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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불살조(殺佛殺祖) -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

종교/불교의 향기

by 소나무맨 2013. 11. 26.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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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불살조(殺佛殺祖) -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

 

   ‘살불살조(殺佛殺祖)’란 당 말 고승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의 유명한 사자후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두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 ? 친척을 만나면 부모 ? 친척을 죽여라. 임제는 한국 선불교 정통 법맥이며, 중국 선불교 임제종 개산조다. 임제 문정(門庭)은 이 ‘살불살조’라는 화두 하나로 격렬하고 전광석화 같은 장군풍 가풍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임제의 제자 혜연(慧然)이 엮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이다. 겉 뜻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라는 말이지만, 속뜻은 부처와 조사에 집착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는 그런 뜻이다.  

                 

 

                                

  이 화두에서 살인은 육체적 ? 생명적 살인이 아니다. ‘우상’으로 떠받드는 부처와 조사, 무명(無明)이라는 아버지와 탐애(貪愛)라는 어머니를 죽이라는 정신적 인격적 살인이다. 한마디로 ‘우상 타파’다. 이 같은 우상을 진리라고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즉 기존 문화적 습관이나 전통에 갇혀 있는 자신을 뛰어넘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단적, 개인적 우상들을 과감히 타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앞부분에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하려면 오직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곧 부처와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속임수에서 벗어나라는 것임을 뜻한다. 이는 부처와 조사라는 관념에 집착하면 현재를 망각해버릴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법어에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 반영돼 있다. 당시 당나라엔 안사(安史)의 난에 이어 지방권력이 강해졌고, 불교교단은 841∼847년 사이 ‘회창(會昌) 파불(破佛)’ 사건을 당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파불의 죄업을 참회할 수 있는 교리를 찾고자 노력했고, 이에 의현은 오무간업(五無間業)과 해탈 문제를 해결하고자 살불살조라는 파격적인 법어를 설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오무간업을 짓더라도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造五無間業 方得解脫)”라고 한 것은 이 같은 정치 ? 사회적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회창의 법란(會昌破佛, 845~ 847)---당의 무종(武宗) 이염(李炎)에 의한 법란. 회창(會昌) 원년으로부터 6년간(841∼847년)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무종 자신은 도교를 신봉했다. 내우외란에 시달리던 당 황제 무종은 유학자들의 권유로 불교를 탄압했다. 이때 불교는 패망의 위기를 맞을 정도로 폐허가 다 됐다. 당시 장안과 낙양에는 각각 4개 사찰만을, 각 주에는 1주에 1개 사찰만을 남기고 모조리 폐사시켰고, 경전들이 불살라지고 사원이 파괴되며 승니들이 거의 죽거나 환속됐다. 이후 교학은 쇠퇴하고 선종과 정토신앙이 주류를 이뤄나가게 되고, 더 은둔적이고 산중불교식으로 변모해 갔다.

       ※오무간업(五無間業)---오무간업이란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업, 즉 오역죄(五逆罪)를 말하는 것으로 임제 스님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죽이며, 부처의 몸에 피를 흘리게 하고, 출가자의 화목을 깨뜨리고, 경전이나 불상을 불사르는 것을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행위라고 했다. 이는 결국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살불살조의 의미와 서로 통한다.

                                          

           

   일가를 이루었던 선사들 역시 인간의 욕망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인데 언어가 그 첨병 역할을 한다고 역설한다. 선(禪)에서 언어의 이 같은 모순적 측면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켜 드러낸 언어 혐오증이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다. 선은 이런 우상들을 부셔버리라고 외친다. 이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으면 냉철한 실제와 만날 수 없고 고요와 평안에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

   석가모니와 노자는 별 볼일 없는 마른 똥 막대기이고(釋迦老子是乾屎棍), 문수 ? 보현보살은 변소 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文殊普賢是擔屎漢). 12분교(分敎) 교학은 귀신장부이고, 종기고름을 닦아내는 휴지일 뿐이다(十二分敎是點鬼簿 拭瘡紙). 몽둥이질로 임제의 고함소리와 함께 선림을 진동시켰던 덕산 선감(德山宣鑑, 782~865) 선사의 ‘가불매조(呵佛罵祖: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하다)’다. 덕산 방 임제 할(德山棒 臨濟喝)의 명성에 어울리는 활구(活句)이며 언어폭력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격외구(格外句)다. 바로 살불살조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이다.

        ※임제 할(臨濟喝) 덕산 방(德山棒)---임제 선사께서는 누구든지 법을 물으려고 문에 들어서면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고, 덕산 선사께서는 주장자로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즉, 임제스님은 학인들을 맞이해 그들 공부를 점검할 때 큰 소리를 내지르는 ‘할(喝)’을 많이 썼고, 덕산스님은 주장자로 후려치는 ‘방(棒)’을 많이 사용했다. 이 유명한 임제 ‘할’과 덕산 ‘방’을 <벽암록(碧巖錄)>에서 “임제스님 고함소리인 ‘할’은 천둥이나 벼락 치듯 하고, 덕산스님이 사정없이 내려치는 주장자 모습은 마치 소나기 빗방울 쏟아지듯 하다.”고 했다.

        ※활구(活句)---이론이나 이치를 통하지 않고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는 화두.

        ※격외구(格外句)---일종의 선문답으로 정해진 틀 밖의 말, 즉 개안(開眼)하게 하는 말.

