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평화를 위하여--강우일 주교

2013. 8. 16. 19:01정치, 정책/통일, 평화, 세계화

지상의 평화를 위하여

  강우일

  안녕하십니까. 이곳으로 오기 위해 지하철 서울시청역에 내렸는데, ‘어쩔 수 없이’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나게 되더라고요. 마침 신부님들이 미사를 끝내고 쌍용자동차 노조 대표분이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곳 일정 때문에 그분들과 손짓으로만 인사하고 그냥 급하게 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시대에 이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모두의 숙제이고 또 고민입니다. 제주에 사는 사람이 인권연대의 초청을 받아 서울까지 온 이유는 제 나름대로 힘들어하는 분들과 함께하고 싶은 제 나름의 표현입니다.

  인권연대에서는 제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란 주제를 주셨는데, 오늘 같은 시대를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하고 절박한 과제가 무엇일지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지금 남북관계가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개성공단 조업 중단으로 인해 그곳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실 것 같은데, 오늘이란 시대를 직시하며 평화에 대해 여러분과 같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천주교 신자분들은 아시겠지만 올해는 요한 23세 교종1)이 〈지상의 평화〉라는 문헌(회칙)을 세계를 향해서 발표한 지 꼭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천주교에서는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에서 평화에 대한 큰 규모의 심포지엄을 계획했다가 갑자기 베네딕트 16세가 퇴임을 하시고 새로운 분이 교종으로 취임하시는 바람에 가을로 연기한 상태입니다. 저희 가톨릭 입장에서는 특별히 올해에 이 세상에 어떻게 하면 평화를 이룩할 것인가 커다란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도 여러분과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콜로세움과 노예제도

  영화를 통해 보시거나 또는 실제로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로마에는 관광객들이 꼭 둘러보는 유적지 중에 콜로세움이 있습니다. 로마시내 한 복판에 있는 콜로세움은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 여러가지 스포츠 경기를 진행했던 곳입니다. 우리의 동대문 운동장보다도 엄청나게 큰 스케일의 유적입니다. 언젠가 EBS에서 하는 방송을 보니까, 지금의 콜로세움은 원래의 3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로마 황제들이 권세를 떨치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어마어마한 규모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콜로세움은 지금 봐도 대단하지만, 사라진 3분의 2를 생각하면 2,000년 전에 로마제국이 얼마나 엄청난 규모의 경제력·군사력을 갖고 있었는지, 로마 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콜로세움이란 어마어마한 구조물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뭘까요? 저런 대형 구조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단 어마어마한 돈이 있어야 지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로마제국이 대형 구조물에 쏟아부은 그 돈은 로마군대가 세계 각국에 쳐들어가서 식민지로 삼은 곳에서 빼앗아 온 것입니다. 대형 구조물을 지을 수 있었던 노동력도 전부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와 노예로 부리면서 유지했던 것입니다.

  콜로세움에서 검투 대결이나 스포츠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평평한 운동장이 있었겠지만, 지금의 콜로세움에는 운동장이 없습니다. 운동장으로 쓰던 부분은 전부 허물어져서 사라졌고, 운동장의 밑부분만이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콜로세움에서는 운동장 밑에 있었던 부분에 몇 개의 분할된 벽 같은 것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운동장 밑에서 노예들이 무언가 작업을 하던 공간, 검투사들이나 동물들이 대기하던 공간, 물건을 쌓아두던 공간이 운동장이 허물어지면서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콜로세움은 로마제국의 본질을 보여주는 매우 함축적인 건축물입니다. 웅장한 대형 건축물이 왜 나머지 3분의 2는 어디 있는지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운동장 부분을 비롯해 곳곳이 무너져내렸고, 또 콜로세움에 있었던 많은 석상들은 왜 사라져버렸을까요?

