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의 그나라 --머니투데이

2019. 11. 11. 11:50시민, 그리고 마을/도시, 마을, 농촌, 삶의 질 농업




싱가포르처럼 부자<strong>나라</strong> 된, 아프리카의 무인도

싱가포르처럼 부자나라 된, 아프리카의 무인도

[이재은의 그 나라 모리셔스 그리고 다인종 국가 ②] 1968년 독립당시 1인당 GDP 200달러 빈국… 2018년 1인당 GDP 1만1238달러, 아프리카의 부국으로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아프리카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섬 나라, 모리셔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꿈의 신혼여행지, 조세회피처, 아프리카의 부국… 그중 아시아인으로서 가장 와닿는 건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는 설명이다. 모리셔스는 싱가포르와 데칼코마니라고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섬나라로서 오랜 기간 무인도였다가 이민을 통해 대량의 인구가 짧은 시간 내에 이주했으며,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지도자를 필두로 빠른 발전을 지속해 각 지역을 대표하는 부국(富國)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 등이 그러하다. (☞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현재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부국이다. 면적(2040㎢)은 제주도(1848㎢)와 유사하고 인구는 120만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난해 1인당 GDP가1만1238달러를 넘어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잘 사는 국가다. 하지만 모리셔스는 불과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도도새만 가득한 무인도였다. ◇도도새 가득했던 무인도에서, '사탕수수의 섬'으로 싱가포르는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 관심 밖 버려진 섬으로, 극소수의 말레이족(원주민, Bumiptra·부미뿌트라)만 살던 해적들의 은거지였다. 하지만 1819년 이 곳의 위치적 중요성을 파악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현 싱가포르 남부에 항구를 개발하고 동방무역 거점으로 키우면서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었다. 모리셔스도 대부분의 역사에서 무인도로 남아있었다. 모리셔스가 발견된 건 10세기경, 말레이족과 아랍인들에 의해서다. 하지만 이들은 모리셔스에 큰 관심이 없었고, 섬은 무인도로 존속됐다. 모리셔스의 포식자는 사람이 아닌 도도새였다. 별다른 천적이 없었던 도도새는 생존의 핵심 역할을 하는 날개를 포기한 채 육지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16세기 초 개시된 유럽인들의 인도양 항해와 함께 모리셔스 개발과 식민이 진행됐다. 도도새는 1505년 이후 시작된 인간의 본격적인 사냥으로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도도새는 결국 인간이 섬에 첫 발을 들인 뒤 약 100년 만에 멸종됐다. 1662년 마지막으로 목격됐으며, 그때부터 1693년 사이에 멸종됐다. 도도새의 멸종과 함께 모리셔스의 변화도 가속화됐다.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열강은 돌아가면서 모리셔스를 점령했다. 이 과정 모리셔스라는 이름도 생겼다. 1598년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Maurits)가 이 섬을 식민지로 만든 뒤 그의 이름을 따서 모리셔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모리셔스 섬에 이름을 줬지만 악랄하게 자연 환경도 파괴했다. 그들은 1638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을 만들고 1710년까지 섬에 정착하며 자바(현재 인도네시아 영토)에서 사탕수수를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다. 이들은 사탕수수 밭을 일궈 럼주를 만드는 등 열대삼림을 파괴하고 모리셔스를 일궈나갔다. 수출을 위해 흑단 나무를 남벌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인들의 삼림파괴로 현재 모리셔스의 저고도 평지는 사탕수수밭과 함께 사바나(열대 초원)와 같은 자연경관을 보이게 됐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풍토병이 닥쳐오자 도망치듯 섬을 빠져나갔다. ◇1968년 1인당 GDP 200달러→ 2018년 1인당 GDP 1만1238달러 빈 자리를 채운 건 프랑스였다. 1715년 프랑스는 모리셔스에 '프랑스 섬'(일드 프랑스·Ile de France)이란 이름을 붙이고 지금의 수도인 포트루이스를 거점으로 섬 전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기존에 남아있던 숲을 갈아엎고 더 큰 사탕수수 농장을 개간했다. 그리곤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와 인도계 자유민(Malabares)을 데려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공고히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모리셔스산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을 주요 무역품으로 해서 성장했다. 프랑스가 약 100여년 지배하면서 현재까지도 모리셔스 곳곳에는 프랑스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날 모리셔스의 지명은 대부분 불어로 남았고, 불어는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된다. 이후 모리셔스를 점령한 건 영국이다. 영국은 1814년 파리조약으로 모리셔스 지배의 바통을 넘겨받았고, 섬은 이때부터 영어명 '모리셔스'로 불리게 됐다. 영국의 지배 기간 동안 모리셔스의 인구구성도 달라졌다. 1835년, 최후의 식민종주국인 영국은 주민의 7할에 달하는 노예를 해방시켜 백인과의 차별을 금지했다. 동시에 이로써 초래된 노동력의 부족은 45만명에 이르는 인도인의 계약 이민을 통해 해결했다. 이후 모리셔스는 지속적으로 인도, 아시아에서 계약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 노동력을 대체했다. 적지 않은 중국계도 먼 바다를 건너 모리셔스에 상륙했다. 150여년간의 영국 지배 끝에 1968년 3월 모리셔스는 독립국이 됐다. 영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모리셔스는 사탕수수 수출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민사회를 형성하게 됐다. 모리셔스는 현재 약 135만명의 인구 중 약 68%가 인도계이고, 아프리카계의 크레올(혼혈인 포함)은 27%, 중국계 3%, 프랑스계 2% 등으로 다인종 국가다. 처음 모리셔스가 독립을 맞았을 때의 상황은 암담했다. 모리셔스는 새로 이민온 이들만 바글대는,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인종갈등이 예견되는 섬이었다. 1968년 1인당 GDP가 200달러에 불과한, 특별한 산업 없이 설탕 수출로 먹고 사는 빈국(貧國)이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모리셔스는 경작지의 90%에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전체 수출의 96%를 설탕이 책임졌다. 신생 독립국이자 빈국 모리셔스는 후에 모리셔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게 된 시우사구르 람굴람 경(SSR·Sir Seewoosagur Ramgoolam·1961~1982년 초대총리)과 함께 혹독한 생존기의 역사를 쓰게된 것이다. 이는 영국 식민지에서 말레이시아에 편입됐다가, 1965년 8월 신생 독립국으로 출범한 뒤 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曜·1959~1990년 총리, 1990~2004년 선임장관, 2004~2011년 내각고문)를 필두로 아시아의 대표적 부국(富國)이 된 '다인종 국가' 싱가포르와 상당히 유사한 흐름이다. (☞"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참고) 싱가포르 역시 1965년 독립 당시만 해도 1인당 GDP가 500달러 남짓으로 국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대 부국으로 성장했다. 싱가포르의 지난해 1인당 GDP는 6만2000달러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다. ◇완전 개방시장경제체제에 국운(國運) 걸었다 두 나라는 좁디좁은 국토에 자원도 고급 인력도 거의 없었다. 제주도 면적의 국토에 약 120만명이 살고 있는 모리셔스는 세계적 인구 조밀국가로 세계에서 17번째로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인다. 싱가포르 역시 마찬가지다. 싱가포르도 서울의 약 1.2배 크기 국토에 인구는 561만명이 몰려있는 대표적 인구 조밀 국가다. 두 국가는 대외적으로 완전 개방 체제를 만들어 해외 자본 유치에 국운을 걸었다.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국가 시스템을 바꿔왔다. 물론 두 국가가 처음부터 이 같은 체제를 지향했던 건 아니다. 싱가포르는 독립 초기, 한국이나 대만 등 신생 독립국들이 그러했듯 수입을 대체하는 국내 산업 육성에 관심을 가졌다. 이렇다 할 생산 기반이 없으니 먼저 수입품의 국내 생산 기반 마련에 초점을 둔 뒤 기술력을 함양하고 자본을 축적해 다시 수출에 나서는 수출 주도형 공업화 방식이었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을 통제하는 보호무역 정책도 실시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적은 인구로 내수 중심의 경제 성장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하고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통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모리셔스도 초기엔 시장 개방이나 3차 산업으로의 전환 등엔 관심이 적었다. 독립 초기 모리셔스는 값싼 노동력을 토대로 섬유의류 가공무역에 주력하며 1973년부터 1999년 사이 실질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5.9%에 이르는 등 눈부시게 성장했다. 하지만 실질 경제성장률이 2000년대 들어 2%대로 떨어지는 등 곧 노동집약적 산업의 한계를 맞닥뜨렸다. 이에 모리셔스는 3차 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 변화를 꾀하고, 시장 개방을 위해 파격적인 외자유치 정책을 시도했다. 두 국가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지역내 대표 부국이다. 싱가포르는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인프라부문 경쟁력 2위 국가(2016~2017년), 1인당 명목 GDP 세계 9위 국가(2018년 IMF 발표), 보아오 포럼 선정 아시아 경쟁력 1위 국가(2017년) 국가로 꼽힌다. 무역은 국내 총생산의 3배를 훨씬 넘고, 외국인 투자가 총 국내 투자의 70%를 차지한다. 싱가포르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도 6000여개를 넘는다. 모리셔스도 마찬가지다. 1인당 GDP가 200달러에 불과했던 빈국 모리셔스는 이제 1인당 GDP 1만1238달러인 아프리카 대표 부국으로 성장했다. 모리셔스의 GDP는 1977년과 2009년 사이 연평균 5.1%씩 증가했다.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아프리카의 최대 경쟁력 국가로 꼽혔고,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과 월스트리트저널이 꼽는 '경제자유지수'에서도 2015년 아프리카 1위 국가로 뽑혔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첨단 전자분야의 다국적 기업을 비롯해 만여개 달하는 외자기업도 진출해있다. ◇3차 산업 중심의 관광 허브로… 두 나라의 야심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두 나라는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IT) 중심 국가로서 21세기형 지식 기반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나겠다는 야심을 갖고 이를 위해 노력 중이다. 그동안 모리셔스 경제의 핵심은 제조업(임가공), 관광업 및 금융서비스업, 농업(설탕) 등이었다. 하지만 최근 모리셔스 정부는 3차 산업 중심의 경제구조로의 전환을 목표로 두고 교육, 통신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도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IT) 중심 국가를 건립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첨단 기술을 보유한 다국적 기업을 유치해서 싱가포르에서 세계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엔 아시아의 관광 허브로 도약한다는 목표도 포함돼있다. 두 나라의 야심을 뒷받침하는 건 높은 교육열이다. 모리셔스 국민의 높은 교육열은 유명한데, 대부분의 국민이 영어와 프랑스어 두가지 언어를 어릴 때부터 공부해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모리셔스인의 94%는 고등교육을 이수했고 문맹률이 거의 없는데, 이는 고등학교 과정까지가 의무교육으로 모든 교육비가 정부에서 제공이 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혹독한 경쟁체제를 통한 높은 교육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전국 학생 성적을 일간지에 공개하는 등 극단적인 경쟁 체제를 도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게 소수의 엘리트들을 키워내는 데 기여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NUS), 난양공과대학(NTU), 싱가포르 경영대학(SMU) 등은 전세계 손꼽히는 명문대다. 두 나라 모두 관광 허브로의 도약 부문에선 이미 어느 정도 성공했다. 아름다운 해변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모리셔스에서 관광산업은 제3의 외화수입원이다. 모리셔스의 연간 관광객 수는 1994년 40만명, 2004년 72만명 등이었다가 2014년 처음으로 관광객 100만명을 돌파했고, 2016년엔 127만명을 기록했다. 싱가포르 역시 관광산업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싱가포르는 빌딩 숲 사이의 야경, 스카이라인, 빼어난 자연환경 등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05년에는 카지노 산업을 위해 도박을 합법화시키는 등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 2013년 한해만 15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참고문헌 아프리카 사회통합 모형 구축을 위한 마다가스카르와 모리셔스의 다종족사회 비교분석, 국제지역연구, 한양환 KOTRA 모리셔스 국가정보(나이로비 무역관) 리콴유-작지만 강한 싱가포르 건설을 위해, 살림출판사, 김성진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11.11 06:30

  • '꿈의 신혼여행지' 아프리카 모리셔스… 대표음식은 '커리'?
    '꿈의 신혼여행지' 아프리카 모리셔스… 대표음식은 '커리'?

    [이재은의 그 나라 모리셔스 그리고 다인종 국가 ①] 영국 통치시절 노예제도 폐지로 인도에서 계약 이민자 대량유입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모리셔스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신은 모리셔스를 창조했고, 그 다음으로 천국을 만들었다." 모리셔스가 천국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산호초로 가득한 높고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 빛 바다, 울창한 초록빛의 원시림 등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어 한 말이다. 아프리카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모리셔스는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동쪽으로 750㎞ 떨어진 곳에 있다. 해저 화산이 폭발하며 솟은 섬으로, 면적(2040㎢)은 제주도(1848㎢)와 유사하다. 모리셔스는 유럽의 부유층, 고령 은퇴자들이 겨울 휴가를 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에도 신혼여행지로 잘 알려져있다. 인도양의 절경 속에서 다양한 해양 레포츠와 관광을 즐길 수 있어서다. 해변가엔 고급 리조트가 즐비하고, 내륙에는 사자와 같은 아프리카 야생동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사파리, 북서쪽의 수도 포트루이스 시가지 투어, 마운틴 트래킹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그런데 다녀온 사람들 평은 한결 같이 특이하다. 정말 좋았는데, 정말 신기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모두 같다. 분명 아프리카를 갔는데, 의도치 않게 인도를 흠뻑 느끼고 왔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 모리셔스에선 곳곳에서 인도의 향을 물씬 느낄 수 있다. 대표 음식은 인도 커리로, 커리 음식점을 정말 쉽게 찾을 수 있고, 호텔에서 뷔페 식사를 하더라도 커리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신기한 건 더 있다. 분명 공용어는 영어이고, 프랑스어나 아프리카 크레올어 등도 사용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인도인의 특징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의문은 모리셔스의 대표 관광지, 그랑 바생(Grand Bassin)을 가면 절정을 이룬다. 그랑 바생은 해발 약 1800피트(약 550m) 사화산 분화구에 위치한 호수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호수는 인도 고유의 종교인 힌두교 상징물로 가득차있다. 시바신을 숭배하는 신전이나 시바, 하누만, 간가, 가네쉬 등 대형 신상이 가득한 이곳은 힌두교 성지로 여겨진다. 이곳은 갠지스(Ganges, Ganga)의 호수(Talao)라는 뜻을 담아 '강가 탈라오'(Ganga Talao)라고도 불리는데, 1972년 인도의 성스러운 강 갠지스강의 일부 성수를 여기에 옮겨 따랐기 때문에 이 같은 별명이 붙었다. 분명 인도와 모리셔스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 같은데, 대체 어찌된 일일까. 모리셔스에는 현재 약 135만명의 인구가 있다. 이중 인도계가 약 90만명으로 전체 비율의 약 68%를 차지한다. 반면 아프리카계의 크레올(혼혈인 포함)은 27%밖에 안 된다. 이외에 중국계 3%, 프랑스계 2%로 다인종 국가다. 종교도 매우 다양하지만 가장 지배적인 건 힌두교(52%)다. 그 뒤는 기독교 28.3%, 이슬람교 16.6%, 기타 3.1% 등의 순이다. 아프리카의 섬나라 모리셔스에 인도인이 이처럼 많은 데는 영국 식민지배의 역사가 있어서다. 모리셔스는 과거 무인도였다가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식민지를 거쳤다. 식민 지배자들은 벌목이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원주민을 데려와 노예로 부렸다. 하지만 영국 통치시절이던 1835년,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최후의 식민종주국인 영국은 주민의 7할에 달하는 노예를 해방시켜 백인과의 차별을 금지했다. 동시에 이로써 초래된 노동력의 부족은 45만명에 이르는 인도인의 계약 이민을 통해 해결했다. 이후 모리셔스는 지속적으로 인도, 아시아에서 계약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 노동력을 대체했다. 지금의 모리셔스인 상당수가 당시 이주노동자의 후손이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 나라이지만 인도의 특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화폐 단위도 '모리셔스 루피'(MUR)다. 모리셔스로 대거 이민온 인도인들이 루피를 챙겨오면서 인도 루피를 기반으로 한 본 통화가 메인화됐기 때문이다. 1968년에 공식적으로 독립한 뒤부터 모리셔스 루피는 모리셔스의 공식 통화가 됐다. 모리셔스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자 모리셔스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시우사구르 람굴람 경(SSR·Sir Seewoosagur Ramgoolam) 역시 인도계 모리셔스인이었다. 그는 영국 유학 중이던 1932년 영국을 방문한 간디의 연설을 듣고 '비폭력 독립 운동'에 매우 감명 받았다. 이후 1961~1982년 초대총리를 지내면서 1968년 3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처럼 다인종 국가이자, 인도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인 모리셔스에서는 의외로 인종간 갈등 국면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평화롭고, 안정적 발전을 해나가는 나라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에서 두드러지게 잘 살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까지 높아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는 별명도 얻었다. 다음 편에서는 무인도였던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 모리셔스가 어떻게 이렇게 잘 발전하게 됐는지를 짚어본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11.04 06:00

  • "썩은 물 마셔!"… 자선단체의 두 얼굴
    "썩은 물 마셔!"… 자선단체의 두 얼굴

    [이재은의 그 나라, 우간다 그리고 빈곤포르노②] 빈곤포르노 속 백인 구원자 콤플렉스 극심… 과도한 연출 등으로 아동 인권 유린하기도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친구와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 여행을 계획하면서 SNS(사회연결망서비스) 인스타그램에 캄팔라 사진들을 찾아본 적이 있다. 여행을 계획할 정도로 우간다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지만 검색 후 나온 사진을 보고 조금은 놀랐다. 우리가 알던 우간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기 때문이다. 캄팔라는 잘 정돈된 알록달록한 건물 모습을 하고 있었고, 우간다 사람들은 화려한 색감의 메이크업으로 꾸미고 있었으며, 한껏 치장한 뒤 멋진 포즈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아프리카를 향한 편견이 극심하다며 이런 편견을 깨야한다고 주장했던 우리지만, 우리 안에도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부끄러웠다. 그 편견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지독한 편견의 근원엔 '빈곤포르노'(Poverty Pornography·빈곤 포르노그라피)가 있다.(☞"가난하다고 동정하지마"… '아프리카의 진주'가 뿔났다 [이재은의 그 나라, 우간다 그리고 빈곤포르노①] 참고) 빈곤포르노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편견을 형성하고 강화하며 그 국민이 진 잠재력과 능력을 평가절하하게 한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이들에 대한 인권이 유린된다는 점으로, 최근 유럽연합(EU) 등 서구권에서는 '빈곤 포르노'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인권 유린 문제가 심각하다며 2014년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빈곤·기아·질병 상황의 아동을 조명할 때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따라 아동이 빈곤이나 기아의 상징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구체적으로는 △절박한 위기상황보다는 해결책을 강조한다. △질병과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 질병에 대한 현상만 다루기보다는 원인과 치료 방법도 함께 명시한다. △굶주리고 병든 아동의 이미지를 이용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탈피한다. △개발도상국의 아동과 가족이 선진국의 원조에만 의지하는 듯한 잘못된 인상을 심지 않도록 주의한다.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더 극심한 상황을 연출해서는 안 된다. △빈곤과 기아, 질병과 관련해서 아동을 다룰 경우 반드시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등이다. 이는 TV에서 방영되는 국제 자선 캠페인 후원 광고 대부분이 숨을 헐떡이거나,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앙상한 아이들, 파리 떼가 가득한 곳에서 힘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 등을 자극적으로 묘사해 후원을 이끌어내려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빈곤·기아 상황의 아이들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한 건 맞지만, 이 아이들이 처한 상황 중 유독 최악의 상황만을 조명하는 게 문제다. 예컨대 치매 등 중병에 걸린 이들도 기저귀를 차고 있거나 허공을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있는 등의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의 다양한 모습 중 이부분만 강조해 조명하지는 않는다. '빈곤 포르노'를 찍고자 하는 자선단체는 지난 수십년간 시청자들의 감정 역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점점 자극적인 화면을 담을 수밖에 없다. 현실이 그렇지 않으면 상황을 연출하는 일도 벌어졌다. 지난 7월 알레시오 마모 이탈리아 사진작가가 인도의 가난을 고발하기 위해 촬영한 '꿈의 음식'이란 사진이 큰 분노를 일으켰다. 사진 속 두 어린 소년은 푸짐한 음식 앞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서고 있다. 이 장면은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음에도 가난 때문에 먹지 못하는 소년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그가 월드프레스포토(World Press Photo) 재단 SNS에 사진을 게재하자, 곧바로 비난이 쏟아졌다. 촬영 당시 음식들은 모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모는 소년들에게 "먹고 싶은 음식들을 상상해보라"고 주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이전에는 에티오피아 식수난을 촬영하려던 한 방송사와 개발 NGO가 에티오피아의 식수난을 촬영하려다 물이 깨끗하자 어린 소녀에게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려고 꼬집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적도 있다. 이외에도 국내 한 개발협력NGO는 필리핀 모금홍보 방송을 위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자아이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말끔한 옷차림을 한 이 아이가 방송 취지에 맞지 않다며 옷을 갈아입혀 논란이 일었고, 한 국제적 NGO는 '아동 노동 현장'을 고발한다며 수심이 깊은 강물에 베트남 아이들을 수차례 빠뜨렸다가 건져 비판받았다. '빈곤 포르노' 과정에서 '백인 구원자 선민의식'(백인 구원자 콤플렉스·White Savior Complex)이 심하게 작동되는 점도 문제다. 수십년간 선진국 자선 단체들이 주축이 돼 '빈곤 포르노'를 만들어온 이유가 우월한 서양이 열등한 개발도상국을 구원한다는 의식 때문이라는 비판이다. 세계적 팝스타 에드 시런이나 할리우드 배우 톰 하디, 에디 레드메인 등도 피구호자를 수동적이고 불쌍한 존재로만 묘사하는 '빈곤 포르노'에 등장해 백인 구원자 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2017년 에드 시런은 노르웨이 학생·학자 국제지원펀드(SAIH)로부터 좋지 않은 모금 광고상 '러스티 라디에이터'를 받았다. 에드 시런은 영상에서 라이베리아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서술했는데, SAIH 측은 영상의 초점이 라이베리아 아이들이 아닌 에드 시런에게 맞춰 있었으며, 라이베리아의 정치적 상황이나 빈곤의 구조적 원인 분석은 나오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그가 깊은 고민 없이 "아이들에게 임시거처를 제공하고 아이들을 호텔에 머물게 하고 싶다"고 발언한 것도 '백인 구세주' 행세라고 비판했다. SAIH는 '빈곤 포르노'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있으며, 한가지 편견만을 강요하는지, 또 '빈곤 포르노' 속엔 얼마나 지독한 '백인 구원자 콤플렉스'가 담겨있는지를 비판해왔다. 대표적 영상은 '아프리카를 구하자!-어디서부터 잘못된거지'란 제목의 영상이다. 영상에서 한 백인 여자 연예인은 아프리카 마을을 방문해 '소년 가장'이라고 설명하는 마이클을 만나고, 마이클의 얘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마이클은 "두 살 때 돈을 벌러 집을 떠났고, 이 집의 가장은 나다"라고 불쌍하게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에 백인 연예인은 마이클에게 "대니쉬 패스트리 먹어본 적 없지"라고 묻고 빵을 선물로 건넨다. 하지만 카메라가 걷히자 마이클은 얼굴에 냉소를 머금고 "일종의 비즈니스죠"라고 말한다. 이어 백인 연예인에게 "이런 자선 광고 처음 찍어보세요?"라고 묻고 입 안의 빵을 뱉으며 "연예인들은 너무 허접한 것들만 선물로 들고 온다"며 짜증을 낸다. '빈곤 포르노'를 비꼬는 이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서 150만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TV나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자극적인 '빈곤 포르노' 후원 광고가 지난해 7월 제 40차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회의 권고 결정 이후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자선단체에선 '빈곤 포르노'를 활용하고 있다. 아직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다.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대안적 국제협력을 지향하는 민간 비영리단체도 생겼다. '아프리카인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꾸고, 아프리카의 각 나라가 건강하고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아직도 '빈곤 포르노'가 만든 이미지에 갇혀 아프리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면, 인스타그램에서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가나의 수도 '아크라',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 등을 검색해보는 게 어떨까. 나와 내 친구가 그랬듯 깜짝 놀랄 수 있으니 말이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10.28 06:30

  • "가난하다고 동정하지마"… '아프리카의 진주'가 뿔났다
    "가난하다고 동정하지마"… '아프리카의 진주'가 뿔났다

    [이재은의 그 나라, 우간다 그리고 빈곤포르노①] 다양한 매력 가진 우간다… '빈곤 포르노' 때문에 무기력하고 주체성 상실한 이미지로만 그려져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우간다. '우간다' 국가명을 들으면 우리 머릿속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히 고인 아이들, 팔다리와 갈비뼈가 앙상한 아이들, 정수되지 않는 물을 마시는 아이들의 모습? 혹은 경치 좋고 풍요로운 자연 풍경에 사는 예절 바른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이 전자일 것이다. 우간다에 대해선 무지하기 때문에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 않고 말이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해 비행 시간만 최소 16시간이 소요될 정도로(경유 1회, 엔테베 공항 도착 기준) 우리와 매우 먼 곳에 떨어져 위치하는 나라다. 하지만 단순히 거리적으로 먼 것만을 우리 무지함의 이유로 꼽기엔 부족한듯하다. 우리는 역시 거리적으로 먼 유럽이나,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간다는 동아프리카 중동부에 위치하며 적도상에 있는 국가다. 우간다라는 국명은 '간다 민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국민 대부분은 가톨릭이나 성공회 개신교 신자다. 42%의 국민이 가톨릭을, 42%의 국민이 성공회 개신교를, 그리고 12%의 국민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수도는 캄팔라로, 빅토리아 호의 풍부한 수자원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 자원 덕에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린다. 빅토리아 호는 아프리카 제1의 호수이자 담수호로는 세계 제2의 큰 호수로, 주변 땅이 매우 기름져 농작물이 잘 자란다. 특히 빅토리아 호 주변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데, 바로 여기서 로부스타 커피가 탄생했다. 우간다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로부스타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로, 커피 품질 연구소에서 최상급의 로부스타 생산지로 지정한 나라다. 비교적 높은 고도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로부스타보다 더욱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우간다 국토의 대부분은 1000~1200m의 고원지대로 사바나(해발 1000m 이상 고원에 발달한 초원)가 울창하게 자리잡았다. 이 자연 덕분에 모두 7252㎢에 달하는 자연공원이 있고, 사자·코뿔소·표범·코끼리·하마·물소 같은 야생동물들도 많기에 연간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특히 퀸 엘리자베스 국립공원은 동아프리카에서도 널리 알려진 자연보호구역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룽가 국립공원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우간다 사람들은 무척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걸 중시하는 민족이다. 나이든 사람을 'Mzee'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하고, 충고와 조언을 구한다. 항상 잘 다려진 옷을 입고 다니며 깔끔한 복장을 입고 다닌다. 식사 시엔 밥 먹기 전과 후 꼭 손을 씻으며, 식사 중에는 절대 말을 걸지 않고 밥을 차려준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손님이 집에 방문할 때는 무릎을 꿇고 인사해 존경심을 표현한다. 이처럼 다양한 매력을 가진 우간다인데, 왜 우리는 우간다하면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든 모습만 생각할까? 물론 우간다(2018년 한국은행 기준 GDP 274억7694만5526달러, 세계 99위)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717달러(약 81만원)에 불과한 빈국인건 맞지만, 비슷한 경제 수준의 네팔(2018년 한국은행 기준 GDP 288억1249만1891달러, 세계 98위)과 비교해 너무 단일의 가혹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네팔을 떠올릴 땐 단순히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가 어우러진 산악 국가, 순박한 사람들이 있는 국가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를 고심하다보면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빈곤 포르노그라피) 문제를 짚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떠올리는 우간다의 모습은 대부분 TV에서 방영되는 국제 자선 캠페인 후원 광고 등을 보고 생긴 이미지다. 이 광고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만 조명한다. 숨을 헐떡이거나,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앙상한 아이들, 파리 떼가 가득한 곳에서 힘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 등이다. 최대한 자극적으로 묘사해 동정심을 일으키는데, 이는 모금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물론 단기간의 성과만 놓고 보자면 빈곤 포르노가 모금에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자선 캠페인이 급증한 1980년대에 생겨났고, 생방송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의 경우 단번에 수천만∼수억달러를 모금하는 기록을 세웠듯이 말이다. 하지만 빈곤 포르노는 장기적 관점에서 다양한 악영향을 준다. 빈곤 원인 해소 등 근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데다가, 기부 수혜자들을 무력하고 희망 없는 이미지로만 그려 기부자로 하여금 '내가 기부를 해봤자' 등의 생각을 하게 해 지속적인 후원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오히려 저해 요소를 준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편견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것도 문제다. 선진국 자선 단체들이 주축이 돼 만드는 이 같은 이미지는 일견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 누구에게도 누군가나 어떤 국가의 이미지를 오롯이 '동정의 대상'이나 '무기력하기만 한 국민' '앞으로도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국가' 등으로 만들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이 가진 잠재력과 능력을 평가절하하게 하므로 말이다. 이 같은 빈곤 포르노 때문에 우리는 '이프리카 대륙'이라고 하면 곧장 빈곤을 떠올리고, '우간다'라고 하면 가난과 죽음을 떠올린다. 우간다가 가난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실제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건 사실이고, 우간다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다. 절대빈곤선(세계은행이 각국 경제·인구지표 등을 활용해 1990년 '세계개발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를 발표하며 정한 것, 하루 1.9달러(약 2250원)) 이하로 살아가는 극빈층이 2006년에는 국민의 31.1%에 달했다. 2013년엔 상황이 매우 나아졌으나 여전히 19.7%의 국민이 절대빈곤선 이하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단일한 이미지는 폭력적이고 사실과도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아프리카 보다 아시아에서 영양실조로 죽는 아이들이 더 많은 것도 우리 편견의 한 단면이다. 유니세프 친선대사 구로야나기 데쓰코는 책 '토토의 눈물'에서 말했다. "같은 한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는 440만명의 아이들이 죽는데, 아시아에서는 830만명, 인도에서만 350만명이 죽는다. 설사로 인한 탈수증이나 예방이 가능한 감염증 등으로 말이다. 나머지는 라틴아메리카다." 빈곤 포르노 없이도 얼마든지 이들이 원하는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 우간다 여성 500명이 직접 출연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잠재력을 털어놓는 광고 '프라이스 택'(팝스타 제시제이의 노래 '프라이스 택'에 맞처 춤과 노래를 부르는 광고)는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이 주체성을 가진 인간임을 잘 보여줬다며 호평받았다. 이 광고는 노르웨이 학생·학자 국제지원펀드(SAIH)가 정한 창의적인 모금 광고상 '골든 라디에이터'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광고의 끝 부분에서 우간다 여성들은 우리와 그들이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며 말한다. "We want the same things that you want."(우리도 당신들이 원하는 것과 같은 걸 원해요.)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10.21 04:30

  • 쓰레기통 없어서… '더러운 취급' 받는 생리 여성
    쓰레기통 없어서… '더러운 취급' 받는 생리 여성

    [이재은의 그 나라, 네팔 그리고 생리 ③] 세계 10대 빈곤국·산악 국가·힌두교 국가인 '네팔'… 생리빈곤 만연하고 월경권 지켜지지 않아… '생리컵'이 긍정적 변화 이끌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여성은 11세부터 49세까지 약 500회의 생리를 한다. 생리기간은 평균 3~7일이고, 그동안 흘리는 피는 약 40리터다. 이 기간 동안 1만1000~1만7000개 140kg이 넘는 탐폰이나 생리대를 쓴다. 지금 이 순간도, 인구 절반인 여성 중 약 20%는 생리를 하고 있다. 3년 전 전국이 충격에 빠졌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서 그 대용으로 신문지를 구겨 쓰고, 신발 깔창을 사용한 소녀 A양의 사연이 알려지면서다.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초등학교 고학년 A양은 첫 월경이 시작됐을 때 당황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에게 생리대를 사 달라고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 처했다. ◇'깔창 생리대'로 본 '생리빈곤'과 '월경권' 2016년 A양의 사연이 알려지며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생리빈곤'(period poverty)문제와 '월경권'을 인식하게 했다. '생리빈곤'이란 빈곤 여성이 기본적인 생리 용품을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을 가리킨다. 주로 저소득층 학생, 노숙인, 재소자들이 겪으며 국가를 막론하고 공통적 이슈다. 얼마 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도 '여성 5명 중 1명이 생리빈곤 문제를 겪고 있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나와 충격을 줬다. 2011년 미국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여성은 평생 생리대·탐폰·팬티라이너를 비롯 진통제·생리혈이 묻어 새로 사야하는 속옷 등 생리 관련 물품 구매에 약 2000만원을 소비한다. 당시 허핑턴포스트는 6시간 마다 탐폰을 교체하는 것과 36개입 탐폰(가격 7달러·7400원)을 기준으로 두고 계산했다. 하지만 통상 탐폰의 권장 교체시간은 4시간이라 실제 여성이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더 비싸다. 비용을 아끼겠다고 탐폰 교체 시간을 늘리다간 독성쇼크증후군이 올 수 있다. '생리빈곤' 문제를 겪는 이들이 평생 2000만원에 달하는 돈을 생리 용품에 쓸 수 있을리 없다. 이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 식재료와 생리대 중에서 양자택일하거나 종이 타월, 화장지, 비닐 봉지, 마분지 상자, 신발 깔창, 천이나 낡은 옷, 신문지 등으로 생리대를 대신한다. 이에 따라 모든 여성에겐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월경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생리하는 여성의 몸이 학습권, 건강권, 노동권, 기본권과 연결돼있다는 인식에 기반한다. UN도 2013년 월경권을 기본 인권으로 선언했다. 우리나라 각지에서도 생리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월경권을 보장하고자 생리대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기도 여주시의회는 지난 4월 전국 최초로 만 11~18세의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를 무상으로 지급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지난 7월 서울시의회도 관련 조례안을 발의했다. ◇네팔 여성들의 월경권 보호하는 '생리컵' 우리나라 등 세계 여러 선진국의 상황이 이러하니 월경권에 대한 인식이 희미한 개발도상국에서의 상황은 더욱 나쁘다. 세계 10대 빈곤국이자 국민의 87%가 힌두교를 믿는 네팔의 상황도 그러하다. 빈곤국 네팔엔 '생리빈곤'이 만연한데, 종교적 특성 때문에 월경권이 지켜지지 않기에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힌두교는 종교적 의례에 따라 엄격하게 정결함(우월함)과 오염·더러움(열등함)을 구분한다. 이때 월경과 출산 등을 담당하는 여성은 생리혈과 출산혈 때문에 오염이 가능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된다. 초경이 시작되기 전의 여성은 오염되기 전이므로 '찬양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겨지고, 초경을 시작한 뒤는 '이미 오염된 존재'로 일종의 혐오의 대상이 된다. (☞월경이 모든 걸 바꿨다… '여신'에서 '사회부적응자'로 [이재은의 그 나라, 네팔 그리고 생리 ②] 참고) 자연히 네팔에서 생리는 '사회악'처럼 여겨져 숨겨야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진다. 여성은 생리기간 '차우파디'(chhaupadi) 관습에 따라 가족과 격리돼 헛간 등에 머물고 정상적으로 생활하거나 등교하는 것,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 등이 금지되며 주택이나, 사원 등에도 들어갈 수 없다. (☞"더러워"… 생리 기간, 죽어나가는 여성들 [이재은의 그 나라, 네팔 그리고 생리 ①] 참고) 부엌에 들어가 음식 등을 만지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먹을 음식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인식 때문에 금지된다. 부엌에서 요리된 음식도 먹을 수 없다. 홀리 바질(향신료 풀·녹색 작물의 일종) 등 녹색 작물을 만지면 녹아버린다는 인식이 있어 이 기간엔 여성이 이것을 만지거나 섭취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생리 중인 차우파디 여성은 밥, 소금, 렌틸콩, 시리얼, 소금만 뿌려진 납작한 빵 등만 먹을 수 있다. '물'은 신성하다고 여겨지기에 수도꼭지나 우물 등 물 공급원과도 접촉할 수 없고 정해진 우물에서만 제한적으로 씻을 수 있다. 생리 중에 격리된 여성들이 벌레 등이 가득한 맨 바닥에서 자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청결을 관리하기가 어려워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자주 씻지 못하고 생리대로 쓰는 헝겊 등을 자주 빨 수 없으며, 햇볕에 생리대를 말릴 수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네팔에서는 '일회용 생리대'를 쓰기도 쉽지 않다. 생리를 숨겨야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에다가 산악국가라는 특징이 더해져서다. 네팔은 세계 10대 최고봉 가운데 8개를 보유한 국가로 지형이 험악하기로 유명한 산악국가다. 흔히 도시에서 보듯 쓰레기를 정기적으로 수거해가는 쓰레기차 등을 보기도 힘들다. 이 때문에 네팔 여성들은 혹 자신이 쓰고 버린 일회용 생리대를 누가 발견하고 더럽다고 여길까봐 쓰지 못한다. 월경권 운동가이자 '비아시'(Be Artsy) CEO인 클라라 가르시아는 호주 ABC에 "네팔에서는 쓰레기 수거가 잘 이뤄지지 않기에 여성들은 대신 더러운 천이나 걸레 등을 대안으로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각종 생식기 감염 위험이 높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최근 네팔에서 활동 중인 인권 단체들은 월경권 보호와 차우파디 관습 개선 등을 위해 생리컵을 배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2017년 시민단체 '비아치'는 라토 발틴 파일럿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1년 간 네팔 소녀 250명에게 영국제 생리컵을 배부했다. 생리컵은 질에 컵을 삽입해 생리혈을 받아내는 생리용품으로, 최대 12시간까지 사용하며 물로 세척해 재사용이 가능한 제품이다. 생리대와는 달리 생리 혈이 밖으로 새지 않아 냄새가 나지 않고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비아시'의 생리컵 배부 후 엄청난 변화가 나타났다. "차우파디 전통 실시에 변화가 없다"고 답한 9명을 제외한 241명에게서 긍정적 변화가 나타났다고 답이 나온 것이다. 소녀들은 "내게서 냄새가 나지 않고, 일회용 생리대를 버리거나 천 생리대를 빨지 않아도 돼서 사생활이 지켜진다" "차우파디를 겪지 않게 돼 생리 기간에도 채소, 과일, 우유 등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냄새가 나지 않아 차우파디 때도 집 안에서 잘 수 있게 됐다" "몸 밖으로 피가 나오지 않아 스스로 깨끗하게 느껴지고 가족 앞에서도 자신감이 있다" "컵을 사용하니 학교도 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10.14 04:29

  • 월경이 모든 걸 바꿨다… '여신'에서 '사회부적응자'로
    월경이 모든 걸 바꿨다… '여신'에서 '사회부적응자'로

    [이재은의 그 나라, 네팔 그리고 생리 ②] 네팔,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 3~4살에 선발돼 초경 시작하며 여신 지위 박탈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지난해 10월, 4살부터 12살 때까지 '쿠마리'로 살았던 라슈밀라 샤(38)가 일본 아사히 신문에 "매일이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쿠마리'란 모든 네팔 국민이 숭배하는 존재로, '살아있는 여신'으로 여겨진다. 어느 정도냐 하면, 대통령은 발에 입을 맞추며 경의를 표하고, 국민은 쿠마리 사원 앞에서 하루 종일 쿠마리를 기다리며 그와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칠 수 있도록 소원을 빈다. 모두가 그를 선망하며 절대적으로 그를 아껴주는데 라슈밀라는 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일까? 쿠마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처녀'를 의미하는데, 네팔의 '처녀신' 숭배 문화의 대상이다. 행운을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힌두교도(네팔 인구의 87%)에게 추앙받으며, 불교도 네팔인(네팔 인구의 8%)에게도 왕국의 수호여신으로 다시 태어난 것으로 간주돼 숭배받는다. 쿠마리는 힌두교 신화 속의 여신 탈레주 바와니와 관련된다. 전설에 따르면 여신 탈레주는 네팔 말라 왕조애 아름다운 여인으로 현현했다. 하지만 탈레주와 가깝게 지내던 말라 왕조의 마지막 왕은 탈레주를 겁탈하려고 시도했고, 탈레주는 분노해 왕을 저주하며 사라졌다. 이에 왕은 여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사원을 짓고 뉘우쳤다. 탈레주는 왕의 사죄를 받아들이면서 어린 소녀를 선택해 자신의 분신으로 섬길 것을 명령했다. 이 분신이 바로 쿠마리다. 네팔 전국엔 카트만두 쿠마리 사원에 거주하는 '로열 쿠마리'를 비롯해 도시별로 9명의 '로컬 쿠마리'가 있어 총 10명의 쿠마리스가 존재한다. 힌두교·불교 신자들은 자신의 어린 딸이 쿠마리로 뽑히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 이는 쿠마리 가족에게 엄청난 축복이 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쿠마리 가족들은 평생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기도 하고 말이다. 따라서 쿠마리가 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움에도 많은 지원자가 몰린다. 쿠마리는 석가모니와 같은 샤캬족 출신으로, 초경 이전의 3~6세 소녀 중에서 선발된다. 쿠마리가 되려면 32개 신체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32개의 신체 기준은 다음과 같다. 단순히 예쁜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고 쿠마리만의 독특한 선발기준이 있다. △소라 껍질 같은 목 △사슴같은 허벅지 △송아지처럼 긴 속눈썹 △오리처럼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 △사자 같은 가슴 △부드럽고 낭창낭창한 손과 발 등이다. 이 기준을 충족하면 이제 전대 쿠마리의 물건을 찾게 하는 시험을 치른다. 사실상 랜덤게임에 해당하는 이 시험을 치르는 이유는 영적 능력이 있다면 탈레주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통과하면 공물로 바쳐진 소·돼지·양 등의 잘린 머리가 놓인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울거나 소리를 내면 탈락한다. 탈레주는 신적 존재이므로 감정표출을 하지 않는다고 봐서다. 이렇게 뽑힌 쿠마리는 '숭배' 받으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로열 쿠마리' 기준 쿠마리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더르바르 광장에 위치한 쿠마리 사원에서 거주하게 된다. 항상 붉은색과 금색 옷을 입고, 머리에 뾰족한 장식을 쓰고 신적 지각력의 상징인 눈을 구현하기 위해 눈화장을 한다. 쿠마리의 발이 땅에 닿으면 탈레주가 떠난다고 보기 때문에 쿠마리는 스스로 걸을 수 없고 가마를 타고 다닌다. 쿠마리는 가족들과의 접촉도 차단되며 사원 관계자들만 접촉할 수 있다. 인드라자트라 축제 등 일년에 12~13차례 정도 공식 일정을 제외하고서는 사원 외부 출입도 금지된다. 사원 내부에서만 이동하기 때문에 쿠마리 사원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쿠마리가 3층 격자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오래 기다린다. 쿠마리가 몇초씩 지나갈 때마다 사원 안뜰에서 쿠마리를 기다리던 신도들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터진다. 신도들은 쿠마리를 기다리며 인형, 과자 등을 준비해와 공물로 바친다. 질병에 걸린 이들처럼 일부 간절한 소원을 가진 이들은 쿠마리를 접견할 기회를 갖기도 한다. 이들은 쿠마리에게 어떠한 질병이 있다고 설명하며 쿠마리가 영적인 도움을 주길 빈다. 이 경우 쿠마리는 자신을 숭배할 수 있도록 발을 이들에게 내미는데, 이들은 쿠마리 발에 키스하며 소원을 빈다. 쿠마리를 접견해 쿠마리의 감정표현을 보면 미래를 점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쿠마리가 웃거나 우는 등 감정표현을 보이면 '심각한 질병 또는 사망'이, 쿠마리가 눈을 문지르거나 눈물을 떨어뜨리면 '죽음 임박'이, 쿠마리가 손을 떨면 '구금'이, 쿠마리가 내민 음식에 반응하면 '재정적 손실' 등이 찾아온다고 여겨진다. 이 같은 쿠마리 전통은 전세계에서 '아동 학대'라며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사원에 격리돼 살아야 하고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2017년 9월엔 세살배기 여아 트리스나 샤카가 쿠마리로 뽑혔는데, 트리스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어린 나이부터 가족과 떨어져 엄격한 쿠마리 규율을 따라야 했다. 더 최악은 쿠마리 은퇴 이후의 삶이다. 쿠마리는 12세 전후로 초경을 시작하면 자격을 박탈당한다. 초경을 시작하면 신성(神性)이 다른 소녀에게 옮겨간다고 여겨 점성술사와 승려가 차기 쿠마리를 선발한다. 이는 힌두교에서 생리를 더러움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데서 기인한다. (☞"더러워"… 생리 기간, 죽어나가는 여성들 [이재은의 그 나라, 네팔 그리고 생리 ①]참고) 힌두교는 종교적 의례에 따라 엄격하게 정결함(우월함)과 오염·더러움(열등함)을 구분한다. 이때 월경과 출산 등을 담당하는 여성은 생리혈과 출산혈 때문에 오염이 가능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된다. 이에 따라 초경이 시작되기 전의 여성은 오염되기 전이므로 '찬양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겨지고, 초경을 시작한 뒤는 '이미 오염된 존재'로 일종의 혐오의 대상이 된다. 고대 인도의 법률가들도 여성을 이렇게 바라봤다. 생리 이후의 여성은 사악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고, 오염 가능성이 있는 열등한 존재이며, 부모의 감시를 피해 임신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찬양하거나, 혹은 혐오하거나… 인도와 여성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 그리고 성차별 ②]참고) 이처럼 초경 후의 쿠마리는 이제 더 이상 쿠마리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져 사원에서 내쫓긴다. 이전까지 모든 사회적 관계가 사원 안에 국한됐던 쿠마리는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제대로된 공립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쿠마리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은 다반사다. 라슈밀라도 유사하게 말했다. 그는 "쿠마리 시절 의례에 쫓겨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며 "봉제인형이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쿠마리에서 물러난 후 학교에 들어가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책상에 앉았지만 영어 등 (다른 아이들이 공부하는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해 창피했다"고 말했다. 약 세살 때부터 열두살 때까지 쿠마리 시절 내내 발을 땅에 닿지 못했던 쿠마리는, 이제 걸을 수 있게 됐지만 걷는 법을 모른다. 다리 근육이 퇴화돼 재활을 받아야 할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쿠마리들은 스스로 걷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보행 장애를 겪는다.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일도 잦다. 쫒겨난 쿠마리와 함께 하면 남자의 정기가 빨려나간다는 속설 때문이다. 원래 가족에게 버려진 쿠마리는 새 인연을 맺기도 쉽지 않다. '쿠마리 출신과 결혼한 남자는 1년 안에 죽는다'는 미신 때문이다. 최근 네팔에서는 쿠마리 관련 아동학대와 인권유린 논란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네팔 정부는 쿠마리 연금을 늘리는 등 은퇴한 쿠마리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세계 각국 인권단체의 비판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앞으로 네팔에서 쿠마리 전통이 지속될 수 있을까.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10.07 04:30

  • 삼성전자 회계감사 수임戰, 해외서 2라운드
    삼성전자 회계감사 수임戰, 해외서 2라운드

    회계법인 '주기적 지정제' 본격 시행…'감사효율'이냐 '자유경쟁'이냐…결국 삼성전자 결정에 달려 금융당국이 오는 14일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에 따라 220개사에 대한 외부감사인을 사전지정할 가운데 회계업계는 해외법인 수임전(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신(新)외감법(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내년부터 본격 시행될 주기적 지정제는 국내법으로, 국내 법인들만 구속하며 벌어진 논란 때문이다. 본사 감사인과 해외 주요자회사 감사인을 일치시키는 게 이미 회계업계에 정착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측과 해외에서는 그 나라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수임경쟁을 벌일 수 있고 결정은 ‘기업의 몫’이라는 측이 맞부딪치고 있다. ‘주기적 지정제’는 금융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가 6년 연속 감사인을 자유선임한 상장사 및 소유·경영 미분리 대형비상장사에 대해 다음 3년동안 감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3일 회계업계에 따르면 모회사에 감사의견을 내기 위해서는 해당 감사인이 전체 연결재무제표에서 50~60%에 해당하는 회사를 감사해야 된다는 멤버펌 규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 법인별로 매출규모, 사업장수 등 감사인을 일치시킬 때의 기준은 상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권고사항일 뿐 강행규정은 아니다. 삼성전자와 같이 글로벌기업으로 손꼽히는 회사의 경우 해당 규정이 글로벌 회계시장에 주는 영향은 적지 않다. 자칫 40년 넘게 삼성전자를 감사해 온 삼일PwC의 경우 본사감사를 잃는 데 이어 글로벌PwC의 해외감사몫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명 빅4(삼일·삼정·한영·안진) 회계법인들은 이번 주기적 지정제로 대형 글로벌회사들을 새로 수임하게 되면서 이 같은 상황변화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정KPMG는 해당 규정을 적절히 활용한 사례다. 올해 초 현대자동차는 30년 넘게 외부감사를 맡아왔던 딜로이트안진 대신 삼정을 선택했다. 삼정의 주요 공격포인트는 이미 현대차 해외법인의 절반이상을 글로벌 KPMG가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사 감사인을 삼정으로 바꿀 경우 감사인 통일이 이뤄져 감사품질이 제고될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해외법인과의 감사인 일치가 강행규정이 아니고 이론과 실무는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이재은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본사와 해외법인을 일치시키는 규정을) 옛날에 그렇게 했던 건 맞지만 규정화됐다기보다 감사기준의 운영원리상 그렇다는 뜻”이라며 “한동안 회계환경에 따라 그 규정을 요구하지 않다가 요구하기도 하는 등 왔다갔다 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종속회사의 감사를 다른 (회계법인에서)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결국 책임은 (모회사 감사인이) 지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모기업의 감사인과 해외법인의 감사인은 일치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이론적으로 그렇고 실무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이번 주기적 지정제 구조상 해외법인 일치는 힘들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고작 ‘3년짜리’ 회계법인이라는 이유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지정감사는 3년이지만 (다음 6년은) 자유수임제로 바뀐다. 3년 때문에 자회사들까지 다 감사인을 바꾸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며 “회사입장에서도 감사인이 바뀌면 새로 온 회계법인이 초도감사를 할 때 인력과 시간이 더 투입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 그런 스트레스를 한 번에 받을지 지정된 회사만 받을지는 결국 본사의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돌고돌아 결국 키는 삼성전자가 쥘 것으로 보인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새 감사인은 본사에서 해외법인 감사인 변경에 지원사격을 해달라고 요청하게 될 것”이라며 “그럼 본사에서도 해외법인에 ‘가능하면 감사인 통일해달라’, ‘새 감사인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등 말을 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해외법인 감사는 기업이 정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아직 주기적 지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우리가 어떻게 하겠다고 결정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지정결과가 나온 후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검토후 방향을 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조준영 기자   2019.10.04 04:45

  • "더러워"… 생리 기간, 죽어나가는 여성들
    "더러워"… 생리 기간, 죽어나가는 여성들

    [이재은의 그 나라, 네팔 그리고 생리 ①] 힌두교, 생리를 재앙과 불운의 상징으로 봐… 생리기간 여성들 헛간 등에 격리 네팔에선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이유로 여성들이 죽어나간다. 2010년 1월, 11세 소녀는 헛간에 격리돼 있다가 탈수와 설사로 사망했다. 소녀의 가족과 이웃 모두 '소녀를 만지면 불순해진다'고 믿어 병원으로 데려가기를 거부해 상태가 악화됐다. 2010년 12월, 한 여성이 헛간에 머무르다가 독사, 전갈 등에 물려 사망했다. 2016년 12월, 21세 여성이 헛간에 격리돼 있다가 화재로 인한 연기 흡입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몇 주 뒤 15세 소녀 역시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2017년 5월, 14세 소녀가 헛간에 격리돼 있다가 감기가 심해지며 사망했다. 2017년 7월, 19세 소녀가 뱀에게 머리와 다리를 물려 사망했다. 2019년 1월, 35세 여성과 그의 두 아들(각각 9세, 12세)은 헛간에 격리돼 있다가 화재로 인한 연기 흡입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2019년 2월, 21세 여성 역시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여성을 생리 기간 가족과 격리하는 '차우파디'(chhaupadi) 관습 때문이다. 차우파디란 나이에 상관없이 생리 중인 여성이나 갓 아기를 낳은 산모를 부정한 존재로 보고 가족으로부터 격리해 헛간 등에 머물게 하는 관습을 말한다. 미국 국무부 인권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기준 15∼49세 네팔 여성의 19%가 차우파디를 겪었고, 중부와 서부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이 비율이 5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우파디 관습으로 인해 생리기간 여성들은 가족들과 정상적으로 생활하거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며 주택이나, 사원 등에도 들어갈 수 없다. 당연히 이 기간 학교를 가는 것도 금지된다. 이 기간 타인에게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타인(특히 남성)과 접촉하는 것도 금지된다. 이는 월경혈이나 출산혈이 재앙과 불운을 몰고 온다는 힌두교의 믿음에 기인한다. 부엌에 들어가 음식 등을 만지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먹을 음식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인식 때문에 금지된다. 부엌에서 요리된 음식도 먹을 수 없다. 홀리 바질(향신료 풀·녹색 작물의 일종) 등 녹색 작물을 만지면 녹아버린다는 인식이 있어 이 기간엔 여성이 이것을 만지거나 섭취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또 힌두교에서 '신성하거나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인 소, 물 등과의 접촉도 엄격히 금지돼있다. 소를 만지는 것뿐만 아니라, 소에서 난 우유나 버터 등을 먹는 것 등도 금지돼 있어, 생리 중인 차우파디 여성은 밥, 소금, 렌틸콩, 시리얼, 소금만 뿌려진 납작한 빵 등만 먹을 수 있다. 또 수도꼭지나 우물 등 물 공급원과도 접촉할 수 없다. 헛간에 격리된 여성들은 헛간에 들어오는 침입자나 동물로부터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겨울 추위나 여름 더위 등을 겪어야 한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헛간에서 불을 피웠다가 연기를 들이마셔 사망하는 일이 잦은 이유다. 대다수 헛간은 평소 소 등 가축이 사는 곳이어서 배설물에 감염되는 일도 잦다. 라나바트 등의 바디야, 카일라리 지역 12~49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차우파디 관습으로 인해 많은 네팔 여성들은 배뇨 장애나 생식기 가려움증 등을 겪고 있다. 생리 중에 격리된 여성들이 벌레 등이 가득한 맨 바닥에서 자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청결을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생리 기간 불결하다고 여겨져 자주 씻을 수 없고, 생리대로 쓰는 헝겊 등을 자주 빨 수 없으며, 햇볕에 생리대를 말릴 수도 없다. 네팔 여성의 89% 즉 대부분이 집에서 아이를 낳는데, 모성혈을 더럽다고 보아 차우파디 하는 관습 때문에 네팔에선 모성사망률도 높다. 네팔 모성사망률은 10만명 당 229명으로, 네팔은 유엔밀레니엄개발목표에 따라 모성사망률을 4분의 3으로 줄이려고 노력했던 국가였다. 생리 여성에 대한 신체적 폭력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자와할랄 네루대학교의 2015년 '네팔 극서부지역 여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폭력' 연구에 따르면 조사 여성 중 68.18%가 차우파디 격리 중 과도한 출혈을, 52.27%는 생식기 감염을, 34%는 폐렴과 신체 통증을, 17%는 자궁탈출을, 11.36%가 빈혈을 겪었다고 답했다. 차우파디 기간만을 노리는 강간범도 적지 않다. 네팔 여성 사팔타 로카야는 가디언에 "밤만 되면 남성들이 헛간에 찾아와 괴롭힌다"며 "부모님이 밤에 남성들을 겨우 쫓아내야 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문제점들 때문에 네팔 대법원은 2005년 차우파디를 인권침해라고 명명하며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차우파디가 공공연하게 행해지자 2017년 8월 네팔 의회는 만장일치로 차우파디를 강요한 이를 처벌하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2018년 8월 발효됐다. 이제 차우파디를 강요한 사람은 3개월 징역형과 함께 3000네팔루피(약 3만20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생리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면서 여전히 차우파디가 행해지는 실정이다. 힌두교 지도자들이 이 같은 믿음을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있어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힌두교 영적지도자 다미 자카리는 가디언에 "여성들도 차우파디 격리 기간을 좋아한다"면서 "결혼하고 싶은 남성들이 알아서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생리 중 여성을 만져서는 안된다"며 "정말로 몸이 아파진다"고 설명했다. 여성들은 교육을 통해 이 같은 인식을 체화한다. 라나바트 등의 연구에 따르면 바디야, 카일라리 지역 12~49세 여성 중 57.7%가 "차우파디를 하지 않으면 가족이나 지역 사회에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 56.7%는 "생리하는 여성이 녹색 채소를 만지면 작물이 죽을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더 큰 문제는 결국 여성들이 생리현상과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는 데 있다. 전문가들이 차우파디가 지속되는 이상 네팔에서 성평등은 요원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사팔타 로카야는 "생리 기간 가축 헛간에 격리돼 소똥 위에서 잠을 자고, 동물들이 내 몸 위를 밟고 지나갈 때면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며 "첫 생리가 시작되고 차우파디에 격리된 뒤 난 생리를 절대 하지 않기만을 빌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회적 인식을 격파하기 위해 같은 힌두 문화권인 인도에서 2015년 P&G 위스퍼는 '피클을 만지자'(Touch the pickle) 캠페인을 벌였다. '생리 중인 여성이 피클병을 만지면 피클이 상한다'는 인도의 미신을 깨뜨리기 위해 시작된 캠페인이다. 10대 여성들을 주축으로 약 300만명이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피클병을 만지며 생리에 대한 인식 개선에 나섰다. 이 캠페인은 생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깨뜨리는 데 긍정적 영향을 줬다는 평을 받으며 2015년 칸 국제광고제에서 양성평등과 관련한 '글래스 라이온' 부문을 수상했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9.30 05:30

