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2013. 7. 14. 14:53이런저런 이야기/책 속에 길이 있다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책소개>

조선 500년 역사에도 백성의 삶을 고민했던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이 책에서는 오직 민생과 부국만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조선 경제학자 13인의 삶과 사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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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통해 조선을 부국(
富國)으로 이끌고자 했던 경제학자 13인의 고민과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사대부에 의해 천시됐던 상공업 등 경제활동의 중요성을 재조명하고, 이론적 체계는 물론 국가의 경제개혁과 경제발전 모델을 제시한 한편, 이를 현실에 접목하고자 한 노력은 오늘날 경제정책 입안자들이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코노미플러스> 취재팀장 한정곤

 

 

<저자: 한정주>

역사와 고전을 다시 보는 책을 주로 저술하는 역사서 작가이며 사암(俟巖)의 대표. 1966년 남도 끝자락에 자리한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로 전학 와서 무등중과 석산고를 졸업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일본사에 대한 관심 탓에 대학에 가서 꼭 일본 근대사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근대사에 관한 그의 개인적 관심은식민과 오욕의 역사를 우리에게 남긴 일본을 극복하겠다는 민족주의적 감정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예측된다.

그는 동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후 당시 대학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탓에 정작 역사 공부보다는 사회과학 공부에 심취했다. 저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갖게 된 소신대로 사회활동을 시작했으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좌절해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를 빌어서 서양과 동양 및 우리나라의 옛 문헌과 서책들을 접하고, 고전과 역사 속에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고민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 뒤 역사와 고전을 현대인들의 문화적 혹은 사회적 욕구에 맞도록 해석해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저술 활동을 시작하여 특히 고전을 새롭고 창조적으로 읽음으로써, 고전이 학자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 큰 관심을 쏟고 있다. 또한 '동심우'(同心友)뇌룡재(雷龍齋)’라는 소박한 연구,집필 공간을 함께 운영하며 현재 역사와 고전의 대중화를 위해 다양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영웅격정사-인물비교로 보는 사기와 플루타르크영웅전』,『천자문뎐-신화·역사·문명으로 보는 125가지 이야기』,『한국사 천자문』, 『조선의 거상, 경영을 말하다』가 있으며, 쓰고 엮은 책으로는『조선 지식인의 독서 노트』와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조선 지식인의 말하기 노트』,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 『조선 지식인의 비평 노트』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 경제학은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을 구한 경제학자 13인의 가상 좌담

1.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
백성의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다
à 조실부모한 천재소년, 벼슬길을 포기하고 농사꾼이 되다. 서인, 인조반정으로 복귀, 위험한 뱃길로 떠난 중국 사행길, 병자혼란 와중에 대동법, 균역법 시행상소, 개혁가 김육의 확고한 믿음 백성구제

 


2.
시장과 상업 활동의 자유를 옹호한 관료 경제학자, 채제공
신해통공을 이끌어 조선의 상업 발전에 큰 물꼬를 트다
à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대의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3.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이자 경제학자, 빙허각 이씨
가계 경영 능력이 국가 경제의 뿌리임을 밝히다
à 가정백과서전 규합총서”, 시동생 『임원십륙지(林園十六志)』를 엮은 서유구

 


4.
지리경제학의 개척자, 이중환
전국을 돌며 사회 양극화와 지역 불균형의 해법을 찾다
à 정치적으로 실세(失勢)한 남인(南人)의 삶, 조선의 산천과 지리, 인물, 역사를 담다, 택리지, 이중환의 [택리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리서로, 전국을 실제로 답사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이중환은 우리의 산천과 그곳을 살았던 인물들의 역사는 물론, 당대 사람들의 정서까지 담아내고자 노력하였다.

 


5.
중상주의 학파의 브레인, 박제가
조선이 나아갈 길은 북학과 중상주의임을 밝히다
à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 호는 초정(楚亭).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전통적인 양반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신분적인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선진적인 실학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으므로 누구보다도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도 당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도시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기 실학, 이용후생학파와 시기를 같이한다.
그리하여 그는 반계(
磻溪) 성호(星湖) 등의 토지경제사상을 지양하고 선진적인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상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국가는 수레()를 쓸 수 있도록 길을 내어야 하고 화폐 사용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중상주의적 국가관을 내세우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북학의』(北學議)가 있다.

