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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1) 이방인 마키아벨리---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공동소장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3. 11. 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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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1) 이방인 마키아벨리
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공동소장

ㆍ변화에 대한 시대적 열망이 부활시킨, 마키아벨리의 ‘힘’

올해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De Principatibus)가 완성된 지 5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1532년 최초의 인쇄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그러했지만, 이 소책자는 마키아벨리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삭제되고 왜곡되어 자기의 본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교황으로부터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편견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식 번역을 따라 ‘론’(論)이라는 글자를 붙임으로써, 제목에서 ‘군주정에 대하여’라는 본뜻과 ‘원로원 수장’이라는 함의를 알 수 없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마키아벨리 전문가인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이 10회에 걸쳐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를 연재한다. 연재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 담긴 시민적 교양이 주목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통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함께 토론되기를 기대한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철학의 빈곤과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현상에 대해 이념적이고 규범적인 판단부터 하고 보는 습관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의 잣대로 낙인부터 찍고 보는 풍토, 방법상의 차이조차 적대적 대립으로 몰아가는 태도, 그리고 정치적 해결은 애초에 부정하면서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민주주의로 해결하려는 모순이 우리의 정치력을 가두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이제 누구도 어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려하지 않는다. 대신 공허한 담론 속에 감정적 극단으로 서로의 상실감을 부추기는 행동이 재생산되고 있다.

둘째는 ‘힘의 철학’에 의해 잠식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어느 사회보다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권력만 잡으면 세상을 뒤집어 버릴 수 있다는 이상한 정치적 현실주의가 이제 미시적 삶의 공간까지 부패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도 시장의 실패가 개개인의 무능력으로 치환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최선보다 최고를 요구하는 힘의 열망이 우리의 일상을 점점 황폐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고민들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희망 없는 현실주의’의 잔인함이 시민들의 지식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있다.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1438). 피렌체는 1432년 밀라노·시에나 연합군과의 산 로마노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토스카나 지방의 맹주가 되었다. 이 그림은 로렌초 메디치 등 피렌체의 영광을 꿈꾸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 버림받은 ‘위대한 예언가’…뜨거운 조국애로 집필 몰두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의 피렌체도 이런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 어느 사회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활기찬 도시였지만, 메디치 가문의 복귀와 함께 생명력을 잃고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인문주의자들은 도덕적 공론과 종교적 귀의로 현실을 회피했으며, 공화주의자들은 어설픈 권력론에 고취되어 시민들의 자유마저 위협하는 제왕적인 군주통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섰다.

이런 시기에 피렌체는 또 하나의 비극을 맞이한다. 바로 마키아벨리가 정치일선에서 쫓겨나 발언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찾아온 실직, 음모에 가담했다고 감당해야 했던 억울한 옥살이, 주변의 시기로 가로막힌 복직의 길, 메디치 가문에 낙인찍혀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했던 관조적 삶, 그리고 1527년 부활했지만 사보나롤라에게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로 끝내 그를 거부해버린 공화정까지, 그의 삶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의 고백마저 사치스럽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그 어떤 삶의 고단함도 조국 피렌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사랑을 꺾지는 못했다. 시민의 자부심이 강대국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학문과 종교의 사치가 부패와 독재를 부추기며,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에,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그를 <강론>(Discorsi)과 <군주>(De Principatibus)를 집필하도록 이끌었다. 이 두 편의 저술을 통해, 그는 인문주의자들에게는 고담준론 속에 잠든 ‘진정한 정치적 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고, 공화주의자들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시민들을 자유로 무장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반면 마키아벨리의 저작들이 동시대인들로부터 받을 홀대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가 실직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의 상상력을 훨씬 넘어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인 카사베키아(Casavacchia)가 그를 ‘위대한 예언가’(maggiore profeta)라고 치켜세웠듯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동시대인들은 많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유력가문의 자제들이나 귀족들에게 그는 ‘다른 생각’(contraria professione)을 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러기에 너무나도 혁명적인 ‘시민적 삶’에 대한 예언을 익숙한 수사의 뒤편에 감추었던 것이다.

