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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2) 민족주의, 역사와 미래 사이에서: 이기백과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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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ㆍ두 지식인, ‘민족의 발견’을 실증하고 ‘주체적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우리 현대사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사상을 꼽으라면 세 가지를 지목할 수 있다. 민족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발전주의가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으로, 민주주의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으로 나타났다면, 민족주의는 이 둘을 아우르면서도 동시에 독자적 사상의 프로젝트로 우리 사회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이 기획은 민족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를 차례로 그 사상의 풍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학자 이기백(왼쪽 사진)이 ‘역사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민족의 역사를 보편성 속의 특수성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사회과학자 리영희(오른쪽)는 민족적 시각에서 민주주의의 새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민주적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역사에 과학을 접목한 이기백 ‘역사적 민족주의’ 증거
냉전적 시민의식 틀 깬 리영희 ‘민주적 민족주의’ 설파
민주주의·세계주의 공존하는 미래의 민족주의 성찰 필요


■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민족주의에는 두 이론적 전통이 맞서왔다. ‘영속주의’와 ‘현대주의’가 그것이다. 영속주의가 민족을 과거로부터 이어진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로 본다면, 현대주의는 민족을 모더니티의 발명품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민족의 기원을 고대나 중세로부터 찾는 게 영속주의이며, 근대화가 민족주의를 만들고 이어 민족을 창조했다고 보는 게 현대주의다. 앤서니 스미스 이론이 영속주의를 대변한다면, 베네딕트 앤더슨 이론은 현대주의를 대표한다.

그 기원을 어디에 두든 서구 민족주의와 비서구 민족주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비서구 민족주의의 경우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고 민족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평생을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김구의 <백범일지> 가운데 ‘민족국가’의 한 구절이다.

■ 이기백의 ‘역사적 민족주의’

2006년 제49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는 ‘우리 시대의 역사가를 말한다’라는 주제의 콘퍼런스가 열렸다. 한 시대를 풍미한 동양사학자 민두기, 서양사학자 민석홍, 국사학자 이기백과 김용섭에 대한 후학들의 평가가 이뤄졌다. 여기서 서양사학자 김기봉은 ‘모든 시대는 진리에 직결돼 있다 - 한국 역사학의 랑케, 이기백’을 발표한 바 있다.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다. 국사학자 제1세대를 대표하는 이기백은 한국 역사학의 랑케라 불릴 만하다. 그는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서울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서강대 등에서 가르쳤다. 전공 분야는 고대사와 중세사, 특히 신라사였다. 그는 시민을 위한 역사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1987년 창간한 반연간지 ‘한국사 시민강좌’의 책임편집위원을 맡았다.

이기백의 역사학은 세 층위로 이뤄져 있다. ‘방법’으로서의 역사학은 실증주의에 기반한다. 이 방법론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한다는 점에서 역사학의 과학적 성격을 강조한다. ‘해석’으로서의 역사학은 인간중심주의를 중시한다. 인간·사회세력·지배세력의 변동을 중심으로 그는 우리 역사의 역동적 변화를 서술한다. ‘사상’으로서의 역사학은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민족의 발견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게 그의 역사학의 최종 목표다. 이러한 탐구의 대표 성과가 1967년에 출간된 <한국사신론>이다.

역사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는 통사의 서술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물론 일관된 관점에 기반한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사 서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역사를 이끌어왔는가다. 이기백의 역사관은 민족을 주목하되 지배세력(주도세력)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는 계급 또는 민중을 중시하는 역사관과 사뭇 다르다.

이기백의 역사관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볼 때 사건사의 측면에선 지배세력의 역할이 두드러졌을지라도 구조사의 측면에선 민중 또는 시민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리고 사건사와 구조사를 매개하는 국면사에선 지배세력과 민중세력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이 역사의 실체를 이뤄온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사실로서의 역사는 이기백의 역사관과 민중사학의 역사관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이기백의 역사학이 우리 사상에 기여한 바는 민족의 역사를 보편성 속의 특수성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역사의 여러 법칙은 어느 민족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법칙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에 개별 나라의 특수성을 갖게 된다는 이기백의 언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 우리 사회 모더니티의 모험도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 동시에, 분단체제와 압축형이라는 한국사적 특수성 또한 갖고 있다. 이기백의 삶에서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들인 소설가 이인성에게 남긴 유서였다. 묘비에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말을 적어주기를 소망한 그 내용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한국사신론> 한글판 머리말에 나오는 이 말은 이기백이 일생 동안 추구해온,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과학으로서의 역사 사이에 가교를 놓고자 했던 ‘역사적 민족주의’를 증거한다. 2004년 그는 안타깝게 이승을 달리했다.