 


6.
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
토지 개혁만이 부국강병의 지름길임을 주장하다
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1622(광해군 14)에서 1673(현종 14)까지 살았던 조선후기 실학파의 비조(鼻祖: 시조)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발발하고 조선 건국 이래 누적되어 오던 여러 가지 모순이 극대화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삼정 (三政)의 문란은 농민들의 삶을 파괴하여 노비나 도적으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유형원은 이러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노력한 개혁가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隧錄)]으로 대표되는 그의 개혁사상은 이미 영조대에 인정을 받아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 유학자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반계 유형원을 가리켜천하의 재상감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역적으로 몰린 부친의 죽음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836)은 정조의 명으로 수원성을 축성하면서 유형원의 축성 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결국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의 개혁방안으로 이어지는데, 그가 실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학문적 계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농촌 생활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학문적 영역은 정치ㆍ경제ㆍ역사ㆍ지리ㆍ국방ㆍ언어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를 자랑했다.

 


7.
중상주의 학파의 개척자, 유수원
맬서스 <인구론>의 맹점을 60년 앞서 비판하다
à 장애를 극복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제시한 학자, 농암

유수원(柳壽垣, 1694~1755)은 영조시대 장애를 극복하고 관료이자 학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인물이었다. 또한 [우서(迂書)]에서 피력한 주장들이 북학(北學) 사상의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은 적지가 않다.

 


8.18
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거두, 이익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꿈꾸다
à 조선 후기 실학자로 실용적인 학문과 양반도 생업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론과 평판에 의해 인재를 등용하는 공거제를 주장했다. 저서는《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후손으로 종자(從子)이병휴(李秉休)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 이가환 등으로 이어졌고, 문인으로는 안정복(安鼎福) · 윤동규(尹東奎) · 신후담(愼後聃) · 권철신(權哲身) ·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9.
양반 사대부 출신 대상인, 이지함
조선 최초로 중상주의를 통해 부국을 지향하다
à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기인(奇人). 일반적으로《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없다.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 해박하였으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했다. 진보적이고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다.

 


10.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오랑캐라도 섬기고 배워야 한다
à 《열하일기》, 《연암집》, 《허생전》 등을 쓴 조선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하였다.

 


11.
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을 완성한 학자, 서유구
널리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모아 <임원경제지>를 펴내다.
à 조선후기 실학자로 농업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농업기술과 방법 등을 현실속에서 연구하여 농업 위주의 백과전서라고 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하였다.

 


12.
중농주의 경제학을 집대성한 학자, 정약용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리를 가장 합리적으로 밝히다.
à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다. 개혁과 개방, 기나긴 유배 생활,강진, 정조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저서는《목민심서》,《경세유표》등이 있다.

 


13.
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창시자, 박규수
통상 개화를 통한 자주적 부국의 길을 밝히다

è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한 근대의 가교자, 조선 후기의 문신·개화사상가.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최익현 등의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문집으로《환재집》과 《환재수계》가 있다.

 

 

<출판사 리뷰>

조선 500년 역사에도 백성의 삶을 고민했던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오직 민생과 부국만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조선 경제학자 13인의 삶과 사상을 만난다!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은 인간의 최고 가치를 정신적 삶에 대한 추구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 책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부국안민과 부국강병을 위해서라면 물질생활의 가치가 정신적인 삶의 가치보다 더 우선해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 조선의 경제학자들은 봉건 체제 내부의 경제 현상은 물론, 1718세기 이후 곳곳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던 시장 및 상품 화폐 경제, 즉 근대적인 경제 현상과 징후들을 분석하고 발전 경로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는《택리지》를 저술한 청담 이중환은 최근 경제학에서 각광받고 있는지리경제학의 개척자, 《토정비결》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토정 이지함은조선사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자 중상주의 경제학의 선구자로 재해석되어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또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관료들 중에서도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을 갖춘관료 경제학자를 찾아냈는데, 대동법을 시행한 잠곡 김육은 민생을 왕권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로 여겼던분배론의 경제학자, 그리고 정조 시대 개혁을 지휘한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은 시장과 상업 활동의 자유를 옹호한시장주의 경제학자로 자리매김했다. 농암 유수원은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진 허점을 270여 년 전에 이미 정확하게 비판했다. 그의 경제학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동안 서양의 경제이론과 사상에 치우쳐 있다가 보니 우리 것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지식 불균형상태에 있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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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에서