■ 모사꾼부터 애국지사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크로체(Benedetto Croce)가 ‘아마도 풀리지 않을 문제’라고 고백한 것처럼,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은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그의 정치철학은 악마의 분장을 한 모사꾼으로부터 피렌체의 미래를 한탄하는 애국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자였다든지 현실주의자였다든지, 공화정을 꿈꾸었다든지 군주정을 옹호했다든지, 분석적이었다든지 열정적이었다든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든지 무신론자였다든지, 새로운 도덕을 주창했다든지 도덕을 무시했다든지, 참주가 되고자했던 선동가였다든지 시민적 자유를 열망한 정치가라든지 모든 주장들이 그만한 근거들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 동안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 대해 일치하는 평가가 있다. 바로 정치의 본질적 요소인 ‘힘’(fortezza)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힘’은 ‘권력’(potenza)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을 통해 사용되어지고 획득되어지기에, 설득이 배제되거나 초인간적 의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권력과 구분된 권위도, ‘지배받지 않으려는 열망’도, ‘힘’으로 구체화되고 그 역학 속에 이해되어진다.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고민도, 갈등에 대한 심리적 분석도, 모두 ‘힘’의 제도적 설계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의 ‘힘’에 대한 통찰력이 ‘변화’에 대한 시대적 열망을 대변해 온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했던 혁명가들도,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들도, 그의 책을 통해 변혁을 꿈꿨다는 것이 전혀 의아하지 않다. 그 어느 누구도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이 담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보편적 합리성과 도덕적 의무론도 실현가능한 최상의 정체를 만들고 실현시키려는 마키아벨리의 꿈을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힘’의 목적이다. 힘이 행사되는 공간으로서 정치가 지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훌륭한 요리사가 가지고 있는 칼과 강도의 손에 쥐여있는 칼이 전혀 다른 도구인 것과 마찬가지로, 힘에 대한 통찰력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정치는 곧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는 기쁨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힘에 대한 통찰력이 타인의 자유를 짓밟으면서까지 자기의 전망을 관철시키려는 목적만 갖고 있다면, 정치가 곧 자의적 지배가 행사되는 지옥으로 전락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말이다.

지금 우리는 무솔리니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인재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었던 ‘위계질서(Gherarchia)’라는 잡지에 소개한 글에서 보듯, 무솔리니는 마키아벨리로부터 ‘이기적 인간본성’과 ‘힘에 대한 찬양’만을 배웠다. 마키아벨리의 ‘힘’에 대한 통찰력이 ‘시민적 자유’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무솔리니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는 자기의지의 관철을 위한 ‘권력’이 최대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로 전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 ‘지배’에서 ‘비지배’로…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에 영감

‘정치 없는 민주주의’가 대안인 것처럼 우리의 귀를 현혹하고 있는 지금, 사회의 모순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는 절망이 우리의 삶을 잠식하고 있는 오늘, 마키아벨리의 호소에 다시 귀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참주의 스승으로 전락한 그의 모습으로부터 민주적 시민을 위한 교양을 찾아내야 하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어설픈 논리로부터 ‘다수’를 위한 민주적 리더십의 핵심들을 발견해야 하며, ‘필연성’이라는 식상한 이야기에서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적 제도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키아벨리로부터 대안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권력을 잡기 위한 기만적 수사와 전략적 선택 이상을 기대할 수 없고, 마키아벨리로부터 희망을 찾으려는 관심은 비관적 현실주의의 잔인함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힘에 대한 심미안은 양날의 칼이다. 특히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거기에는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 너머에 있는 ‘정치’라는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처세’나 ‘경영전략’이라는 측면에서의 독서는 오히려 덜 위험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키아벨리의 힘에 대한 통찰력은 조심스럽게 학습되어야 한다. 다수의 의사가 곧 힘이 되는 사회에서, 마키아벨리의 힘에 대한 심미안은 소수와 소외된 사람들을 제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통해 마키아벨리의 힘에 대한 통찰력이 ‘지배’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사용되기를 기대한다. 도덕적이고 올바른 정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도, 힘에 대한 솔직한 성찰을 원하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은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공공선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시민들의 교양이 될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가 그린 마키아벨리의 미소처럼, 우리의 닫힌 마음들이 그의 재치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을 다시 정치로 불러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독서가 아니라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탐닉하는 사람들만 풀 수 있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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