  • 아시아가 열받았다, 유럽의 '환경보호 훈계'에…
    아시아가 열받았다, 유럽의 '환경보호 훈계'에…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열파 ②] 유럽, 이상고온현상 잠식하면서 '플라이트 셰임' 등 "항공기 타지말자"는 운동 활발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이번 여름 유럽 대륙을 이상 고온 현상이 잠식했다. 프랑스는 남부 프로방스 갈라르그 르 몽튀외에서 낮 최고 45.9도를 기록하는 등 올해 최고 기온 기록을 수립했다. 프랑스 뿐만 아니다. 이번 여름 최고 기온이 새로 수립된 유럽 나라는 최소 12개국으로, 앞으로도 매년 최고 기록이 경신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폭염이 뉴노멀로 자리잡으면서 유럽에서는 물만 있으면 뛰어드는 이들이 늘며 익사자가 속출하고, 에어컨 없는 가정이 경쟁적으로 에어컨 구매에 나서는 등 여름 풍경이 변화하고 있다. (☞'물만 있으면 뛰어든다' 날씨가 모든걸 바꿨다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폭염 ①] 참고) 기록적인 찜통더위를 몸소 겪으며 유럽인들은 자신이 살아갈 터전이 더 이상 변화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도 공유하게 됐다. 유럽인들 사이 전반적인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프랑스·스웨덴·독일·벨기에·포르투갈·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선 '기후변화를 막자'는 행동 촉구 시위, FFF(Friday for Future) 운동 등 환경 관련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이 꾸준히 증가했다. 정치적 지형도도 변화했다. 지난 5월 유럽의회 선거에 따르면 녹색당 그룹은 기존 의석수 52석에서 17석을 늘리며 69석을 차지했다. 이런 유럽인들 사이 요즘 가장 핫한 주제는 '플라이트 셰임'(flight shame·스웨덴어 flygskam(플뤼그스캄·비행수치)다. 유럽 대륙에서 화제인 비행기 탑승 반대 운동 '플라이트 셰임'은 우리말로 '부끄러운 비행'이란 뜻으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때에 비행기를 타는 데서 느끼는 죄책감 혹은 수치스러움을 이르는 말이다. 이 운동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기후변화에 민감한 스웨덴에서 2017년 시작됐다. 스웨덴 가수 스태판 린드버그가 환경을 위해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한 뒤 바이애슬론 선수 비욘 페리(Björn Ferry)나 오페라 가수 말레나 에른만(Malena Ernman) 등이 동참하면서 빠르게 확산됐다. 이후 '기후변화를 막자'는 행동 촉구 시위, FFF(Friday for Future) 운동을 촉발한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까지 '플라이트 셰임'에 뛰어들며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는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인물로, 평소 '플라이트 셰임'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유엔 청년 기후변화 정상회의와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탄소배출이 없는 태양광 요트를 타고 스웨덴을 떠나, 15일간 대서양을 건너 지난 8월28일 뉴욕에 도착했다. 여러 운송수단 중에서도 특히 비행기가 타겟이 된 건 비행기가 시간당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운송수단이어서다. 유럽환경청(EEA)에 따르면 승객 한 명이 1㎞를 이동하는 동안 비행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은 285g으로 버스(68g)의 4배, 기차(14g)의 20배에 달한다. 항공산업 전체는 매년 약 10억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데, 이는 항공 산업이 한 국가라면 브라질, 캐나다, 한국, 영국 등과 같은 배출량을 뿜어내는 셈이다. '플라이트 셰임' 운동가들은 "플뤼그스캄(flygscam·비행기 타는 걸 부끄러워하라)"거나 "탁쉬크리트(tagskryt·기차로 여행하는 자부심)" "해시태그 #jagstannarpåmarken(나는 지상에 있다)" 등을 외치고 '행동 강령'을 공유하며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플라이트 셰임'의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보다는 가급적 기차 타기 △국제회의는 가급적 화상통화(skype)로 대체 △비행기를 꼭 타야한다면 승객 한 명당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양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에 가급적 승객을 많이 싣는 편을 타기 △1등석이나 비즈니스석 보다는 이코노미석 타기 △비행기 연료를 줄이기 위해 수화물 무게를 줄이기 △항공편을 이용한 해외 직구를 가급적 하지 않기 △단거리 항공편은 장거리보다 연비가 좋지 않으므로 최대한 타지 않기 등이다. 플라이트셰임 운동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각 국가들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캠페인이 이뤄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FlightFree2020 캠페인'이 시작됐고, 프랑스에서는 'Restons les pieds sur terre'(지상에 있자)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벨기에, 캐나다 등에서도 유사한 프로젝트가 이뤄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선 항공사도 나섰다. 네덜란드 항공사 KLM은 '책임있는 여행' 캠페인에 뛰어들었다. 단거리 여행의 경우 기차 등 다른 여행 옵션 등을 알려주고, 수화물을 가볍게 들고올 것을 권고한다. 이 같은 운동에 동참하는 게 '옳다'는 인식이 유럽 전역에서 공유되면서, 여러 실제적 변화들도 나타났다. 먼저 스웨덴에선 항공 여행이 크게 줄었다. 스웨덴 공항을 운영하는 국영 스웨다비아는 "지난해 국내 승객 수가 3% 감소했으며,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가 그 배경이었다"라고 발표했다. 세계자연기금(WWF)도 "기후 변화 우려로 지난해 스웨덴 국민의 23%가 항공 여행을 줄였다"고 분석했다. 항공기 운항에 따른 환경부담금도 다수 국가에서 신설됐다. 프랑스 교통부는 자국 공항을 이용해 떠나는 항공편들을 상대로 환경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유럽연합 내 항공편은 이코노미석 2000원, 비즈니스석 1만2000원 정도이고, 유럽연합 밖을 연결하는 항공편은 최대 2만4000원이다. 네덜란드도 2021년부터 자국 공항을 이용하는 항공 여객 1인당 7유로(약 9200원)의 환경세를 부과할 방침이다. 벨기에 역시 지난 3월 열린 환경장관회의에서 EU회원국 내 모든 항공에 환경세를 부과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모두가 '플라이트 셰임'에 공감하는 건 아니다.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벨기에 브뤼셀 소재 비정부기구 '교통과환경' 소속 앤드루 머피는 "프랑스가 부과하는 환경세는 탑승객들의 커피 한 잔 가격보다 적다"며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스 카플란 항공 관련 전문가도 "정말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고 싶다면 아예 여행하지 않아야한다"고 밝혔다. 이는 "유럽인 몇 명이 '행동하는 양심'에 따라 항공기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아시아인들이 지속적으로 항공기를 이용한다면 아무 효과가 없다"는 회의적 시각과도 결이 같다. 최근 유럽에서는 '플라이트 셰임' 관련 논의를 하며 아시아의 항공산업, 관광, 교통 인프라 등에 대한 언급이 잦아졌다. 즉 동남아시아인들은 항공기를 자주 이용하고, 인도나 중국 등지에서도 경제성장에 따라 중산층의 항공기 이용이 빠르게 늘고 있으며, 동아시아는 이미 엄청난 관광계의 큰 손이라며 유럽에서 아무리 '플라이트 셰임' 논의를 해봤자 아시아의 동참 없이는 파급력이 적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항공업계의 추정에 따르면 중국, 인도 및 동남아시아에서 중산층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2037년까지 전 세계 항공 승객 수는 두 배로 뛸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증가추세는 가파르다. 2008년 동남아시아 항공사들은 2억명의 승객을 날랐는데, 지난해엔 5만5000만명의 승객을 수송했다.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늘어나는 승객 수에 발맞춰 공항을 증설하거나 신설하고 있는데, 한국과 싱가포르는 공항을 확장하고 있고, 인도는 2035년까지 100개의 새 공항을 건설할 예정이며 중국은 공항 200개 건설을 계획중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 문제를 되새겨보자는 여론(☞"오지마!".. 관광객에 질린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관광객 ②] 참고)이 있기는 하지만, 아시아에선 이와 관련해 아시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고가는 건 옳지 않다는 비판도 나온다. 동남아권 여행 관련 매체 ttrweekly에 돈 로스가 지난 6월 기고한 글에도 이 같은 시각이 담겨있다. 그는 "유럽은 기차 인프라가 잘 돼있으므로 '플라이트 셰임'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아시아는 한중일 3국을 제외하고는 기차 인프라가 갖춰져있지 않다. 동남아시아인들이 국내 여행에도 항공기를 이용할수밖에 없는 이유다. 동남아시아인들은 버스, 보트 등 다른 대안들은 위험하거나 불편하고, 노후돼 건강이나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기에 이런 선택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시에 "'플라이트 셰임' 같은 운동 대신 항공사가 승객의 요구가 많은 노선을 운용하고 직항 노선을 설정하는 등 시장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도 '플라이트 셰임' 관련 기사가 나오자 "유럽을 비롯해 선진국들이 산업혁명하고 지금까지 경제적 번영을 누려온 건 생각을 안하고 왜 이제야 잘 살게돼 이제 막 항공기를 이용하는 아시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냐" 등의 반응이 나왔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9.23 06:30

  • '물만 있으면 뛰어든다' 날씨가 모든걸 바꿨다
    '물만 있으면 뛰어든다' 날씨가 모든걸 바꿨다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폭염 ①] 기후변화로 이상고온현상… 재해수준의 폭염 이어지며 생활풍경, 정치지형도에도 변화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유럽을 덮친 폭염으로 프랑스에서 올 여름 1435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보건부는 지난 8일(현지시간) 이 같이 밝히며 대다수 사망자가 75세 이상 고령자였다고 말했다. 1435명이라니, 여간 놀라운 숫자가 아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린 2016년, 한반도의 열사병에 의한 사망자 수가 17명에 불과했던 걸 고려하면 이 숫자는 더욱 놀랍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프랑스 보건부의 태도다. 아그네스 부쟁 보건부 장관은 '1435명'을 거론하며 "프랑스 국민에 보낸 주의 경보 메시지 등 예방 조치 덕분에 사망자를 줄이는데 성공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올 여름 프랑스의 더위는 기록적이었다. 지난 6월28일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갈라르그 르 몽튀외는 낮 45.9도를 기록하며 관측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기존 프랑스의 최고 기록이었던 2003년 6월의 44.1도를 넘어선 더위였다. 폭염은 7월에 다시 찾아왔는데, 지난 7월25일 프랑스 수도 파리도 42.6도로 기존 역대 최고 기록(1947년)을 갈아치웠다. 프랑스 현지 언론은 이날 "파리가 아프리카 이집트 수도 카이로보다 더 덥다"고 전했다. 지독한 폭염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2003년 프랑스에 찾아온 폭염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다. 프랑스에서는 폭염이 20일간 이어지던 2003년 여름엔 약 1만5000명이, 두 차례의 폭염이 유럽을 휩쓴 2006년 여름엔 1388명이 사망한 바 있다. 이 같은 자연재해를 겪으며 프랑스 당국은 2004년 4단계 폭염 경보 체계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당국은 올해 남부 일부 지역에 적색경보를 발표하고, 대부분의 다른 지역엔 적색경보 바로 밑인 오렌지색 경보를 내렸다. 학교 4000여곳이 휴교했고 예정됐던 공공행사도 취소됐다. 전국 단위 시험도 연기됐다. 프랑스 교육부는 지난 6월 말로 예정됐던 중학생 전국 학력평가시험인 브르베를 다음달인 지난 7월 초로 연기했다. 파리시는 심야 수영장을 개장해 개장 시간을 늘렸고, 거리에선 물을 나눠주는 자선단체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지자체 차원에서도 에어컨 구입에 나섰다. 파리시도 노인들과 병약자, 노숙자 등 폭염에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거리 곳곳에 에어컨이 가동되는 장소를 마련해 쉴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다양한 노력을 통해 그나마 올 여름 폭염 사망자를 1435명에 그치게했다는 데서 프랑스 보건부는 만족감을 표현한 것이다. 재해 수준의 지독한 폭염은 프랑스의 여름 풍경도 바꾸고 있다. 기존에 유럽은 전통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나타냈던 지역이어서 에어컨을 갖춘 가구가 별로 많지 않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지난해 전 세계 에어컨 사용률을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23%)과 중국(35%) 두 국가가 에어컨 전체 사용량의 절반을 훌쩍 넘긴 반면 유럽 전체 국가는 6%에 그쳤다. 하지만 최근 몇년 간 이상고온 현상이 반복되면서 프랑스인들의 에어컨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설치도 늘었다. 프랑스의 한 에어컨 업체 관계자는 워싱턴포스트에 "지난 5년 동안 에어컨 구매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면서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더운 요즘 에어컨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폭염을 겪으며 프랑스 에어컨 판매율은 지난해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염은 프랑스 인프라 가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7월24일 벨기에에서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향하던 유로스타에서 고장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600명 넘는 승객이 터널 속 40도의 찜통더위 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유로스타는 고가 전력공급장치 결함때문에 빚어진 사고라고 설명했는데, 폭염으로 인한 사고로 추정됐다. 지난 7월25일엔 전력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다. 프랑스 원자력 발전 업체인 EDF는 원자로를 식힐 냉각수가 너무 더워졌다며 남부 골페쉬 원전의 원자로 가동을 일부 중단했다. 파리 곳곳에서도 의도치 않은 워터파크가 생겼다. 물이 뿜어져나오는 곳이라면 시민들이 들어가 몸에 물을 적셨다. 시내 곳곳 분수나 바닥분수, 교외 강이나 바다, 호수 등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물에 뛰어든 시민들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익사자도 늘었다. 프랑스 당국은 "지난해 여름 같은 기간에 비해 익사로 인한 사망이 약 30% 증가했다"고 밝혔다. 최소 60명이 수영 미숙에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됐다. 비슷한 사고도 이어졌다. 파리 북부 생드니에서는 6살 시리아 출신 여아가 주민들이 더위를 식히려고 틀어놓은 소방 호스 물세례를 맞고 공중에 솟구쳤다가 넘어져 중태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이번 폭염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공기가 유럽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이어진 것으로 진단된다. 사하라 사막 상공에서 48도 정도까지 달궈진 거대한 공기 덩어리가 제트기류(지상 1만m 안팎에서 수평으로 부는 공기 흐름)를 타고 북상해 유럽 곳곳으로 넓게 퍼져 여름철 열파(heatwaves) 현상을 낳았고, 이게 이번 폭염의 원인이 됐다. 문제는 이 같은 열파 현상이 화석연료의 사용 등에 따른 '지구온난화' 기후변화로 잦아지고 있고, 재해 수준의 폭염이 찾아오는 여름 기후는 이미 유럽의 뉴노멀(New normal)이 됐다는 것이다. 클레어 널리스 세계기상기구(WMO) 대변인은 "최근 유럽 열파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온실가스 증가와 극단적인 기온 변화가 일치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라며 "열파가 더욱 강렬해지고 길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가디언은 "과학자들은 기후 위기가 여름철 열파 현상이 이전보다 5배나 많이 나타나도록 자극했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미국 CNN에 따르면 '올해 최고 기온 기록이 새로 수립된 유럽 나라는 최소 12개국'인데, 앞으로도 매년 최고 기록이 경신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재해 수준의 폭염이 뉴노멀이 된 유럽에선 이로 인한 여러 사회적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선 청소년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이전보다 더 강력히 내고 있다. 최근 매년 기록적인 찜통더위를 몸소 겪으며 자신이 살아갈 터전이 더 이상 변화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청소년과 젊은이 사이에 공유되면서다. 이에 프랑스, 스웨덴, 독일, 벨기에,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선 매주 금요일 이들을 중심으로 '기후변화를 막자'는 행동 촉구 시위, FFF(Friday for Future)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촉발한 시위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그레타 툰베리는 프랑스 의회에서 "만일 2030년까지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심각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치적 지형도도 변화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 공유는 유럽에서 녹색당의 지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지난 5월 유럽의회 선거에 따르면 녹색당 그룹은 현재 의석수인 52석에서 17석을 늘리며 69석을 차지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가 젊은 유럽인을 중심으로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프랑스 내무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프랑스 녹색당은 34세 미만 유권자에게 가장 높은 득표율(18~24세 25%, 25~34세 28%)을 얻었다. 독일 녹색당도 젊은 유권자(18세~24세)의 1/3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자본주의나 사회구조적 문제를 짚는 좌파당 보다 환경 문제 그 자체를 다루는 녹색당이 젊은 세대의 공감을 더 자아냈기 때문이다. AFP통신은 "기성 정당들이 쇠락한 유럽의회에서 녹색당이 각종 이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녹색당은 기후변화 대응 조치에 대한 서면 약속 등을 연정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향후 녹색당은 환경과 관련해 산업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무역 정책에 대한 수정 등을 요구하며 기후변화에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9.16 05:41

  • '천국'에도 차별은 있다... 신체 자르고 돌 던져 사형
    '천국'에도 차별은 있다... 신체 자르고 돌 던져 사형

    [이재은의 그 나라, 브루나이 그리고 부국 ②] 무슬림말레이인에게만 한정된 복지… 말레이인 이외 인종차별 만연하고, 사실상 종교적 자유도 없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말레이시아 영토 한쪽 구석에 위치한 소국, 브루나이는 여러 국제 지표들에 따르면 돈 많고 행복한 나라다. 국제통화기금이 선정한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에 따르면 브루나이는 카타르, 룩셈부르크,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을 정도로 부국이다. 브루나이는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등 걸출한 선진국들에 이어 UN 2015 세계행복보고서 기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 9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브루나이가 제공하는 여러 복지를 보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게 느껴진다. 브루나이 국민들이 받는 혜택은 △대학 졸업까지 모든 교육이 무료이며 학생들은 용돈과 안경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돈이 필요할 경우 가까운 은행에 가서 신용에 관계없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어린이·경찰관의 경우 병원비가 무료이며, 군이나 정부 직영병원은 병원비를 받지 않는다. △이밖의 사람들이 여타의 병원을 갈 경우 어떤 병을 가져도 병원비는 1회 900원에 불과하다 등이다. (☞학비 공짜·병원비 900원... 부자나라 '브루나이' [이재은의 그 나라, 브루나이 그리고 부국 ①] 참고) 그런데 브루나이에 거주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알려진 만큼의 복지 정도를 체감할 수 없고,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그리 여유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브루나이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꼭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무슬림 말레이인이 아닌 이들의 경우에 말이다. 인구수 43만명의 브루나이는 말레이인·중국인(화교)·토착인종 등으로 구성된 다인종 국가다. 2015년 기준 브루나이 국적자의 대부분이 '무슬림 말레이인'이며 이들이 전체 인구의 70% 가까이 차지한다. 가장 큰 소수민족은 호키엔, 킨멘, 샤먼, 하카, 광둥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중국인들로 이들은 전체 인구의 10.1%를 차지한다. 문제는 이처럼 적지 않은 이들이 국가적으로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겐 국적도 잘 부여되지 않고, 종교의 자유도 사실상 없으며, 전통을 즐기는 것에도 제약이 따른다. 브루나이에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화교가 다수 이민왔고, 1867년 대영제국이 말레이시아를 식민지화한 뒤 브루나이도 함께 영국으로 편입돼 영국인도 다수 이민왔다. 1929년 세리아(Seria)지역에서 해상유전이 발전되면서 사라왁, 싱가포르, 홍콩 출신 이민자들도 크게 늘었다. 문제는 이같은 이민자의 후손들 중 90% 넘는 이들이 브루나이 국적을 받지 못해, '무국적 영주권자'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국적자로서 해외여행도 쉽게 다니지 못하고, 브루나이 국내에서도 숱한 차별을 마주한다. 브루나이 국민들은 노란색 신분증을, 외국인이나 무국적 영주권자들은 빨간색 신분증을 받는데, 노란색 신분증이 없는 이들은 인터넷 상품 가입이나 전화 요금제 가입도 어렵고, 정부가 주는 교육 장학금도 받을 수 없다. 대대손손 브루나이에 살아온 화교들 사이에선 '왜 국적도 주지 않냐'며 한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브루나이 당국은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국적법에 따라 여러 조건을 만족 시 국적을 준다고 명명해뒀는데, 조건을 지키면 될 것이지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브루나이 국적을 얻기 위해선 시민권 시험을 치른 뒤 브루나이 말레이언어위원회를 찾아 브루나이 말레이어를 익숙하게 사용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시험을 보고, 충성 맹세의식 등을 치르면 된다. 하지만 브루나이 거주 화교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표준 말레이어와 길거리에서 사용되는 브루나이 말레이어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실제로 국적을 얻은 이들이 거의 없다"고 항변한다. 브루나이의 복지는 사실상 국적을 가진 무슬림 말레이인에게만 한정돼있고, 국적을 얻기는 다른 그 무엇보다 어렵다. 무슬림 말레이인들에겐 천국 같은 나라지만 다른 인종에겐 각종 제한만이 가득한 지옥 같은 나라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이슬람 술탄 왕국' 브루나이는 전제주의 왕정체제를 유지하며 이슬람국가로서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 발전을 무슬림 말레이인을 배려·존중하는 방향으로 유지해왔다. 브루나이도 말레이시아처럼 부미뿌트라(토착 말레이족) 특혜 정책을 통해 역내에서 빠르게 경제세력을 키워가고 있는 화교들을 경계한다. 또 '이슬람 술탄 왕국' 브루나이는 타종교에 대한 종교적 억압도 가하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국교인 이슬람교 외 다른 종교도 포용한다. 헌법에는 "브루나이의 공식 종교는 이슬람교다. 다른 모든 종교는 평화와 조화 속에서 실천될 수 있다"는 구절이 있어 종교의 자유를 적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브루나이에서는 이슬람교 아닌 다른 종교는 전도·포교 활동이 금지된다. 기독교는 정부허가를 받은 교회 안에서만 전례가 허용되고,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도 허용이 금지된다. 성경만 들고 다녀도 포교로 간주돼 종교경찰(무타와)에 즉시 체포된다. 학교는 이슬람 교육을 제공해야하며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은 금지된다. 불교, 도교, 힌두교 또한 사원 증축을 금지하는 등 명맥을 잇지 못하게 만들었다. 비 무슬림 종교행사나 문화를 금지하는 맥락에서 크리스마스도 금지되고 있다. 브루나이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행위를 하면 최고 2만달러의 벌금형과 최대 5년의 징역형이 내려진다. 중국식 설날(음력 설날)을 지내거나, 중국식 사자춤을 설날에 공연하는 것에도 엄격한 제한이 가해진다. 사자춤이 설날 3일 중 제한된 시간 동안만 공연되는 식이다. 브루나이 당국은 이 같은 제한 이유로 "다른 종교인들이 축제를 벌이면, 일부 무슬림이 참여하게 되는데, 흥겨운 분위기 때문에 내내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세계화 추세에 따라 다른 국가들은 기존의 차별들을 완화하고 있지만, 브루나이는 조금씩 더 강화하고만 있다. 브루나이는 '최고 이슬람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2014년 4월부터 이슬람 교리에 바탕을 둔 이슬람 율법 '샤리아법'을 시행해 일반 형법과 이중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정 범죄에 두 가지 형법 중 무엇을 적용할지는 특별위원회가 결정한다. 샤리아법은 어린이, 외국인, 비이슬람교도에게 모두 적용된다. 국적에 관계없이 브루나이 영토에서 일어난 범죄라면 샤리아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지난 4월에는 이 샤리아법에 근거해 동성애자에 대한 투석사형을 규정한 새 형법 시행을 강행하기도 했다. 해당 형법은 동성 성관계 및 간통 행위자에게 돌팔매질을 통한 사형을 집행하는데 어린이, 외국인, 비이슬람교도 모두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법은 아울러 절도범들을 대상으로 초범은 오른손, 재범은 왼발을 절단하도록 했다. 전세계 각국이 이 법 시행에 비판 목소리를 내자 이스타나 누룰 이만 브루나이 총리는 "브루나이는 주권을 지닌 독립 이슬람 국가"라며 "샤리아법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처벌하고 방지할 뿐만 아니라 믿음, 인종,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개인이나 사회의 권리를 교육하고 존중하며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조지 클루니, 엘턴 존, 엘런 디제너러스 등 세계 유명인사들과 전세계 각국이 이 법 시행에 비판 목소리를 내자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1946년~현재)은 TV연설을 통해 사형 유예 및 유엔 고문방지협약 비준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브루나이는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 같은 이슬람 보수화가 관광산업의 발전을 꾀하는 브루나이에 호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여행시장은 2019년 238억달러(약 28조원)로 세계 관광 지출의 13%에 이른다. 매튜 울프 인권단체 브루나이프로젝트 설립자는 샤리아와 할랄을 엄격히 지키는 브루나이는 무슬림 여행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면서 브루나이 정부가 경제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보수화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향후 석유에 의존한 경제가 침체돼도 권력을 유지·강화할 방법을 찾은 것"이라며 "이슬람 세계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고 이슬람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9.09 06:00

  • 학비 공짜·병원비 900원... 부자<strong>나라</strong> '브루나이'
    학비 공짜·병원비 900원... 부자나라 '브루나이'

    [이재은의 그 나라, 브루나이 그리고 부국 ①] 1인당 GNI 세계 4위 부국 브루나이… 세계 최고(最古)의 이슬람 술탄 왕국으로 표현의 자유 등은 억눌려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비롯 일부 국가를 저격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특혜를 받기 위해 개발도상국이라고 자청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가 망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국가들이 WTO에서 개발도상국으로서 얻는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90일 내로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은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부유한 국가'는 중국·홍콩·멕시코·싱가포르·아랍에미리트(UAE)·한국 등이다. 그런데 여기에 인도차이나 지역 보르네오 섬 북서쪽, 말레이시아 영토 한쪽 구석에 위치한 '브루나이'라는 국가도 포함됐다. 브루나이를 들어본 적 없거나, 알더라도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소국' 정도로만 아는 이들이 적지 않아 "이게 무슨 나라인데"라는 반응도 나왔다. 브루나이는 세계 손꼽히는 부국이다. 국제통화기금이 선정한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가 카타르, 룩셈부르크,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높다. 1인당 국민소득(GNI·3만2860달러)도 우리나라(2만7600달러·세계은행 2016년 기준)보다 높다. 유엔(UN)에서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Human Development Index) 부문에서도 브루나이는 앞서있는데, 2017년 기준 0.853으로 조사대상 189개국 중 39위를 차지했다. 이는 동남아에서 싱가포르에 이어 2위로, 브루나이는 명실상부 엘리트 국가다. 그렇다면 브루나이는 이처럼 부자 국가인데도 왜 그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브루나이는 엄청난 소국이라, 그동안 각종 외교관계나 연구대상 등 관심 목록에서 자주 배제돼왔다. 브루나이는 경기도의 절반이자 제주도의 2배 수준의 영토를 갖고 있다. 인구 수도 의정부시(45만명)의 그것에 못미치는 43만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브루나이를 작다고 무시해선 곤란하다. 브루나이는 석유와 각종 자원을 바탕으로 작지만 강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브루나이는 1929년 세리아(Seria)지역에서 해상유전이 발전된 뒤 본격적인 산유국의 길을 걸었다. 브루나이는 동남아에서 세 번째로 큰 석유 생산국으로 하루 평균 약 18만 배럴을 생산한다. 액화천연가스(LNG)도 생산하며 세계 9번째 생산국이다. 이처럼 석유자원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부 덕에 브루나이는 대표적 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도 매년 브루나이로부터 엄청난 자원을 수입한다. 2017년 우리나라는 8억 달러 규모의 원유, 천연가스를 수입해 브루나이의 2위 수출대상국이었다. 양국 교역량이 상당한 데다가, 우리 기업의 투자나 접근가치가 높으니 한국은 브루나이가 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 정상회의 계기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1946년~현재)과 정상회담을 열었고, 지난 3월에는 문 대통령이 브루나이를 국빈방문해 한-브루나이 업무협약(MOU) 서명식을 가졌다. 그런데 브루나이가 흥미로운 건 비단 브루나이가 산유국이거나 부국이어서가 아니다. 브루나이는 엄청난 복지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북유럽 북지국가들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한마디로 국가가 나서서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원해준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대표적 복지만 나열해도 이정도다. △대학 졸업까지 모든 교육이 무료이며 학생들은 용돈과 안경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 정부가 정해놓은 일정 요건을 갖추고 유학을 가면 학비가 전액 지원되며 보호자 생활비도 지원된다. △개인소득세와 재산세는 면제된다. △돈이 필요할 경우 가까운 은행에 가서 신용에 관계없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상환기간도 빌리는 사람 마음이다. △경로(60세 이상), 장애인, 지적장애 아동 및 피부양자에게는 연금이 지급된다. △어린이·경찰관의 경우 병원비가 무료이며, 군이나 정부 직영병원은 병원비를 받지 않는다. △이밖의 사람들이 여타의 병원을 갈 경우 어떤 병을 가져도 병원비는 1회 900원에 불과하다. △치료차 해외 병원에가면 치료비가 전액 지원되고, 간병인 숙식과 생활비도 지원된다. △주택은 나라에서 지은 수상가옥에서 거주할 수 있는데, 30만원을 내면 평생 지낼 수 있다. △한 가정당 4대까지 자동차를 정부지원으로 보유할 수 있고, 휘발유는 리터당 리터당 500원, 경유는 250원에 불과하다. △4년 마다 한번씩 정부에서 해외여행 지원금을 준다. △1년에 한번 있는 라마단 기간이나 새해 행사 기간에 왕궁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국왕이 90만원 상당의 용돈 쿠폰을 준다 등이다. 아무리 산유국이라고 치더라도 브루나이의 국가적 지원은 꽤나 파격적인 측면이 있다. 브루나이는 국민에게 대체 왜 이렇게까지 베풀까. 브루나이는 동남아 유일한 전제주의 국가다.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이슬람 술탄 왕국으로, 이민이나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는 등 외부세계에 국가를 매우 한정적으로 개방한다. 이슬람 술탄 통치체제의 보전을 위해 모든 국가정책도 매우 느린 속도로 점진 확대 발전시키고 있고, ASEAN(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 일원이면서도 동남아 사회에서 필요 이상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원유 산업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국부는 세습 술탄(سُلْطَان·이슬람 세계에서 세습 군주제로 통치하는 국가 또는 지역의 군주)인 국왕이 관리한다. 자연히 볼키아 국왕은 세계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부유한데, 미국의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는 그의 재산 규모가 200억달러(약 23조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같은 부를 국왕 혼자 차지한다면 국민의 분노와 시위 때문에 자리를 보전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볼키아 국왕은 시혜성 석유복지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막대한 국부를 '국왕의 국민에 대한 관용과 자비로운 은전'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에 일부 환원하는 방식은 국왕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국민에 부각시키는 역할도 했다. 또 다른 산유국이자, 중세형 절대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유사한 형태다. 세계적인 산유국 사우디는 거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국민에게 고용·의료·교육 등에서 시혜성 '석유 복지'를 베풀며 정치적·종교적·사회적 불만을 눌러왔다. 사우디 왕실의 자본 원천은 국영화한 석유 산업(국영석유기업 아람코)이다. 사우디에는 국민이 선출한 의회도, 독립적인 사법 기구도 없다. 왕실은 여기에 엄격한 '경찰 감시국가 체제'를 더하면서 체제 안정을 꾀해왔다. 브루나이도 정치적·종교적·사회적 불만을 누르고 전제주의 왕정체제를 유지하며 이슬람국가로서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 발전을 이 같은 방향으로 유지해왔다. 볼키아 국왕은 자주권 투쟁으로 1984년 브루나이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킨 뒤 1991년 '말레이이슬람왕정(MIB)'이라는 보수 이데올로기를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제정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해왔다. 볼키아 국왕은 자신이 수상에 취임했으며, 선왕인 스리 버가완 국왕이 서거한 뒤 선왕이 맡았던 국방장관직도 겸임하고 있다. 국왕은 모든 국사에 책임을 지며 전체적 국내문제를 통제하고 관장하는 행정업무 등도 모두 총괄한다. 이외의 권력있는 자리도 모두 왕실이 차지해 국왕의 친위세력을 모두 장악했다. 외무장관(무하마드 볼키아)과 재무장관(제프리 볼키아)는 국왕의 친동생이고, 각종 국가요직도 볼키아 왕가가 독점했다. 이슬람 국가로서 이슬람 율법의 준수강화를 주된 내용으로 한 종교교육과 사회교육도 꾸준히 확대중이다. 이슬람왕정 지배체제하의 '신민의식' 주입도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이슬람 율법과 전통 사회 유지를 중시하고 왕가 체제 보존에 힘쓰고 있다 보니 브루나이에는 표현의 자유가 없다.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금기로, 선왕인 스리 버가완 국왕 때 선포된 계엄령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국에 사는 우리 시각에는 브루나이 분위기가 숨막히기만 하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별로 부럽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지 브루나이는 매년 세계에서 행복한 국가로 꼽힌다. UN이 발표한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브루나이는 덴마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바하마, 핀란드, 스웨덴, 부탄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국가 9위'에 올랐다. 다음 편에서는 브루나이 국민들이 정말 행복한지, 이들의 이슬람 왕국은 현재 형태로 꾸준히 유지될 수 있을지 등을 짚어본다. 브루나이 국가 내부에서나 국제사회에서 브루나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9.02 06:00

  • 푸틴의 꿈… "내가 100살까지 대통령 할 것 같나?"
    푸틴의 꿈… "내가 100살까지 대통령 할 것 같나?"

    [이재은의 그 나라, 러시아 그리고 푸틴 ②] 러시아, '강한 제국 소련'에 집단적 향수 빠져있어… 푸틴, 러시아 부흥 열망으로 장기집권 노려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20년째 장기 집권 중이다. 2000년 처음 집권한 푸틴은 2000~2008년, 당시 4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했다. 이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총리로 물러났지만 '상왕' 노릇을 하며 사실상 집권을 계속했다. 푸틴은 2012년 대선을 통해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난 제6대 대통령직에 복귀했고, 지난해 3월 대선에서 또 다시 당선됐다. 푸틴이 제7대 대통령 임기까지 마치고 나면 24년 동안 한 나라를 집권한 게 된다. 일부 사람들이 러시아를 '푸틴의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후엔 어떻게 될까. "임기가 끝나는 2024년 이후 또 다시 대선에 출마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푸틴은 "여러분은 내가 100살까지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라며 "(대통령직을) 100세까지 할 생각은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푸틴은 그동안 장기집권에 강한 야욕을 보이며 차근차근 제도를 개선해왔고, 꾸준히 장기집권에 대한 열망을 보여왔다.(☞'푸틴의 제국' 러시아에선… 프레임 전쟁 활활 [이재은의 그 나라, 러시아 그리고 푸틴 ①] 참고) 푸틴이 이토록 장기집권에 집착하는 이유로는 '제국을 잃은 트라우마'와 '강한 러시아 부흥의 열망' 등이 꼽힌다. 푸틴은 자신의 정권 출범 초기부터 소비에트 유니언(소련)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목표는 꾸준한 지지율의 원천이 됐다. 러시아의 '자부심 회복'을 바라는 건 비단 푸틴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앞서 사설을 통해 "러시아는 집단적 냉전 향수에 빠져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인들은 냉전 시기 소련의 위상을 늘 그리워하며, 향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첸트르' 조사 결과 "소련 붕괴가 안타깝다"는 응답이 과반수(56%)였고, "그렇지 않다"는 이들은 28%에 불과했다. 또 다른 러시아 조사기관 '브치옴'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붕괴가 애석하다"는 응답은 63%, "소련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는 응답자는 56%였다. 여론에 기대 푸틴은 꾸준히 옛 소련의 영향력 재건을 위해 노력 중이다. 대표적 사례가 '유라시아경제연합'(EEU 혹은 EAEU)이다. 푸틴과 러시아의 정치 엘리트, 학자들은 구소련 공간에 대한 정치·경제적 재조직을 통해 러시아를 발전시켜나가고자했다. 이에 따라 푸틴은 2011년 '유라시아연합'(EAU)을 구상했고, 2015년 이를 '유라시아경제연합'으로 출범시키며 현실화시켰다. 유라시아경제연합은 과거 '거대한 소련'처럼 재화, 노동,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단일통화를 목표로 하는 '거대한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통해 서유럽 국가 중심의 유럽연합(EU)에 대응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등 연내 인구만 1억8000만명에 이르는 대연합이다. 푸틴의 옛 소련 영향력 재건의 꿈은 우크라이나 등 신생독립국 지역을 러시아 영향권에 두고자하는 데서도 드러났다. 푸틴은 신생독립국 지역의 패권을 잃으면 강한 러시아의 꿈이 물거품이 된다고 보아 이 지역을 미국과 서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전략적 완충 지대로 남겨놓고자했다. 이런 판단에 따라 푸틴은 2014년 3월18일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었던 크림 공화국과 합병 조약을 맺어 '우크라이나 사태'를 발발케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등 7개 국가 사이에 위치하고 흑해와 인접해 있어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 장악을 위해 필수적인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푸틴의 야욕은 끝나지 않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꾸준히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데, 푸틴의 관심은 특히 벨라루스에 가있는 것 같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4월 벨라루스에 대한 석유 공급 가격을 인상시키는 방법 등으로 벨라루스를 압박하며 러시아와의 국가통합(화폐 통합, 단일 사법 체계, 공동의 외교안보 정책 수립 등)에 나서라고 윽박질렀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압박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알렉산더 그리고리예비치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연설에서 "벨라루스의 독립을 포기토록 강요하는 어떠한 외부의 시도에도 매우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의 영향력 확장 시도는 중동과 아시아에도 미쳤다. 푸틴은 중동에선 시리아를 통해 영향력을 확장했다.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전세를 바꾸는 등 말이다. 러시아의 중동내 영향력은 미국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는다. (☞꼬이고, 꼬이고, 꼬였다… 시리아 왜 여기까지 왔나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③] 참고) 지난 4월 푸틴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난 것도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장 노력 중 하나였다. 푸틴은 김 위원장을 만나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에 "러시아가 북한을 도울 수 있으니 러시아를 중요 역할로 고려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능력있는 한국, 한반도 넘어 세계 봐야" [2019 키플랫폼]딘 벤자민 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인터뷰 참고) 이처럼 푸틴은 '호시절'을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영향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옛 소련 시절 강대국 지위 회복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효과를 냈다. 예컨대 2014년 3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일방적으로 병합한 뒤 푸틴의 러시아 내부 지지율은 80% 넘게 치솟기도 했다. 영향력 확장을 노릴 수록 지지율 상승, 국민 결집 등의 효과가 나니 푸틴 입장으로선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푸틴이 점점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이유다. 지난 10일 푸틴은 '밤의 늑대들'이라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행사에도 참여했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 창립된 '밤의 늑대들'은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숭배하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등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단체다. 앞으로도 딱히 푸틴의 대외전략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럴수록 서구사회의 시름도 늘고 있지만 말이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사설을 통해 "러시아가 소련붕괴 이후 잃은 영토를 되찾으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등 우려스러운 보복 정책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푸틴이 세력확장을 자제하지 않으면 새로운 냉전이 불거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8.26 06:30

  • '푸틴의 제국' 러시아에선… 프레임 전쟁 활활
    '푸틴의 제국' 러시아에선… 프레임 전쟁 활활

    [이재은의 그 나라, 러시아 그리고 푸틴 ①] 20년째 장기 집권중인 푸틴… 언론탄압·정적 제거·부정선거·프레이밍 등 사용한다는 의혹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왜 러시아 대통령은 항상 푸틴이지?' 어릴 적 부모님 곁에서 9시 뉴스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한국 대통령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순으로 바뀌었고 미국 대통령도 빌 클린턴에서 조지 W부시로 바뀌었는데, 러시아 대통령은 언제나 블라디미르 푸틴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푸틴은 20년째 장기 집권 중이다. 2000년 처음 집권한 푸틴은 당시 4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연임했다. 2000~2008년 제3·4대 러시아 대통령을 연임한 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총리로 물러났지만 '상왕' 노릇을 하며 사실상 집권을 계속했다. 이후 푸틴은 2012년 대선을 통해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난 제6대 대통령직에 복귀했고, 지난해 3월 대선에서 또다시 당선됐다. 푸틴이 제7대 대통령 임기까지 마치고 나면 24년 동안 한 나라를 집권한 게 된다. 일부 사람들이 러시아를 '푸틴의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이 같은 푸틴의 장기 집권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늘고 있다. 수도 모스크바에선 반푸틴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4주째 시위인 지난 10일 시위에는 6만명(주최측 추산·경찰 추산 2만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2011년 부정 선거 의혹으로 러시아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이래 최대 규모다. 푸틴 지지도도 18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BBC 방송 러시아어 인터넷판에 따르면 러시아 여론조사 전문기관 '폼'(FOM)이 최근 '가까운 일요일에 대선이 실시되면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란 설문조사를 한 결과 43%의 응답자가 푸틴을 꼽았다. 2001년 조사 때 같은 질문에 42%가 푸틴이라고 답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푸틴이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한 응답자도 지난달 64%에서 이번 조사 60%로 떨어졌다. 27%는 '푸틴 대통령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러시아 정치학자 콘스탄틴 칼라체프는 푸틴 지지도 하락 이유에 대해 "저항 시위는 촉발제일 뿐, 근본적 원인은 유권자들의 피로감과 지난해 대선 이후 대통령에 대해 걸었던 기대가 이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라면서 러시아 국민이 20년 동안의 푸틴 장기 집권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의 아성에 금이 가고는 있지만, 아주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푸틴이 지속적으로 집권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그렇다면 푸틴은 어떻게 안정적인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을까. 푸틴은 앞서 다른 나라 독재자들이 그랬듯, 그들과 유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언론 탄압이다. 국제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가 조사한 세계 언론자유도 조사에서 러시아는 100개국 중 83위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비정부기구 언론인보호위원회(CPJ)에 따르면 1992년 이후 러시아에서는 무려 기자 58명이 피살됐다. 지난해 4월에도 러시아 정부가 숨기고 있는 '시리아 용병 파병' 문제를 취재하던 기자가 자택 발코니에서 추락하는 의문사가 발생했다. 러시아에선 기자가 체포되는 일도 빈번하다. 지난 6일에는 러시아 대부업체 비리와 장례산업을 취재하던 유명 탐사보도 기자 이반 골루노프가 체포됐다. 러시아 경찰은 체포 이유로 골루노프의 배낭에서 마약 4g이 발견됐다고 설명했는데, 시민들은 언론 탄압이라며 강하게 항의하고 시위를 벌였다. 여론이 악화되자 러시아 경찰은 11일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면서 수사를 종료하고 골로노프를 석방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또 한번 언론 탄업이라며 분개해야했다. 독일의 유명 시사주간지 '슈피겔' 소속 기자도 이날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서다. 언론 탄압의 방법은 점차 다변화되고 있는데, 지난 3월 푸틴은 옛 소련 시절 반정부 성향 매체를 탄압하는 데 악용됐던 것과 비슷한 법안에도 서명했다. '가짜 뉴스 금지법안'과 '국가상징물 등 모욕 콘텐츠 차단법안' 등 2건의 법안이다. 먼저 가짜 뉴스 금지 법안은 인터넷상 국민의 생명·건강·자산·사회질서·안전 등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허위 정보를 고의로 확산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온라인 매체에서 이같은 정보가 발견되면 검찰은 통신·정보기술·매스컴 감독청인 '로스콤나드조르'에 해당 정보 차단을 요구하고, 감독청은 즉각 인터넷 매체에 해당 정보 삭제를 요구한다. 공공기관 모욕 금지 법안은 사회·국가 상징, 정부 기관 등을 모욕하는 콘텐츠를 인터넷상에서 차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도덕관념을 비속한 방식으로 모욕하거나, 사회·국가·국가 상징·헌법·공공기관 등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내용을 담은 콘텐츠를 제한하는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인권 단체 관계자들은 이 법안들의 내용이 모호해 남용 위험이 있다며, 당국이 반정부 성향 언론을 탄압하는 데 악용할 수 있다고 반발했다. 유리 드지블라제 민주주의발전·인권센터 소장은 "옛 소련 시절의 '소련 체제 훼손 활동 금지법'과 '반(反)소련 캠페인·선전 금지법'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수준의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부정선거, 부정투표도 푸틴을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이슈다. 러시아에서는 총선과 대선에 대해 부정선거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2003년 12월 총선이나 2011년 12월 총선 등이 끝난 뒤엔 러시아는 더 이상 선거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푸틴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4선에 성공한 지난해 3월 대선에선 중복투표의 증거로 보이는 장면이 다수 포착되기도 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로이터 기자들이 대선 당일 러시아 남부 우스트-제구타 지역 투표소에서 두 차례에 걸쳐 투표한 것으로 보이는 17명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며 "이들 가운데 다수가 공무원으로 보였으며, 일부는 투표소에 무리를 지어 나타나거나 정부 기관 명칭이 부착된 미니버스를 타고 왔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계수기를 사용해 러시아 전역의 12개 투표소에서 투표한 모든 사람의 수를 집계한 결과, 9개 투표소에서 공식 투표수 집계결과와 10% 이상 차이가 났다. 우스트-제구타에 위치한 216번 투표소는 총 투표수보다 관리들이 잠정적으로 집계한 푸틴 득표수가 더 많았다. 푸틴은 지속적으로 정적을 제거한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반부패재단(FBK) 창설자로 푸틴의 대표적 정적이자 반푸틴 시위의 상징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지난달 24일 불법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돼 30일 구류 처분을 받고 수감돼 있다. 그는 구금 닷새째 구치소에서 부종, 발진, 가려움 같은 증세를 보여 시립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는데, 나발니를 면회한 주치의는 "화학물질 테러로 인한 신체이상 증세"라며 배후에 정부 당국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옐친의 후계자'로 거론됐던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의 사망도 배후를 의심 받고 있다. 넴초프는 2011년부터 나발니와 함께 선거 부정, 푸틴의 장기 집권 시도 등을 규탄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였는데, 2015년 2월 27일 집으로 향하던 중 한 다리 위에서 차를 탄 괴한들의 총탄에 수발을 맞아 사망했다. 이 같은 의혹들은 푸틴 집권 이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한번에 불이 확 붙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의혹을 제기할 창구가 마땅치 않아서다. 푸틴은 집권 이후 정치 체제를 폐쇄적 형태로 바꿔 야당의 목소리가 커질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만들었다. 동시에 시민단체의 정당,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 및 영향력 행사도 어렵게 만들었다. 옐친 집권기인 1993년부터 1999년까지는 러시아공산당, 러시아 정부가 주도하는 권력당, 그리고 자유주의 성향의 야당이 경쟁하는 구도였다면, 1999년 통합(Единство)당의 창당과 그 뒤를 이은 통합러시아당(Единая Россия)의 등장으로 인해 2000년대의 러시아 정국은 명실상부한 권력당이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또 2004년엔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정당 이외 사회단체들이 선거블록을 결성해 선거에 참여하는 게 금지됐다. 시민사회세력이 선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게 원천 봉쇄됐다는 뜻이다. 정당의 의회 진입 장벽도 전국 득표율 5%에서 7%로 상향 조정되면서 시민사회 단체들의 정치적 기회도 현저히 축소됐다. 이로써 러시아 인권·환경·민주주의 단체가 정치적으로 연대한 야블로코(Яблоко)당은 2007년과 2011년 선거에서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자연히 러시아 인권단체는 의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정당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인권단체의 활동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부재하기에, 의회에서 인권단체에게 불리한 법안이 통과되는 걸 막아줄 세력도 없다. 푸틴은 여타의 독재 권력자들이 그러했듯, 인권단체가 발언권을 전혀 가질 수 없도록 견고한 프레임도 짜뒀다. '인권단체=反러시아' 프레임이다. 푸틴을 비롯 정부 관련 인사들은 인권 단체와 인권 운동가들을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서구에 대한 이상에 젖은 反러시아적 존재로 틀 짓고, 인권단체의 활동을 국가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러시아 대 서구라는 양분법적 틀을 사용하여 러시아 정부에 대해 비판하거나 도전하는 단체들을 그 주장의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反러시아적인 것, 서구적인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예컨대 크렘린 정치자문가인 파블로프스키(Gleb Pavlovsky)가 "인권활동가들이 서구적 이상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나, 푸틴이 2005년 인권활동가와의 미팅에서 "비영리단체들이 정치적 활동을 위해 해외로부터 재정지원 받는 것을 참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는 실제로 민주주의 및 인권단체들이 러시아의 인권침해 상황이나 민주주의 위반 사례 등을 해외에 알림으로써 러시아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다고 본다. 또 이들이 러시아에서의 민주주의 혁명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 큰 러시아로의 발전을 방해하는 서구 세력의 앞잡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푸틴은 2012년 비영리단체법을 개정했고, 인권 단체들에 프레임 씌우는데 완전히 성공했다. 개정된 법에 따르면 해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비정부 기구는 스스로를 '외국 에이전트'(foreign agents)로 등록해야한다. 외국 에이전트는 스탈린 시대의 용어로서 러시아에서는 조국에 대한 배신자, 스파이 등과 동일시된다. 이들에게 외국 에이전트로 등록하도록 강요하는 건 이들 단체들의 정통성과 합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이를 등록하지 않으면 최대 백만 루블(약 3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고, 단체 관계자는 최대 2년의 징역형을 부여받는다. 미국국제개발처는 탈냉전 이후 줄곧 러시아 시민사회 발전을 위해 줄곧 러시아 인권 단체에 막대한 금액을 지원해왔다. 특히 환경, 여성, 인권, 민주주의 관련 단체가 주로 혜택을 받았는데, 이들 중에는 2011년 12월 의회선거에서의 부정행위를 폭로했던 선거모니터링 단체 골로스(ГОЛОС)가 포함돼있었다. 골로스는 외국 에이전트로 등록하지 않아 처벌받는 첫 번째 단체였다. 골로스는 2개의 기소장을 받았는데, 하나는 골로스 조직에 대한 기소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릴리야 쉬바노바 골로스 대표 에 대한 것이었다. 골로스느 2012년 11월 이후 해외 자금을 받은 바 없었지만 검찰청은 2012년 이 단체가 노르웨이헬싱키위원회상(사하로프상) 상금을 받았기에 외국 에이전트라고 봤다. 결국 골로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푸틴 정부는 일련의 시민단체 및 활동가들에 대해 형사 기소함으로써 이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위협했다. '푸틴의 제국'은 위 같은 방법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푸틴은 이 같은 장기집권을 통해 결국 뭘 얻고자하는 걸까. 다음 편에서는 푸틴의 꿈과 야망을 짚어본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8.19 06:00

  • 늙어가는 개발도상국 태국… 외국인 은퇴자의 천국?
    늙어가는 개발도상국 태국… 외국인 은퇴자의 천국?