                                        

 

                    

  ‘부처=마른똥막대기’는 범성일여(凡聖一如)의 불성 절대평등을 강조하는 선사들의 관용적 표현이다. 선(禪) 언어학에는 가장 천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독특한 철학이 있다. 노장(老莊)의 언어학과 같은 맥락이다. 운문 문언(雲門文偃, 864~949) 선사는 “석가모니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칠 때 내가 옆에 있었다면 한방에 때려죽여 살덩이를 개밥으로나 던져주어 천하태평을 도모하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釋迦初生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云 天上天下唯我獨尊 老僧當時若見 一棒打殺與狗子吃 貴圖天下泰平).”는 일성으로 살불살조의 극한에 이르렀다. 섬뜩한 소름마저 끼치게 하는 격렬한 매도이고 욕설(?)이다. 그러나 선문에선 임제, 덕산, 운문이야말로 가장 부처를 잘 받든 불제자로 추앙받고 있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우상을 부수고 나오는 ‘존재의 변화’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살불살조(殺佛殺祖)란 바로 살아(殺我)라고 할 수 있다. 삶과 구체적으로 접목되는 지점을 떠나 있는 불교는 이름일 뿐이고 허상일 뿐이다. 선은 바로 그 지점에 철저하고자 했던 불교의 ‘종교개혁’이었다. 간화선(看話禪)이니 안거(安居)니 하며 선의 전통을 형식적으로만 붙들고 앉아있으려는 자세를 떨어내야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사들의 간곡한 가르침이다 - 금강신문.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에게 얽매임이 있어서는 결코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말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어야만 읽은 경문이나 들은 법문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야만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욕설이나 살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첫 번째 살(殺)은 ‘믿지 말라’는 뜻이고, 두 번째 살(殺)은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 참뜻은 “내 마음 안에 있는 부처를 죽이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스승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다. 즉, 마음의 상[망상, 우상]을 멸함으로써 본래청정심을 회복해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한 제 본분을 다하라는 말이다. ‘불취어상 여여부동’이란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여여해서 동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부처나 조사에 대한 고정된 상상의 이미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들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해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의 실천으로 무한한 자기향상을 이루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나 조사라는 이름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모습),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나 조사에 대한 명상(名相)과 고정관념의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본래심의 지혜로운 선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전통이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아야만 글로 읽고 말로 들은 모든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의심으로 시작된 구도일지라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이고, 망설이는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두려워하는 마음 또한 없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어디 아무나 민다고 열리는 문 너머의 세상이던가.

                                         

               

   중국 육조시대에 단하산(丹霞山)에 기거해 단하 천연(丹霞天然, 739∼824)이라 불리던 선사가 행각을 하다가 어느 추운 날 혜림사(惠林寺)에서 법당의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것 역시 형상의 불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한 예라 볼 수 있다.       

   선가에서 말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 가풍을 일반인은 오해할 수도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이런 말은 선가가 아니면 쓰기 힘든 말이다. 어느 종교에서 자기 종교교주를 만나면 죽여라,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랬다간 당장 이단으로 쫓겨날 말이지만, 이 활발하고 살인도와 활인검을 함께 쓰듯 한, 선가에서는 그런 표현까지도 걸림 없이 쓴다.    

   부처와 조사,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어 고맙지만, 그렇다고 종노릇을 할 필요는 없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부처나 조사도 내 주인공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최고의 의미와 가치는 나의 주인공인 ‘나’를 살리는 것이다.

   아무리 고맙다고 해도, 강을 건널 때 쓴 뗏목을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듯이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이 나를 주인공으로 대자유인으로 이끌어주는데 기여했다고 해서, 굳이 주인으로 섬기고 내가 당신의 종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선가의 가풍이고,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철저한 소식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살불살조’라는 구도자 자세를 견지하기 위해 경전이나 특정인물이 절대화되거나 신격화돼서는 안 된다. 경전문구에 진리를 갖다 맞추려고 하지 말고, 경전문구를 진리에 맞도록 해석하거나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붓다께서 설법하신 법문 중에는 중생을 개오(改悟)케 하기 위해 방편으로 설하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즉 방편으로 법륜을 굴리는 소식인데 참된 뜻을 모르고 방편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도깨비굴로 찾아드는 격이다.

   그렇지 않고 말과 문자 그대로라고 한다면, 닦을 것도 없고 고생해가면서 깨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설법이나 듣고 경전이나 읽으면 되지 굳이 수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과 문자 밖에 참뜻이 숨어 있으니 그 걸 깨치려고 수행하고 수도하는 것이 아닌가. 팔만대장경도 선지식의 설법도 그 모두가 방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 것이다. “신비로운 광명이 밝고 밝아서 만고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모든 알음알이를 던져버려라(신광불매 만고휘유 입차문래 막존지해 - 神光不昧 萬古輝猶 入此門來 莫存知解).” 중봉명본(中峯明本, 1238~1295) 스님 말씀이다. 문자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이다. 

   경전 뜻을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문자대로 해석하면 붓다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생의 사고력과 상상력은 고정관념과 편견에 의해 제약받고 사로 잡혀있기에, 새로운 세계로 도약이란, 이제까지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벗어던지고 허공에 뛰어들 각오와 용기가 없이는 되지 않는 법이다. 즉 백천간두에서 진일보하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살불살조 하라는 것이다.  

                            사진4-서산대사

   그리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깨달음을 얻을 만한 대장부는 부처님이나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해야 한다. 만약 부처님께 매달려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부처님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 깨닫지 못하고 무언가를 구하고 있다면 모두 고통이므로 일없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불살조는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가 누군지 조차 모르면서, 책을 보고 알았다고, 선문답 보고 알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하면서, 지가 만든 지도 모르는 지에게 속아서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 지 눈도 못 뜨면서 어찌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 말인가. 정신 차리고 오늘도 차라리 묵언정진하라.”라고 해, 아무나 함부로 살불살조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일침을 가하셨다. 제 앞도 닦지 못하는 주제에 살불살조 운운 하는 졸부의 등골이 오싹하게 하는 충고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이 덕 호(아미산)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많은 분들의 글을 읽고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일일이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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