  그것은 콜로세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노예제도가 허물어지면서, 그 어마어마한 구조물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품화하고 노예로 부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고대 로마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였습니다. 그저 소유물이었고, 얼마든지 시장에서 팔고 살 수 있는 존재였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사여탈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노예들은 오랫동안 사람으로서의 모든 품위와 존엄성과 인격을 박탈당했고, 그 고통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예제도가 근본적으로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로마제국의 작은 식민지였던 유대라는 나라에서 온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때문에 로마제국의 노예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결국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것, 노예도 귀족과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태어났고 고귀하고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교가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제자들이 모이는 그리스도 공동체에는 귀족도 군인도 평민도 있었고, 노예 출신도 있었습니다. 노예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노예제도가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고통받고 희생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지만, 그런 고통과 슬픔이 축적되고 그 축적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만나 로마제국의 경제를 바탕에서 받쳐주던 노예제도를 뒤집어엎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면 그 고통이 무의미하게 사람들의 희생으로 그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이 쌓이면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고통받을수록 오히려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또 고귀한 존재인지를 역으로 드러내는 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인류가 경험한 고통들이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에서 배운다

  미국 워싱턴 D.C.에는 백악관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태인들이 나치정권의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를 통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를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 여러 전시물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입니다. 제가 그곳에 들렀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이 박물관이 유태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연방정부가 만든 국립 박물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인데, 왜 미국이 유태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국립’ 박물관을 만들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여러 주교들과 함께 방문했던 참이라 관계자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 입구에는 한 벽면을 채울 만큼 커다란 사진이 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로 진격한 미군은 독일 나치가 만들어놓은 유태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면서 그곳 수용소에 쌓여있는 시체더미들, 살아있는 자들도 완전히 뼈만 남은 수용자들이 거의 탈진상태로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미군들이 한 손에는 소총을 늘어뜨려 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다들 기가 막히다는 듯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될 수 있는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장면을 어떤 기자가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비록 군인들이지만 사람이 저런 짓을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여겼기에, 강제수용소에 들어갔던 미군 사령관부터 모든 참전 군인들이 그 잔혹함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에 “적어도 이제부터는 지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뜻으로 박물관을 만들었다는 게 홀로코스트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그곳에 전시된 유럽의 유대인 학살 관련 전시물을 돌아보면서 금세 제가 살고 있는 제주의 4·3을 떠올렸습니다. 규모와 양상은 다르지만 사람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는 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는 점, 거의 인종청소에 가까운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주 4·3도 똑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서 벌어졌습니다. 단 하나의 사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변에 알려지지 않았고,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침묵을 지켰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면에서 홀로코스트와 4·3은 다를 바 없다고 느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학살은 히브리말로 ‘쇼아(Shoah)’라고 합니다. 다른 서양 유럽 언어로는 ‘Holocaust(홀로카우스트, 홀로코스트)’가 됩니다. 이 말은 구약성서 레위기에 나오는 번제(燔祭)물이란 뜻입니다. 동물을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쇼아·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유태인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마치 번제물처럼 불살라 죽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전쟁을 통해 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것은 인류역사상 끊임없이 반복된 일이지만, 이렇게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은 드문 일입니다. 전쟁은 서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싸우는 행위이니 그래도 정당방위라는 구실은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상황도 아닌데 무고한 양민을, 무기도 들지 않은 민간인을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상급자의 명령으로 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적을 많이 죽여도 그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군이 아니라 양민을 죽인 경우에는 국제법으로 형사재판의 대상이 됩니다. 원래 국제법은 민사재판으로 국한되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세계를 관할하는 상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가장 중대한 범죄, 집단살해죄, 반인륜적 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등을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2차대전 때 독일 나치가 저질렀던 범죄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죄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공감대가 전세계적으로 형성되었고, 이 공감대를 바탕으로 상설 형사재판소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도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나치의 대규모 학살에 관여했던 사람이 90세가 넘었는데도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을 보면서, 이 비극적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우선되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설령 그것이 국가라고 해도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 그럴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통해 인류가 배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1948년, 2차대전이 끝난 지 3년 후, 12월 10일에 유엔 48개국 회원국 전부의 찬성으로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이후 유엔의 각종 인권 규약은 물론, 전세계 각국의 모든 인권과 관련된 법이나 규정 또는 모든 사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나치에 의해 학살된 600만 명의 유태인을 포함한 모든 무죄한 민간인 희생에 대한 기억은 국가가 저지른 엄청난 범죄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인류의 기억과 믿음은 유엔 차원의 세계인권선언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여러가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 어디 독일뿐이겠습니까?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전쟁범죄가 독일만큼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곳곳에서 심각한 전쟁범죄가 자행되었습니다. 요즘 일본의 정치인들이 부정하려고 하는 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여러 범죄가 저질러졌습니다. 그나마 독일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뉘우치고 사죄하고 그 사죄가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느낄만한 여러가지 행동을 보여주었는데, 일본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최근 일본의 양심 있는 분들, 그중에서도 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기자회견을 열고 양심적인 목소리를 냈던 것은 그래도 우리 인류역사에 희망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근거였습니다.

