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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선대인의 맨발의 경제학](5) 부조리극 같은 도시, 울산

경제/경제와 경영, 관리

by 소나무맨 2013. 7. 7.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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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선대인의 맨발의 경제학](5) 부조리극 같은 도시, 울산

우석훈 | 내가 꿈꾸는 나라 공동 대표·경제학 박사

 

ㆍ누가 ‘버지니아 울산’을 두려워하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버지니아 울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에드워드 올비의 희곡이며, 영화 제목이다. 솔직히 희곡은 물론 영화도 보지 못했다. 스크립트 수준의 약간의
소개만을 봤을 뿐이다. 제목은 오히려 버지니아 울프보다 더 유명할 정도다. 그렇다면 버지니아 울프는 제대로 아는가? 전쟁에 대해 남편과 토론하다 격분해 템스강에 투신했고, 어린 시절 성폭력에 희생당했으며, 가부장적 남성주의 사회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주 어린 시절 읽은 그녀의 따분하다 싶은 소설 일부분이 드문드문 기억난다. 그냥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한다면? 희곡 또는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도 모르고, 버지니아 울프도 제대로 모른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같은 토론그룹에 속했다는 것 정도로 버지니아 울프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봤는데, 역시 나와 사정이 많이 다르지 않았다. 오! 우리는 인문학적 소양이 결핍된 경제인 혹은 경제 전문가들이다.

■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자 도시

버지니아 울프를 버지니아 ‘울산’이라고 바꾸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심지어, “누가 버지니아 ‘울산’을 두려워하랴”라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듯싶다. 버지니아 울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희곡의 제목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희곡을 몰라도, 버지니아 울프를 몰라도, 이 복잡한 구조의 메타 텍스트의 생명력은 유효하다. 그것은 일종의 부조리극이며, 기승전결에 따라 꽉 채워진 고전적 구조와는 또 다른 연상과 기호의 세계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희곡은 사실 버지니아 울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의 악역, ‘나쁜 큰 늑대(Big-Bad-Wolf)’를 따와서 ‘누가 빅 배드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제목이 되는 게 작가의 원 의도였다. 그러나 이 동화를 상업화시켜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게 된 디즈니사가 반대하면서, 비슷한 어감을 주는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든, 버지니아 울산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울산시 장생포항에 정박한 배 너머로 울산석유화학단지의 공장들이 아스라히 보인다. 석유화학단지에서 나는 악취는 이 ‘부자 도시’ 울산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 우석훈


최근 포항과 부산에서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은 얘기가 있다.

“이곳 부산(포항)의 호화 아파트들은 결국 울산의 부자들이 사게 될 겁니다.”

부동산의 눈으로 보면 수도권에서 갑 중의 갑은 ‘강남’이고, 이걸 경상도 버전으로 바꾸면 울산이 갑 중의 갑이 된다. 한국에서 궁극의 부자는 바로 울산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수치들은 그 말이 아주 틀리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지역총소득으로 보면 울산은 1인당 6만달러 소득을 넘어선다. 서울은 평균 수준일 뿐이다. MB 정부가 자신들의 목표로 747을 내걸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신화화된 언어로 얘기하면 이미 6만달러를 넘어선 울산은, 어느 코미디 용어대로 “한국이 아니므니다, 스웨덴입니다.” 물론 한국은행에서 가끔 지적하는 것처럼 자금 유출, 즉 본사로 유출되는 자금의 비중이 워낙 높기 때문에 이 돈이 그대로 울산 시민들의 소득인 것은 아니다. 울산의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수출업체의 매출액이 지역 소득으로 집계되기 때문에 높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울산은 여전히 부자 도시이고, 많은 사람들이 돈 벌러 울산으로 온다. 가족이 따로 사는 분거가족의 전국 평균은 16.9% 정도인데, 울산은 23.7%로 전국 평균보다 상당히 높다. 직장 때문에 따로 사는 경우는 45.4%, 학업이 이유인 경우는 36.9%다(울산발전연구원, 울산경제사회브리프 21호, 2012년). 몇 년 지나 세종시 통계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분거가족 항목에 기상천외한 수치들이 나올 것 같지만, 어쨌든 현재는 울산의 수치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이런 수치들을 종합해보면, 울산에 산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낫다는 것을 의미하고, 식구들을 두고 돈 벌러 갈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사람들이 판단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포항이나 부산의 부동산업자들이 ‘울산의 부자’라고 표현할 만큼, 운이 좋다면 아주 크게 성공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적어도 다른 지역보다 그럴 개연성이 높다.

