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6. 19:59ㆍ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 체 게바라 (Ernesto Guevara) (전직) 정치인
- 생몰1928년 6월 14일 ~ 1967년 10월 9일
- 출생지아르헨티나
- 경력쿠바 공업장관
저서
(13개)-
201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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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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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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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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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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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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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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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30
-
2005.01.25
-
2004.12.31
2012.03.28 1회독
- 작가
- 박영욱
- 출판
- 이룸(김현주)
- 발매
- 2003.12.20
체 게바라의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트 게바라였다. 체는 스페인어로 '어이, 친구'라는 뜻으로 의사가 아닌 혁명가의 삶을 다짐하면서 스스로 '체 게바라'라고 불리길 원하였다. 미국의 자유주의 노선과 소련의 공산주의 노선 두 진영의 이념대립에 따라 희생자가 된 쿠바의 주체적인 권리를 갖기 위해 피델 카르스토와 함께 싸워왔다. 미국을 따르는 것은 결국 미국의 속국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소련 또한 순수한 사회주의가 아닌 자국의 배를 불리기 위한 불순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혁명군으로 싸워온 인물이 바로 체 게바라이다. 놀라운 것은 그는 쿠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쿠바를 위해 싸워올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체 게바라의 평전 내용의 주된 내용은 체 게바라의 여행 이야기이다. 그는 친구와 함께 남아메리카 지역을 무전여행하였는데 그 때 보고 느낀 것이 이 혁명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였다. 특히 새롭게 이주해온 북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인들에게 쫓겨난 인디언들의 참상을 보았고 민중의 고통을 보면서 진정한 혁명과 개개의 의지를 존중하는 위대한 평등주의자가 되어 희생할 각오를 계속해서 다져나갔다. 혁명군을 이끌 때도 마찬가지였다. 적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원칙을 잊지 않도록 대원들에게 강조하였다. 혁명전쟁의 목적은 결국 인간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 잊지 않았다. '지금 왜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대원들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하고 종종 연설을 하면서 목적의식을 고취시켰다. 실질적으로도 인간주의적 원칙은 혁명군이 승리할 수 있는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삶 또한 혁명군으로서 마감하게 되었다. 혁명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소련의 압박에 대하여 쿠바 정부는 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였지만 체 게바라는 달랐다. 여전히 혁명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방해공작이 많은 탓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체 게바라는 누구보다 순수하게 혁명가가 되었다.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평등'. 자신의 조국도 아닌, 쿠바를 위해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갑자기 국토대장정이나 무전여행에 관하여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후반부의 혁명 이야기보다는 그가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들이 굉장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딘가에 가면 어떤 것 보게 되고 어떤 것을 느끼게 될까? 체 게바라가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혁명가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내 인생도 그런 경험을 통해 무언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이 된다.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어떻게'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위인전을 보고 '무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차다니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어떠한 책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출처] 112)『청소년 평전 05 : 아름다운 혁명가 체 게바라』/박영욱|작성자 제제
뉴스
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김산환의 <안녕, 체>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그 다음 여정 | |
ⓒ 꿈의지도 |
체 게바라가 1951년 12월, '포데로사'라고 이름 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를 돌아본 6개월간의 여정(이때의 여정은 2004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후, 1953년 12월, 본격적인 혁명의 대열에 몸을 던지고자 스며든 과테말라로부터 멕시코와 쿠바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체 게바라 루트'를 열면서 나아간다. 물론 그 길은 체 게바라와 함께 가는 길이고, 그 첫 여정이 '안티구아'이다.
다정한 편지글체로 마치 연인에게 소식을 전하듯 잔잔히 풀어놓는 저자의 글은 또 다른 묘미를 주었으며, 거부감 없이 저자의 행로를 따라 동화되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게다가 걸림 없이 유려한 문체로 풍광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책도 여행자가 휴대하기 좋은 크기로 작게 만들어져서 들고 다니며 쉽게 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먼 이국땅의 낯섦을 편안함으로 바꾸어주었다.
마야의 나라 과테말라에서
저자는 안티구아를 참 매력이 넘치는 곳이라고 했다. 체 게바라가 당시에 과테말라를 택한 이유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자유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혁명가들의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테말라 정부가 워낙 많이 몰려드는 여행자들을 위해 도시 치안을 잘 유지하고 있어, 이런 이유로 여행자들은 안티구아를 '과테말라의 해방구'라 불렀다. 또한 이미 안티구아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0미터 높이로 군더더기 하나 없이 치솟은 아구아 화산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기에, 인구 3만의 작은 도시 안에 세계가 있다고 했다.
