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업 농촌살림, 그리고 지역살림
우리농업은 살아나고 있는가?
1980년대 나는 농민시위에 나선 적이 있다. 지금은 반백이 된 당시의 열혈농민들과 함께 원주의 원동성당에서 ‘천만 농민생존권 쟁취’ 운운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의 주요내용은 ‘농가부채 탕감’문제와 ‘수입개방 반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한국사회인구가 사천만쯤 되었으니 농민인구 천만은 남한인구의 4분의 1쯤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 한국농민은 삼백오십만명이 채 안된다. 전체인구의 7%쯤 되는데 지금도 FTA반대운동이 전개되고 있고 농가부채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여년이 흘렀는데도 농업문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 왔다.
혹자는 친환경농업이 발전하고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협이나 한살림을 중심으로 벌어진 도시소비자운동은 생태공동체적 관점과 공동체적 관점에서 시작된 유기농업운동이기 때문에 유기농업의 양질적 성장을 통해 한국농업농촌의 전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친환경농업은 최근 외형적으로 급속히 증가 했다. 2005년 말 현재 전체 경지면적 중 친환경농업경지면적은 2.7%, 친환경농업 실천 농가수로는 4.4%, 친환경농업생산량 비중이 4.4%이다. 이것은 2000년 이전 1%도 안 되던 량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신장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나 전체 농업 중에서 유기농업 재배면적은 0.4%로 유럽연합 평균 3.5%에 비하면 지나치게 적다. 이것은 1990년대 말 친환경농업육성법의 제정과 정부의 육성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과 정부주도의 친환경농업 육성정책에 대해 결코 긍정적인 평가만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친환경농업의 전반적인 신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무농약과 저농약(농가수 기준으로 전체 친환경농가의 무농약과 저농약의 비중이 88.9%이른다)에 몰려있고 친환경농업의 기본취지가 고투입농업에서 저투입농업으로의 생태적 전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의 친환경농업은 친환경농자재를 많이 쏟아 붓는 화학농약 안친 고투입 농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제철이 아닌 겨울철에도 우리는 싱싱한 푸성귀와 딸기와 같은 과일을 친환경농산물이라는 이름으로 먹고 있다. 그것들이 생산되기 위해 소모되는 것은 다름 아닌 화석연료이다. 이미 친환경농업이 상업적인 유통과 결합하여 친환경농업 본래의 취지와는 무관한 상품생산 농업인 관행 농업화 되어 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결국 한국에서는 유기농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생태적인 것도 아니고 절대 선도 아닌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친환경농업이 채 정착하기도 전에 말이다.
왜 그럴까? 우리농업은 정녕 희망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언가 잘못보고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땅에 뿌리 박은 지혜』와『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생명평화의 뿌리가 농업인데 오늘 한국사회의 현실은 농업농촌이 위기이다. 그것도 사회운동과 정부지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운동, 귀농운동, 전국농민회 총연맹등과 같은 지속적이고 다양한 농업살림 운동이 있어왔다. 정부지원도 1993년 김영삼 정부시절 49조원의 투융자를 시작으로 2004년부터는 119조원의 농업농촌투융자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운동이 문제라면 운동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정부의 농업지원정책에 문제라면 그것을 어떻게 바른길로 이끌어낼 것인가?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짚어내고 대안을 마련 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정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농업을 살리려고는 할까?
