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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문화예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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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문화예술
- 김 봉 준 님

- 환경과 예술의 문제에 대하여. 나의 예술이 환경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저로서는 그런 질문이 다소 충격적인 질문입니다. 곧 이어 아, 환경운동 현실의 거대한 벽 앞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맞습니다. 오늘날 환경운동의 물성주의, 몰개성주의, 문제제기형 개선 투쟁의 수준에서는 예술은 무기력 합니다. 이 수준에서는 예술이 환경운동에 복무하는 선전도구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환경문화적 한계를 넘어서야 시민적 교양으로서 살림(생명)문화가 자리 잡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몰개성주의야말로 반생명적인 사유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환경예술이 개성적 생태, 물성의 개성을 주목하지 않으면 즉발적 환경문제를 다루는 예술적 기재 정도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환경은 인간중심주의 개념이고 주변을 들러리로 보는, 세계를 영혼이 없는 믈질주의로 보는 해석이기 때문에 영혼과 생명을 중심으로 삼는 예술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자연을 개성적 생명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우주로 물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래 예술은 자연과 우주를 신성한 생태적 개성으로 이해하는 출발지입니다.

- 농적 예술, 살림예술에 대하여. 나의 예술의 지향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서슴없이 농민문화예술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 땅의 소농이야말로 가장 생태적 삶을 머리가 아닌 영혼으로 이해하며 생존하는 자들이라고 봅니다. 이젠 관행 근대농, 기업형 영농으로 농적인 삶마저 해체 위기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마지막 스러져가는 농민적 삶의 전통에서 영혼적 삶의 문화를 파악해야 할 기회는 이제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지식인들은 농적 삶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지적 풍토에 반기를 들었나 봅니다. 천상 저는 비주류를 자처해야 하는 자발적 고립자입니다. 하기사 저는 지식인도 못되고 농부도 못되는 한낱 예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낙향해서 살았던, 저~ 장년기의 산그리메 살이 10여년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농적 지혜와 슬기, 숲의 예감과 풍류를 공부하던 산골 유학길이었습니다. 풍부한 전통문화가 농적 문화임을, 물성에서 영혼이 있음을 찾았던 눈부신 만남들을 저는 결코 잊지 않고 살것입니다. 생명의 기름과 돌봄, 살림의 포태와 산고를 거쳐야 탄생하는 창조적 자연이 경외롭습니다. 짝퉁문화가 주류가 된 시대에 비주류의 농적 문화를 저의 새출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가난을 벗 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자발적 고립기를 견뎌내지 않고는 근대의 막강한 문화체계와 결별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저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민중미술가' '현장문화운동자' '민족예술인', '홍익미대출신 중견작가' 뭐라 불러도 이제는 개념치는 않지만 나는 이미 대안의 살림문예로 넘어 간지 한참입니다. 결코 과거를 청산한 새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다시 거듭나는 살림의 예술로 가고 있습니다.

- 반성적 미, 대안문화예술. 지난번 말씀드린 순승(巡昇)적 미, 반성(反性)적 미는 홍콩 현대미학자 서복관의 미학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전자는 모순을 불에 기름을 더 붓듯이 증폭 폭로 확장하여 극명하게 모순을 드러내는 미학이라면 후자는 무더운 혹서를 피하여 시원한 그늘을 찾는 것 같이 반대로 나아가 대안을 구하는 미학을 말합니다. 전자는 문명의 위기를 증언하고 고발하는 데 유효하지만 후자는 위기로부터 상처받은 문명을 치유하는 처방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긍정적 세계상을 구하려는 실천자의 미학입니다.

저는 환경운동도 문명위기를 치유하는 대안문화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기적 욕망 넘어 사람을 서로 살리는 치유문화를 찾자면 부정론 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긍정적 세계상을 만드는 희망의 문화가 이제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과 자연의 대척점만 볼 것이 아니라, 현문명에 대응하는 대안문명을 제안 할 때입니다. 싸우면서도 대안문명을 창조하는 창조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 문명의 위기를 치유하는 희망의 문화. 유기농 쌀장사만 옹호하는 물질적 대안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물적 기반에 상응하는 정신적 대안이 함께 준비되지 않으면 환경의 공공심(천심)은 내면화 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부터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예감이 이성과 기술을 앞지르기도하고 환경운동에서 영혼 치유의 문화운동으로 성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환경운동은 대안과 투쟁을 같이 내어 놓는 문화운동이어야 합니다. 예술은 내 안에 자연과 화해하는 정서형식을 제출하고 내 밖의 자연과 친교하는 사회조직화로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예술은 인류의 문명을 반성케 하는 눈물샘을 자극할 필요도 있지만 성찰 이후에는 근대문명에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고 치유해야 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보다 성숙하고 책임 있는 대안으로 자연도 살고 사람도 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 소박한 살림문화예술. 자기 문화전통을 볼품없이 여기고 외면하는 것, 봉건적 청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생태적인 것은 지역적 일 수밖에 없으며, 다원성의 기초는 지역 나름나름의 물성이 품고 있는 개성입니다. 문화의 개성은 지역의 개성적 시공간의 역사에 기반 하는 것이고 특히 환경예술은 지역에 기반을 두어야 마땅합니다. 자기가 사는 땅으로부터 소박한 삶, 자발적 가난, 느림의 미학을 삶의 양식으로, 미적 취향으로 즐기는 것이 '환경예술'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여가생활을 주목해서 미적 취향을 근대 관행 예술에서 살림 문화예술로 바꾸어 내는 일도 환경예술가들의 몫입니다.

