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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선대인의 맨발의 경제학](10) 공공의료의 모범, 소록도

경제/경제와 경영, 관리

by 소나무맨 2013. 7. 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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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선대인의 맨발의 경제학](10) 공공의료의 모범, 소록도

우석훈 |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대표·경제학 박사

 

ㆍ홍준표 지사님, 소록도에 한번 가보시죠

조선대 치대를 졸업한 젊은 오동찬(사진)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소록도에 공공전문의로 발령받아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에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크리스천인 오동찬은 졸업에 즈음하여 기도 중에 ‘소록도에 가라’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는 예전 소록도에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슈바이처를 꿈꾸는 젊은 의사가 약간의 의기와 호기심으로 소록도행을 결심한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어머니에게 설명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1년만 다녀오겠습니다.”

젊은 의사 오동찬은 1년만이라고, 그렇게 어머니를 속이고 소록도에 치과의로 발령받게 된다. 국가공무원 신분이다. 그렇게 소록도에 들어간 오동찬은 기대와 달리 자신을 냉담하게 대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당황하게 된다. 어차피 잠시 머물고 갈 사람, 정을 주지 않겠다는 환자들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그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그렇게 살았다. 법령이 바뀌어서 소록도가 환자들을 잡아 가두는 곳은 아니고, 그들 스스로 그 안에서 살 것인지 나갈 것인지 형식적으로는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 박정희 시절이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과 제도일 뿐이고, 환자들, 그것도 고령의 환자들이 소록도 바깥에서 스스로 독립해서 살기는 쉽지 않다. 오랫동안 소록도에서 살았던 환자들은 잠시 머물다 갈 의사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일제강점기의 소록도는 강제노역과 폭력으로 얼룩진 수난과 고통의 땅이었다. 그러나 1916년 개원한 소록도 병원은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공공의료의 모범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었다. 사진은 해방 이후 자치권을 요구하다 학살당한 원생 84명을 기리기 위해 소록도 들머리에 만든 추모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 19년간 한센병 환자 돌보고 있는 오동찬

그렇게 형식적으로만 소록도의 의사였던 오동찬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총각이었던 오동찬이 인근 마을을 방문했는데, 어차피 관사로 돌아가야 별 일이 없어서 마을사람들과 소박하기 그지없는 저녁식사를 한 것이다. 당시 소록도 환자들은 경제활동으로 돼지를 사육했다. 현대 시설을 갖추지 못한 당시 축산은 열악했다. 환자들도 축산 환경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젊은 의사 오동찬이 저녁식사를 한 날은 바로 섬이 생기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온 날이다. 다음날 오동찬을 만난 환자들이 모두 했던 이야기는, 자신들과 밥을 먹었던 젊은 의사의 결심!

다음은 오동찬의 이야기에서 클라이맥스로 올라가는, 보통은 3시퀀스라고 부르는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다. 아니 그 전에, 잠시 어머니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할 것 같다. “1년만 가보겠습니다”라고 했던, 치대를 나온 아들이 소록도에 그냥 눌러 살고 있는데, 그냥 있으면 또 의사 어머니가 아니다. 결국 소록도에 내려와서 “애야, 집에 가자”, 뭐 이러셨을 것 아닌가?

그 어머니에게도 임종의 순간이 왔다(슬픈 얘기지만, 우리 모두 맞게 될 순간의 이야기다). 어머님은 자신에게 엄청난 미안함을 느끼고 있을 아들에게 한마디를 남긴다. “섬의 환자들을 어머니처럼 돌보거라.”

오, 마이 갓! 데모대에 앞장서서 죽어간 아들을 대신하여 지라시를 돌렸다는 전설 같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이후로 이렇게 충격적이면서도 눈물겨운 어머니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오동찬의 어머니 이야기는 자식, 특히 아들에게 집착하는 우리 시대 어머니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혹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면서 당신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을 아들의 불편함을 짊어지고 가신, 그래도 어머니, 그분의 얘기일 수도 있다.

