 실감했다.
전후헌법에서 특히 주목할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장 1조에서 8조까지의 상징천황제 조항이었고, 다른 하나는 2장 9조의 전쟁포기조항이었다. 상징천황제 조항에서 메이지천황의 권위는 부정되었다. 천황은 실체적 권력을 갖지 못하고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국민통합의 상징'의 존재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지위는 주권을 지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하여 주권재민의 원칙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엄격히 물을 것을 요구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이 예상되었다. 천황의 존재가 군국주의의 부활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이었다. 이를 설득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 전쟁포기조항이었던 것이다. 일본국헌법 제9조는 2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항에서는 일본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고 하였으며, 제2항에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기타 군사력'을 보유하거나 유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 두 개 항이 이른바 '평화헌법'의 핵심 조항이 되고 있는 것이며, '평화국가' 일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3. 한국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탄생
그런데 한국전쟁의 현실을 목전에 두고, '평화국가' 일본의 존립이 위기를 맞이했다. 일본 내외에서 재군비 논의가 일었던 것이다. 이미 한국전쟁 이전인 1948년 3월 무렵부터 냉전이 가시화하는 가운데 일본의 안보를 둘러싸고는 여러 논의가 있어왔다. 주일 미 극동군 사령부는 점령의 일상 업무에 더해 재해에 대처하고 민간비상사태와 전면적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아라 다카시(荒敬)의 연구에 따르면, 주일 미군은 1947년 7월에는 민간비상사태, 즉 일본 국내의 소요사태를 상정해서 톨부스(Tollbooth) 작전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는데, 냉전의 진전과 더불어 1948년 3월에는 북부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부터 위협이 가해질 것을 상정하여 전면적 비상사태 계획으로 건파우더(Gunpowder)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1949년 4월에는 대소전을 상정하여 건파우더 작전이 수정되고 격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주일 미군이 한국 전선에 투입되자, 일본의 국내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에 공백이 생겼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는 7월 4일, '한국에서의 미군의 군사행동에 대한 협력방침을 승인'했으며, 8월 19일에는 <조선의 동란과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외무성 성명을 통해 유엔군에 대한 협력방침을 최종 확인했다. 8월 29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 수상은 맥아더에게 '일본 정부는 어떠한 시설이나 노무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에 대한 전면 협력을 약속했다.
이후 일본은 한국전쟁을 위한 출격기지, 수리조달기지, 훈련휴양기지, 생산기지가 되었다. 일본에서 한반도의 전선으로 수송되는 미군 병사와 군수물자들을 실어 나르는데 일본의 선박과 선원, 부두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의 아버지는 LST(Landing Ship Tank)라 불리는 선박의 선장으로 근무하며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오고가다가 기뢰에 저촉되어 배가 침몰하면서 희생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의 소해정이 한국수역에 파견되었다. 이 '작전'에는 원산 상륙을 앞둔 1950년 10월 초부터 그해 말까지 연 12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소해대원들은 해상보안청 소속 직원들로 대부분 구 해군 간부 출신들이었다. 또 일본의 미군기지 주변에는 미군 병사들을 위한 위락시설들이 들어섰고, 이러한 시설에 흘러들어 온 기지촌의 여성들은 미국에 의해 '기지국가'화하는 일본의 모습을 상징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일본의 기지들을 이용해 전쟁을 치루는 미국은 일본에 대한 강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 군부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장기적인 점령의 지속은 일본 국민 사이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부담이 되었다. 오히려 강화 이후의 일본이 미국의 우호국으로서 자발적 협조를 약속하게 하는 것이 유리해 보였다. 자유로운 기지의 사용과 조기 강화라는 미국의 두 가지 목표는 같은 날에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안보조약에서 구현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 조약은 불가분의 짝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듯 패전으로 고도국방국가를 해체하고 평화국가로서의 재생을 모색하던 일본은 한국전쟁 하에서 '기지국가'가 되어 '독립'하여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기지국가'란 '스스로의 국방군을 보유하지 않은 채, 동맹국의 안보상 요충에서 기지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안전을 확보하는 국가'라 개념화할 수 있다.