농업농촌살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땅에 뿌리 박은 지혜』를 읽다보면 곳곳에서 농업의 중요성과 흙의 고마움, 농촌살림의 필요성 등이 느껴진다. 이 책의 집필진이 우리사회에서 그동안의 개발과 성장정책아래 희생되어온 농업과 생태를 담론으로 하는 사회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분들이기에 개개의 글들에서 그 절절함이 우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현재까지 제기된 농업의 중요성과 농촌살리기의 담론서중에서 쉽게 쓰여진 몇 안 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그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제5부 ‘농업문제의 해법을 찾는다’는 주제의 글들 중 천규석선생이 말하는 농지법 개정의 필요성과 우석훈선생이 이야기하는 ‘친환경농업으로의 급속한 전환 전략’의 필요성, 박진도선생이 제시한 도농상생의 길로서 농업농촌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변화와 깨우침 모두 공감하고 필요한 일이다. 앞에 두 분의 이야기는 정부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박교수님의 이야기는 농업문제의 주체가 국민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시민들과 사회운동단체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추상적이라고 생각된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구체적 방향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농업문제 해법의 주역은 역시 국민이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건 사회운동이 현실의 모순과 문제해결을 지나치게 정부에 의존해 온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일반시민들이 시민운동가들에게 정치적 의혹을 갖기도 한다. 즉 활동가나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정부정책에 대해 외치고 정책제안을 하는 것은 맞지만 구체적으로 농업농촌살림을 향한 실천적인 국민 깨우침을 위해 함께하는 운동이 빈곤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농업문제는 그 동안의 성장과 효율에 기초한 개발, 개방위주의 정부정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개선 또는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정책의 변화를 필요로 하고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정부가 아닌 한 혹은 베네주엘라의 우고차베스 같은 진보적 정권이 아닌 한 정부에 큰 기대를 한다는 것은 농업문제 해결책으로는 다소 구태의연하다. 한국의 정부란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에는 어느 정권이나 한쪽으로는 공업과 성장경제론을 기초로 한 개발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소득증대정책을 유지 할 것이고 농업은 정책당국자들이 먹고 살 만큼의 최소정책을 유지해 나갈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정책당국자들이 보기에 농업은 비교열위에 있고 규모화를 달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농림부에 대해 아무리 바꾸자고 해도 쇠귀에 경 읽기이거나 설령 바꾼다고 해도 다른 부처의 시장에 근거한 성장과 개발정책으로 무위가 될 것이다. 우석훈 선생 말대로 농림부가 6헥타르 정책을 포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책에 실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이나 스웨덴, 미국 할 것 없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은 이른바 하나의 ‘세계경제’-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정치적 차이’라는 장막 뒤에 숨어 있지만 실은 공통의 이해를 가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기관에 의해 우리의 삶은 작동되고 있습니다. 세계경제를 꿰뚫어 보고 누가 세계경제를 움직이며 어떻게 이것이 작동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정치적 힘을 되찾아올 수 없습니다. 정치의 배후에 잇는 경제활동, 여기에 실제권력이 있습니다. 이들이 지배하는 법칙이 ‘세계적 경제성장’입니다.”
필자는 모든 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운동의 방향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의 농업농촌살리기 운동은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농촌에서의 농민들의 생존권차원의 운동과 도시에서 시민들이 농민과 함께 전개해 온 농업살림운동이다. 농민들의 생존권차원의 운동은 그동안 정부정책에 대해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가까울 만큼 처절한 싸움의 역사이다. 필자가 기억하기에 지난 30여년동안 년 중 농민시위가 없는 해가 없었다. 1966년 가톨릭농민회가 활동을 시작했고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과 결합하면서 농민운동도 전국화 및 대중화 되어갔다. 1980년대 후반에는 현대 농민운동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는 ‘전국농민회총연맹’도 생겨났다.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면 십만에 가까운 농민들이 집회를 열고 정부의 농업정책을 규탄하기도 하고 농업살림의 정책을 요구했다. 그걸 생각하면 화도 나고 우울해 진다. 그 사이 생명을 잃은 농민은 얼마나 많은가? 농가경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농촌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아스팔트 농사가 수십 년 되었는데도 농업 농촌의 살림은 나아질 줄을 모르고 시위현장의 구호는 20여 년 전이나 현재나 비슷한 이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한살림 운동이 농업농촌살림운동에 시사하는 바
1985년 6월 24일 원주 가톨릭센터에서는 지학순주교, 무위당 장일순선생, 현 박재일회장이 참여한 가운데 ‘원주 소비자 협동조합’ 창립총회가 있었다. 70년대부터 원주를 중심으로 전개해온 민주화운동과 협동운동, 농업농촌 살림운동에 대한 성찰과 구상 속에서 나온 첫 번째 실천이다. 그것은 당시에 급격히 축소되고 있는 농촌현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정부의 성장과 개발담론이 농촌농민들의 삶만을 어렵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시민들의 삶도 위협한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이른바 근대농업이라고 하는 것은 품종개량과 화학농약과 화학비료 기계화영농 등을 이용한 생산력중심의 농업체제로 급격하게 농업생태계와 농민들의 생명을 파괴할뿐더러 도시 소비자들의 먹거리를 오염시킴으로서 국민전체의 생명을 위협한다. 당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원주에서는 새로운 운동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도농직거래를 중심으로 한 생활협동공동체운동이다. 57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은 박재일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겨울 원주소협의 이사장직함을 유지하면서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 농산’ 이라는 쌀가게를 연다.『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는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농업살림 밥상살림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실천을 강조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제창아래 시작된 한살림 운동은 이제 한국의 생명운동과 농업살림운동을 대표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셔서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남아서 그 농사를 제대로 짓게 하고 자각된 사람들은 농촌에 들어가서 땅을 마련해가지고 유기농을 짓든 자연농을 하든 간에 문제를 공동체속에서 해결해 나가려고 애를 쓰고 또 기왕에 농약으로 농사짓고 있던 농사꾼이라도 껴안고 우리의 살길을 같이 협의해가고, 그렇게 돼야 하잖겠어요? ”1)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는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운동이 걸어온 지난한 과정들이 녹아 있다. 단순히 연대기적인 역사나 자화자찬의 역사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켜보려는 하나의 조직이 현실과 마주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갈등과 곤란이 드러나 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집단내의 노력들이 드러나 있다. 때로는 실패의 아픔으로 때로는 따듯한 마음으로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운동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애잔함이 절로 우러난다. 특히 그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화두인 생태공동체와 농업농촌살림이라고 하는 담론을 ‘한살림’ 이라고 하는 생소한 언어에 집약시켜서 농민만이 아닌 도시소비자를 농업농촌살림운동의 동반자로 해서 걸어온 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오늘 날 친환경농업 유기농업의 담론이 한국사회의 주요한 담론이 되기까지 한살림 뿐만 아니라 오재길선생이나 원경선선생 등 여러 선각자들과 정농회나 생활협동조합, 풀무학교 등 여러 조직이 씨를 뿌리고 싹을 함께 길러왔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럼에도 한살림이 걸어온 길은 다른 유기농업운동과 달리 농업농촌살림운동의 주역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 그 지평을 대중적으로 열어준 것으로서 의미가 크다.
