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三歸依, 팔리어 띠사라나/Tisarana)>

2013. 11. 26. 08:00종교/불교의 향기

  <삼귀의(三歸依, 팔리어 띠사라나/Tisarana)>


   삼귀의란 불교도들이 불(佛) ? 법(法) ? 승(僧) 삼보(三寶, 팔리어 tiratna)에 귀의함을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요 연기적 존재이기에 크게는 이웃과 세계, 자연과 우주에 의지해 살며, 작게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어리석은 중생은 자식이나 재산, 권력, 혹은 지식, 명예를 추구하고, 그리하여 얻은 조그마한 성취에 도취돼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보장이라도 해주 듯 그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영원할 수가 없으며, 제법무상(諸法無常)의 가르침처럼 언젠가는 변해 떠나가기 마련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대신 탐(貪) ? 진(瞋) ? 치(癡) 삼독심에 의한 온갖 번뇌와 고통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괴롭힌다.

   이렇게 고통과 번민에 가득 찬 사바세계에서 진정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따를만할 영원한 의지처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 귀의(歸依)이며 믿음이다. ‘귀의’란 믿음을 받들고 몸을 바쳐서 구원을 청하는 생각이며, 마음의 깨달음에 의지해 일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해 마음속에 무한한 안위(安慰)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머무를 섬으로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준다.

   정신적 의지처가 없는 사람은 뜬 구름과 같은 불안과 방황의 삶을 산다. 그러기에 붓다께서는 <아함경>에서 “의지하고 존중할 대상이 없는 삶은 괴로움이다”라고 설하셨다. 따라서 불자가 귀의해야 할 대상은 불교에서 귀중하게 받들어 모시는 불 ? 법 ? 승 삼보인 것이다.

 

                 

   삼보(三寶)란 세 가지 보배라는 뜻으로 불(佛)은 우주와 진리, 인생의 참다운 모습을 깨닫고, 이에 의해서 다른 이를 가리켜 인도하는 부처님(Buddha)을 뜻하며, 법(法, Dharma)은 붓다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바탕 해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설한 교(敎)를 말하고, 승가(Sangha)는 그 법을 받들고 그에 따라 수학(修學)하는 불타제자집단을 지칭한다.

   불교인들은 붓다 당시부터 불 ? 법 ? 승 삼보에 귀의했으며,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따라서 삼귀의(三歸依)는 소승, 대승불교를 막론하고 불교도라면 누구나 받들어야 하는 의례로서, 불 ? 법 ? 승 삼보에 몸과 마음을 바쳐 신앙하는 불교도의 믿음을 표시하는 의식으로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의례이다. 이러한 삼귀의는 <대지도론(大智度論)>, <보성론(寶性論)>, <불지경론(佛地經論)>,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승의장(大乘義章)>을 비롯한 많은 논서에서 언급하고 있다.

   삼귀의례(三歸依禮), 삼귀의계(三歸依戒)라고도 하며, 삼귀례(三歸禮) 혹은 삼귀계(三歸戒)라고도 하는데, 불교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 할 정도로 불자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불교도가 존경해서 공양하는 불 ? 법 ? 승 삼보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위덕(威德)이 있는 최상의 것이며, 변하지 않음이 세간의 보배와 같다고 해서 삼보(三寶)라 한다. 그리고 이 셋을 삼보라 한 이유에 대해 <보성론(寶城論)>에서는,

   ① 선근이 없는 중생은 백천만겁을 지나더라도 이 삼보를 만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세상의 보물을 얻기 어려운 것과 같기 때문에,

   ② 삼보의 불가사의한 위력과 신통력이 세상의 보배와 같기 때문에

   ③ 삼보는 보배처럼 함부로 능멸할 수 없고 개변할 수 없기 때문에, 등 여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삼보가 그만큼 우리들 인생살이에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보성론(寶性論)---5세기 초엽 유가행파(瑜伽行派)에 의해 저술돼 대승불교의 여래장(如來藏)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 논서이다. 인도에서 찬술된 여래장 계열의 논서로서는 유일하게 온전한 산스크리트본이 남아있다. 정식명칭은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이고, 중국 북위(北魏) 시대(A.D. 508년경) 늑나마제(勒那摩提)가 한역했다.

   삼귀의는 원시불교 이래 수계식 등 모든 불교의식에 필수적이기에 가장 먼저 행해진다. 계(戒)를 받아 불교신도 또는 승려가 되기 전, 법회(法會)를 시작하기 전, 재(齋)를 열기 전에 먼저 귀의불 ? 귀의법 ? 귀의승의 삼귀의를 행한 뒤, 수계를 받거나 법회 또는 재를 개최한다. 삼귀의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취해지는 것은,

       ?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 으로서 한 구절을 외울 때마다 예경(禮敬)을 한다.

 

                   