체 게바라는 과테말라에서 첫 번째 아내 일다를 만나게 되지만, 1954년 봄, 게바라가 들어간 지 몇 달 만에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자유정권은 무너지고, 게바라는 안티구아 가까이 있는 산악지대로 도피한다. 그곳에 '아티틀란 호수'가 있었다. 영국 작가 헉슬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극찬하였고, 게바라도 두 번이나 찾아 몸을 숨겼던 아티틀란 호수. 저자는 누구라도 이 호수를 만나면 마음의 짐을 다 풀어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했다. 크기도 매우 커서 백두산 천지의 열 배쯤 된다나. 이곳에서 게바라는 마야 문명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야에 대한 게바라의 관심은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영역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된 채,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신음하는 제 3세계 민중에 대한 당대의 문제였다. 아마도 마야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전 세계 민중들을 위해 투쟁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그 공감의 힘이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저자도 '코판'과 '티갈'로 가서 마야의 놀라운 유적지를 더듬으며 찬탄했다.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가 만난 멕시코에서
일 년 뒤에 게바라는 과테말라를 탈출하여 멕시코시티로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사진 기자로 일하며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 밖에 되지 않았다. 저자는 게바라가 머물렀던 멕시코시티로 가기 위해 카리브 해와 닿아있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를 따라, 툴룸, 칸쿤, 치첸잇사, 욱스말, 팔링케를 거쳐갔다. 팔링케는 게바라와 그의 아내가 신혼여행을 떠났던 곳이다.
저자는 특히 멕시코 최대의 휴양지 '칸쿤'에 오래 마음을 머물게 했다. 1960년대만 해도 한적한 어촌이었지만, 700km에 달하는 거대한 해변과 눈부신 백사장을 세계 제일의 휴양지로 개발하여, 오늘날 '호텔의 띠'가 무려 23km나 펼쳐져, 한 해 평균 200만 명이나 찾아오는 칸쿤에서 지난 2003년, 쌀 수입개방을 조인하는 제5차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가 열렸고, 이때 한국의 농민 이경해씨가 세계화와 쌀 개방 반대를 외치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칸쿤이 멕시코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듯이, 세계화 역시 농민들에게는 행복한 삶을 박탈당하는 부당한 현실이었으므로.
저자는 맥주 한 병을 고스란히 해변에 부으며, 이경해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는 멕시코시티를 거쳐 쿠바로 향해 간다.
이쯤에서 이 아름다운 문명과 작별을 고할까 해. 과테말라의 안티구아에서 시작해 마야를 찾아 나선 여정은 고고학 산책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일깨워준 시간이었어. 그것은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오락영화 속에 나오는, 잔뜩 뒤틀려버린 문명의 이야기와는 다른 거야. 제 3세계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진짜 이 땅의 역사를 마음껏 사색할 수 있게 나를 이끌어주었어. 이처럼 아름다운 문명이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슴 아파. 오늘은 갈 길이 멀어. 체 게바라가 사랑하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 끝에 늘 그렇게 썼듯이, 마야의 순수한 영혼과 카리브 해의 바람이 담긴 포옹과 키스를 보내.(본문 168쪽)
'멕시코시티 레프블루카 광장 근처 엠파란 가(街) 49번지, 마리아 안토니오 산체스 곤잘레스라는 여인의 비좁은 아파트'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운명적으로 만난 곳이다. 이때부터 '에르네스토'라는 이름을 버리고 '체'가 되었다. '체'는 의사에서 혁명가로 다시 태어났다. 체는 1956년 11월, 쿠바 혁명을 위한 원정을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운다.
"저는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해 싸울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는 방식대로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삶이 체 게바라에게는 무력해 보였을까. 오직 치열하게 싸우다 길 위에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체는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다시 쿠바에서
▲ 시가를 문 체게바라 | |
ⓒ 체게바라 |
쿠바인들은 열대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나무처럼 몸을 격렬하게 흔들고, 흔드는 것이 춤이 되는 열정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 뜨거운 피는 하나의 틀 안에, 하나의 사상에 안주하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여행자의 거리 '아바나 비에하'를 걷고, 쿠바인들의 그 어떠한 친절도 모두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소개하며, 쿠바 시가의 구수한 향기, 그리고 푸른 바다와 하늘과 바람이 담긴 술 럼주, 슬픈 역사를 가진 사탕수수밭, 카리브 해로 지는 석양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직도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과 50년간 미국의 경제 봉쇄에 맞서 살아남은 쿠바의 낙천주의도.
