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1) 자유주의의 외로운 초상 : 최인훈과 김수영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ㆍ그들, 초라한 자유주의를 증거하고 구속하는 현실에 절규하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생각의 방법 및 내용을 사상이라고 한다. 사상은 사회발전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것을 이끌어간다. 산업화 30년에 이어 민주화 30년으로 가는 현재, 우리 사상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이 기획은 열두 번에 걸쳐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을 다뤄보고자 한다. 문제의식은 두 가지다. 첫째, 산업화와 민주화가 현대성의 양면이라면, 우리 사회는 그 현대성의 한 순환을 마감하고 있다. 산업화는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사슬 풀린 시장 권력이 새로운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있다. 민주화는 군부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 절차를 제도화했지만, 그 기반은 여전히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지나간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첫 번째 문제의식이다.
둘째, 현대성의 사상은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뤄져 있다. 자유주의·발전주의·민주주의·민족주의·세계주의·인문주의·생태주의·페미니즘 등은, 수많은 신들이 영원한 투쟁을 벌이는 게 현대성의 특징이라는 막스 베버의 경구처럼, 서로 토론하고 경쟁해 왔다. 이 사상들이 정치·사회세력과 결합해 싸워 온 게 우리의 현대사를 이룬다. 이런 사상이 선 자리와 갈 길을 살펴보려는 것이 두 번째 문제의식이다. 이제 그 첫 번째 풍경으로 자유주의를 돌아보고자 한다.
최인훈과 김수영은 1960년대 자유주의 논쟁을 불러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최인훈의 소설이 초라한 자유주의를 증거했다면, 김수영의 시는 자유를 구속하는 현실을 절규했다. 최인훈(위쪽)과 김수영의 초상은 각각 이강훈과 정병례의 작품이다.
▲ 중도의 비극을 간파한 ‘광장’현실적 자유주의 노래한 ‘풀’
최인훈·김수영이 열망하던 자유주의는 오히려 후퇴, 신자유주의만 전성시대 구가
■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사유재산의 보호가 자유주의의 출발점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우리 사회에서 보수든 진보든 자유주의를 앞에 내걸었지만 그 초상이 대단히 초라하다는 점이다.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자기 정체성으로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자유주의적인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로 자신을 지탱해 왔다. 진보는 때때로 자유주의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에 맞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렇게 빈곤한 자유주의에 생명을 불어넣은 두 지식인은 인문·사회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였다. 소설가 최인훈과 시인 김수영이 그들이다. 최인훈의 소설은 초라한 자유주의를 증거하고, 김수영의 시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자유를 구속하는 현실에 대해 절규한다.
■ 최인훈과 중도적 자유주의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1960년 <광장>을 발표함으로써 해방 이후 최고의 문제적 작가로 부상했다. <광장>은 1960년 10월 잡지 ‘새벽’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을 여섯 번이나 고쳐 다시 내놓았다.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舊)정권 하에서라면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초판 서문에 쓴 말이다. ‘구정권’은 이승만 정권을, ‘빛나는 4월’은 4월혁명을 뜻한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에서, 이후에는 남한에서 살아온 경험은 최인훈에게 두 사회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광장>에서 주인공인 철학도 이명준 역시 남과 북의 현실을 모두 체험하고, 그 이념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사멸했습니다. (…)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명준이 북한에서 발견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소설의 시간은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다. 하지만 이 표현은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남과 북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살아 있되 이기적 욕망만 넘치는 사회와 혁명을 앞세우지만 인간이 죽어 있는 사회, ‘광장 없는 밀실’(남한)과 ‘밀실 없는 광장’(북한)은 1950년대 한반도에 존재한 두 자화상이었다. 결국 남은 선택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일 수밖에 없었다.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이명준은 자살을 감행한다.
<광장>을 이끌어가는 최인훈의 사상적 거처는 자유주의다. 하지만 1950년대의 현실은 자유주의를 품어 안을 수 없었다. 냉전분단체제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냉전분단체제는 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양축을 이뤘다. 반공주의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검열 장치로 기능했다면, 권위주의는 사회의 재생산 방식 그 자체였다. 북한은 더 심각했다. 증오로 무장된 반미주의와 공산주의적 전체주의가 사회를 철저히 지배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현대성의 중핵을 이룬다. 이 민주주의는 다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원리로 삼는다. 개인의 천부적 자유와 이 자유에 대한 책임, 그리고 그 자유에 기반한 경쟁은 민주주의와 현대성의 출발점이다. ‘가짜’ 자유주의만이 넘치는 사회,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당연시하는 사회가 바로 1950년대의 빛바랜 초상이지 않았던가?