    [이재은의 그 나라, 태국 그리고 친일②] 태국 고령화 속도, 선진국 수준… 세계적 노인보호 거점국가로 나아가려는 계획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역강국(Regional power)으로는 어떤 국가가 꼽힐까. 미얀마·태국·캄보디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라오스·필리핀·브루나이 등 아세안 10개국 중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정도가 지역 강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태국이 동남아시아 맹주 자리를 지속하기 위해선 꼭 넘어야할 산이 있다. 고령화 문제다. 보통 선진국이 고령화 문제로 시름하는 것과 달리 태국은 '개발도상국'임에도 고령화 문제를 맞닥뜨렸다. 지난 6월 UN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태국의 여성 1인당 출산율은 1.535명으로 200개 국가 가운데 171위를 기록했다. 스위스(170위, 1.535명)나 핀란드(172위, 1.53명)와 유사한 수준이다. 출산율 저하와 평균 수명 연장으로 태국의 노인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다. 국가경제사회개발위원회(NESDB)에 따르면 태국은 2017년 기준 60세 이상 노인 인구가 1220만명(17%)에서 오는 2036년까지 20%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태국 정부는 고령화사회 도달에 따른 사회복지비용이 2013년 4000억 바트(13.6조원)에서 2028년 1조4000억 바트(48조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는 꾸준히 지속돼서, 세계 은행은 2040년까지 동아시아의 모든 개발 도상국 중 태국이 가장 높은 노인 인구를 보유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2040년 태국은 1700만명이 65세 이상 노인으로, 총 인구의 1/4을 차지할것으로 예상된다. 태국의 고령화 역시 급속한 도시화 및 여성의 교육·사회지출 확대와 맞물려 발생했다. 하지만 유난히 태국이 고령화를 일찍 마주하게된 건, 1970년대부터 '미스터 콘돔'으로 유명한 사회운동가 메차이 비라바이디야의 주도 아래 피임 및 빈곤 탈출 운동이 확산되면서 출산율 하락이 가팔라졌기 때문이다. 유엔은 이대로라면 현재 약 7000만명인 태국 인구가 20세기 말에는 3분의 1 넘게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구 고령화는 어떤 경제국에서건 까다로운 과제로 꼽힌다. 노동력 감소와 노동 생산성 약화가 경제 성장을 짓누르고 의료비와 복지 지출 증가는 국가 재정에 부담을 안기기 때문이다. 이미 태국은 성장 둔화에 직면한 상태다. 태국 성장률은 199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연평균 성장률이 5% 중반에서 3% 중반까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올해 1분기에는 성장률이 2.8%까지 둔화됐다. 물가상승률은 1% 아래에 머물고 기준금리도 1.75%에 그친다. 태국 정부는 1982년부터 노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 고령화사회 대비 국가 위원회'(National Elder Council)을 발족해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고 있다. 1982년부터 2001년까지 국가 보장 1차 계획을 실시했으며, 현재는 2002~2021년 실시되는 국가 보장 2차 계획이 실행 중이다. 이 같은 계획 내에는 노인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제고하고, 노인 건강 증진을 위한 사업을 벌이고, 노인에게 사회적 보호를 보장하는 등 다양한 사업이 포함돼있다. 예컨대 2012년 4월 태국 정부는 노년층을 위한 의료창구를 병원에 개설하고 6월에는 공중화장실 내 재래식 변기를 모두 좌식양변기로 교체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노년층이 편안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국가 보장 2차 계획의 일환이었다. 2014년부터는 국민연금 15년 이상 가입인원을 대상으로 연금 지급도 시작했고, 2015년엔 정부 부처에 노인부(The Department of Older Persons)를 신설했다. 태국 법정 정년 60세를 넘긴 1000만명의 태국인 중 40%가 생계를 위해 아직 산업현장에 투입돼있는 점에 착안해 은퇴연령을 넘긴 노령인구의 고용과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올해 안에는 처음으로 방콕시 산하 노인 전용 병원이 완공될 예정이다. 300베드(침상수)로, 연간 최대 90만명이 이용할 수 있는 규모다. 고령화에 따라 태국에선 헬스케어 및 실버산업이 유망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태국 헬스케어 지출 비중은 2016년 GDP의 4.5%에서 2026년 7%까지 오를 전망이다. 의료기기, 의약품 시장이 확대되고 있고, 헬스케어 로봇, 가정용 의료기기, 실버용품 등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태국에선 건강·의료 서비스 비용이 타국에 비해 저렴하다. 이 같은 점 때문에 이미 예전부터 태국에 의료 관광을 오는 외국인들의 수가 많았다. 태국엔 현재 529개의 사설병원과 클리닉이 있으며, 이중 29개가 국제적 기준의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다. 2013년 태국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225만명의 외국인 환자를 유치했다. 이에 태국은 이 같은 장점들을 살려 세계적인 노인보호 거점국가로 나아갈 계획이다. 태국 정부는 태국 4.0 정책에 따라 의료산업을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육성하고, 태국을 아세안 시니어 시장 허브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이미 태국은 전세계 노년층의 은퇴 후 목적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태국에 머물기 위해 은퇴 비자를 신청한 50세 이상 외국인수는 2013 년 4만명에서 2017년 약 7만3000여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태국 은퇴 비자 발급 조건도 까다롭지 않다. 태국 은행 계좌에 한달에 약 6만5000바트(약 250만원)씩 고정 수입이 들어오거나, 80만 바트(약 3100만원)가 들어있으면 된다. 양로원, 실버타운 등 태국 내 시니어 공동체나 이를 다루는 사업체의 수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 SCB 경제연구소(SCB EIC)에 따르면 2018~2020년 사이 태국 내 시니어 공동체에 대한 신규 투자 규모는 60억 바트(약 2367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며, 2020년 누적 투자규모는 270억 바트(약 1조 651억원) 수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방콕 포스트에 따르면 최근 고령화로 관련 수요가 늘어나자 시암시멘트그룹(SCG)과 두짓타니 Plc 등 주요 기업들도 관련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해 양로원 서비스를 운영 중인 기업은 3000개로, 지난해 대비 1.5배 늘었다. Tepha에 따르면 현재 200개의 기업이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60~70%는 양로원 서비스, 20% 정도는 노인 전용 아파트다. 두짓 인터내셔널은 2년 이내에 태국 북부 치앙마이와 사무이섬에서 노인 리조트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두짓 인터내셔널 그룹 관계자는 "노령 인구가 많아지고 건강에 신경 쓰는 소비자가 늘어나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리조트 사업을 고려하고 있다"며 "단순한 양로원 서비스를 넘어 노인들이 리조트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친목을 쌓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태국으로 전세계 은퇴자가 몰려들면서 고령화의 어두운 그림자 '고독사'도 함께 따라왔다는 점은 슬픈 점이다. 태국은 과거 미국, 영국의 은퇴자들에게 각광받았지만, 일본 이민자가 꾸준히 늘면서 일본 은퇴자들도 태국을 찾고 있다.(☞"싸와디카 아리가또"… '친일국가' 태국 [이재은의 그 나라, 태국 그리고 친일①] 참고) 일본 영자신문 재팬타임스에 따르면 태국은 일본 퇴직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종착지이지만, 고독사 사례가 매우 많다. 2016년 2월 암으로 사망한 81세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 "일본이 그립다" 등의 말을 해왔지만,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태국에서 홀로 외롭게 사망했다. 2013~2016년 3년 동안 치앙마이에서 사망한 일본인 20명 중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치앙마이 일본 영사관은 "(태국은) 일본 고령화 사회의 축소판과 같다"고 말했다. 태국에서의 외국인 죽음을 기록해두는 사이트 '페랑데스'(farang-deaths)에 따르면 지난 4월에도 태국 우본랏차타니에서 은퇴 후 태국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일본인 오사나이 히로시(72)가 고독사한 채로 발견됐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8.12 07:47

  • "싸와디카 아리가또"… '친일국가' 태국
    "싸와디카 아리가또"… '친일국가' 태국

    [이재은의 그 나라, 태국 그리고 친일①] 일본, 태국의 최대 투자국… 태국인 96.2% "일본 신뢰한다"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똑똑하고 활기 넘치는 데다가 영어에도 능통해 모든 친구와 잘 어울리는 태국인 친구가 있었다. 마음 속 한 켠에선 늘 그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어느날 그와, 한 일본인 친구와 셋이 대화하던 중 또 한번 부러움이 커진 일이 생겼다. 친구가 일어에도 능통한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어로 일본인 친구와 막힘없이 대화했다. '일어까지 잘하네? 부족한 게 뭐야'라는 생각과 함께 '태국인이 일어를 배운 이유가 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어떻게 일어를 잘하냐"면서 "매우 예외적인 일 아니냐"고 묻자 그는 "아니다, 주변 태국인 친구 중에 일어를 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면서 "일본 기업에서 일하는 이들도 많다"고 답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은 뒤 지리적으로 일본과 붙어있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 경험도 없던 태국인데 많은 이들이 일어를 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내 궁금했다. 방콕을 둘러본 뒤 의문은 일순간에 풀렸다. 방콕 곳곳은 일본의 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의 흔적이 가득했고, 태국인들은 일본에 큰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콕 곳곳에서 일어를 보거나 일본식 인테리어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방콕 중심부엔 일본 백화점이 위치한다. 예컨대 태국 최대 쇼핑몰 '아이콘 시암'(ICON SIAM)에는 일본 유명 백화점 '다카시마야'(Takashimaya)가 입주해 있다. 같은 쇼핑몰에 위치한 일본 프리미엄 슈퍼마켓 '다카마르쉐'(TakaMarche)에서는 다양한 일본 식재료를 판매하고 있다. 편의점을 가려해도 세븐일레븐, 로손 등 일본계 편의점들이 대부분이다. 태국에선 일본 음식이 진미로 여겨져, 2300개 이상의 일본 식당이 성업 중이고, 태국인들은 '일본에 가서 정통 일본 음식을 먹고 싶다'며 일본 관광을 희망한다. 방콕 패션 리더들은 일본 스타일을 보여주는 웹사이트나 잡지를 찾아보고, 일본 패션 브랜드 이세이미야케의 '바오바오'백을 메길 원한다. 시세이도 화장품이나, 겐조 신발, 카시오의 지샥 시계 등도 인기가 높다. 국제적 인기 보다는 국내 인기가 더 높아 '내수용'이라는 비판을 듣는 일본 대중문화도, 태국에서의 인기가 막강하다. 일본 걸그룹 AKB48, BNK48이 방콕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땐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처럼 일본 문화에 대한 반감이 적고, 일본에 대한 전반적 호감도가 높으니 태국에서 만들어진 자체 문화 컨텐츠에도 일본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태국인들이 사랑해마지않는 영화 '쿠 깜'(Khu Kam·คู่กรรม)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국을 배경으로 한 태국 여성과 일본군 장교의 사랑을 그린 소설 '차오프라야에서의 일몰'을 원작으로 한다. 태국인들의 크나큰 사랑을 받으면서 '쿠 깜'은 텔레비전 드라마로 총 6차례(1970, 1972, 1978, 1990, 2004, 2013년) 리메이크 됐고, 1973, 1988, 1995, 2013년 총 4차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2004, 2007년엔 뮤지컬로 상연됐다. 쿠 깜은 일본인과의 로맨스나, 일본 문화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는 평을 받는다. /영상=쿠 깜 공식트레일러, 유튜브 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일본의 공익재단법인 신문통신조사회가 지난해 3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영국, 태국, 중국, 프랑스 등 6개국에서 각각 1천명씩을 대상으로 지난 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10일 밝혔다. 태국인들은 96.2%가 일본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해 일본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았다. 이 수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같은 조사에서 한국인이 응답한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인 응답자의 79.4%는 일본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고, 신뢰할 수 있다는 대답은 19.2%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태국인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로는 두 국가 사이의 공통점이 꼽힌다. 먼저 두 국가 모두 국왕이 있는 왕실 국가로서,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감정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 두 국가는 왕실간 교류를 지속적으로 해오며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현재까지 왕실이 매우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태국에서는 큰 의미를 갖는다. 태국 왕실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일본 왕실에 호감이 들고, 이게 자연히 일본 국가와 일본 국민에 대한 호감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또 일본과 태국은 모두 불교를 기반으로 한 국가다. 이는 현재까지 모든 남자 성인이 불교 스님이 되는 의식을 치러야하는 태국에 상당한 호감을 준다. 이외에도 두 국가가 공유하는 감정이 유사해 잘 맞는다는 평도 있다. 일본은 섬나라 특유의 '남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된다'는 민폐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태국인들이 가진 '끄랭짜이'(เกรงใจ·다른 사람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담이 될까 부탁을 잘 못하는 마음 상태)와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국인들의 일본 사랑은 단순히 호감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 보일 때가 있다. 즉 한류를 좋아하는 것처럼 단순한 차원의 호감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태국과 일본은 경제적으로 매우 의존한 상태다. 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사실상 '형제의 국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태국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라고 부를 정도다. 일본은 예전부터 태국을 동남아 진출의 허브로 보고 투자해왔다. 1970년대부터 일본은 대 태국 투자 2위 국가인 미국을 크게 앞서며 최대 투자국이 됐다. 너무나도 공격적이었기에, 당시 일본의 진출은 태국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1972년 태국의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발생시켰다. 물론 이후에도 일본의 투자는 지속됐다. 1980년대부터는 개발원조, 일본어 교육과 유학생 지원 등 일본 국가이미지 제고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일본은 인프라 개선 및 인적 자원 개발과 같은 분야에서 태국의 경제 성장을 지원하기위한 경제적 원조를 제공했다. 예컨대 일본 정부는 그 당시 태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수행되고 있던 '동부 해안 개발 프로젝트'에 집중적으로 도움을 줬다. 방콕 차오프라야 강을 건너는 다리에도 일본 원조의 흔적이 남아있다. 강을 건너는 21개 다리 중 14개에는 '일본 다리' 등의 글자와 함께 일장기가 그려져있다. 일본의 원조를 받았다는 뜻이다. 일본은 대(對) 태국 투자의 가장 큰 손이다. 1970년부터 2007년까지 일본은 태국에 2754건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총 1.5조바트(약 58조 5300억원)을 투자했다. 이 같은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 2012년 일본의 태국 투자금액은 3484억 바트(13조 6000억원)으로 전체 외국인 투자(FDI)의 63%를 차지했다. 2013년은 경제성장 둔화에 따라 23.2%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2828억 바트(11조원)로 큰 규모였다. 일본이 이토록 태국에 큰 돈을 투자하는 건 태국이 전략적 활용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주요 국가들과 육상 및 해상 교역이 편리해 인도차이나 반도의 무역 허브로 기능할 수 있다. 나아가 저렴한 인건비, 25만 ㎞에 이르는 도로와 4000㎞에 이르는 철도 라인, 28개 공항 등 잘 갖춰진 물류, 전력, 수도, 통신 인프라 및 안정된 사업 환경, 국제무역 및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정책 등은 태국 투자를 더욱 용이케했다. 태국 내수시장이 작지 않다는 점도 매력 요소다. 여기에 2015년 아세안 경제공동체(AEC·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브루나이 등 아세안 10개국이 결성. '동남아판 EU(유럽연합)'이라고 불린다.) 덕에 태국은 더 매력적인 곳이 됐다. 아세안 경제공동체는 단일 시장 및 생산 허브를 지향해 자유로운 상품과 노동력의 이동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무관세로 경쟁력있게 일본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동남아 국가에 팔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국에는 도요타, 혼다, ISUZU, 스즈키, 미쯔비시, 닛산 등 일본 자동차 대부분의 공장이 들어섰다. 태국은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로 불리며, 일본 자동차 생산대수의 90%를 차지한다. 당연히 도시바, 캐논, 니콘, 히타치 등 일본 전기 전자 업체들도 태국에 자리를 잡았다. 많은 태국인들이 일본 기업에서 일하게 되자, 일본 기업이 침체된 태국 경제를 살려주고 고용효과를 내준다며 일본 호감도는 더욱 커졌다. 또 많은 일본 기업이 진출하고, 태일 교류도 늘어나면서 많은 일본인이 태국에 거주하게 됐는데 이 역시 일본에 대한 호감도를 키웠다. 일본인이 많아지면서 일본인을 상대로한 상점 등이 늘고, 일본 문화나 음식 등을 접할 기회가 늘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하도 많아 '도쿄도 방콕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방콕 일본인 밀집 주거지역(방콕 중심부 수쿰비트)이 대표적다. 이곳엔 '일본 거리'란 이름을 가진 거리가 있고, 일본 음식이나 일본 재료를 파는 슈퍼마켓, 일본 학교,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태국어 학원도 몰려있다. 태국엔 2015년 기준 6만7000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이중 5만여명이 방콕에 거주한다. 다음 편에서는 일본과 닮아가는 태국의 자취를 조명하고, 태국에 몰려드는 일본인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단면을 살펴본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8.05 07:37

  • "도시가 죽었다"… 美디트로이트를 살린 '아날로<strong>그</strong>'
    "도시가 죽었다"… 美디트로이트를 살린 '아날로'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도시재생 ②] 디트로이트, 아날로그 감성가진 도시… 업사이클링 방식으로 부활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는 행위는 하드 드라이브의 음악을 꺼내 듣는 것보다 더 큰 참여감을 주고, 궁극적으로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레코드판이 꽂힌 서가에서 앨범을 골라 디자인을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턴테이블의 바늘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행위, 그리고 레코드판의 표면을 긁는 듯한 음악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직전 1초 동안의 침묵.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손과 발과 눈과 귀, 심지어 레코드 표면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 위해 가끔은 입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물리적인 감각을 더 많이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레코드판이 주는 경험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재미있는 경험이다.(책 '아날로그의 반격' 프롤로그 중) 데이비드 색스(David Sax) '아날로그의 반격' 저자는 아날로그가 디지털 세상에 반격하며,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 세상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날로그의 반격은 역설적이지만 고도로 진화한 디지털 기술로 인해 모든 게 빠르고, 좋아진 세상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시작됐다. '빠른 변화'들과 '새 것'들에 사람들이 질려버린 것이다. 한때 아이팟, 최신 휴대폰,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은 힙하거나 쿨한 것들이었지만, 모든 게 빠르고 좋아진 '디지털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이것들은 더 이상 힙하거나 쿨하지 않아졌다. 유행을 선도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자기 윗 세대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옛것들에 눈길을 돌렸다. 예컨대 최근 LP판이 LP세대가 아닌 18~24세가 주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이들 사이 큰 인기를 끌며 부활했듯이 말이다. 아날로그 감성은 디지털 세계에 살며 메마른 사람들의 감성도 채워줬다. 0과 1의 이진법적 조합으로 표현되는 디지털은, 정확하지만 차갑다. 이에 인간의 깊고 섬세한 모든 면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단절된 이진법이 아닌 연속의 개념이다. 그래서 따뜻하며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인식된다. 아날로그 감성은 인간의 깊고 섬세한 내용을 전달하고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여겨진다. 작가 스티븐 킹이 "모든 오래된 것이 머지않아 새로운 것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제 트렌드는 조금 오래된 옛 것, 그래서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으로 옮겨갔다. 전세계적으로 '레트로(복고) 열풍'이 불고있는 이유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과거 폐허가 된 땅이나 버려진 건물 등은 오히려 가장 최신의 트렌드가 됐다. 힙스터들은 새로 지어진 건물 대신, 버려진 공업사를 재활용해 만든 카페, 과거 문을 닫은 공장에 만들어진 미술관, 아무도 찾지 않아 방치된 수영장을 리모델링해 만든 클럽 등을 즐겨찾는다. 이런 트렌드는 과거 번영했다가 폐허가 된,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들에 호재로 작용했다. 대표적인 게 독일 베를린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미처 아물기 전, 서와 동 두쪽으로 갈라진 도시. 또 갑자기 장벽이 붕괴되며 동쪽에 빈건물이 대거 남겨지게 된 도시, 베를린의 이 같은 특징은 아날로그 감성이나 복고 열풍을 그대로 잡아냈다. 유럽도시 마케팅 벤치마킹 리포트에 따르면, 베를린은 2015년 1237만명이 찾으며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 이어 관광객이 많이 찾은 도시 3위에 자리했다. 이는 미국 디트로이트에도 호재로 작용했다. (☞美디트로이트는 정말 '강성노조' 때문에 파산했나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도시재생 ①] 참고) 디트로이트는 포드, 크라이슬러, GM(제너럴모터스) 미국 자동차 3사가 위치하며 미국 자동차 산업의 부흥을 이끈 도시였지만, 1950년 185만명으로 인구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인구 유출 현상을 겪은 뒤 '유령 도시' '파산 도시'가 된 곳이다. 디트로이트의 부활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2013년 인구는 7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 '포브스' 선정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로 선정됐으며, 미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최초로 파산을 신청한 시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침체해 있던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가 트렌디한 도시로 변모한 건 시에 내재된 아날로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면서다. 2010년대부터 디트로이트 다운타운과 미드타운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업사이클링'(up-cycling) 방식을 통해서다. 업사이클링은 재활용(리사이클)을 넘어 흠이 있는 건물이나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을 철거하지 않고, 때 빼고 광낸 후 지역의 문화와 서비스를 담아 관광객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 시작을 알린 호텔이 바로 수십년 공건물로 남아있던 소방서를 개조한 디트로이트 파운데이션 호텔(Detroit Foundation Hotel)이다. 호텔에는 미쉐린 스타 셰프가 지휘하는 레스토랑과 로컬 디자인을 선보이는 팝업 스토어,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객실을 갖춰 세계 각지의 힙스터들을 디트로이트로 이끌고 있다. 이어 지난해 초에도 30여 년간 버려져 있던 월리처 빌딩(Wurlitzer Building)에 더 사이렌 호텔(The Siren Hotel)이 들어섰다. 이 호텔은 기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에 파스텔 톤 색과 레트로풍 디자인을 가미해 지역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도시 전체가 재건 사업 중인 만큼 호텔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볼 수 있다. 자동차 판매점을 개조한 디트로이트 현대미술관(MOCAD)은 현대미술 전시를 비롯해 영화 상영, 패션쇼 등을 개최하며 지역의 문화 허브로 자리 잡았다. 도시에 방치된 폐허를 사무실과 엔터테인먼트 단지로 개조한 패커드 플랜트(Packard Plant)도 관광명소가 됐다. 오바마가 사랑하는 디트로이트산 시계 '시놀라'는 아날로그 산업 분야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자, '아날로그 도시' 디트로이트의 부활을 상징한다. 시놀라는 1907년 구두광택제 회사로 출발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게 보급품으로 지급되면서 유명해졌지만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시놀라는 2011년 디트로이트에서 새롭게 창업했다. 시놀라는 시계를 비롯 구두약과 관련된 가죽제품을 생산, 이후 자전거 등으로 제품을 확대하면서 사람의 꼼꼼한 손길이 필요한 제품을 장인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브랜드로 각인 됐다. 4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5년 만에 540명이 고용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이제 미국 제조업 부활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제3세계의 값싼 노동력을 쓸 법도 하지만 시놀라는 미국인 고용을 고집한다. 미국 장인의 정교한 솜씨와 독창성이라는 내러티브는 시놀라 마케팅에서 집요하게 언급된다. 시놀라 브랜드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는 건 디자인이나 가격이 아니라 '디트로이트의 장인이 만든 시계'라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시놀라는 디트로이트를 브랜딩에 활용했다. 본부와 공장은 디트로이트 미드타운 인근에 위치한다. 시계제작은 태생적으로 많은 의사결정을 요구하는데 생산과정 더 많은 부분에서 '사람'이 관여하게되고 이런 경험은 그들이 회사의 일부라는 느낌을 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공장을 견학하고 14개의 시계를 구입한 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시놀라 팬으로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에게 시놀라 시계를 선물했다는 점 등은 시놀라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했다. '아날로그 반격'을 시작한 디트로이트에겐 한가지 호재가 더 있었다. 아날로그는 태생적으로 지역사회에 이윤을 가져다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색스에 따르면 승자독식, 소득 격차라는 문제를 야기한 디지털 경제와 달리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된 경제 모델은 기업들 간 이익의 균형을 맞춰준다. 즉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이 하나 더 생기는 것보다 작은 레코드점이나 시계 공장이 들어서는 것이 지역 경제에 더 이윤을 분배해주고, 활력을 발생해준다는 것이다. 시놀라가 수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냈듯이 말이다. 디트로이트가 아날로그 감성의 정수로 떠오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비닐(LP)레코드 브랜드 써드맨 레코드(Third man records)도 미드타운의 옛 공장을 개조해 디트로이트에 지점을 냈다. 여기에 대기업과 시정부도 디트로이트 부활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점이 큰 힘이 됐다. 미국 최대 모기지 대출업체인 퀴큰 론스(Quicken Loans) 창업자 댄 길버트 회장은 2010년 고향을 살리기 위해 본사를 디트로이트 시청 부근으로 옮겼다. 길버트 회장은 또 부동산 개발회사인 베드록을 설립해, 도심 빌딩에 투자했다. 수십억 달러를 들여 100개 이상의 빈 건물을 인수하고 개발했다. 도심 본사 직원수가 당초의 1700명에서 1만7000명으로 늘어나면서 디트로이트는 더욱 살아났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빅3' 브랜드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국 자동차 노조와 '빅3'는 고용을 늘리기 위해 기존 근로자 임금은 동결하는 대신 새로 채용하는 근로자 임금을 절반 수준으로 낮추는 '차별임금제(Two-tier wage system)'를 통해 고통을 분담하고, 생산 원가를 낮추면서 회생이 가능했다. 정부 지원도 한몫했다. 2013년 3.3%던 GM의 영업이익률은 2017년 6.9%로 크게 높아졌다. 이제 디트로이트는 더 이상 '버려진 도시'가 아니라, '아날로그의 도시' '부활의 도시'가 됐다. 도시가 가진 스토리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산업을 부흥시키고 있다. 2009년 6월 17%까지 치솟았던 디트로이트와 인근 지역을 포함한 메트로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2017년 12월 4.2%로 떨어져 미국 전체 실업률(4.1%)과 비슷한 수준이 됐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의 부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지난해 6월에 포드 사가 오랫동안 버려져있었던 미시간 중앙역을 구입했다. 포드는 2022년까지 이곳을 자율 주행차 연구소로 탈바꿈하고, 포드 직원 2500여명을 이곳에서 일하게 할 방침이다. 디트로이트는 더 살아날 일만 남았다.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7.29 06:05

  • 美디트로이트는 정말 '강성노조' 때문에 파산했나
    美디트로이트는 정말 '강성노조' 때문에 파산했나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도시재생 ①] 1900년대 미국 대표도시 디트로이트는 어떻게 '도시 파산'을 맞았나… 인종갈등, 탈산업화 추세 대응 실패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부자도시였던 인구 200만의 미국 디트로이트가 파산하면서 빈민 70만명만 남은 폐허가 됐다. 울산도 강성 귀족노조의 천국이 되면 이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민심탐방 겸 울산을 찾아가 한 말이다. 그는 그러면서 "강성 귀족노조로 인해 울산경제도 어려워지고 나라도 어려워진다"며 "이제는 모두가 한 발짝씩 물러서 울산시민들의 행복과 재도약을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디트로이트는 도시 파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디트로이트는 정말 홍 전 대표의 이야기대로 '강성 귀족노조' 때문에 빈민만 남은 도시가 된 것일까. 일부 이 같은 지적이 있기는 하지만, 디트로이트가 파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다. 2019년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뉴욕,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워싱턴DC, 로스앤젤레스 등이 꼽힌다면, 1900년대 미국엔 디트로이트가 있었다.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미시간 주의 최대 도시, 디트로이트는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큰 도시였다. 디트로이트는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미국 최대 공업 도시로 성장했다. 천혜적인 입지가 이를 뒷받침했다. 수륙교통이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던 18~19세기, 미국의 5대호(슈피리어·미시간·휴런·이리·온타리오)로 둘러싸인 디트로이트는 공업이 발달하기 가장 좋은 도시였다. 더군다나 디트로이트는 강을 다리 하나 사이에 두고 캐나다 온타리오 윈저시와 마주하고 있어, 넓은 시장 확보에도 유리했다. 여기에 놓인 다리(앰버서더 브릿지)는 지금까지도 이동량이 많아 북미에서 가장 바쁜 다리로 꼽힌다. 이 같은 입지 덕에 디트로이트에 물류와 사람이 몰리며 가파르게 도시가 성장했다. 1830~1860년 30년간 인구는 6배로 증가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며 디트로이트는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에 이어 4번째로 큰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포드 자동차 설립자 헨리 포드는 디트로이트 디어본에 공장을 설립하고, 대량생산 체계를 구축했다. 근대 대량자동생산 시스템인 '포디즘'이 도입된 리버 루지 공장에선 약 9만명의 노동자가 일했고, 하루 7500대의 차량이 생산됐다. 포드 뿐만 아니라 크라이슬러, GM(제너럴모터스) 등도 이곳에서 공장을 운영했다. 이 세 브랜드는 서로 경쟁하며 미국 자동차 산업 전성기를 이끌었다. 1920년대 초에는 포드가 연간 생산대수 170여만대로 미국 자동차의 절반을 생산하며 호황을 이끌었고, 1920년대 말에는 GM이, 1930년대에는 크라이슬러가 호황을 주도해 나갔다. 이 세 브랜드는 디트로이트에서 10개가 넘는 대형공장을 운영하며 공장 직원 30여만명을 고용했다. 자동차 회사와 공장에서 일하고자 하는 이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디트로이트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었다. 디트로이트 시가 걷는 세수가 늘어났고, 도시는 지속적으로 발전해갔다. 높은 빌딩이 지어졌고 다리가 세워졌으며 극장, 쇼핑몰, 호텔 등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디트로이트의 호황은 이렇게 지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1950년 185만명으로 인구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인구 유출 현상을 겪는 도시가 됐다. 이후 디트로이트는 '망한 도시' '파산 도시' '유령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트로이트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실 단순히 생각했을 때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위기를 맞고, 또 이곳이 도시 쇠퇴를 겪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조업 경쟁력이 미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가면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보다 저렴한 값에 꽤나 괜찮은 기술력을 가진 일본 자동차가 등장하며 미국 자동차는 큰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높아진 디트로이트 자동차 3사의 직원 연금 및 의료비나 생산직 근로자의 임금 등도 부담의 원인으로 꼽혔다. UAW(전미자동차노조)의 요구를 들어준 결과, 미국 내 일본 완성차 업체 등과 비교했을 때 디트로이트 자동차 3사의 노동자 임금이 높아 생산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왔다. 다양한 이유로 미국 자동차 산업이 위축됐고, 보다 인건비가 저렴한 제3세계나 미국 남부로 공장이 이전하면서 디트로이트는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것만이 이유일 순 없었다.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디트로이트와 함께 미국 경제 전체의 산업화를 이끌어온 피츠버그에서는 좀 다른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가족당 평균소득 수준은 디트로이트가 피츠버그에 비해 높았지만, 1980년대를 전후로 역전됐고, 이젠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는 비교 불가한 도시가 됐다. '죽은 도시'가 된 디트로이트와 달리, 피츠버그는 1990년 모기지 사태 때도 타격을 받지 않은 도시였고, 2010년대에는 포브스, 이코노미스트 등에 의해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혔다. 조형제 울산대 사회학 교수는 논문 '산업도시의 재구조화와 거버넌스'를 통해 두 도시의 발전 양상 차이에는 '인종 구성'이란 변인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피츠버그는 인종 구성상 흑인 비율이 전체의 27.1%에 불과한 반면, 디트로이트는 흑인 비율이 전체의 81.6%를 차지하고 있다. 피츠버그는 백인 비율이 높아 도시 내 백인들간의 동질성을 유지해 교외로의 이주를 억제하고 도시재구조화를 위해 행위 주체들이 서로 협조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디트로이트는 흑인 비율이 높아 그렇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의 설명처럼, 사실 인종 비율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이런 인구 구성이 나타나게 된 데에 큰 문제가 있다. 디트로이트가 발전하던 1900년대 중반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디트로이트 도시 중심으로 유입됐는데, 이 과정에서 인종 갈등이 축적됐다. 1940년대 초 자동차 생산이 절정을 이뤘을 때, 채 3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30만명이 넘는 백인 노동자와 5만명의 흑인 노동자가 디트로이트에 유입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흑인 가정은 주거지를 얻기 어려웠다. 백인 거주자들은 흑인들을 지역과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봤다. 흑인 가정은 백인 가정 보다 더 높은 임대료를 내야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살 수 없었다. 자동차 공장에서도 '2등 시민' 대우가 이어졌다. 1943년 패커드 모터스(Packard Motors)가 백인들과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할 수 있도록 흑인 노동자 3명을 승진시켰을 때 2만5000명에 달하는 백인 노동자가 항의 시위를 했듯이 말이다. 한번에 많은 사람들이 디트로이트로 몰려들면서 한정된 일자리와 한정된 주택을 두고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이 커져갔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백인 노동자가 흑인들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텍사스발 루머가 디트로이트에 도달하면서, 1943년 6월 '디트로이트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두 인종이 맞붙으면서 34명 사망(25명 백인·9명 흑인), 433명 부상, 200만 달러(2015년 기준 2750만 달러·약 323억원) 상당의 재산이 파괴됐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현실은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고 실직이 이어지던 1950년대를 기점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에 백인들은 더욱 더 도시 외곽으로 거주지를 옮겨갔다. 의사, 변호사 등 상류층 백인들은 도시 중심부에 거주하는 흑인 노동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이제 잘 사는 백인들은 도시 외곽에, 못 사는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에 살게 됐다. 인종이 완전히 갈린 것이다. 누적된 흑인들의 분노는 다시금 1967년 7월 '디트로이트 폭동'으로 표출됐다. 단순해 보였던 백인 경찰이 무허가 술집을 단속해 흑인 80명을 체포한 사건이 대규모 폭동을 낳았다. 디트로이트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휴스턴 등 전국 17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존슨 미국 당시 대통령은 상황이 가장 최악인 디트로이트에 4100명 규모의 공수부대와 정규군을 급파했다. 병력이 투입된 디트로이트는 5일만에 안정을 되찾았지만, 디트로이트는 사망 36명, 부상자 2000여명이라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인종별로 나뉘어 살고, 꾸준히 폭동이 일어나는 등 인종적 긴장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디트로이트 교외에 자리 잡았던 다수의 백인들은 디트로이트를 대거 빠져나갔다. 이렇게 디트로이트는 1950~1970년 사이에만 32만5000여명의 주민을 잃었다. 인구가 줄었다는 건 과세 기반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빠져나간 인구의 대다수가 구매력 있는 백인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도시의 기반 시설 지원은 점차 어려워졌고, 빈 건물이 늘어갔다. 점차 도시 전체가 할렘화돼가면서 범죄가 증가했다. 이후 시는 일자리를 잃은 흑인들로 가득한 도시 중심가를 번영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교외로 이주한 주민들을 다시 도시 중심으로 돌린다는 목적을 갖고 ‘디트로이트 르네상스’(Detroit Renaissance) 계획을 가동했다. 1970년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2세도 르네상스 센터 (Renaissance Centre) 건설사업에 투자하는 등 도심 재개발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르네상스 센터는 고급 주택과 수십개의 레스토랑, 수천개의 객실을 보유한 호텔 등을 보유한 초고층 빌딩으로 계획됐다. '디트로이트 르네상스'는 탈산업화 추세에 대응해 도시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도심 지역 서비스 부문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은행, 유틸리티, 부동산 개발 등 서비스 부문을 활성화하기 위해 르네상스 센터를 비롯해 호텔, 컨벤션 센터, 스타디움 등의 건설이 추진됐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인구는 유출됐고, 도시는 황폐화되기만 했다. 여기에 디트로이트시가 자동차 산업을 도시 내부에 붙잡아두려고 했던 노력도 부작용만 낳았다. 시정부는 1980년에는 GM 공장 부지를 재정비해 좀 더 기술적으로 고도화한 공장을 세우는 '폴타운 프로젝트'를, 1986년에는 크라이슬러 공장을 재정비하는 '제퍼슨공장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과정 시정부는 세금 감면과 연방정부의 보조금 지원 등의 특혜를 제공했는데, 이는 자동차 업체의 고용을 일정 규모로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정작 주민 복지나 주민 생활 향상 등 여타 꼭 필요한 곳에 지원할 돈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2013년 인구는 70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같은 해 '포브스' 선정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 1위'로 선정됐다. 하지만 불명예는 끝이 아니었다. 시는 미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최초로 파산을 신청했다. 불어나는 연금지급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185억 달러(약 21조원)의 부채를 상환하지 못한 까닭이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시내 가로등을 켜지 못할 정도로 재정난에 빠졌다. 이렇게 디트로이트는 래퍼 에미넴 주연의 영화 '8마일'에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도시가 됐다. 영화의 '8마일'은 미시간주를 관통하는 간선 고속 도로 중 하나인 도로 M-102의 또 다른 이름으로, 백인들의 주거지 북쪽과 흑인들의 거주지 남쪽을 나누는 기준이자 동시에 빈부 격차를 나타낸다. 수십년간 절망에 빠져있었고, 또 도시 파산을 맞으며 영구한 죽음을 맞은 것 같았던 디트로이트는, 어쩐지 최근 '핫한' 도시로 부응하는 모양새다. 다음 편에서는 죽은 도시 디트로이트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 짚어본다.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7.22 06:00

  • "좋은 일 알선해줄게"… '성매매 합법화' 독일에선
    "좋은 일 알선해줄게"… '성매매 합법화' 독일에선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성매매합법화 ②] 성매매 합법 국가 독일, 신매매, 미성년자 성매매 등 관련 문제 지적 끊이지 않아… 최근 관련 규제 강화 추세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선선했던 날,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한 비어가르텐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베를리너들과 대화를 하게됐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온갖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화는 수영장, 사우나, 클럽 등 다양한 주제를 거쳐 성매매로 뻗어나갔다. 내가 "나는 내일 사우나를 갈 예정"이라고 말하자 한 50대 아저씨는 내게 "사우나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나 역시 예전엔 자주 가던 사우나가 있었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내가 "대체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아르테미스(Artemis)"라며 "그곳은 몇 년 전 불법적인 일에 연루됐다"고 말했다. 그가 즐겨 찾았다던 아르테미스는 독일 수도 베를린의 최대 성매매업소다. 2005년 9월, 650만유로(약 76억원)를 들여 지어진 아르테미스는 4층 건물에 70개의 침실, 그리고 건물 내 3개의 사우나와 대형 풀장, 헬스장, 2개의 영화관, 일광욕 시설 등까지 갖춰 하나의 리조트 같이 지어졌다. 아르테미스는 개장과 함께 2006년 독일월드컵을 맞이하며 전세계적 관심을 모았고, 대중교통과 길거리 광고로 명성을 차곡차곡 쌓았다. 75유로(한화 약 9만6000원)만 내면 술, 음식, 영화, 사우나, 성매매까지 무제한으로 할 수 있었으니 독일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 관광객들이 꼭 들리는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아르테미스의 아성에 금이 간 건 2016년 4월13일 아르테미스의 매니저 2명과 마담 4명이 인신매매와 조세포탈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면서다. 이날 아르테미스에는 경찰과 세무당국 인력 등 900명이 들이닥쳐 이들을 체포했다. 당국은 수개월간 사전 조사를 진행한 뒤 이 같이 급습했다. 붙잡힌 이들은 2006년부터 고용 인력을 자영업자로 위장하는 수법 등으로 1750만 유로의 사회보장세를 탈루했고, 인신매매 등으로 여성을 강제 성매매 산업에 종사케 한 혐의를 받았다. 2002년 성매매를 법으로 보장한 독일에서 성매매가 법망 아래 온전히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 봤던 이들의 환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성인용품 리얼돌 판결'과 독일의 '성매매 합법화'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성매매합법화 ①] 참고) 성매매의 합법화는 성인간의 '자발적 성매매'는 불법이 아니지만, '불법 성매매'는 더욱 강력하게 처벌한다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돼있다. 이런 불법 성매매는 강제성매매, 미성년자 성매매 및 불법이주자의 성매매 등을 말한다. 문제는 이미 성매매는 합법화됐기에, 경찰이 성매매 관련 인신매매, 성매매 강요, 혹은 착취문제를 수사하거나 기소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는 것이다. 성매매 자체가 합법적인 경제활동이자 사업으로 간주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결정적 증거 없이 수사를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 사건 역시 같은 결과가 나왔다. 베를린 지방 법원은 검찰이 기소한 혐의 중 인신매매·조직 범죄 연루 등의 혐의에 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지난 1월 아르테미스 측은 "우리는 부당하게 박해받았다"며 "경찰과 검찰에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항변했다. 아르테미스 측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일부 독일 대중 사이에선 "정말 아르테미스가 억울한 게 맞냐"는 얘기가 나왔다. 아르테미스 사건이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뒤 그동안 아르테미스가 여성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다른 사례들도 여러 개 공개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동안 아르테미스가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매매 중 프렌치 키스 등 타액을 나누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시킨 것, 콘돔 사용을 금지해온 것, 오럴 섹스를 강요해온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매매 여성이 성병에 걸릴 경우엔 가차 없이 퇴출시켜온 것 등이 말이다. 이에 따라 법원의 판결과는 관계없이 아르테미스에서 뭔가 옳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널리 알려졌다. 이에 위축된 수사권 및 기소권, 그리고 성매매의 정상화로 인한 산업급성장이 만나면서 독일이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도착지가 됐다는 비판은 지속됐다. 이런 비판은 일리가 있었다. 성매매가 합법화되고 성산업이 양지로 올라오면서 성산업도 매우 팽창했다. 독일의 경우 성매매 산업에서 나오는 이윤이 150억유로(약 20조원)에 달한다. 문제는 성매매 산업의 팽창의 속도를 성매매 종사자 증가 추세가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법화 시행 이후 성을 사려는 남성은 크게 늘었지만 공급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뷔페식으로 성매매를 운영하는 업소들은 대부분 '최대규모' '최저가'를 기치로 홍보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여성을 수급해야했다. 이들을 싼값에 여러 번 성매매시켜야하니 말이다. BBC 등은 지난 20년간 합법화 정책의 영향으로 독일 내 성 산업 종사자 숫자가 두 배 증가해 40만명에 육박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여성 수급이 힘드니 많은 경우 인신매매를 통한 여성 조달로 이어졌다. 여기에 20세기 후반 이후 빈국의 가난한 여성이 산업화된 선진국으로 이주해 노동하는 '이주의 여성화'(femigration)현상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이주자나 저소득층, 난민 등 취약계층 여성이 인신매매 형식으로 성매매 산업에 지속적으로 유입됐다. 인신매매는 물리력을 행사해 의사에 반해 시간·장소 등을 지정한 뒤 성매매를 시키거나, 가족을 인질로 해 협박을 하거나, 마약 중독을 유도하거나,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준다며 취업 사기를 치거나, 빚과 이자 등 경제력 압박을 통해 여성들을 압박하는 등 온갖 방식으로 이뤄진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연구에 따르면 2001년 1만9740명이었던 독일 내 인신매매 피해자 수는 성매매 전면 합법화가 시행된 2002년 2만2160명, 2003년에는 2만4700명으로 늘었다. 내국인 피해자는 10%에 불과했다. UNHCR(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독일은 성매매 인신매매 피해자의 주요 도착지였다. 독일에서 가장 많이 확인된 성매매 인신매매 피해자는 EU시민권자로 불가리아인, 루마니아인이었고 이외에도 러시아, 아랍 국가, 중국, 나이지리아, 기타 아프리카 출신 등도 적지 않았다. 집시나 난민 등도 인신매매의 주요 피해자였다. 인신매매 피해자의 약 4 분의1은 어린이들이었다. 인신매매 피해자의 대부분은 술집, 매춘 업소 및 아파트 등에서 성매매를 강요받았다. 결국 애초에 성매매를 합법화하면서 독일 당국이 의도했던 목표, 즉 성매매자의 노동권과 인권보호 향상, 강제 성매매 감소와 탈성매매 증가라는 기대가 거의 충족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 정부는 2014년 유럽의회에서 제기된 성매매 합법화에 대한 비판, △독일에서 성매매가 합법화되면서 성산업 규모가 폭증하고 인신매매가 증가했다는 비판 △합법화 이후 성구매자나 포주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는 성판매 여성의 숫자가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많아졌다는 비판 △성매매가 정상적인 직업 활동으로 정의되면서 성판매자를 위한 탈성매매 지원 서비스가 축소됐다는 비판 등에 대해 평가보고서를 통해 정책 자체가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으나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인정했다. 독일 정부는 처음 성매매 합법화가 목표로 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으며, △성판매자의 고용계약서 작성률과 사회서비스 이용률이 여전히 낮고 △여성 전체인구에 비해 폭력경험 비율이 훨씬 높고 △성판매 여성의 정신건강문제 역시 심각하다는 것도 인정했다. 이제 독일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성매매 관련 인신매매 보도가 나온다. 2년 전에는 독일의 서남부 도시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성매매업소인 '파라다이스'(지상 5층 규모로, 사우나·수영장·레스토랑 등의 시설을 갖췄다)를 운영하던 위르겐 루들로프가 인신매매 교사 및 방조 혐의로 체포됐다. 슈투트가르트 검찰에 따르면 '파라다이스'에서 일하는 150여명의 노동자 중 대다수가 동유럽 출신 여성이었는데, 이들은 갱단(범죄를 목적으로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폭력 조직의 무리)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해 강제로 파라다이스에서 일하게 된 이들이었다. 루들로프는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방조했고, 더 많은 여성들을 갱단에서 수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여성들에게 하루 벌이 목표치 500유로(약 66만원)을 정해준 뒤 이 만큼의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했으며, 성형수술이나 문신도 강요했다. 루들로프는 TV쇼에 '재벌'로 출연할 만큼 유명인이었기에, 루들로프의 체포는 독일인들에게 '성매매 합법화에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키웠다. 그리고 얼마 전, 지난 5월에는 태국 여성 200명을 인신매매 해 강제로 성매매를 시킨 혐의로 지난해 체포됐던 5명의 재판이 시작됐다. 피해자들 대다수는 트랜스젠더였는데, 이들은 5명 업주들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했고 월급은 원천 징수당해 돈을 받지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고 싶어하며 원활히 잘 이뤄질 것이라는 성매매 합법화주의자들의 환상과 달리, 실제 현실은 성매매 산업화의 확장과 박리다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신매매와 미성년자 강제 성매매 등으로 얼룩져있다. 2016년 베를린 아르테미스를 단속했던 경찰이 한 언론에 "업소에 있던 여성들의 상황을 '목화농장의 노예' 같았다"라고 말한 것이나 루들로프 사건을 다룬 슈투트가르트 지방 법원의 판사가 지난 2월 "이 크기의 깨끗한 성매매 사업장은 상상할 수 없다"고 한 것 등은 얼마나 성매매 여성들의 존엄이 얼마나 잘 지켜지지 않는지, 또 이런 현상이 얼마나 필연적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성매매를 합법화했던 국가들은 최근 성매매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앞서 독일 정부는특정 기간을 설정한 정액제 성매수를 금지했고, 인신매매 등으로 강제 성매매에 동원된 이들의 성을 매수하면 징역형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성매매가 합법인 네덜란드에서도 '성매매 불법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 네덜란드에서는 '성매매를 불법화하고 성 구매자를 처벌하라'는 청원 서명자가 4만명을 넘겨 하원이 이를 다루게 됐다. 네덜란드에선 청원자가 4만명이 넘으면 하원이 해당 안을 논의해야 한다. 이 청원을 주도한 기독교 청년단체 엑시스포스(Exxpose)는 '나는 값을 매길 수 없다'(I am priceless)라는 캠페인을 통해 "성매매를 통한 착취나 성매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라 라우스 엑시스포스 설립자는 "값싼 성매매와 높은 성매매 수요로 암스테르담이 인신매매에 취약해졌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 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첫 여성 시장 펨케 할세마 역시 성매매 여성들을 보호하겠다며 △도심 홍등가 일부를 폐쇄하고 축소하며 △호객용 유리 진열시설을 전면 폐쇄하고 △성매매 노동자 면허 발급기준을 강화한다는 등의 개선안을 발표했다. 성매매 합법화는 단순히 '성매매를 합법화'하자는 성매매 옹호론자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갈리는 주제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성매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매매를 합법화해서는 안되고, 또 다른 여성주의자들은 보호를 위해 오히려 합법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성매매 합법화를 통해 긍정적 변화를 모색했던 독일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참고문헌 성매매합법화와 비범죄화 논의 재고, 한국여성학, 안창혜 네덜란드 성매매 합법화의 효과, 다문화사회연구, 유숙란 성매매행위의 비범죄화, 원광법학, 박기석 독일 성매매 합법화 이후 실태와 정책 효과, 이화젠더법학, 정재훈 한국, 스웨덴, 독일의 성매매 정책 결정과정 비교분석, 한국여성학 제23권 4호, 유숙란·오재림·안재희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9.07.15 06:05

  • '성인용품 리얼돌 판결'과 독일의 '성매매 합법화'
    '성인용품 리얼돌 판결'과 독일의 '성매매 합법화'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성매매합법화 ①] 독일, 문제해결의 주체를 국가 아닌 사회로 봐… 국가가 개인의 삶 간섭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성매매 합법화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지난달 여성의 신체 형상을 모방한 성인용품 수입을 허가해야 한다는 첫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이 판결을 보고 독일의 성매매 합법화 과정이 떠올랐다.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돼야 한다"는 대법 판결이 독일의 성매매 합법화 과정 드러난 독일의 국가관과 맞닿아있는 것 같아서다. 지난달 27일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국내 성인용품 수입업체인 엠에스제이엘이 인천세관을 상대로 제기한 수입통관보류처분취소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엠에스제이엘은 2017년 여성의 신체를 실리콘 재질로 형상화한 '리얼돌'에 대한 수입 신고를 했지만, 세관으로부터 '풍속을 해치는 물품'이라며 반려당하자 소송을 냈다. 지난해 9월 1심 재판부는 "물품을 전체적으로 관찰했을 때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왜곡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의 특정한 성적 부위를 적나라하게 표현·묘사했다"며 세관의 수입 금지 처분이 적법하다고 봤다. 하지만 지난 1월 2심 재판부는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최소화돼야 한다"며 원심을 뒤집었고 이어 대법원도 2심 판단이 맞다고 봤다. 2심 재판부와 대법원의 시각은 독일인들의 국가관과 맞닿아있다. 독일은 나치시대 히틀러의 기억 때문에 국가가 지도자 원칙에 따라 개인생활을 모든 차원에서 간섭하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 따라 독일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중앙국가 보다 주정부 자치를 중심으로 한 연방국가 체제를 형성하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은 국가가 개인에게 '행동을 이렇게 하라'거나 '저렇게 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문제 해결의 주체도 국가가 아닌 사회라고 본다. 개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구성할 수 있어야한다고 믿으며,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라면 그 형태에 대한 제한도 거의 없어야한다고 여긴다. 작은 삶의 단위(개인과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국가는 나서지 않아야하며, 국가는 작은 삶의 단위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조성을 위해 도움만 줄 뿐이다. 독일은 이 같은 시각에서 평등한 계약관계에 토대를 둔 취업활동과 사회보장, 권리보장을 국가가 해주면 성매매여성 대부분이 탈성매매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성매매 합법화를 추진했다. 독일의 국가에 대한 시각이 이처럼 타국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었던 관계로, 합법화 논의 과정도 다른 국가들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됐다. 성매매를 금지하는 국가인 스웨덴(성매매 구매 금지)과 한국(성매매 구매 및 판매 금지)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착취'를 반대하는 맥락에서 법안이 만들어진 반면 독일은 성을 판매하고자하는 여성들의 자유를 보호해야한다는 맥락에서 법안이 만들어졌다. 성매매 합법화 진행 과정에서 성매매가 논쟁의 이슈로 부흥하기 전, 세 국가에선 모두 다 도덕 프레임이 대두했다. 신체는 인간의 존엄과 직결됐기에 이를 매매하는 행위는 비도덕적이라는 시각이다. 이 같은 시각에 따라 한국과 스웨덴에서는 여성시민단체들이 인신매매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성매매는 비도덕적이고, 여성 젠더에 대한 사회 구조적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는 전체 여성의 문제라면서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스웨덴과 한국에선 반대 여론이 사회 전체의 여론으로 부상했다. 독일에서도 이 같은 프레임이 지속됐다.1901년 제국법원이 성매매를 민법 138조의 부도덕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이후 일관되게 성매매는 부도덕한 행위로 취급됐다. 하지만 2000년대 본격적 성매매 합법화 논의가 시작되면서 '개인에 대한 차별' 부분이 크게 부각됐다. 국가에 대한 관념 때문이기도 했지만, 성판매 기업인 '하이드라'(Hydra)가 이 논의의 중심축으로 등장하면서 더욱 그러했다. 하이드라는 "성매매자가 받는 사회적 차별을 제거해야한다" "성매매는 다른 직업과 같다" "국가는 성매매자가 받는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 나서야한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이런 견해는 스웨덴이나 한국이 그러했듯, 성매매를 전체여성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아니라, 단순히 '성매매자의 문제'로만 한정하는 효과가 있었다. '성매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 담론이 부각되면서, 차별을 없애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았다. 이 같은 여론이 조성됨에 따라 2000년11월 독일 최대민간보험회사인 독일의료보험조합(DKV)은 차별을 없애는 맥락에서 성매매를 직업으로 인정하고, 성매매 여성들도 특별계약조건이나 더 많은 보험료 등 차별 없이 의료보험 가입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성매매여성임을 고지하지 않고 의료보험에 가입했다가, 성매매 행위가 드러난 경우 불이익(보험료 폭등, 지급 거절, 가입 해지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후 2001년 '성매매자의 법률관계의 규율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2002년 본격적으로 성매매가 합법화됐다. △미성년자와의 성매매를 한 자 △그를 알선한 자 △성매매 여성의 수입에 의존해 생활하며 성매매 여성을 감시하는 자 △성매매 시간이나 장소 등 환경을 결정하는 자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인신매매를 알선하는 자 등은 여전히 처벌대상으로 남았지만 이외에는 대부분 합법인 행위가 됐다. 성매매 합법화에 따라 성매매 여성은 인신매매 상황에 놓였을 때 국가에 이를 고발할 수 있게 됐고, 누군가 자신을 강요할 경우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국가에 호소할 수 있게 됐다. 성매매는 연금, 의료, 실업보험 등 사회보험 가입이 가능한 직업이 됐다. 재취업훈련 등 사회보험에서 제공하는 취업지원프로그램에 대한 권리 확보도 가능해졌다. 또 장해연금 수급권도 확보돼 취업활동을 못하게 됐을 때 연금수급도 가능하게 됐다. 독일은 이 같은 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성매매 여성이 자활에 성공, 성매매 여성의 수가 감소할 것이라고 봤다. 그럼 독일이 처음 합법화를 했을 당시의 취지처럼, 성매매 여성 수는 감소했을까. 또 성매매 여성들은 합법이라는 법망 아래,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을까? 일단 성매매 합법화에 따라 성매매 산업은 확장됐고, 성산업 종사자 수도 두배 정도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 곳곳에서 백화점형 성매매 업소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됐고, 일정 가격에 무제한으로 음식을 먹고, 사우나를 하고, 성매매를 할 수 있는 뷔페식 성매매 업소까지 등장했다. 거리 곳곳과 대중교통에 "성매매 하러 오라"며 유혹하는 광고판이 붙은 것도 물론이다. 다음 편에서는 독일에서 성매매 합법화에 따라 어떤 현상들이 나타났는지, 이게 어떤 논란을 불러일으켰는지 추가적으로 짚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성매매합법화 ②] 계속 참고문헌 절망 너머 희망으로, 에이지21, 니콜라스 크리스토프·셰릴 우던 EU에서의 성매매와 한국의 성매매 규제에 관한 연구, EU연구 제23호, 김학태 독일 성매매 합법화 이후 실태와 정책 효과, 이화젠더법학, 정재훈 한국, 스웨덴, 독일의 성매매 정책 결정과정 비교분석, 한국여성학 제23권 4호, 유숙란·오재림·안재희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7.08 06:30




  • "중국은 대국(大國)… 너희도 부럽지?"

