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4주년]'모란꽃'이라 불린 여자 전옥주씨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옥주씨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광주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가슴 한구석 살을 도려내는 아픔과 상처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80년 피비린 내 나던 5월, 광주를 겪은 분들이 그 분들인데요. 그 가운데서도 광주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직접 이끌어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80년 5월 19일 밤에서 다음 날 새벽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도청 앞까지 소형 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가두방송으로 광주의 실상을 알렸던 전옥주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전옥주씨와 함께 80년 5월 광주 정신의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전옥주씨
-24년이 흘렀는데 오늘 광주 5.18 기념식을 맞는 심정은 어땠는지.
“현재 행불자들의 행적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아픔도 크다. 진정한 민주화가 되려면 지금 어딘가에서 있을 찾지 못한 시신들이 망월동에 안치되어야 하는데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시신을 찾는 가족조차 없는 희생자들은 시신을 찾는 연고자마저 없어서 얼마나 울부짖고 있겠나. 그래서 올 해는 더욱 더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광주에서 추산하는 희생자의 수는 어느 정도인가?
“약 760명 정도라고 하는데, 사실 행불자는 현재 망월동에 안치되어 있는 영령보다 더 많을 것이다. 당시 내가 직접 옮긴 시신이 30구 이상이었다. 당시 동명동 어느 지하에 수많은 시신들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달려갔는데 이미 어디론가 트럭이 와서 싣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산천에 매장됐든, 물속에 수장됐든 지금이라도 그 시신들을 찾아내야 한다. 다들 민주화가 됐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진정한 민주화가 되려면 양심선언을 하고 그 시신들을 내놓고 그것을 국민과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한다.”
-행불자 문제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던 문제인데 정부는 어떤 대책을 내놓고 있나.
“이번 5월 30일까지 5차 접수를 받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나마 가족이 있는 희생자들의 시신은 유족들이 찾고 있지만 가족이 없는 시신들은 어디서 누가 찾아서 망월동으로 올 수 있게 하느냐는 거다. 그게 가슴 아플 뿐이다.”
-우리 한국의 민주화에서 광주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
“처음에 학생들은 촛불 시위를 평온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계엄군이 처들어 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광주 시민들은 불안에 떨면서 내 자식, 내 남편, 내 어머니, 내 아버지가 혹시 죽지 않았나 해서 거리로 모두 뛰쳐나왔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광주가 민주 성지가 됐다 해서 내놓을 만한 것이 뭔가.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도 됐고, 또 오늘도 대통령을 비롯해서 많은 의원들이 망월동에 왔지만 그들이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들 뱃지 달기 급급해서 5월을 얼마나 팔았나.”
-80년 5월, 전옥주씨는 가두방송을 통해 진압군과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졌는데 가두방송을 하게 된 계기는.
“누구든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와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금남로에 가보니 학생들이 무자비하게 워커발에 짓밟히면서 군용차로 끌려가는 광경을 봤다. 그러고 있던 차에 학생들이 물을 떠다 달라고 해서 물을 날랐다. 계속 물을 나르고 있는 데 학생들이 모금을 해서 엠프를 사왔다. 그러나 그 엠프는 최루탄을 맞아 30분도 채 쓰지 못했다.
그래서 가까운 동사무소에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 스피커와 엠프를 떼오면서 숙직실에 당시 가지고 있던 7만원을 놓고 왔다. 5시까지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덕분에 죄명에 특수공갈죄가 추가됐었다.
동사무소에서 도청 앞까지 걸으며 방송을 했다. 방송하는 도중 누군가 픽업차를 가지고 와서 가두방송을 해달라고 해서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시민군이 나를 따라다니며 광주 시내를 돌기가 너무 힘이 들었었다. 그래서 누군가 버스를 가지고 와서 시민군들이 버스를 타고 함께 광주 시내 전체를 돌게 됐다. 그렇게 신역 쪽에 도착했는데 누군가가 신역에 시신 2구가 있다고 알려왔다. 그 모습이 광주 항쟁을 다룰 때 방송이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리어카 위에서 태극기로 덮여있던 시신 2구...그 광경이다.”
-가두방송을 시작하면서 시민들의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가두방송중 시민들에게 간첩으로 오해받아 고초도 겪었다는데.
“방송을 하고 시신을 운반하고 도청 앞에 오니까 누군가 ‘저 여자는 간첩이다. 간첩이 아니고는 저렇게 말을 잘 할 수가 없다. 세뇌 교육을 받지 않고는 저렇게 할 수가 없다’고 외쳤다.
그냥 귓전으로 흘려듣고 다시 방송을 하며 광주 공원으로 갔는데 거기서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를 간첩이라고 외쳐댔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그렇게 나를 따라줬던 시민군들이 나를 에워싸서 포승줄로 뚤뚤 묶어 세워놨. 그래서 ‘나는 간첩이 아니다. 나는 전직 경찰 가족이고, 내 아버지는 퇴직금마저 국가에 헌납했던 분이다. 나는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시민군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 차 집으로 가다가 따라 온 사람들 가운데 나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간첩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이 돼서 풀려나게 됐고, 다시 방송을 하게 됐다.”
-광주항쟁이 끝나고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도 하셨다는데.
“그 때 연행 되서 여성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고통을 10일간 겪었다. 그래서 하혈을 3년을 했고, 군 재판을 받았다. 6월에 검사 조서를 받고 다시 광산 경찰서로 넘어갔다. 그래서 경찰서에서 9월 15일 15년 형을 받아 19일 광주 교도소로 넘어가서 독방에 있었다.”
-2004년 광주의 산 증인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양동 시장 어머니들이나 금남로의 모든 광주시민은 어느 시민보다도 위대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정말 운이 나빠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고, 감옥살이를 했지만 감옥에 갔다 온 저나 다행히 감옥행은 피했지만 정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동지들과 광주 시민들의 아픔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정말 유족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어떨 때는 최인처럼 가슴이 아프다. 내가 선두에 서서 가두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혹시나 희생이 줄지 않았을까 하는 아픔도 있다.
어제 어떤 학생이 ‘월드컵도 이렇게 요란하지 않았는데 왜 광주 문제는 해마다 이렇게 요란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정말 가슴아팠다. 지금 10대들은 아무도 광주 문제를 알지 못한다. 전국에 있는 시민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다. 자녀들 손을 잡고 꼭 망월동 성지에 찾아달라고.”
▶진행:김근식교수(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98.1MHz 월~토 오후 7시~9시) <ⓒ CBS 노컷뉴스 www.nocut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