- 민간문화의 부흥. 마을 축제가 마을경제 살리기에 도구가 되기만 해서도 안 되지만, 마을 농부들의 생태적 농기술로 생존하려는 소박한 꿈, 직거래의 바램에 마을축제정신이 필요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람도 살고 자연도 사는 희망의 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본과 소비지향의 축제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는 근대문명적 관행입니다. 생태적, 생명적 민간살림축제를 통하여 마을의 경제, 사회, 문화를 자연친화적으로 서서히 바꾸어 나가는 운동- 민간문화부흥운동을 제안합니다. 환경운동, 환경예술은 민간문화부흥의 한몫이 되기를 시대는 요청합니다. 개발과 발전 논리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 희망일 수 있는 민간살림문화의 부흥으로 대안 있는 문화운동을 펼칠 때입니다.

<숲과 마을 미술축전>은 그러한 비젼의 출발이었습니다. 이러한 출발은 소박한 삶의 문화로부터 자기를 재발견 하도록 하는 것이고 농적인 기술, 수공예적 중간기술로 대량생산기술을 저어시키는 대안 마련입니다. 살림예술은 수공예로 물성 사이에서 영혼의 소통을 강조하는 미적 기술입니다. 생명의 기름과 돌봄의 미학이 깃든 예술과 농촌은 도시 사람들에게 삶의 할력이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도농 상생의 대안문화 만들기 밑으로부터의 문화부흥은 희망과 생존의 양식을 창조하는 살림문화, 민간문화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작년 말에 카톨릭 농민회가 주최하는 추수감사제에 초대되어 <김봉준미술체험전>을 서울 송파구청 마당에서 펼친 적이 있습니다. 각 지역의 농산물과 거기에 어울리는 우리그림과 판화를 선보이고 어린이들이 체험 하도록 배려한 기획의도가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도시인이 마음으로 농적 문화를 즐기게 하려면 서로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농적 문화의 질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기름과 돌봄의 살림문화체험, 살림미술 살림예술의 감상과 체험, 한글시서화 체험, 몸과 마음의 치유문화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환경문화예술적 주제와 형식이 질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이야기 나눔-아름다운 예감, 대안의 살림예술문화, 생명과 평화의 문화, 영혼문화 등에 관한 시민적 담론이 필요합니다. 교육, 예술, 인문, 과학, 놀이, 체육, 건강, 종교, 농민, 도시민, 시장 모두가 서로 협력하며 큰 살림문화운동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창조적 비주류에 머물지만 이 살림문화운동이 퍼져서 마침내 주류 교육문화계, 정치경제계, 시장경제문화까지도 창조적인 살림문화로 부흥하는 때, 그 때가 문예부흥기가 될 것입니다. 준비한 것만큼 맞이할 권리도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살리고 서로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살림문화의 길로 여럿이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운동이 예술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성실한 답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운동을 설득하지 못하면 그 어느 사회운동인들 살림문화예술이 노래하는 희망의 소리에 귀 기우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애써서 적어 보았습니다. 지금은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개발 저지론만으로는 경제개발논리를 저지하기 늘 버겁습니다. 이제는 근대문명의 위기를 실감하고 반생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살림문명이 희망임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경제지상주의30년의 결과가 고작 이렇게 사는 것인가요? 인정은 메마르고, 사람은 극도로 이기주의화하고, 생활은 늘 바쁘고, 늘 불안한 직장에 위기감을 갖고 사는 생존양식을 받아들어야 하는게 선진사회는 아닐것입니다. 문화가 성숙하지 않는 경제부국은 근대의 어설픈 모방만으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오랜미래의 녹색문화- 살림문화를 세워야 할 것 입니다.

물고를 트는 일은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길을 무어라 개념 지우든, 노선의 차이가 있든, 방법이 서로 다르든 그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새로 만들어야하는 녹색문명은 산업문명의 상처를 공감하며 서로 화해하는 길에서 만들어 질 것 같습니다. 환경과 예술, 삶과 영혼을 서로 이해하고 생명화해의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원주에서 짧은 만남, 긴 여운이 남기고 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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