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6. 07:55ㆍ종교/불교의 향기
<죽림정사(竹林精舍, 산스크리트어 베누바나 비하르(Venuvana-vihra)>
죽림정사 입구
불교는 처음부터 종교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단지 사회개혁 성향의 신진사상이었을 뿐이었다. 수행자 고타마의 주장은 인간평등에 있었다. 특히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Cast) 제도의 타파에 있었다. 그는 민중 편에 서서 “사람은 누구나 출생에 따라서 신분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만은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선언을 했고 이를 평생 실천했다.
물론 고타마 자신도 브라만이 아니었기도 했었지만 당시는 브라만이 주도해온 사회가 사제들의 부패로 많은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을 때였기에 도처에서 반(反) 브라만 사상이 성숙되던 시기였다. 이런 결과로 고타마 사문은 브라만사회에서는 기피인물로 배척을 받았지만, 반면 사제의 전횡을 못마땅해 하던 신흥세력들 - 신흥국가 왕들이나 관료, 상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있었기에 죽림정사(竹林精舍)라는 사찰의 원형이 성립될 수 있었다.
불교 발생 초창기에는 사찰이라는 것이 없었다. 불교교리에 따라 수행자들은 생사의 해탈을 위해 철저한 무소유와 방랑생활로 고행생활을 했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 제약으로 우기동안에는 한 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안거(安居)제도를 택하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거주처가 필요했고, 이것이 사찰건립의 동기가 됐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밑을 떠나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 곳이 녹야원(鹿野苑, 미가다야, Migad?ya)이다. 여기서 다섯 제자들에게 법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돌린 것이다[초전법륜(初轉法輪)]. 이후 많은 제자를 얻었고, 진리를 체득한 제자들로 하여금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 전법을 하러 떠나보낸 후 부처님도 당시 인도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인도의 마가다(摩揭陀國, Magadha)국 수도 왕사성[(王舍城, 라자그리하(Rajagrha)-지금의 라즈기르(Rajgir)]으로 향했다.
가는 길목에서 30여 명의 젊은이들을 교화하시고, 우루벨라촌으로 가서 당시 왕사성에서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였던 가섭(Kassapa) 세 형제(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하가섭은 아니다)를 교화해 제자로 삼게 돼, 그 형제들을 따르던 수천 명의 무리 역시 부처님께 교화돼 제자가 되니 마가다 국왕을 비롯한 왕사성 사람들 모두가 크게 놀랐다. 이리하여 국왕은 물론 많은 왕실 권속들과 신하들이 함께 재가신자가 됐다.
죽림정사 대나무
그런 어느 날 부처님이 마가다국의 서울 왕사성 부근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국왕을 비롯해 왕후장상과 장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동안 마가다국 빔비사라(빈비사라, 頻毘娑羅, Bimbisara, BC 582~554 재위)왕은 마음이 점점 맑아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 기쁜 환희를 조금이라도 더 맛보기 위해 왕은 부처님과 일천 명 제자들을 모두 초청해 왕으로서는 첫 번째의 공양(Pujana)을 올렸다.
이때 마가다국의 재력가인 카란다(Kalanda, 迦蘭陀) 장자가 빔비사라왕과 부처님 앞에 조용히 다가왔다.
“부처님 저는 카란다라는 사람이올시다. 어제부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사옵니다. 세존의 고마움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어젯밤 세존을 가까이 모시고 귀중한 말씀을 계속 들을 방도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빔비사라왕이 말했다.
“카란다 장자여, 너의 마음이 과연 나의 마음과 같구나. 나도 지금 부처님을 가까이 오래 모시기 위해 사원을 지어드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이곳에서 너무 멀어도 곤란하고, 또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뵙고자 할 때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하겠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 번거롭게 해서도 안 되는 곳, 밤에는 소리가 없어 조용하고 홀로 앉아 있기에도 알맞은 곳, 그런 곳이 없을까 하고 생각 중이로다.”
“그런 곳이라면 제가 소유하고 있는 대나무 동산[죽림원(竹林園)]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대왕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제가 기꺼이 그곳을 부처님께 바칠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곳에 아름다운 사원을 지어주소서.”
“아, 그 생각 참으로 기특하도다. 이로써 마가다국은 세상에서 부처님을 모시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마가다국의 백성들은 번뇌에서 해탈하는 복을 누리겠구나. 사원건축은 당장 내일부터 착수해 전 국력을 기울여 우기(雨期)가 오기 전에 완성할 것이다.”
이렇게 해 불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지어지게 됐다. 죽림정사가 완성되자 녹야원에서 포교를 위해 사방으로 갔던 제자들도 차츰 이곳으로 모여들어 불교교단의 무궁한 발전을 기할 수 있게 됐다.
죽림정사는 산스크리트어 베누바나 비하라(Venuvana-vihra)의 번역어이다. 이는 카란다 장자가 자기 소유의 베누바나(죽림원)를 헌상하고, 이곳에 마가다국왕 빔비사라왕이 정사(精舍, vihra)를 건립해 불교교단에 기증했다는 뜻이다.
