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3) 발전주의의 새로운 도전 : 박세일과 김종인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ㆍ두 경세가, ‘발전주의’ 혁신 모델 선진화와 경제민주화를 설파하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부여된 가장 중대한 과제는 ‘나라 세우기’였다. 나라 세우기의 목표는 무엇보다 현대적 제도와 의식의 정착에 있었다. 모더니티의 모험이라 부를 수 있는 나라 세우기를 구체화한 게 다름 아닌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시대정신이자 모든 프레임을 아우르는 ‘마스터 프레임’이었다.
법학자 박세일(왼쪽 사진)과 경제학자 김종인(오른쪽)은 모두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를 발전주의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진단과 처방은 달랐다. 박세일은 신성장 패러다임 구축을 통한 선진화를 주창한 반면 김종인은 시장과 국가의 균형을 강조한 경제민주화를 발전주의의 미래상으로 제시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신성장 패러다임 구축에 주력 박세일, 공동체 위한 책임 중시
시장과 국가 관계의 균형 강조 김종인, 민주주의 다양성 수용
대선 승리 기여해 ‘정치적 성공’ 실현 안돼 ‘사회적 실패’ 가까워
■ 발전주의란 무엇인가
사상의 측면에서 산업화 시대를 열고 추동해 온 것은 부국강병의 논리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력을 튼튼하게 하는 부국강병 사상은 근대 이후의 세계사에서 독일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후발(late) 산업화’의 기본 발전논리였다. 우리 사회에서 부국강병을 위한 산업화에 전력한 시기는 박정희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후발산업화를 벤치마킹한 이른바 ‘후후발(late late) 산업화’를 추진해 고도성장을 이뤘다.
산업화 시대는 명암이 뚜렷한 시기였다. 이 시대에 우리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모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났고,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췄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정경유착과 인권탄압이 이뤄진 권위주의 시대였다. 우리 사회 심층의식의 한 흐름인 성장지상주의와 군사문화가 뿌리내린 시기도 이 시대였다.
산업화 시대를 관통하는 부국강병 논리를 나는 ‘발전주의(developmen talism)’라고 이름 짓고 싶다. 발전주의란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두되 국가가 그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것을 강조하는 이념을 뜻한다. 발전주의와 유사한 개념으로 ‘발전국가’나 ‘개발독재’를 들 수 있다. 이 셋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두 가지다. ‘선 성장 후 분배’가 하나라면,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다른 하나다.
현재의 시점에서 산업화 시대의 발전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민주화가 가져온 ‘사회적 효과’다. 초기 발전주의는 정치·사회적 권위주의의 기반 위에 추진됐지만,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는 새로운 국가-시민사회의 관계를 구조화해 왔다. 시장의 역동성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정부를 상급동반자로, 시장을 하급동반자로 하는 발전주의 모델은 세계화 시대에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새로운 국가-시장의 관계를 요구했다.
이러한 발전주의를 새롭게 혁신하려는 시도는 보수 세력에게 부여된 매우 중대한 사상적·정책적 프로젝트였다. 발전주의의 진화와 혁신을 선구적으로 모색해 온 두 사람은 법학자 박세일과 경제학자 김종인이다.
<대한민국 선진화전략>과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표지
■ 박세일의 선진화론
몇 해 전 나는 박세일을 한국 최고의 ‘아카폴리’ 사회과학자로 부른 적이 있다. 아카폴리는 ‘아카데미즘’과 ‘폴리시 스터디스’(policy studies·정책 연구)를 적극 결합한다는 의미다. 박세일은 학자인 동시에 정치가다. 그는 지식인이라기보다 경세가, 뜻을 이룰 상황이면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학문에 전력하는 이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박세일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와 미국 코넬대에서 법학 및 경제학을 공부했다. 서울대에서 법경제학을 가르쳐 온 그는 김영삼 정권에서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등을 맡았다. 1999년 서울대로 돌아왔지만,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2005년 다시 서울대로 돌아온 그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창립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2012년 총선에서 ‘국민생각’을 창당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박세일을 학계와 정치권에서 일약 유명하게 만든 책이 2006년에 발표한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다. 선진화론의 출발점을 이룬 이 책의 문제의식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가 새로운 국가 목표가 돼야 한다는 데 있다. 선진화론은 세 가지 핵심 아이디어로 구성돼 있다. 국가 비전으로서의 선진화, 철학으로서의 공동체 자유주의, <창조적 세계화론>에서 제시한 새로운 발전전략으로서의 ‘서울 컨센서스’ 10대 전략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개념은 공동체 자유주의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를 말한다.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성찰적 배려와 자율적 책임을 중시하는 공동체 자유주의는 한나라당 강령에도 실릴 만큼 보수의 새로운 철학으로 주목받았다.