18
세기 경제학자들에게서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구한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릴 것인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화려한 청사진들이 등장하고 있다. 누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FTA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서민들의 박탈감을 더하는 부동산 문제를 풀 것인지에 대해 각 당에서 여러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박규수 지금 우리 후손들의 상황을 보면, ‘쇄국개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다퉜던 그때 상황이 떠오릅니다. 쇄국을 고집하다가 외세의 강압과 무력에 굴복한 개항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때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개국을 해서 일찍부터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틀을 다졌다면 조선이 그토록 허망하게 몰락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FTA를 하더라도 외부의 힘이나 상황에 떠밀려 하는 것은 쇄국만큼이나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FTA에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세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형원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농민이 대다수였던 우리 시대와는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으니까, 무작정 농업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농업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외국 농산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체제가 된다면, 결코 산업 발전이나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에너지안보 못지않게식량안보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농업을 희생양 삼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외국 농산물의 공세 앞에 국내 농업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정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박지원 저도 유형원 선생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비록 대외개방과 통상무역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하더라도,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어느 한쪽이 이익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농업과 상업, 그리고 공업 모두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경제 체제 아닐까요? 물론 우선순위는 있겠지요. 그러나 공업이 농업을 희생양으로 삼고, 상업이 공업을 희생양 삼아 발전하는 경제라면 과연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느 한곳도 희생당하지 않고 경쟁력을 갖춰서, FTA 체제 하에서도 농공상이 모두 균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이론과 정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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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구한 경제학자 13인의 가상 좌담(본문 중에서)

역사의 강을 면면히 흘러내려온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흐름!
갑오농민전쟁은 중농주의를, 갑신정변은 중상주의를 이은 혁명이었다!
18세기에 경제학의 양축을 이룬 것은 중농주의 학파와 중상주의 학파였다. 이 책에서는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중농주의 학파의 사상과 이론이 19세기 후반아래로부터의 농민(토지) 혁명을 통해 근대화를 모색한 전봉준과 김개남의 갑오농민군으로 계승되었고, 이지함유수원박지원박제가박규수로 이어지는 중상주의 학파의 계보는위로부터의 정치 혁명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했던 개화 독립당(개화파)으로 계승되었음을 밝혔다.

강진 지방의 야사에 의하면 정약용의 저서로서 현행본 《경세유표》 이외에 별본이 있었던 것 같다. 《강진읍지》 <명승초의전名僧草衣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초의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학문적 동지이다. 다산이 유배지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하생 이청(李晴)과 초의에게 주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남상교, 남종삼 부자 및 홍봉주 등에게 전해졌고,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 윤세현, 김병태, 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 김도일 등을 통해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전봉준), 김개남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다. (갑오) 전쟁 끝에 관군은 정다산 비결이 전봉준 일파의 비적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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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갑오농민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본문 중에서)

그러면 당시(갑신정변)의 혁명가에게 이러한 신사상이 감염되게 된 경로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춘고(박영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필자 왈. 백형이라 함은 영교를 가리킴이다)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이유원이 영의정이었을 때 우의정으로 있다가 이유원(李裕元)과 불합하여 괘관(卦冠 사직)하고, 재동 집에 있어서 김옥균 등 영준한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부 《연암문집》을 강의도 하고 중화 사신들이 들고 오는 신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하고 춘고(박영효)는 당시 신사상이란 것이 평등론, 민권론이란 것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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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가 갑신정변에 미친 영향에 대한 박영효의 발언(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