하여간 이렇게 집안 문제를 갈등과 해소라는 그 풋풋한 구조로 마무리지은 오동찬 이야기의 핵심적 전개는 질투에 관한 것이다. 오동찬의 얘기는 이어진다. 바로 그 유명한 구더기 얘기다.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은 통증을 잘 못 느낀다. 그래서 치과 환자들의 주증상은 턱밑에 알을 깐 구더기 증상이었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 일단 구더기부터 잡아내야 했다. 얼굴에 구더기가 살 정도면 얼마나 악취가 심하겠는가? 그 상황까지 방치된 환자, 얼마나 관리가 엉망이었겠는가? 환자들의 구더기를 잡고, 뒤틀어진 턱과 관절을 수술하고, 틀니까지 해넣는 것, 그게 치과의사 오동찬이 소록도에서 주로 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이 구더기를 잡아줬던 환자들이 결국 불렀던 이름은 의사인 자신이 아니라 간호사! 그러면 간호사가 그들의 어깨를 부추기면서 산책을 나가고, 꽃구경을 시켜주고, 그렇게 통증에 시달린 환자들에게 잠시의 휴식을 만들어준 것.

의사 오동찬은 그 상황을 회상하면서 우리에게 치료와 치유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그는 의사, 아니 전문의로서 치료를 하려 했지만, 당시 간호사는 치유를 하려 했던 것이었다는! 요즘 용어로 하면, 큐어와 힐링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 얘기를 열심히 하는 오동찬에게 내가 느낀 것은, 그러나 힐링과 같은 새콤풋풋한 단어가 아니라 질투였다.

의사와 간호사의 경쟁은 그 후 본격화된다. 누가 더 섬에 오래 남을 것인가. 뭐 그런 젊은 사람들의 경쟁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시점에서 나는 드디어 입에 침이 마르는 것을 느꼈고, 오동찬이 비로소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질투는 나의 힘’.

“누가 이겼나요?”

편안한 목소리로 오동찬의 말이 이어진다.

“남기는, 제가 결국 섬에 남았지요.”

순간, 나는 보지도 않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후루룩 지나가면서, 결국 섬을 떠나는 어느 간호사의 뒷모습 같은 게 찬란한 실루엣처럼 이어졌다.

“결국 이기셨나요? 그분은 어디로 가셨나요?”

참, 내가 하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지금의 아내가 되었어요. 싸우다 정들었죠.”

두둥! 결혼? 그렇지, 젊은 남녀가 선의로 서로 경쟁을 하다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아름답고도 논리적인 결론이, 결혼 아닌가? 이 기막힌 반전을 들으면서, 잠시 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것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사랑받던 의사와 간호사가 섬에서 결혼할 때, 환자들이 “이 여인 슬프게 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그렇게 수백번은 했을 법한 말들이 귀에서 스쳐 지나갔다. 질투, 그것을 뒤집으면 바로 사랑 아닌가?

■ 한센병 극복 ‘한국 자본주의의 미담’

오동찬이 클라이맥스로 꼽은 것은 ‘900:1’ 이야기다. 뭐, 그의 어머니나 결혼 이야기만큼 극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얘기를 특히 좋아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동찬도 섬을 떠날 순간이 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으로 이곳에 온 것처럼,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그가 섬을 떠날 생각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900명의 환자들이 그가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900:1의 기도, 그는 아직 섬을 떠나도 된다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19년째 소록도를 지키고 있다.

만약 이 클라이맥스 자리에 900:1 같은, 영화 <300> 분위기 나는 그런 밑천 보이는 얘기가 아니라 기막힌 얘기를 넣을 수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소록도 영화를 기획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클라이맥스가 밋밋하다.

소록도는 한국 공공의료의 대표적 성공 사례이자, 한국 자본주의의 대표적 미담이 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시작은 군사정권의 성격을 가진 일본 총독부가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생이별시키면서 잡아넣은 때부터다. 별 영문 없이 한국 자본주의가 시작된 것과 같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보여준 원장과 환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기묘한 줄타기를 하는 장로의 얘기, 이게 우리가 아는 초기 소록도의 이야기다. 그나마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소록도에 대해 약간의 감정이 움직이지, 그야말로 요즘 젊은것들, 조진웅식 발음으로, “알도 모태!”