  저는 지난해 12월 중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주교들이 모여서 4년에 한 번 갖는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베트남의 쑤안록이라는 곳에서 열렸습니다. 아시아 주교 총회에서 제가 한국대표로 발언할 기회가 있어서 “이런 자리를 빌려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넘는 세월 동안 한국군이 베트남에 와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진심으로 베트남 분들에게 용서를 청한다, 죄송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 실제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는지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나라 국민들은 잘 모릅니다. 3년 전 우리나라에서 NGO 활동을 하는 분이 자전거로 베트남 전역을 돌아다니며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얼마나 많은 학살이 있었는지를 조사한 책이 재작년에 나왔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2)이란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정말 고개도 들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간 김에 사과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비극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 아픈 과거를 딛고 다만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비극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비극적 역사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어야 우리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과거를 답습한다면, 그건 정말로 인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려면 기억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억으로부터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

  인류역사에는 대량 학살의 아픈 대목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전쟁 상황이 아닌데도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전쟁 국면에서도 그랬습니다. 전투에 임하는 군인들보다 비무장 상태의 힘없는 민간인들이 더 많은 화를 입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트남전쟁 이후에도 세계 각 지역에서 끊임없이 전쟁, 내전, 지역 간 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이나 시리아에서 또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시리아에서 벌어지는 참상도 그렇습니다. 벌써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내전으로 인한 난민도 엄청난 규모입니다. 매일처럼 시리아에서 몇백 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입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안보라는 이유 때문에 아무 죄 없고 힘없는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국가라고 하면 숭고한 가치를 지녔고,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하는 굉장히 신성한 존재, 국민보다 높은 가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런 사람들을 애국자, 순국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사 속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너무 끔찍한 일들이, 너무나 옳지 않은 불의와 죄악이 저질러져왔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 국가의 안보를 걱정하면서 일한다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이, 그들이 말하는 국가의 정책이 국민들의 동의나 공감대 속에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만을, 지배층의 소수 권력자들만을 위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들만의 편향된 사고와 이념,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위해서 국가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국가가 하는 일이라고 해서 우리 모두가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은, 뭐랄까, 너무 소박한 생각이 아닐까요.