이러한 '기지국가'화의 현실에 대해, 좌우 양쪽으로부터 반발이 조직화되었다. 우선 다양한 스펙트럼의 재무장론이 분출했다.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군사적 보통국가화'의 논의에 불이 붙은 것이다. 전전의 우익과 구 군인들이 추방에서 해제되어 정치의 전면에 되돌아오면서 이들의 목소리는 조직화의 양상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보수적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자들도 '필요악'으로서 최소한의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무장혁명과 이를 위한 반미 군사노선을 정식화하고, 미군 기지와 군수물자 생산공장을 겨냥해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가운데 일본 국민의 선택이 주목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국민들의 여론 동향을 살펴보면, 미군에 대한 기지제공과 재무장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과 9월에 실시된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서는 강화 이후 미군에 대한 기지제공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도 재군비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다가 중국의 참전이 확인된 1950년 12월 이후에는 미군에 대한 기지제공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입장이 반대를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을 계기로 변화된 일본의 여론 동향으로 보아, 일본 국민은 헌법개정과 이를 통한 재군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1952년의 언론사들의 여론조사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헌법개정에 대해 1952년 2월에 실시된 요미우리신문의 조사에서는 일본 국민의 17.4%가 반대한 반면 47.3%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4월의 마이니치신문 조사에서도 반대가 26.8%, 찬성이 42.2%였다. 그런데 정작 1952년과 1953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국민은 재군비를 주장하는 세력에게 정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않는 의석을 안겨주었다. 개헌론자들 가운데 우익적 성향을 드러내는 인사들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일본 국민들이 이들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로서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조건 하에서 형성된 '기지국가'의 현실은 국민의 추인을 받은 결과가 되었다. 한국전쟁 그 자체는 '통일도 없고, 전쟁도 없는' 애매한 형태로 종결되었으며, 그것이 '기지국가'라는 어정쩡한 형태로 일본이 전후사를 헤쳐 오는 전제가 되었다.
4. 베트남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변용
일본 국민의 재군비에 대한 거부반응은 1960년 안보투쟁을 거치면서 재확인되었다.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조직적으로 분출된 안보투쟁에도 불구하고 미일안보조약은 개정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를 강행한 기시 수상은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와 동시에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헌법개정과 재군비는 저지되었다. 기시에 이어 등장한 이케다 수상은 1960년 10월 수상 취임 후 처음 가진 시정방침 연설에서 헌법 개헌 논쟁은 '본래 문제의 본질이 국민 각층에서 충분히 논의되어, 상당한 세월을 거치면서 국민여론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방향을 향해 성숙할 때 비로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사실상의 헌법 개정 포기 선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60년 안보투쟁은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은 일본 국민이 '기지국가' 일본의 현실과 직면하게 했다.
1965년 2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에 대해 전면적 폭격을 개시하자 사토(佐藤) 내각은 이를 '불가피한 조치'라 하여 이해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안보조약의 형식에 따라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본토의 미군기지를 베트남전쟁의 후방기지로서 미국에 제공했다. 4월 14일에는 시나(椎名) 외상이 안보조약 상의 '극동'의 범위에 대해 재해석함으로써 사토 내각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60년에 개정된 안보조약의 '극동조항'이 베트남전쟁에서 현실화한 것이다. '북폭' 이후 오키나와는 물론 요코스카(横須賀)와 이와쿠니(岩国) 등의 미군기지가 베트남전쟁으로 향하는 항모와 폭격기의 출격기지로 변모했으며, 사가미(相模) 보급창은 수리조달기지가 되었다. 오지(王子)와 네리마(練馬)의 미군병원은 야전병원이 되었으며, 베트남전쟁 특별수요가 창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전쟁 시기의 일본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북폭'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965년 8월 24일의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는 '북폭'에 찬성하는 국민이 겨우 4%에 불과했고, 75%의 국민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미국의 기지가 되어 베트남전쟁에 협력하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련)'이 전개한 반전운동은 광범위한 시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베평련 운동의 이론가로 활약했던 오다 마코토(小田実)는 일본이 미국에 의한 '기지화'의 피해자가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베트남전쟁에 협력 가담하는 가해자가 되어 있는 현실에서 '가해, 피해의 동시발생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러, '가해자=피해자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본토의 기지와 오키나와의 기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탈주 미군병사를 지원하고 그들의 망명을 지원하는 운동을 통해 '국가의 원리'를 넘어서는 '개인의 원리'에서의 반전 평화론이 제기되었다. 반전 평화운동의 주체로서 '개인'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국가'로부터의 탈각에서 평화의 가능성이 모색되었다. 같은 시기 '폭력을 통한 평화'를 주장하고 행동했던 전공투(전국공투회의) 또한 조직 원리에서는 '개인 참가'의 원칙을 중시했으며, '국가'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했다. 베평련과 전공투는 평화운동에서 '개인' 우위의 원칙을 확립하고, '국가'의 초극 또는 부정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은 현실적이었다. 이번에도 일본 국민은 '기지국가'의 현실을 추인했다.