    "중국은 대국(大國)… 너희도 부럽지?"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③] 사회주의·공산주의 경험한 중국인과 영국 식민지배 하 합리적·민주주의 사회시스템 길들여진 홍콩인 간 간극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내게는 한 광저우 출신 중국인 친구가 있는데, 그와 대화할 때면 내가 알던 상식이 사실이 아닌가 의심해봐야할 때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홍콩인들은 다 본토 중국인을 부러워하거든. 본토 중국인은 대국인이고 홍콩인은 소국인이니까, 대국의 일부가 되고 싶은거야. 그래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됐을 때 홍콩인들이 정말 기뻐했어." 그러면서 친구는 "대만 역시 마찬가지야. 대만인들도 중국의 일부가 되길 바랐고, 그래서 중국 당국이 더 노력중이야"라고 말했다. 정말 이상했다. 내 주변의 모든 홍콩인 친구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 '중국인'이라고 부르면 인상을 찡그리며 "나는 홍콩인"이라고 정정하고, 중국의 SNS, 미디어 규제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에 강한 열망을 보이는 등 중국 본토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차례 중국인 친구에게 "정말 그래? 홍콩인들 얘기는 다른 것 같은데"라고 물었는데, 그는 "내가 광저우 사람이잖아. 홍콩이랑 가까워서 홍콩엔 영화보러도 자주 놀러가서 잘 아는데 정말 그래"라며 잘라뗐다. 그의 단호한 확신에 잠시 현실이 정말 그러한가 생각해야했지만, 다시 홍콩인 친구들과 대화한 뒤엔 그의 확신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온 일종의 '세뇌'였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훗날 "(상대적 소국민인) 한국인 역시 중국인을 부러워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중국인의 '대국'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로 막강한지, 또 그들이 얼마나 대국적 논리에 기반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일견 알 수 있었다. 이처럼 홍콩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엄청난 생각의 간극이 있다. 먼저 홍콩인은 영국 지배 하(1841~1997년) 156년 동안 영국식 사회 시스템에 오래 길들여졌다. 영국은 행정제도, 사회기반시설, 공공서비스 등을 그대로 홍콩에 이식했고, 홍콩은 세계 최고의 무역항으로 거듭났다. 경제적으로도 본토에 비해 매우 풍족해졌으며 민주주의 의식도 발달했다. (☞'천안문 사태' 강력대응 中, 홍콩엔 한발짝 물러선 이유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②] 참고) 이는 단순한 차원의 차이가 아니었다. 일상 곳곳에서도 차이가 드러났다. 영국 식민 경험을 통해 홍콩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다양한 교류를 해왔다. 자연히 국제적 감각도 높아졌다. 홍콩인들의 눈에 중국인은 국제적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하게 비춰졌다. 홍콩 경제는 세계자본주의 발전의 지표가 됐을 정도로 선진국 수준에 이미 도달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소비수준이 다르니 사용하는 제품도 달랐다. 홍콩의 중산층은 벤츠, BMW, 볼보, 아우디, 혼다, 도요타 혹은 마세라티, 롤스로이스 등 외제차량 브랜드에 익숙했지만 중국인은 상하이나 베이징에 사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것들에 익숙지 않았다. 앞서 홍콩의 중국 반환 전 '중국인 정체성'을 강조하던 홍콩인들이 이젠 중국인과의 차이점을 강조하며 '홍콩인 정체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의 일부 민족주의·민주주의 인사들은 영국이 센트럴 등 영국인이 다수인 지역만 개발시키고, 홍콩인 밀집지는 등한시한다는 등 영국 정부의 상대적 차별에 대해 항거하며 당시 이들은 영국인이 아닌 '중국인 정체성'을 강조했었다. 하지만 중국 반환 후 홍콩의 민족주의·민주주의 인사들의 항거 대상도 달라졌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말이다. 이에 따라 이들은 '우리는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중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기저에는 공산주의 사회 중국 회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중국 반환을 전후로 당시 홍콩 인구의 10%인 65만명에 달하는 홍콩인들이 캐나다, 미국 등으로 해외 이민을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홍콩에 남아 사회운동을 일으켰다.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의 홍콩에서는 사회운동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97~2016년 20년 동안 홍콩에서는 6만4677건의 집회가 벌어졌다. 홍콩인들은 '중국 통합'에 대한 두려움을 집단의 연대와 통합으로 대응했으며, 또 이를 통해 '홍콩인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이전까지 홍콩인들에겐 국가 정체성이 크게 자리잡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오랫동안 중국과 분리되어 있었고, 이주민들로 구성된 다문화·다지역성의 사회였기 때문에 민족이나 국가 개념이 정체성으로 자리 잡을 공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 식민지배 하의 자유무역항과 국제화된 도시사회의 발전에 따라 국가를 중심으로 한 정치정체성은 홍콩에서 두드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권 반환과 함께 홍콩의 역동성과 다원성이 침식당하고, 중국의 민족 국가와 애국주의로 대체당할 것을 강요당하면서 이 같은 국가 정체성은 오히려 커졌다. 홍콩인들에게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은 기획된 '신화'처럼 느껴져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이 같은 정체성의 갈등은 정치적 시위 뿐만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도 빚어졌다. 홍콩인은 홍콩인 정체성을 키워나가며 이를 침범하려는 중국과 중국인에게 날카롭게 대응했다. 2004년 홍콩 피크트램(Peak Tram)에서 중국인-홍콩인 갈등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피크트램은 빅토리아 산 정상에 올라 홍콩 시내와 바다를 굽어볼 수 있어 외국인과 중국 대륙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관광지다. 2004년1월24일 춘절연휴 중 중국 광둥성에서 온 중국인 관광객 캉모씨(25) 가족, 친지 10여명이 하산하는 길에 싸움이 붙었다. 캉씨 일행 중 두명이 길게 늘어선 줄에 살짝 끼어들었다가 홍콩인 황모씨 가족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황씨가 "대륙인들은 매너가 없다"며 비난하자 캉씨가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순식간에 패싸움으로 변해 네명이 병원에 실려가고 여섯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중국 대륙에서는 웬만한 새치기를 눈감아 주지만 홍콩인에게 줄서기는 몸에 밴 질서다. 이처럼 양측의 줄서기 문화가 달라 빚어진 갈등이기도 하지만, 황씨가 한 말에 기반해 홍콩인이 중국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고 또 이게 어떤 갈등을 빚는지 알 수 있다. 홍콩 언론이 중국인을 바라보는 방식 역시 연장선상에 있다. 홍콩 언론은 중국 관광객들이 명품 가게에서 싹쓸이 쇼핑을 하거나 대로에서 신발을 벗고 휴식을 취하는 꼴불견 장면들을 심심치 않게 보도한다. 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다가 벌금을 내는 중국인 관광객에 대해서도 빈번하게 전한다. 2014년 4월에는 홍콩 공중화장실의 줄이 너무 길어 중국 여행객 부모가 거리 한복판에서 아이에게 소변을 보게 한 사건이 화제되면서 홍콩에서는 "중국인 관광객을 막아야한다"는 여론이, 중국에서는 "중국인 차별이 막심하니 홍콩 관광을 가지말자"는 여론이 급증하기도 했다. 칼럼 등에서도 홍콩에 취직 등을 위해 몰려오는 중국인들을 가리켜 (홍콩) 생태계를 파괴하는 '메뚜기떼'라고 언급하는 걸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베리 사우트먼·옌하이롱은 '홍콩 본토파와 메뚜기론: 신세기의 우익 포퓰리즘'에서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홍콩은 약소집단으로 전락했고 홍콩의 대홍콩주의도 약화됐지만 여전히 의식 속에서 홍콩의 우월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면서 홍콩이 중국을 적대시하고 이분법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홍콩의 중국에 대한 우월감이 작동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에 따르면 홍콩의 우월감은 서구화된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의 발전 경험과 글로벌 시대에 맞는 세계 시민이라는 인식, 그리고 반중이 곧 민주의 수호라고 인식되는 것처럼 비록 제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제도적·절차적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는 자부심에서 기인한다. 사우트먼·옌하이롱은 "홍콩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본토주의를 형성한 조건은 '식민 현대성'과 '냉전에서의 승리'라는 두 요인"이라면서 중국을 상대화해 홍콩의 우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지양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홍콩인들이 중국 대륙인을 향해 우월감을 느끼고 있고, 또 시위를 통해 반중정서와 홍콩의 독립 요구가 부각되고 있지만, 이게 전체 홍콩인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수 시민은 '독립' 보다는 중국과의 '공존'을 원하고 있다. 2017년 3월에 있었던 홍콩행정장관 선거에서 캐리 람에 밀려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선거 기간 내내 50%가 넘는 높은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온건 친중파 존창(曾俊華) 전 재정사장은 선거 구호로 '개방, 조화, 포용, 공존의 홍콩'을 강조했다. 이런 가치들이 홍콩사회가 구성하고자 하는 홍콩의 집단 기억과 정체성인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같은 집단 기억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홍콩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독립보다는 다양성의 존중과 중국과의 평화로운 공존, 즉 '일국양제 유지'로 추측된다. 2017년 6월7일에 실시된 '홍콩 민의와 정치발전'(15세 이상 1028명 대상 여론조사)에 따르면 2047년 이후에도 중국과 홍콩 간에 일국양제가 유지돼야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71.2%였다. 14.7%는 중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지지했고, 11.4%만이 홍콩의 독립을 지지했다. 결국 홍콩과 중국은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제도로 통합될까. 혹은 차이를 인정하고 두개의 제도를 가진 하나의 국가로 남게될까. 참고문헌 홍콩의 집단 기억과 시위 그리고 정체성 정치, 중소연구, 이종화 홍콩 민주화 시위에 나타난 정체성의 정치 분석, 서울교대, 박서현 1997년 이후 홍콩인 정체성의 지속과 변화, 한국인문과학회, 홍석준 우리의 기억, 우리의 도시, 집단기억과 홍콩 정체성, 동북아문화연구, 장정아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7.01 06:01

  • '천안문 사태' 강력대응 中, 홍콩엔 한발짝 물러선 이유
    '천안문 사태' 강력대응 中, 홍콩엔 한발짝 물러선 이유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②] 베이징, 중국인들에게 상징적인 데다가 시위 확산 가능성 높아 강력 진압… 홍콩 우산혁명 시위는 내부서 분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몇년 전 중국 베이징에 놀러가서 천안문 광장을 둘러봤다. 11월이라 쌀쌀했는데, 마침 비까지 내려 어딘가 씁쓸했다. 관광객 수 보다 월등히 많은 공안 수는 을씨년스러움을 한결 고조시켰다. 추적추적비를 맞으며 천안문 사태를 생각했다. 이후 광저우 출신 중국인 친구와 저녁을 먹으며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천안문 사태 알아?"… 모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안다"고 답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런 얘긴 하기 좀 그런데"라고 말을 흐렸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교과서에서 배우나?"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있었다고 들었다"고 답했다. 이어 "해보진 않았으나 검색을 하면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안다"면서 "중국인 모두 어떤 좋지 않은 일(천안문 사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는 마치 '금기'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천안문 사태는 1989년 6월4일 베이징 중앙에 있는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과 시민들을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1989년 4월말부터 계엄령이 선포된 5월20일까지 천안문 광장에는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2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덩샤오핑(1978~1983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1989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은 민주화 투쟁을 위해 모인 인민들을 무력으로 짓밟았고, 이 자리에서 최소 500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이 경제적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도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 영국 지배하 경제가 번영하고 민주주의 의식이 발달한 홍콩에는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홍콩은 1841년부터 156년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됐다. 영국의 홍콩 지배 기간을 거치면서 홍콩은 세계 최고의 무역항으로 거듭났다. 영국은 행정제도, 사회기반시설, 공공서비스 등을 그대로 홍콩에 이식했고, 꽤 합리적으로 식민지를 운영했다. 많은 홍콩인들은 영국에 대한 반감이 적고 이 시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홍콩은 이 시기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아시아의 중심 무역축으로 성장했고, 영국이 만든 사회 기반에 따라 민주주의 의식도 높아졌다. 이에 중국 반환 직전 홍콩에서는 불안감이 고조됐다. 영국식 사회 시스템에 오래 길들여진 홍콩인에게는 공산주의 사회인 중국으로의 회귀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천안문 사태를 지켜봤었기에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도 컸다. 수 많은 중산층 홍콩인은 불확실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민을 떠났다. 중국 반환을 전후로 당시 홍콩 인구의 10%인 65만명에 달하는 홍콩인들이 캐나다, 미국 등으로 해외 이민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7월1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홍콩 주권이 중국으로 인수인계됐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고, 홍콩특별행정구가 탄생했다. 중국 정부는 경제현대화의 첨병인 홍콩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젖었다. 홍콩 반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이후 마카오 반환과 대만과의 통일 등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고도 봤다. 장쩌민(1993~2003년 중국 국가 주석)은 1997년 6월30일 밤 홍콩 반환식 경축사에서 "1997년 7월1일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만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면서 "홍콩주권의 반환은 중국 민족의 축제이자 전세계 평화와 정의의 승리"라고 말했다. 당시만해도 홍콩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국이 비해 월등했다. 이에 중국 정부도 홍콩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고 고도의 자치를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장쩌민은 홍콩 반환식 경축사에서 "일국양제" "홍콩주민의 홍콩통치" "고도의 자치" "50년 불변" 정책을 확고하게 이행해 홍콩의 기존 사회경제체제와 생활방식 및 법률을 기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동안은 이대로 진행됐다. 그동안 중국을 향한 우려는 기우였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이 어느 정도 경제력을 키우기 시작하고, 국제적으로도 발언권을 갖게되면서 상황은 달라져갔다. 2003년 후진타오(2003~2012년 중국 국가 주석)의 임기 시작과 함께 중국의 홍콩을 향한 태도는 급격히 달라졌다. 후진타오는 중국이 부상하면서 홍콩과의 역학관계가 달라졌다고 봤다. 이에 '양제'를 강조한 기존의 홍콩 인식을 조정하고 그동안 '양제'에 놓였던 방점을 '일국'으로 조정하고자 했다. 중국의 홍콩에 대한 인식 조정 노력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았다. 중국이 '일국'을 강조할수록 홍콩의 반감도 커져갔다. 이때부터 홍콩에 반중국시위가 빈발했다. 2003년 7월, 기본법 23조를 근거로 중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안전법) 제정을 시도하자 50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에 나섰다. 2012년에는 친중 성향의 국민 교육과목을 필수 도입하려는 시도에 고등학생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시진핑(2013년~현재 중국 국가 주석)으로 바뀌면서 '일국' 지향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중국몽(시진핑이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 오른 직후 내세운 것으로, 봉건왕조 시기 조공질서를 통해 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전통 중국의 영광을 21세기에 되살리겠다는 의미)을 실현하고자 하는 시진핑은 홍콩 민주화에 대해 특히 부정적이었다. 시진핑은 '백서'를 발간해 '일국양제'의 전제가 '일국'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아가 홍콩의 자치 가능성을 축소했다. 홍콩 행정수반 선거 후보자 추천 방식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제한했다. (☞ "물러날 수 없다"… 한국 '촛불혁명'과 홍콩 '우산혁명'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①] 참고) 그렇게 2014년 9월부터 약 79일간 '우산혁명'이라는 이름의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50만명에 달하는 홍콩 시민들은 홍콩 행정수반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우산 혁명 시위를 벌였다. 우산혁명은 꽤나 오랜 기간 진행됐고(79일간), 또 많은 이들(50만명)이 참여하면서 전세계 이목을 끌었다. 당시 우산혁명 시위 참가자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보통선거를 달라" "우리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들(시위 반대자)은 대의 명분이 없다" 등의 주장을 했다. 이에 반해 중국 당국은 "이번 시위로 홍콩 시민들이 충격과 공포에 빠져 위협을 느끼고 있다" "렁춘잉 홍콩 행정장관에 대한 사임 요구는 불합리하며, 시위대는 황색동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격함은 보통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홍콩 경제에 타격을 줄 것이다" "시위대의 점거가 홍콩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등의 주장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우산혁명은 흐지부지 끝났다. 많은 수의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의 논리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2014년 홍콩중문대 여론연구소의 우산혁명 지지여부 조사에 따르면 우산혁명은 홍콩 시민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고학력인 범민주파지지 성향의 10~20대 젊은이들에게서만 지지를 받았다. 40~50대 이상으로 이미 경제적인 기반이 있는 고소득층은 홍콩 도심지를 장기간 점거하는 시위가 초래하는 불편함에 주목했고, 홍콩 경제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에 우산혁명을 이끌었던 베니타이 교수 등 3인방은 2014년 12월3일 시위를 이끈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자수했다. 베니타이 교수는 또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시위 중단을 권유했다. 그는 글에서 "센트럴 점령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며 "이제 우리는 민주화를 위한 다른 전략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우산혁명 시위가 대만과 마카오를 포함해 소수민족 분리시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시위 대응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우산혁명시 천안문 사태 때처럼 강력하게 대응하진 않았다. 첫째는 이처럼 홍콩내 시위를 두고 홍콩인들 사이에서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엇갈려 중국 정부가 개입해야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이었다.두번째는 중국 정부는 홍콩의 시위가 곧바로 대륙 전체로 확산할 것이라곤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홍콩이 '경쟁력 있는 지방정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중국의 대륙 중 아주 작은 섬에 불과하므로 베이징과는 그 중요성에서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베이징은 중국의 800년을 이어온 전통적·역사적 수도로서, 중국의 정치·행정·문화가 집약된 곳일 뿐 아니라 주요 상업·금융의 중심지다. 국가건설 전부터 무수한 정치투쟁과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이어져왔으며 베이징대(北京大)·칭화대(淸華大) 같은 국제적 대학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도시다. 천안문 사태 때도 그러했다. 서로 다른 도시의 학생 지도자들 사이를 전화 등이 연결시켜줘 어느 때 보다도 쉽게 소식이 전파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모든 연락은 꼭 베이징을 거쳐야 이루어졌기에 실질적 중심지로서의 베이징의 역할은 더욱 컸다. 이에 중국은 천안문 사태가 다른 대규모 시위 보다 전국적 확산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보아 강력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앞으로 중국은 '중국몽' 실현을 위해 더욱 홍콩을 중국 정부의 손 아래 두려고 할 것이다. 물론 최근의 '송환법 추진' 100만 반대 시위처럼 중국 정부에 대한 반발이 빗발칠 것이고, 이 과정 홍콩인의 홍콩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강해지겠지만 말이다. 다음 편에서는 홍콩인과 중국 본토인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짚어보고 이들의 생각 차이를 알아 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③] 계속 참고문헌 반정부시위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응, 연세대, 성별희 홍콩 민주화 시위에 나타난 정체성의 정치 분석, 서울교대, 박서현 홍콩의 반환과 중국의 장래, 배재대, 김소중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6.24 08:09

  • "물러날 수 없다"… 한국 '촛불혁명'과 홍콩 '우산혁명'
    "물러날 수 없다"… 한국 '촛불혁명'과 홍콩 '우산혁명'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①] 홍콩서 꾸준히 반중시위… 중국에 대한 불신이 근본적 원인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홍콩인 친구는 내게 한국이 가진 역동성에 대해 늘어놓길 좋아한다. K-POP, K-드라마 뿐만 아니라,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건 한국의 민주주의라면서 말이다. 한국에서 유학 중인 그는 2016~ 2017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혁명에도 참가했다. 당시 그는 내게 홍콩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일어났던 적이 있다며 '우산 혁명'을 소개했다. '우산 혁명'은 2014년 9월부터 약 79일간 진행된 민주화 시위다. 당시 50만명에 달하는 홍콩 시민들은 홍콩 행정수반 선거의 후보자 추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우산 혁명 시위를 벌였다. 주로 대학생들이 집회를 열었는데, 중고등학생들이 동참하면서 당국이 시위대에 최루탄을 쐈다. 무고한 학생들에게 마구 최루탄을 쏘자 초기엔 시위에 냉담했던 시민들 가슴에도 불이 붙었다. 시민들은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 센트럴은 홍콩의 도심)고 외치고, 우산으로 최루탄을 막아내며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한국의 촛불혁명이 대통령을 탄핵시키며 성공적으로 끝난 것과 달리, 우산혁명은 허무하게 끝났다. 중국 정부가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무대응'으로 일관했으며, 홍콩 내에서도 시위 장기화에 따른 경제 악화를 이유로 시위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어 시위 중심지였던 몽콕과 애드미럴티의 바리케이드 등이 홍콩 당국에 의해 철거되면서 시위는 시작 79일 만에 허무하게 종료됐다. 사실 홍콩에는 '우산 혁명'에 비견될 만한 시위들이 이전에도 수차례 있었다. 2003년 7월에는 기본법 23조를 근거로 중국 정부가 국가보안법(안전법) 제정을 시도하자 50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조항이 철회됐다. 2012년에는 친중 성향의 국민 교육과목을 필수 도입하려는 시도에 고등학생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세계인의 이목이 다시금 홍콩에 집중됐다. 지난 9일 홍콩 시민 103만명(주최 측 추산·경찰 추산 24만명)이 빅토리아 파크에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번 시위에는 "홍콩인 7명 중 1명이 참여"했으며, 홍콩이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뒤 일어난 최대 규모 시위다. 이번 시위는 왜 일어났으며, 홍콩인들은 무엇에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지난해 2월 시작됐다. 한 홍콩 출신 19세 남성은 휴가차 방문한 대만에서 임신한 20세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홍콩으로 도피한 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만은 이 남성을 송환시키기 위해 홍콩의 당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홍콩 당국은 대만과 범죄인 인도 협정이 없기 때문에 이에 협조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성을 대만으로 송환하지 못함에 따라 홍콩 법원이 강제로 이 남성을 석방할 수 있게 되자, 홍콩 당국은 오는 7월 이전에 범죄인 인도 법안을 통과시킬 것을 의회에 촉구했다. 얼핏 홍콩 당국이 합당한 법안을 추진 중인 것 같은데, 홍콩인들의 태도는 자못 비장하다. 홍콩인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면 홍콩의 미래는 없다"거나 "홍콩인들은 홍콩의 리더들을 전혀 믿지 못한다. 그들은 베이징 입맛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며 시위 현장에 나섰다. 홍콩인들은 이 법안이 반중국인사, 인권 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보내는 데 악용돼 홍콩 민주주의와 법치를 무너뜨리고 독립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가 격화되며 법안 심사가 예정됐던 지난 12일에는 홍콩인들이 입법회 건물 등을 둘러싸고 시위를 벌였고, 경찰 역시 최루탄, 고무탄 등은 물론이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충돌하기도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홍콩 당국은 인권과 절차적 보호 등은 유지되며 탈세 등 9가지 범죄는 이 법안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홍콩 시민들 분노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위대는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람 행정장관이 홍콩인들을 배신했다면서 즉각적인 퇴진을 촉구했다. 홍콩 당국이 9가지 범죄는 법안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한다고 물러섰는데도 홍콩인들은 왜 이리 절박하게 '반대'를 부르짖을까? 그 이면에는 홍콩인들의 캐리람 행정장관과 중국 본토에 대한 불신이 있다. 먼저 캐리람이 어떻게 행정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됐는지가 중요하다. 2014년 있었던 우산혁명 당시 홍콩인들은 '행정장관 완전 직선제'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대표적 '친중파' 캐리람이 당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켜 1000여명에 달하는 인원을 체포하는 등 강경대응하면서 우산혁명은 좌절됐다. 결국 간접선거제도를 관철시킴으로써 캐리람은 2017년 3월 행정장관에 선임됐다. 이후 홍콩의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중국 당국과 발맞춰 홍콩 독립운동파 단속을 강화했고, 지난해 9월엔 국가안보와 공공안전, 공공질서 등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사회단체의 해산을 가능케 한 '사단(社團)조례'에 따라 홍콩 정당 역사상 최초로 홍콩민족당의 활동을 금지했다. 지난 4월에는 킨만(陳健民·60) 홍콩중문대 교수, 베니 타이(戴耀延·54) 홍콩대 교수, 추이우밍(朱耀明·75) 목사 등 우산혁명 지도부 9인이 전원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당시 국제적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는 "홍콩 법원은 권리를 추구하는 평화시위를 불법행위로 규정함으로써 향후 정부가 활동가들을 기소하도록 만들었다"고 강력 비판한 바 있다. 시위가 점점 격화되고 홍콩인들이 16일 대규모의 시위를 열 것이라고 예고하자 홍콩 당국과 캐리 람 행정장관은 한발 물러났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15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홍콩 당국이 법안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소통하는 데 실패했다"면서 "법안 2차 심의를 보류하고 연기하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안 심의는 무기한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16일 예정된 시위를 진행했다. 홍콩 재야단체 연합인 '시민 인권 전선'에 따르면 16일 밤 11시 기준 시위에 참여한 홍콩인은 200만명(경찰 추산 33만8000명)으로, 지난 9일 시위 103만명의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이날 홍콩인들은 오후 2시30분쯤 빅토리아파크에서 모인 뒤 홍콩의 정부 청사가 있는 애드머럴티 인근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홍콩인들이 시민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자, 캐리 람 행정장관은 이날 오후 8시30분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홍콩인들의 반응은 싸늘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홍콩에서 이와 유사한 시위는 언제고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낮은 신뢰도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면 홍콩인들은 중국 반환 후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또 시위가 일어나지만 번번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스러지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중국인들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다음 편에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이 평행선으로 달리고 있는 이들의 각 입장을 살펴보고, 왜 자꾸 홍콩과 중국 사이 갈등이 발생할수밖에 없는지 자세히 짚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홍콩 그리고 反중국혁명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6.17 06:00

  • 미국판 '아프니까 청춘이다?'… 밥 굶는 美 대학생
    미국판 '아프니까 청춘이다?'… 밥 굶는 美 대학생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슈가베이비 ②] 과도한 등록금 부담에 배고픔 허덕이는 미 대학생… 36% "음식 제대로 먹지 못한다"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의 학자금 빚을 내가 대신 전부 갚아주겠습니다."… 지난달 19일(현지시간) 미국 억만장자 로버트 F 스미스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사립대학 모어하우스 컬리지 졸업식에 참석해 연설 중 2019 학년도 졸업생 전원의 학자금 융자액을 몽땅 갚아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졸업하는) 학생 여러분의 (학자금)대출을 없애주기 위해 보조금(grant)을 조성하겠다"며 "우리 모두 아메리칸 드림의 기회를 가지고 있는 만큼, 모든 졸업생들에게 꿈과 열정을 좇을 자유를 선물한다"고 말했다. 스미스의 이 같은 결단은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문제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은 '등록금과의 사투' 중으로, 평소 스미스는 대학 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이 많은 학자금 빚에 억눌려 있는 것을 국가적, 사회적 문제로 보아 우려해왔다. 이에 따라 스미스는 축사하기 불과 며칠 전에서 졸업생들의 빚을 모두 갚아주기로 결심했다. 모어하우스 컬리지의 일부 학생(2019년 졸업생)만 따져봐도 빚을 지고 있는 학생은 약 400명이다. 이들이 지고 있는 대출금 총액은 약 4000만달러(약478억원)로 추정된다. 모어 하우스 컬리지의 등록금은 1년에 2만5368달러(약 3000만원)로, 기숙사비 등 다양한 비용을 모두 합치면 1년에 약 4만8000달러(약 5700만원)가 들어간다. 학교 측에 따르면, 학생의 약 90%가 학자금 대출을 받고 있으며, 1인당 평균 3만5000~4만 달러(4100만~4700만원)에 달한다. 이를 모어하우스 전체 학생, 모어하우스가 위치한 조지아주 대학생의 대출금, 미국 전체 대학생의 대출금 등으로 확대할 경우 얼마나 규모가 클지 대충 감이 온다. 억만장자들이 모두 달려들어 대학 등록금 대출금 문제를 해결해보려해도 불가능할 지경이다. 문제의 기저에는 살인적인 미국 대학 등록금이 있다. SAT와 AP 시험을 주관하는 비영리 단체 '칼리지보드'에 따르면 2013~2014년 사립 비영리 4년제 대학의 학비, 방세 등 평균 비용은 연간 4만917달러(약 4900만원)였다. 공립 4년제 대학의 학비, 방세 등 평균 비용은 연간 1만8391달러(약 2200만원)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2017년 졸업생을 기준으로 미국 대학생 한 명이 졸업할 때까지 들어간 평균 비용은 12만5000달러(약 1억4000만원) 수준이다. 미국 중간 소득 가구의 연간 소득이 6만 달러(약 7100만원) 수준이므로, 대학생 한명을 키워내는 건 일반 가정이 부담하기에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그래서 미국 공립대학생의 77% 그리고 사립대학생의 86%가 학자금 대출 등을 받는다. 문제는 졸업할 때쯤엔 다들 빚쟁이가 돼있다는 것이다. 졸업하는 대학생의 3분의 2에 달하는 학생들은 2010년 기준 평균 2만4000달러(약2800만원)의 빚을 지고 대학 문을 나선다. 금액이 상당하니 몇년 안에 떨칠 수 있지도 않다. 대학생 재정보조 전문가 마크 칸트로비츠는 2011년 뉴욕타임스에 "졸업하는 대학생의 상당수가 자기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학자금 대출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어마어마한 상승률을 타고 미국 대학 등록금 문제는 나날이 심각해져만 간다. 미네소타에 위치한 비정치적인 교육 기관인 인텔렉츄얼 테이크아웃(Intellectual Takeout)이 발표한 1978년부터 2010년까지의 대학 등록금과 주택가격 및 소비자 물가지수 비교 그래프에 따르면 주택 가격은 1978년과 2006년 사이 4.35배 증가한 반면, 대학 등록금은 주택 가격 보다 10.5배 증가했다. 결국 대학생들은 최대한 적은 빚을 지고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대학생들은 슈가대디, 혹은 슈가마미를 만나 성적인 내용이 포함된 서비스를 제공한 뒤 재정적 지원을 받는 슈가베이비가 되기도 한다. (☞원조교제 어때?"… '검은 손'에 빠진 '슈가베이비'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슈가베이비 ①] 참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양 불균형 문제도 심각하다. 곤궁해지니 먹을 것을 줄이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위스콘신 대학교의 '희망 랩'(Hope Lab)에서 연구한 결과, 미국 20개주 2년제 및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는 4만3000명의 학생 중 36%가 재정적 빈곤으로 인해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나에 위치한 한 대학의 경우, 74%의 학생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끼니 걱정을 한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대출을 받거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대학생들'도 이 같은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스콘신 희망랩 설립자인 사라 골드릭랩은 "사람들은 대학생들이 캠퍼스내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이런 오해 때문에 대학생들이 굶고 있는 사실은 오랜 기간 주목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 2016년 미국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대학 캠퍼스에서 1년간 식사하는 비용은 4년제 공립대학교 4400달러(520만원), 4년제 사립대학교 5600달러(660만원)다. 연간 6000달러(700만원)를 웃도는 곳도 적지 않다. 최근 대학생의 과도한 등록금 부담 문제가 조명되면서, 대학생의 '식량 안보' 문제도 함께 주목 받았다. 대학 등록금, 교재비, 월세, 생활비 등에 치여 먹는 데 돈 쓰지 못하는 대학생들에게 끼니를 제공하는 '푸드뱅크'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대학들이 창고 형식의 장소를 빌려주고, 비영리 단체가 세금 지원이나 기부를 받아 음식을 배포하며, 자원봉사자들이 일하는 형식이다. 학생들은 소득에 관계 없이 최대 한달에 3번 푸드뱅크를 방문해, 통조림콩, 참치, 스파게티 소스, 파스타면 등의 음식을 3일 분량 받아갈 수 있다. 상황이 심각한 만큼 각 지자체도 푸드뱅크 지원에 적극적이다. 2017년 제리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캠퍼스 기아' 퇴치를 위해 푸드뱅크를 지원하는 내용의 750만 달러(89억원) 규모의 법안에 서명했다. 앤드류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그 어떤 학생도 굶지 않도록'(No Student Goes Hungry)이란 이름의 프로그램 일환으로 지난해 뉴욕주내 모든 대학에 푸드뱅크를 설치했다. 이에 모든 학생들은 신분과 가정형편에 상관없이 누구나 캠퍼스 내 식료품 배급소에서 무료로 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게 됐다. 미국의 '대학생 문제'는 이를 겪고 있는 대학생 수가 엄청나고 개인이 감당하고 있는 빚의 규모가 커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할 조짐이다. 미국은 결국 이를 해결해낼 수 있을까. 슈가베이비, 푸드뱅크는 미국 청춘이 겪고 있는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각 지자체가 문제를 인식하고 발벗고 나선 만큼 앞으로는 보다 나아지길 바라본다. 청춘에겐 아프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6.03 06:20

  • "원조교제 어때?"… '검은 손'에 빠진 '슈가베이비'
    "원조교제 어때?"… '검은 손'에 빠진 '슈가베이비'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슈가베이비 ①] 美 연간 5000만원 대학생 학비 부담, 슈가베이비 양산… 성매매 비판 나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미국인 4명중 1명이 학자금 부채에 허덕이며 40대까지 대출금 상환 인생을 삽니다. 반면 슈가베이비 학생들은 월평균 3000달러(약 350만원)를 슈가대디에게 지원받기에 3개월이면 수업료 납부 고통(칼리지보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4년제 공립대 연평균 학비는 2001년 보다 2배 뛴 9510달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슈가베이비 관련 웹사이트의 홍보 문구) 무한 경쟁 사회, 아르바이트는 잘 구해지지 않고 시급도 그리 넉넉지 않다. 패스트푸드점, 레스토랑, 슈퍼마켓 등에서 하루 종일 진이 빠지게 일해봐야 등록금은커녕 월세도 감당하기 힘들다. 이런 때 누군가 자신과 데이트만 해준다면, 월세와 등록금은 물론이고 여윳돈까지 준다고 속삭인다. 미국 대학생들이 '슈가대디'를 만나는 '슈가베이비'가 된 이유다. 슈가대디는 여대생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아버지뻘 되는 남성들을 일컫는다. 미국 최대 슈가대디-베이비 매칭 사이트 시킹어레인지먼트(Seeking Arrangement)에 따르면 미국에 등록한 슈가대디들은 평균 38세이며 연평균 25만달러(약 3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슈가베이비들은 슈가베이비로 활동하며 매달 2800달러(약 335만원)를 벌어들인다. '슈가베이비' 활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함께 라떼를 한잔 마시는 것부터, 공식적인 모임에 동행하는 역할,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자는 것, 성관계를 하는 것까지 역할도 다행하다. 슈가베이비들은 보통 한 슈가대디 당 한 달 1만∼2만 달러(약 1200~2400만원)를 받거나, 슈가대디와 한 번 만날 때 마다 100∼500달러(약 10~50만원)씩을 받는다. 경제적 이유로 인해 미국 곳곳의 여자 대학생들이 '슈가대디'를 소개해주는 인터넷사이트에 가입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시킹어레인지먼트' 뿐만 아니라 '마이슈가대디' '슈가데이터스' '슈가데이트' '슈가대디' '슈가대디포미' '뮤츄얼어레인지먼츠' 등의 슈가대디-슈가베이비 중개 사이트가 성업중이다. 이 중 2006년 시작돼 가장 규모가 큰 사이트인 시킹어레인지먼트에 따르면 이곳 회원 중 42%인 140만명은 대학생이다. 슈가베이비 중 36%는 슈가대디로부터 등록금을 받고 있고, 23%는 집세를 지불하기 위해 슈가베이비 활동을 한다고 답했다. 하버드대 같은 명문대생들도 포함돼 있다. 시킹어레인지먼트 대학별 회원 명부에 따르면 각 대학별로 1000명을 넘는 학생들이 슈가베이비로 활동 중이다. 가장 많은 회원 수의 대학교는 뉴욕대로 1676명의 슈가베이비가 등록됐다. 뒤를 이어 조지아주립대(1304명), 센트럴플로리다대(1068명), 컬럼비아대(1008명), 앨라바마대(968명) 등이 순서대로 올랐다. 킴벌리 델라크루즈 시킹어레인지먼트 대변인은 "우리 사이트에 등록한 회원은 135개국 총 2000만명이다"라면서 "특히 재정적 도움을 얻고자하는 대학생들이 슈가베이비로 등록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시킹어레인지먼트 역시 대학생들의 슈가베이비 등록을 장려한다. 그는 "학생들이 .edu 이메일을 사용해 등록할 경우 프리미엄 회원 자격을 준다"면서 "프리미엄 회원은 대시보드에 본인을 노출할 수 있고, 사진이나 승인된 프로필 없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대학생들은 슈가베이비 활동을 통해 (인생에서 성공한 이들로부터) 학비 및 생활비 뿐만 아니라, 멘토링까지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생을 끌어모은 건 시킹어레인지먼트의 성공 비결이었다. 대학생은 어리고 젊은 데다가, 신분이 확실해 슈가 대디들도 선호했다. 시킹어레인지먼트는 대학생들에게 '슈가베이비'가 되는 길이 합리적이라고 유혹한다. 시킹어레인지먼트 홈페이지에는 "대학생 슈가베이비는 월 평균 3000달러를 받습니다. 최저임금을 받는 파트타임 직종에서 귀중한 학습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대신 시킹어레인지먼트의 후원자들과 연락하세요. 학비를 대출하는 것 만큼 간편하지만, 이 돈을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이 같은 슈가베이비 등록은 친구 추천을 통해 빠르게 확산했다. 안젤라 버무도 시킹어레인지먼트 대변인은 "대학 별로 회원 수가 급증하는 건, 친구 추천이나 입소문을 통해서다"라면서 "한 학생이 슈가베이비로 지내면서 얼마나 좋았는지를 친구에게 얘기하면, 그 친구가 슈가베이비로 가입하는 식이다"라고 설명했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 슈가베이비들은 만족감을 드러낸다. 특히 재정적 측면에서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경영학 MBA를 공부중인 애나씨(33·가명)는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나는 낮에는 MBA 학생으로, 밤에는 안마사로 일했다. 그럼에도 슈가베이비 활동이 없었으면 나는 내 월세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에 사는 음대생 크리스틴 모리스씨(24)는 미국 ABC방송에 "한번에 세 가지 일을 해도 학기당 1만 달러(약 1200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불어나는 학자금 대출을 감당할 수 없어 학업을 중단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부분 학생들이 슈가베이비에 들어서는 이유는 학비, 월세 등 재정적 이유와 함께 인턴십 등 직업적 기회다. 미국 언론들도 이처럼 대학생들이 슈가베이비가 되는 현상에 대해 과도한 학비 부담을 이유로 지적한다. SAT와 AP 시험을 주관하는 비영리 단체 '칼리지보드'에 따르면 2013~2014년 사립 비영리 4년제 대학의 학비, 방세 등 평균 비용은 연간 4만917달러(약 4900만원)였다. 공립 4년제 대학의 학비, 방세 등 평균 비용은 연간 1만8391달러(약 2200만원)였다. 학비 부담이 심한 영국, 호주 등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은 2012년 9월 최대 3배 등록금을 인상하면서 학생들의 학비부담이 심각한 수준으로 높아졌다. 영국의 대학 등록금은 연간 9250파운드(1400만원)다. 런던 킹스턴대가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대학 친구 중 섹스 산업에 관련된 일을 하는 학생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4명 중 1명은 "그렇다"고 답했다. 슈가대디-슈가베이비 중개 사이트인 시킹닷컴에 따르면 영국에만 47만5000여명의 슈가베이비가 있으며, 이들 슈가베이비들은 평균적으로 월 2900파운드(약 44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호주도 마찬가지다. 지난 4월22일 호주 ABC와 영국 데일리메일 등에 따르면 호주에는 17만7000여명의 슈가베이비가 있으며, 호주 슈가베이비들은 평균 월간 2900호주달러(약 240만원)를 벌어들인다. 호주 멜버른 모나시대학교에서 유학중인 뉴질랜드인 사만다씨(26)는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해서 연간 6만 호주달러(약 5000만원)를 벌어들였지만, 한달에 1800호주달러(약 150만원)로 월세가 나가고 학기당 8500~1만 호주달러(약 700~820만원)를 등록금으로 내야했다. 그는 이런 경제적 이유가 본인을 슈가베이비가 되게했다고 답했다. 사만다씨는 해외 유학생으로 부담이 더 크긴 했지만, 호주인 대학생들도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슈가베이비에 등록하고 있다. 디킨대, 그리피스대, 맥쿼리대, 모나쉬대 등 호주 명문대학생들의 슈가베이비 등록 증가추세가 매섭다. 하지만 슈가베이비 활동에 대해서는 늘 '성매매'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은 부유한 남성에게 여성성을 판매하는 것이며, 실제 성관계로 나아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뉴욕포스트가 "슈가대디 웹사이트가 여대생들의 성매매를 정당화한다"는 기사를 냈던 이유다. 시킹어레인지먼트 역시 "슈가베이비-슈가대디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은 오롯이 당사자들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성관계가 포함될 수 있다"고 사이트에 언급해뒀다. '성매매 전문가' 멜리사 페리(Melissa Farley) 임상심리학자는 "슈가베이비-슈가대디는 또 다른 형태의 성매매이자, 전형적인 성매매다"라면서 "대부분의 성매매 여성들은 이처럼 인터넷을 통해 성매매에 나선다"고 분석했다. 벨기에는 슈가베이비를 아예 성매매로 규정, 광고한 광고주를 처벌했다. 리치밋뷰티풀 투자자 시거드 베달(Sigurd Vedal)은 벨기에 브뤼셀 내 대학 근처에서 슈가베이비 광고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벨기에 법원에서 2만4000유로(약 3200만원)의 개인적 벌금과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회사 역시 24만 유로(약 3억 20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슈가베이비들은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은 성매매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한다. '슈가베이비' 라일씨(26)는 "나는 매춘부가 아니다"라면서 "나는 오히려 가정에 평안을 주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결혼생활 후 아내가 살이 찌고, 화장을 더 이상 하지 않고, 항상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다면 남편은 이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슈가베이비가 남편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면, 남편은 그 행복한 감정을 통해 아내와 가정에 더 충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 편에서는 슈가베이비 문제가 발생한 근본적 이유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살인적인' 미국 대학 등록금이 미국에 어떤 영향들을 줬는지 살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슈가베이비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5.27 08:06

  • 한 국가 내 세 <strong>나라</strong>… '조지아'의 눈물
    한 국가 내 세 나라… '조지아'의 눈물

    [이재은의 그 나라, 조지아 그리고 인기 휴양지 ②] 2008년 러시아 무력 개입으로 남오세티야·압하지야 분리 독립 선언… 국토 20% 잃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러시아는 과거 소비에트 유니언(소련)으로 전 세계 막강한 영향력을 뽐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호시절'을 그리워하며 끊임 없이 열강을 꿈꾼다. 하지만 러시아 경제는 한국 보다 훨씬 작고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적 규제까지 받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25일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난 것은 이 열망의 한 사례로, '작은 투자'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만나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에 "러시아가 북한을 도울 수 있으니 러시아를 중요 역할로 고려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능력있는 한국, 한반도 넘어 세계 봐야" [2019 키플랫폼]딘 벤자민 청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인터뷰 참고)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 열망에서 비롯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벨라루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등 7개 국가 사이에 위치하고 흑해와 인접해 있다. 이처럼 지정학적 급소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 장악을 위한 치열한 다툼의 무대에서 중심에 서있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강한 러시아의 꿈이 물거품이 된다고 보아 우크라이나를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방과의 전략적 완충 지대로 남겨 놓고자했다. 이런 맥락에서 푸틴 대통령은 2014년 3월 18일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었던 크림 공화국과 합병 조약을 맺었다. '강한 러시아'로 복귀에의 열망은 사실 이전에도 드러났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2008년 조지아에서 벌어진 남오세티야 전쟁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유사한 사례인데, 러시아는 조지아가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후에도 조지아에 영향력을 떨치고 싶어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조지아 영토 내부 분리독립 조짐을 보이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지원했고, 2008년 8월8일 러시아군과 조지아군은 무력 충돌했다. 이 전쟁으로 조지아 영토의 20%에 달하는 지역이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 공화국으로 실질 독립했고, 러시아가 이 부분을 실효 지배하게 됐다. 조지아는 즉각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당시 조지아 외교부는 성명을 내고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요구에도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점령지에서 군사력을 되레 증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고위대표도 조지아 주권과 영토 유지에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러시아군의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주둔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끄덕 없었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한 나라는 러시아를 비롯해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나우루, 시리아 등 5개국뿐이다. 이 같은 조지아-러시아 관계를 통해 조지아의 현재를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조지아에서는 구 소련 시절 러시아어가 사용됐고,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어 사용이 줄어들다가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반러정책이 실시됐다. 하지만 여전히 조지아는 러시아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MIT에 따르면 조지아의 주요 수출국가는 △러시아(3억3000만 달러 교역) △불가리아(3억2600만 달러) △아제르바이잔(2억6100만 달러) △터키(2억2900만 달러) △중국(2억9000만 달러) 등이다. 조지아가 물품을 수입하는 국가는 △터키(1억4000만 달러) △러시아(787만 달러) △중국(757만 달러) △아제르바이잔 (5억 7400만 달러) △우크라이나(451억 달러) 등이다. 즉 러시아는 주요 교역 국가로, 조지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조지아가 늘 불안감에 떨고 있는 이유다. 실제 조지아는 이미 2006년 러시아의 조지아산 와인 수입 금지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바 있었다. 러시아는 조지아산 와인 중 44%에서 살충제가 발견됐다며 2006년 3월말 조지아산 와인 수입을 금했다. 러시아는 조지아 와인 수출의 80~90%를 차지하던 시장이었기에, 조지아에 큰 타격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은 2006년 5월 러시아는 조지아산 생수도 수입을 금했다. 러시아는 "물에 좋지 않은 성분이 들어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조지아는 "러시아의 그늘을 벗어나 친유럽 국가가 되기 위해 2003년 장미혁명을 거쳤고, 친EU(유럽연합), 친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려 러시아가 무역 보복에 나섰다"고 항변했다. 점차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온전한 독립국이 되고자, 조지아는 서구권 국가와 교역을 확대해 경제적 안정을 꾀하고자 한다. 조지아는 최근 세계 17개국과 FTA(자유무역협정)을 맺고 매섭게 시장을 확대 중이다. 다양한 국가로부터 투자 받고 교역을 늘리기 위해 조지아 정부는 규제도 최대한 느슨하게 맞춰준다. 조지아는 사업 친화지수 전세계 6위, 유럽 2위이고 헤리티지재단이 발표한 경제자유지수는 전세계 16위, 유럽에선 8위다. 조지아는 방위권을 확보하고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나토와 EU 가입에도 매달리고 있다. 미국 역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지지한다. 나토 역시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과 크림반도 병합 이후 지난해부터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에 병력 4000여명을 새로 배치하는 등 '동진정책'을 사용해 러시아의 영향력 확장에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조지아의 나토 가입이 쉽지만은 않다. 일부 유럽국가들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는 데 반대하면서 조지아의 가입은 늦춰지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과거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 구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을 나토에 가입시킨 게 결국 러시아의 서쪽 무력 팽창에 명분을 줬다고 본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역시 러시아를 저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에 또 다른 팽창의 명분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양한 외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저력을 보이고 있다. 조지아는 구소련 독립 이후 10%대에 가까운 고성장을 경험했고, 유럽 재정위기 상황에서도 경제성장세를 이어갔으며 2017년에는 4%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인구가 적지만 지리적 특성 덕에 EU, 흑해경제협력기구(BSEC), 중동걸프협력회의(GCC), 독립국가연합(CIS) 등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 잠재력도 매우 높게 점쳐진다. 물론 조지아 외부와 내부에서도 회의적 목소리가 나오긴 한다. 미국에서 운영되는 집단 지성 사이트 쿼라(Quora)에 "조지아가 가진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란 글이 게시됐다. 본인을 조지아인이라고 밝힌 답변자는 "조지아 사회는 현재 극도로 분화돼있다. 조지아 정부는 (EU 가입을 추구하는 등) 서구 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 중이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가치와 견해들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인구의 약 90%가 믿는) 기독교 정교회의 영향력이 매우 큰 조지아에서는, 성직자들이 공공연히 서구 가치에 대한 무지와 증오심을 퍼뜨린다"고 덧붙였다. 그는 "소수자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조장하고, 국가의 포부에 반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게 조지아에 외국인 혐오증이나 동성애 공포증, 여성 차별 사상 등이 퍼져있는 이유다"라면서 "매우 가부장적인 국가 조지아에서는 강간이나 가정폭력이 발생할 경우 여성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도 많다"고 밝혔다. 그는 또 "수도 트빌리시에 모든 게 집중돼있는 점이나, 빈부격차가 심한 점 등도 문제"라고 짚었다. 답변자가 지적한 한계에 더해 높은 빈곤율도 조지아의 한계로 여겨진다. 2014년 세계은행에 따르면 빈곤율은 4년 연속 감소했지만, 여전히 조지아 인구의 3분의 1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조지아의 빈곤층 인구는 32%로, 그중 28%는 어린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세계 빈곤율은 10%로, 조지아는 세계 평균 보다 훨씬 높은 빈곤율을 보이고 있다. 결국 조지아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구 소련 국가'가 아닌, '유럽 국가 중 한 곳'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러시아의 강대국을 향한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꽤나 번영하고 있다. 조지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재은의 그 나라, 미국 그리고 슈가베이비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5.20 06:05

  • '저렴한 스위스', 조지아가 뜬다
    '저렴한 스위스', 조지아가 뜬다

    [이재은의 그 나라, 조지아 그리고 인기 휴양지 ①] 저렴한 물가에 아름다운 풍광… 한국인, 무비자 장기체류 가능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최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럽 여행객들 사이에서 물가 싼 스위스로 불리며 유명해진 곳'이란 제목의 글이 게시됐다. 작성자는 글에서 "유럽 사람들 사이에선 오래 전부터 유명했는데 국내에는 아직 덜 알려졌다"면서 "이번에 여행가려고 찾아보니 근래 들어 국내 여행 다큐에도 많이 나왔고 한국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많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곳은 바로 '조지아'"라면서 "미국에 있는 조지아가 아니라, 유럽·아시아 대륙 사이에 걸쳐져 자리한 국가인데, 구 소련 국가였기에 러시아식 발음인 '그루지야'로 더 많이 불린다"고 덧붙였다. 그는 "스위스에 알프스 산맥이 있다면 조지아에는 코카서스 산맥이 있어서 좋은 풍광을 만날 수 있다"면서 "전통 음식이 맛있고 와인의 발상지"라고 말했다. 때마침 나 역시 조지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있어 해당 글에 눈길이 갔다. 얼마 전 마무카 쎄레텔리 조지아미국비즈니스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어 조지아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고, 또 그에게 조지아의 다양한 매력을 자세히 들었기 때문이다.(☞신시장 찾고 있다면… "조지아로 오세요" [2019 키플랫폼]마무카 쎄레텔리 조지아미국비즈니스협회장 인터뷰 참고) 마무카 협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작성자의 글은 사실 그대로를 담았다. 조지아는 1991년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인구 약 400만명의 작은 나라로, 유럽, 아시아, 중동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 아르메니아, 터키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 코카서스 산맥 근처에 위치한 만큼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여기에 물가가 저렴하고 구 소련 시절 의학 중심지로 알려져있어 의료관광 목적으로 조지아를 찾는 이들이 많다. 주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아르메니아 등 인근 국가 사람들이 의료 관광을 위해 조지아를 찾는다. '조지아 저널'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에만 1만3900명의 외국인이 의료 치료 및 회복 목적으로 조지아를 방문했다. 이는 2017년 같은 기간 보다 61.2% 증가한 수치다. 자연 환경이 좋으니 기후와 토지가 좋아 각종 차, 복숭아, 땅콩, 양파, 면화, 호밀, 멜론, 블루베리, 헤이즐넛, 피칸 등 상업작물도 잘 자란다. 좋은 재료를 가진 만큼 음식 역시 유명하다. 아시아 국가 중엔 태국 요리나 베트남 요리가 유명하듯 조지아 음식 역시 세계적 명성을 가졌다. 특히 러시아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은 대부분이 조지아 전통요리 음식점이다. 예컨대 한국인들이 요즘 자주 찾는 러시아 도시,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최고 평점 음식점은 조지아 음식점인 '수프라'(Supra)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와인 역시 조지아 것이 고급 종류로 여겨진다. 와인 자체가 조지아에서 태동한 음료로, 조지아가 와인의 최초 발생지라는 점은 흑해 연안에서 약 8000년 전의 포도씨가 발견되면서 입증됐다. 오크통에서 숙성하는 일반 와인과 달리, 조지아 와인은 땅에 항아리를 묻어 숙성한다.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무쿠자니(Mukuzani), 밀디아니(Mildiani), 치난달리(Tsinandali), 흐반치카라(Khvanchkara) 등이 대표 브랜드다. 더 좋은 점은 저렴한 가격이다. 좋은 와인도 만원 내외로 구매 가능하다. 조지아의 물가가 싼 덕분에 이 같은 가격이 나올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바구니 물가가 저렴한데 소비자는 △오이 800g 0.39라리(170원) △토마토 700g 1.16라리 (500원) △사과 800g 1.27라리(550원) 등의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지아를 '저발전국'이라며 무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조지아는 잠재력 있는 국가로서, 초고속 발전 중인 나라다. 조지아는 구 소련 독립 이후 10%대에 가까운 고성장을 경험했고, 유럽 재정위기 상황에서도 경제성장세를 이어갔으며 2017년에는 4%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일대 지역 시장 중에서는 가장 높은 잠재력을 보이고 있다. 한국보다 더 발전한 측면도 갖고 있다. 조지아는 디지털경제의 핵심 기술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자본주의인 토큰 이코노미 시대를 열 블록체인 기술에 선도적인 국가다. 이미 10년 전부터 블록체인 기반 공공 서비스를 도입했다. 예컨대 한국에서 사업자 등록을 하는 건 몇 번의 과정을 거치는 등 골치아픈 일이지만, 조지아에서는 모든 일이 한 번에 해결된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거래에도 블록체인을 적용해 불과 30분만에 모든 거래 절차를 마칠 만큼 디지털 경제 확산 속도가 빠르다. 안정적인 치안에 따라 높은 수준의 삶의 질도 보장된다. 2017년 해외 온라인 통계 사이트 넘베오(NUMBEO)에 따르면 전세계 125개국 중 조지아는 범죄지수 20.83, 안전지수 79.17로 안전한 나라 7위다. 나는 조지아를 알게된 순간부터, 언젠가 은퇴한다면 이후 조지아로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은 비자 없이 1년을 통째로 조지아에서 체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음 편에서는 아름다운 인기 휴양지 조지아가 가진 내부적 문제를 짚어본다. 구 소련 독립국으로서 아직까지 러시아와 영토 분쟁 중인 점, 불안정한 정치 상황, 높은 빈곤율 등 다양한 방면에서 조지아를 바라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조지아 그리고 인기 휴양지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5.13 06:30

  • 일본 '국민병', 이젠 한국 '국민병' 될까?
    일본 '국민병', 이젠 한국 '국민병' 될까?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국민병 ②] 일본, 국가적·민간적 노력 통해 당뇨 인구 감소… 한국, 당뇨 환자 지난해 처음으로 300만명 돌파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일본 열도가 변화에 힘쓰고 있다. '국민병'으로 불릴 만큼 열도 전체가 당뇨병(일본인 당뇨병 환자의 약 95%는 2형 당뇨병)으로 신음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변화에 나선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당뇨병 극복을 위해 각종 상품을 내놓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는 당뇨병이 일본의 국민병으로 발전한 데 따른 것이다.(☞옆 나라 일본의 '국민병'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국민병 ①] 참고) 일본 후생노동성이 전국 2만4187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16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인구는 전체의 12.1%인 1000만여명으로, 1997년 690만명 이후 꾸준히 증가 중이다. 여기에 당뇨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거나 이미 당뇨병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는 '예비군' 역시 1000만명으로, 당뇨병을 앓는 것으로 보이는 인구가 총 2000만명으로 거듭났다. 당뇨 인구가 계속 느는 데다가, 당뇨 환자로 인한 국가 전체의 의료비가 증가하자 당국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일본 후생노동성과 각 현은 당뇨병이 비만과 과식, 운동 부족 등이 주요 원인으로 평소의 생활 습관에 기인하고, 또 사전에 당뇨병을 진단해야 당뇨병으로 발전하기 전 손을 쓸 수 있다며 '국민병 탈출'을 목표로 사업을 시행중이다. 특히 후생노동성은 당뇨병이 자각증상 없이 중증화된다는 데 큰 우려를 나타내며 중증화 예방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중증화란 혈당이 높은 상태가 오래 지속돼 눈, 신장 등 모세혈관이 손상되면서 합병증이 발생하는 것을 이른다. 2016년엔 후생노동성과 일본의사회, 당뇨병대책추진회의가 국가 차원의 대책인 '당뇨병 중증화 예방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프로그램에는 △의료기관 미검진자 및 진료 중단자에 대한 진찰 권장, 보건 지도 △통원 환자 중에서 중증화 위험이 높은 환자를 의사가 판단, 개별 보건지도 등이 담겨있다. 이외에도 후생노동성은 △각 현의 의사회와 협력해 중증화 예방 프로그램의 진행 상황과 환자 상황 등을 공유하고, △중증화 예방대책이나 관련 건강진단진찰율이 늘어날 경우엔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각 현도 당뇨병 환자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예시는 히로시마현 쿠레시다. 쿠레시는 당뇨병 중증화의 위험을 가장 선도적으로 인식, 2008년부터 의료비 청구서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이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당뇨병 중증환자 중 투석 직전 단계에 있는 환자에게 통원하는 의료기관과 협력해 개별 보건지도를 제공한다. 개별 보건지도에는 간호사가 직접 연락해 생활 습관 등을 점검하거나, 단백질 위주의 저염식 메뉴 요리 수업을 제공하고, 관련 문서 자료를 배포하는 일 등이 포함된다. '우동현' 별명의 카가와현도 '당뇨병 유병률 3위의 현'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 노력 중이다. 카가와현은 매년 초등학교 4학년생 전원을 대상으로 '혈액 검사'와 '소아 생활 습관병 예방 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어린 나이부터 생활 습관병의 실태를 파악하고, 향후 개선 방안 및 예방 조치를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외에도 나가노현 마츠모토시, 사이타마현, 도쿄도 아다치구 등도 시내 건강보험과 지역의사회, 약사회, 영양사 등이 연초 마다 모여 '환자 증감 검토회'를 연다. 이들은 다 직종간 긴밀한 정보 공유를 통해 당뇨 환자 수와 환자의 상황을 감시하면서 당뇨병 환자 관리에 힘을 기울인다. 국가나 지방단체가 당뇨병 문제가 심각하다고 알리고, 적극적으로 예방·해결 대책에 나선 배경에는 국민이 있었다. 일본 국민은 국가가 행동에 나서기 전 한발짝 먼저 당뇨병 위험성을 인지하고 당질제한식 등으로 식이습관과 생활습관 변화에 나섰다. 2005년 일본 당질제한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베 코우지 의사가 최초로 당질제한식이를 다룬 서적 '주식을 빼면 당뇨병은 좋아진다:당질 제한 다이어트'를 출간했고, 이후에도 관련 서적이 연달아 출간됐다.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식사가 잘못됐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당질(糖質) 제한 다이어트' '당뇨병 피하는 조리법' 등은 모두 일본에서 먼저 나와 인기를 끈 서적이다. 당질제한식이란 당질을 적게 섭취하고, 지방과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해 혈당을 낮추는 식단이다. '당질'이란 탄수화물에서 식이섬유를 제외한 전분과 단맛이 나는 성분(당류)으로 주로 밀가루, 빵, 떡 등의 가공 식품과 곡물류를 뜻하는데 이런 당질을 줄인다면 당뇨의 위험성도 함께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질제한식을 하는 이들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체질을 지방분해가 잘 되는 체질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당질제한식을 장려하는 일본 사단법인 '로카보'에 따르면 일본인은 하루 평균 300g정도의 당질을 섭취하지만 건강을 위해서는 이를 줄여야한다. 로카보협회는 한끼에 당 질량을 20~40g으로 제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일본인은 한끼 식사에서 주먹밥 2개와 야채주스 1잔을 마시는데, 이 경우 100g 정도의 당질이 한번에 섭취된다. 당질이 과다한 상태다. 꾸준히 '국민병' 당뇨병을 앓는 이들이 늘고 관련 인식이 높아지면서, 일본에서는 당질제한식이 인기를 끌었다. 다양한 브랜드에서도 당질제한식을 발매했다. 카레 전문점 코코이치방야는 지난해 12월 당질 제한 카레라이스를 발매했다. 기존 카레라이스 보다 당질이 절반에 불과한 메뉴다. 나가사키짬뽕체인점 링거하트(リンガーハット)는 당질이 30% 적은 컵라면을 발매했다. 패밀리레스토랑 로얄호스트는 저당질 빵을 제공하고 있으며, 가스토(ガスト)와 죠나단(ジョナサン)도 당질 제한 메뉴를 도입했다. 햄버거 체인점 프레쉬니스 버거(フレッシュネスバーガー) 역시 당질 제한 번(빵)을 개발, 모든 햄버거를 당질제한 버거로 바꿀 수 있도록 했다. 편의점 업계도 저당질 식단 도입에 열성적이다. 2013년 세븐일레븐이 '샐러드 치킨' 메뉴를 선보여 웰빙족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은 후, 패밀리마트도 피트니스 회사 RIZAP(라이잡)과 콜라보해 '패마에서 라이잡'이라는 슬로건으로 여러 저당질 식품을 출시했다. 망고 푸딩, 샐러드 치킨바, 초코칩 스콘, 초코칩 케이크 등 제품군도 다양하다. 제일 돋보이는 건 일본 편의점 브랜드 로손이다. 로손은 '탄수화물 제한'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며 로카보 협회와 콜라보했다. 로카보 마크가 달려있으면 당질제한식에 부합하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저당질 빵, 간편식 뿐만 아니라 일반 도시락, 국수 요리 메뉴에도 당질 제한식을 도입, 전국 로손 점포에 출시했다. 이처럼 일본의 당뇨병에 대한 관심은 국가적이고, 전국민적이다. 이 같은 노력을 바탕으로 다행히 당뇨 관련 인구는 그래도 감소 추세에 들어섰다. 당뇨병 환자수 자체는 1997년 690만명에서 2016년 1000만여명으로 꾸준히 증가중이지만, 당뇨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거나 이미 당뇨병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는 '예비군'은 2007년 1320만명을 정점으로 2012년 1100만명, 2016년 1000만명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일본이 이렇게 당뇨병 측면에서 앞서가는 사이, 한국은 어떠할까? 한국은 상대적으로 당뇨병 문제를 큰 문제로 보지 않고 있는 듯 하다. 탄수화물 중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기도 하다. (☞기사 '떡볶이+핫도그 토핑' 죽이는 맛, 몸은 죽을 맛 참고) 그 사이 한국의 당뇨 인구는 늘어만 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당뇨병 환자는 302만8128명이었다. 처음으로 당뇨병 환자가 300만명을 넘어선 것이다. 일본이 1990년대부터 당뇨병 문제를 인식하고 2000년대부터 국가적 차원의 변화에 나섰듯, 우리도 변화를 꾀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당뇨병은 우리 '국민병'으로 거듭날지도 모르겠다.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5.06 06:00

