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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의 재해석 ⑤ 벤치마킹-영양 서석지기품있는 진경 한눈에…은둔과 여유 '유가 이상향'

숲에 관하여/숲, 평화, 생명, 종교

by 소나무맨 2013. 10. 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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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정원의 재해석 ⑤ 벤치마킹-영양 서석지기품있는 진경 한눈에…은둔과 여유 '유가 이상향' / 1530㎡ 공간 돌 하나에도 성리학·인본주의 담아내

정진우  |  epicure@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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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13  17: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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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석지 전경. 일반적인 전통정원과 달리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가로 13.4m, 세로 11.2m 크기의 연당을 중심으로 '은둔과 여유'의 유가적 이상향을 담아내고 있다.
 

경북 영양은 영남은 물론 한국에서도 오지로 꼽힌다. 영양과 더불어 인근의 봉화, 청송을 묶어 'BYC'라는 별칭이 있다. 그만큼 이들 3개 군(郡)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은둔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자리잡은 서석지도 그런 은둔의 미학을 닮은 전통정원이다.

처음 이곳을 찾은 방문객이라면 '과연 이곳이 조선의 3대 민간정원이 맞을까'하는 의구심을 앞세우곤 한다.

하지만 서석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정갈하고 기품있는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둔과 여유의 진경을 간직한 공간이라는 설명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서석지는 전국의 이름난 전통정원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1530㎡의 공간이 전부다. 하지만 작은 돌 하나에도 성리학과 인본주의의 이상을 담아내며 '바로 이곳이 진정한 유가의 정원'임을 숨기지 않는다.

서석지는 1613년(광해군 5년)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1577~1650년)이 조성한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석문 선생은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하면서 학문 정진하기 위해 연못(池塘)을 만들었다. 그의 나이 36세때다. 석문은 퇴계 이황-서애 유성룡-우복 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삼전(三傳)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서석지는 경정(敬亭)을 비롯해 사우단(四友壇), 한가지 뜻을 받드는 서재라는 뜻의 주일재(主一齋), 연당(蓮塘) 등으로 이뤄져 있다.

무엇보다 여느 전통정원과 달리 서석지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국의 이름있는 민간정원이 주변 자연과의 동화에 많은 고민을 품고 있다면, 서석지는 자연과 정원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연못의 동북쪽에 있는 주인의 거처인 주일재의 경우 연못이 아닌 사우단을 바라보게 배치했고, 강학공간인 경정은 연못 전체를 내려다 본다. 대문 옆으로는 큰 은행나무를 심어 많은 인재들이 나올 것을 기원했다. 정명론(正名論)에 의한 인본주의에 천착했던 석문 선생의 학문적 포부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셈이다.

대문을 열면 왼편 서단에 경정이 자리하고 있다. 경정은 넓은 6칸 대청과 방 2개로 되어 있는 큰 정자이다. 대청마루에 걸린 편액이 이곳의 세월과 연륜을 대변한다. 경(敬)은 단순한 공경의 뜻이 아니라 퇴계학파에서 가장 중시하는 사상개념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주변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경이다.

서석지의 핵심은 단연 가로 13.4m, 세로 11.2m 크기의 연당이다. 평지에 연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돌을 배치해 연을 심었다. 못을 파면서 땅속에서 많은 바위들이 나왔고, 석문 선생은 이 바위들에게 맹자와 중용 등에서 따온 이름들을 붙이며 생명을 불어넣었다. 수륜석, 어상석, 관란석, 화예석, 상운석, 봉운석, 난가암, 통진교, 분수석, 와룡암, 탁영석, 기평석, 선유석, 쇄설강희절암 등이다.

서석(瑞石)이란 이름도 '이 연못을 팔때 땅 속에서 상서로운 모양의 돌이 나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발을 벗고 경정마루에 올라본다. 난간에 기대니 한점의 바람이 스쳐간다. 사방은 적막하고 연못은 잠잠했다.

석문 선생의 인생관과 욕망이 은밀하게 읽혀진다. '서석지는 완상만 하는 정원이 아닌, 읽고 사색하는 정원'이라는 설명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서석지는 급한 마음에 둘러보기는 어려운 곳이다. 마음의 눈으로 한참을 들여다 보면, 정신문화와 풍류문화의 진면목이 서서히 보인다.

서석지를 통해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되새길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정원에는 스토리와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해준다. 서석지는 그런 곳이다.

● 신라의 옛 정원, 경주 동궁·월지
- 가장자리 굴곡 넣어 좁은 연못 크게 본 지혜

  

월성의 북동쪽에 인접한 신라의 옛 정원인 동궁(왕세자가 거처하는 궁궐)과 월지는 신라문화의 정수이자, 신라왕궁의 별궁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조성된 이곳은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됐고,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931년,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674년(문무왕 14년)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곳은 동서 200m·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됐다.

지난 1974년부터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가 이어지면서 주목할 만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신라가 망한 뒤 폐허가 되자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드는 못'이라는 이름의 안압지(雁鴨池)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부터는 더이상 안압지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월지의 가장 큰 특징은 가장자리에 굴곡을 넣으며 어느 곳에서도 전체를 한번에 볼 수 없게 한 것. 좁은 연못을 크게 보이도록 한 신라인의 지혜가 읽혀진다. 동궁과 월지는 화려한 야간 조명시설을 앞세워 야간명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경주의 랜드마크인 이곳은 언제나 방문객으로 북적인다. 경주시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데다, 유동인구가 많은 탓에 이곳에서 여유로움과 고즈넉한 정경을 만나기는 힘들다. 성공한 관광지와 제대로 된 전통정원의 한계와 차이를 절감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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