신문논조가 '확전 반대'(특히 마이니치신문)'를 주된 기조로 해서 전개되는 가운데, 일본 국민은 미일안보조약에서 약속한 기지제공의 현실과 전후헌법 하에서의 자위대의 현상유지를 지지했다. 1969년과 1972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국민의 41%가 '현상을 유지하여 미일안보체제와 자위대로 일본의 안전을 지킨다'는 수단을 지지하고 있다. 안보조약을 해소하고 자위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은 1969년에는 13%였다가 1972년에는 11%로 줄어든 반면, 안보조약을 해소하고 자위대도 축소 또는 폐지하자는 주장은 10%에서 16%로 증가하고 있다. 즉 '기지국가'를 해체하자는 데 찬성하는 입장은 여전히 소수 의견이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기지국가 해체 이후 자주적 국방국가로의 변화'를 지지하는 국민은 더욱 감소하고, '미군에 대한 기지제공도 자위대도 필요 없다'는 '절대평화주의'의 입장은 근소하나마 증가했다. 이는 베트남 반전운동의 미약한 성과였다. 그 사이에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었고, 본토에서 미군기지가 축소되는 만큼 오키나와에서는 미군기지가 확충되었다. 이에 따라 '기지국가'의 속성이 '기지의 섬'에 집중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5. 걸프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한계
냉전이 붕괴되고 미일안보조약이 재조정의 운명에 처해질 즈음인 1990년, 동아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동 지역에서 발발한 걸프전쟁은 일본의 미군기지가 여전히 전쟁의 후방기지로서 유용함을 보여주었다. 걸프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본도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중동을 향한 출격, 중계, 보급기지가 되었다. 오키나와의 가데나(嘉手納), 후텐마(普天間), 그리고 본토의 이와쿠니(岩国) 등에서는 항공부대가 출격했으며, 요코스카와 사세보(佐世保) 등의 해군기지로부터는 제7함대 소속 함정들이 추격해 나갔다. 오키나와 타임즈에 따르면 1990년 8월 7일 밤부터 8일에 걸쳐, 완전무장한 미군병사가 C130 수송기로 출격했고, 8일에는 E3 공중조기경계관제기(AWACS)가 2기 중동을 향해 발진해 나갔다. 그리고 14일에는 오키나와주둔 미군 소식통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제1해병 항공단 소속 공격기 등 항공부대의 일부가 야마구치현 이와쿠니 기지와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에서 필리핀을 경유해서 걸프지역으로 향했다.