  지금 현존하는 지구상의 국가들 대부분은 지난 100년 사이에 건국된 나라들입니다.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나라들이 서로 침략을 하거나 한쪽으론 침략을 받으면서, 다른 나라를 억압하거나 한쪽에선 저항을 하는 다양한 체험들이 오랫동안 축적이 되면서 국가 또는 민족의 동질성과 아이덴티티(정체성)가 형성된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일본과 일본인들은 지난 세기부터 일본인으로서의 어떤 긍지와 국가의식을 강하게 느끼면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쳐들어가서 힘들게 했고, 지금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식이 생긴 것은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입니다. 1800년도 후반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일본인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러 지역의 봉건영주들이 다스리는 연합체였습니다. 영주들 중에서 가장 힘 센 영주가 전체 영주들을 통합하면서 중앙정권이 발전하고 국가시스템도 그렇게 갖춰져 있었지만, 실제 일반 국민들은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각자 서울 국민, 대구 국민, 광주 국민 하는 식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는 번(藩)이라고 하는 지역 단위, 우리로 치면 도(道), 경기도나 경상도 같은 곳인데,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 등의 서남지역의 유력 번의 지역 영주와 사무라이 등이 들고 일어나 막부(幕府)를 쓰러뜨리고 천황을 꼭두각시로 세우면서 통일 정권을 수립한 것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 청나라와의 전쟁(1894 ― 1895), 러시아와의 전쟁(1904 ― 1905)을 거쳤고, 다시 중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1 ― 1945)을 벌이면서, 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국민이라는 의식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국민’이란 말도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경기도’를 위해 사람들이 사무라이가 되어 싸웠을 뿐이지, 전체 일본(이라는 나라)을 위해 싸운다는 개념은 없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면서, 청나라와 싸우고 러시아와 싸우면서, ‘우리는 일본인’이란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일본인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에서, 그 전에는 ‘소학교’라 부르던 것을 ‘국민학교’로 바꿔 부르면서 끊임없이 국민이라는 개념을 주입시켰습니다.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 국민이라는 의식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면서 자신들만의 번영을 위해, 타자(他者)를 억압하고 도구화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예를 들어볼까요. 18세기 말엽, 미국이 하나의 국가로서 독립할 무렵에 지금의 미국과 캐나다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소위 네이티브아메리칸이 1,000만 명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 대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불과 10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건국 이후 100년이 지난 19세기 말이 되자, 유럽이나 다른 대륙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 수는 100만 명에서 1,000만 명을 넘어 1억 명을 넘었습니다. 반면, 1,000만 명이 넘던 네이티브아메리칸의 수는 1,000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100년 사이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100년의 세월 동안 미국의 선주민들은 미국정부와의 전쟁, 강제 이동에 따른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미국의 동부 해안도시에만 살던 이주민들이 서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영토를 확장했고, 선주민들을 쫓아냈습니다. 그 과정이 미국이라는 국가와 미국인이라는 국민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오늘날 미국은 국가의 이름으로 전세계의 인류에게 엄청난 부담을, 특히 무력으로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안전을 위한다며 전세계 곳곳에 군사기지를 만들고 군대를 파견하고 필요하다면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 여러 나라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체험을 성찰하면서 국가라든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절대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보다 무조건 우선하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신성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국가들이 건국되고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수가 모인 패권적 집단이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집단이나 개인들을 희생시키거나 억압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항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공감대의 형성, 정의의 실현이라는 가치의 지향,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소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제주에서 산다는 것

  저는 2002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주에 오기 전에는 제주의 역사에 대해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제주는 그런 곳일지 모릅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 정도의 의미밖에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제주는 예전부터 범죄인들을 귀양 보내던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지만, 조선의 중앙권력의 눈 밖에 난 의로운 사람들도 귀양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들은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철저하게 격리된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격리의 삶은 귀양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만 강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조선 본토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못하면 뭍으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섬에만 갇혀서 계속 살아야 했습니다. 제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준범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제주에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살다 보니, 그들의 자손들이 제주에 뿌리내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조선 본토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 또는 저항의식이 자신들도 모르게 조금씩 쌓여갔습니다. 제주 4·3의 비극이 발생한 것은 해방 후의 여러가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요인들 때문이지만, 그 근저에는 제가 지금 말씀드린 제주 특유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축적되어온, 준범죄인 취급을 당했던 억압받는 제주 백성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 분노가 4·3 사건의 중요한 매개였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도 항상 2등 국민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주도는 섬 전역이 화산토로 이뤄져 있기에 쌀농사가 안됩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밭농사만 갖고 먹고살아야 합니다. 겨우 보리, 밀, 메밀이나 채소 같은 것들만 생산이 가능했고, 그나마 평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굉장히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것이나, 말 키워서 얻는 것들은 조선 본토에서 다 가져갔기에 제주 사람들의 삶에는 별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제주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제주지역의 신분 계층에는 대지주는 물론, 지주도 별로 없습니다. 양반이나 귀족 계층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소박한 규모의 농업과 1차산업, 어업에 종사하는 서민 계층이 주를 이뤘습니다. 언어와 풍습도 본토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너무도 다른 언어와 풍습 때문에 본토에서 파견된 공무원, 관료들은 제주도 사람들을 자기네 나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반도에서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습니다. 선거를 거부하자는 움직임도 활발했습니다. 그 과정에는 분명히 복잡한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는 먹고살기에 척박한 곳이어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 등으로 가서 노동을 하며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자, 무려 7만 명쯤 되는 제주도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2년쯤 되는 시기 동안에만 7만 명쯤이 귀향했습니다. 당시 제주 인구가 20만 명쯤 되었는데, 갑자기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돌아오니까 제주는 여러가지로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도민들의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거기다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살면서 항일 의식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항일 의식을 갖고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건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사람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일본에서 대거 귀국을 하자, 이들이 제주지역 사람들의 여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는 있을 수 없었던 겁니다. 원래 한 나라인데, 어떻게 반쪽 선거를 하느냐 남북이 모두 참여하는 선거가 되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어떻게 해서든 빨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원했고, 이 과정에서 총파업이 일어나는 등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의 자세한 상황을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그런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서 미군정이 직접 제주를 다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공권력을 동원해야 하는데, 미군이 직접 못하니까 그전에 육지에서 했던 것처럼 경찰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 시대의 경찰이나 일제시대의 경찰은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제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개혁이나 인적 청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주도민들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던 경찰에 대한 불신이 극대화되었습니다. 제주지역의 총파업이나 시위 등의 과정이 미군정에 보고되는데, 이게 전부 경찰 손에서 작성된 보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아예 제주를 “빨갱이 섬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아예 미군들도 제주를 ‘Red Island’라고 타이틀을 붙일 정도였습니다.