<한국사신론>과 <전환시대의 논리> 표지


■ 리영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해방 이후 가장 문제적 지식인을 한 사람만 들라면 당연히 리영희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국제관계라는 학술 영역은 물론 시민적 계몽이라는 대중 영역에서 주목할 성취를 이뤄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필두로 그가 펴낸 일련의 저작들이 우리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은 다른 지식인들과의 비교를 불허한다.

리영희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경성공립공업학교, 국립한국해양대에서 공부했고, 기자 생활을 하다가 한양대에서 가르쳤다. 리영희 사상을 어느 하나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그가 펼쳐보인 사상의 숲에는 자유주의·민주주의·민족주의·평화주의가 모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무기로 그는 반공주의·군사독재·외세주의에 당당히 맞섰다. 이 가운데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그의 생각과 신념을 지탱해온 두 축이었다.

‘사상가 리영희’를 우리 앞에 등장시킨 것은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1974년 유신체제 아래서 출간된 이 책만큼 1970~1980년대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 저작을 찾기 쉽지 않다. 이 책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를 특징지어온 냉전분단체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책의 내용은, ‘아시아, 중국, 한국’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변화하는 동아시아를 다룬다. 중국의 재인식을 중심으로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대외정책,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화,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역사와 현실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분석과 예리한 통찰을 통해 냉전체제에 갇혀 있던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전환의 시대’에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려는, 대외의존적 사유에서 주체적 현실인식에로의 전환을 요청하려는 게 이 책이 겨냥한 목표였다.

한반도는 동아시아 지정학(geo-politics)과 지경학(geo-economics)의 중심을 이룬다. 해양 세력(미국·일본)과 대륙 세력(중국·러시아)의 교차점에 놓여 있고, 더욱이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돼 있다. 리영희는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냉전적 보수주의에서 벗어난 균형적 현실주의의 시각이다. 다른 하나는 외세적 관점을 넘어선 민족적 시각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리영희를 관통하는 사상을 나는 ‘민주적 민족주의’라 이름 짓고 싶다.

<전환 시대의 논리> 이후 리영희는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그리고 최근 <대화> 등에 이르는 저작들을 통해 진보적 지식사회의 최전선에 서서 냉전분단체제라는 우상의 파괴자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가 제시한 몇몇 가설들은 더러 낡았고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체적 관점에서 탈냉전적 국제질서를 모색한 것은 더없이 선구적인 통찰이었다. 리영희만큼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은 지식인도 드물다. 보수 세력엔 ‘의식화의 원흉’으로 비판받았지만, 진보 세력엔 ‘사상의 은사’라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리영희가 겪었던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세 번의 징역’은 민주화 세력의 역사를 그대로 증거한다. 그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전 파병 결정에 맞선 반대 시위에 노구를 이끌고 참여한 모습이었다. 그는 역사의 관찰자인 동시에 주인공을 맡은 아주 드문, 진정 용기 있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2010년 그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났다.

■ 민족주의의 미래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준다. 한편에선 서로 다른 민족주의들이 격렬히 충돌하고, 다른 한편에선 세계 시민사회의 등장과 다문화사회의 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의 배타성이 시험대 위에 올라서 있다.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는 물론 월드컵 거리 응원과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이슈들이 민족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민족주의는 본디 개인주의라기보다 집단주의의 정치·사회적 프로젝트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의 한 차원인 국가주의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개인주의는 태생적으로 내적 긴장을 이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지구적 차원에서 패권주의에 맞서는 여전히 유효한 기획이다. 미국과 중국이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는 G2 시대의 개막이 상징하듯이, 세계화 시대가 강화된다고 해서 민족주의가 일방적으로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민족주의의 이러한 상반된 특성은 그 미래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게 한다.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성찰, 다시 말해 ‘성찰적 민족주의’가 요구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성찰적 민족주의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 대내적으로 민주주의와의 공존을 모색하고, 대외적으로 세계주의와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게 그것이다. 새로운 성찰적 민족주의로 나아가는 데 이기백의 역사적 민족주의와 리영희의 민주적 민족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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