미 태평양군 준 기관지인 Stars and Stripes는 1990년 8월 22일자 기사에서 후텐마 기지의 제36해병 항공군이 필리핀에서의 훈련을 끝내고 중동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요코스카 기지로부터는 제7함대 기함 블루리지 출항했고, 사세보 기지에서는 19일, 전차 양륙함 샌버나디노(San Bernardino)호가, 20일에는 전차 양륙함 세넥타디, 해난구조함 브라운즈윅 등이 출항했다. 21일에도 해난구조함 뷰포트, 군용 트럭과 물자 등을 적재한 독크형 양륙함 데뷔크 등 2척이 출항했는데, 이들 함정들은 20일에서 23일 사이에 오키나와의 화이트비치, 레드비치 등에 기항, 전차와 트럭과 지프차, 대포, 탄약, 의약품 등의 군수물자와 해병대원 등을 적재하고 다시 출항했다. 걸프전쟁 시기 미국은 54만 명 이상의 미군이 투입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약 15,000명이 주일 미군기지에서 직접 걸프 지역으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미군의 출격은 지역적으로 주일미군의 동원을 극동의 안전보장에 한정한 ‘극동조항’에 위배되는 내용이었지만, 일본 국회에서는 외무성 조약국장이 ‘주일 함대가 출동하는 것은 전투작전행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이동에 불과하다’는 궤변으로 이를 용인했다. 걸프전쟁을 계기로 주일미군은 일본의 기지로부터 어디로든지 출격이 가능한 태세가 만들어졌다. 나아가 가이후(海部) 수상은 담화를 발표하여 다국적군의 투입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고, 다국적군에 대한 후방지원을 위해 자위대 파견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유엔평화협력법안'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헌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반대에 부딪혀 폐기되었다. 그 대신 일본은 다국적군에 대해 130억 달러의 재정을 지원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매정한 평가가 내려졌다. '피를 흘리지 않는 이기적인 국가', '평화에 대한 무임승차 국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일본에 각인되었다. 한편 90년대 초는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회자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당국의 '불바다' 발언으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한반도에서 '통일도 없고 전쟁도 없다'는 '기지국가' 외교의 전제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보통국가론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일련의 법안정비를 거쳐 1999년에는 주변사태법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걸프전쟁 시기에는 '소시민 평화주의'의 양가성이 드러났다. 베트남전쟁 시기, '진영 평화주의'와 '지식인 평화주의'가 유효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지 못하는 틈새에서 반전평화를 구호로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했던 그룹은 이른바 '소시민'들의 집합체였던 베평련 그룹이었다. 이후 일본에서는 '생활평화주의'라고도 할 만한 '소시민'들의 평화주의가 반전 평화운동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소시민'들의 평화주의는 유엔평화협력법안을 폐기에 이르게 하는 힘을 발휘했지만, 보수 평론가 니시베 스스무(西部邁)가 예견했듯이, '미지근한 평화주의(薄められた平和主義)'의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평화주의'란 국제적 사안에서 간접적인 참가를 선호하는 태도와 입장을 말한다. 니시베에 따르면 이러한 뜨뜻미지근한 평화주의는, 유엔헌장 43조와 일본국 헌법의 간극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유엔헌장 43조는, 모든 가맹국이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전의 유지에 필요한 병력과 원조 및 편익을 안보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약속한다'는 내용인 바, 이는 일본국 헌법 제9조가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냉전기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것인데, 탈냉전 지구화의 시대에 들어와 일본 국민은 비로소 그 간극의 크기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보통국가화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걸프전쟁 이후 일본의 논단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군사적 '보통국가론'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의 무력행사 개시 이전의 일본 논단 및 일간지 논조는 ‘보통국가론 진영’에 대해 ‘절대평화 진영’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절대평화 진영’에 대한 ‘보통국가론 진영’의 반격이 개시되어, 전쟁이 단기간에 다국적군의 승리로 귀결되고 일본의 느리고 둔한 대응과 미미한 공헌에 대한 국제적 비판에 직면해서 ‘보통국가론자’들에 의한 ‘절대평화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 기류가 논단을 휩쓸게 되었다. 특히 보수적 입장의 논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제공해 온 『諸君』, 『正論』, 『This is 読売』, 『中央公論』에서 그러한 논조가 지배적이었다.