   ?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며, 대원(大願)과 수행, 복덕(福德)과 지혜, 계(戒)와 정(定)을 구족하셔서 양발(兩足)로 서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짐이 없듯 일체(一切)를 평등심(平等心)으로 바라보시는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이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자귀어불 당원중생 체해대도 발무상심(自歸於佛 當願衆生 體解大道 發無上心 :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오니 마땅히 모든 중생은 진리를 깨달아 위없는 보리 마음을 낼지어다.)”라고 했다. 즉 부처님께 귀의함은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와 자비의 고향으로 돌아가 의지하는 것으로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이란 일체의 허망함과 욕심을 떠나라고 가르치시는 청정한 부처님 법[불법(佛法)]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자귀어법 당원중생 심입경장 지혜여해(自歸於法 當願衆生 深入經藏 智慧如海 : 스스로 바른 법에 귀의하오니 마땅히 모든 중생은 경장(經藏)에 들어가 지혜가 바다 같이 넓어지이다.)”라고 했다. 즉 모든 욕심을 버리고 법에 귀의하는 것은 무한광명과 참 생명의 고향으로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들과 더불어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이란 사람 무리 가운데에서는 가장 귀중한 승가(상가/Sangha)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승가란 명백하게 깨달음을 성취한 종교적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의 그룹을 뜻한다. 즉 여기서 귀의의 대상은 스님이 아니라 승가(불교교단)임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화엄경>에 이르길 “자귀어승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自歸於僧 當願衆生 統理大衆 一切無碍 : 스스로 승가에 귀의하오니 마땅히 모든 중생과 화합하고 대중을 싸안아 온갖 곳에 걸림이 없어지이다.)”라고 했다. 즉 승가에 귀의한다는 것은 청정과 평화와 평등의 고향으로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과 더불어 내 스스로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귀의란 불 ? 법 ? 승의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이니, 이제부터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목숨을 다 바쳐 귀의하는 마음을 굳건히 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실한 가르침을 존중하며, 그 법을 실천하고 널리 포교하는 사람들인 부처님의 후계자에게 귀의한다는 맹세의 표시인 것이다. 그리하여 육조 혜능(慧能)선사는 이를 풀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佛)이란 깨달음이고, 법(法)이란 마음이 올바름이며, 승(僧)이란 마음이 청정함이다.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해 그릇되고 어두운 것을 내지 않고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하게 생각해 재물과 색을 떠나면 이것이 양족존(兩足尊)이다.

   마음이 올바름에 귀의해 그릇된 소견이 없으면 남과 나를 따지는 일도, 탐욕과 애욕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욕존(離欲尊)이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에 귀의하면 온갖 지저분한 것과 애욕에 물들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중중존(衆中尊)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밤낮으로 삼귀계(三歸戒)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부처에게 귀의한다면 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무엇을 의지해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 귀의(歸依)한다는 말이 우습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신의 부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없다. 이제 스스로 깨달았다면 저마다 제 마음의 삼보에 귀의하라. 안으로 심성(心性)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남을 공경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함이다.”라고 했다.

   한편 고려 말 나옹(懶翁)선사께서는 자심삼보(自心三寶)에 귀의할 것을 강조했다. 나옹은 귀의를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항상 분명히 깨달아서 허명(虛明)하고 영묘(靈妙)하며 천연(天然) 그 자체로서 조그마한 조작도 없는 것을 자심불보(自心佛寶)라 하고, 탐애를 아주 떠나서 집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의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을 자심법보(自心法寶)라 하며, 청정해 더러움이 없고 한 생각도 생기지 않으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고 홀로 드러나 당당한 것을 자심승보(自心僧寶)라고 정의했다. 삼귀의례가 귀의대상을 외부에다 둔 타력신앙의 성격을 가진 것인 데 비해, 나옹의 자심삼보는 자기마음을 삼보로 삼아 스스로를 깨우쳐 간다는 자력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허명(虛明)---물욕도, 사심도, 선입관념도 없는 텅 빈 마음의 밝음을 의미함.

 

                      

   그리고 불 ?˙법 ?˙승 삼보는 나누면 셋이지만 합치면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승(僧)은 법(法)을 깨달아 불(佛)이 되는 것으로, 불은 법을 깨달은 승이요 승은 법을 아직 깨닫지 못한 불이고, 또한 법이 없으면 불도 승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원효(元曉)대사는 돌아가는바 하나의 마음(一心)이 곧 삼보라고 했다. 의미상으로는 불 ? 법 ? 승이 각각 다른 것이나 그 본질상으로는 다르지 않은 일체(一體)라 하는 동체삼보(同體三寶)임을 말한다.

   부파불교시대 아비달마불교의 <구사론(俱舍論)>은 삼보에 귀의하는 취지에 대해 ‘구제(救濟)’를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즉 일체의 고통에서 해탈하고자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는,

   ① 생사의 악 ? 불선(不善)에서 벗어나기 위해,

   ② 열반을 희구(希求)해서,

   ③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삼보에 귀의한다고 설명함으로써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함께 생각하는 대승불교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대승의장(大乘義章)---중국 수나라 시대 혜원(慧遠:523∼592)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해설서로서 불교교리 중 중요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 여러 경전과 논서, 수나라 이전 여러 학파의 주장을 모아 분류한 뒤 대승입장에서 평가하고 주석한 일종의 불교백과사전이다.

   결국 대승불교에 있어서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함께 하는 자성삼보(自性三寶)를 추구함이며, 이러한 자성삼보를 보게 되면 깨달아 미혹하지 않고, 바르고 삿되지 않으며, 깨끗해 오염되지 않으니 곧 모든 삼신불을 보게 되고, 그렇게 할 경우, 사람마다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일념(한 생각)이 바꿔지느냐에 달려 있다. 일념이 일어나면 망상집착에 전도되지 않으니 곧 부처이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신묘한가.

   마치 높은 지붕에 오르려면 사다리를 의지해야 하고 깊은 강물을 건너려면 뗏목을 의지해야 하듯이, 진리를 깨닫고 불국정토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삼보란 최상의 거룩한 공덕을 지닌 세 가지 보배로서,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청정한 공동체(僧寶)를 말한다. 붓다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고, 법(다르마)는 치료약이며, 승가는 간호사이다. 따라서 혼탁한 세속번뇌에 병든 중생이야말로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병든 몸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이덕호(아미산)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용함에 있어서 일일이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스크? 해 가시는 분은 출처를 분명히 밝히며 이용해 주세요. 아니면 저적권법에 저촉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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