  • 옆 <strong>나라</strong> 일본의 '국민병'
    나라 일본의 '국민병'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국민병 ①] 일본 당뇨 인구 2000만명 시대… 탄수화물 섭취량 높은 식단이 문제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일본이 병에 걸렸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도 생활 습관과 사회 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며 "생활습관을 바꾸라"고 호소했다. "과체중자와 비만 인구는 체중을 줄여야하고 다른 국민 역시 신체 활동을 늘려야한다"는 것이다. 연일 신문에서도 '국민병'이라며 늘어난 환자수를 우려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일본 후생노동성이 전국 2만4187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16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 이 병을 앓고 있는 인구는 전체의 12.1%인 1000만여명으로, 1997년 690만명 이후 꾸준히 증가 중이다. 여기에 이 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거나 이미 병으로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는 '예비군' 역시 1000만명으로, 이 병을 앓는 것으로 보이는 인구가 총 2000만명으로 거듭났다. 이 병은 당뇨병(일본인 당뇨병 환자의 약 95%는 2형 당뇨병)이다. 이중 10%만 유전에 따른 것이고 90%는 식습관 및 운동부족에 따른 것인 만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짚어보고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도 이뤄지고 있다. ◇당뇨병에 취약한 아시아인 인종적 특성… 일본인 당뇨병 낳았다 탄수화물은 단백질·지방과 함께 우리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3대 영양소로, 일반적으로 섭취하는 에너지의 50~60%를 탄수화물에서 얻는 것이 이상적이다. 일본 후생노동성도 하루 섭취 영양분 중 50~70%를 탄수화물에서 섭취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탄수화물 섭취는 인슐린 과다분비로 생리현상에 불균형을 낳는다. 인슐린은 혈중 포도당을 세포 속에 흡수시켜 에너지원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이지만 과도하게 분비될 경우 사용 후 남은 포도당을 체지방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결국 탄수화물 중독은 비만·당뇨·고혈압·뇌졸중·심장병 등 대사증후군성 질환으로 연결된다. 일본인의 경우 기본적으로 흰쌀밥을 주식으로 먹는 데다가 빵이나 면류 등 밀가루 음식을 간식으로 즐긴다. 여기에 음료수나 쿠키, 사탕, 빙과류 등 설탕이 들어있는 다른 탄수화물 공급원을 추가로 섭취해 탄수화물을 과다섭취하기 쉽다. 특히 설탕은 탄수화물 이외 영양소가 거의 포함돼있지 않아, 세계보건기구(WHO)는 하루 설탕 섭취를 에너지의 5% 미만(약 24g)으로 줄일 것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의 설탕 섭취는 과다한 상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따르면 일본인이 하루에 섭취하는 설탕의 양은 하루 69g으로, 농림수산성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의 성인 하루 필요 에너지 섭취량(2200kcal)의 17.25 %에 해당한다. 이 같은 일본인의 식습관은 아시아인의 인종적 특성과 합쳐져 당뇨병을 국민병으로 발전시켰다. 2012년 미국 하버드대 의대 채닝 연구소와 브리검 여성병원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미 섭취량이 많지 않은 호주인과 미국인보다 섭취량이 많은 중국인과 일본인에게서 제2형 당뇨 발병률이 더 높게 나타났다. 아시아인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백미를 섭취하기 때문에 다른 탄수화물 공급원을 추가로 섭취한다면 서양인들보다 제2형 당뇨 발병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아시아인은 인종적으로도 당뇨병에 취약하다. 아시아인은 근육이 적고 복부지방이 많아 인슐린 저항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슐린 저항성이란 혈당을 낮추는 호르몬인 인슐린에 대한 몸의 반응이 감소해 근육 및 지방세포가 포도당을 잘 저장하지 못하게돼 고혈당이 유지되고, 이를 극복하고자 더욱 많은 인슐린이 분비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에 따라 아시아인은 BMI지수가 낮더라도 당뇨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2013년 국제당뇨병연맹(IDF)에 따르면 전세계 약 3억8200만명의 당뇨병 환자 중 60% 이상이 아시아에 거주한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등 아시안의 당뇨병 유병률과 백인간의 유병률은 약 2배가 차이난다.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남아시아 여성은 당뇨병 빈도가 27.5%, 남아시아 남성은 26.7%, 백인 여성은 2.9%, 백인 남성은 5.9%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탄수화물에 빠진 일본 일본인의 탄수화물 사랑은 익히 알려져있다. 일본인은 흰 쌀밥에 우메보시(梅干し·매실장아찌)나 명란젓 등 짠 반찬을 즐겨 먹는다. 반찬을 짜게 먹을 경우 흰쌀밥을 더 많이 먹게되고, 혈압도 높아져 당뇨병이 발생하기 쉽다. 별도의 반찬 없이 흰 밥에 후리카케(ふりかけ·어분(魚粉)·김·깨·소금 등을 섞어 만든 가루 모양의 식품)를 뿌려 먹거나, 오챠즈케(お茶漬け·쌀밥에 녹차와 가쓰오부시 다시를 부어 먹는 음식)을 즐겨 먹기도 한다. 우동, 소바, 라멘 등 탄수화물 지수(GI지수)가 높은 면 요리도 일본인이 사랑하는 음식이며 감자가 들어있는 고로케빵이나, 야끼소바빵(빵에 야끼소바가 들어있는 것)처럼 탄수화물이 거듭 들어있는 식품도 인기다. 이 같은 탄수화물 사랑이 당뇨병 유병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게 일본 내 중론이다. 예컨대 '달콤한 간장'이 특산품으로, 음식이 달콤한 것으로 유명한 가고시마현은 당뇨병 유병률 5위다. 타카미네 카즈노리 가고시마대 농학부 교수는 "가고시마현민은 '달콤함'을 맛있다고 생각하고, 이게 음식문화로 뿌리내려있다"면서도 이 같은 음식 문화가 당뇨병 발병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일본 내 밀가루 소비량 최대인 지역으로, '우동현'이라는 별명을 가진 카가와현 역시 당뇨병 유병률 3위의 현이다. 카가와현에만 우동집이 600개가 있을 정도로 우동 소비율이 높은데, 이 같은 '우동'과 여타의 탄수화물 소비가 당뇨병의 이유로 지목됐다. 2016년 일본 뉴스24는 "'우동현' 카가와현의 당뇨병 사망률이 높은 원인은 우동 과식"이라면서 "카가와현민은 우동과 함께 주먹밥이나 유부초밥을 섭취한다"고 보도했다. 즉 과도한 탄수화물 섭취 문제가 카가와현의 당뇨병을 낳았다는 것이다. 쿠리야마 당뇨병 전문의는 이에 대해 "국수나 밥, 빵 등 이중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할 경우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증가한다"고 설명했다. 짜게 먹는 식습관과 적은 운동량도 당뇨병에 영향을 끼쳤다. 히로사키 대학 의학과 시게유기 교수는 아오모리현이 당뇨병으로 인한 사망률 1위인 데 대해 아오모리현 특유의 '짠 식습관'과 '적은 운동량'이 문제라고 밝혔다. 아오모리현은 주로 자동차로 이동하는 문화이고 연중 눈이 쌓여있어 운동이 적은 것도 당뇨병 유병률에 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일본 정부, '국민병' 고치려 팔 걷어부쳤다 당뇨 인구가 계속 느는 데다가, 당뇨 환자로 인한 국가 전체의 의료비가 증가하자 당국도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일본투석학회에 따르면, 1983년 5만 3017명이던 투석환자는 2016년 32만9609명까지 증가했다. 이중 약 40%가 당뇨병성 환자다. 인공 투석 관련 의료비는 1인당 한달에 약 40만엔(400만원)으로, 연간 1조 6000억엔에 달해 일본 총 의료비의 약 4%를 차지한다. 일본 후생노동성과 각 현은 당뇨병이 비만과 과식, 운동 부족 등이 주요 원인으로 평소의 생활 습관에 기인하고, 또 사전에 당뇨병을 진단해야 당뇨병으로 발전하기 전 손을 쓸 수 있다며 '국민병 탈출'을 목표로 사업을 시행중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통해 국민병 극복 노력을 하고 있을까? 일본은 국가적, 민간적 차원 모두에서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한국 역시 일본과 그리 다른 상황이 아닌 데도 강 건너 불 구경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일본의 국민병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살펴보고 우리가 배울 것이 없을지 짚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국민병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4.29 06:30

  • "사랑해, 자기야"… 오명 쓴 '사기의 <strong>나라</strong>'
    "사랑해, 자기야"… 오명 쓴 '사기의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지역강국 ③] '나이지리아 사기'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사기 만연… 무역 사기부터 로맨스 스캠까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자기야, 이제 한국에서 같이 살고 싶어. 미군 파병 중 받은 포상금 보낼 테니 운송료 보내줘." "호텔에 미리 전화해 내 카드로 숙박비와 체류비를 함께 결제해둘 테니 따로 체류비를 계좌로 보내줘." 지난 2일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나이지리아인 A씨(40) 등 7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2017년 8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약 1년간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등을 통해 한국인에게 접근, 약 14억원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사기 수법은 '로맨스 스캠'이라 불린다. 로맨스 스캠은 로맨스(Romance)와 신종 사기(Scam)이 합쳐진 용어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해 신분 등을 속여 신뢰를 쌓은 뒤 연애·결혼 등을 빙자해 각종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로맨스 스캠은 어디에 속하고 싶은 심리, 외로운 심리 등을 이용해 중·장년층에서 주로 발생하며, 스캠네트워크라는 국제 범죄조직에 뿌리를 두고 이뤄진다. 스캠네트워크는 나이지리아를 비롯 서아프리카 지역에 본부를 두고 한국·중국·홍콩 등에서 활동한다. 나이지리아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국내에도 영어 사용 가능 인구가 늘어나면서 범죄의 주 타겟이 됐다. 로맨스 스캠이 최신형이긴 하지만, 이 같은 사기 형태는 새로운 게 아니다. 이미 전세계는 '나이지리아발(發) 사기'에 익숙해져있다. 나이지리아 사기 혹은 나이지리아 편지, 나이지리아 419 등의 용어가 세계 각국 사전에 등록돼있을 정도다. '나이지리아 사기'(나이지리아 선급금 사기, Advanced Fee Fraud·AFF)는 1990년대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확산된 사기 수법으로, 기업이나 개인을 대상으로 영문으로 된 편지·팩스·이메일 등을 통해 사기성 메시지를 송달한 뒤 돈을 받아내는 방식이다. 주로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누구나 한 번쯤은 이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받아본 적 있을 것이다. "나는 매우 돈 많은 정치인·부호의 유산상속자인데, 정부의 눈을 피해 비자금을 옮겨야한다. 하지만 감시가 삼엄해 우리가 직접 손을 쓰면 덜미를 잡힐 것이다. 만일 이 메일을 읽는 당신이 우릴 도와서 비자금을 옮기는 비용을 대신 내준다면, 우리가 받을 유산 중 일부를 수수료로 제공하겠다" 등이다. 무역 사기도 유사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중앙은행(CBN)이나 석유개발공사(NNPC) 임원을 사칭하고 지하자금이나 불법자금을 관리, 세탁해 줄 경우 상당한 수수료를 지급한다고 기업인들을 유인한 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돈을 탈취해 가는 방법이다. 이외에도 무역 사기의 방법으로 일종의 '가짜 주문'도 자주 이뤄졌다. 높은 구매단가를 제시하면서 처음엔 사전송금 등 좋은 조건의 결제방식을 제시했다가 중간에 부득이한 사정이 발생했다고 하면서 물품 선적 후 선하증권(Bill of Lading)을 보내주면 전신환(Telegraphic Transfer)으로 대금을 결제하겠다며 결제방식을 바꾼 뒤 결국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물건만 떼어먹는 수법이다. 또 신용장 사기(신용장 위조) 수법이나 물품의 대량 샘플 요구 후 실제 거래는 하지 않고 샘플만 다른 시장에 팔아먹는 수법 등도 자주 사용됐다. 이같은 나이지리아발 사기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면서, 각국 대사관과 관계기관은 419에 대한 경보를 발동시키며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미국 FBI(미국 연방수사국) 홈페이지에도 '나이지리아 편지' '나이지리아 419'라는 용어와 함께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적혀있다. 419라는 건 나이지리아 형법 419조를 가리킨다. 나이지리아 형법 419조는 나이지리아 사기를 언급한 형법 조항으로, 1995년 4월 대통령 칙령 13호 발효로 개정 및 확장된 '선급금사기죄(AFF) 및 기타 사기성범죄에 대한 칙령'이다. 미국이 1992년 나이지리아 사기를 이처럼 명명하면서 이후 '419 사기' '나이지리아 419' 등으로 불렸다.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도 피해 사례가 속출했다. 특히 IMF 금융위기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1997년 말, 절박한 심정을 자극한 사기 피해가 이어졌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린 기업이 큰 물량의 수입 오더에 희망을 걸면서다. 당시만해도 '나이지리아 419'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도 했다. 1998년 KOTRA 라고스(Lagos) 무역관장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무역관에는 한국인들로부터 매달 2~3회 정도 사기여부 확인요청 전화가 걸려왔다. 대기업이었던 아시아자동차, S물산 등도 국제무역사기 희생양이 됐다고 한다. 업계에선 "한국은 국제무역사기의 봉"이라는 자책도 나왔다. 이후 범죄의 주체는 가나, 카메룬, 베냉 등 경제적으로 낙후된 서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로맨스 스캠'으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는 어쩌다 '사기의 나라'가 됐을까. 아페 아도가메(Afe Adogame) 영국 에딘버러 대학 교수는 "1970년대 후반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경제·사회·정치적 격동과 불안정이 나이지리아에서 사기성 책략을 출현하게 했고 이를 강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즉 1973년 1차 오일쇼크에 이어 1978~1981년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나이지리아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사기 행각이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됐다는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인해 원유값이 치솟으면서 이전까지 페르시아만 연안의 석유에 주로 의존하던 나라들은 나이지리아 등으로 원유수입처를 다변화했다. 이때부터 나이지리아에 막대한 오일 달러가 대량 유입됐다. 특히 2차 오일쇼크 직후인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대량 유입되는 달러로 인해 타국으로부터 나이지리아로의 물품수입이 급증했다. 자연히 나이지리아 당국이 수입절차상 필요사항을 허가하는 일도 많아졌다. 문제는 당시 나이지리아가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이후 군사정권이 지속되면서 사회체계가 부패하고 불합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권한남용이 발생했는데, 담당 공무원은 허가권을 남용해 상시적으로 뇌물을 수수했다. 일각에선 이 뇌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사기 행각이 시작됐다고 본다. 1980년대 초 석유 가격의 변화도 나이지리아에 사기 행각이 만연케하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 초 유가가 하락하자 나이지리아 경제 역시 휘청였다. 다수의 대학생들이 취업에 실패했고, 이들이 당시 나이지리아를 방문했던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사기 행각을 한 게 시초다. 내전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떨어진 신뢰의 가치 역시 사기가 만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이지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내전은 1967년~1970년 사이에 일어난 '비아프라 전쟁'이다. 1966년 하우사족 출신의 야쿠부 고원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여기에 반발한 이보족이 동부 지역을 '비아프라 공화국' 이라는 이름으로 분리 독립 선언하며 벌어진 전쟁이다. 소련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군이 비아프라를 함락하면서, 1970년 비아프라는 무너졌지만 이 같은 내전 하 주민들은 살인, 절도, 강간과 같은 범죄에 노출돼 안보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했다. 국제개발협력 전문가 배기현은 "내전에 따른 공포로 신뢰와 협력의 가치는 실종되고, 심각한 사회 자본의 변형을 경험하게 된다"면서 "언제라도 내전이 재발할 수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사회성을 황폐하게 만들면서, 정직 보다는 염탐과 사기를, 공정한 교류 보다는 약탈과 폭력이 단기적으로 쉽고 유리하게 평가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현재 나이지리아는 명실상부 서아프리카 '지역 강국'으로서, 2050년엔 세계 경제순위 14위 경제강국이 될 것으로 점쳐진다. (☞'나만 모르는' 2050년 경제강국… 의외의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지역강국 ①]) 그렇다면 2020년을 목전에 앞둔 현재, 나이지리아는 '사기의 나라'라는 오명을 벗어 던졌을까? 안타깝게도 나이지리아를 향한 의심쩍은 시선은 그대로다. 극성인 로맨스 스캠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역 사기 역시 끊이지 않고 있어서다. 2016년 당시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이던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KOTRA의 '최근 3년간 우리 기업의 무역사기 현황'을 토대로 "나이지리아에서 100건의 무역사기가 발생했다"며 "이 국가와 무역할 때 각별하게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오명 때문에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KOTRA 관계자는 "대다수의 나이지리아 바이어들은 일부 몰지각한 나이지리아 악덕업체들의 무역사기 사건으로 인해 세계 시장에서 나이지리아가 나쁜 평판을 얻게 돼 자신들의 비즈니스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초래되고 선의의 피해를 입게 된데 대해 매우 분개하며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나이지리아의 무역사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비상식적인 유혹에 현혹되지 말아야 하며,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경우에는 KOTRA 라고스 무역관의 '해외시장 조사대행-단순 해외현장 확인정보' 서비스를 통해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나이지리아는 '사기의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을까. 나이지리아가 매년 8~9% GDP 성장률을 보이며 저력을 보이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기대를 걸어봐도 괜찮겠다. 물론 그러려면 나이지리아 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범죄 조직을 소탕하고, 석유로 얻은 이익이 고르게 배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국내외 투자사기의 유형과 대책에 관한 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황지태·박정선·양승돈 나이지리아 무역사기 사례모음, KOTRA 라고스 한국무역관 개발도상국의 유형별 신뢰 수준이 삶의 만족에 미치는 영향, 성균관대, 정혜린 나이지리아인의 인터넷 사기의 유형, 주 나이지리아 대사관 분쟁 후 사회건설: 여성화된 빈곤과 공포의 극복과 개발협력 과제, 제1회 국제개발협력 논문공모 수상 논문집, 배기현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국민병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4.22 06:00

  • 잘 살고 못 살고, 갈림길에 선 <strong>나라</strong>
    잘 살고 못 살고, 갈림길에 선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지역강국 ②] '네덜란드병' 나이지리아, 소수민족 편 아닌 다국적 석유회사 편에 서면서 민족간 갈등 겪어… "산업 다변화해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1959년 네덜란드 흐로닝언 주 앞 북해에서 다량의 가스전이 발견됐다. 유럽연합(EU) 전체에 매장된 천연가스 매장량의 25%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네덜란드는 환호했다. 천연가스가 샘솟아 자원부국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이후 네덜란드는 천연가스 수출로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상과 달리 경제성장률은 자꾸만 꼬꾸라졌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천연가스를 제외한 다른 네덜란드 산업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천연가스 수출 대금이 유입되자 급격히 늘어난 외화의 유입으로 굴덴화(네덜란드 화폐)의 가치가 크게 올랐고 물가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물가가 오르니 노조는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기업은 조금밖에 올려줄 수 없다며 맞섰고, 사회불안이 커졌다. 기업이 투자를 머뭇거리게 되며 제조업 등 산업의 파국이 시작됐다. 동시에 비싼 물가로 소비자의 수입수요가 증가하면서, 내수 산업의 몰락 추세가 더욱 거세졌다. 이후 1977년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네덜란드병'이라는 용어가 실리면서 한 나라가 자원개발에 의존해 급성장할 경우,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찍는 현상을 '네덜란드병'이라고 지칭하게 됐다. 이처럼 자원이 풍부한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오히려 자원이 부족한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저조한 현상을 '자원의 저주'라고 부른다. 미국 외교협회(CFR)의 남미 전문 칼럼니스트 로시오 카라 라브라도르는 베네수엘라가 경제적 파국을 맞은 이유도 '네덜란드병'이라고 분석했다. 수출의 96%를 오일머니에 의존하던 베네수엘라는 2014년 유가폭락으로 경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IMF에 따르면 2016년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은 475%였고, 2021년엔 4500%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2011년 1만238달러였던 1인당 GDP는 지난해 3168달러로 추락했다. 2020년엔 2000여달러로 예상된다. 이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한달치 월급을 모아도 빵 하나 사기가 어렵다. 지난해 2월21일 베네수엘라 3개 주요 대학의 연구 결과 베네수엘라 국민 75%는 2017년 한 해 동안 체중이 평균 11㎏ 줄었다. 응답자의 60%는 "지난 3개월 동안 식량을 사기에 충분한 돈을 가지지 못해 배가 고팠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정부 세금의 70%를 외국 석유 회사가 내고 있고, 수출의 90% 이상이 석유인 나이지리아는 어떨까. 1960년대 독립 당시 많은 인구와 풍부한 자원으로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큰 기대를 받았었다. 인구가 많으니 중산층 수도 많아 4000만명에 이르는 중산층이 탄탄한 내수시장 구축에 도움을 줬다. IMF에 따르면 2008년 나이지리아는 9%, 2011년엔 8% 성장하는 등 매년 8~9% 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경제규모가 가장 큰 나라로 자리잡았다. (☞'나만 모르는' 2050년 경제강국… 의외의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지역강국 ①] 참고) 하지만 나이지리아 역시 네덜란드병을 앓고있다는 회의적 시각이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나이지리아에게 '지역 강국'은 꿈일 뿐인 이야기라고 추측한다. 현재 갖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잠재력 있는 국가'로만 남을 것이라고 본다. 이 지적이 틀린 것만 같지는 않다. 나이지리아는 빈부격차가 매우 심해 빈민층 인구수가 1억명을 넘는다. 분명 석유가 터지는 나라인데 말이다. 김예슬은 '나이지리아 국가실패의 배경에 대한 연구'에서 △다국적 기업 △나이지리아 사회 내부의 다종족·다종교 문제 △나이지리아에 만연한 부정부패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즉 '국가실패'로까지 보이는 나이지리아가 이 같은 이슈에 잘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자원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나이지리아는 '미완의 잠재력'으로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이지리아 인구의 절반은 기독교를, 나머지 절반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 종교 갈등이 첨예하다. 언어별로 분류할 경우 무려 250개의 민족이 살고 있어 민족간 이해관계도 첨예하다. 특히 라고스를 제외한 북부·동부·서부·중서부의 옛 4개주에는 주요 4개 부족이 살고 있는데, 석유는 이곳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니제르 델타 지방에 90% 이상 집중매장돼있었다. 민족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나이지리아 정부가 자원으로부터의 이권을 분배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이지리아 정부는 이 같은 조정 역할에 실패했고, 이는 나이지리아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주요 원인이 됐다. 김예슬은 "니제르 델타 지방에 집중 매장된 원유 생산은 이 이익을 얻기 위한 다종족들간 민족 분쟁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켰다"면서 "나이지리아 정부는 이를 중재하기 보다는 다국적 기업과 연대,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며 다수의 소수민족을 자원의 혜택으로부터 소외시켰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로 인해 내전이라는 국가 운영 실패의 전형적인 결과가 나타났고 국가의 경제 발전에도 커다란 걸림돌이 됐다"고 덧붙였다. 나이지리아가 어떻게 소수민족의 편이 아닌, 다국적 석유회사의 편에 섰는지는 니제르델타 지역의 오고니랜드에 거주했던 인구 50만명의 소수민족, 오고니족 이야기에 잘 나타난다. 1950~1960년대까지만해도 나이지리아는 세계 최대 코코아 수출국으로서 여타의 농업 작물도 많이 경작했다. 하지만 1956년 석유가 발견된 뒤, 급격히 석유위주로 국가 산업이 재편됐다. 오고니족이 살고 있던 오고니랜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니제르델타 남동쪽에 위치한 오고니랜드에서는 오고니족이 대대로 코코아, 고무, 면, 땅콩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1957년 오고니랜드에서 상업성 높은 석유가 발견되면서, 쉘(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과 쉐브론(Chevron Corporation) 등 다국적 석유회사들이 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오고니족 등 소수민족 편이 아니라, 다국적 석유회사의 편이었다. 나이지리아의 권력층은 장기간 군부 정권의 집권을 바탕으로 했는데, 이들은 다국적 기업과의 합작계약 등을 통해 높은 유가에 따른 수출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지리아 정부의 정책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그 이익을 '빼앗는 데' 초점이 있었다. 1979년 나이지리아 헌법개정안에는 "연방정부는 모든 나이지리아 영토에 소유권을 가지며, 땅값은 취득 당시 토지에 있는 작물의 가치로 보상을 끝낸다"고 적혀있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나이지리아 정부는 이렇게 획득한 땅을 석유회사들에게 나눠줬다"고 주장했다. 오고니족 역시 "나이지리아 정부와 석유 회사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땅을 포기하라고 강요해왔다"고 항변해왔다. 순식간에 오고니족은 경작하던 땅을 빼앗기고, 대대로 해왔던 농사일도 하지 못하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석유 작업 도중 유출된 기름 때문에 땅도 오염돼갔다.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됐고, 뻘 바다 어족자원도 씨가 말랐다. 공동 우물에서 석유냄새가 나며 마실 물도 없어졌다. 식량은 부족해졌지만 물가는 상승했다. 참다못한 오고니족은 1990년, 민족 출신 유명 작가 켄 사로위와를 대표로 '오고니족생존운동'(MOSOP)을 창설했다. 부족은 △오염 실태를 조사하고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 △원유 개발이익을 주민에게 분배하라 △부족 자치권을 보장하라 등의 생존권 요구를 담은 오고니 권리장전을 제정했다. 이들은 나이지리아 소수부족 인권연대기구(UNPO)와 더불어 평화 집회 및 시위를 벌였다. 1993년 1월 평화행진에는 부족 성인 전부인 30만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여기서 나이지리아 정부는 가히 재앙적인 태도를 취했다. 소수민족이 아닌 다국적기업의 편에 선 것이다. 1995년 11월, 켄 사로위와를 비롯 9명의 원주민운동가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메이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 전세계는 이 사형을 "사법적 살인"이라고 비난했지만 나이지리아 정부는 듣지 않았다. 켄 사로위와는 죽기 전 "나는 셸이 델타에서 벌인 생태계 범죄가 곧 정당한 처벌을 받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예언이 통한 건지, 이제 세계는 셸을 켄 사로위와의 죽음을 야기한 주범으로 지목한다. 셸은 2009년 나이지리아 군부세력과 손잡고 반정부 환경 운동가 켄 사로위와를 탄압, 사형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로 미국의 뉴욕 법정에 섰고, 유족 측에 1550만달러(약 196억원)를 보상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나아가 세계는 오고니랜드를 파괴한 주범 역시 셸이라며 이를 인정하고 보상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2017년 11월 국제 인권운동단체 앰네스티는 오고니랜드에서 군부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 사건에 셸이 연루돼 있다며 수사를 촉구했다. 이어 "살인, 강간, 고문에 셸이 가담했다는 증거도 있다"며 "목격자들의 진술서에 따르면 셸은 나이지리아 주 보안기관으로부터 훈련받은 잠복 경찰 조직을 운영했다. 나이지리아 정부 역시 셸의 편이었다. 1993년 4월30일 MOSOP가 셸의 새로운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을 반대하는 시위를 할 때 정부 수비병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눠, 11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당시 군경의 뒤따른 반발로 약 1000명이 사망하고, 3만명이 집을 잃었으며, 마을이 파괴됐다. 그럼에도 셸은 1993년 작업량을 늘리기 위해 파이프라인 공사를 시작했고, 시추작업 중단 이후에도 시설이나 장비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채 방치했다. 환경단체는 파이프라인 공사를 시작으로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장비나 송유시설이 광범위한 오염을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영국 가디언도 수 천 개의 기업 내부문서와 목격자들의 증언을 검토한 결과 1990년대 석유 생산지역인 오고니랜드에서 시위자들을 침묵시키는 잔인한 작전에 셸이 연루돼 있었다고 보도했다. 소수민족 대신 쉘, 엑손모빌, 쉐브론텍사코, 토탈, 아지프 등 다국적 석유회사의 손을 잡은 나이지리아 정부. 그렇다면 이들의 바람대로 나이지리아는 이들과 함께 순항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이지리아에선 농업 등 기존 산업이 무너지고 석유 산업만이 주를 이루게 됐는데, 다국적 석유 기업은 자사의 기술과 노하우 등을 나이지리아 국내 기업과 공유하거나 이를 제공하지 않고 배타적 독점을 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의 규모와 자산, 경영전략 등도 국내 기업에 비해 월등해 나이지리아 국내 기업이 성장할 틈이 없다. '라틴아메리카 구조주의' 경제학자 푸르타도(C.Furtado)에 따르면 다국적 석유회사는 자본집약적이고 노동절약적인 기술을 사용했기에 딱히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나이지리아는 '신식민주의'라고 불리는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결국 국민의 편에 설 수 있을까. 다행히 나이지리아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좀 더 근본적인 변화와 국가 발전전략 마련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조나단 굿럭 대통령(임기 2010년5월~2015년5월)은 스스로를 '농부의 대통령'이라 칭할 만큼, 농업 등 타 산업 육성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다면서 육성에 치중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재정장관 엔고지 오콘조-이웨알라도 "정부는 지금이 석유의존적인 경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업 구조 개편과 발전 토대 마련 이외에도, 나이지리아가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해야할 노력들은 산적해있다. 다음 편에서는 나이지리아가 강국으로 나아가기위해서 꼭 극복해야할, '사기'에 대해 짚어본다. 사람들이 왜 나이지리아를 '사기꾼의 나라'라고 부르는지, 나이지리아에 만연한 사기를 토대로 말이다. 참고문헌 나이지리아 '국가실패'의 배경에 관한 연구, 숙명여대, 김예슬 나이지리아 그림자경제에 대한 탐색적 연구, 부산대, 김준수 개발도상국의 도시빈곤과 KOICA의 도시개발 원조사업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 방설아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4.15 06:00

  • '나만 모르는' 2050년 경제강국… 의외의 <strong>나라</strong>?
    '나만 모르는' 2050년 경제강국… 의외의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지역강국 ①] 매년 8~9% 괄목적 경제성장… 서아프리카 지역강국 나이지리아, 최근 '지역권력' 잃고있다는 지적 받기도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얼마 전 독일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발단은 독일인 아주머니의 질문이었다. 그는 대화하던 중 내게 "그런데 어느 나라 사람이랬죠?"라고 질문했다. 내가 한국이라고 답하자 그는 "그게 어디냐"고 되물었다. 한국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내가 "서울이 수도인 나라" "북한과 분단 상태인 나라" "삼성·LG·현대의 나라" 등 다양한 설명을 해봤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그 뒤의 말은 더 황당했다. 그는 내게 "너희 나라에서는 안전하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냐"고 묻고, "지하철도 있냐"고 물었다. '대체 한국을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는 거지?'란 생각에 억울한 심정까지 들었다. 때마침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이 국민소득·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을 △미국 △한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스페인 △호주 등과 함께 전세계 10대 선진국으로 꼽았단 소식을 들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지내다가, 문득 예전에 본 예능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한 예능인은 2017년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나 출신 예능인 샘 오취리를 향해 "가나에도 TV가 있냐"거나 "공중파·케이블 방송국이 있냐" "지하철도 다니냐" 등의 무례한 질문을 쏟아냈다. 해당 예능인은 방송 이후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비판한 이들이 국가 가나라든가, 혹은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잘 알고 있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선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나이지리아 △이집트 △케냐 △에티오피아 등이 지역강국(Regional power)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이들이 어떤 국가인지, 얼마나 발전했는지,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독일인 아주머니만 탓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국가들도 모두 흥미로운 지점을 지니고 있지만, 나이지리아는 특히 흥미롭다. 나이지리아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제규모가 큰 국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7년 나이지리아의 국내총생산(GDP)은 3757억7071만3742.8달러로 세계31위다. 이는 아프리카의 강국 남아공 보다도 큰 경제규모다. 같은 해 남아공은 3494억1934만3614.1달러의 GDP로 세계33위를 기록했다. 나이지리아의 경제규모가 이토록 큰 건 어마어마한 인구수 덕이다. '아프리카의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이자 세계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다. 특히 청년 인구는 3900만명으로, 인도와 중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많다. 높은 청년 인구수와 여타의 성장 잠재력 덕에 나이지리아는 앞으로 수십년 안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국이 될 것으로 점쳐진다. 2011년 2월 씨티그룹은 "나이지리아는 2010~205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GDP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IMF에 따르면 2008년 나이지리아는 9%, 2011년엔 8% 성장하는 등 매년 8~9% 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다. 회계컨설팅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도 "나이지리아는 2050년 세계 GDP 순위 14위의 국가로 매우 괄목적인 성장을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PwC에 따르면 2050년 나이지리아는 중국, 인도, 미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 이어 14위 GDP(PPP기준)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PwC는 한국이 2016년 13위에서 2050년 18위로, 이탈리아는 12위에서 21위로, 캐나다는 17위에서 22위로, 스페인은 16위에서 26위로, 호주는 19위에서 28위로 밀려날 것으로 예상했다. 풍부한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한 경제 성장률에, 월등한 경제규모까지 더해지며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전통적인 '지역강국'(Regional power)으로 꼽혀왔다. 지역강국이란 특정 지역에서 정치·군사·경제 부문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를 말한다. 미국이나 중국은 지역 강국이면서 동시에 강대국 혹은 초강대국인 국가이며, 인도네시아나 호주는 지역 강국이지만 대륙 자체가 전반적으로 국력이 작아, 국제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국가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후자에 속한다. 수십년간 나이지리아가 아프리카 대륙의 지역강국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최근 몇년 사이 회의적 시각이 빈발하고 있다. 아프리카권 언론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엔 '아직도 나이지리아를 지역강국이라 부를 수 있냐'는 내용의 글이 자주 올라온다. 꾸준한 경제 성장세에, 장밋빛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 나이지리아에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나이지리아가 보코하람(Boko Haram)수습에 사실상 실패했기 때문이다. 보코하람은 2002년 설립돼 2009년부터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을 목표로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군사 도발에 나선 이슬람 무장단체다. 국제사회엔 2014년 4월 나이지리아 동북부 도시인 치복의 한 학교를 급습, 여학생 276명을 납치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올루솔라 오구누비(Olusola Ogunnubi) 남아공 줄루랜드대학교 정치학 교수는 남아공 정치학회지 폴리티콘에 '실패한 지역강국? 보코하람의 진행과 나이지리아의 국제위상'이라는 글을 기고해 "이어진 보코하람 활동 결과, 나이지리아의 지역강국 지위는 약화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 이유로 나이지리아가 지역강국의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며 "나이지리아는 보코하람과 싸우기위해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많이 의지해왔다. 아주 작은 국가들에게까지 말이다"라고 말했다. 나이지리아는 보코하람에 속수무책이다. 2009년부터 보코하람의 공격으로 2만여명이 살해됐지만, 보코하람의 테러는 2019년 현재까지도 근절되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국토의 상당 부분이 보코하람 통제하에 있으며, 나이지리아 국민은 계속 위협당하고 있다. 나이지리아 정부군도 보코하람에 맞서싸우고 있지만 매번 정부군의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점과 무기가 적다는 점만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꼴이 됐다. 민간 희생도 이어졌다. 2013년 4월, 정부군이 보코하람과 싸운 보르노 북동부의 어촌마을에서 185명이 사망하고 2200채의 집이 파괴됐다. 지난 1월28일에도 보코하람이 나이지리아 북서부의 마을 란(Rann)을 공격해 최소한 60명이 숨졌다. 오사이 오지고 국제사면위원회 나이지리아 대표는 "이는 지난 10년간의 보코하람 공격 중 가장 잔인했다"면서 "목격자들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공격 하루 전 이 지역을 포기, 시민들 보호에 완전하게 실패했음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보코하람은 약 2주 전 같은 곳을 공격해 나이지리아 정부군을 몰아낸 바 있다. 즉 나이지리아가 보코하람과의 전쟁에서 실패하고, 군사력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나이지리아를 지역강국으로 인정할 수 있냐"는 회의론이 커진 것이다. 지난해 10월30일 오비 아냐디케 국제인도주의 뉴스에이전시 IRIN 편집인은 WPR(월드폴리틱스리뷰)에 '나이지리아는 보코하람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길을 잃었는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글에서 "나이지리아 군사력에 대한 평가는 과장돼있다. 나이지리아 군은 무기 부족으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칼럼니스트 로드 에이킨스 아드세이는 가나 매체 '모던가나'에 '나이지리아, 감소하는 지역권력?'이란 글을 기고해 "나이지리아는 서아프리카의 유일한 지역강국이지만, 이 권력은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2년 1월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말리 내전'을 나이지리아 지역 권력이 감소하는 사례로 들었다. 아드세이는 "굿럭 조나단 나이지리아 대통령(임기 2010년5월~2015년5월)이 '나이지리아는 ECOWAS(서아프리카 경제협력체)의 일원으로서 큰 병력지원을 약속한다'고 말했지만, 나이지리아는 결국 군사능력과 자산 등을 동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프랑스가 최신식 라파엘 전투기와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말리 북부의 무장대원을 몰아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년간 무장대원들에 점령됐던 말리는 프랑스의 진출 1달 만에 잠재워졌다. 지역민은 프랑스의 노고에 찬사했다"며 "이는 프랑스가 초강대국(미국 같은 군사적·경제적 대국)은 아니지만, 유럽의 지역강국으로서 아직까지 아프리카 문제에 힘이 있다는 걸 입증하는 사례였다"고 분석했다. 즉 아프리카 서북부에 위치해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말리 내전 문제에, 과거 말리를 지배했던 프랑스는 적극 개입해 세력을 떨친 반면, '지역강국' 나이지리아는 아무런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수년내에 내부적 문제를 극복하고 지역강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점차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가고만 있는 것 같다. 다음 편에서는 나이지리아가 지역강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할지 짚어본다. 나이지리아를 장악한 다국적기업과 관련해서 말이다. ☞[이재은의 그 나라, 나이지리아 그리고 지역강국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4.08 06:00

  • "남자만 오세요"… 북적이는 필리핀 섹스 관광지
    "남자만 오세요"… 북적이는 필리핀 섹스 관광지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④] 빈곤율 21.6%…성매매가 산업화하며 인신매매·아동성매매 만연… "성매매 관광지 가득 채운 한국인 남성들"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내 취미는 항공권 검색이다. 바쁜 일상에 지칠 때면 항공권 검색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어디로 가는 항공권이 언제 저렴한지 구경하곤 한다. 물론 매일 일상이 있기 때문에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래도 각 여행지가 어떤 매력이 있는지 알아보고 이를 상상하는 데서 왠지 모를 마음의 위안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리핀 앙헬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필리핀항공 등 국적기는 물론이고 진에어·제주항공·에어아시아제스트 등 저가항공까지 매일 같이 인천-앙헬레스 직항을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만 잘 맞으면 왕복 10만원 초반대의 가격에도 갈 수 있었다. '필리핀'하면 마닐라, 보라카이, 세부밖에 몰랐기에, '내가 유명 관광지를 놓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앙헬레스는 굳이 몰라도 될 관광지다. 앙헬레스는 과거 미군의 세계 최대 공군 기지가 위치하며 번영했다. 하지만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을 계기로 기지가 폐쇄되면서 앙헬레스는 아예 성매매 관광지로 거듭났다. '오락 수도'라는 별명의 앙헬레스는 불야성이다. 앙헬레스 최대의 홍등가 '필즈 애비뉴'(Fields Avenue)엔 낮이든 밤이든 저렴한 값에 성매매를 하려는 남성들로 득실거린다. ◇필리핀 성매매 관광지 '앙헬레스'… 가득 채운 한국인 남성들 앙헬레스의 필즈애비뉴에는 바, KTV(노래방), 비키니바(호스티스바), 마사지바 등이 늘어져있다. 이들 모두에서 성매매가 성행하고 있다. 심지어 길거리에 서있는 여성들도 성매매를 제안해올 정도다. 업종과 여성의 나이에 따라 다르지만 비용은(필리핀 정부는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이들을 '조기퇴근'시키려면 성매수자는 업주에게 일종의 퇴근비(성매매비)와 벌금을 지불해야한다.) 아침까지 데리고 있는 조건으로 '최대' 60달러(약 6만원) 정도로, 한국을 비롯 선진국 남성들에게는 그리 비싼 값이 아니다. 구글에서 앙헬레스에 위치한 각종 바 등을 검색하면 "남자가 가기 좋은 곳" "저렴하게 성매매할수 있는 곳"이라는 한줄평이 줄지어 남겨져있는 이유다. 흥미로운 건 앙헬레스를 즐겨 찾던 서양인들 사이에서 최근 볼멘소리가 나온다는 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호주 등 서구권 남성들이 즐겨찾던 앙헬레스는 이제 주고객이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앙헬레스 곳곳에는 이제 'OO바' 등 한국어로 써진 간판이 즐비하다. 2017년 유튜브에 게시된 '앙헬레스의 첫인상-필리핀 브이로그' 영상에도 재미있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 댓글을 남긴 이는 "영상에 한국인 남성들이 길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등장하듯, 앙헬레스는 점차 한국인들로 가득차고 있다. 정말 많은 수의 한국 남성들이 앙헬레스를 배회하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바들, 식당들이 한국인 남성만을 대상으로 영업한다"며 "점차 서구권 남성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외신도 잇따라 '한국인 남성'이 앙헬레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2일 영국 가디언은 한국을 비롯 각국 남성이 필리핀에서 '섹스 투어'(성매매 관광)를 한 뒤 낳고 간 필리핀 아이들에 대해 다뤘다. 이 아이들이 자라나 자신의 아버지를 찾고 있다는 내용이다. 가디언은 "필리핀 관광청에 따르면 매년 470만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필리핀을 방문하고, 이중 120만명이 혼자 오는 남성"이라면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적은 한국, 미국, 중국, 호주"라고 전했다. 가디언은 이어 "필리핀 앙헬레스 빈민가의 아이들은 다양한 혈통을 갖고 있다. 흰 피부, 검은 피부, 그리고 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며 "이들의 아버지가 '섹스 투어리스트'(성매매를 하러 온 관광객)이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아시안 섹스 투어리스트 중에선 한국 남성을 콕 집었다. 2015년3월12일 카타르 알자지라도 "(앙헬레스가 위치한) 클락 국제공항은 목·금요일엔 도착 항공편으로, 일·월요일엔 출발 항공편으로 바쁘다"면서 "대부분의 승객은 한국·호주·미국 등지의 성매매 고객들"이라고 보도했다. ◇이 많은 여성들은 어디서 왔을까 필리핀은 인신매매법에 따라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력한 단속이 없이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2013년 기준 필리핀의 9750만 인구 중 50만명이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는 예상치로, 실제로는 이를 훨씬 웃돌 것으로 보인다. 피아 카예타노 상원의원은 2011년 "필리핀에서 성매매로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최대 80만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레이디보이(빠끌라·여장남자) 등 일부 남성들이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사자들은 여성이다. 그럼 이렇게 수많은 여성들은 모두 어디에서, 왜 왔을까? 2008년 사마라싱헤(Samarasingihe Vidyamali)의 연구에 따르면 성매매 여성 대부분은 가난으로 인해 성매매에 자발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했다. 2009년 기준 필리핀인의 26.5%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고, 빈곤율도 2015년 기준 21.6%로 최빈국 아이티와 비슷한 수준이다. (☞"우리도 한국처럼 될 수 있다"… 가난한 나라의 발버둥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②] 참고) 앙헬레스에 종착하는 많은 여성들은 주변의 빈곤 농촌 지역, 즉 사마르, 레이테, 비사야 등에서 온다. 아직까지 전기와 상하수 시설이 제대로 돼있지 않을 정도로 개발이 이뤄지지 않은 지역이다. 이 여성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어 부모와 형제자매를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도시로 이동했다. 필리핀 사회는 전통적으로 딸은 결혼 후에도 친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족을 위해 돈을 보내는 만큼 딸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도시에도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거의 없다. 필리핀의 2016년 1분기 기준 실업률은 23.9%로, 매우 높다. 이에 따라 앙헬레스에 도착한 여성들은 'Now Hiring!'(지금, 댄서를 고용합니다) 등의 광고를 보고 유흥업으로 빠지게 된다. 슬프게도, 이들의 염원과 달리 이들이 버는 돈은 충분치 않아서 대부분 성매매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활을 꾸리기 위해 빚을 지게 된다. 성매매 여성들의 죄책감도 적지 않다. 1998년 세계노동기구(ILO)의 '동남아시아 대규모 섹스 산업'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 마사지 가게에서 일하는 여성의 50% 이상이 "무거운 마음으로 일한다"고 답했고, 20% 여성이 "돈을 받고 성관계를 맺은 뒤 죄책감을 느꼈다"고 답했다. 이는 다른 연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김경애 전 동덕여대 여성학 교수의 '우리나라 남성 성매수자와 필리핀 성매매 여성과의 관계 맺기'에 따르면 조사대상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일은 나쁜 일로, 더럽고 지저분하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또 "여러 남자를 상대하므로 건강상 좋지 않고, 주야로 일해 힘들며 성매매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길"이라고 답했다. 필리핀이 엄격한 가톨릭 국가라는 걸 고려하면 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의 크기가 얼마나 클 지 추측할 수 있다. 필리핀은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이혼을 불법으로 규정할 정도 가톨릭이 크게 영향을 미치는 국가다. 필리핀에서 여성은 결혼 전 '순결'이라 불리는 성적 비경험을 유지해야하고, 성관계는 임신을 위해서만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에 따라 혼전 성관계를 가진 여성은 타락한 도덕성을 가진 자로 낙인 찍힌다. 자연히 성매매 종사 여성은 필리핀 사회에서 배척된다. ◇섹스 투어리스트가 낳은 '아동 성매매'와 '인신 매매' 성매매 관광객들은 '아동 성매매'와 '인신매매'를 낳았다. 2008년 사마라싱헤는 "일부 여성들은 인신매매를 당해 강제적으로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게 됐다"고 기술했다. 인신매매업자는 여성에게 과도한 수수료 등을 부과하고 신분증을 압수해 사기성 계약을 작성한다. 이로써 여성이 성매매 굴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아동 성매매'다. 소아성애자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돈벌이를 위해 아동을 인신매매하는 현상이다. 지난 20일 가톨릭아시안뉴스(UCAN)에 따르면 최근 필리핀 마닐라 북부 팜판가의 한 호텔에서 14세 어린 소녀 20명이 구출됐다. 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있었으며 이들을 중개하는 업자는 거리에서 아이들을 거래해 성매매에 이용했다. 업자들 뿐만 아니다. 부모들도 아이를 돈벌이에 이용하기도 한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 '스테이시 둘리 인베스티게이츠'는 2017년 필리핀에서 엄마들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녀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영상을 찍어 팔거나, 성매매를 주선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아동 성매매에 관심있는 이들은 주로 소아성애적 기호를 가진 호주, 미국 등 서구권 남성들이다. 2015년 7월22일 호주 ABC뉴스는 '필리핀의 젊은 여성들을 착취하는 호주 섹스투어리스트'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캐롤라인 노마 박사는 ABC에 "호주 남성들은 '아시안 여성들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변명을 하며 아동 성매매를 한다"면서 "이는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노마 박사는 "필리핀 서부 지역에서 성매매를 시작하는 나이는 평균 14~16세다. 업주들은 '젊을 수록 좋다'고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9일 호주 남성 테런스 하인스워스(61)는 필리핀 앙헬레스 등에 거주하며 5~8세 사이의 필리핀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한 죄로 11년형을 받았다. 미국의 상황도 유사하다. 2005년부터 10년 넘게 필리핀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아동 성매매 후 영상을 촬영해온 미국 남성 데이비드 폴 린치(56)는 징역 330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 남성들도 적지 않다. 2012년 미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 6위 아동 성매매 관광객 송출 국가다. 엑팟(ECPAT) 등 국제 아동 성매매 관광 근절 단체는 "한국 관광객의 아동 성매매는 소아성애적 기호 때문이라기보다는 구매할 수 있는 아동이 있고, 이런 행위가 용인되는 상황에서 아동의 성을 구매하는 이른바 상황적(situational) 구매자"라고 분석했다. 필리핀 당국도 인신매매법을 제정하는 등 성매매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는 있지만 적극적이진 않다. ILO, 세계보건기구(WHO) 등에 따르면 "섹스 투어는 필리핀 국내 총생산(GDP)의 2~14%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수익성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내부의 사정 때문에 공급을 줄일 수 없다면 수요라도 줄여야한다. 구매하지 않으면 자연히 공급도 사라질 테니 말이다. 적어도 필리핀의 인신매매 이슈에 한국이 가장 문제 있는 나라로 언급되는 일은 피해야하지 않을까. 2017년 필리핀 세부 데일리뉴스에 한국인 남성 9명이 여성과 함께 동행하며 성관계까지 갖는 '에스코트 서비스'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인신매매 혐의로 실명과 조사받는 장면 등이 대서특필됐듯이 말이다. ☞[이재은의 그 나라, 케냐 그리고 지역 강국 ①] 계속 참고문헌 필리핀 여성 빈곤의 특징과 그 구조적 요인, 사회교육과학연구, 전경옥·문은영 우리나라 남성 성매수자와 필리핀 성매매 여성과의 관계맺기, 젠더연구, 김경애 Child Sex Trafficking in Metro Manila, IJM(International Justice Mission) Sex work in Asia, WHO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4.01 06:05

  • '가난한 <strong>나라</strong>' 이유로… 살해당하는 국민
    '가난한 나라' 이유로… 살해당하는 국민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③] 필리핀, 해외 나가 일하는 노동자 1020만명… 인간적 대우 받지 못하는 이들 多=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홍콩에 놀러가 일요일을 홍콩에서 지내는 이들이라면 궁금해하는 게 있다. '오늘 홍콩에 큰 행사가 있는지' 여부다. 매주 일요일 홍콩의 행정·경제 중심지 센트럴 주변을 걷다보면, 끝없는 인파를 맞닥뜨려 이 같은 궁금증을 품기 마련이다. 멀리서 보면 콘서트 등을 기다리는 인파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이들은 대부분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돗자리를 편 채 삼삼오오 둘러 앉아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먹는가 하면 포커 게임을 하고 책·잡지·신문 등을 돌려본다. 주로 광장이나 공원, 고층빌딩 사이, 육교 등 햇볕을 피할 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들이 일요일 마다 바깥에 나와있는 건, 홍콩 정부가 이들에게 일주일 중 하루를 의무적으로 휴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또 일요일엔 홍콩 모든 가족이 집에 들어와 있는데, 보통의 홍콩 집은 좁으므로 가족들끼리의 시간을 보내도록 필리핀인 가사노동자들이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다. 이들의 일상이 늘 괴로운 것만은 아니지만 편치 않은 건 사실이다. 이곳을 지나다보면 얼굴이 새빨간 채 어딘가 아파 보이는데도 길거리에 나와 누워 있는 이들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 2월13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인권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매체는 "한 대학 연구소가 홍콩에서 일하는 2000명 이상의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조사한 결과 이들 중 70% 이상이 하루에 13시간씩 일하며, 이들 대부분은 봉급을 다 받지 못한다"고 전했다. 홍콩에서는 35만2000명(2016년 기준)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일하며 대부분은 필리핀·인도네시아인이다. 이들은 '입주' 가사도우미로 일하는데, 홍콩의 집이 작다보니 제대로된 방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 부엌에서 쪼그려 자면서 숙식을 해결한다. 14만명의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일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2017년 리서치 어크로스 보더스의 조사 결과 60%의 가사도우미가 저임금, 긴 노동시간, 폐쇄회로TV(CCTV) 감시, 고용주에 의한 착취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슬픈 점은 이런 인권침해적인 현실도 중동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2월 쿠웨이트에서 레바논-시리아인 부부가 학대 끝에 필리핀 가사도우미 조애너 데마펠리스를 살해한 뒤 1년 동안 냉동고에 시신을 보관하고 있던 게 발각됐다. 쿠웨이트로 조애너가 떠날 당시 조애너의 가족들은 "그냥 필리핀에 남아 함께 살자"며 조애너를 말렸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큰 조애너가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이라 더욱 슬픔이 컸다. 쿠웨이트에는 약 25만명의 필리핀인이 일하고 있고, 이중 75%에 달하는 이들이 가사도우미다. 이전에도 필리핀 가사도우미가 쿠웨이트인 집주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수차례 발생한 바 있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분노를 금치 못하며 더 이상의 자국 노동자 송출을 금지하고, 자국 노동자 25만명에게 쿠웨이트 철수를 명령했다. 귀국 비용도 모두 정부가 댔다. 쿠웨이트 집주인의 학대를 신고한 자국 가사도우미 26명은 필리핀 대사관으로 탈출시켰다. 하지만 쿠웨이트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다른 중동 국가에서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필리핀 가사도우미가 폭행 끝에 주인이 강제로 먹인 표백제 때문에 의식을 잃고 위중한 상태가 됐다. 2014년엔 사우디 집 주인이 "커피를 신속하게 가져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리핀 가사도우미에게 끓는 물을 던져 전신 화상을 입힌 일도 있었다. 집주인은 고통을 호소하는 가사도우미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는데, 평소에도 집주인은 그를 구타하고 음식도 주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전세계에 퍼져 있는 필리핀 가사도우미가 얼마나 처참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는 많디 많다. 모두 늘어놓을 수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필리핀 여성들은 이런 대우를 받는 데도 불구하고 외국으로 취업하러 나오는 것일까. 기본적으로는 이들이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임금은 매우 낮다. 필리핀 노동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필리핀의 일일 최저임금은 466페소(약 10.31달러)에 그친다. 필리핀 여성을 가사도우미로 고용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필리핀에서는 한 달 15만원(2019년 기준)이다. 반면 홍콩에서는 최소 4520홍콩달러(약 65만원, 2019년 기준)가 필요하고, 싱가포르에서는 570싱가포르달러(48만원, 2017년 5월 기준)가 든다. 필리핀인 입장에서는 가사도우미로 같은 일을 한다면 외국에 나가서 하는 게 낫다. 가족을 부양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송금해서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길 바라므로 말이다. 2017년 컨설팅업체 리서치 어크로스 보더스에 따르면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출신 가사도우미 800명 중 3분의 1은 "내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내가 일한 뒤 고국으로 송금하지 않으면 가족이 먹지 못하고 굶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특히 저소득층 여성이라면 해외에 나가 일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2018년 글로벌 젠더갭(성별 격차) 리포트에 따르면 필리핀은 성평등 측면에서 세계 8위로, 세계 상위 10위권에 있는 유일한 아시아 국가다. 하지만 빈곤층의 경우 성별 격차는 여전하다. 지난 20일 필리핀 뉴스채널 ABS-CBN 보도에 따르면 매킨지글로벌연구소는 이 같은 결과를 인용하며 "이제 필리핀의 상류층 여성들은 남성들과 유사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있으며, 임금 격차도 적다. 하지만 저소득층 여성들은 아직도 상당한 수준의 성별 임금 격차를 겪고 있고,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적다"고 분석했다. 논문 '필리핀 여성빈곤의 특징과 그 구조적 요인'을 발표한 전경옥·문은영 교수에 따르면 필리핀 빈곤층 여성들은 비슷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는 남성 임금의 평균 59%(2001년 기준)를 받는다. 지난해지난해 3월7일 "성차별주의는 필리핀 여성을 가난하게 유지한다"는 제목의 CNN 기사도 이 같은 현실을 짚었다. 이런 임금 성차별은 남성은 보수가 따르는 생산적인 일을 하는 반면 여성은 대부분의 시간을 가정 내에서 할애한다는 전통적 사고 방식에서 기인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필리핀 여성들 입장에서는 해외에 나가 가사도우미를 하는 게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여성들이 해외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모습을 쉬이 볼 수 있는 이유다. 또 이들 입장에서는 해외 생활이 일종의 '새로운 삶'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비춰지기도 한다. 예컨대 홍콩은 외국인들이 홍콩에서 7년 이상 살면 영주권을 준다. 물론 홍콩 당국은 어떻게든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들에게 영주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말이다. 앞서 2013년 홍콩 최고법원인 종심법원 재판부는 20여년을 홍콩에서 산 가사도우미 에반젤리네 바나오 바예호스와 다니엘 도밍고가 홍콩 정부를 상대로 영주권 신청 권한을 달라고 제시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 필리핀인들이 가사도우미 등 해외로 나가 일을 하는 건 국가 입장에서도 장려된다. 필리핀 노동자가 해외에서 돈을 벌어 모국으로 송금한 돈이 필리핀 경제의 생명줄처럼 기능하는, '송금 경제'가 나라 살림의 주축이라서다. 필리핀은 수출주도형 발전전략 혹은 자본집약적 서비스산업 등 뚜렷한 경제발전산업이 없기 때문에 해외로 나간 자국민 노동자가 가족들에게 보내온 돈으로 내수 증진을 하고 있다. 2013년 필리핀해외위원회(CFO)에 따르면 필리핀 인구의 11% 수준인 약 1020만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해외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대부분은 젊은이들이다. 2011년 실시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필리핀 출신 해외 노동자의 24%를 24~29세가, 23%를 30~34세가 차지했다. 필리핀 정부는 정책을 통해 노동자 해외 송출을 증진하고, 미디어 캠페인이나 해외 정부와의 딜(계약) 등을 통해 노동자 해외 송출을 장려한다. 해외 노동자들은 미디어 등에서 필리핀 국가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시민들이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거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된다. 필리핀인 해외 노동자 인구는 수년간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로, 이 같은 분위기가 필리핀인이 전세계 100여개국에 펼쳐져 있는 가장 큰 디아스포라 인구로 거듭나는 데 기여했다. 필리핀 정부가 가사도우미 등의 해외 송출을 위해 해외 정부들과 협상에 나서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해 5월 아랍에미리트 정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필리핀 노동자를 아랍에미리트 가사도우미로 데려오는 비용을 2만디르함(약 615만원)에서 1만2000디르함(약 370만원)으로 낮췄다. 필리핀인들은 이처럼 아주 빈번히 좋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세계 각국에서 노동자로 힘들게 일하고 있다. 필리핀인들 사이에서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냐"는 울분 섞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다음 편에서는 필리핀 하층민의 '가난'이 이들의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몰아넣었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본다. 필리핀에 만연한 '섹스 투어'와 관련해서 말이다.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④]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3.25 06:02