죽림정사는 부처님이 가장 많이 이용한 사찰로서 불교가 교단기반을 구축한 곳이다. 죽림정사는 불교에 있어 참으로 의미 깊은 곳이다. 최초의 사찰이고, 부처님의 왼팔과 오른팔 격인 사리풋타(S?riputta, 사리자)와 목갈라나(目?連, Maudgalyayana)가 여기서 부처님께 귀의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가장 막내 격의 인물로 아사지(Assaji) 비구란 이가 있었다. 아사지 비구를 한역해서 마승(馬勝)이라 하는데, 이 아사지 비구의 행동에 사리풋타가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당시 청년 사리풋타는 회의론자인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다. 그런데 앗사지 비구는 행동이 의젓해서, 늘 점잖고 위엄 있게 자신의 정신을 걸음걸이에 잘 집중시키면서 흔들림 없는 태도로 걸어다녔고, 경행(經行) 중에는 한순간도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아사지 비구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던 사리풋타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어느 날 왕사성(라자가하)에서 탁발하는 앗사지 비구를 본 사리풋타가 물었다.
“벗이여, 당신은 누구에게 출가했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나는 부처님에게 출가했으며,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사리풋타는 계속해, “그대의 스승은 무엇을 설하십니까?”며 물었다. 앗사지는 대답 대신 게송을 읊었다.
“모든 법은 원인으로부터 발생하니,
부처님은 그 원인을 설하셨네.
모든 법의 소멸 또한 그와 같다고 위대한 사문은 설하셨네.”
게송을 들은 사리풋타는 “먼지와 때를 여읜” 법안(法眼)을 얻었다. 즉시 목갈라나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리풋타의 환한 모습을 본 목갈라나는 전후사정을 듣고 “벗이여, 우리 부처님 곁으로 갑시다. 부처님만이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런데 벗이여, 200명의 행각 사문들이 우리를 의지하며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정을 알려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합시다.”고 이야기했다. 행각 사문들에게 말하자 그들도 모두 두 사람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스승 산자야에게도 사정을 설명했다. 산자야는 “안 된다. 가지 마라. 우리 셋이 함께 이 무리를 보살피도록 하자”며, 오히려 둘을 설득하려 했다. 결국 200명과 함께 둘이 떠나자 산자야는 뜨거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200명의 사문들과 오는 것은 본 부처님은 말했다. “비구들아, 저기에 오고 있는 두 명은 콜리타(목갈라나의 속명)와 우파팃사(사리풋타의 속명)다. 그들은 가장 뛰어나고 현명한 나의 한 쌍의 제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불교사원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으로, 중생의 번뇌와 업(業)을 녹여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량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절은 두 가지 형태로 출발했다고 한다.
? 아바사[Avasa, 주처(住處)] - 비가 많이 오는 3개월간의 장마철에는 비구승들이 다니면서 수행하거나 교화할 수 없으므로 이런 때에는 단독으로, 또는 몇 사람이 임시로 방을 만들어 사는 일시적인 승려 거주처가 필요했다 - 임시 수행하기 위한 동굴 등- 이에 따라 생겨난 것이 아바사이다.
? 아라마[Arama, 원림(園林)] - 수도하기도 좋고 교화하기도 좋으며 보시받기도 편리한 도시나 큰 마을 주변의 한적한 숲에 일정한 대중과 승려가 거주할 수 있도록 마련한 건물이다 - 죽림정사나 기원정사가 여기에 해당 한다. - 아바사가 임시적이라면 아라마는 영구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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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아바사와 아라마는 부처님 입멸 이후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나 불상이 절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아란야, 비하라, 승가람마로 변해 갔다.
? 아란야(Aranya) - 원래 ‘숲 속’이라는 뜻으로 세속에서 멀리 떨어진 수행하기에 적합한 한적한 곳의 장소를 말한다. 즉, 적정처(寂靜處)라고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암자에 해당한다.
? 비하라(Vihara) - 수행자들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요사채로서 스님들의 생활공간이었다. 그리고 비하라엔 불상이나 탑을 모신 예불당(禮佛堂)을 갖춰서 종합적인 수도원의 성격을 띠는 곳으로서 정사(精舍)라고 했고, 탑을 모신 탑원(塔院)은 차이티아(caitya)라고 했다.
? 승가람마(Samgharama, 僧伽藍摩) - 부처님 당시의 아라마가 확장돼 종합적인 수도원의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중원(衆園), 승원(僧院)으로 해석한다. 이곳에는 스님들의 거처와 설법을 하기 위한 설법전, 식당 등 절을 운영하기 위한 여러 부속건물들도 함께 갖춰지게 된다. 기능면에서는 비히라와 같다고 한다.
마가다국은 ‘고대 16국’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이런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신흥대국의 국왕 빔비사라(Bimbisara)는 부처님의 45년간에 걸친 전법 일생에서 강력한 후원자였다. 따라서 왕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 수행처로서 죽림정사를 마련해주고, 우안거 동안의 수행지인 영취산으로 가는 전용도로도 닦아주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부친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 아자타사투루왕도 마찬가지여서 이 때 불교는 교단, 즉 ‘상가람(Sangharam, 僧伽)’의 기틀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자주 죽림정사(竹林精舍)에 머물며 가르침을 폈다. AD410년, 이곳을 찾은 법현(法顯)은 “두 개의 가람이 있고 몇몇 승려들이 죽림정사를 청소하고 있었다.”라고 했고, 그 후 640년에 들린 현장(玄?)도, “산성 북문에서 약 1리 남짓 가면 카란다 죽림원(竹林園)에 이른다. 지금도 정사가 있는데 동쪽으로 문이 나 있다. 부처님은 이곳에 오래 계시면서 중생들을 교화 제도하셨다. 지금도 여래의 몸과 같은 상이 서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번성함에 따라 죽림정사는 터만 남게 되고, 대나무조차도 현재는 많지 않다고 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이 덕 호(아미산)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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