  경찰이 사람들을 붙잡아다 조사를 하는데, 고문을 일삼으니까 제주지역의 자생 남로당 당원들은 엄청난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주지역 남로당은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죽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자기들끼리 토론도 있었지요.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경찰하고 싸우냐”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럴 땐 항상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니까 내부 논쟁에서 강경파가 이겨서 무장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사람들이 12개의 파출소를 동시에 습격해서 4·3이 터지게 됩니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경찰만으로는 감당이 안된다고 판단했고, 국방경비대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주는 숲도 많았기에 한라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몸을 숨기기도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쉽게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3개월 후인 11월 17일에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만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군은 제주도민들에게 일주일 내에 해안선을 기준으로 5km 이내로 내려와라, 고지대에 있는 주민들이 해안선 5km 이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내려오면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만약 내려오지 않으면 공비(共匪)로 간주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일주일이 지나자 계엄군은 중산간지역의 마을을 하나씩 포위하면서 초토화 작전에 돌입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참담한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계엄군의 초토화 과정에서 중산간 마을의 가옥 95%가 불에 타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2만여 명의 주민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좌익 무장세력의 강요에 의하기도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산속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무장대로 간주되고 토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해가 바뀐 1949년 3월,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3)가 설립되면서 제주 전역에 삐라를 뿌려 귀순하면 사면한다는 홍보를 했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그 말을 믿고 하산했습니다. 그러나 하산을 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붙잡혀 들어가 처형을 당하거나 육지의 감옥으로 넘겨졌습니다. 1949년 6월, 무장대의 총책인 이덕구라는 사람이 사살되면서 무장세력은 사실상 궤멸되어 4·3의 혼란이 끝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25가 터지면서 4·3의 아픔이 다시 재연되었습니다. 소위 요시찰인과 입산자 가족에 대한 보복이 진행된 것입니다.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 식구 한 명이 없다면 나머지 네명은 조사할 것도 없다며 끌고 갔습니다. 한라산 금족령이 완전히 해제된 것은 6·25가 다 끝나고도 한참 뒤인 1954년 9월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제주도민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체 제주도민이 28만 명인데, 3만 명이 죽었으니 10%가 넘는, 11%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전부 빨갱이 가족이라고 연좌제에 걸려서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도 없었고, 외국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저는 4·3을 체험한 여러분들의 증언을 들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군경이 마을을 포위하고는 주민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한 다음, 줄을 세워 끌고 갔는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끝도 없습니다.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지금도 제주 전역에 퍼져있습니다.

  제주 4·3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사업을 진행하다가, 이명박 정권 들어서자마자 4·3위원회의 예산이 깎이는 바람에 지금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제주에 오시는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한쪽에서도 몇년 전에 유해 발굴작업을 해서 여러 유골들을 수습했습니다.

4·3은 남로당 무장세력이 경찰서를 습격해 시작되었지만, 그 대응 과정에서 국가의 공권력이 무장세력 이외의 민간인들을 정당한 재판도 없이 무차별 학살한, 제노사이드(genocide)에 준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시(戰時)라고 해도 민간인을 죽이는 법이 아닌데, 심지어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그렇게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은 분명한 범죄입니다. 국제사회에서도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할 범죄인데, 대한민국은 자국민이 그렇게 많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지난 60여 년 동안 침묵을 강요했습니다. 진실조차 밝혀지지 않아서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 국민의 90%가 진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반인륜적 범죄, 국가의 동족 학살에 대해서 대한민국 국민은 아무런 아픔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지난 6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류 차원으로 봐도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입니다.