인구 1만명당 한 명이 한센병 환자이면 국제적으로 유병국가로 분류된다. 한국에는 90여곳의 정착지에 1만3000명의 환자가 있고, 그들 모두 비전염성이다. 가장 어린 환자는 40세, 사실상 한국은 한센병 퇴치가 끝난, 세계보건기구(WHO)식 용어로는 한센병 사업 종료 지역이다. 지금 있는 환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이제 우리에게 ‘당신들의 천국’은 지나간 시절의 추억이 될 뿐, 사라진 질병이다.

소록도 병상 안쪽 깊은 곳에서 오동찬의 애인이라는 환자 한 분과 커피 한 잔을 마실 기회가 생겼다. 인천에서 소록도로 옮겨온 그녀는, 처음에 깊은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도 했다고 한다. 소록도의 의사들이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커피 투여’, 저녁마다 가장 한가하게 된 의료부장 오동찬과 커피를 마시는 것. 그야말로 노하우가 필요한 결론이었다. 그녀는 조용필의 소록도 콘서트와 그에게 쓰고 있는 편지, 그리고 오동찬이 얼마나 괜찮은 의사인가를 두고 내가 쩔쩔 맬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환자를 강제로 수용하는 국가폭력과 서울대 치대를 나온 보건의의 풋풋한 삶이라는 양극단이 소록도를 형성하는 얘기들이다. 이제는 섬이 아니라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처럼 된 소록도, 그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필연적으로 다시 공공의료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 소록도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방문을 기다린다

그렇다, 바로 홍준표 얘기다. 인도, 중국 등은 여전히 한센병 퇴치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고, 마치 우리가 1960~1970년대까지 그랬듯이, 일부는 국가 시설에서 지내고 일부는 마을 한구석에서 집단을 이루어 지낸다. 브라질 정도면 어느 정도 기본적인 국가 인프라 단계는 넘었을 듯 싶은데, 오동찬의 설명으로는 인구의 10%가 한센병 환자라고 한다. 일본은 국가 위신을 생각해서 감추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습하고 더운 날씨라서 아직 퇴치 단계에 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일제와 군부독재 시절의 추억을 관광처럼 즐기면서 소록도를 방문하고 있지만, 한센병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세계 최고의 모범 사례인 셈이다. 과연 국가가 이렇게 강제로 잡아들이는 게 옳은 것인가, 그 질문만큼 국가가 그들을 맡았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두 가지 질문이 동시에 머리를 후벼판다. 홍준표식으로 했다면, 지금의 소록도 성공은 불가능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귀족 노조’를 얘기하며 진주의료원의 문을 닫기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었다. 한센병을 극복한 한국의 공공의료가 담당해야 할 다음 질문은 치매 등 간병인이 필요한 질환, 즉 개인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질환이다. 홍준표식으로 얘기하면 한때 원장대리를 했던 오동찬과 그의 동료들은 귀족 노조를 넘어, 국가의료원을 개인 병원처럼 활용한 흉악범들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공공의료,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소록도에서 그 방향을 본 듯싶다. 그 시작과 동기가 어찌 되었든, 오동찬 소록도 의료부장 같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치료든 치유든 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국가가 할 일 아닌가? 경영과 부채 그리고 사업성, 그런 것은 나 같은 경제학자 혹은 공무원에게 맡겨주시라. 어떤 수를 쓰든, 오동찬 같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치료할 수 있는 행정적 여건을 만들어낼 테니.

지난 대선 때, 소록도에서는 박근혜에게 몰표가 나왔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의 헬기 방문 정도로는 육영수 여사 때부터 소록도에 들인 박근혜 가문의 정성을 이길 수 없었나 보다. 이 기회에 소록도 환자들의 청원을 청와대에 전달해 드린다.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 박근혜의 방문을 그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부디, 방문해 주시면 좋겠다. 바로 이 소록도에서 경제민주화의 한 축인 공공의료의 출발점이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록도,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본의 강점, 그리고 군사독재, 그 후에는 시장의 지배. 어쨌든 소록도에서 우리는 세계적 사례를 만들고, 일본도 하지 못한 한센병을 극복했다. 공공의료, 갈 길이 궁금하거든 소록도에 한 번씩 가보시기 바란다. 그곳에 진주의료원 등 공공의료가 갈 길이 그려져 있다. 우린 아직 수많은 오동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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