존 롤스가 정의론을 이야기하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유아의 영혼들이 맺게 되는 계약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이를 ‘신계약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직 자신이 어느 육체에, 누구의 아들로 태어날지 모르는 유아들이 계약을 한다면, 불리한 경우를 최소화하도록 계약을 하지 않겠느냐는 게 롤스의 추론이다. 흔히 ‘맥스민(max-min)’이라고 부르는, 약자의 후생이 최대화되는 것이 정의라고 하는 롤스의 정의가 바로 이제 태어날 영혼들의 계약에서부터 나왔다. 영혼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이병철이나 정주영의 아들로 태어날 가능성보다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로 태어날 가능성이 더 높거나 혹은 이 경우의 위험성이 더 심각해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들은 정주영 아들의 형편을 더 높게 하는 것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황을 더 높게 해주는 방식의 계약을 하지 않겠는가. 이게 롤스의 정의론이다. 만약 한국에서 태어날 영혼들이 자신이 태어날 지역을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어디를 자신의 고향으로 선택할 것인가? 수치만 가지고 선택한다면, 그들은 평균적 지역소득이 가장 높은 울산을 선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상한다면, 대부분의 영혼들은 서울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일부의 영혼이 울산을 선택할 것이다. 보나마나, 그들은 수치만 가지고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경제학자가 되기 위해 경제학과에 입학하지 않을까?

■ 경제적 풍요 속 생태적 건강 잃어

지난 12일 수년 만에 다시 방문한 울산의 현대자동차 정문은 한산했다. 토요일, 일요일, 이런 거 없이 부산하게 돌아가던 공장은 요즘 비정규직 문제의 타협점을 못 찾아서 주말근무를 쉬는 중이었다. 파업할 때에도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인근의 식당 주인들은 현대차 노동자들의 수입이 줄어서 자신도 수입이 줄었다고 약간 앓는 소리를 했다. 물론 나는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중국에 대규모 공장을 신설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울산 공장 인근의 식당 수입에는 단기적인 교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차에 장기적 위기가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이미 세계화된 현지 생산 구조로 엔저 때문에 죽겠다고 말하는 것도, 그냥 엄살로 이해하고 있다.

‘울산의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옥동에 다시 찾아가본다. 1년 전에 비해 주상복합건물이 조금 더 늘기는 했지만, 해운대의 마린시티나 인천의 송도 같은 데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처럼 느껴졌다. 물론 조건이 별로 좋지 않은 울산의 주상복합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1년 전, 아마 최초로 외제 승용차를 분양 경품으로 내걸었던 곳도 울산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울산이 다른 것은, 이 아파트들을 뒷받침해줄 경제적 실체가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만약 울산 아파트에 위기가 온다면, 그건 이미 한국 자본주의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더 큰 위기 장세로 깊숙이 들어간 다음일 것이다. 이 정도면 애교 수준이다, 그게 ‘울산 버블’의 핵심 옥동에 대해서 내가 가진 느낌이다. 이 논리를 뒤집으면, 옥동도 위험할 정도라면, 한국 전체에 위험하지 않은 아파트는 없다, 그런 얘기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울산항과 울산석유화학단지를 방문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대기 문제 중 흔히 악취 문제라고 부르는 그것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까? 이런 대규모 석유화학단지에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경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황산화물, 이후에 질소산화물 그리고 미세먼지, 이렇게 한국의 대기 관리 패러다임이 지나온 순서대로 보면, 많은 경우 울산의 대기질은 서울보다 우수하다. 수치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만들어내는 악취 문제, 이건 앞으로도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다. 불행히도, 이건 발암물질이다. 계측기를 들고 가서 재지는 않았지만, 내가 한참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시절과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이 문제를 풀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노무현 정부든, 이명박 정부든, 심지어 현 정부에도 해결 의지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4대강 사업을 ‘녹색성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악취 문제가 눈에나 들어오겠는가? 고래 보호와 지역 경제 사이에서 생태관광으로 적당한 타협을 본 장생포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래 고기 전문점과 고래박물관 사이의 그로테스크한 이질성, 그게 울산 석유화학단지의 환경 문제 아니겠는가?