  • "우리도 한국처럼 될 수 있다"… 가난한 <strong>나라</strong>의 발버둥
    "우리도 한국처럼 될 수 있다"… 가난한 나라의 발버둥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②] 식민지 잔재, 토지개혁 실패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 극심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조만간 '필리핀'(the Philippines)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사라지고 마할리카(Maharlika·따갈로그어로 '귀족'이라는 뜻)라는 나라가 생길지 모르겠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달 국명을 개명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이라는 국명은 스페인 통치시절(1521~1898년) 스페인 왕 필립 2세 왕의 이름을 따 명명했기에 식민 통치의 잔재라는 것이다. 국명에 스페인의 흔적이 남았듯, 필리핀엔 사회·정치·문화·경제적으로 곳곳에 식민지의 잔재가 남아 있다. 가장 큰 흔적은 필리핀의 경제상황에 남겨졌다. 스페인(1571~1898년)과 미국(1898~1946년)의 식민지, 그리고 그 사이 잠시 일본의 필리핀 점령기(1942~1945년)까지 거치면서 오랜 식민지배 기간 끼친 여러 영향들이 필리핀의 지금의 모습, 세계 최빈국의 모습을 만들었다. IMF에 따르면 필리핀의 1인당 명목 GDP는 지난해 기준 3095달러로 세계 131위, 세계 최빈국이다. 물론 필리핀은 6.1%(2015년) 6.9%(2016년) 6.7%(2017년) 6.7%(2018년) 등 매년 높은 GDP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이 GDP 성장률은 중국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동남아시아에선 '필리핀은 아시아의 호랑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2013년 2월 다바오시에서 열린 필리핀개발포럼에서 모투 코니시 세계은행 디렉터도 "필리핀은 더 이상 동아시아의 아픈 손가락이 아니라,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말했다. 2013년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 중 하나인 피치레이팅스는 필리핀의 성장이 ‘안정적’이라면서 BBB-를 부여했다. 세계경제포럼 역시 필리핀을 2012년 '세계 경쟁력 순위' 10위에 뒀을 정도다. 하지만 어쩐지 아직 필리핀은 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발전을 거듭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그야말로 '빈익빈부익부'다. 시사 매거진 디아틀란틱(The Atlantic)은 2013년 5월7일 "필리핀의 발전상은 대부분의 필리핀 서민들에겐 그저 '숫자'로만 느껴진다. 빈민가는 언제나처럼 황량하고, 경제 호황은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했다. 2012년 포브스 아시아에 따르면 필리핀 40대 부유 가문의 총 재산은 2010년에서 2011년 1년 사이 37.9%(130억달러) 증가해 474억달러를 기록했다. 2013년에서 2014년 1년 사이에도 또 13%가 늘어나 724억달러를 기록했다. 반면 필리핀 노동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필리핀의 일일 최저임금은 466페소(약 10.31 달러)로, 3년간 겨우 4.5% 증가했다. 경제는 발전하는데 임금은 그대로니 최저임금을 받는 이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필리핀 5세 이하 아동의 32%는 영양실조에 따른 심각한 발육부진을 겪고 있으며, 필리핀 국민 중 60%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병원 등 의료케어를 받지 못한다. 2009년 기준 필리핀인의 26.5%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빈곤율(2015년 기준 21.6%)은 또 다른 세계 최빈국 아이티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필리핀의 빈익빈부익부가 이처럼 심각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농업 종사 인구가 필리핀 빈곤층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며 "대다수 농민들의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토지개혁의 실패에서 왔다"고 지적한다. 2014년 기준 필리핀의 노동가능인구 중 30%는 농업에 종사한다. 장소영은 논문 '필리핀의 토지개혁'(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동남아학과, 2000년)에서 "정부가 수없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토지개혁이 계속 실패하거나 한계가 많았던 원인은 과거 식민지배기간에 만들어진 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때 구축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중심으로 지주계급이 국가의 정책까지도 방해하거나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토지개혁'이란 전후 독립 탈식민지 국가에서, 경제적 근대화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로의 전환을 목표로 국가 주도하에 지주-소작관계의 해체를 추진하는 개혁정책을 일컫는다. 즉 단순히 소득 불평등을 해결해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목적 외에 지속적으로 권력을 장악해온 통치계급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제거한다는 목적을 가지지만, 필리핀은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통치계급을 공고화했고, 탈식민지에 이르러서도 이들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이들은 지속적인 사회 개혁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필리핀은 식민지의 유산인 플랜테이션 위주의 농업형태를 띠고 있다. 스페인은 18세기 말 식민지 경영비용을 현지에서 조달하기 위해 사탕수수와 코코넛을 비롯해 차·고무·바나나 등 열대작물을 중심으로 플랜테이션을 도입했다. 이 플랜테이션 체제가 스페인 식민지 기간 지주 계급에게 '부의 쏠림'이라는 선물을 줬다. 지주 계급은 스페인 식민지 기간 동안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체제(아시엔다·Hacidenda)를 강화해 부를 축적했다. 방법은 이랬다. 지주들은 개간된 땅을 무작위로 강탈하고 관료와 결탁해 관료에게 바칠 토지세 등 각종 세금을 농민에게 부과했다. 당연히 소수의 자작농도 파산했다. 그들의 토지는 대지주의 소유가 됐다. 스페인 당국은 이 같은 권력 쏠림을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겼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입장에서도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편이 경영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주들의 힘이 세진다는 건 국가의 독립성과 자율성엔 제약이 걸린단 걸 의미한다. 독립 이후 필리핀은 지주제 폐지와 자작농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1955년 토지개혁법 이래 점진적이지만 끊임없이 토지개혁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해집단을 만들어 국가 주도의 토지개혁에 반대했다. 필리핀농업회의소(PCA), 전국미곡생산자협회(NRPA), 전국사탕수수농장주협회(NSPA)등은 의회 밖에서 개혁법안의 반대를 주도했다. 시민단체와 자선단체, 협동조합과 은행까지 소유한 지주 계급은 토지재분배정책을 공산주의적 사고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또 지주 계급은 번번이 사탕수수와 코코넛을 비롯한 지주 소유의 수출용 재배작물을 농지분배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고, 강제규정을 두지 않았다.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그리고 '온건하고 건전한 반공국가'를 세우고자 한 미국의 대한 정책 등에 영향을 받아 1950년 6월 농지개혁을 실시, 지주를 거세하고 자작농 체제를 성립한 한국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필리핀 지주계급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 하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재임 1966~1986년) 정권의 20여년 독재정치 기간에도 지주계급을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마르코스 정권에 충성을 다한 지주 출신 엘리트와 크로니들은 온갖 특혜를 보장받았다. 즉 마르코스는 자신을 후원하는 소수의 지주계급(크로니)에게 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 정실(족벌·패거리) 경영과 정경 유착의 경제 체제)를 형성해나갔다. 지주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투표권'이 생긴 뒤 더 강해졌다. 토지를 장악한 지주 계급이 가난한 민중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여기서 오는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 권력(표)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행태를 후견주의(클리엔털리즘)라고 부른다. 후견주의에 따라 지주 계급은 경제적 권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까지 장악했고, 자연히 경제적 불평등도 지속됐다. 1987년 피플파워 혁명을 통해 21년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재임 1966~1986년)을 몰아낸 뒤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재임 1986~1992년)을 대통령에 올려놓고도, 필리핀 국민은 1987년 5월 선거를 통한 의회 구성에서 대부분의 의원을 지주 계급으로 채워 토지개혁 등 일련의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아이러니한 국민의 선택 역시 후견주의로 풀이된다. 물론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나 아키노 전 대통령 역시 본인과 가족이 지주 계급인 만큼 애초에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말이다. 한국은 성공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농업의 생산력과 농업잉여를 증가시켜 그 잉여를 제조업이나 기타 공업 등 기본설비시설에 투자함으로써 저발전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을 이뤘다. 반면 필리핀의 지주계급은 산업자본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잉여자본을 제조업분야나 산업기반시설에 투자하지 않고 오히려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 아씨엔다를 넓혀가면서 부를 축적했다. 필리핀의 GDP 대비 투자 비율은 19.7%로, 인도네시아의 33%, 태국의 27%, 말레이시아의 24%에 비해 현저히 낮다. 필리핀이 독립하면서 외세의 힘을 막기위해 도입한 60·40법도 성장을 발목잡았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업에서는 외국인 지분이 40%를 넘을 수 없다. 이 같이 외국인 투자에도 제한을 걸면서, 필리핀의 발전을 위한 투자에도 늘 제동이 걸렸다. 여기에 태풍·지진·화산 폭발 등 빈번한 자연재해는 발전하려 하면 좌초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2007년 7% 성장하고 2008년 경제위기 여파에도 3.8%의 성장을 기록한 필리핀이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강한 태풍으로 인해 0.9%의 저조한 성장률을 보인 게 그 예시다. 또 7000여개의 섬으로 구성된 국토는 강력한 국가권력 체계가 발동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필리핀에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는 반군 등이 등장한 이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필리핀은 결국 아시아의 호랑이가 될 수 있을까? 필리핀에서 나오는 기사들을 읽어보면 한국이나 태국, 싱가포르 등과 비교하며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토지개혁과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필리핀의 미래는 어두워만 보인다. 그리고 국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필리핀 국민들은 세계 곳곳에서 아주 힘든 삶을 살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필리핀이 '가정부의 나라'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와 필리핀 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짚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③] 계속 참고문헌 필리핀의 토지개혁, 서강대, 장소영 후견주의가 필리핀 민주화에 미친 영향, 이화여대, 송세시리아 한국과 필리핀의 민주적 이행에 관한 비교연구, 동국대, 서문수 필리핀의 토지개혁과 농업 현대화 과정의 전개와 한계, 농업경영 정책연구, 김광종 전운성 필리핀과 한국 토지개혁 법령의 특징, 경제연구, 김호범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3.18 05:50

  • [MT리포트]마약·뇌물·탈세·몰카…지금까지 열린 '버닝썬 게이트'
    [MT리포트]마약·뇌물·탈세·몰카…지금까지 열린 '버닝썬 게이트'

    [버닝썬 게이트](종합)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이 된 일부 '아이돌'은 문화권력에 취해 범죄에 무감각해졌다. 권력층의 비호 얘기도 들린다. 강남 클럽 버닝썬에서 단순 폭행으로 시작돼 마약과 뇌물, 탈세와 불법 몰카영상, 권력층과의 유착으로까지 확대된 '버닝썬 게이트'를 중간 점검했다. ━버닝썬 일파만파, 총리까지 나섰다━'버닝썬(Burning Sun)'이 '음지'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경찰청과 국세청에 수사 확대와 강력 처벌을 지시했고, 검찰은 경찰 유착 의혹을 포함한 관련 사건을 배당하고 수사 준비에 착수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14일 정부서울청사에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버닝썬 사태'와 관련, "이제까지의 수사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일부 연예인과 부유층의 일탈이 충격적"이라며 "이번 사건뿐 아니라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유흥업소나 특정계층의 마약범죄 등 일탈에 대해서는 전국으로 수사를 확대해 강력하게 처벌해야겠다"고 말했다. 또 "국세청 등 관계기관도 유사한 유흥업소 등이 적법하게 세금을 내고 정상적으로 운영하는지 철저히 점검해 의법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 총리는 "경찰의 유착의혹은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며 "사법처리된 전직 경찰만의 비호로 이처럼 거대한 비리가 계속될 수 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에 수사결과가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리는 지난 5일에도 "경찰의 (버닝썬) 유착 의혹에 대해 경찰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수사하라"고 주문했다. 검찰은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 11일 수사 의뢰한 그룹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의 성접대 의혹과 경찰 유착 의혹, 가수 겸 방송인 정준영의 성관계 동영상 불법촬영·유포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 배당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이날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 배당 사실을 밝히며 "불법 성매매 영상을 유통시키는 것은 그 목적에 관계없이 가장 나쁜 범죄행위 중 하나"라고 말했다. 또 민갑룡 경찰청장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 "이번 사건에 경찰 명운이 걸렸다는 자세로 전 경찰 역량을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유착 의혹과 관련해서는 "철저히 빠짐없이 해결해나가고, 개혁이 필요한 부분도 철저히 해 이런 문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날 승리와 정준영은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나와 조사를 받았다. 정준영은 경찰에 출두하며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하고 조사실로 이동했다. 승리는 "진실된 답변으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박준식, 이영민, 이동우, 황국상 기자 ━'승리 게이트' 되기까지…시간 순으로 본 '버닝썬 사건'━[버닝썬 게이트]폭행에서 소환까지… '버닝썬 사건' 시간순 총정리 단순 클럽 폭행 사건에서 시작된 '클럽 버닝썬' 관련 사건이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28)의 성접대 알선 의혹을 비롯해 클럽 마약 투약 유통지 의혹, 경찰과 클럽 유착 의혹, 불법 촬영 영상물 공유 의혹 등으로 뻗어나가며 '승리 게이트'로 비화했다. 이른바 '버닝썬 나비효과'다. ◇2018년 11월24일 김상교씨, 클럽 버닝썬 손님으로 방문… 폭행 사건 휘말려 지난해 11월24일 서울 강남에 위치한 버닝썬 클럽을 찾은 손님 김상교씨(29). 그는 이날 버닝썬에서 성추행당하던 여성이 본인을 잡고 숨으려고 해 보호하려다가 클럽 이사 장모씨 등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집단 구타에 의해 갈비뼈 전치 4주 골절, 횡문근융해증(근육이 녹아 혈액을 막는 증상) 등이 생겼으나 경찰 조사 결과 가해자가 됐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4일 온라인 커뮤니티 '보배드림'을 통해 이같이 밝힌 뒤 본인의 SNS(사회연결망서비스) 인스타그램에 역삼지구대 폐쇄회로TV(CCTV) 폭행 영상을 올렸다. 이어 지난 1월29일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경사 ***, 경장 *** 등등 ***에서 뇌물받는지 조사부탁드립니다'는 제목의 청원을 올렸다. 해당 청원은 하루만에 20만명의 동의를 넘겼다. ◇2018년 12월21일 여성 3명 "버닝썬에서 김상교씨로부터 성추행당했다" 주장 버닝썬 측은 폭행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다만 김씨가 클럽에서 여성을 성추행한다는 민원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끌어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실제 지난해 12월21일 여성 3명이 강남경찰서에 김씨를 강제 추행 혐의로 고소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모두 버닝썬과 연관된 인물들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김씨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여성 3명 중 1명은 중국인 고객 손님을 담당하던 클럽 직원(MD) 애나다. 또 다른 한 명은 버닝썬 대표의 지인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1명은 버닝썬 영업직원의 지인으로 드러났다. 버닝썬 측이 김씨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허위로 고소를 진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2019년 1월28일 버닝썬 CCTV 영상 공개… "버닝썬에서 마약과 성폭행은 빈번한 일"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지난 1월28일 김씨가 게시했던 버닝썬 CCTV 영상이 급속도로 공유됐다. 영상에는 한 여성이 노트북을 잡는 등 몸을 가누지 못하며 가드에게 끌려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27일 유튜브에 이 같은 내용의 영상을 게시하며 버닝썬의 약물 성폭행 의혹을 제기했다. 김씨는 "무언가(물뽕 등 약물로 추정)에 취한 여자를 버닝썬 가드가 머리채만 잡은 채 VIP 통로를 통해 끌고 가고 있다"면서 "여자는 컴퓨터와 데스크를 잡는 등 (구해달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버닝썬 직원들이 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영상을 한 시민에게 제보받았다고 덧붙였다. 이때부터 피해여성들의 증언도 잇따랐다. 여성 고객에게 물뽕(GHB)을 먹이고 강간하는 문화가 클럽 내부에서 횡행했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마약을 적극 유통하고 이를 이용한 성폭력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부추긴다고는 증언도 나왔다. 물뽕 논란은 일반 마약류로 번졌고, 버닝썬에서 여러 종류의 마약이 공공연하게 유통된 정황도 드러났다. 또 다른 대형 클럽인 아레나와의 커넥션, 경찰과 유착 관계 등 의혹도 더욱 커졌다. 이에 지난 1월30일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가 경찰 유착과 클럽내 성폭행 및 마약 의혹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 수사 결과, 애나 집에서는 마약으로 의심되는 액체와 백색 가루가 다수 발견됐다. 이문호 버닝썬 대표와 영업사장 한모씨 모발에서도 마약 성분이 검출됐다. ◇2019년 2월17일 버닝썬 영업 종료 폭행사건에 이어 경찰 유착 의혹, 마약 판매 의혹까지 받으면서 버닝썬은 궁지에 몰렸다. 손님이 줄어들고 버닝썬이 위치한 르메르디앙 서울 호텔 역시 버닝썬 측에 임대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관련 내용증명을 보내면서 버닝썬은 영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2019년 2월21일 "버닝썬서 돈 받아 경찰에 돈 살포"… 서울 강남경찰서 유착 의혹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2월21일 전직 강남경찰서 소속 경찰관 강모씨를 소환 조사했다. 이 자리에서 강씨는 경찰과 버닝썬 간 유착 의혹과 관련, '연결고리' 의혹을 받고 있는 돈 살포를 인정했다. 이에 서울지방경찰청은 수사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하기 위해 버닝썬 폭력 사건을 강남경찰서에서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이송했다. 이전까지는 버닝썬 논란 관련 폭행 사건은 강남경찰서, 마약·뇌물 등 사건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나눠서 수사해왔다. ◇2019년 2월26일 승리 "잘 주는 애들로"… 성접대 의혹 지난 2월26일에는 승리가 2015년 말 재력가 고객에게 성접대를 제공하려 한 카카오톡 대화가 보도됐다. 승리는 2015년 12월6일 밤 11시38분쯤 가수 A씨, 설립 준비 중이던 투자업체 유리홀딩스의 유모 대표, 직원 김모씨 등과 함께 이 같은 대화를 나눴다. 승리는 이 방에서 외국인 투자자 일행을 위해 "강남 클럽 아레나에 메인 자리를 마련하고 여자애들을 부르라"고 직원 김씨에게 지시했다. 김씨가 "자리 메인 두 개에 경호까지 싹 붙여서 (중략) 케어 잘하겠다"고 답하자, 승리는 "여자는?"이라 묻고 "잘 주는 애들로"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10분 뒤 채팅방에 "남성 두 명은 (호텔방으로) 보냄"이라고 최종 보고했다. 승리의 성접대 의혹이 커지자 YG엔터테인먼트는 "승리 본인에게 확인한 결과 해당 보도는 조작된 문자메시지로 구성됐다"면서 "가짜 뉴스를 비롯한 루머 확대 및 재생산 등 일체의 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4일 국가권익위원회가 승리가 성접대를 주선했다는 의혹이 담긴 카카오톡 대화 원본을 공익신고 형식으로 입수받으면서, 이 같은 승리 측의 해명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2019년 3월10일 경찰, '성매매 알선' 혐의로 승리 입건 결국 경찰은 지난 10일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승리를 입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또 '성접대' 의혹이 제기된 클럽 아레나를 10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3시간 동안 광수대 수사관과 디지털 요원 등 20여명을 보내 내부 압수수색했다. ◇2019년 3월11일 정준영, 단체 카카오톡방에서 불법 몰래 촬영 영상 공유 경찰은 승리의 성접대 알선 의혹 카카오톡 대화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가수 정준영이 불법 촬영이 의심되는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한 혐의를 포착했다. 정준영은 다른 지인들과의 카톡방에도 문제의 동영상과 사진 등을 수차례 올렸으며, 2015년부터 약 10개월간 정준영의 불법 촬영 동영상 피해 여성은 10명에 달한다고 전해졌다. 정준영의 지인들은 여성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성관계하는 등 성폭행으로 의심되는 자신의 경험 등을 카톡방에서 공유하기도 했다. 정준영은 앞서 2016년 자신의 전 여자친구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한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른 바 있다. 당시 정준영은 "여자친구와 장난 삼아 상호 합의 하에 촬영했고 이후 바로 삭제했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다. 정준영은 12일 오후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로 입국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날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정준영을 입건했다. ◇2019년 3월13일 "버닝썬 사건, 강남경찰서장 넘어서는 직위 관련돼 있어"… 경찰청장? '승리·정준영 카톡방'을 제보한 방정현 변호사가 13일 대화방에 경찰 유착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다고 폭로했다. 방 변호사는 익명의 제보자에게 제보받아 '비실명 대리 신고'로 국민권익위원회에 해당 내용을 제보한 인물이다. 그는 "자료와 제보자의 제보를 다 검토했는데 경찰과 유착 관계가 굉장히 의심되는 정황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면서 "제보자가 왜 망설였을까 이해가 될 정도의 직급이다. 해당 경찰의 계급이 강남경찰서장 이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민갑룡 경찰청장은 13일 오후 청사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씨가 포함된 카톡 대화방에서 특정인물이 경찰청장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뒤를 봐준다'는 식의 표현이 나온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2019년 3월14일, 승리·정준영·유모씨 나란히 경찰 출석 정준영은 1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광수대)에 검은색 카니발 차량을 타고 출석했다. 두손을 모은 채 포토라인에 선 정씨는 네번에 걸쳐 죄송하다고 말했다. 각종 의혹엔 사실상 침묵했다. 정씨는 취재진의 질문에 앞서 "죄송하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 끼쳐드려 정말 죄송하다"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 죄송하다. 죄송하다"고 말했다. 승리 역시 이날 오후 2시3분쯤 검은색 카니발 차량을 타고 출석했다. 포토라인에 서기 전 허리를 90도로 숙인 승리는 "성접대 혐의를 여전히 부인하냐"는 질문에 "아…"라며 몇 초 간 머뭇거렸다. 이후 "국민 여러분과 주변에서 상처받고 피해받은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며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승리의 지인이자 투자업체 유리홀딩스 대표인 유모씨도 이날 낮 12시50분께 같은 혐의로 경찰에 출석했다. 당초 오후 3시쯤 출석할 예정이던 유씨는 취재진의 눈을 피해 예정보다 이른 시각에 경찰에 출석했다. 이재은, 이동우, 이영민 기자 ━정준영·승리 소환조사…버닝썬 수사 급물살 탈까━14일 주요 피의자 출석…곧 전직 경찰 '구속 심사' 등 수사 총력전 경찰이 '버닝썬 사건'과 '승리 게이트' 주요 피의자 3명을 같은 날 소환조사 하며 수사의 고삐를 강하게 당겼다.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한 점 의혹 없는 수사'를 천명한 지 하루 만이다. 총력전에 돌입한 만큼 이른 시일 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을지 주목받는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4일 '불법 촬영물'(몰카) 유포 혐의를 받는 가수 정준영씨(30)와 성접대 의혹이 불거진 아이돌 그룹 빅뱅 출신 전직 가수 승리(29·본명 이승현)를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이날 정씨와 이씨는 오전과 오후 차례로 경찰에 나왔다. 경찰은 대화방에서 불법촬영물을 주고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이들이 수사 상황을 전하고 말을 맞출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같은 날 소환했다. 이씨와 함께 성접대 의혹을 받는 유리홀딩스 대표 유모씨도 오후 출석해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출석 당시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질문 등에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죄송하다", "성실히 조사받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자리를 떴다. 심지어 '경찰총장'과 문자 대화를 한 것으로 지목받은 유씨는 예정된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출석해 취재진의 눈을 피했다. 이들의 경찰 출석에는 국민적 관심을 반영하듯 취재진 200여명이 몰렸다. 프랑스통신사 AFP, 일본 방송사 TBS(도쿄방송)가 현장을 찾는 등 외신도 큰 관심을 보였다. 이씨와 정씨 모두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해온 만큼 외신의 관심이 높다는 해석이다. 대화방에서 성접대와 불법촬영물 관련 대화를 한 주요 인물들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며 수사는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이씨는 그동안 버닝썬의 실소유주라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날 성접대 의혹 수사에 이어 경찰 유착, 마약 등에서도 수사도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정씨를 조사하며 불법 촬영물 유포 혐의 확인에 주력했다. 모발과 소변을 임의제출 형식으로 받는 등 마약 투약 여부도 살폈다. 전날 오전부터 정씨가 2016년 고장난 휴대폰 복원을 의뢰한 사설 수리업체의 압수수색도 진행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디지털 작업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2~3일 정도 더 소요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정씨의 혐의 입증을 위한 증거능력 확보에 집중하는 한편, 이날 소환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신병처리 방향을 검토할 예정이다. 경찰은 문제의 대화방에서 정씨가 보낸 불법 촬영물 유포 의혹을 받는 아이돌 그룹 하이라이트 출신 용준형씨(30)도 13일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용씨는 "(정씨가 보낸) 동영상을 받은 적 있고, 부적절한 대화도 했다"며 팀 탈퇴 의사를 밝혔다. 오는 15일 클럽-경찰간 '브로커' 역할을 의심받는 전직 경찰관 강모씨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은 이번 수사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강씨는 지난해 7월 미성년자가 버닝썬에서 고액의 술을 마신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경찰에 돈을 전달했다는 혐의다. 경찰 내부에서는 강씨의 구속이 관련자들 혐의 입증의 지렛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강씨의 방어 논리를 깨기 위해 총력를 해온 만큼, 구속이 이뤄지면 다른 증거들 역시 힘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다. '버닝썬 사건'과 '승리 게이트'가 국민적 관심으로 떠오르며 경찰 수뇌부는 연일 총력 수사 의지를 밝히고 있다. 정씨와 이씨가 대화를 나눈 카톡 대화방에서는 '경찰총장' 등 고위급 경찰과의 유착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이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경찰의 명운이 달렸다는 자세로 경찰력을 투입해 특단의 의지로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이동우, 이영민 기자 ━탈세·마약·몰카 범죄 백화점 '버닝썬 사건' 형량 다합치면 100년 이상?━[버닝썬 게이트][the L]이론상 법정최고형은 무기징역… 서울 강남의 유명클럽 버닝썬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이 마약 유통과 탈세, 성범죄, 경찰 최고위층 유착 비리 의혹 등 대형 게이트 양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모양새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가수 승리와 정준영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된 가운데 이들과 관계된 연예인과 사업 파트너 등의 혐의도 속속 드러나고 있어 이들에게 적용될 죄목과 형량에 관심이 모아진다. 이미 제기된 의혹만 해도 마약, 탈세, 불법 촬영 등 강력범죄에 해당돼 이들이 받을 형량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가수 승리의 경우 클럽 버닝썬 대표를 지내면서 성매매 알선과 탈세 등의 의혹을 받고 있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성관계 여부나 금전 등 대가성 여부에 대한 확인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선고된다. 여기에 버닝썬을 비롯해 승리가 경영해 온 다수의 사업체들이 다년간에 걸쳐 탈세를 해왔다는 정황도 포착된 상태다. 탈세는 연간 10억원 이상일 경우 4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신민영 변호사는 "탈세로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없지면 이론상으로는 법정형 최고로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며 "현재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실제로 구형될 형량은 수사 결과에 따라 나뉘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불법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공유한 것으로 드러난 가수 정준영은 최근 불법촬영범죄에 대한 강화된 형량에 따라 최대 징역 7년6개월까지 받을 수 있다. 현행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은 피해자 의사에 반해 영상물을 촬영하거나 촬영된 영상을 유포하면 최대 징역 5년 또는 벌금 3000만원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또한 촬영 당시에는 촬영 대상자 의사에 반하지 않는 경우에도 촬영물을 사후에 피해자 의사에 반해 유포한 경우에도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기에 피해자가 다수일 경우 형의 2분의 1이 가중될 수 있다. 정준영이 성관계 동영상을 공유한 여성의 수는 1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가중 처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준영은 이와 함께 강간 모의, 증거인멸과 탈세 등 다른 의혹들도 속속 제기되고 있어 이들 혐의가 모두 인정될 경우 형량은 훨씬 무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마약유통에 관여한 버닝썬 이문호 대표, 마약운반책 중국인 애나 등 마약 관련 혐의를 받고 있는 3명은 최대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이문호 대표는 마약류 투약 및 유통, 뇌물 공여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대표는 경찰 소환조사에서 버닝썬과 경찰 간 금품 전달 통로로 지목된 강모씨에게 2000만원을 건넨 혐의를 인정했다. 성매매 알선 혐의를 받고 있는 유모 유리홀딩스 대표는 징역 3년, 추가 혐의가 더 드러날 경우 최대 4년 6개월까지 형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방정현 변호사가 이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유 대표가 경찰총장과 문자를 했다는 내용을 폭로했다. 지난해 미성년자 출입사건을 무마해주겠다며 버닝썬 측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전직 경찰 강모씨는최대 징역 7년 6개월까지 선고될 수 있다. 또 클럽과 경찰 유착의 연결고리를 했다는 의혹도 받는 점에서 수사 결과에 따라 형량이 추가될 수 있다. 버닝썬 연루자 가운데 처음으로 기소된 버닝썬 직원 조모씨는 마약류관리법·화학물질관리법 위반으로 최대 징역 8년까지 가능하다. 버닝썬 사건의 발단이 된 김상교씨 폭행 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된 버닝썬 이사 장모씨의 경우 폭행 혐의에 따라 최대 2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신 변호사는 "버닝썬 사건을 형량면에서 봤을때 가장 큰 대목은 마약유통과 탈세로 마약건은 최대 무기징역이 가능할만큼 중한 범죄"라고 말했다. 이미호, 최민경 기자, 오문영 인턴기자 ━[팩트체크] 정준영 폰 복구업체, 제보자라면 오히려 처벌 받는다?━[the L]고객 맡긴 폰에서 데이터추출해 제3자에 전했다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형사처벌 대상될 수도 '정준영 성관계 몰카 유포'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3년전 정준영(30)씨의 전(前) 여자친구가 '몰카'를 이유로 고소한 당시, 휴대전화 복구를 맡겼던 업체에 대해 13일 압수수색을 했다. 경찰은 수사자료 확보 차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해당 업체 관계자가 이번 사건의 제보자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공익신고' 형식으로 '비실명 대리신고'했다는 방정현 변호사는 이날 한 라디오 방송에서 익명의 제보자가 존재함을 밝혔다. 제보자가 이메일을 보냈고, 그로부터 '버닝썬' 관련 자료를 받아 권익위에 대리신고했다는 주장이다. 법률전문가들은 만약 이날 압수수색을 당한 복구업체 직원이 방 변호사에게 파일을 보낸 익명의 제보자라면, 여러가지 법적 쟁점이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본다. 공익 목적의 제보였지만 경우에 따라 형사처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보과정에 불법성 있었다면 '공익신고자' 인정돼야 처벌 면할 수 있어 우선 제보자의 '공익신고자' 해당 여부부터 문제된다. 방송 등 일부 언론에서 방 변호사를 '공익신고자'로 표시하고 있지만 엄격히 따지면 방 변호사는 '공익신고자'가 아니다. '공익신고를 대리하는 변호사'다. 공익신고자보호법 제 8조의 2에 새로 규정된 '비실명 대리신고' 제도는 지난해 4월 신설돼 10월 18일부터 시행됐다. 공익신고자의 신원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공익신고자 본인'에 관한 인적사항 등은 '봉인'돼 권익위에 보관되고 본인 동의없이 열람되지 않는다. 공익신고자보호법에 따른 '공익신고'가 인정되려면 법령에서 정한 범죄혐의가 있어야 한다. 공익신고자보호법에서 공익침해행위 대상 법률로 별표에 별도로 나열한 284개의 법에 '형법'이나 '성폭력처벌법'은 없다. 그런데 현재까지 정준영 휴대전화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카톡 대화방과 동영상만으로 가늠할 수 있는 범죄는 대부분 일반 형법이나 성폭력처벌법 관련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정도다. 동영상 중에 '약'을 먹여 기절한 여성과의 성관계 장면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운용 변호사(다솔 법률사무소)는 "제기된 혐의 중에서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외엔 공익제보가 가능한 유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뚜렷하게 보이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만약 수사결과 마약류관리법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정준영 휴대전화 데이터를 바탕으로 범죄혐의를 권익위에 '공익신고'한 의미가 없어진다. 권익위가 검찰에 수사의뢰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범죄신고'가 됐지만 법에 따른 '공익신고'의 형태여야만 가능한 '신고자보호'를 기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은 제14조에 "공익신고자의 범죄행위가 발견된 경우에는 그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는데, 이 '형사책임 감면'도 제보자가 '공익신고자'로 인정받아야만 가능하다. ◇고객비밀 유출했다면 형사처벌 대상 될 수도 법에 따른 '공익신고자' 보호가 안 된다면 오히려 제보자가 범죄혐의자가 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공익을 위한 제보라도 고객의 의사에 반해 고객의 비밀을 외부에 알렸다면 '비밀침해죄'나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의 형사적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소연 변호사(리인터내셔날 특허법률사무소)는 "헌법 제17조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을 자유권을 규정하고 있고 형법 제316조 제2항에 의해 봉함 기타 비밀장치한 사람의 편지, 문서, 도화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기술적 수단을 이용해 그 내용을 알아 낸 경우 처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복구나 수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맡겼다고 해도 본인의 의사에 반해 기술적 수단 등을 이용해 그 내용을 알아냈다면 비밀침해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정씨가 휴대전화를 맡기면서 데이터 확인절차가 필요한 데이터복구업체 업무 특성상 동영상이나 카톡대화를 일시적으로 확인해도 된다는 의사를 보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업체 직원이 이 데이터를 고객이 아닌 제3자에게 사후에 전달했다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될 수 있다. 김운용 변호사는 "카톡 대화가 파일 형태로 돼 있긴 하지만 제3자간의 통신내용인 점을 고려하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향후 재판에 넘겨질 경우에는 '증거 능력'도 문제될 수 있다. 업체 직원이 복구한 파일이 맞다면 법리적으론 '사인(私人)'에 의한 위법수집증거가 된다.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가 기록된 파일을 제3자가 취득해 넘긴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엔 해당 자료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모든 사인에 의한 위법수집증거가 배제되는 건 아니다. 제한적으로 비교형량을 통해 증거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런데 통신비밀보호법 제4조는 불법감청 등으로 기록된 전기통신 내용은 재판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돼 있다. 따라서 증거로 쓰이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수사기관에선 정씨와 카톡 대화방 참여자 등 관련자들을 기소하기 위해선 이 파일을 참고해서 별도의 수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해야만 한다. 또한 업체에서 데이터복구한 자료가 방 변호사를 통해 권익위에 전달됐고 다시 검찰에 넘어갔다면, 그 과정에서 정보가 오염될 가능성도 높다. 이런 경우의 데이터 파일은 증거로 쓰이기 어렵다. 유동주 기자 ━강남 클럽의 민낯…어쩌다 '범죄 온상'으로…━[버닝썬 게이트]현재 클럽, 과거 '클럽+나이트클럽' 형태…운영 방식·수익 구조 달라져 범죄 행위 움튼 듯 서울 강남 일대 '클럽'이 범죄의 온상으로 떠올랐다. 탈세부터 마약류 유포·투약, 경찰과의 유착까지 다양하다. 클럽 업계 관계자들은 클럽의 운영방식이 바뀌면서부터 범죄 행위가 움튼 것 같다고 말한다. 14일 클럽업계 등에 따르면 소규모 클럽까지 포함해 서울에만 클럽이 100여개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아레나 △버닝썬 △페이스 △강남메이드 △옥타곤 △매스 등이 매출 상위권으로 꼽힌다. 보통 저녁 10시에서 11시에 문을 열어 아침 7시에 닫으며, 버닝썬의 경우 목금토일 4일 영업하는 구조였다. 현재 강남 클럽은 춤추는 무대인 스테이지와 그 주변을 둘러싼 테이블, 룸(방)을 모두 갖춘 형태다. 과거 클럽은 주로 춤을 추는 공간만 갖췄는데, 클럽 업계가 성장하면서 테이블과 룸으로 이뤄진 나이트클럽의 특징이 합쳐졌다. 2000년대 중후반 나이트클럽이 구시대적 장소로 20대에게 외면받으면서 클럽과 나이트클럽이 섞인 지금의 '클럽'이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수익 구조도 달라졌다. 과거 클럽과 나이트클럽은 술값과 입장료에서 주로 매출을 올렸지만 지금 강남 일대 클럽은 테이블과 룸에 비용을 청구해 매출을 얻는다. 강남 일대 한 클럽 관계자는 "강남서 1·2위를 다투던 버닝썬과 아레나는 매출 90% 이상을 테이블 손님에게서 얻고 있다"며 "아레나는 한 달 매출이 4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강남 일대 클럽 테이블 이용료는 보통 100만~200만원, 룸 이용료는 300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위치에 따라, 혹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는 테이블 가격이 700만원을 넘기도 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25만원부터 시작하던 테이블 값이 지금은 100만원대로 올랐고 그만큼 서비스도 달라졌다. 강남 일대 클럽이 과거 나이트 클럽의 부킹 서비스를 도입하면서부터다. 클럽 매출 상당 부분이 테이블과 룸 예약 손님에 달려 있는 셈이다. 클럽에서는 고액을 지출할 수 있는 '큰손'을 유치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 이 과정에서 '마약'과 '성접대', '불법촬영' 등 온갖 불법 행위를 벌인다고 클럽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클럽 버닝썬 개장 이후 112 신고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이후 강남경찰서 역삼지구대에 접수된 버닝썬 관련 신고 중 마약은 1건, 성추행 피해·목격 신고는 5건이었다. 실제로 버닝썬 대표인 이문호씨와 MD(머천다이저, 상품기획자) 조모씨, 중국인 애나 등은 모두 마약류를 흡입하거나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손님의 이목을 끌기 위해 버닝썬은 1억원을 호가하는 일명 '만수르 세트' 상품을 기획하기도 했다. 실제 중동의 거부 만수르가 이용했다는 것으로 전해지는 만수르 세트에는 한 병에 수천만원인 '아르망 드 브리냑'과 '루이 13세 브랜디' 등으로 구성돼 있다. 현금이 많은 중국인 관광객을 유혹하기 위해서라는 게 클럽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VIP 손님이라면 미성년자도 클럽 출입이 가능했다. 지난해 7월 미성년자가 강남 클럽 버닝썬에 출입해 수천만원대 술을 마셨고 부모의 신고로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버닝썬 대표가 경찰에 돈을 건넸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클럽과 경찰 간 유착 혐의가 드러났다. 방윤영, 임찬영 기자 ━성범죄에 뇌물·탈세까지…클럽 유착 어디까지?━[버닝썬게이트]"경찰총장'이 뒤 봐준다" 카카오톡 나오면서 유착 의혹 일파만파 '버닝썬'의 마약·성범죄에 이어 '아레나'의 탈세까지 서울 강남일대 클럽업계의 각종 범죄 의혹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업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탈법을 감시·감독해야 할 당국이 오히려 의혹을 눈감아 준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온다. 여기에 가수 정준영씨(30) 등이 들어있는 카카오톡 대화방에 "경찰총장이 뒤를 봐줬다"는 내용까지 나오면서 경찰 최고위층 연루 '게이트'로 번질 조짐마저 보인다. 경찰은 최고위층까지 거론되는 등 유착의혹이 일파만파 커짐에 따라 126명 규모 특수수사팀을 구성해 이번 의혹에 전면 대응에 나섰다. 가장 먼저 불거진 유착의혹은 강남경찰에 대한 뇌물이다. 단순 폭행, 성폭력 사건에서 권력기관 유착 의혹으로 급선회한 것도 사건무마 대가로 금품이 오갔다는 진술이 나오면서다. 지난해 7월 미성년자가 출입한 사건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전직 경찰관 강모씨가 버닝썬과 경찰의 '브로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강남경찰서는 사건 발생 한 달 뒤 '증거 부족'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경찰이 당시 버닝썬의 여러 불법 정황을 묵인했다는 의심이 나오는 대목이다. 논란이 커지자 경찰은 그동안 버닝썬 폭행-성추행 사건을 수사해온 강남서를 배제하고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로 수사를 일원화했다. 경찰은 버닝썬 공동대표 이모씨 등 뇌물 의혹에 연루된 인물을 여러 차례 소환 조사하며 유착 의혹을 밝히는 데 집중했다. 뇌물전달자로 의심받고 있는 강씨에 대해선 한차례 반려된 구속영장을 재신청, 15일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를 앞두고 있다. 탈세 의혹에서도 빠짐없이 과세당국이 등장한다. 가수 승리(29·본명 이승현)의 해외 투자자 성접대 의혹이 제기된 장소인 아레나에서 봐주기식 세무조사를 한 정황도 포착된 것이다. 국세청은 이씨의 성접대 의혹 장소로 지목된 클럽 '아레나'의 수백억대 탈세 혐의 조사 과정에서 전·현직 사장들로부터 실소유주에 대한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과세당국은 아레나의 150억원대 탈세 혐의 고발 당시 실소유주를 뺀 '바지사장'만 고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11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을 압수수색해 국세청에서 강씨를 제외하고 서류상 대표 6명만 고발했다는 점을 포착했다. 2017년 국세청에 들어온 최초제보에는 강씨가 등장했지만 고발장에는 빠진 것이다. 경찰은 강모씨가 아레나의 실소유주라는 진술을 확보하고 국세청에 고발을 요청했지만 한 달 넘게 지연되고 있다. 여기에 클럽에 주류 등 각종 유통망을 둘러싸고도 탈세 의혹이 나온 상태다. 이들 유통업체에 자리잡은 전직 공무원들 '입김'이 작용한다는 설도 유착의혹을 키우고 있다. 이밖에 경찰은 아레나 측이 식품이나 소방 관련 규정을 두고 전방위 로비를 벌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김영상 기자 ━'아레나 탈세 수사' 난관…국세청 입만 보는 경찰━[버닝썬 게이트]국세청, 경찰의 고발요청 한달 넘게 외면…실소유주 지목 강모씨 '의혹 핵심 인물' 강남 유명 클럽 아레나 탈세 의혹과, 국세청 봐주기 세무조사 의혹 등을 수사 중인 경찰이 좀처럼 수사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버닝썬의 폭행사건에서 시작한 각종 파문이 강남 일대 클럽과 각종 관가 유착의혹으로 번지고 있지만, 탈세의혹 수사만큼은 더딘 모양새다. 수사지연은 국세청에 이번 수사의 핵심 인물이자 아레나 실소유주로 지목된 강모씨에 대해 고발요청을 보냈지만 한달 넘게 회신이 오고 있지 않아서다. 국세청에서 고발을 미루면서 아레나 탈세 의혹, 국세청 봐주기 조사 의혹 수사도 난관에 봉착했다. 14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는 서울지방국세청 관계자 등을 참고인으로 부르고 2차 압수수색으로 얻은 세무조사 자료를 분석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국세청 직원은 피의자로 전환된 사람이 없다"며 "국세청 직원을 참고인으로 계속해서 부르는 등 탈세, 봐주기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 고위관계자 연루 의혹과 2016년 가수 정준영 몰카 사건 무마 의혹 등으로 경찰 전체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분위기 반전을 끌어낼 카드로 보고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검찰로부터 내려받은 아레나 탈세사건 수사는 사실상 마무리 단계라는 게 경찰 안팎의 해석이다. 문제는 아레나 탈세 의혹의 핵심인 강모씨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은 지난해 8월 국세청이 고발한 아레나 전현직 사장 6명을 조사하면서 실소유주가 강씨라는 정황과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강씨를 본격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올해 1월 말쯤 국세청에 강씨를 고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기려면 반드시 국세청의 고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세청에서는 추가 세무조사 등을 이유로 고발을 미루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강씨를 입건하고 피의자로 전환했지만 국세청의 고발 없이는 공소 제기가 안 되는 상황"이라며 "국세청이 고발해 주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국세청의 봐주기 의혹의 중심에도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경찰은 지난해 11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을 압수수색해 국세청에서 강씨를 제외하고 서류상 대표 6명만 고발했다는 점을 포착했다. 2017년 국세청에 들어온 최초제보에는 강씨가 등장했지만 고발장에는 빠진 것이다. 경찰은 지난해 12월27일 강씨를 긴급체포한 뒤 다음날인 28일 증거 인멸 우려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 보강을 이유로 이를 반려했다. 경찰은 이달 8일 세무조사 과정상 작성된 서류 등을 확보하기 위해 국세청에 대한 2차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경찰 관계자는 "국세청에서 기존에 고발한 6명은 바지사장으로 보고 강씨에 대한 수사에 집중할 계획"이라며 "기존 6명의 사건 처리는 향후 강씨와 함께 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강씨에 대한 고발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세무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경찰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기 위해 조사 중"이라고 해명했다. 최동수 기자 ━'몰카방지법' 현주소…2·3차 유포자도 처벌━[버닝썬 게이트]처벌 수위 강화 추세, '유포 방지' 노력도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몰카'(불법촬영물)가 성행하면서 이를 처벌하기 위한 관련 법도 마련됐다. 국회는 2010년 '성폭력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을 제정했다. 14일 경찰에 출석한 가수 정준영씨는 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를 받는다. ◇몰카 형량 강화, 2·3차 유포자도 처벌=이 법은 지난해 12월말 개정됐다. 예전보다 처벌 강도가 높아졌다. 자신의 신체를 찍은 촬영물을 유포하거나 동의 하에 남의 몸을 찍은 촬영물을 유포해도, 남의 몸을 동의 없이 촬영해 유포하는 행위와 똑같이 처벌된다. 복수심에 유포하는 '리벤지포르노' 등 불법 촬영물 처벌 역시 강화됐다. 촬영물이 촬영 당시 동의에 의해 제작됐어도 이를 동의 없이 유포하면 5년 이하 징역을 살거나 3000만원 이하 벌금을 내야 한다. 자기 신체를 촬영해 유포하는 것도 범죄다. 이에 대한 처벌 수위도 남의 신체를 촬영해 유포하는 것과 같아졌다. 자기 신체 촬영물을 유포하다 적발될 경우에도 촬영자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 영리 목적으로 동의 없이 촬영된 영상을 유포하면 무조건 징역이다. 당초 '징역 7년 이하와 3000만원 이하 벌금'이었던 형량에서 벌금형이 삭제됐다. 불법촬영물을 2차·3차로 유포한 자도 신상공개 포함 처벌을 받게 됐다. ◇불법촬영물 삭제 근거 신설, 식당엔 몰카 방지 의무=지난해 국회는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불법촬영물 삭제지원 근거와 구상권 행사 근거를 만들었다. 또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부가통신사업자에게 명백한 불법촬영물에 대해 삭제∙접속차단 등 조치를 취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를 위반하면 20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국회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도 손을 댔다. 수사기관이 요청한 관련 불법촬영물을 삭제∙차단하도록 패스트트랙을 마련했다. 식당 등 공중위생영업자에 몰카 설치금지 의무 규정이 생겼다. '공중위생관리법'이 개정되면서다. 해당 법안은 감독관청에게 공중위생영업소의 몰카 설치 검사권을 줬다. 몰카가 단속된 경우 영업소 폐쇄 등 행정제재 처분을 내릴 근거가 생긴 것이다. ◇"몰카 처벌 더 강화"…계류중인 법안들=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는 13일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준을 강화자는 내용이다. 윤 원내대표는 "최근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및 촬영물 유포행위 등 디지털성범죄로 인한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며 "디지털성범죄에 엄격히 대응하기 위해 현행법상 벌금액을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라 상향하는 등 처벌 수준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계류중이다. 몰카 등 범죄를 몰수·추징 대상 범죄에 추가하자는 내용이다. '변형카메라의 관리에 관한 법률안'도 계류중이다. 변형카메라 제조·수입·판매 등에 대한 사전규제를 도입하자는 게 골자다. '개인영상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은 개인영상정보의 안전한 처리·보호에 관한 사항을 규정했다. 개인영상정보 불법 유출 등으로 취득한 금품·이익은 몰수·추징토록 했다. 아울러 공중화장실 등에 몰카 설치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5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토록 했다. 김평화 기자 ━'정준영 루머' 해명, 왜 女연예인들 몫인가━[버닝썬 게이트]"사실무근"에도 女연예인 명예훼손…'신상털이'에 2차 피해도 심각 가수 정준영씨(30)가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 및 유포 논란으로 14일 경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가운데, 사건과 관련 없는 여자 연예인들의 명예훼손이 심각하다. 또 불법 촬영물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도 발생하고 있다. ◇실검 등장·댓글 언급… 女연예인 명예훼손에 소속사 "사실무근" 정씨는 2015년 말부터 10개월간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성관계 동영상 등 불법 촬영물을 수차례 공유한 혐의(성폭력처벌특별법 위반)다. 피해 여성은 1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이 사건은 지난 11일 오후 정씨가 속한 카카오톡 대화방을 폭로한 SBS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보도 이후 각종 '지라시'를 통해 아이돌 그룹 멤버 및 배우 등 여성 연예인이 이름이 거론됐다. 정준영과 친분이 있던 연예인을 걱정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서 여성 연예인 다수의 이름이 올랐다. 또 '정준영 OO(여성 이름)' 등이 자동완성·연관 검색어로 형성됐다. 관련 기사 댓글이나 커뮤니티 글에서도 끊임없이 실명이 언급됐다. 이에 배우 이청아와 정유미는 12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걱정 말라'는 글을 올려 의혹을 에둘러 부인했다. 해당 배우들의 소속사는 공식입장을 통해 강경 대응을 예고한 상태다. JYP엔터테인먼트도 12일 트와이스 공식 홈페이지에 악성 루머에 대해 "법적으로 가용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임을 알려드린다"고 경고했다. 배우 오연서의 소속사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도 13일 "당사 소속 배우 관련 내용은 전혀 근거 없는 루머"라며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다. 배우 오초희도 이날 SNS에 "정말 아니다. 전 관계없는 일"이라며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통의 연락을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14일 오전에는 문채원이 정준영 SNS에서 지속적으로 '좋아요'를 누른 모습이 포착됐으나 이는 개인 SNS를 해킹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몰카 상대는 누구?"… 2차 가해 일파만파 이처럼 여성 연예인들을 향한 루머와 해명이 잇따르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해명은 피해자의 몫인가", "왜 피해자에 이렇게 관심을 갖냐"는 반응도 나온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또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성관계 동영상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각종 커뮤니티, 카카오톡 오픈 채팅, SNS 등 익명으로 대화가 가능한 곳이라면 어김없이 '몰래카메라 상대가 누구냐', '동영상 구한다' 등 2차 가해가 발생했다. '여성가족부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에 따르면 2차 가해는 △성희롱 사건에 대한 소문 △피해자에 대한 배척 △행위자에 대한 옹호 등의 형태로 피해자를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 "몰카 피해자라는 주홍 글씨…신변 알려질까 두려워" 실제 피해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승리의 성 접대 의혹을 처음 제기한 기자는 한 인터뷰에서 피해자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은 그에게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고, 막막하고 두렵다"며 "살려 달라. 어떻게 살아야 되냐"고 토로했다. 또 "한 여자로서 이 몰카 피해자라는 주홍글씨를 평생 어떻게 따라 붙이고 살아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겠다"며 "강경 대응을 하고 싶어도 신변이 알려질까 봐 너무나 두렵다"고 고백했다. 이 같은 2차 가해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불법강간약물' 사용, 성 접대 등 '버닝썬 사건'이 불거진 후에도 그랬다. 성인사이트엔 '버닝썬 동영상'이란 이름의 영상이 올라왔고, 각종 커뮤니티에도 "버닝썬 동영상을 봤다"는 글이 올라오자 "동영상을 어디서 봤냐"는 답글이 달렸다. 2차 가해는 경우에 따라 법적 처벌이 가능한 범죄다.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를 담은 내용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전할 경우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전달받은 동영상을 재유포하는 것도 정보통신망법 제44조에 따라 처벌이 가능하다. 여성변호사들도 나섰다.14일 한국여성변호사회는 '불법촬영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즉시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정준영씨의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혐의 '2차 가해'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한지 경각심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이들이 '어딘가에 영상이 있겠지', '누굴까? 나도 보고싶다'는 생각으로 검색하고 있다"며 "가해자 조사가 가장 우선인데, 피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나서서 해명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황 평론가는 "유독 여성 피해자들에 주목하고 대상화하는 풍토가 있다. 이번 정씨 이슈에서는 '피해자'도 아닌 '피해녀'라는 워딩까지 등장했다"며 "정말 중요한 문제인 경찰의 부실수사나 전과자에 관대한 방송계 문화 등에 더 집중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민선 기자, 조해람 인턴기자 ━검·경수사권으로 더 달아오른 '버닝썬 게이트'━[버닝썬게이트] 검찰, 중앙지검서 직접 수사예정…경찰, 126명 대규모 수사인력 투입해 사활건 영역 다툼 지난 11일 밤 11시 세종시에서 올라온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들이 급하게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방문했다. 제보자로부터 받아 보관 중이던 정준영 휴대폰 파일을 직접 대검에 전달하면서 수사의뢰를 하기 위해서다. 권익위가 늦은 밤 먼 거리를 달려와야만 하는 상황이 된 건 경찰에 의한 압수수색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찰의 자료 협조요청에 권익위가 제보자보호를 이유로 응하지 않자 압수수색이라는 강제수사방법을 동원하기 직전이었다. 권익위 보관 자료가 대검에 넘어가자 13일 경찰은 아예 파일의 출처로 의심됐던 복구업체를 압수수색해 자료확보를 시도했다. 버닝썬게이트 초기부터 경찰은 인근 파출소 등 전현직 경찰들의 유착관계가 의심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를 의식한 경찰도 감찰반을 동원해 전반적인 자체 감찰과 수사를 동시에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권익위에 제보된 정준영 휴대폰 파일에 경찰 고위 관계자가 뒤를 봐준 것으로 의심되는 대화내용까지 있다고 알려지면서 경찰은 다급해졌다. 13일 아침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민갑룡 경찰청장은 126명이라는 대규모 수사팀을 꾸려 총력을 다해 수사하겠단 방침을 밝혔다. 경찰 유착의혹에 대해선 일단 사과를 하기도 했다. 권익위로부터 수사의뢰를 받은 검찰도 행동에 나섰다. 법무부장관도 14일 국회에 출석해 사건을 검찰에서 다루기로 했다는 점을 알렸다. 서울중앙지검 형사부가 수사를 맡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미 경찰에서 대규모 인력으로 수사 중인 사건임에도 검찰이 직접 나서겠다고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버닝썬게이트 관련 사건들의 파급력이 ‘검경수사권’ 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점을 검·경 양측이 다분히 의식한 듯한 모양새다. 사건 초기부터 국민적 불신을 받고 있던 경찰도 나름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정준영에 대해 이번 사건과 유사한 형태의 범죄신고가 들어와 지난 1월 이미 휴대폰 복구업체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검찰에 신청했으나 반려당했다는 점까지 밝혔다. 검찰 탓이란 뉘앙스다. 이에 검찰도 즉각 반박했다. 2016년 정준영이 처음 동영상 촬영으로 입건됐을 때 ‘무혐의’ 처분받은 사건과 올 1월 영장신청한 사건이 별개란 점을 소명해 재신청하라는 수사지휘였다는 것이다. 검찰과 경찰이 3년전과 지난 1월, 정준영 관련 과거 사건에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책임에 대해 서로 ‘네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준영·승리 등이 들어있는 문제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경찰총장'이라는 단어가 언급됐다는 소식에, 경찰청장이 긴급 기자간담회를 갖고 굳이 ‘경찰청장’이 아닌 오타로 보이는 ‘경찰총장’이라는 카톡 원문 그대로 보도해달라고 한 점도 눈에 띄는 점이다. 대화 정황상 ‘경찰 고위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경찰은 검찰수장을 뜻하는 ‘총장’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살려서 ‘검찰총장’의 오타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전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경찰 입장에선 검찰 고위 관계자도 연루됐을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 문제가 터진 강남 클럽 등 업소를 관할하는 현장 경찰들의 유착이 강하게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경찰은 연예기획사나 관련 사업가들과 검찰이 유착돼 있을 수 있다는 소위 ‘피장파장’ 전략을 쓰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검찰이 연예사업에 유독 관대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201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검찰이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 박봄에 대한 마약수사에서 이례적인 ‘입건유예’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검찰이 입건조차 하지 않은 점에 대해 야당 의원들이 문제 삼았다. 박봄 뿐 아니라 버닝썬게이트의 핵심인 승리가 속한 빅뱅 멤버들이 대마흡연과 교통사고 등의 사건을 일으켰을 때도 상대적으로 처벌이 가벼웠다는 지적이 계속돼왔다. 수사의 최종책임과 기소여부 판단은 검찰에게 있기 때문에 검찰도 연예기획사들을 봐 준다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상기 법무장관이 올해 검·경 수사권 조정 시행을 중점과제로 삼겠다고 밝힌 가운데, 수사권 조정이 임박한 시점에 터진 버닝썬게이트는 그런 면에서 검·경이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대형 사건이 됐다. 중앙지검이 직접 수사하고 경찰청장이 매머드급 수사인력을 투입할 만큼 양 수사기관의 핵심 주요사건이 돼 버렸다. 유동주 기자 ━승리·정준영이 망친 한국 이미지?━[버닝썬 게이트]해외 K-POP 팬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부정적 반응… 외신도 '경찰 유착' '성매매' '몰카 범죄' 주목해 잇따라 보도 "K-POP 스타, 클럽 성매매 알선 사건에 연루" (美 NYT) "성매매 알선 용의자 된 승리… 몰래카메라·데이트 강간·성폭행, 한국의 고질적 문제" (美 CNN) "한국 문화 수출 핵심 K-POP 스타들… 한국 내 만연한 차별·폭력성 드러내" (佛 AFP통신) "승리·정준영이 보여준 한국, 몰카와 싸우는 나라… 한 해 보고된 몰카만 6000건" (英 BBC) "한국 상황, 한국 드라마에서 본 모습 그대로" (K-POP 해외 팬 트위터) '클럽 버닝썬' 관련 사건이 'K-POP 스타'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28)의 성접대 알선 의혹과 클럽 마약 투약 유통지 의혹, 경찰과 클럽 유착 의혹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새다. 나아가 정준영(30), 최종훈(29) 등 한류 연예인들의 불법 촬영 영상물(몰래카메라·몰카) 공유 의혹 등으로까지 확산하며 '버닝썬 게이트'로 비화했다. 해외 K-POP 팬들은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한국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고, 외신에서도 연일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국가 이미지 전반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K-POP 해외 팬들 "한국 경찰 당국과 정치권, 한국 국민 모두 문제" 15일 숨피(케이팝 관련 영문 웹사이트), 올케이팝(영어권 한류 사이트), SNS(사회연결망서비스) 트위터 등을 살펴보면 빅뱅 승리가 성접대 알선 피의자로 경찰 수사를 받게된 데 대해 한국 경찰 당국과 정치권, 나아가 한국 국민을 질타하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트위터에서는 "진짜 한국 드라마 그대로다. 한국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유명인 승리를 이용하네" "포털 네이버는 승리 관련 이슈를 뉴스 상단에 유지해 여론을 조작한다. 대통령의 잘못들을 숨기려고. 박근혜 전 대통령때도 이랬었지"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장 복구 정황에 이은 북미관계 악화 가능성, 미세먼지 등 민생의 어려움 등으로 지지율 하락(46.3%)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공유하고 이 같은 이유로 승리를 희생양 삼았다고 주장했다. 숨피에서도 해외 팬들의 '승리 감싸기'와 '한국 비판하기'가 이어졌다. 해외 팬들은 "승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다른 나라들은 한국처럼 이렇게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고 결론짓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가 유죄로 밝혀질 때까지 결백하다는 걸 믿는다"거나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다뤄져야한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은 처음부터 승리를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할 수 있나? 언론과 대중 모두 말이다. 한국인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댓글을 남겼다. 전문가들은 해외 팬들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전형적인 '사회심리적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황용석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해외 팬들이 승리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가짜뉴스를 받아들이고 확산하는 심리와 유사하다"면서 "자신이 믿어왔던 것이 무너지는 데 대해 심리적 저항이 생겨,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인지하고 본인과 다른 의견을 보이는 한국 언론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신들 "한국의 고질적 문제들, K-POP 스타들 통해 다시금 드러나다" 미국, 유럽 등 해외 언론도 경찰 유착 의혹 등 K-POP 스타 승리의 '버닝썬 게이트'와 또 다른 스타 정준영의 '몰카 촬영 의혹' 사건에 주목했다. 외신은 빅뱅 승리가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은 만큼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는 동시에 정준영의 의혹 관련 '몰카 범죄'를 '한국의 고질적 병폐'라고 보도했다. 미 CNN은 13일(현지시간) "빅뱅의 승리가 성매매 알선 용의자가 됐다"고 보도하며 한국의 고질적 문제로 여겨지는 몰래카메라, 데이트 강간 및 성폭행 등과 이번 사건이 관계있다고 설명했다. CNN은 서이지(CedarBough Saeji)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한국 문화사회학 교수를 인용해 "한국에서 K-POP 스타는 국가의 대표이자 공적 소비 상품"이라면서 "버닝썬 사건이 진실이라면 그동안의 K-POP 문화에서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사건은 한국에서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됐던 '몰래 카메라'와 '약물 성범죄'가 어떻게 여성을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AFP통신도 "한국 문화 수출의 핵심이었던 K-POP 스타들이 입길에 올랐다"면서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 만연한 차별과 폭력성을 드러냈다"고 분석했다. 특히 AFP는 '몰카' 관련 이슈에 주목하면서 "최근 한국에서 '몰카' 관련 사건이 연이어 문제시되고 있으며, 지난해 여름엔 수만명의 한국 여성들이 몰카 근절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영국 BBC도 정준영의 몰카 범죄 의혹을 집중 보도했다. BBC는 "한국은 최근 몇년간 마치 전염병과 같이 지독한 몰카 범죄와 싸우고 있다"면서 "한국 화장실과 탈의실 곳곳엔 몰카가 있고, 피해자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그대로 인터넷에 게시된다"고 보도했다. 이어 "한국은 2017년 한해에만 6000건 이상의 몰카 범죄가 보고된 나라"라고도 전했다. 이 밖에도 뉴욕 데일리메일, E온라인, 이브닝스탠더드, 포브스, T13 등 많은 외신이 이번 사건을 비중 있게 다뤘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이번 사건 관련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강화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스타가 마약과 연루된 일은 사실 해외 팬들이나 외신에도 충격은 아닐 것"이라면서 "하지만 '경찰 유착'이라든가 '몰카' 등의 이슈는 정말 충격적인 일로, 한국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사건이 서구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아시아의 그저 그런 나라'가 '역시나' 마약, 경찰 비리, 여성 차별과 여성 위협 등 나쁜 일들과 엮여있구나'하는 이미지를 주면서 이들의 오리엔탈리즘 편견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재은 기자 ━“K팝 넘어 대한민국 망신”…기획사 침묵 속 끝없는 신뢰 하락━[버닝썬 게이트]‘버닝썬·승리 게이트’로 본 케이팝의 미래…“경제적 손해는 물론, 대한민국 이미지까지 타격” 소위 ‘승리 스캔들’이 터진 이후 한류 스타들이 속한 대형기획사들은 말을 아꼈다. 말 한마디가 잘못 번져 또 다른 의혹을 생성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세세히 읽혔다. 승리가 속한 YG엔터테인먼트는 “메시지 조작” 멘트 이후 아무런 답변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아이돌 그룹을 보유한 중·대형 기획사 상당수 역시 연락이 닿지 않거나 답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욱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케이팝의 향후 이미지 타격에 대해 “요즘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서 관련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언급을 자제했다. 또 다른 B기획사 대표 역시 “케이팝 미래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 같다”고만 언급한 뒤 “더 이상 할 말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국내 기획사 관계자들이 말을 아끼는 사이, 외신은 서로 앞다퉈 버닝썬으로 촉발된 일명 ‘승리 게이트’에 대한 뉴스를 자세히 쏟아냈다. 영국 BBC는 11일(현지시간) ‘빅뱅:케이팝 스타가 성뇌물 의혹 속에 쇼비즈니스 중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며 승리의 성접대 의혹 수사와 가수 정준영 씨의 불법 촬영 동영상 등 디지털성범죄를 자세히 보도했다. 영국의 가디언지도 12일 'K-POP 스캔들:불법 성매매 혐의로 고발된 한국의 위대한 개츠비'라는 타이틀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가디언지는 블룸버그를 인용, YG엔터테인트먼트의 주가가 14% 하락했으며 다른 케이팝 기획사들도 손해를 봤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버라이어티는 지난 11일 "한국 가요계 거물 중 한 명인 승리가 성매매 여성 공급 혐의로 기소됐다"며 은퇴 소식도 함께 전했고 말레이시아 유력 일간 ‘더스타’ 온라인도 “승리를 둘러싼 일련의 의혹들이 한국 팝스타로서의 경력을 무너뜨릴지 모른다”고 보도했다. 케이팝 스타 중 특히 일본과 아시아권에서 가장 잘 나가던 빅뱅 멤버의 추락은 단순히 빅뱅 그룹이나 YG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방탄소년단이 정점을 찍은 케이팝의 공든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는 비판과 함께 다른 케이팝 스타들의 해외 활동에 이미지 타격이 작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지배적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단순히 승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단체방 대화에 참여한 한류스타들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라며 “한국 연예계가 그간 깨끗하다고 여긴 해외 팬들에게 지저분하다는 이미지를 던져줬고, 이는 곧 케이팝 이미지의 전체적 실추로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는 “아시아권보다 미국이나 유럽 쪽 보도가 많은데, 이는 그들이 성범죄나 마약 등을 가장 중요한 보도로 여기기 때문”이라며 “다시 말하면 아시아권에서 케이팝은 콘텐츠에 따라 재기할 여지가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선 이미지 실추 하나로 콘텐츠도 동반 하락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지금 케이팝을 이끄는 선두주자들이 대개 상업성과 거리를 둔 콘텐츠(가사나 장르)로 승부하면서 케이팝 브랜드의 차별화, 상업과 타협하지 않는 예술성 등에 접근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콘텐츠 위선에 대한 논란, 브랜드 이미지 추락 등이 도마에 올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헌식 평론가는 “약간은 저항문화적 기질을 가진 스타들이 그간 케이팝을 이끌었는데, 앞으로 공신력 있는 곳에선 케이팝의 가치를 높게 매기기 어려울 것”이라며 “일반 대중에게선 콘텐츠 자체로 재기할 수 있어도 심기일전 물갈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재근 평론가는 “이번 사건이 여성이 혐오하는 범죄와 연루돼 케이팝 팬들의 상당수인 해외 여성 팬들의 충격이 작지 않다”며 “사건과 관계없는 다른 스타들에게 불똥이 튈 것이 가장 우려된다”고 말했다. 아이돌 그룹이 매년 늘어가는 추세에 맞춰 기획사의 관리 체계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 중견 기획사 C이사는 “신인 땐 관리 감독이 제대로 먹혀드는 것 같은데, 스타가 되면 통제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불안한 정서나 잘못된 성인식에 대한 전문가 교육 시스템을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헌식 평론가는 “경제적 손해도 엄청나겠지만, 무엇보다 케이팝을 넘어 대한민국 브랜드 이미지까지 타격받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김고금평 기자 ━'K팝 개츠비'의 몰락…외신이 본 승리·정준영 사태━ [버닝썬 게이트]이상적인 문화 수출품에서 마약·성접대 의혹 범죄자 나락까지 K팝 그룹 빅뱅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의 성접대 의혹이 가수 정준영의 불법촬영 촬영 혐의로 커지며 외신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13일(현지시간) 영국 BBC는 '정준영:비밀 섹스 비디오로 케이팝 스타 은퇴(Jung Joon-young: K-pop star quits over secret sex videos)'라는 제목으로 정준영의 연예계 은퇴 소식과 승리 성접대 의혹을 다뤘다. BBC는 "연예계 섹스 스캔들이 커지면서 두 번째 K팝 스타가 극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며 "이는 빅뱅 그룹 멤버인 슈퍼스타 승리로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 지 하루 만에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준영에 대해선 "버라이어티 쇼로 잘 알려진 싱어송라이터"라고 표현했다. BBC는 정준영의 불법 촬영 혐의 기소가 처음이 아니라는 내용도 부연했다. 정준영은 2016년 9월 전 여자친구의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했으나, 검찰 수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당시 정준영은 "동의를 받고 촬영했다"고 주장했다. BBC는 "한국에선 현재 포르노 불법 촬영을 근절하는 움직임이 급격히 퍼지고 있다"며 "2017년에만 신고가 6000건을 넘었다"고 설명했다. NYT도 같은 날 정준영이 불법 촬영 관련 사과문을 올렸다고 보도하며 "한국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촬영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만6500달러(30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NYT는 전문가의 말을 빌려 관련 법 진행이 느슨하다고 지적했다. NYT는 "지난해 (불법 촬영) 6800건 중 삼 분의 일 가량이 재판에 넘겨졌고, 재판 열 건 중 한 건보다 적은 꼴로 징역형이 나왔다"고 전했다. 이날 프랑스 AFP 통신은 정준영의 경찰 출석 동영상을 메인 홈페이지에 편집자 추천(Editor's Pick) 중 하나로 올리기도 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정준영의 소식과 함께 승리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뤘다. SCMP는 승리에 대해 "스캔들 전까지만 해도 잘생긴 외모, 성공적으로 보이는 사업, 화려한 파티 등으로 위대한 승츠비(승리+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이름)'로 불렸던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SCMP는 팝 문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승리가 '이상적인 문화 수출품'(ideal cultural export)으로 여겨졌다"고 표현했다. 또한, 사태를 바라보는 빅뱅 팬들이 실망과 불신으로 양분됐다고도 언급했다. "몇몇 해외 팬들이 꽃을 든 사진과 함께 '꽃길에서 기다릴게'(지난해 3월 빅뱅 발매곡 '꽃길' 가사 일부)라는 문구를 올렸다"고 전했다. SCMP는 'K팝 레이블 YG가 승리, 지드래곤 등이 섹스·마약 스캔들에 휩싸이며 위기에 빠졌다'는 제목으로 승리뿐만 아니라 같은 그룹 멤버인 지드래곤의 마약 의혹 등도 함께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YG 스타들의 연이은 마약 의혹으로 회사 평판은 더럽혀졌고, YG가 '약국'의 약자라는 조롱까지 얻었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오전 10시 정준영은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유포 혐의로 출석했다. 정준영은 해외 촬영 중이던 지난 13일 새벽 입장문을 통해 "모든 죄를 인정한다"며 연예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승리 역시 성 매매 알선 혐의로 출석했다. 승리는 지난 10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 뒤 12일 연예계 은퇴 소식을 알렸다. 강민수 기자 ━정준영, 그때 복귀하지 못했다면…━[버닝썬 게이트]"제작진 과거 비슷한 논란에 둔감하게 대처…책임 피하기 어려워" 수면 위로 드러난 가수 정준영씨의 성관계 동영상 불법 촬영. 똑같은 논란이 3년 전에도 있었다. 정씨는 2016년 전 여자친구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혐의로 피소됐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고 3개월 만에 복귀한 바 있다. 경찰을 비롯해 방송가도 정씨의 악행을 제지하지 못한 셈이다. 그로부터 3년 뒤 오늘(14일) 정씨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에 출석하게 됐다. 2015년 말부터 약 8개월 동안 동의 없이 성관계 영상을 촬영하고 이를 지인들과의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이나 개인대화방에서 공유한 혐의다. 불법촬영 피해를 당한 여성은 10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2016년 검찰은 전 여자친구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정씨가 피해자와 합의했고, 증거가 부족하다는 근거다. 수사기관이 당시 정씨의 휴대전화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최근 밝혀졌다. 그는 이 사건으로 2016년 10월 자숙의 의미로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만에 KBS '해피선데이-1박2일(이하 1박2일)'로 복귀했다. 당시 1박2일 제작진은 "무혐의 처분 이후 최근 잇따라 정준영 복귀에 대한 이슈가 생겨, 복귀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1박2일 멤버들도 방송에서 정준영에 대한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다. 일부 여론은 "이른 복귀"라며 비판했지만, 많은 대중들도 이후 '1박2일'을 비롯해 tvN '짠내 투어', '현지에서 먹힐까?' 등 그가 등장한 방송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정씨 외에도 '무혐의' 처분을 받은 스타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복귀했다. 개그맨 이수근은 2005년 성폭행 혐의 논란이 있었지만, 무혐의로 판명돼 7개월 만에 방송에 복귀했다. 가수 겸 배우 박유천도 2016년 성추문에 휘말렸으나, 이후 성폭행 혐의에 대해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고 최근 앨범을 발매했다. 가수 겸 배우 김현중도 임신, 폭행 관련해 전 여자친구가 제기한 소송에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고 4년 만에 안방극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밖에 2002년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배우 이경영은 최근 SBS 드라마로 복귀했다. 전문가들은 "성범죄 의혹 관련 연예인들의 복귀에 대해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방송사가 출연자 선정 가이드라인 수립을 비롯한 전반적인 방송 제작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당시 '1박2일' 제작진 등이 성범죄 관련 혐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둔감하게 대처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며 " 특히 '1박2일'은 대표 예능프로그램인만큼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또 "무혐의라는 건 죄가 없단 게 아니라 법적으로 증거를 찾기 어려웠다는 측면이 강하다"며 "고소를 취하하며 정리된 측면도 있는 만큼 그런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방송 프로그램은 아무리 '리얼'이라고 해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며 "대부분 편집될 가능성이 높아 시청자들이 출연자의 문제를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어 "방송사들의 출연자 선정에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민선 기자 사회 > 일반 | 박준식 기자, 이영민 기자, 이동우 기자, 황국상 기자, 이재은 기자, 이미호 기자, 최민경 기자, 유동주 기자   2019.03.15 06:30