체 게바라는 쿠바 동부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조금씩 해방구를 넓혀 1958년 12월, 바티스타의 마지막 저지선 산타클라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1959년 1월, 드디어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해 6월, 체는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 그는 모든 행복을 뒤로 한 채, 카스트로에게 편지를 남기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일 년 만에 그는 아프리카를 탈출하여 볼리비아에 들어가 아마존 강 밀림에서 게릴라전을 펼친다. 그로부터 다시 일 년 후인 1967년 10월, 그는 총상을 입었고, 볼리비아 장교와 미국 CIA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된다. 죽은 체 게바라의 모습은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예수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저자는 산타클라라 시내에 세워진 체 게바라 동상과 오래도록 눈을 맞추었다. 삐딱하게 눌러쓴 베레모 아래 먼 곳을 응시하던 깊은 눈의 사내를 만난 건 대학 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젊음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상실의 시대가 왔다고 느꼈을 때,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그가 슬며시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육체적인 삶은 볼리비아의 황량한 고원에서 끝났지만, 그의 영혼은 죽지 않았다고.
그렇다. 아직도 그의 영혼은 죽지 않았다는 위안은 아직도 혁명의 열정이 필요하다는 확신이며, 더 좋은 세상, 자본주의 너머, 인간이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의 영혼이 필요하다는 말이며, 다시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품자는 전언이 아닌가.
<안녕, 체>를 읽기 전에 나는 마치 흩어진 천 조각들을 움켜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녕, 체>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천 조각들을 이어 붙여 아름다운 조각보를 내 마음 속에 만들었다. 체 게바라의 열정적인 삶과 과테말라, 멕시코, 그리고 쿠바, 그 뜨거운 열대의 습기와 바람과 바다와 석양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피부색과 흥겨움과 혁명이 조각보를 이루어 출렁이듯 펼쳐짐을 느꼈다.
시거를 한 대 피워 물었어. 쿠바인의 핏줄을 따라 흐르는 뜨거운 본능이 내 몸에서도 꿈틀거리게 하고 싶었어. 귓불을 핥는 부드러운 바람의 속삭임에 취해 다시 몸 속 깊은 곳으로 시거의 향기를 빨아들이다가 방파제에 가만히 몸을 뉘었어. 눈물 나게 파란 하늘이 내 눈 가득 들어와. 눈을 감았어. 방파제 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가 내 영혼까지 홀딱 적셔놓고는 저만치 멀어져 가. 어디선가 사내 하나가 걸어와. 금빛으로 빛나는 별을 단 베레모를 쓰고, 예수처럼 수염을 기른, 저 먼 이상을 향해 그윽한 눈길을 주고 있는 사내, 체 게바라. 내 영혼의 등대였던 그에게도 이젠, 작별을 고할 시간이야. 안녕, 체!