6. 아프간전쟁과 일본: '기지국가'의 종언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동시다발테러와 이에 이은 미국의 아프간전쟁은 일본의 보통국가화가 '자위대의 해외파견'이라는 형태로 일선을 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월 11일 심야, 일본 정부는 국제긴급원조대를 편성하고 국내 미군시설에 대한 경비 강화를 지시했다. 아프간전쟁이 개시된 뒤에는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일본의 적극적 공헌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미군의 지원협력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법제를 마련하고 자위대를 파견했다. 10월 5일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18일에 중의원, 29일에 참의원을 통과해서 가결되었다. 이어서 11월 9일에는 이지스함을 포함한 자위대 함정이 인도양을 향해 사세보를 출항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일본으로서는 이례적인 속도로 진행되었다. 11월 25일에는 추가로 자위대 함정 3척이 사세보를 출항했으며, 전체적으로 1200명 규모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는 '기지국가' 이후 미일안보조약 하에서 진행되어 온 현실이 기정사실화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걸프전쟁 이후 유사법제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아프간전쟁에서의 일본의 협력 여부를 둘러싸고 일본에서는 '전쟁론'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아프간에서의 사태가 전쟁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견부터 크게 세 가지의 입장으로 갈렸다. 『문예춘추(文芸春秋)』에서는 '이것이 전쟁이다'라는 제목으로 특집이 꾸며졌다. 동시다발 테러 이후의 새로운 국제정세는 국제사회의 위기들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 관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위기관리체제가 여전히 미비하다고 하여 그 보완 구축, 즉 헌법개정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반해 『세계(世界)』의 논진은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는 입장에서 일본의 아프간전쟁 협력 방침을 비판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개시되는 전쟁에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러한 국제사회의 '규약위반'에 일본의 협력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한편 『현대사상(現代思想)』의 특집호는 '이것이 전쟁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대해 일본의 평화주의가 어떠한 대응을 할 수 있는가 모색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렇듯 아프간에서의 미국의 전쟁에 대해 일본의 논단에서는 ‘이것은 전쟁이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이것은 전쟁인가’라는 삼각 진용의 논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대테러전쟁에 대한 비판과 영합, 분노와 낭패의 언설이 형성되고 있었다.
때마침 북한의 핵개발과 중국의 급격한 부상이 맞물리면서 일본에서는 안보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고이즈미 내각의 자위대 파견 결정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9.11 직후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일본 여론에 변화가 나타났다.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주도의 아프간 보복 공격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일본의 자위대 파견에 대해서도 지지하지 않는 여론이 지지하는 여론을 웃돌기 시작했다. 9월 22/23일에 실시된 최초의 조사에서는, 미국의 보복공격에 대해 ‘지지’가 48%, ‘지지하지 않음’이 38%였으며, 고이즈미 내각의 자위대 파견에 대해서도 찬성이 52%, 반대가 37%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대테러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감수해야 할 위험, 즉 일본 국내에서 테러가 일어나거나 외국에서 일본인이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데 대해 불안을 호소하는 의견이 90%에 이르렀다. 또한 찬성 의견에도 다음과 같은 유보가 붙어 있었다. ‘미국이 보복공격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85%), ‘미국의 보복공격을 인정하는 유엔결의가 필요하다’(73%)는 것이었으며, ‘일본이 자위대를 파견할 경우, 미군의 작전에 대해 주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도 65%였다. 이라크 등에 대한 확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의견도 58%였다.