  • 아시아의 부국(富國)은 왜 가난해졌나
    아시아의 부국(富國)은 왜 가난해졌나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①] 70년대까지 아시아 경제 이끌던 선도국가… 80년대 아시아 첫 여성대통령 배출하는 등 앞서나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어릴 적 차를 타고 서울 중구에 위치한 장충체육관 근처를 지날 때 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저기 밖에 봐봐, 저 체육관은 과거 우리나라가 잘 못살았을 때 필리핀이 만들어준거야. 당시 우리나라에 이걸 만들 정도의 기술력이 없었대. 돈도 없었고. 그랬던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했으니 대단하지?" 훗날 어른이 돼서야 알게됐지만, 어머니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장충체육관은 건축가 故김정수의 설계로 서울시의 예산과 국고보조금 등으로 만들어젔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한국을 불쌍히 여긴 필리핀이 체육관을 무상으로 지어줬다거나, 한국인 엔지니어가 아닌 필리핀인 엔지니어가 설계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종의 유언비어였다. 하지만 이 유언비어는 꽤나 강력해서, 많은 국민은 아직까지 이를 사실로 믿고 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책 등에서도 "1963년 개장한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이 지어준 것이다" 등의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이 같은 말을 큰 근거가 없는데도 수많은 국민이 그대로 믿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럴만해서'다. 필리핀은 과거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선망했던 아시아의 대표 국가로, 수십년 전까지만해도 '꽤나 잘 살고' '정치적으로도 선진적인' 아시아 국가로 자리했었다. 필리핀은 독립이후 1970년대까지 아시아의 경제를 이끄는 경제 선도국가이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창설한 주도한 국가였다. 필리핀에는 금, 구리, 니켈, 크롬, 알루미늄 등 풍부한 광물이 있다. 연중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가져 쌀, 옥수수, 바나나, 설탕, 사탕수수, 카사바 등 농작물 생산도 풍부하다. 이런 필리핀은 1946년 미국에서 독립한 뒤 1950년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성장을 이룩했다. 이후 마르코스가 집권한 첫 시기(1965년~)에도 적극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제조업 분야에 민간자본의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당기간 성장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966년 기준 필리핀의 GDP(국내총생산)은 63억7100만 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GDP는 39억2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필리핀의 GDP는 동남아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높은 것이었다. 1966년 태국의 GDP는 52억7000만 달러, 말레이시아 GDP는 31억4400만 달러였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였다. 자연히 필리핀은 아시아 국가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아시아의 부국으로 자리한 필리핀에는 각종 국제기구도 자리했다.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아시아개발은행(ADB) 본점 역시 이 당시 아시아의 대표국 필리핀에 생긴 국제기구 중 하나다. 1963년 유엔아시아유럽경제위원회(UNECC)가 주최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에서 ADB 설치가 통과된 뒤 1966년 12월19일, 마닐라가 ADB 유치지로 최종 낙점됐다. 뿐만 아니다. 필리핀은 정치적으로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한발짝 앞서 나가는 이미지였다. 필리핀에는 '태평양의 아이젠하워'라 불리는 막사이사이가 있었다. 막사이사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게릴라를 이끌고 일본과 싸웠으며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국방 장관을 거쳐 1953년 제7대 대통령이자 필리핀 공화국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후크발라합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내란을 수습하면서 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대통령 임기 중 막사이사이는 그의 청렴성으로 또 한번 존경을 받았다. 그는 가족 및 측근에게 어떠한 혜택도 부여하지 않았다. 자신의 우상화를 경계해 도로, 다리, 및 건물 등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호명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 의전 특권을 반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국민에겐 가히 파격적인 지도자였다. 그가 1957년 세부 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국하자 전세계적 추모 물결이 일었다. 1958년 록펠러 재단이 막사이사이 재단을 설립, 막사이사이상을 제정했을 정도다. 막사이사이상은 자유를 위한 막사이사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시아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참고로 한국인 중 장준하, 김활란, 법륜스님, 윤혜란, 박원순 등도 이 상을 수상했다. 이후 필리핀은 독재자 마르코스의 독재 정치 시기를 거치며 암흑기에 빠져든다. 마르코스는 1965년 국민당 공천으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21년간 장기집권했다. 물론 마르코스 역시 집권 초기에는 농공업 정책을 시행하고, 토지 개혁 등을 시도하는 등 개혁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본인을 비롯 친인척과 수구 엘리트 세력의 재산 수호에 급급하는 등 전형적인 독재자가 된다. 19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지하고 정적과 언론인을 투옥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필리핀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존경심과 부러움은 급격히 낮아졌다. 마르코스가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을 암살하고 국민의 신임을 잃어 반마르코스 열풍이 불었는데, 이때 대다수 필리핀 국민의 지지를 받아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필리핀은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민중의 힘으로 정권을 재창출했고, 민주정권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1986년 2월25일, 독재정권과 부패한 관리, 무능한 정부 등에 대항해 민중이 궐기하고 이로써 마르코스 대통령이 물러난 사건을 '피플파워'(People Power·민중의 힘) 혁명이라고 부른다. 당시 한국을 비롯 주변 국가들은 제대로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했던 때였기에 필리핀 국민이 창출해낸 정권과 배출한 대통령은 아시아 국가의 부러움을 받았다. 더군다나 코라손 아키노는 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자, 이처럼 필리핀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이미지였고 1970년대까지 마닐라는 해외 다른 유명 도시에 밀리지 않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1980년대엔 민주주의 측면에서 앞서가는 정치문화적 리더의 면모도 보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필리핀은 이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불린다. 필리핀 통계청의 2009년 자료에 의하면, 5인 기준 가구당 월 소득이 134달러 이하인 빈곤층이 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필리핀 도시 곳곳은 마약과 마피아로 가득해 위험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필리핀을 함부로 여행할 경우 여권법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는다. 필리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외에 나가서 일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가사도우미로 나가 세계 곳곳에서 일한다. 필리핀은 이제 '가정부의 나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분명 필리핀은 진보하거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오히려 퇴보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문제들이 필리핀을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을까.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참고)는 "잘못된 지도자는 첫 번째 임기에 정권을 망치고, 두 번째 임기에 나라를 망친다"면서 필리핀의 처참한 발전상에 대해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독재와 관련해 비판했다. 과연 필리핀의 현재 모습은 정말 마르코스 시기의 잘못된 정책들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음 편에서는 필리핀의 현재 모습을 짚어보고 어디서부터 필리핀이 꼬였는지 하나씩 살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필리핀 그리고 빈국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3.11 06:05

  • "오지마!"… 관광객에 질린 <strong>나라</strong>
    "오지마!"… 관광객에 질린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관광객 ②] 독일 베를린, 관광객 많이 찾은 도시 3위… '오버투어리즘' 문제 겪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Tourist : your luxury trip my daily misery." (관광객 여러분, 당신의 호화스런 여행은 내 일상의 고통입니다.) 몇년 전까지 서울 대학로 근방 이화동 벽화마을을 즐겨 찾았다. 산 중턱 높은 고도에 위치해 발밑에 서울이 쫙 펼쳐보이고 바로 옆엔 낙산공원 성곽이 둘러져있는 데다가, 아름다운 벽화가 가득 그려져있어서다. 낮에 가면 따뜻해서, 밤에 가면 한적해서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감흥에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한 기사를 읽은 뒤 내 존재가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겐 방해물이 된다는 걸 알게돼서다. 기사는 이화마을 주민들이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와 이들이 내는 소음 등으로 고통받아 벽화를 지우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그러고보니 혼자 앉아 주변을 구경할 때, 큰 소리로 떠드는 이들이나 남의 집 문 앞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이들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곳은 이화마을 뿐만 아니다. 서울 북촌 한옥마을, 서촌 세종마을, 통영 동피랑마을, 부산 감천마을, 전주 한옥마을 등도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다. 관광객들로 인해 거주민들의 생활이 파괴되는 걸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이라고 부른다.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을 일컫는 '오버투어리즘'은 환경·생태계를 파괴하고 관광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 같은 현상은 관광객들의 목적지가 국립공원, 테마파크 등 전통적 위락시설에서 도심 및 지역사회로 확산되면서 나타났다. 과거의 관광형태가 관광지와 주거지가 분리되어 있었다면, 오늘날엔 관광을 위한 장소와 주거 목적의 장소가 혼재돼있기 때문이다. 주거지가 관광지로 개발되고 관광객이 주거지를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관광객과 지역주민 간의 갈등은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관광지화'를 의미하는 touristify와 지역의 상업화로 인하여 원주민이 내쫓기는 현상을 의미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합성어. 일반 주거지역이 관광지화됨에 따라 실생활에 불편을 겪는 주민이 이주에까지 이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오버투어리즘과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을 겪고 있는 지역에서는 모두 초기엔 이 같은 문제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주민이 떠나 지역사회가 공동화되기 시작하자 문제를 인식했다. 이탈리아 북서부 수상도시 베네치아가 대표적이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섬으로 구성돼 177개 수로에 400여개의 다리가 놓여져 아름다운 풍경을 가졌다. 이 때문에 연간 전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베네치아 인구는 5만명에 불과하지만, 연간 관광객은 2500만명에 육박한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도시는 관광객이 남기고 떠난 쓰레기로 가득찼다. 생활에 필요한 식료품점 대신 관광객 상대의 기념품숍이 들어섰다. 현지인들이 드나들던 식당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사라졌고, 대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값이 비싼 식당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베네치아에선 2010년대 초반부터 대형 크루즈의 정박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관광객을 상대로한 폭력사건까지 벌어졌다. 1955년 17만5000여명이었던 인구는 날이 갈수록 감소했다. 인구가 5만명을 찍으며 도시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베네치아 당국은 관광세 등 세금을 도입해 비용 부담을 높이는 방식으로 관광 수요를 억제했고, 주거지역으로 들어오는 지점 두 곳에 회전문으로 된 검문소를 설치했다. 성수기엔 현지 주민만 통과시키려 한 조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마요르카, 포르투갈 포르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랑스 파리, 그리스 산토리니,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히말라야 부탄, 일본 교토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독일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유럽도시 마케팅 벤치마킹 리포트에 따르면, 베를린은 2015년 1237만명이 찾으며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 이어 관광객이 많이 찾은 도시 3위에 자리했다. 기본적으로 인기 관광의 흐름이 좀 더 '현지인스럽게', 좀 더 '주거지'로 바뀌면서 다른 도시도 영향을 받았지만, 베를린의 경우 더욱 큰 영향을 받았다. 베를린은 '힙스터 도시'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에펠탑·타지마할·마추픽추… 상징물 없이 관광대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관광객 ①] 참고) 힙스터는 '꾸며진 것' '작위적인 것'을 싫어한다. 자연스럽게 누더기가 된 옷을 사랑하고, 주름진 얼굴을 굳이 화장으로 가리지 않으며, 허름한 건물을 부시지 않고 다시 정비해 새롭게 사용한다. 이런 힙스터들은 여행을 가더라도 관광객 스타일로 하길 원치 않는다. 각종 '타워'나 '동상' 등 관광 명소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는 등의 관광 말이다. 대신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타인'의 눈에서 도시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히 도시에 동화돼 '현지인'의 눈에서 바라보길 원한다. 이 같은 힙스터 트렌드가 전세계적 흐름과 맞물릴 때 등장한 에어비앤비는 '동네 놀이'를 가능케하면서 힙스터들의 구미를 완벽히 잡아냈다. 호텔과 비슷한 값에 현지인이 가는 마트를 가서 식재료를 사고, 현지인처럼 요리해서 밥을 먹고, 현지인처럼 한적한 동네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해 '현지인 로망'을 충족시켜주면서 말이다. 당국도 이 같은 흐름을 반겼다. 베를린 관광청은 '동네를 경험하다·베를린 12개 지역 현지인처럼 즐기기'(Kiez erleben) 여행 관광 소개서와 앱을 발간해 어떻게하면 좀 더 현지인처럼 베를린을 즐길 수 있을지 소개했다. 페트라 헤도르퍼 독일관광청장은 "독일 관광 지표는 세계 경쟁 속에서 강력한 포지셔닝을 통해 발전을 해왔다. 세계 여행객 수가 천천히 증가하는 반면 독일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진짜 현지인'이 입게 됐다는 것이다. 베를린의 집값은 유럽에서 비싼 편이 아니었지만, 2004년부터 2016년까지 12년 동안 115%나 뛰어올랐다. 결국 베를린은 2016년 법으로 에어비앤비 규제를 강화했다. 베를린 당국은 단기 체류자를 위해 불법적으로 집을 임대하는 경우 10만 유로(1억3천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이처럼 규제가 심해진 후 아파트 8000채가 일반 임대 아파트로 전환됐다. 또 베를린 곳곳 일명 '핫한' 지역에선 독어가 아니라 영어만 쓰는 카페가 늘어갔다. 2017년 당시 기민당 소속의 옌스 슈판 보건부 장관은 "요즘 베를린 식당들은 오직 영어만 사용한다"면서 독일이 점차 이민, 관광객 위주로 변화하고 있음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독일 언론은 장관의 발언에 더해 프렌츠라우어베르크, 미테 등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도했다. 독일에서도 "관광객이 싫다"거나 "독일은 산업 구조가 탄탄해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적은데 왜 관광산업을 키워야하냐"는 등 반감 여론이 생겨났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1980년 2억7800만명이었던 세계 관광객 수는 2000년 6억7400만명으로 증가했고, 2017년에는 13억명을 기록했다. 관광객들이 이처럼 늘어난 이유로는 중국의 중산층 증가와 저가 항공 활성화, 먼 여행지들까지 쉽게 검색할 수 있는 기술 향상, SNS(사회연결망서비스) 활성화 등이 꼽힌다. 2030년 세계 관광객 수는 18억명일 것으로 예상된다. 즉, 앞으로 오버투어리즘 문제는 나날이 더해가면 더해갔지 잦아들진 않을 것이란 소리다. 어쩌면 이제 오버투어리즘 문제는 국제적이고 전지구적인 문제가 된 것 같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플라스틱을 덜 사용하고, 온실 가스 발생을 줄이기 위해 탄소 배출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 오버투어리즘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하는 시점이 온 게 아닐까. 참고문헌 관광지화된 주거지역 주민의 혼잡지각과 정주성 관계분석, 한양대, 남윤영 독일 세계를 읽다, 가지, 리처드 로드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2.25 08:13

  • 에펠탑·타지마할·마추픽추… 상징물 없이 관광대국 된 <strong>나라</strong>
    에펠탑·타지마할·마추픽추… 상징물 없이 관광대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관광객 ①] 독일, 스페인·프랑스 이어 세계 3대 관광 대국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여러 나라 친구들이 함께 있을 때, 먼저 말을 걸고 싶은 친구들은 언제나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 출신 친구들이었다. 막연히 에펠탑과 파리의 나라 프랑스와 '로마의 휴일'의 나라 이탈리아에 끌려서다. 자연히 독일인 친구들에겐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나만 이런 것 같진 않았다. 독일에 관광을 갈 계획인 이들에게 "왜 독일에 가냐"고 물으면 답은 언제나 같았다. "몰라요, 그냥… 뭐 딱히 어떤 걸 기대한다기보다…"라는 답 말이다. 독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이는 딱히 없어보였다. 독일엔 에펠탑이나 자유의 여신상, 또는 타워브릿지처럼 '명물'도 없다. 그래서인지 독일이 '관광 대국'이라는 데 대해 깜짝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놀랍게도 독일은 세계경제포럼(WEF)이 2017년 발표한 국가별 관광경쟁력 순위에서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3위를 차지한 국가다. 명실상부 '관광 대국'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매력이 독일로 관광객을 끌어모았을까. 당연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면, 다들 알고 있듯 독일은 경제 강국으로 선진국이다. 우리에게 삼성, 현대, LG 등이 있다면 독일엔 벤츠, BMW, 아우디, 폭스바겐, 포르쉐, 지멘스, 보쉬, 티센크루프, 지멘스 등이 있다. 독일에 도착해 시내를 둘러보면, 모든 택시가 벤츠임에 깜짝 놀란다. 독일이 선진국이라는 점은 매력적인 부분일 테다. 또 과거 분단국으로서 독일이 어떻게 분단 문제를 극복했는지, 또 통일한 뒤 이전의 흔적들은 어떻게 독일의 강점이 됐는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독일은 통일됐지만 베를린엔 분단의 상징물 '베를린 장벽'이나 '체크포인트 찰리' 등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들은 이런 학술적 이유로 독일을 방문했을까. 물론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독일이 '세계 3대 관광 강대국'으로까지 거듭난 데는 독일 관광청의 노력이 주효했다고 본다. 먼저 독일의 '슬로시티' 육성이다. 슬로시티(Slow city)란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느리게 사는 마을을 가리킨다. 슬로시티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인구가 5만명 이하고 도시와 주변 환경을 고려한 환경정책 실시, 유기농 식품의 생산과 소비, 전통 음식과 문화 보존 등의 조건을 충족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느리게 걷고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할 때 가입할 수 있다. 지정된 대부분 도시들은 인지도가 높아져 관광객이 큰 폭으로 증가했고, 소득이 향상됐고 고용도 높아졌다. 지역 전통·고유문화를 유지·발전시켜 지역의 소속감·정체성·자부심 등이 높아져 사회적 지속 가능성을 향상시켰다는 장점도 있다. 한국의 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면, 장흥군 유치면, 담양군 창평면, 하동군 악양, 예산군 대흥면 등도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이탈리아 남부의 아주 작은 도시 포지타노가 슬로시티를 선언한 뒤 독특한 매력을 가진 인기 관광지가 된 건 대표적 성공 사례다. 독일도 이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독일은 헤스부르크(Hersbruck)를 시작으로 발트키르히(Waldkirch), 다이데스하임(Deidesheim), 헤르스부르크(Hersbruck) 등이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주민 1만2500명에 불과한 헤스부르크는 매해 독일 관광객 2만5000명과 외국 관광객 10만명 이상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중 2000명 넘는 외국인들은 1박 이상을 헤스부르크에서 머문다. 한국에도 수많은 슬로시티가 있지만, 이처럼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독일이 기울인 노력에 관심이 간다. 헤스부르크는 독일이 독일다운 노력을 기울여 탄생한 관광마을이다. 헤스부르크 주민들은 마을 곳곳에 18개의 조각작품을 설치해 마을에 독특한 매력을 불어넣었다. 헤스부르크는 다수의 축제도 기획했다. 매년 1월엔 '독일목동박물관' 축제, 7월말~8월초에는 '알트슈타트페스트', '사과의 날' 축제 등이 열린다. 2004년부터 헤스부르크가 개최한 '꽃장식 대회'도 도시를 더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다. 헤스부르크 주민들은 마을 9~11세 어린이들에겐 어릴 때부터 요리를 가르치며 고향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 2000년 초반부터 진행된 이 같은 '미니쿡 프로젝트'는 이들이 성인이 돼 헤스부르크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하는 자양분이 됐다. 독일은 과거의 아픈 기억, 즉 나치와 유대인에 관련된 기억들도 가감없이 공개했다. 처절하게 반성하기 위해 과거의 과오를 공개했는데 이것들은 결국 독일의 관광상품이 됐다. 잔혹한 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현장이나 자연재해 장소를 방문해 의미를 되새기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다크투어)이 최신 여행 트렌드가 됐기 때문이다. 독일이 과거의 과오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다. 슈톨퍼스타인은 '걸림돌'이라는 뜻으로, 독일어로 걸려 넘어지다(stolpern)와 돌(stein)의 합성어다. 콘크리트 블록 사이에 가로, 세로, 높이 10㎝의 돌을 심고, 그 위에 황동 판을 붙여놓은 것으로, 독일 베를린 시내 거리 곳곳에서 슈톨퍼슈타인을 발견할 수 있는다. 1993년 처음 심기 시작한 이 걸림돌은 현재 7만개 가까이 설치됐다. 동판에는 한 사람의 이름과 출생년도, 체포일시 및 피살 정황과 함께 "그가 여기 살았다"고 적혀 있다. 유대인 학살을 반성하는 의미다. 같은 맥락에서 독일인들이 베를린 한복판에 만든 유대인 학살추모공원이나 유대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등도 마찬가지다. 과오가 아니더라도 '분단'이라는 과거의 아픈 기억 역시 다크투어의 일환이 됐다. 베를린 장벽은 이제 인기 관광지가 됐고, 베를린 장벽 조각 역시 관광 기념품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다른 그 무엇보다 독일, 그중에서도 베를린이 요즘 가장 핫한 관광지로 뜬 건 2015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분 '힙스터' 열풍 때문이다. 힙스터란 보통 주류 문화에서 조금 벗어나 인디음악이나 독립영화 등 하위 문화를 소비하고, 힙스터의 필수품 '커피'와 '맥주'를 생활화해 마시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주로 공정무역이나 채식 등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이다. 통일을 이끌어낸 베를린 청년들은 힙스터들에게 가장 구미가 당기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와 노이쾰른 등은 수많은 그래피티와 떠뜰썩한 밤문화, 마이크로 농업, 멋진 카페들이 자리하며 힙스터의 성지가 됐다. 최근 인터넷에서 인기인 '힙스터 테스트'(스스로 힙스터인지를 체크해보는 테스트로 '서울시 마포구에 산다' '맥주는 수입 맥주만 마신다' 등이 선지다.) 36번 문항에 '최근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독일 베를린이다'란 게 있을 정도다. 자, 이처럼 독일은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가 됐다. 이제 누구나 독일(특히 베를린)을 가고 싶어하고, 독일의 다양한 모습을 즐기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렇게 독일 관광청의 노력이 들어맞아 성공한 순간, 독일에서는 환희가 아니라 분노가 들끓었다. 대체 독일에선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다음 편에서는 '성공한 관광지' 독일의 반응과, 현대 관광이 지닌 문제들을 짚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관광객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2.18 05:44

  • 인기 관광지 울룰루에 서린 눈물… "나는 2등 시민"
    인기 관광지 울룰루에 서린 눈물… "나는 2등 시민"

    [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②] 호주 백인, '백호주의'와 '테라눌리우스' 등 원칙으로 원주민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 최근 아시아태평양 국가로서 변화 노력 2012년 1월27일,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재미있는 물건이 매물로 올라왔다. 짝을 잃은 구두 한 짝이었다. 스웨덴 가죽 제품인 네이비블루 컬러의 이 신발은 처음 148호주달러(약 12만원)에 올라왔으나 점차 올라 2000호주달러(한화 160만원)까지 치솟았다. 이 신발의 주인공은 줄리아 길라드 당시 호주 총리(제 14대 총리, 임기 2010년 6월24일~2013년 6월26일)다. 이 신발은 길라드 전 총리가 수도 캔버라에서 열린 '자랑스런 호주인' 행사에 참가했다가 자신들을 차별한다며 항의하는 원주민 시위대들에게 쫓겨 황급히 달아나면서 벗겨진 하이힐 한 짝이었다. 물론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이 신발은 25분만에 경매 목록에서 내려갔다. 경매 원칙상 소유자가 직접 매물 목록에 올리거나, 아니면 경매를 허락한 경우에 한해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베이 대변인은 "우리는 그 신발의 주인이 총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당사자가 판매를 허락한다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록에서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길라드 전 총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길라드 총리는 전날인 2012년 1월26일, 호주 건국기념일인 '호주의 날'을 맞아 캔버라 호주 의회 근처 식당에서 호주의 날 기념메달 수여식을 가졌다. 하지만 200여명의 원주민 지지자들이 시위를 벌여 대피해야만했다. 시위자들은 이날 '원주민 천막대사관'(Aboriginal Tent Embassy)에서 천막대사관 설치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다가 길라드 전 총리의 행사장에 가서 이 같은 항의 표시를 했다. 발단은 당시 호주 최대 야당 자유당의 토니 애버트 당수의 발언이었다. 토니 애버트는 이날 연설에서 캔버라 구 의사당 앞에 설치된 ‘애보리진 천막대사관’이 무의미하며 철거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흥분한 원주민과 지지자들이 호주 의회 근처 식당에서 열린 호주의 날 기념메달 수여식장을 습격한 것이다. 천막대사관은 40년 전인 1972년 1월26일 호주 원주민 작가이자 예술가인 케빈 길버트가 캔버라의 구 의사당 앞에 세웠다. 호주 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취지에서다. 그는 캔버라에서 원주민에 의한 항의 시위를 이끌기도 했던 인권운동가였다. 원주민 천막 대사관은 이후 부숴지고 다시 세워지고를 반복했지만 이후 전국적 원주민 운동을 촉발하면서 하나의 상징이 됐다. 대체 어떤 인종 차별 정책들이 원주민들을 이토록 분개하게 한걸까. (☞"굴러 온 돌, 박힌 돌 뺐다"… '호주의 날' 맞은 원주민 [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 ①] 참고) 원주민 사회는 호주 백인이 호주 땅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서서히 무너졌다. 백인들과의 무력 충돌, 유럽 사회에서 온 질병들, 백인들로부터 뺏긴 사냥터, 백인들로부터 유입된 독한 럼주를 마시는 문화, 백인 남성에게 옮겨온 성병 등으로 인해서 말이다. 가뜩이나 위태로웠던 원주민은 이들을 '말살'시키려던 백인 정부에 의해 한 없이 무너졌다. 특히 호주 정부가 1915년부터 1969년까지 실시한 '원주민 동화정책'과 '문명화 정책'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정부는 10만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강제로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백인 가정 및 선교 기관 등에 위탁했다. 주로 피부색이 비교적 하얀 아이들은 '백인 사회에 섞이기 위해' 강제 입양됐다. 원주민 가정에선 피부색이 흰 아이들을 숨기거나 일부러 어둡게 만드는 일도 벌어졌다. 물론 입양된 어린이들 다수가 농장 일꾼으로 전락했고, 또 상당수 어린이들은 신체적, 성적 학대로 고통 받았다. 결국 대부분은 적응하지 못해 마약과 알코올에 의존하게 됐다. 뿐만 아니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백인의 호주를 만들자는 주의)의 오랜 유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주는 호주 연방 형성 당시부터 몇십년에 걸쳐, 백인 이외의 인종을 차별하고 배제했다. 호주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 유입되는 인종은 대다수 아시아인들이었다. 자연히 백호주의의 피해자는 주로 원주민과 아시안들이 됐다. 백호주의의 근원은 1851년 호주 골드러시 때다. 당시 호주에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자 골드러시가 일어났고, 이 과정 낮은 임금의 중국인 노무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호주 백인들은 1910년대 '호주 원주민 협회'(Australian Natives' Association·보통 일컫는 호주 원주민, 즉 에버리진들이 아니다. 당시 호주 백인들은 자신들을 호주 원주민이라 일컬었다.)를 만들고 아시안계 이민을 제한했다. 백호주의의 맥락에서 원주민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백인들은 원주민을 자연유산으로 간주해 투표권을 주지 않았고, 대신 수많은 규제만을 내렸다. 예컨대 백인이 원주민을 고용하는 데 부과되는 허가세는 개를 소유하기 위해 내는 허가세보다도 낮았다. 원주민들은 연방 정부의 승인 없이는 백인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속 터지는 건 백인들이 마음대로 세운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 즉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땅' 원칙이었다. 원주민 입장에선 조상 대대로 물려내려오며 살던 땅인데, 어느 날 등장한 백인들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땅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이다. 부족의 땅은 오랜 세대를 거쳐 전해져 온 것이었다. 땅의 경계는 나무, 돌, 바위 등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호주 백인들은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따라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라고 봤다. 원주민은 이들에게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그렇게 땅을 빼앗긴 뒤 원주민들은 그 어느 곳에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 없었다. 억울함이 커지던 중 토레스 해협 원주민 에디 코이키 마보가 등장했다. 1939년 토레스 해협 머리 섬에서 태어난 그 역시 어렸을 때부터 부족 어른들에게 가르침을 받아 부족의 땅을 인식해왔었다. 퀸즈랜드 제임스쿡 대학의 조경사로 일하며 독학한 마보는 1974년 대학의 역사학자들에게 부족의 땅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자문을 청했다. 결국 마보는 1981년 여러 법률가들의 도움으로 1981년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도전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마보의 소송은 10년간 수차례 기각됐다. 하지만 마보는 연방 고등법원에 재차 소송을 제기했다. 그 사이 마보는 점차 피폐해져 1992년 1월 암으로 결국 사망했다. 마보의 사망 5개월 후 1992년 6월, 연방 고등법원은 마보 케이스(Mabo case)에 대해 "원주민의 주권이 엄연히 존재하며 원주민 혹은 도서 지역 사람이 토지의 소유권을 결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렇게 원주민의 주권과 토지소유권이 인정되며 지난했던 싸움이 끝나나 싶었다. 하지만 1996년 12월 윅 케이스(Wik case)에선 다른 판결이 나왔다. 연방 고등법원은 윅 케이스에 대해 동일 토지에 대해 원주민과 백인 모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되,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원주민에 비해 백인의 소유권이 우선해야한다고 판결했다. 즉, 호주 원주민의 '테라 눌리우스'에 대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1970년대 호주 백호주의도 공식 폐지됐고, 호주에선 이제 '다르다'는 의미가 강한 foreign(외국의) 대신 보다 세계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international(국제적인) 단어를 쓸 정도로 인권감수성이 향상됐다. 또 원주민들이 수십년간 요구해왔던 '에어즈락 명칭 변경'과 '등반 금지'도 드디어 시행됐다. 에어즈락(Ayers Rock)은 백인들이 부르던 명칭이고, 울룰루(Uluru)는 원주민들이 부르던 용어다. 울룰루는 백인을 비롯 외부인들에겐 단순한 기암괴석의 관광지에 그쳤지만 지역 원주민인 아난구족들에겐 신성한 성지였다. 여기엔 바위 동굴과 원주민이 그린 고대 벽화들이 많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한 울룰루는 5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매년 25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호주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으로 꼽히면서 관광객들은 꼭 등반을 해왔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관광객의 74%가 등반에 나섰다. 그동안은 원주민들의 성지여도 그리 신경써주지 않았지만, 최근 원주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울룰루'로 불리게 됐고, 또 '등반'도 금지됐다. 울룰루-카타주타 국립공원 관리이사회는 오는 10월26일부터 울룰루 등반을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원주민 인권이 인정되고, 인종차별을 주의하자는 호주의 변화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호주가 변화한 이유가 '아시아 태평양 일원'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찝찝하다. 즉 베트남전이 끝나고 호주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가장 근접한 이웃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서 백호주의를 철폐해야한다고 생각했다는 분석이다. 호주는 1975년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면서, 호주와의 무역 거래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호주 사람들이 영국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권리도 잃었다. 반면 점차 아시아태평양 시장은 잠재력이 컸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커졌다. 호주인들은 이제 과거 영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잊고 아시아태평양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예상컨대 앞으로 호주 원주민은 매일 조금씩 더 나은 권리를 갖고, 보다 나은 대우를 받게될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호주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당위적 측면에서 그렇게 변화해야만 하기도 하고 말이다. 앞으로는 북부준주(NT)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원주민을 자주 볼 수 있게 될까. 구걸하거나 술에 취한 원주민이 아니라, 호주 사회 속에 섞여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을 말이다. 참고문헌 호주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신봉섭 세계를 읽다 호주, 가지, 일사 샤프 호주의 정체성에 나타난 원주민의 역사 문화유산의 가치와 확장성에 대한 문제점, 역사문화연구 제47집, 강재원 호주 원주민 문학에 있어서의 역사의 문제, 외국문학연구 제 16호, 윤혜준 ☞[이재은의 그 나라, 독일 그리고 힙스터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2.11 06:15


  • "굴러 온 돌, 박힌 돌 뺐다"… '호주의 날' 맞은 원주민

    "굴러 온 돌, 박힌 돌 뺐다"… '호주의 날' 맞은 원주민

    [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 ①] 호주 원주민, 교도소 전체 수감자 중 4분의 1 차지… 낮은 진학률·높은 실업률·약물중독·자살·폭력 등 시달려… 호주 사회 최하층민 호주에서 지내던 대부분의 날은 즐거웠다. 워낙 날씨가 좋은 데다가 사람들도 친절했다. 팀탐·래밍턴·몰티저스 등 달콤하고 맛난 음식이 가득했고, 향긋한 커피를 파는 카페까지 줄지어있었으니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찝찝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메이어스 백화점 근처 멜번 번화가 한복판에서 백인 청소년들이 내 머리를 때리고 도망갔을 때 그러했고, 오페라하우스가 보이는 시드니 서큘러키 한 구석에서 호주 원주민(Indigenous Australian 또는 Aborigine·에보리진) 대가족(할머니, 할아버지 등 노인부터 5살 짜리 꼬마들까지)이 옛 복식 그대로 분장을 하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돈을 모금하는 모습을 봤을 때도 그랬다. 내가 당했던 일은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임이 명백했다. 그리고 원주민이 제대로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구경거리'로 전락해 살아가는 것에도 인종차별이 덧씌워져있는듯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토록 안타까워한건, 이들 모습이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기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사회 다른 구성원들과 잘 융화되지 않으며, 타자화돼 살아가는, 비극적 처지에 놓인 상황 말이다. 원주민과 이외 구성원들이 얼마나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지는 '호주의 날'을 바라보는 시각차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26일은 '호주의 날'(Australia day)이었다. 호주는 매년 1월26일을 국경일로 기념한다. 이날은 1788년 아서 필립이 영국 함대에 이주민들을 이끌고 시드니 록스에 상륙해 영국 국기를 게양한 날이다. 대부분의 호주인들은 이날을 국가적 '개척의 날'로 여겨 각종 행사를 열어 크게 기념해왔다. 이날 호주 곳곳에서는 지역행사, 불꽃 놀이 등은 물론이고 호주식 무료 바베큐 파티까지 열린다. (호주식 바베큐 파티란, 식빵에 구운 소시지를 얹어 머스타드와 케첩을 뿌려주는 음식제공행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이를 다르게 바라본다. 당시 영국인이 대륙에 살던 최소 75만명의 원주민을 무시하고 호주 대륙을 '주인 없는 땅'으로 선언한 '침략의 날'로 말이다. 이들은 이날 영국 함대가 착륙한 이후 수만 명의 원주민이 질병과 기아·학살 등으로 사망하게 됐다며 이날을 기점으로 고통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원주민들의 이 같은 생각은 최근 몇년 새 호주에서도 퍼져나가고 있다. 호주 제3당 격인 녹색당의 데이빗 쇼브리지 의원은 "호주의 날은 호주가 이룩한 성공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백인들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당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기억하는 날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호주의 날'을 맞은 지난 26일에도 시드니 등에서 '침략의 날'로 정정해야한다는 시위가 대규모로 열리기도 했다. 녹색당은 최근 '호주의 날'을 바꾸는 것을 올해 최우선적인 과제 중 하나로 선정, 전국적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빅토리아주의 모얼랜드, 야라, 데어빈, 서호주주의 프리맨틀,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바이런베이 등의 카운슬 의회가 '호주의 날' 기념행사를 다른 날로 바꾼 상태다. 실제 원주민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고려해 이날을 바라보면, '호주의 날'이 아니라 '침략의 날', 나아가 '재앙이 시작된 날'로 불러도 과하지 않다.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이 1788년 시드니에 정착하기 전 수만년 동안 수렵활동을 하며 살아왔지만, 영국인이 들어온 뒤 90% 가량이 죽었다. 영국인들의 호주 정착 초기 원주민들은 영국인들과 함께 들어온 수두 등의 전염병과 성병 등에 걸려 대규모로 사망했다. 이후엔 원주민들은 호주 백인 정부에 의해 200년 가까이 시행돼온 박해와 차별정책으로 인해 거주지와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가정이 파괴됐다. 특히 호주 정부가 1915년부터 1969년까지 실시한 '원주민 동화정책'과 '문명화 정책'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정부는 10만명의 원주민 어린이들을 강제로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백인 가정 및 선교 기관 등에 위탁했다. 이 어린이들 중 다수가 농장 일꾼으로 전락했고, 또 상당수 어린이들은 신체적, 성적 학대로 고통 받았다. 결국 대부분은 적응하지 못해 마약과 알코올에 의존하게 됐다. 이 같은 여파가 현재까지 남았다. 원주민 인구는 계속 줄어 이젠 약 70만명으로 호주 전체 2400만명의 인구 중 3%만을 차지한다. 이들은 낮은 진학률과 높은 실업률, 그리고 약물중독·자살·폭력 등에 시달리면서 호주 사회의 최하층민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호주 북부와 서부 변두리 대지에 위치한 60여개의 원주민 캠프에서 살고 있는데, 의료혜택 미비 등으로 몸이 성치 않고 평균수명이 다른 이들에 비해 17년 짧다. 원주민 성인의 70%는 난청을 겪고 있으며, 2.5%는 뇌기능 장애가 있다, 어린 시절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해 염증을 심하게 앓았거나 임신 기간에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소득문제도 심각하다. 2016년 호주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서호주 지역에서 원주민 가정은 한 주에 398호주달러(약 31만원)을 벌어들였다. 당시 같은 지역 평균 가정의 주당 소득은 1210호주달러(약 96만원)였다. 원주민은 평균 보다 무려 3배 정도 적게 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실업 상태도 심각하다. 원주민중 38%는 실업 상태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50%나 실업상태다. 교육 상황이 좋지 않으니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뉴사우스웨일스주정부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원주민 초등학생 3학년의 경우 읽고 쓰는 능력 최저에 미달하는 학생 비율은 40%에 달했다. 이는 비원주민 학생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격차는 학년을 거듭할 수록 더욱 커졌다. 초교 5학년의 경우 원주민의 50%가 최저 기준에 미달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평균 77%가 학업을 수료할 때 원주민은 33%만이 학업을 수료한다. 지독한 가난에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이 겹치고, 교육을 받지 않아 상황이 더욱 악화되기만 하니 원주민으로선 의욕 상실 문제를 겪기 십상이다. 적지 않은 원주민들이 정부의 복지보조금을 약물 등을 사고 도박을 하는 데 허비했다. 2017년부터 호주 정부는 원주민 다수 거주지 2곳에 대해 현금 대신 복지카드를 지급하고 교육·음식 구입에만 한정시키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원주민을 더 미치게 하는 건 이 같은 이미지가 공고화되면서 차별이 해를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톨리-코퍼즈 UN 특별보고관은 "원주민들이 끔찍한 여건 속에서 살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기본적으로 빈곤 때문에 처벌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원주민의 경우 사소한 범법행위로도 투옥된다"며 "매우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부준주(NT) 지역에서는 젊은층 구금자들의 95%를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젊은층 원주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법제도에 연루될 가능성은 동년배 비원주민들보다 17배나 높다고 말했다. 원주민은 호주 교도소 전체 수감자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청소년의 경우 더욱 심한데, 호주의 전체 소년원 수감자 중 59%가 원주민이다. 다른 인종 청소년 보다 28배나 높은 수치다. 그는 "과일 한 개를 훔쳤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에서 잠을 잤다는 이유로 체포된 원주민도 있다"며 원주민에게 유독 가혹한 잣대를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호주에선 매일 충격적인 원주민 관련 소식이 나온다. △원주민 가수 제프리 구루물 유누핀기는 멜번·다윈·시드니 등에서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택시 승차거부를 당했다. △2016년 원주민 버우 포스터는 퇴근하고 버스를 타려 정류장을 향해 뛰었는데, 경찰이 다짜고짜 그를 곤봉으로 때렸다. 인권 단체에선 "버우의 유일한 죄는 원주민이 버스를 잡으려고 달렸다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지난 3일부터 11일까지 9일 동안 청소년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진 아이들은 대부분 12~15세의 원주민이었다. 이중 14살의 나이로 자살한 소녀 로셸 프라이어는 죽기 전 페이스북에 "내가 죽어야만 괴롭힘과 인종차별이 멈출 것"이라고 적었다. 물론 호주 정부도 방관한 것만은 아니다. 호주 정부는 2008년 건강·기대수명·교육 수준·고용률 등 총 7가지 과제를 포함한 계획을 수립해 추진해왔다. 예컨대 고용격차와 원주민 학생의 읽기·쓰기·수리 능력 격차, 학교 출석률 격차, 아동사망률 격차를 10년 후인 2018년 6월까지 절반으로 줄이자거나 고등학교 졸업률 격차를 2020년까지, 원주민과 비원주민간 평균수명 격차를 2031년까지 해소하자는 목표다. 정부는 목표 달성을 위해 지난 10년간 매년 334억 호주달러(약 27조9000억원)를 원주민에 투입해왔다. 하지만 2019년 현재까지, 호주 정부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원주민들은 주변화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상황은 점차 심각해져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 이토록 풀 수 없게 돼버린 것일까. 다음 편에서는 원주민들이 겪어야했던 처참한 역사를 되짚어본 뒤 상대적으로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비교해 생각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1.28 06:00