김산환의 <안녕, 체>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체 게바라의 딸에게 쿠바를 묻다
시사INLive 허은선 기자 입력 2012.12.21 02:43
나의 아버지 '체 게바라' "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최종수정 2012.12.02 10:20기사입력 2012.12.02 10:20
알레이다 게바라 방한..서울대에서 강연 "체는 건설적인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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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이다 게바라는 쿠바국제우호협회(icap)와 한쿠바교류협회의 교류를 위해 지난달 30일 방한했다. 때마침 알레이다 게바라가 속해있는 연구센터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체 게바라 : 뉴맨'도 한국에서 개봉을 한 참이었다. 알레이다 게바라는 한국 방문의 첫 행사로 서울대를 방문해 '나의 아버지 체 게바라'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14시간의 시차로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서도 그는 우리가 '체'에 대해 몰랐던 소소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쿠바'의 비전에 관한 큰 그림까지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알레이다가 5살 때 체는 반군활동 지원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떠났다.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마지막 만남이 그녀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가 콩고에 있다 극비리에 쿠바에 온 적이 있다. 집에 왔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변장한 모습이었다. 왜냐면 내가 유치원에 가서 '아빠가 돌아왔다'라고 말을 하면 큰 일이 나니까. 근데 변장한 모습의 그 사람이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체는 와인에 물을 타먹는 습관이 있었다. 5살의 알레이다는 변장한 아버지가 와인을 마시려고 하자 "우리 아빠는 와인에 물을 섞어 먹는다"며 거기다 물을 부어주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알레이다가 놀다가 넘어져 목 뒤를 심하게 다치자 '체'가 그를 정성껏 치료하고 돌봐줬다. 치료가 끝나자 알레이다는 엄마에게 다가가 "엄마,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나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날 밤의 기억은 평생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그 이후에는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랑을 할 줄 아시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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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체 게바라 : 뉴맨' 중 |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와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피델과 체가 멕시코에서 붙잡힌 적이 있었다. 당시 피델은 동료들에게 신변의 안전을 위해 '정치적인 성향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체는 오히려 '난 공산주의자다'라고 크게 얘기했다. 게다가 투옥돼있는 사람들과 함께 스탈린에 대해 논쟁도 했다. 결국 피델을 포함해 당시 잡혔던 모든 사람들이 풀려났지만 '체'는 제외됐다. 알레이다는 "피델은 나에게 삼촌과 같은 존재다. 그 사건으로 피델은 '체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는 피델을 '훌륭한 군사지도자'라고 여겼다"고 설명했다.
"쿠바 국민은 체 게바라를 굉장히 존중한다. 왜냐하면 '체'는 일어나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굉장한 비평가인 동시에 건설적인 비평가였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비평을 하더라도 그에 대한 해답도 동시에 제기했다. 특히 쿠바 젊은이들과 많은 대화를 했는데,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쿠바 청소년들이 가장 중요한 인물 1위로 손꼽는 이유다."
체가 평소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는 질문에는 체가 '음치, 박치'였다는 의외의 대답이 나오기도 했다. 유일하게 체가 출수 있는 춤이 '탱고'였는데 어떤 음악이 '탱고'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춤추는 자리에서는 탱고가 나오면 그의 친구가 팔꿈치로 '체'를 찔러서 신호를 줬다. 어느 날은 한 아름다운 여성이 체와 그의 친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가 '저 여인을 보라'고 체의 팔꿈치를 쳤는데 체는 그것을 '탱고' 신호로 받아들여 무대로 나가 탱고를 쳤다. 그러나 그 때 나온 음악은 '맘보'였다는 게 체의 '굴욕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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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이다 게바라의 모습 |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술, 속옷 등 각종 상품에 사용되는 현상에 대해서 알레이다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그 같은 상업화를 차단할 것"이라 단호하게 말했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붙여져있는 상품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한 안과에서 체의 사진을 홍보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많은 매체에서 아버지의 사진만 이용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콘텐츠는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쿠바 아바나에 체게바라 연구소를 설립해, 이런 행위를 자제하고 법적인 대응을 하려고 한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체의 티셔츠를 가지고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파시즘'을 추구하는 이들이어서 거절했다. 또 한편 포르투갈에서는 14살의 소년이 체의 얼굴이 박혀있는 깃발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체 게바라처럼 나 역시 승리를 이룰 때까지 계속 투쟁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체의 사진이 많이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처럼 득과 실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상업적으로, 무자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막으려 한다."
쿠바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쿠바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적게 가지고 있지만 서로 공유한다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 얼마 전 쿠바에서 태풍이 강타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복구활동에 나서 전력을 복구하고, 식품생산을 재개했다. 이러한 것은 사회주의라는 체제가 국민에게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두 번째 책은 어떤 내용인가?