<광장>은 중도의 비극을 상징한다. 최인훈은 현실의 좌파와 우파로부터 모두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중도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 중도적 자유주의는 그 어디에도 닻을 내릴 수 없었다. 1960년대에 <회색인> <총독의 소리> 등 실존적 자아의 고뇌와 식민지적 현실의 비판을 다룬 소설들을 발표한 최인훈은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낸 다음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들고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광장>과 <김수영 전집> 표지.
■ 김수영과 현실적 자유주의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1965년 발표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한 구절이다. 자유주의자인 김수영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다.
김수영은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등에서 연극과 영문학을 공부했다. 해방 직후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정부 수립 이후 한국전쟁과 4월혁명을 거쳐 산업화로 나가는 길목에서 자유의 정신을 자신의 표현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갔던’ 지식인이다.
그가 남긴 <김수영 전집> 두 권은 요즘도 널리 읽히는 우리 현대의 고전이다. 특히 <전집 1: 시>는 해방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 땅에서 살아온 한 자유주의자의 외로운 내면풍경을 생생히 엿보게 한다. 그의 분방한 상상력과 예민한 자의식은 부국강병의 우파 논리나 사회변혁의 좌파 논리와 태생적으로 조화되기 어려웠다.
김수영의 자유주의는 개인적 영역에 머문 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 대한 성찰로 일생 진화했다. 그 첫 번째 계기는 서구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의 자각이다. “1950년 7월 이후/ 이 나라의 비좁은 산맥 위에 자태”를 보인 “헬리콥터여 너는 설운 동물이다”/ -자유/ -비애”(‘헬리콥터’, 1955)라고 그는 노래한다. 헬리콥터로 상징되는 서구문명의 ‘자유’에 열광했지만, 그 자유의 다른 이름은 ‘비애’였다. 서구적 이상과 한국적 현실의 거리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린 설움’이었다.
이 설움의 자유주의는 4월혁명이라는 두 번째 계기를 맞이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1960)이라고 노래함으로써 그의 자유주의는 현실의 목소리를 얻는다. 자유를 향해 진군하는 우렁찬 그의 목소리는 5·16 쿠데타도 막을 수 없었다. ‘풍자만 할 수도 없고 해탈만 할 수도 없는’ 현실의 심장에 그는 화살을 겨눴다. 그 화살의 하나가 당당히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였다.
이러한 ‘현실적 자유주의’의 절정이 ‘풀’(1968)이었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풀은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 풀은 개인이거나 민중일 수 있고, 너이기도 하며 나이기도 하다. 바람의 구속을 거부하는 풀의 자유를 노래했던, 표현의 자유와 이를 위한 정치적 자유를 그 누구보다 열렬히 옹호했던, 천상의 관념적 자유주의를 지상의 현실적 자유주의로 하강시켰던 고독한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1968년 초여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안타깝게 떠났다.
■ 자유주의의 현재와 미래
문제는 현재다. 돌아보면 최인훈과 김수영이 그토록 열망했던 자유주의는 유신시대와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 아래서 오히려 후퇴했다. 1987년 민주화 시대가 열렸건만 자유주의는 그 주인이 아니었다. 당장 현실을 보라.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사태’에서 볼 수 있듯 표현의 자유는 거부당하고, ‘채동욱 검찰총장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사생활과 인권은 여지없이 침해되고 있다.
정치·사회적 자유의 빈곤만이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반인 고전적 자유주의는 이렇게 초라한데, 인간과 사회가 부재한 자유주의인 신자유주의는 정작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시장의 경쟁 원리를 배타적으로 특권화한 이 신자유주의는 양극화를 강화하고 사회통합을 훼손해 왔다. 지속불가능한 신자유주의가 시민사회 위에 오만하게 군림해온 것은 민주화 시대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쓸쓸한 풍경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는 미완의 사상적 프로젝트다.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정의’는 시간의 구속을 넘어서는 우리 공동의 미래다. 자유주의가 당연히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김수영이 ‘꽃잎 1’에서 노래하듯,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은 공동체의 책임과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은 개인의 자유가 공존하는 그런 미래를 꿈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당연한 권리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