수출 중심으로 달려온 한국 경제의 과거와 미래가 석유화학단지의 핵심을 형성하는 울산항 바로 옆에 있는 장생포 포구에 그대로 펼쳐진다. 야박한 얘기지만, 나한테 울산에 식구들을 데리고 와서 살겠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다. 지역소득 측면에서 한국의 모든 도시들이 부러워하고, 한 개만 있어도 좋겠다는 국가공단이 여러 개인 데다 온산공단까지 끼고 있는 울산은 얼마나 부러운 도시인가? 모든 지자체가 울산처럼 되지 못해서 난리 아닌가? 그러나 이들에게도 고민이 있다. 태화강의 생태 복원은 전국적으로 최고의 성공 사례로 꼽히지만, 그 사례가 이 지역이 생태적으로 건강하거나 보건적으로 안전하다고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울산의 주도권을 쥐고 경쟁하는 것은 세 개의 세력이다. 하나는 정몽준으로 대표되는 새누리당 세력, 바로 자본과 돈의 주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울산이 조승수를 알고 조승수가 울산을 안다’는 최고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일부가 지지하는 진보 정당. 마지막으로 생태도시 울산을 향해 또 다른 힘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울산의 시민사회다. 민주당? 이 기이한 도시에서 그들의 자리는 아직 없는 듯싶다. 경상도의 힘과 자본의 힘이 딱 결합한 울산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노동자와 시민이 각각 자신들이 설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려고 하는 이 상황에서 ‘민주’라는 이름은 적어도 경제라는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 경제 선진화, 울산에게 어떤 의미인가

지금의 울산은 내용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그렇게 모범적인 도시는 아니다. 경제적으로 약간 풍요로울지는 몰라도, ‘보건적으로 안전한 도시’로 가기 위한 로드맵도 없다. 그냥 먹고살기 위해서 가장들이 일하러 오는 도시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지만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도시 또한 울산이다. 공단 지역이 생태도시로 전환되는 그 거대한 실험이나 시민들의 자치가 가능할 수 있는 건, 여기는 아직도 돈이 있기 때문 아닌가? 다른 지역 주민이나 지자체가 모라토리엄을 고민하면서도 토건사업으로 질주하는 동안, 그나마 ‘삶의 질’에 대해 고민했던 거의 유일한 광역도시가 울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지방선거, 보나마나 이 지역은 새누리당의 싹슬이 지역이 될 것이고, 잘해야 노동자들이 기초의회 몇 자리 정도나 건질 것 같아 보인다. 조승수의 시대, 안 올지도 모른다. 뭐, 좋다. 현실이기도 하고. 진보 정당이든, 민주당이든, 울산의 미래는 이래야 한다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대안을 제시한 적이 없기도 하다. 어차피 큰 토건이나 작은 토건이나 비슷한 상황에서 이게 진보다, 이게 보수다, 그런 얘기는 적어도 울산에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처럼 몰락할 것인가? 그러기에 울산은 가진 게 이미 많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지난 정부에서 ‘경제 선진화’를 기조로 내걸었다. 747, 그런 식이면 울산은 이미 선진화되고도 남았다.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화, 한국 자본주의의 선진화, 뭐든 좋다. 그게 울산한테는 어떤 의미인가?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거나, 잔업수당이 늘어서 지역 식당이 죽어라고 핑핑 돌아가는 게 울산의 미래인가? 아니면 자본가들의 하수인일 뿐인 보수 정치인들의 손에서 노동자 전사들이 지역 자치의 주권을 찾아오는 것이 울산의 미래인가? 한국 자본주의의 최전선, 수출전선의 심장에서 길을 묻는다. 누가 버지니아 ‘울산’을 두려워하랴? 각 지역, 각 지자체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와 ‘과제’들을 이미 해결한 광역도시 울산, 우리가 울산을 아는가? 그리고 울산의 미래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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