브라질의 '땅 없는 사람들의 운동(MST· Movimento sem Terra)'을 소재로 한 책이다. 이 운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프로젝트이다. 브라질은 큰 나라다. 그런데 비옥한 토양 중 80% 이상을 상류층 27가구가 소유했다. 그래서 엄청나게 넓은 땅이 놀고 있다. MST는 토지 개혁을 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노는 큰 땅을 점유해서 경작한다. 정부로서도 이런 휴면지를 차지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결국은 땅을 주게 된다. 토지 소유주의 살해 위협 등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는 매우 성공했다. 땅을 차지한 사람들이 재배하는 작물은 세 가지다. 자신이 먹을 것, 판매할 것, 여기에 아직도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줄 작물까지 키운다. 또 가공식품을 만들어서 사회에 더 많이 환원할 수 있도록 한다. 땅을 존중하기 때문에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유기농 경작을 한다. 여러모로 존경할 만한 프로젝트이다.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방한 첫날, 한국의 첫인상에 대한 질문을 받고 '느낄 겨를도 없이 바빴다'고 했는데, 오늘도 바빴나?(웃음)
바빴다(웃음). 하지만 내일은 한국의 고궁을 돌아보기로 했다. 건축양식을 보거나, 시골 농부가 사는 집을 본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허은선 기자 / alles@sisain.co.kr
다시 게바라를 떠올린다
오마이뉴스 홍성식 입력 2002.12.03 04:57오사리잡탕 같은 2002년 한국정치계. 젊은 것이나, 늙은 것들이나 자신의 이익과 손해만을 기준으로 손바닥 뒤집듯 신념을 바꾸는 국회의원들이 지도자 행세를 하는 한국은 슬픈 나라다. 우리는 불행한 백성이다. 권력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 지도자 한 명 없는 좀팽이들의 한국정치판.이 처참한 상황은 슬픈 나라의 불행한 백성들에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승리했으며, 볼리비아 정글에서 장렬히, 그야말로 장렬히 세상과 작별을 고한 "그리운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1928~1967).<font color=navy>의사로서의 풍족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고난으로 가득 찬 혁명의 길을 걸었던 사람.목숨을 건 싸움으로 얻은 권력을 넝마인양 버릴 수 있었던 사람.관료화한 볼셰비키들이 역겨워 그 앞에서 내처 쿠바산 시가만 피워대던 사람.아프리가 콩고의 밀림과 볼리비아 정글의 울부짖는 사자 같았던 사람.처형자로 하여금 "죽음 앞에서 그토록 당당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 술회하게 한 사람.마르크스와 랭보, 포이에르 바하와 블레이크 사이를 넘나들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사람.</font>하여,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부군의 흉탄에 유명을 달리한 지 3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전세계 모든 청년들의 가슴에 우상이자 영웅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위대한 인간은 죽음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혁명의 세기"라 지칭되는 20세기.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낸 혁명가 중의 혁명가. 그러나, 체 게바라에게선 불요불굴의 의지를 가진 혁명가의 모습만이 읽히는 건 아니다. 게바라는 10대 때부터 고대 그리스의 시와 보들레르의 표상주의에 경도됐던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그는 험난한 시에라 마에스트라산(山)에서 피델 카스트로, 오초아 등과 함께 생명을 담보로 한 게릴라전을 펼치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 바로 이 체 게바라의 문학적・시적 성정을 남김없이 확인할 수 있는 시집이 출판됐다.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42)가 엮은 체 게바라 시집 <먼 저편>(문화산책).@IMG2@책에 등장하는 시(詩)들은 사실 "운문적 향취를 띠는 산문"에 가깝다. 자타가 공인하는 "게바라 매니아" 이산하가 체 게바라가 남긴 일기와 메모 등을 시의 형식에 맞게 일정부분 윤색도 했다. 하지만, 게바라 특유의 결단성과 과감성 그리고 낭만성은 전혀 희석되지 않은 채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한 권의 시집으로 엮기 위해서는 의역과 재구성이 불가피했다. 그러다보니 다소 비약된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원전의 뜻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넣지는 않았다"는 것이 이와 관련된 이산하의 설명이다.
기실 <먼 저편>의 미덕은 "잘 쓴 시"를 만나는 것에 있지 않다. 철의 혁명가로만 알려진 체 게바라의 예술가적 감수성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집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런 기꺼운 마음으로 책에 실린 시들을 읽는다. 될 수 있으면 전투적인 것보다는 서정적인 시편들을 중심으로 읽어가는 것도 <먼 저편>을 제대로 즐기는 한 방법이다. 책에 수록된 "참된 삶"이라는 5행의 짧은 시는 시가 가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미학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font color="#B8733">북미의 백만장자가되는 것보다는차라리,문맹의 인디언이되는 게 낫다-- 위의 책 중 "참된 삶" 전문.</font>"나을 것 같다"가 아니고 "낫다"다. 백만장자와 문맹의 인디언을 비교함에 어떤 이유도 들이대지 않고, 단 한마디로 후자의 삶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과감성. 혁명가는 뒤를 돌아볼 틈이 없는 사람이지 않던가. 이 시는 혁명을 위한 투쟁에서 체 게바라가 어떤 태도를 보여주었는지를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과감성과 함께 혁명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또 무엇이 있을까.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선천적으로 결핍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다. 이 시 역시 단 6행의 칼날같은 문장으로 혁명가 아니, 인간의 덕목을 간명하게 설파한다.