  2000년 8월 28일,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했고, 2003년 10월 31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과 유족에 대해 공식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0년 이상 현대사에서 삭제되고 침묵을 강요당했던 사건이, 대통령이 제주에 한번 날아와서 사과 발표했다고 해서 그 역사가 회복될 수는 없습니다. 4·3이 일어난 이후 6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역사적 진실의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제가 진실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냥 어떤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진상을 규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만, 제가 말씀드린 진실의 의미란 4·3이 우리나라 역사의 여정 전체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찾아내고, 4·3이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우리가 발견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3만여 명의 무고한 희생이 그냥 허공에 사라지고 땅속에 파묻혀버리고 맙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참상을 겪으면서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남북이 날카로운 공방을 주고받거나 또는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전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키면 서로가 파국을 겪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울 줄 알아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4·3은 아무리 공권력이라고 해도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짓밟을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아무리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이유를 내세워도 국민의 생명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것을 4·3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는 정부 혹은 국가가 결코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4·3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4·19혁명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인권이란 가치가 국가나 정부가 가지는 가치에 우선한다는 것을 조금씩 터득해왔습니다. 그런데 4·3은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훨씬 더 인간생명과 인권의 숭고한 가치를 역설적으로 깨우쳐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왜 지난 60여 년 동안 4·3에 대해서는 그토록 아무런 언급도 없고, 침묵만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방 이후 국가의 공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제주 4·3을 그저 단순히 무장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단순화시켜서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제주도민들이 4·3으로 큰 희생을 겪으면서 생명을 잃고, 인권과 인격의 숭고한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채 아픔, 희생, 슬픔을 안고 60여 년을 살아왔지만, 제주도가 바다 건너에 있기에 그냥 무시하고 잊어버리기 쉬워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제주 4·3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반드시 치유해야 할 상처입니다.

 

국가에 의해 유린되는 인권

  5월 20일과 21일,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40~50명에 불과한 노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700명이 넘는 경찰력이 동원되어 노인들을 둘러싸고 그분들을 끌어가고 또 쓰러뜨리기도 하는 상황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한마디로 대도시의 소비문화, 끊임없이 소비하고 쓰고 또 갈구하는 자본주의의 소비문화를 위해서, 거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니 그 에너지를 무한 공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많은 전기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전이나 정부에서는 툭하면 블랙아웃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만 해도 2년 전 후쿠시마 사태 이후 몇십 개의 핵발전소 가동을 중단했는데도 지난 2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잘 굴러갔습니다. 블랙아웃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전이나 정부에서 말하는 블랙아웃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들만 보면, 대도시의 소비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해야 하고, 그러니 더 많은 핵발전소가 필요하고, 핵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공급해야 하니 송전탑을 짓는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국가가 강제로 수용을 해서라도 송전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논리입니다.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국가의 시책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지고 나니까, 비로소 일본 국민들은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기는 전부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사람들이 썼지, 후쿠시마 지역의 사람들은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만들어낸 전기의 혜택을 조금도 보지 않았습니다. 후쿠시마 지역에서 농사짓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왜 도쿄시민들을 위해서 희생되어야 하는가 하는 성찰이 일어났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방사능이 확산되고 부근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풍비박산으로 일본 전역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 생각 있는 많은 사람들은 왜 대도시의 잘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골의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해야 하냐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핵발전소의 가장 치명적인 윤리적 결함입니다. 핵발전소의 정당성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부분입니다.

  밀양 송전탑 건설계획이 발표된 것이 2007년이고, 제주에서 해군기지 반대를 시작한 것도 공교롭게도 2007년이었습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제주에 살고 있는 저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국가 차원에서 군사기지를 짓겠다는데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가, 반대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도 마음속으로는 꺼림칙해도 국책사업이라니까 반대할 엄두도 못 내고 체념하고 포기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체념하는 모습을 접하면서 저는 뭐랄까, 마음속에서 “이래서는 안된다. 4·3 때 제주도민들이 그렇게 당했는데, 정권이 제주도민을 이렇게 짓밟아서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라도 나서지 않으면 제주도민의 신음소리가 묻히고 어디서도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주는 한국에서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2010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되는 지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도 강정마을은 옛날부터 제주 사람들이 ‘일(一) 강정’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제주의 모든 곳이 쌀농사가 안되는데도 유독 강정만은 쌀농사가 가능한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도 강정지역 일대를 절대보전지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그것을 스스로 깨뜨려버리고, 청정해역 10만 평을 뒤집어엎어 거대한 방파제를 만들고, 해군함정 20척이 정박할 수 있는 대규모 군사시설을 짓고 있습니다.

