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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의 재해석 ④ 벤치마킹 - 창덕궁 후원비정형적 조형미·절제된 아름다움 극치 / 조선 군주들 쉼터…지배층 건축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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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무맨 2013. 10. 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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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의 재해석 ④ 벤치마킹 - 창덕궁 후원비정형적 조형미·절제된 아름다움 극치 / 조선 군주들 쉼터…지배층 건축 롤모델

정진우  |  epicure@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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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06  17: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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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후원 부용지. 사각형 연못인 이곳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를 품고 있다.

100여년 전만 해도 창덕궁과 창경궁은 외부와 단절된 신성한 공간이었다. 왕족이 아니면 숨소리 조차 넘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창덕궁과 창경궁은 왕과 왕족을 위한,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특별하고 유일한 문화유산들을 에두르고 있다. 여기에 세월의 숙명같은 더께까지 내려앉았다. 이렇게 궁궐은 영기어린 민족의 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궁궐정원의 진수로 불리는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 정원을 지면으로 만나본다.

숨이 막힌다. 과연 이곳이 속세인지 잠시 망설여진다. 창덕궁 구중심처에 자리잡은 후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한폭의 산수화에 빠져들게 된다.

후원은 조선 궁궐 정원의 고갱이다. 한 나라의 대표 문화는 지배층의 문화이고, 그 시대 그 민족의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척도는 다름아닌 궁궐문화라는 점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후원은 조선시대 지배층이 품고 있던 건축적 이상이 구현된 공간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못한다.

창덕궁은 조선의 이궁(離宮)이다.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정궁이었다면, 창덕궁은 태종에 의해 별궁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또 창덕궁은 자로 잰듯한 비례와 질서를 앞세운 경복궁과 달리 건물들이 좌우대칭 일직선상에 배치되지 않으면서 '산세의 흐름을 거스리지 않는 비정형적 조형미'를 추구한다. 경복궁이 사무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이 큰 반면 창덕궁은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배여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선의 국왕들은 경복궁 보다는 창덕궁에서 머물렀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이 모두 불탔을 때에도 가장 먼저 재건된 궁궐이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후원도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창덕궁의 미덕을 깨트리지 않는다.

부용지와 주합루, 애련지와 연경당, 존덕지와 반도지, 옥류천 등이 들어선 후원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국 최고의 정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통명전 연지(위)와 춘당지.

후원은 숨겨진 정원이라 해서 비원(秘苑)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정원이라 해서 금원(禁苑)으로도 불렸다. 이렇듯 후원은 나랏일로 분주한 조선 군주들의 전용 휴식처이자, 왕을 위한 정원이었다.

후원으로 향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부용지를 기준으로 남쪽에는 부용정, 동쪽에는 영화당, 북쪽에 위치한 주합루를 만난다.

부용지는 사각형 연못인 부용정과 그 가운데에 원형의 섬으로 구성돼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리가 읽혀진다.'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을 의미하는 주합루는 1층의 왕실도서관인 규장각과 2층의 열람실 겸 전망 좋은 마루로 구성된 복층구조이다.

주합루의 직선상에는 등용문이자, 임금과 신하를 상징하는 어수문이 있다. 영화당 앞마당에서 과거시험을 통과한 인재들은 등용문인 어수문을 거쳐 주합류와 규장각을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고 한다.

발길을 돌려 춘당대를 거쳐 효명세자가 독서를 즐겼다는 의두합을 지나면 상대적으로 소박한 애련지에 이른다. 애련지를 둘러본 뒤 연경당, 관람지, 관람정, 존덕지, 존덕정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옥류천이 나온다. 인조 때 조성된 옥류천은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임금과 신하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문을 짓는 유상곡수연이 행해졌다고 한다.

후원에서는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를 천착한 한국 전통정원의 기본원리를 체득할 수 있다. 상서로우면서도 사색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공간, 다름아닌 창덕궁 후원이다.

● '힐링 공간' 창경궁 정원

- 권위 감춘 채 여유·위안 가득

창덕궁 후원이 왕실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창경궁의 후원은 크고작은 정치적 행사를 위한 개방적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 성종 14년(1483년)에는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등을 모시기 위해 증축한 뒤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꿨다. 숙종이 장희빈을 처형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궁중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또 일제강점기에 놀이공간인 창경원으로 격하됐던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 탓에 아직도 '창경원=유희공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뒤로 하고도 창경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건물이 적은 탓에 권위적인 느낌이 덜한 대신 여유와 위안을 전해준다. 창경궁의 나무그늘을 걷고 있다보면 '아, 좋다'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창경궁의 후원은 현재 춘당지가 있는 북쪽이다. 현재는 창경궁에서 옛 전통정원을 감상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통명전 지원, 낙선재 후원, 춘당지 등이 꼽힌다.

낙선재의 경우 세자·세자빈·후궁들이 거처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앞세워 주변 경관요소들이 뛰어나다.

영춘전 맞은편 언덕 아래에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장희빈과 인현황후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곳이기도 하다.

통명전을 지나서 수림이 우거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꽤 넓은 면적을 가진 큰 연못과 작은 연못으로 이루어진 춘당지를 만나게 된다.

유장한 역사의 생채기가 서려있는 창경궁 정원, 이제는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여유와 휴식을 전해주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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