이제 한 살림은 전국에 13만 회원, 출자금 약 90억원, 월 취급 품목 수 900여 가지, 전국 곳곳의 19개 지역조직, 공급 액 약 900억, 생산자 1200여명 등의 외형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살림 운동의 의미는 외형에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농업농촌살림운동이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에서 사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문제이고 농업이 무너진다는 것은 농민생존권(생명으로서의 존재 권리)이 아니라 국민생존권이 무너진다는 점을 일깨운 것일 게다. 그것도 일상적인 삶속에 농업농촌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환경과 생태와 우리의 생명이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살림 운동에 아쉬운 게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한살림운동 초기에 진행되었던 운동방식 중에 다섯 가구를 모아서 공급하는 공동체공급이라는 게 있었다. 이 운동은 초기에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조합원들에게 개별적으로 배송하는 일이 실무자들에게 힘들기 때문에 도입의 계기도 되었지만 일본의 생활클럽 생협의 공동구매를 학습한 이후에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공동체공급은 공급비용을 줄이는 역할도 했지만 도시에서 조합원들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고 조합원들의 다양한 활동을 끌어내는 중요한 공동체운동 이었다. 또 하나는 한살림의 사업은 아니지만 1993년경까지 유지되던 주말장터의 소멸이다. 이것은 농산물의 교역이라는 점 못지않게 농민들과 소비자가 얼굴을 맞대고 만나 소통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전자는 지소를 출발로 한 매장중심의 공급과 함께 점차 사라졌으며 후자는 소비자협동조합 강원도 연합회가 서초동 성당을 중심으로 시작해 도시에 퍼지기 시작하다가 1993년경에 소멸되었다.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에서는 이 운동이 간헐적으로 진행되어 품이 많이 들고 농민들에게 삶의 안정을 주지 못해 사라지고 보다 안정적인 직거래운동인 한살림 운동이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 생협에서도 공동공급이 줄어들고 있지만 아직도 40%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점과 북미나 서유럽에서 농민장터가 활성화되고 있는 점을 보면 두 가지 다 한국 상황과 시대적 상황 탓만 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남는다. 그 외에도 지난 20년 동안 한살림이 도시지역에서 지역살림운동의 사례를 만들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것은 향후 한살림 운동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농업농촌을 살리는 운동의 구체적 공간은 어디인가?
이제 농업살림 농촌살림운동의 주체는 농민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이고 그들의 일상적 삶속에서 농업농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농업농촌을 살리기 위한 삶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농업농촌살리기 운동의 핵심골간은 농업농촌살리기의 담론으로 국민들을 공감시키고 조직하는 운동이 제1순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생협조합원 28만, 한살림 13만은 전 국민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의 20%이상에 비하면 한국의 생협운동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고 농업농촌을 살리기 위한 숫자로는 너무 적다. 그런 점에서『땅에 뿌리 박은 지혜』는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농업농촌의 중요성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정민철선생의 말대로 삶의 문제로 농업문제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농업농촌살림의 주인이 책을 읽는 바로 ‘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나’가 모든 사람을 상대로 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피상적이다. 국민이라는 개념은 전국을 포괄하는 개념이고 ‘나’라는 개인이 전국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다. 오히려 ‘나’의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내가살고 있는 지역의 이웃과 함께 하고 그걸 바탕으로 전국의 지역과 연결하고 세계의 지역과 소통함으로서 자본주도의 세계화에 맞대응하는 것이 ‘나’의 운동 방안이 되어야 한다. 즉 운동의 현장은 가정과 가정이 속해 있고 친근한 이웃이 있는 지역인 것이다.