박세일은 수정주의역사관, 결과평등주의, 집단주의, 반법치주의, 포퓰리즘을 5대 반(反)선진화 사상으로 지목한다. 이에 맞서 그가 제시한 제도와 정책의 선진화를 위한 5대 핵심 전략은 교육·문화의 선진화(최고 핵심전략), 시장 능력의 선진화(선진경제), 국가 능력의 선진화(선진정치와 행정), 시민사회의 선진화(선진시민사회), 국제관계의 선진화(선진외교안보)다.
선진화론의 명암은 분명하다. 박세일은 민주화를 넘어서는 보수의 새로운 시대정신, 즉 이념적·정책적 좌표를 제시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강조한 ‘부민덕국(富民德國)’은 부국강병의 21세기형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선진화론은 성장과 개방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분배와 복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다. 한때 각광받았지만, 최근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복지국가론 또는 경제민주화론과 비교할 때 선진화론은 서서히 잊혀가는 것으로 보인다.
■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론
지난 몇 년간 정치인 및 학자들과 시리즈로 대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경향신문에서 이상돈과 진행한 ‘대화’와 김상조와 진행한 ‘대논쟁 시대정신’이 그것이다. 이 두 기획에 모두 초청한 유일한 인사가 바로 김종인이다. 박세일과 함께 김종인은 우리 시대에 주목할 또 한 명의 경세가다. 1970년대 의료보험 도입, 1987년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 신설, 재벌개혁에 대한 일관된 강조 등 그가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결코 작지 않다.
김종인은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와 독일 뮌스터대에서 독일어 및 경제학을 공부했다. 서강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 정계에 입문해 노태우 정권의 경제수석, 보사부 장관, 네 번의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최근 그가 큰 관심을 모은 것은 지난해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과 경제민주화 추진단장을 맡아 박근혜 후보의 18대 대선 공약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김종인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경제민주화다. 1987년 헌법 제119조 2항인 경제민주화 조항은 그가 주도해 만들었다는 점에 착안해 ‘김종인 조항’으로도 불린다. 지난해 대선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11월 그는 자신의 학문적 생각과 정치적 이력을 담은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를 출간했다.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론을 지탱하는 기둥은 셋이다.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 테어도어 루스벨트 정권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권을 거쳐 존슨 정권에 이르는 미국 경제정책의 교훈,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 자문에서 노태우 정권의 경제수석에 이르는 현장 체험이 그것이다.
김종인의 문제의식은 명쾌하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 성장의 효율만을 중시한 나머지 압축성장하는 과정에서 독점과 과점을 조장해 재벌(그는 대규모 경제세력이라 부른다)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졌다는 게 그의 시대진단이다. 그에게 경제민주화란 한마디로 재벌이 나라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경제의 최대 현안인 양극화를 해소하고 역동적인 시장경제를 가꿔나가기 위해 그는 재벌·노사관계·복지·조세 및 재정, 금융 분야의 포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개혁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 한가운데 ‘강한 정부’와 대통령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주장의 핵심을 이룬다.
발전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승인해야 한다는 김종인의 경제 논리는 시장지상주의라 부를 수 있는 영미식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압도적인 우리 현실에서 매우 이채로운 것이다. 경제민주화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데는 그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했다. 그러나 재벌의 소유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도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그의 처방은 재고를 요청한다. 더불어 대통령의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제도개혁을 중시하는 그의 또 다른 주장과 중대한 내적 긴장을 안고 있다.
■ 발전주의의 미래
박세일과 김종인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경세가다. 두 사람 모두 정부 정책의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은 유사하다. 하지만 제시하는 해법들의 방향은 크게 다르다. 박세일의 선진화론이 세계화 시대의 신성장 패러다임 구축에 주력한다면,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론은 민주화 이후의 시장-국가 관계의 균형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담론이 가져온 결과다. 선진화론은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건 ‘선진일류국가’의 토대가 됐고, 경제민주화론은 지난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내건 ‘국민행복시대’의 핵심을 이뤘다. 두 후보가 선거에서 모두 이겼으니 담론은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5년과 박근혜 정권 1년을 돌아보면, 선진화론과 경제민주화론이 결국 ‘선거용’으로 소비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거두기 어렵다. 이 점에서 두 담론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담론과 현실의 거리다. 나중에 장하준과 김상조의 경제 연구를 다룰 때 다시 논의하겠지만, 세계화 시대에 발전주의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는 우리 경제 사상과 실천에서 매우 중차대한 과제다. 이런 맥락에서 선진화가 좌절되고 경제민주화가 지체되는 현실이 더없이 안타깝다. 우리 사회 보수의 최대 문제는 정치·사회 세력은 존재하되 사상이 부재했다는 데 있다. 박세일의 선진화론과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론은 빈곤한 보수 사상에 의미 있는 영감과 통찰을 제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