또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보복공격 직후인 10월 13/14일에 실시된 <TV 아사히>의 조사에서는 공격에 대한 ‘지지’가 51%, ‘지지하지 않음’이 37%, 자위대 파견에 대한 ‘지지’가 55%, ‘지지하지 않음’이 35%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1월 17/18일의 여론조사에서는 ‘영미의 군사공격’에 대해 ‘지지’가 40%, ‘지지하지 않음’이 47%로 역전되었으며,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의 인도양 파견’에 대해서도 ‘지지하지 않음’이 53%인데 반해 ‘지지’가 38%로 역전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국민은 '기지국가'의 효용한계를 실감하는 한편, 자위대가 '기지'의 방위를 넘어선 활동에 참가해서 군사적 '정상국가'로 탈바꿈하려 하는 데 대해서는 여전히 저항감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 '헌법개정'의 향방
대테러전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전쟁을 '세계내전'이라 명명한 국제정치학자들이 있었다. '세계내전'의 시대에 '기지국가'는 유효기간이 종료된 것으로 감지되었다. '세계내전'의 시대에는 '극동'의 지정학적 구분도, 전선과 후방의 군사작전상의 구분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지국가'로부터의 탈각이 '전후로부터의 탈각'이라는 구호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 이 즈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표출된 일본 국민의 여론은 양가적이다. 우선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2000년대에 들어와 '자위대와 방위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2000년까지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나타내는 국민은 걸프전쟁 시기를 예외로 하면 50-60% 사이에서 점증하고 있었는데, 2000년 이후부터 오름세가 뚜렷해 졌으며 2003년 이후 60%를 너머 70%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한 관심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선택하는 방법으로는 '자주방위'보다는 '미일안보와 자위대'에 의지하는 것을 최선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국민의 수가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주방위'를 선택한 국민이 10%내외에서 평행하고 있는 데 비해, '미일안보와 자위대'의 현상유지를 선택한 국민은 2000년대 들어 70%를 넘어서고 있다. 즉, 방위정책에 관한 한 현행 헌법 하의 현상유지에 대한 선호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국민 사이에서 헌법개정론이 호헌 여론을 앞서기 시작했다는 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일례로 NHK조사를 들 수 있는데, 1992년부터 10년 만인 2002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헌법개정 찬성론자가 반대론자를 앞선 결과를 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제9조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30%, '필요 없다'는 응답이 52%로, 방위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평화헌법의 유용성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3년의 조사는 보다 복잡하다. 개정 찬성론자(약40%)가 반대론자(약20%)보다 두 배 많은 결과를 보였으며, 제9조의 개정에 대해서도 개정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33%, 개정 반대 의견이 30%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면 이제 일본 국민은 헌법개정을 통한 군대 보유에 긍정적인 의견이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다 구체적으로 의견을 묻는 항목에서는 미묘하게 상반된 결과를 보였다.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변경하자는 의견'에 대한 찬반은 반대가 45%, 찬성이 20%로 나타나, 헌법개정이 곧바로 본격적 군대 보유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찬반 여론은 보다 이러한 경향을 농후히 보여준다. 2013년 8월에 실시된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찬성하는 국민이 27%인 반면, 59%의 국민이 반대하고 있었다. 아베 내각 지지층 가운데에서도 찬성은 37%, 반대가 49%여서, 일본이 현행헌법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데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8. 동아시아적 문제로서의 일본의 '정상국가화'
이와 같이 전후 동아시아에는 미소 간에 전개되는 지구적 냉전 체제 하에 한국전쟁 휴전체제라고 하는 지역 수준의 준전시체제가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은 ‘기지국가’가 되어 동아시아 휴전체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1963년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속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일본의 현실을 녹여 배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총력전 체제를 갖추고 ‘고도국방국가’가 되어 있던 일본은 전후 평화 헌법 하에서 ‘평화국가’로 재기를 다짐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지국가’가 되어 국제사회에 복귀했다.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계승되어야 할 자산이거나 부정되어야 할 유산으로 자리 잡은 평화국가의 실상은 기지국가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정상국가’화 논의가 대두된 1990년대는 지구적 수준에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이면에서 동아시아의 휴전체제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일본의 개헌 논의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과의 마주대하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지국가’는 역사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평화국가’처럼 초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며, 한국전쟁 휴전체제에 조응해서 존재하는 한시적 비상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그 해체를 시도하는 힘은 보다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이며,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일본의 혁신 진보가 ‘평화국가’의 이상에 매달려 ‘기지국가’를 지속시키는 현실-즉, 한국전쟁 휴전체제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반면, 보수 우익이 주장하는 ‘정상국가’화가 한국전쟁 휴전체제의 해체 보다는 그 강화를 의도하는 가운데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지국가의 정상국가화는 동아시아 휴전체제의 해체와 한 쌍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이 될 터인데, 일본의 보수 우익은 미일동맹의 강화를 통한 휴전체제의 온존 강화와 정상국가화라는 모순된 역사과정을 동시에 이루려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휴전체제 종식을 위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일본의 헌법 개정 논의가 2016년까지 얼마간의 유예기간을 갖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기지국가는 원전국가이기도 하다. 기지국가가 전후 일본 국가의 안보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원전국가는 경제적 표현이다. 일본은 2011년 3월 시점에서 54기의 원전을 보유하여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원전국가였는데, 국토면적을 원전수로 나눈 단위면적으로는 세계 제2위, 인구밀도당 원전수는 세계1위의 원전국가였다. 그런데 국민의 생활과 기업의 생산에서 원전의 존재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원전국가 일본의 위기가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감지되고 있다.