<font color="#B8733">민중에 대한 사랑인류에 대한 사랑정의감그리고 인간에 대한관대함 없이는진정한 혁명가일 수 없다-- 위의 책 중 "사랑" 전문.</font>혁명의 필요했던 시대는 20세기만이 아니었다. 착취와 억압, 불평등과 부자유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혁명의 필요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아래 인용하는 시는 2002년 현재를 사는 한국민 모두를 슬프게 한다.
문둥병에 걸린 이들과도 함께 음식을 나누고, 그들의 처참한 환경에 가없는 연민을 가지며, 그 불행을 강제하는 것들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당당한 의지를 다졌던 체 게바라의 모습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억울한 죽음을 맞은 열 다섯 소녀들의 피묻은 운동화와 오만방자하고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미국의 태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내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비굴한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font color="#B8733">...더 있다보아야 할 것이 더 있다산중에 쓸쓸히 서 있는 오두막계속되는 굶주림과 수탈벼룩...저주받은 것들사방에 버려진 넝마주의 아이들허망한 꿈에 젖은 눈동자들뼈반 앙상하게 남은 팔영양결핍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그리고 아메리카...-- 위의 책 중 "나환자촌" 부분.</font><table cellpadding=0 cellspacing=1 border=0 width=350 align=right><tr><td width=10></td> <td width=340> <table cellpadding=0 cellspacing=1 border=0 width=340 bgcolor=#d98719> <tr> <td> <table cellpadding=0 cellspacing=0 border=0 width=338 bgcolor=#F9F0ED> <tr> <td colspan=3 height=8></td> </tr> <tr> <td width=8></td> <td width=322 class=box2 height=20><먼 저편>을 엮은 이산하 시인은...</td> <td width=8></td> </tr> <tr> <td width=8></td> <td width==322 class=box1><br><table width=10 align=right cellpadding=0 cellspacing=0 border=0> <tr> <td rowspan=4><img src=./images/00.gif width=10 height=1></td> <td align=right><img src=http://www.ohmynews.com/down/images/box/89498_1[1].JPG WIDTH=100% border=0></td> </tr> <tr> <td align=left><font style=font-size:9pt;line-height:150%; color=#3A6E7C>▲ </font></td> </tr> <tr> <td class=context align=left><font style=font-size:9pt;line-height:120%; color=#5A8E9C></font></td> </tr> </table>1960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출생해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 혜광고와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82년 문학동인지 <시운동>에 "존재의 놀이"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br><br>대학시절 지하신문의 제작과 인천지역 노동운동 등에 관여했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5년 가까이 수배자의 신분으로 살기도 했다. <br><br>87년에 발표한 장편서사시 <한라산>의 이적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석방 후 10년 이상을 절필하다가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99년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를 내놓으며 문단에 복귀했다.<br><br>올 봄 전국의 유명사찰을 돌아보고 쓴 기행문 <적멸보궁 가는 길>은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현재 인권 월간지 <사람이 사람에게>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홍성식 기자 </td> <td width=8></td> </tr> <tr> <td colspan=3 height=8></td> </tr> </table> </td> </tr> </table> </td></tr></table>"그리고, 아메리카..."라. 인류와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가진 지도자는커녕, 민족적 자존심조차 팽개치는 정치모리배들만이 판치는 한국정치판에 몸을 담은 정치인들은 많은 시를 읽어보지 못했을테니, 이 시의 마지막 구절 "그리고 아메리카"와 "말줄임표(...)"에 내포된 은유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은유가 아닌 직설로 물어볼까?나라와 국민을 책임지는 자리인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에게 동시에 묻노니, "우리는 진정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코스모스같은 어린 영혼을 살해한 그들이 정말로 무죄인가?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민족적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하는가?"체 게바라 시집 <먼 저편>은 정치인은 물론, 이기(利己)과 보신(保身)의 일상을 사는 우리들에게 위와 같은 가혹하고도 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 있어 그 질문에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답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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