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빨리 남북 대치 끝나 안전하게 살았으면…"
(파주=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1953년 7월 27일. 그날 어느 때보다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어. 밤 10시께 갑자기 총성이 멎더니 다음 날 아침에 군인들 환호성이 들리더라고. 그때 휴전이 된 걸 알았지."
남한 최북단 마을인 '대성동마을' 주민 박필선(80)씨와 김경래(77)씨는 9일 휴전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박씨와 김씨는 1934년과 1937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1·4후퇴 직후 4개월 간 경기도 화성에서 머문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대성동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
6·25전쟁과 정전 60년 역사를 현장에서 지켜 본 산 증인이다.
대성동마을은 '남북이 각각 비무장지대(DMZ) 안에 마을 1곳을 둔다'는 정전협정에 따라 1953년 8월 조성됐다.
DMZ 안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이다. 행정구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북쪽으로 800m 떨어진 북한지역에는 기정동마을이 들어섰다.
김씨는 "전쟁이 터진 날 새벽 송악산에서 '쾅, 쾅' 포성이 울리더니 철길을 따라 피난민이 몰려왔다"며 "인민군이 임진강을 먼저 건너 피난을 가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대성동마을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1951년 10월 휴전회담 장소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바뀐 뒤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로 이들은 기억했다.
회담 동안 '판문점 반경 2㎞ 이내 교전 금지' 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중국군과 북한군이 수시로 기습했다.
주민들은 마을에 주둔한 미군 첩보부대와 함께 총을 들고 싸워야 했다.
회담이 막바지에 이르자 교전은 더욱 치열해져 주민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김씨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총을 들고 싸웠다"며 "당시 13명이 마을을 지켰는데 기습한 적군과 교전하다가 1명이 죽고 3명이 다쳤다"고 말했다.
휴전 뒤 삶도 녹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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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대성동 마을 '산 역사' 김경래·박필선씨
- (파주=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인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 마을에서 6·25 전쟁 이전부터 살고 있는 김경래(오른쪽)씨와 박필선(왼쪽)씨가 통일촌에서 2㎞ 북쪽에 있는 대성동 마을을 가르키고 있다. 김씨와 박씨는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대성동 마을에서 겪은 사연를 들려줬다. 2013.7.10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 미군 트럭이 와 주민들을 금촌까지 태워다 줬다.
농산물 자급자족은 가능했지만 소금 등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다. 미군 트럭을 타고 금촌으로 가 물건을 사 1주일 뒤에야 돌아왔다.
그런 생활은 16년 간 이어지다가 1970년 초 버스가 운행되며 조금 숨통이 트였다.
군사분계선(MDL)이 지척에 있어 안타까운 일도 겪었다.
1997년 마을 언저리에서 도토리를 줍던 모자가 북한에 납치돼 5일 만에 풀려났다.
1975년에는 농사일을 도와주러 마을에 들어온 청년이 북으로 끌려갔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이 청년은 문산 남쪽 파주읍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납치된 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남북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전쟁의 공포에 떨었다.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치됐을 때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됐을 때는 '진짜 전쟁이 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김씨는 "전쟁 분위기가 수시로 조성됐다"며 "마을 주민이 논에서 일하다가 오해를 받아 미군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고 힘겨웠던 삶을 털어놨다.
박씨와 김씨는 마지막 소망을 이렇게 얘기했다.
"대성동마을의 역사를 온전히 아는 사람은 이제 우리 둘뿐"이라며 "통일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남북 대치 상황만이라도 하루빨리 끝나 마을 주민이 안전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7/10 07:03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