많은 일본 국민이 후쿠시마 제1원전이 수소폭발을 일으켜 연료봉이 용융되어 가는 모습에서 원전에 의존해 온 전후 국가, 즉 원전국가의 용융을 겹쳐 보고 있었다. 이후 금요일마다 총리관저 앞에서 열린 시민들의 집회가 2012년 6월 정점에 이르면서, 원전국가로 상징되는 전후 국가가 시민사회의 힘으로 결정적인 변화의 기로에 세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작년 말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탈원전 진영은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고, 전후 국가의 변화를 가로막는 핵심적 존재가 전후정치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근대 이래 부식된 일본의 내부 식민지주의와 그 위에 전후 이래 침착된 미일동맹의 이중구조이며, 바로 그것이 ‘기지국가’라 부르는 전후체제였던 것이다. 일본 최초의 SNS선거로 기록될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탈원전을 구호로 내세워 넷심의 지원을 얻은 후보가 도쿄도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변화의 기로에서 멀어져 가던 일본을 다시 기로 앞에 되돌려 세운 데 의미가 있다.
한편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후쿠시마의 위치가 전후에 이어진 제국 일본의 ‘내부 식민지’ 문제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와 후쿠시마의 제1원전이 쌍을 이루는 문제임을 명백히 드러내 주는 증표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지국가의 해체를 통한 정상국가화의 시도가 원전국가의 온존과 동시 진행되고 있는 것 또한 일본의 보수 우익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순이다. 반면 기지국가로 존재해 온 전후 체제에 손을 대지 않고 원전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 탈원전 진영 또한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탈원전 진영의 근대 비판 담론은, 내부 식민지에 대한 가해자 의식의 재각성을 의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근대화의 희생자로서의 일본인 이미지를 재생산하면서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연히도 후쿠시마사태와 동시에 진행된 센카쿠 및 독도 분쟁을 매개로 근대 비판의 내셔널리즘은 일본인의 피해망상을 자극하여 공격적인 배외주의를 용인하고, 우익이 주도하는 정상국가화 담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헌법개정을 정치가로서의 숙원이라 공언해 마지않는 아베 신조(安倍晋三)씨가 자신의 제2차 내각을 이끌고 수상관저의 주인으로 복귀한 것은, 후쿠시마원전 사고에 대해 국민의 분노가 대규모 시위로 분출한 이후 탈원전/반원전 운동으로 일본의 평화운동이 새로운 흐름으로 재편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2012년 여름의 뜨거웠던 탈원전시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일본 국민은 '원전'의 문제가 '기지'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원전국가'는 '기지국가'의 경제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요요기공원에 17만 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사요나라 원전 집회'가 개최된 날은, '기지' 일본의 현실을 환기한 <<코쿠리코 언덕에서>>가 개봉된 지 딱 1년 만인 2012년 7월 16일이었다.
'기지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 온 일본의 평화운동 진영은 이제 '원전국가'에 대한 반대의견의 표출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듯이 보인다. 2012년 12월의 중의원 선거에서 헌법개정 발의 가능선인 3분의 2 의석을 개헌론자에게 안겨준 일본 국민은 2013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이를 균형잡는 행동을 보였다. 중참 양원에서 3분의 2 의석수의 찬동으로 헌법개정 발의가 가능한 현행 헌법 하에서 당분간 헌법개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개정의 모멘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국의 부상과 미중 양강구도의 출현 속에서 헌법개정과 군사적 '정상국가'화의 유인(誘因)은 더 커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휴전협정체제의 부산물인 동맹의 대립구도를 다자간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 그것이 '기지국가' 일본의 해체와 '정상국가' 일본의 출현을 안착시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 저작권자 © 자치분권 Issue&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