  최근 서해 앞바다에서 니미츠라는 미국 항공모함과 한국의 이지스함 등이 합동군사훈련을 했습니다. 군사훈련이 끝나자마자 이 함정들이 바로 제주도 동남쪽 바다로 몰려가서 탐색구조훈련을 한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제주도에서 전투기를 볼 수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투기가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한 국방 관련 연구원이 탐색구조훈련이라지만 항공모함과 첨단 전투함들이 모여서 무슨 탐색구조훈련이냐고, 실제는 사실상의 전투를 위한 훈련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주는 지도를 봐도 금세 알 수 있는 것처럼 한반도의 최남단이고, 중국에 가깝게 위치해 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요충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 군사기지를 건설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4·3이라는 끔찍한 일을 저질러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버적버적 군홧발로 들어와서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3만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외치자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요한 23세 교종이 〈지상의 평화〉라는 회칙을 발표한 지 50년이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당시 세계는 일촉즉발의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사태로 미국과 소련이 격돌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고, 미국의 U2 첩보기가 공중정찰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만약 이대로 미사일기지 공사를 강행하면, 미국에 대한 전쟁 도발로 간주하고 완벽한 의미에서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소련은 미사일기지 건설에 필요한 상당한 물자를 쿠바로 보낸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해상봉쇄를 하고 있었고, 곧바로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1962년 10월의 일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요한 23세는 무척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과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게 각각 사람을 보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년도 채 안된 상황인데, 불과 십몇 년 전까지도 전쟁 때문에 인류가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 또다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느냐, 이번에 전쟁이 벌어지면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핵전쟁이 일어날 텐데 그 결과는 누가 책임질 수 있느냐, 당장 두 강대국이 대화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라고 촉구합니다. 강력한 호소가 담긴 제안을 두 나라의 지도자에게 보낸 것입니다. 요한 23세의 호소가 있은 다음 일주일인가 지나서,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먼저 메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미사일을 실어 나르던 수송선을 철수시켰고, 곧이어 케네디도 더이상 문제삼지 않겠다고 해서, 쿠바 미사일 사태가 풀렸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요한 23세는 이 세계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평화의 소중함을 인류에게 호소하기 위해 만든 문건이 바로 〈지상의 평화〉입니다.

  이미 50년이 지났지만, 다시 〈지상의 평화〉라는 회칙을 읽어보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2013년의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평화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외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힘을 과시하면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생산적인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거의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고, 많은 분들이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평화를 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이 정도로 제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 강우일 주교는 천주교의 수장 ‘교황’을 의식적으로 ‘교종’으로 불렀다. 천주교의 수장을 일컫는 외국어 표기로는 ‘Holy Father’(영어), ‘Summus Pontifex’(라틴어), ‘Papa’(라틴어) 등이 있지만, 교황(敎皇)이란 단어가 임금, 황제를 연상시키기에 적당하지 않기에 교종(敎宗)이라고 쓴다고 언론 인터뷰 등에서 밝힌 바 있다.

2)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년. 저자 이규봉은 이 책을 통해 베트남에서의 학살이 제주 4·3 등의 사건을 통해 민간인 학살을 학습한 결과이며, 베트남에서의 학살은 다시 광주에서의 학살로 이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3) 이승만 정권이 1949년 3월 2일 4·3과 관련된 제주도민 소탕을 위해 만든 부대. 당시 미군의 정보 보고에 따르면, 이 토벌대는 한국군 2,622명, 경찰 1,700명, 민보단 약 5만 명으로 편성돼 있었다고 한다.


강우일 ―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 제주교구장. 이 강연기록은 지난 5월 22일 인권연대 제100차 수요대화모임(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했던 얘기를 정리 · 보완한 것이다. 기록을 정리 · 제공해주신 인권연대 측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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