보다 주요한 측면은『땅에 뿌리 박은 지혜』의 맨 마지막에 실린 헬레나 호르베리 호지의 ‘세계화에서 지역화로’라는 글에서 보듯이 세계화에 대한 대응공간이 지역이라는 점이다. 호지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경제체제는 ‘세계적 경제 성장’을 기본법칙으로 하여 자연과 규모가 작은 농촌사회와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며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슬럼으로 내 몬다. 그리고 대기업중심의 세계경제체제는 소비자와 생산자를 더욱더 격리시키며 세계무역의 증대를 요구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 필요한 농식품(우리로 치면 쌀, 고추, 마늘, 채소, 과일 등)의 수출입이 포함되며 이것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이 스와핑 되는 미친 짓으로 대기업에게 이윤을 가져다준다. 이에 따라 우리가 할일은 소비자와 생산자사이의 거리를 좁혀야(할 수 있다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으면 더 좋다) 한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세계화가가 아니라 ‘지역화’즉 경제활동의 지역화라고 한다. 이 지역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내가살고 있는 지역에서 이웃들과 다양한 지역공동체를 만들고 지역경제를 재건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는 물물교환, 지역통화, 지역식품시스템(local food system)등을 활용할 수 있고 나아가서 생태마을과 생태공동체를 창조해야 한다.’
즉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말 그대로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의 자립적 살림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한국은 기형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인구의 3/4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살고 있다. 그 나머지 인구도 중소도시에 살고 있으며 약 7%만이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살림은 이제 농촌지역의 힘만으로는 자생력이 없다고 보여 진다. 이제 한국의 농업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도시의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대도시의 사회운동단체들은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운동에 농업농촌살림운동을 밑바탕에 깔고 도시와 농촌이라는 두개의 지역살림운동을 구체적으로 계획할 필요가 있다.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환경운동단체 시민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들 운동은 환경운동 지역자치운동의 핵심에 농업농촌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민자치와 지역살림이 중요하다면 농업을 통해 도시와 농촌, 두개의 지역살림으로 나갈 것을 제안한다.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는 한국농업을 배경으로 스무 살을 맞는 한살림의 성년식이라는 잔치에 즈음해 내 놓은 성장기로서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 농업이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친환경농업의 현황이 결코 긍정적이지만도 않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과제를 안아야만 하기에 내내 축하만 할 수 없는 마음이다. 게 중에서 가장 큰 과제는 책에서도 있지만 ‘지역화’이다. 전체 한살림 생협의 성장과 발전도 중요하지만 지역 한살림생협의 자율과 자치 그리고 지역 내 연대를 통한 지역살림운동과 지역농촌살림운동의 활성화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생협, 다른 시민사회단체 등과 지역사회의제문제를 풀어내고 지역과 연계된 농촌지역을 살리는 운동이 필요하다. ‘한 살림’이라는 큰 틀에서 한 살림의 조합원들이 지역에서 지역살림과 농업농촌살림운동을 전개해 나갈 때 스무 살 이후의 한 살림이 세상을 바꾸는 주역이 될 것 같다.
“그래서 공생하자는 것인데 이제 시대는 공생의 시대예요. 자연과도 공생해야 되지만 제대로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하고도 공생해야 된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가서 만나서 안아주고 그렇게 하고 그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연대가 되는 거다 이말 이예요. 다시 애기하면 우리끼리만 맛있는 것 먹고 우리끼리만 몸에 해롭지 않은 거 먹고 뭐 이런 식으로만 운동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제 우리의 이일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겠어요?”2)
세계화 시대에 지역은 생활의 식민지다. 끊임없는 성장과 이윤을 위해 전 세계 곳곳의 지역과 농촌을 식민화 시키고 지역을 대기업의 상품판매지로 강요하고 있으며 농촌지역에는 규모화 된 영농으로 자본의 대열에 들어오지 못 할 바엔 농업을 접으라는 협박을 일삼고 있다. 한국의 농업농촌은 지난 세월동안 이들의 강요와 협박으로 무너져 왔다. 그런데 이 붕괴경향에 살림으로 대응하는 방안은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세계화에 맞선 지역살림운동을 농업농촌지역살림운동과 병행할 때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의 모든 사회운동세력들이 농업농촌살림운동에 있어서만은 지역살림운동과 함께 제일의 과제로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 스스로 삶의 희망과 농업농촌의 희망을 말할 수 있으리라.
환경과 생명/김용우
[출처] 농업 농촌살림, 그리고 지역살림|작성자 stup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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