  • 찬양하거나, 혹은 혐오하거나… 인도와 여성
    찬양하거나, 혹은 혐오하거나… 인도와 여성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 그리고 성차별 ②] 힌두교, 여성을 '오염' 가능한 미숙한 존재로 봐… 종교서 시작된 여성혐오, 조혼·지참금 문화 등 낳으며 여성 삶 피폐화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인도 여성들은 참혹한 상태에 놓여있어요. 인도에서 성폭행이 많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성폭행이 일어난 뒤 이에 대한 대중의 태도에요. 많은 경우 여성들은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가해자들은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죠." 2015년 3월, 호주에서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었다. 인도 출신 교수님은 어느 날 수업에서 '인도의 딸'(India's Daughter) BBC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며 말을 꺼냈다. (☞"성폭행 싫으면 밤에 다니지 마"… '강간의 왕국' 오명 쓴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 그리고 성차별 ①] 참고) "다들 2012년 12월의 '델리 여대생 버스 강간 사건', 알고 있죠? 이에 대한 다큐멘터리형 영화가 있는데, 인도 정부의 태도가 정말 참혹합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델리 여대생 버스 강간 사건'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들, 가해자들, 가해자 측 변호사 등을 두루 취재해 담은 영화는 사실 그대로를 담았다 △인도 여성은 이처럼 인권 사각적인 현실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실만을 담을 영화를, 인도 정부는 '반성'은 못 할 망정 '상영 금지'해서 현실을 덮어버리려한다 등이다. 인도 정부는 2015년 3월, 영화가 만들어지자마자 인도 대법원에 상영금지처분을 신청했다. 이어 BBC에도 "이 영화가 방영되거나 온라인에 게시되지 않기를 요청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물론 BBC는 예정대로 방영했지만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인도 여성들은 성폭력이 13분30초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대체 인도는 왜 '성폭행이 빈번한 위험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된 것일까. 인도는 여성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차별·무시하는 나라다. 이 말인 즉슨, 인도는 여성혐오(misogyny·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여성을 이상화함으로써 찬미해 성적대상화 하거나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것, 이로 인한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이 모두 여성혐오에 포함된다.)가 사회에 깔려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고 이게 진짜 남성성을 과시하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인도에서 이처럼 여성혐오가 만연해진 이유로는, 힌두교를 꼽을 수 있다. 인도는 13억 인구의 약 80%인 10억여명이 힌두교 신자다. 힌두교라는 종교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은, 대부분 인도인들이 여성을 생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힌두교에선 무려 3~4억명의 신을 숭상하는데, 여신 다수도 선망한다. 이중 여신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정숙하고 자애로운 여성상과, 강렬한 성적 매력을 가진 여성상이다. 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신이자 '번성함' '복지' '부와 행운' 등을 상징하는 락슈미의 경우, 전자에 해당한다. 락슈미는 남신(남편인 비슈누)의 지배 하, 남편을 주인으로 받들며 충실하게 순종한다. 주로 상층 카스트 부인들이 락슈미를 숭상해 락슈미의 덕목을 그대로 따른다. 반면 (쉬바의 아내인) 빠르바띠, 두르가, 깔리 등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특히 성적으로 유혹적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이처럼 홀로는 강력하고 파괴적인 여신 역시 '결혼'을 통해 통제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들은 결혼을 통해 자애로운 존재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힌두에선 결혼이 매우 중시되고, 여성의 역할은 결혼 이후 가정에만 한정된다. 힌두에서 결혼이 중시돼온 이유는 또 있다. 여성을 '오염 가능성이 있는 열등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특히 힌두라는 종교적 의례에선 정결함(우월함)과 오염·더러움(열등함)은 구분된다. 이때 월경과 출산 등을 담당하는 여성은 오염이 가능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됐다. 이에 따라 여성은 초경이 시작되기 전, 즉 오염되기 전 서둘러 '결혼'이라는 통제수단에 속해야하는 존재로 여겨져왔다. 고대 인도의 법률가들도 여성을 이렇게 바라봤다. 여성은 본래 사악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고, 오염 가능성이 있는 열등한 존재이며, 부모의 감시를 피해 임신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이게 마누법전(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 인도의 사상, 제도를 집대성해 정비된 힌두법전)에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8~12살이다. 30살 남성은 서둘러 마음에 드는 12살 여자를, 24살 남자는 8살 여자를 취하라. 그렇지 않으면 다르마(의무)를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문구가 실린 이유다. 마누법전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를 엄격히 따르는 높은 카스트 층(브라만, 크샤트리아 등의 순서로)을 중심으로 조혼(유아혼)이 성행했다. 낮은 카스트에서는 상대적인 평등상이 이뤄지고, 남편과의 역할교환도 이뤄졌지만 이들의 산스트리트화과정(높은 카스트 모방)을 통해 다른 계층에도 퍼졌다. 인도 전역에서 조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1881년 인구 기록에 따르면 벵갈 지역에서 10세 소녀의 14%는 결혼을 했거나 이미 과부였으며, 봄베이 지역 10세 소녀 10%가 결혼했고, 4.5%는 과부였다. 1921년 인구 기록에 따르면 여성 1000명 중 14명이 5세 이하에 결혼했고, 111명이 10세 이하에, 437명이 15세 이하에 결혼했다. 이후 인도 사회운동가들은 조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마하트마 간디(본인도 7살에 약혼을 하고 13살에 결혼했다)는 "사띠(사망한 남편과 함께 과부가 된 여성을 생화장하는 풍습) 등으로 여성 조혼 풍습은 어린 소녀들의 사망률을 높인다"며 조혼 풍습의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1955년 힌두결혼법률은 15세 미만 여성의 결혼을 금지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조혼 풍습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기준 인도 여성 중 20%는 15세 이전에 결혼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조혼 풍습은 젊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지난해 9월 영국 의학 전문지 랜싯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자살하는 여성 중 36.6%가 인도 여성이다. 랜싯은 폭력을 조장하는 가부장 문화가 팽배한 인도에서 조혼이 인도 여성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주요 원인이라고 해석했다. 즉 자살한 인도 여성 대다수는 35세 미만의 기혼자였는데, 조혼을 종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 인도 여성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뒤 가정 폭력 등 뿌리 깊은 가부장적 문화에 시달린다. 여기에 여성이 재정적으로 홀로 설 수 없는 현실이 더해지며 여성은 자살로 내몰린다. 힌두교 여성관은 조혼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여성억압적 관습을 파생했다. 지참금 문화다. 힌두교는 여성을 종교적 선물로 간주해 남성에게 '선물'로 딸을 증여한다. 이 경우 딸은 생리를 시작하기 전이어야한다. 신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가의 의상과 보석, 가재도구, 현금 등도 함꼐 보내진다. 이 같은 지참금 문화가 반드시 해야하는 의무가 되면서, 딸의 출산을 재앙으로 만들었다. 가난한 집안에선 딸이 태어나는 걸 두려워해 '여아 낙태'를 자행했고, 태어날 경우에도 지참금 걱정에 '여아살해'가 이뤄진다. 1800년대 후반 라즈뿌뜨 친족집단들 사이에서 여아 수는 남아의 25~30%에 불과했다. 최근까지 이 같은 경향이 이어져 2015년 기준 매일 2000명 이상의 여아가 낙태되고 있다. 마네카 간디 당시 인도 여성·아동발달부 장관은 "매일 2000명의 여아가 자궁 속에서 살해된다"며 "일부는 태어나자마자 베개에 눌려 질식사 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즉 낙태를 포함 한해 600만건의 여아살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2011년 기준 30년간 1200만명의 인도 여아가 낙태된 것으로 집계된다, 2011년 기준 인도 남아 1000명당 여아 비율은 914, 2014년 기준 여아 비율은 900이다. 주로 북부 인도일 수록 힌두교 원리주의자들이 많은데, 2014년 남부 케랄라주는 가장 높은 967명, 북부 라자스탄주는 861명, 모디 총리의 출신지이자 힌두교 원리주의자들이 많은 구자라트주는 854명, 뉴델리 인근 하리아나주의 경우는 831명으로 인도 최악의 성비 불균형을 보인다. 이처럼 여성혐오가 만연하니 페미사이드(Female(여성)과 homicide(살해)가 결합된 단어·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어야하는 '여성혐오 살해')가 만연해졌고, 불균형한 성비를 낳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살해가 공공연히 이뤄졌고, 성폭력의 연장선상에서 강간, 고문 등이 발생했으며 가족관계 안에서 아동성학대, 가정폭력 등도 빈번해졌다. 여성이 '2등 시민'으로 간주되고, 여성의 삶은 가정에서 남편을 보조하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게 책무라고만 여겨지는 인도에선 당연히 여성 교육과 고용도 잘 이뤄지지 않는다. 2011년 인구 통계조사 결과 인도의 여성문해율은 65.46%로 세계 평균인 79.7%에 비해 현저히 낮다. 2014년 기준 인도 여성이 일하는 비율은 27%에 그친다. 인도 젊은 여성 5000만명 이상은 경제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2009년에 도입된 교육권리법은 무료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인도 여성의 삶에서 교육이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으니 교육을 중단하는 비율도 높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약 63.5%의 여학생이 청소년기 학교를 그만둔다. △학교에 화장실이 없어서 △생리를 시작했지만 생리대가 없어서 △등하교 시간 성폭행 위협에 노출돼서 등 학업 중단의 이유는 다양하다. 일각에선 인도여성들의 삶이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취업에 대한 높아진 의지가 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2008년 1월 인디안 익스프레스(The Indian Express)가 인도 20개주 40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발표에 따르면, 여성의 74%가 여성 취업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이 경향은 교육받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들의 90%이상이 여성 취업에 동의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엔 한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여성교육률과 여성고용률이 높아져봤자, 이게 여성인권 향상과는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다. 힌두근본주의 세력이 여성의 경제적 활동을 반대하지 않는 건, 이들이 여성인권 향상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측면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즉 물질적 소득을 위해 경쟁하는 시장경제 체제 아래에서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밖에서 수입을 올리고 동시에 가사일도 기꺼이 충실히 하라는, 매우 가부장적 접근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기사를 봤다. "인도 페이스북 사용자 중 여성 비율은 24%로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남성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인도 여성은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차별받고 있다는 것.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삶을 처참하게 유지한 채로는 인도의 엄청난 성장 동력도 스퍼트를 내기 힘들지 모른다. 인도 정부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인도여성(신화와 현실),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김주희·김우조·류경희 인도 힌두권 여성 선교를 위한 선교 이해, 협성대, 곽계선 인도의 빈곤과 소득분배, 경상대학교 해외지역연구센터, 박종수 ☞[이재은의 그 나라, 호주 그리고 에보리진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1.21 06:00

  • "성폭행 싫으면 밤에 다니지 마"… '강간의 왕국' 오명 쓴 <strong>나라</strong>
    "성폭행 싫으면 밤에 다니지 마"… '강간의 왕국' 오명 쓴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 그리고 성차별 ①] 13분30초에 한 번 꼴로 성폭행 발생… 뿌리 깊은 여성혐오가 문제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2011년 겨울, 여자인 친구와 둘이서 두 달 동안 인도-네팔 여행을 갔었다. 당시 인도 특유의 자유로운 느낌과,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 아그라의 타지마할, 히말라야 등에 빠져있었기에 '여자끼리 인도 여행을 가면 위험하다'는 말에도 어떻게든 여행을 강행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대신, 최대한 준비해갔다. 잡상인 등이 다가올 때 '필요없다'는 말을 힌디어로 하면 '현지에서 좀 살았나' 싶어 바로 자리를 뜬다기에 'नहीं'(아니오·'나히'로 발음)를 계속 되뇌었고, 오후 5시 이후는 절대 밖에 나가지 말자고 친구와 굳게 약속했다. 북인도 콜카타(캘커타)로 처음 인도에 발을 디딘 뒤 우리의 약속은 굳건했다. 밤 늦게 나가지 않으니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인도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상한 일은 꽤나 자주 벌어졌다. 예컨대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길을 지나가면 인도 남성들이 은근슬쩍 내 몸을 만진다든가, 몰래 핸드폰 카메라로 나를 찍기에 항의하면 그런 바 없는 척 한다든가 등의 불쾌한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내 반응을 이끌어내려고 빤히 쳐다보며 쫓아온다거나, 끈질기게 캣콜링(cat-calling·여성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추파를 던지는 등의 행위)을 하는 일은 매일 있었다. 반응을 하지 않으면 따라오며 반응을 유도하고, 화를 내면 좋아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으로 보지 않고 마치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흰 피부를 선호하는 인도인들이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는 건 이해할 수 있었지만, 키가 동아시아인 보다 큰, 그래서 보다 위협적으로 인지되는 서양인 여성들에겐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 점엔 부아가 치솟았다. 대부분의 사건은 여행이 끝난 뒤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사건은 딱히 별 일이 없었음에도 뇌리에 강하게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바로 콜카타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의 기억이다. 인도를 가기 전 읽은 가이드 북엔 '여성들은 대중 교통, 특히 지하철과 버스는 절대 타지말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상식 밖의 구절이었다. 보통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는 안전을 위해 다수의 목격자가 있어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 어려운 대중교통을 탈 것을 권유받는데, 왜 그럴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을 탈 적절한 기회가 왔다. 때마침 호텔 바로 앞에 지하철 역이 있었고, 칼리 사원(Kalighat Temple·'죽음과 파괴의 여신' 칼리를 모시는 사원으로 콜카타에서 가장 오래된 숭배지)을 가기에 가장 편한 방법이었기에 지하철을 타보기로 했다. 타자마자 친구와 나는 바로 후회했다. 북적이는 지하철 칸 속 수십명이 넘는 남성이 우리를 향해 원을 그리며 몸을 돌렸고, 강렬하게 눈빛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자동적으로 '자칫 이들이 한 마음을 먹고 우릴 다 같이 성폭행하려한다면 도무지 구해질 방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몇 정거장 뿐이었기에 위험한 일은 없었지만, 이때의 두려운 마음은 지속됐다. 이후 뉴델리, 아그라, 바라나시 등을 여행할 땐 절대 대중교통을 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뉴스가 전해졌다. 2012년 12월 16일 남델리 근교 무니르카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23세의 인턴 물리치료사 조티 싱 판디가 남성 6명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해 숨진 것이다. 조티는 당시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고 함버스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 조티와 그 남자친구를 제외하고, 버스 안에는 운전사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함께 조티를 강간했다. 이들은 강간한 뒤 피해자의 장기와 몸을 버스 밖에 던져버렸고, 조티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어졌다. 조티는 싱가포르로 후송되어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13일만에 숨졌다. 이 사건은 인도 국내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낳았다. 이후 BBC에서 '인도의 딸'(India's daughter)이라는 다큐멘터리형 영화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가해자와 가해자 측 변호사가 한 말은 국제적 공분을 낳았다. 가해자이자 당시 버스 운전사였던 람 싱은 "여성은 알아서 조심해야한다"며 "해가 떨어진 뒤 여성은 밖을 돌아다니면 안된다. 결혼하지도 않은 남성과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여성에겐 교훈을 줄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가해자 측 변호사 마노르 랄 샤르마 역시 "여성은 마치 보석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으로, 스스로 잘 지켜야 한다"며 "바깥에 마구 돌아다니면 당연히 길가의 강아지는 그 보석을 탈취해 갈 것"이라고 말해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인도의 여성이 얼마나 불안한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가해자들이 아무런 반성이 없고, 나아가 공공연히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모습은 인도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인도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사그라졌던 시위에 다시금 불이 지펴진 건 2015년 12월, 사건 가해자 중 한 명인 우타르(18)가 3년 형을 마치고 석방되면서다. 2013년 9월3일 인도 뉴델리 소년법원은 우타르에게 3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가해자가 청소년이므로 청소년 최고형인 3년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강간 살인범을 3년만에 풀어주는 게 어디있냐며 격렬한 항의시위가 일어났고 피해자 조티 싱의 유족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큰 반향을 일으켜 인도 정부도 관련 법률을 강화했다. J S 베르마 전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한 '베르마 위원회'가 설립됐고, '베르마 위원회'의 권고안을 기초로 법률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이 개정안엔 집단 성폭행이나 미성년자 성폭행 등 범죄에 대한 최저 형량을 기존의 두 배인 징역 20년으로 높이고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식물인간 상태가 된 경우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근본적인 건 바뀌지 않았다. 이따금씩 인도 고위 남성들이 실언을 해 논란의 중심에 섰는데, 이 같은 실언엔 이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2012년 12월 당시 인도 대통령 프라나브 쿠마르 무케르지(임기 2012년 7월25일 ~ 2017년 7월25일)의 아들 아비지트 무케르지가 여성 시위 참가자들을 향해 "(그들은) 촛불 시위를 한 뒤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고, 꾸미고 다니는 것만 좋아하는 소위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 "(이 같은 시위는) 현실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저 그들만의 일"이라고도 언급했다. 전국적 비난이 쏟아지자 대통령 무케르지와 그의 딸 샤르미스타는 아비지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수상 역시 반대 의사를 표명해야만 했다. 인도 남성들의 근본적 생각이 바뀌지 않으니 성폭행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일종의 고질병처럼 고착돼갔다. 조티 싱 사건과 일련의 시위 이후 성폭행 사건의 신고가 큰폭으로 증가했지만, 경찰의 안이한 대처엔 변화가 없었다. 성폭행 사건의 신고 건수는 2012년 706건에서 2013년 1~9월 1330건으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하지만 인도 경찰은 업무과다를 핑계로 2012년~2016년 사이 접수된 성폭행 사건 중 3분의 1가량만 조사했다. 지난해에만도 인도에선 굵직한 성폭행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지난해 1월 북부 잠무-카슈미르 주에서는 유목 생활을 하던 무슬림 가족의 8세 소녀가 힌두 주민들에 의해 집단성폭행 당한 뒤 살해됐다. 같은 달 뉴델리에서는 28세 사촌이 술에 취해 8개월된 아기를 강간해 중태에 빠지게 했다. 이어 지난해 4월에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사는 16세 소녀가 여당 소속 주 의원과 그의 동생에게 1년 전 성폭행당했다며 주 총리의 집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다. 지난해 7월에는 첸나이에서 청각 장애가 있는 11세 소녀가 7개월에 걸쳐 보안요원, 배관공 등 22명의 남성에 의해 여러 차례 집단 성폭행 당했음이 알려졌다. 심지어 조티 싱의 집단성폭행 사망 6주기 추모 행사가 열리던 지난해 12월16일에도 유아 성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뉴델리 서부 빈다푸르 지역에서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건물 경비원이 3세 여아를 유인해 성폭행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인도는 '성폭행'이라는 오명을 쓴, 위험한 나라가 됐다. 톰슨로이터재단은 지난해 6월 보고서를 통해 '세계에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로 인도를 꼽았다. 성폭력, 문화와 관행, 인신매매 3개 항목에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라는 것이다. 인도 영화 '가비지'의 감독 코식 무케르지도 한 인터뷰에서 "강간 등이 기사화되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며 "뭄바이나 콜카타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인도에선 절대로 여성이 혼자 길거리를 다닐 수도 없다.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럼 인도에선 왜 성폭행이 끊이지 않을까. 미국 데일리비스트(The Daily Beast)지는 "문화적 전통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이 아직 남아 있다"며 "남성들은 여성을 희롱하는 일이 '진짜 남성성'을 과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데일리비스트는 이어 "이 같은 남성들의 비뚤어진 인식부터 바뀌어야 성폭행을 줄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BBC방송도 "인도에서 성폭력은 힘을 행사하거나 힘없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발생 빈도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BBC는 현지 정부 통계 등을 인용해 "인도에서는 16세 이하와 10세 이하 어린이가 각각 2시간35분, 13시간마다 성폭행당한다"며 "유아 성폭행 범죄는 2012년 8541건에서 2016년 1만9765건으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아동 성폭행과 성인 성폭행을 모두 합칠 경우, 성폭행은 더욱 빈번히 일어난다. CNN에 따르면 2016년 인도에서는 총 3만9000건의 성폭행이 발생했다. 13분30초에 한 번 꼴로 일어난 셈이다. 이 수치 역시 전년도 대비 12%이상 증가했다. 즉 인도가 '성폭행 나라'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도 사회 기저에 깔려있는 여성혐오를 탓할 수 있다. 힌두교에 뿌리를 둔 여성혐오사상은 인도 여성들의 삶을 주변화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인도의 오랜 여성 지참금 문화가 빈곤과 뒤섞이며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다음 편에서는 인도에서 성차별이 나타나는 근본적 이유와 인도 내 여성혐오를 살펴본다.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 그리고 성차별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1.14 05:55

  • '장수(長壽)의 상징' 日 오키나와, '단명의 도시'된 이유
    '장수(長壽)의 상징' 日 오키나와, '단명의 도시'된 이유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 ②] 일본 내 빈곤율 1위 오키나와, 미국 영향 받아 패스트푸드·통조림 위주로 식단 변화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유명하고, 꼭 먹어야 하는 음식으론 햄버거, 스테이크, 타코 등이 있다."… 저 먼 미국이나 유럽 얘기가 아니다. 일본 오키나와 얘기다. 오키나와에서 명물로 꼽히는 유명한 음식들은 이처럼 타국의 향이 물씬 난다. 패전 후 약 70년간 미군이 주둔하면서 오키나와는 미국 아닌 미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일본 오키나와의 특징 이야기를 하자면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주일미군을 떼려야 뗄 수 없다. 일본 국토 전체 면적의 0.6%를 차지하는 섬 오키나와에만 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75%가 있으니 말이다. 주민 대다수가 생활하며 관광지가 형성되어 있는 오키나와 본섬 전체의 20%가 미군기지로 쓰이고 있고 2만 여명에 달하는 미군이 오키나와에 살고 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지 이어진 미군 점령과 지금도 계속되는 미군기지의 주둔은 오키나와인의 식생활을 비롯 오키나와 전반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갖고왔다. ◇버거, 타코, 스테이크… 미군이 남긴 흔적 오키나와 최대의 번화가는 나하시에 위치한 국제거리다. 약 1㎞에 걸쳐 수백 개의 가게와 시장 등 볼거리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스테이크 식당이다. 세 걸음도 못가 스테이크 식당 한 곳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곳곳에 위치한다. 스테이크 식당은 개점 초기엔 미국인들의 스테이크 사랑을 염두에 둔 메뉴였으나 오키나와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뻗어나갔다. 수많은 스테이크 하우스들은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된다. 특히 철판구이집들의 인기가 좋다. 타코라이스 역시 미군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오키나와에서 만들어진 음식이다. 타코맛의 분쇄된 소고기, 치즈, 양상추, 토마토, 살사가 곁들여진 타코를 토르티야 대신 쌀밥 위에 올려 먹는다. 타코라이스를 파는 식당도 오키나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고유 음식으로 여겨지는 '오키나와 소바' 역시 이처럼 대중화되기까지는 미군의 영향을 받았다. 소바라고 불리긴 하지만, 일본 본토의 소바와 달리 메밀가루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를 사용해 만들어져 맛과 식감은 라멘이나 고기 우동과 유사한 음식이다. 오키나와 소바는 메이지 말기 시작돼 다이쇼 시대 퍼진 오키나와 고유 음식이지만, 오키나와 전투 등을 거치며 명맥이 끊겼다. 이후 오키나와 소바가 다시 만들어진 건 미군 점령 때 미군이 오키나와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밀가루를 보급, 밀가루가 풍부해지면서다. 오키나와 소바는 오키나와 현 내에서만 이 메뉴를 판매하는 식당이 2000개 이상으로, 1일 15만~20만 그릇이 소비될 정도로 오키나와 대표 음식이다. 음식 부문에서 오키나와가 미군의 영향을 받은 게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지점은 오키나와에 즐비한 패스트푸드점들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버거 체인점이지만 이젠 미국에선 모두 사라지고 캐나다, 말레이시아, 태국을 비롯 일본에선 오키나와에만 있는 A&W가 특히 그러하다. 오키나와엔 이처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양식 패스트푸드점이나 레스토랑이 향토 음식점보다 많고, 드라이브인오더 시스템이 갖춰진 곳이 많다. ◇최고 빈곤 오키나와… 미국식 식생활과 맞물려 '단명' 과거 오키나와는 장수 현으로 유명했다. 1985년 일본 후생노동성의 평균수명 통계에서 오키나와는 남녀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좋은 자연 환경에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걸 증명했던 '장수 현' 오키나와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나하시에 위치한 종합운동공원 한쪽에 '세계 장수지역 선언비'를 세웠다. 오키나와 섬 북쪽에 위치한 오기미 마을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세계 최고의 장수촌'으로 인정을 받아 1993년 '일본 제일 장수선언촌' 기념비를 세웠다. 이 선언비에는 "80살은 사라와라비(오키나와어로 어린아이라는 뜻)이며, 90살에 저승사자가 데리려오면 100살까지 기다리라고 돌려보내라"는 오키나와 엣 속담이 써있다. 오키나와는 이처럼 장수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언제나 일본 통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는,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어린이 빈곤율 30% (일본 전국 1위, 전국 평균의 약 2배) △급식비 미납 비율 전국 1위 △1인당 현민 소득 전국 최하위 △비정규직 비율 1위 △실업률 1위 △젊은이 결혼 비율 1 위 △속도 위반 결혼 비율 1위 △이혼율 1위 △이직률 1위 △미혼모 가구 비율 전국 1위(전국 평균의 약 2배) △한부모 가정의 아동 빈곤율 60%(전국 1위) △고등학교·대학 진학률 전국 최하위 등… 일본은 최저임금이 지역마다 다른데, 오키나와는 만년 꼴찌로 한 시간에 760엔이다. 도쿄 보다는 최저임금이 225엔 낮다.위 같은 서구식 식생활이 오키나와의 높은 빈곤율과 맞물리며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때 마침 미군이 주둔하며 물밀듯 들어온 서구식 식습관, 특히 패스트푸드와 통조림 햄(스팸·런천미트 등, 오키나와인들은 이를 '포크'라고 부르며 매우 즐겨 먹는다. 한 해 오키나와인이 통조림 햄을 12캔씩 소비할 정도다. 오키나와에선 식당에서 야채 볶음을 시키거나, 오키나와 소바를 주문하거나, 노점이나 편의점에서 주먹밥을 살 때 많은 경우 이 '포크'가 들어있다.)등이 오키나와인들의 식탁을 점령한 것이다. 야채는 비싸니 당연한 결과였다. 오키나와인의 하루 야채 섭취량은 일본 도도부현 47개 중 남자 45위, 여자 44위로(2013년 기준) 일본 내 최하위권이다. 당시 남녀 1위는 나가노현이었는데, 오키나와 남성의 1일 야채 섭취량은 266g으로 나가노현 남자 1일 야채 섭취량 379g의 약 70%에 그쳤다. 야채 섭취량은 적지만 패스트푸드점은 많다. KFC의 인구당 점포 수는 오키나와가 일본 전체에서 가장 많고 2012년 세대당 햄버거 외식비용도 전국 1위로 일본 평균의 1.5배에 달했다. 이처럼 채소는 먹지 않고 통조림 햄과 패스트푸드를 매일 먹는 데다가 상대적 빈곤까지 겹치니 비만율이 높아지면서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수명이 짧아지게 됐다. 결국 오키나와는 불과 몇 십년 만에 '장수 현'에서 '단명 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통계로도 나타났다. 1985년 남녀 평균수명 모두 전국 47개 도도부현 중 1위였던 오키나와는, 2000년 통계에서 남성 평균수명이 26위로 급전직하했다. 2010년 같은 통계에서 남성 평균수명은 30위, 늘 1위이던 여성 평균수명도 전국 3위로 내려앉았다. 더 심한 건 장수의 질 부문이다. 장수의 질이란 평균수명 가운데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는 기간인데, 여기서 오키나와의 남성은 47개 도도부현 중 꼴찌인 47위, 여성은 46위로 나타났다. 2015년 기준 65세 미만의 사망률은 남녀 모두에서 일본 전국 1위다. ◇오키나와인들의 숙원된 '미군 기지 이전' 상황이 이러하니 오키나와인들이 피해의식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미군 주둔에 따라 오키나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각종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 부담과 영향은 온전히 오키나와만이 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상 이익은 일본 전체가 누리면서 말이다. 미군 주둔 때문에 오키나와 땅이 꽁꽁 묶여 발전할 수 없다는 생각과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산업 육성을 위해 특별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강하다. (☞"나는 오키나와인"… 눈물 서린 日휴양지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 ①] 참고) 지난해 8월 췌장암으로 숨진 오나가 다케시 전 지사는 오키나와 내 주일미군 후텐마 비행장 기지를 같은 현인 나고시 헤노코로 이전하는 데 대해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아베 신조 정권과 각을 세워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상징이 된 인물이었다. 그가 말했던 게 이 같은 오키나와인들의 생각을 반영했다. 오나가 전 지사는 "미군기지는 오키나와 경제발전의 저해요인이다. 정부가 강행하려는 헤노코 새 기지 건설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말해왔다. 나아가 미군 기지 이전 문제는 오키나와인들에게 아픈 과거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중요한 문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가족 중 최소 한 명을 잃은 오키나와인들은, 미군 등 냉전과 전쟁의 상징을 더는 오키나와 땅에서 보고 싶지 않아한다. 미군 기지 이전은 또 오키나와인들에겐 생활과 밀접한 숙원사업이기도 하다. 오키나와는 특별한 산업이 없고 리조트 등이 밀집해 관광 산업이 주를 이루는데, 이라크 전쟁이나 북한 핵실험 등으로 미군이 긴장할 때 가장 먼저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오나가 전 지사가 별세해, 지난해 10월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가 다시금 치러졌는데 이때도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밖 이전을 주장하는 다마키 데니 후보가 당선됐다. 다마키 지사 역시 오나가 전 지사의 뜻을 잇고 있다.즉, 미군기지를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시키라는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먼저 치러진 나고 시의회 선거에서도 후텐마 기지 이전 반대파가 과반을 차지했다. 오키나와인들은 지속적으로 같은 의견을 내고 있다. 오키나와인들의 여론이 이러하니 일본 정부의 시름도 깊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 상황이나 중국을 안보적 군사적 측면에서 견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다지만,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하자는 주장은 21세기에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오키나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 그리고 차별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9.01.07 06:00

  • "나는 오키나와인"… 눈물 서린 日휴양지
    "나는 오키나와인"… 눈물 서린 日휴양지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 ①] 100년 간 류큐왕국인-일본인-미국인-일본인 정체성 변화… 오키나와 전투 등 눈물의 역사 남은 휴양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아주 추운 겨울, 일본에 있는 한 연구소에서 인턴을 했던 때의 이야기다. 추위를 질색하는 내게 동료와 친구들은 "주말에 따뜻한 오키나와로 놀러갔다오라"라며 "일본 본토와는 풍경도, 음식도, 사람들도 다르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 와중 재미있던 건 본토인들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말들이었다. "오키나와인들은 대체로 피부톤이 조금 어둡고, 얼굴도 작아. 이국적이랄까? 아무로 나미에(오키나와 출신 J-POP 가수)처럼 말야." "본토인들은 '私'(わたし·와따시, '나'라는 뜻의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본인을 지칭하잖아? 그런데 오키나와인들은 본인의 이름을 말해. 본인 이름이 '리나'라면 '리나가 오늘 무엇을 먹었다' 처럼 말야. 1인칭으로 본인을 가리키면 오글거린다나."… 이 같은 말을 들을 수록 '오키나와는 본토와 동화됐다기 보다는 유리돼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키나와는 일본 큐슈 남단에서 685km 가량 떨어진 최남단에 위치한 섬 지역이다. 57개 섬으로 구성된 오키나와현에서 가장 큰 본섬을 오키나와라고 부른다. 본섬에는 나하, 나고 등 오키나와현 내 굵직한 시(市)가 위치하며, 오키나와현 인구 90% 상당이 이곳에 살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제주도를 최고의 휴양지로 손꼽듯 오키나와는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국내 여행지'다. 외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하는 국제선 공항보다 일본 각 지역을 오가는 비행기의 이·착륙지인 국내선 공항이 더 클 정도다. 일본의 골든 위크(4월말부터 5월초까지의 공휴일 집중기간) 마다 오키나와엔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룬다. 오키나와의 자랑은 산호로 덮인 에메랄드빛 바다로, 미바루 비치, 아라하 비치, 에메랄드 비치, 세소코 비치 등이 유명하다. 석회암이 침식돼 만들어진 코끼리 코 모양의 해안절벽 만좌모, 길이가 8m에 이르는 고래상어를 볼 수 있는 츄라우미 수족관… 오키나와엔 볼거리도 많다. 이렇게 보면 오키나와는 '일본의 하와이'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오키나와가 갖는 위상은 그 보단 훨씬 복잡하다. 오키나와인들이 겪어야했던 눈물 섞인 역사와, 이로 인한 정체성 혼란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으로 존재했다. 류큐왕국은 본래 19세기 중반까지 450년간 한중일 3국과 무역하며 독자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큐 왕국은 군사력 강화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지유신 이후 곧장 정복돼 1872년 오키나와는 가고시마현 관할의 류큐번이 됐다. 이어 1879년 메이지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파견해 류큐왕 쇼타이에게 슈리성을 비우도록 명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해 일본 영토로 완전히 병합했다. 그렇게 류큐 왕국이 멸망했다. 이른바 '류큐 처분'(琉球處分)이다. 일본은 이후 식민지 정책을 시행해 언어와 두발, 풍속과 생활관습까지 철저히 일본화했다. 이후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점령한 뒤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미국령이 됐다가 1972년 '오키나와 반환'에 의해 다시 일본에 편입됐다. 즉 오키나와인들은 10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류큐 왕국-일본-미국-일본'이라는 정체성의 격변을 겪었다. 빠르게 정체성이 변화하고, 적응을 요구받는 동안 오히려 '오키나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강해졌다. 2007년 류큐 대학 법문학부의 한 교수가 2005~2007년 3년 간 오키나와인 1201명을 상대로 오키나와인의 정체성 의식 조사를 한 결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만약 스포츠 경기에서 오키나와 팀과 일본인 팀이 대결할 경우 어느 팀을 응원할 것인가"란 질문에 "(정치, 사회, 경제 이슈와 상관없다면) 오키나와 팀을 응원하겠다"는 답변이 94.1%나 나온 것이다. "자신을 오키나와인, 일본인 중 어느쪽이라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는 오키나와인이라는 답변이 30.3%, 일본인이라는 답변이 28.6%, 양쪽 모두에 해당한다는 답변이 40.1% 나왔다. 즉 오키나와인들은 향토에 대한 애착심이 매우 높고, 일본 본토인들과 다르다는 타자의식이 강하며, 정체성 구조가 매우 복합적이다. 오키나와가 일본 사회 내에서 여전히 이질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이유다. 일본 웹사이트를 웹서핑 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오키나와인들이 남긴 의미심장한 내용의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본토가 오키나와를 무시해선 안된다" "오키나와는 본토에 이용돼왔다. 오키나와 자체의 문제는 항상 무시돼왔다" "오키나와가 일본의 하와이라고? 그 보다는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비슷한 느낌이다" 등의 글들이다. 이 같은 생각의 배경은 오키나와가 본토에 비해 차별받아왔다는 의식에 있다. 오키나와에 남은 대표적 상흔은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오키나와 전투'다.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1일에 시작해 81일 간이나 계속된 태평양 최대의 치열한 전투였다. 당시 일본 본토인들에게 오키나와인들은 '일본인'이라기 보단 타인이었다. 자연히 오키나와인들의 재산이나 생명은 본토인들의 그것보다 하찮게 여겨졌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 1945년 종전 교섭을 앞두고 일왕을 보호할 시간을 벌고, 부족한 병력을 채우고, 미군의 일본 본토 진공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오키나와를 방패로 삼았다. 오키나와 주민을 '철혈근황대'나 '히메유리 간호대' 등에 총동원한 것이다. 또 적전에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기보다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미군의 승리로 끝난 전투에서 오키나와는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12만 명이 희생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또 한 번 오키나와를 버렸다. 도쿄 전범재판이 진행되던 1947년 9월 히로히토 일왕이 전쟁 책임을 면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미군에 장기 조차 형식으로 넘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1975년 현재의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신분으로 오키나와를 찾자 이에 항의한 오키나와인이 분신자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다시 복귀됐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오키나와는 본토로부터 이용되고 있는 식민지적 성격을 갖는다. 일본 전체 국토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엔 아직도 주일미군 기지의 75%가 집중돼있다. 오키나와는 미군 주둔에 따른 안보상 이익은 일본 전체가 누리면서 부담은 오키나와가 지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높다. 오키나와인들은 이따금 이 같은 현실을 다시금 깨닫고 본토인들로부터 차별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 기지의 현 밖으로의 이전을 요구하는 것도 그 맥락에서다. 1995년 미군 해병 3명의 12세 여중생 성폭행 사건이 불거졌을 때 미군 기지 이전 운동에 불이 붙었고, 이라크 전쟁이나 북한 핵실험 등 미군이 긴장할 때도 오키나와 전체가 전시하에 놓이게 된다고 불안에 떨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로 대부분의 이들이 가족 구성원 중 최소 한 명을 잃은 오키나와인들은, 지금까지도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살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오키나와에선 이따금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3년 마쓰시마 야스카쓰(松島泰勝) 류코쿠대 교수는 '류큐 민족독립 종합연구학회'를 발족했다. 그는 2015년 '류큐 독립선언'이란 책을 발간해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2013년 당시 오키나와가 지역구였던 데루야 간토쿠(照屋寬德) 사민당 의원도 블로그를 통해 '오키나와, 드디어 야마토(일본 본토의 옛 이름)에서 독립'이란 글을 올리고 "나는 오키나와가 이렇게 차별을 받느니 일본에서 독립하는 게 낫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키스타 107(오키나완 스터디즈 107)처럼 탈군사화, 탈식민지화, 류큐 민족의 자기결정권 등을 주장하는 단체도 있다. 물론 이게 오키나와 내 주류 목소리는 아니다. 아무리 오키나와인들이 오키나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고, 자부심도 크다해도 독립에 대한 열망은 소수의 목소리다. 2007년 오키나와 현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독립에 찬성하는 의견은 20.6%, 2012년 같은 조사에서는 1%에 그쳤다. 하지만 우치난추(오키나와 주민들이 본토인과 자신을 구별해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에 대한 야마톤추(오키나와 주민들이 본토인을 가리키는 말)의 차별이 지속된다면 향후 여론은 어떻게 튈지 모르겠다. 현재까지도 오키나와에선 처절한 저항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주일 미군이 사용하는 오키나와 후텐마 비행장을 오키나와 나고시 헤노코 해안에 옮기겠다고 밝히자 연일 "더 이상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 기지를 설치 말라"며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류큐 오키나와인의 아이덴티티 형성사,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손지연 오키나와의 눈물, 논형, 메도루마 슌 오키나와 이야기, 역사비평사, 아라사키 모리테루 오키나와인의 내셔널 아이덴 티티 인식에 관한 연구, 경희대, 김미영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2.31 07:06

  • 베트남 신부, <strong>그</strong>리고 아이들… '한국사람입니다'
    베트남 신부, 리고 아이들… '한국사람입니다'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③] 다문화 가정 학생 부모 출신국 1위, 베트남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사회적 인식이 다양한 인종들끼리의 이해와 우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적절한 조치를 교육·문화·사회분야에서 채택하라." 2007년 8월, 유엔 인종차별철폐 위원회는 이와 같이 정부에 권고했다. 이로부터 약 10년이 흘렀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크게 변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한민족' 정체성을 강조해왔고,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왔다. 타문화나 다문화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다. 특히 우리는 경제적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의 서열적 위치에 기반해 외국인을 바라봐왔는데, 이에 따라 한국으로의 국제결혼을 택한 결혼이민자들을 '경제적으로 유복하지 않은 국가 출신'이라거나 '우리와는 다른 인종·민족'이라며 거리를 두고 바라봐왔다.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온갖 차별이 발생했다. 여성가족부의 '2015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결혼이주민·귀화자'의 40.7%가 사회적 차별을 경험했다. 취업은 잘 되지 않았고,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보육시설 등에서의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베트남 신부가 한국을 찾은 이유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②] 참고) 초기 베트남 결혼이주민들이 대량으로 입국해 정착하는 과정에는 이것이 이들의 문제처럼 여겨졌지만, 점차 이들의 자녀가 성장하며 더 큰 문제로 비화했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란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인 다문화 가정과 그 아이들은 그 수가 적지 않다. 교육부의 '2017년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초·중등학교 다문화 학생 수는 10만9천387명이다. 이 중 대다수는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 학생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부모 출신국 중 베트남 비율은 29.1%로 1위였다. 차별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곳은 학교다. 오인수 이화여대 교수의 '다문화가정 학생의 학교 괴롭힘 피해 경험과 심리 문제의 관계' 논문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에 비해 괴롭힘에 더 많이 노출돼있다. 다문화가정 학생 760명 중 34.6%가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31.2%를 보인 일반 학생들 비중보다 높았다. 특히 왕따 등 관계적 괴롭힘을 경험한 비중은 18%로 일반 학생들 비중인 11.2%보다 훨씬 높았다. 앞서 2016년엔 전남 소재 한 초등학교에서 동급생들이 머리를 자르고 바늘로 찌르는 등의 가혹행위를 한 사례, 지난 10월13일엔 인천 연수구 한 아파트 옥상에서 동급생들이 집단폭행을 가하다가 추락사하게 한 사례의 피해자 모두 다문화 가정 학생이었다. 학교에서의 차별은 이들을 교육환경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여성가족부의 2015년 다문화가족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다문화 가족 자녀의 상급학교 진학률은 초등학교 97.6%. 중학교 93.5%, 고등학교 89.9%, 고등교육기관 53.3%에 그쳤다. 국민 전체의 취학률과 비교하면 초등학교는 격차(0.9%p)가 거의 없으나 중학교(2.8%p), 고등학교(3.6%p)로 갈수록 커졌다. 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기관의 진학률 격차는 14.8%p에 달했다. 자칫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주변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결혼이주민과 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 사회적 차별이 대물림되는 건 사회 내 다문화에 대한 편견이 심각한 데다가, 가정이나 학교 내에서 다문화에 대한 교육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는 등 우리 구성원으로 '포섭'하려는 노력을 해왔지만, 우리 스스로 이들의 문화를 배우는 등 다문화를 인정하고 바뀌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용광로 사회'를 추구하다가, '모자이크 사회'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전환한 호주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호주는 동화주의(새 이주민들에게 주류사회화해 포섭을 바라는 전략), 심지어는 '백호주의' 정책을 사용했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주민이 급격히 늘자 여러 폐해를 겪고 1970년 다문화주의로 전환했다. 이로써 초기에 소수민족 학생들에 대한 영어교육과 언어적응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교육이 점차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영어와 함께 모국어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장려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또 학생들이 다양한 문화를 배우며 사회 통합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베트남 출신 어머니 중에도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A씨는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는데 왜 한국인들은 배우지 않냐. 한국 아이들 역시 베트남어와 문화를 배우면 서로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다문화 교육 과정에서도 '다 같이 잘 지내야한다' 등 피상적인 교육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타문화와 타언어에 대한 기본적 교육을 해주는 게 다문화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격차가 해소돼야한다. 해외에서 이주민이나 이민자의 2세가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등 다문화사회를 가로막는 인종갈등 문제는 보통 새 이주민들이 경제적 평등을 이루지 못해 최하의 계층에 머물러 있을 때 발생했다. (☞무슬림 난민을 어찌할꼬… 佛로 비춰본 韓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②] 참고) 따라서 다문화가정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맞벌이 욕구가 높은 베트남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의 경우 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다문화 가정의 어머니가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직업교육, 취업알선 등 경제적인 욕구를 해소해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정책이 한 방법이다. 예컨대 결혼이주여성이 모국어를 활용해 취업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다양한 측면의 정책을 검토해볼 필요성이 있다. 호주는 학교에서 자녀교육 관련 자료를 이주민 부모의 모국어로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부 학교에서는 안내자료 등을 모국어로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또 호주는 이주민 집단 지역에 같은 국가출신의 교사를 배치하고 모국어교육을 실시한다. 이 경우 다문화가정 자녀가 꾸준히 학교 생활을 해나가고 한국어 언어의 문제로 학습을 중단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려면 이들 자녀가 교육대학교 등에 진학해야하는데, 소수인원이라도 이들 출신의 학생이 선발될 수 있는 대입전형제도를 검토해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참고문헌 미국, 캐나다, 호주의 다문화주의 비교 연구, KNU기업경영연구소, 성연옥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인권 보호를 위한 법적 방안 연구, 이화여대, 박지영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부적응 요인에 관한 연구, 인하대, 레쑤언흐엉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문화적 갈등과 적응, 영남대, 찐티미띠엔 베트남결혼이주여성의 시기별로 본 한국생활적응에 관한 근거이론연구, 경인교대, 백경아 베트남출신 국제결혼이주여성의 우울과 불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충북대, 홍선엽 한국 내 베트남 여성 결혼이민자의 문화적 적응, 부산외대, 조채윤 ☞[이재은의 그 나라, 일본 그리고 오키나와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2.24 08:28

  • 베트남 신부가 한국을 찾은 이유
    베트남 신부가 한국을 찾은 이유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②] 국제결혼과 대도시 취직, 큰 차이 없어… 친정에 송금 가장 큰 목적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저는 베트남 여자와 살고 있지만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에서 신랑을 만나 아기를 낳아주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목적은 100% 본국으로 송금입니다. 신랑이 돈을 대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벌어서 부쳐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입니다. 신부에겐 1순위 친정 부모님, 2순위 형제들, 3순위 친구들, 4순위 친정집 돼지 개 가축, 그 다음 5순위가 한국 신랑과 아기입니다." (지난해 한 결혼 육아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온라인 육아 커뮤니티나 국제결혼 정보공유 온라인 카페에서는 위 같은 내용의 글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주로 본인을 베트남 여성과 결혼했다고 소개하는 한국 남성이 베트남 여성과의 국제결혼을 주의하라는 내용이다. 위의 내용이 엄밀히 말해 사실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그동안 많은 수의 베트남 여성들이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친정을 돕기위해 한국행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판받을 일인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잘못이라기 보다는 베트남이 가진 사회적 특징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은 왜 베트남 여성을 선호할까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①] 참고) ◇국제결혼이 익숙한 베트남 본인의 가족과 삶의 기반을 떠나 아는 이 없는 나라로 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베트남 여성들 역시 국제결혼 업체에 본인을 등록하기까지 큰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나마 베트남에서는 일찍이 국제결혼한 커플이 많이 생겨나면서 우리나라에서의 국제결혼 보다 조금 더 친숙한 개념이었기에 여성들은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었다. 베트남 여성들이 현지에 주둔했던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다. 1970년대 이후엔 북미·호주·유럽의 국제결혼중개업체 소개로 편지를 교환하며 결혼을 약속받고 이주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1990년대,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 머이(Doi Moi·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경제개혁 흐름이 이어지자, 1986년 베트남 정부가 채택한 개혁·개방 정책) 시행 이후에는 '비엣 끼에우'(Việt kiều·외국에 살고 있는 베트남인)라고 불리는 베트남계 미국인과의 혼인이 줄을 이었다.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베트남 남성들은 이민사회 주류에 편입하지 못했고, 떠나온 고국 여성을 신부로 데려오고자했다. 1990년대 이후로는 자본시장을 개방한 베트남에 대만 중소 자본가들이 대규모로 진출하면서 대만 남성과의 결혼이 크게 늘어났다. 2001년 기준 베트남에서 총 2만7544명이 국제결혼을 했는데, 그 중 1만885명(전체의 39.5%)에 달하는 여성이 대만 남자와 결혼했다. 이처럼 국제결혼이 흔해진 데엔 성비차이 문제가 있었다. 베트남은 성비가 불균형한 사회로, 결혼 적령기인 여성들의 성비가 더 높아(2004년 기준 성비 여자 100명당 남자 96.7명)외국으로 짝을 찾아가는 게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 베트남 전쟁(1955~1975년) 등을 겪으며 수십만명의 남성이 사망했고, 성비가 가장 낮은 국가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는 남아선호사상이 이어지면서 남성의 성비가 높아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20년 뒤 베트남에는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 수십만명이 생겨난다.) 반면, 한국은 혈통과 가문의 대를 이어야한다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다. 1980년대 이후로 이 같은 현상이 심화되면서 결혼적령기 남성이 짝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됐다. 베트남에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국제결혼이 이어져 국제결혼에 익숙했던 데다가, 대만의 국제결혼 중매시장이 상업적으로 발전해 거대한 산업을 구성한 상태라, 한국인과의 국제 결혼도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베트남 여성이 한국을 찾아온 이유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을 찾는 이유는 개인에 따라, 출신 지역(남부·북부 등)에 따라 매우 달랐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북부 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남부출신 여성들이, 취직과 비슷한 개념으로 한국을 오는 일이 흔했다. 1990년대 이후 급증한 한국인·대만인과의 국제결혼은 특히 남부지역에 집중됐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십여 년 동안 총 3만9325명의 베트남 여성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 남성과 결혼했는데, 이 가운데 남부 베트남 여성과 외국 남성과의 결혼이 92%이상을 차지했다. 한국 결혼비자(F-2) 발급 건수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북부 하노이 보다 남부 호치민에서의 발급 건수가 현저히 많다. 남부는 전반적으로 발전이 더뎠기 때문에, 남부 제 2의 도시 껀터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2009년 기준 껀터 출신으로 국제결혼한 여성 수는 2000여명으로 이 중 90%가 한국과 대만에 이주했다. 베트남 남부에서도 특히 메콩 델타 지역은 최대 곡창지대지만 사회적 기반시설이 적다. 국제결혼은 베트남의 농촌 지역 여성들에게 돈 벌 수 있는 기회로 빈곤한 가족을 도와줄 수 있으며, 빈곤과 과중한 농사 관련 노동에서 탈출할 수 있고, 혹 기회가 닿으면 가족들을 부국에 이민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기회로 비춰졌다. 결국 이들에겐 호치민 등 대도시에 나가 돈을 버는 것과 국제결혼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됐다. 장지혜 문화인류학자는 논문 '국제결혼을 통한 송금이 여성 결혼이주자 본국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에서 "베트남에서 국제결혼을 해 국제이주하는 여성들에게 한국, 대만, 일본 등 이주대상국 은 그다지 고려할 사항도, 선택의 사항도 아니었다"면서 "어떤 중개업체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당시 국제결혼시장에서 선호하는 시장이 어디인 지에 따라서 그 나라가 정해진다. 중요한 건 부유한 국가로 이주해서 돈을 벌어 집안의 살림에 보태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연히 이들의 가장 큰 목적은 '친정에의 송금'이다. 세계은행통계에 따르면 베트남은 세계 10대 송금 수입국이다. 2012년 기준 해외거주자로부터 베트남에의 송금액수는 100억달러로, 9위였다. 2005년 보건복지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약 70%가 본국에 송금을 하고 있으며, 연간 평균송금액은 97만원이었다. 한편, 베트남 여성들에게는 '혼기를 놓친 나이' 역시 결혼을 결정하는 데 큰 고려 사항이다. 베트남에서 여성의 결혼 연령은 보통 20~22세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은 집안의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갓 성인이 된 여성은 연상 남성들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는데, 만일 이 과정에서 결혼까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여러 형태의 압박을 받게 된다. 반면 이들이 중개업체를 통해 한국, 대만 등의 남성과 국제결혼할 때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결혼중개업체에 등록해 국제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도 이와 관련돼있다. ◇'송금' 갈등과 가정폭력 이처럼 베트남 여성들은 가족지향적이고, 베트남에 있는 친정 가족과 긴밀한 정서적 결속력을 갖고 있기에 형제의 학비, 부모의 생활비 등 경제적 원조를 해줘야겠다는 의무감이 크다.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한국을 찾아왔기 때문에 이 목적이 가로막힐 경우 갈등이 불거지기 십상이다. 김한곤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이주여성 상당수가 친정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호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국제결혼을 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라면서 "이주여성의 적응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친정 가족들에게 송금을 하느냐 여부였다"고 분석한 바 있다. 결국 베트남 국제결혼 가정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부부간 호혜적인 태도를 유지해야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한국에서도 한국인 아내의 친정을 자주 찾고, 한국인 아내의 친정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리거나 용돈을 드리지않냐'며 송금을 남편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인 남편들은 송금 문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부담스럽게 여긴다. 시댁식구가 '딸은 출가외인이다'라거나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더 이상 돈을 요구하지말라'는 태도를 보이며 베트남 여성에게 가사노동에만 전념하게하게 하기도 한다. 만일 남편이 도와주는 송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송금을 하지 못하게 할 경우 이들은 큰 좌절감을 느낀다. 처음엔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또 한국어가 능숙하더라도 한국인의 인종차별적 인식 때문에 이들의 취직은 쉽지 않다. 만일 결국 취업이 돼 약간의 여윳돈이라도 생기면 부부 갈등은 불식된다. 하지만 만일 취직 마저 하지 못하게 남편이나 시댁이 가로막을 경우 이들은 비상금을 모으고, '가출'이나 '이혼' 등을 결심하곤 한다. 이 과정 부부간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기도 한다. 갈등이 생기는 것 자체는 부부간에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문제는 많은 경우 가정폭력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지난 6월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결혼이주여성 920명 응답자의 42.1%가 '가정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조사대상의 출신국가는 베트남 42.4%, 중국 29.4%, 필리핀 11.4% 등의 순이었다. 가정폭력 유형(복수응답)으로는 △심한 욕설(81.1%) △한국식 생활방식 강요(41.3%) △폭력위협(38%) △생활비나 용돈을 안 줌(33.3%) 등의 순이었다. 이 밖에 부모님과 모국 모욕, 성행위 강요, 본국 방문·송금 방해 등의 답변도 나왔다. 한국인 남편이 결혼이주여성을 가정폭력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심지어는 살해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속성 국제결혼에 따른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자 2011년 '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법무부의 국제결혼안내프로그램이다. 베트남,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태국 등 속성 국제결혼이 만연한 국가의 국민과 결혼하는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4시간 동안 해당국 문화와 가정폭력 방지를 비롯한 인권존중 안내, 국제결혼 경험담을 소개하는 제도다. ◇"친한 한국인, 한 명도 없어"… 사회적 배제 심각 하지만 국제결혼 여성들의 한국에서의 삶은 아직도 갑갑하기만 하다. 나아지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결혼이주여성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빈번히 전해지고 있다. (△레*** (2007년 3월 대구, 베트남) 임신한 몸으로 갇혀있던 아파트 9층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떨어져 사망 △후*** (2007년 6월 충남 천안, 베트남) 입국 한 달만에 남편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해 갈비뼈 18대 부러져 사망 △쩐*** (2008년 3월 경북 경산, 베트남) 입국 일주일만에 14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 △탓**** (2010년 7월 부산, 베트남) 입국 일주일만에 조현병 환자인 남편에 의해 칼에 찔려 사망 △황** (2011년 5월 경북 청도, 베트남) 출산한지 19일 만에 남편에 의해 칼로 난자당해 사망 △팜*** (2012년 3월 강원 정선, 베트남) 조현병 남편에 의해 사망 △응*** (2014년 1월 강원 홍천, 베트남) 남편이 목졸라 살해△전*** (2014년 1월 경남 양산, 베트남 ) 남편이 목졸라 살해 서△** (2014년 7월 전남 곡성, 베트남) 남편이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 △응*** (2014년 11월 제주, 베트남) 한국 남성이 살해 △누*** (2014년 12월 경북 청도, 베트남) 남편이 살해 △이** (2015년 12월 경남 진주, 베트남) 이혼 후 자녀 면접권을 가진 전남편이 아이와 함께 살해 △부*** (2017년 6월 서울, 베트남) 시아버지가 살해…, 집계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그리고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배제돼있다. 여성가족부는 '2015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서 '결혼이민자·귀화자'의 30%가 사회적 관계 맺음에 취약하다'는 결과를 내놨다. 즉 도움이나 의논을 청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맺은 이가 없다는 뜻이다. 한국 거주기간이 늘어나고, 한국어 구사 능력이 좋아지고 있음에도 한국인과의 사회적 관계는 위축됐다. 이들이 사회적 차별을 경험한 비율은 40.7%에 달했다. 취업은 잘 되지 않았고,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자녀가 다니는 학교와 보육시설 등에서의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차별을 경험한 결혼이주민들의 75.3%는 그냥 참았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가 결혼이주민의 사회적 소외 문제 해결을 우선순위로 설정해야 하며, 차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적극적으로 편입될 수 있는 방안과 이들의 자녀 문제를 다뤄본다. 참고문헌 국제결혼을 통한 송금이 여성 결혼이주자 본국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 전북대, 장지혜 베트남 여성의 가족가치관에 대한 연구, 동국대, 이은주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인권 보호를 위한 법적 방안 연구, 이화여대, 박지영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부적응 요인에 관한 연구, 인하대, 레쑤언흐엉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문화적 갈등과 적은, 영남대, 찐티미띠엔 베트남결혼이주여성의 시기별로 본 한국생활적응에 관한 근거이론연구, 경인교대, 백경아 베트남출신 국제결혼이주여성의 우울과 불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충북대, 홍선엽 한국 내 베트남 여성 결혼이민자의 문화적 적응, 부산외대, 조채윤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③]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2.17 06:00

  • [MT리포트] "잘 죽고 싶어요"… 죽음 '맞이하는' 사람들
    [MT리포트] "잘 죽고 싶어요"… 죽음 '맞이하는' 사람들

    [웰다잉 시대](종합)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1955년 복부대동맥류 파열로 쓰러졌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수술을 거부했다. 그는 '웰다잉'(Well-dying)을 선택했다. 자신이 원하는 때, 품위 있게 죽음을 맞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지금 '좋은 죽음'이 좋은 삶 못지않게 중요한 시대가 됐다. 우리의 가장 확실한 미래인 죽음,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잘' 죽기로 했다 ━[웰다잉 시대 ①]죽음, 삶의 일부로 인식…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 "제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평상복 입고 참석해주세요. 조의금은 받지 않습니다." 지난해 11월, 일본 한 신문에 의문의 광고가 실렸다. 자신의 '생전 장례식'을 치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광고를 게재한 사람은 안자키 사토루(당시 80세). 일본 건설기계 분야의 1위 기업 고마쓰의 전 사장이었다. 그는 온몸에 암이 전이돼 수술 불가능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연명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아픈 몸으로 버티며 사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로부터 약 3주 뒤, 안자키 전 사장의 생전 장례식이 열렸다. 회사 관계자, 동창생, 지인 등 약 1000명이 참석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모든 테이블을 돌며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감사 편지도 남겼다. 생전 장례식을 치르고 6개월 뒤, 안자키 전 사장은 81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말처럼 '몸부림치지 않는 죽음'이었다. 잘 죽어야 잘 사는 시대가 왔다. 이른바 '웰다잉'(Well-dying) 시대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을 삶의 일부로 인식한다. '죽음의 질'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웰다잉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능동적으로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죽음의 시기와 방법, 혹은 그 이후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다리며 준비한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죽음을 맞이하는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고 있다. ◇'웰빙' 이어 '웰다잉' 시대로…고령화로 관심 높아져 웰다잉은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으로 화두에 올랐다. 대법원이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의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존엄사를 허용하며 환자의 결정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됐다. 이후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 최근에는 빨라진 고령화가 웰다잉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유병장수' 시대가 열리면서 죽음의 패러다임이 변했기 때문. 병든 채 목숨을 유지하기보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웰다잉을 더욱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노인층에서 특히 뚜렷하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만 65세 이상 노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노인 10명 중 8명은 존엄사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연명의술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돕는 '호스피스 서비스 활성화'에 동의하는 노인도 87.8%나 됐다. 고령 인구가 늘면서 '좋은 죽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지자체들은 웰다잉 프로그램을 앞다퉈 마련하고 있다. 2016년 대전광역시를 시작으로 30여곳의 지자체가 웰다잉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경기도 평택시는 웰다잉 사업의 일환으로 민간차원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업무에 시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영정사진 찍고 관속에 눕고…"잘 죽을 준비 됐습니다" 웰다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임종체험은 대표적인 죽음 준비 과정으로 꼽힌다. 대개 유언장을 쓰고, 관에 들어가는 등 죽음을 간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한 상조회사는 별도의 '힐링센터'를 지어 무료로 임종체험과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7년째 운영 중인 이 센터는 누적 체험자 수가 2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선 영정사진을 찍는 문화도 생겼다. 계기는 가지각색이지만 이유는 비슷하다. 자신의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다. 지난 5월 영정사진을 촬영한 취업준비생 이모씨(26)는 "죽음도 긴 일생의 일부라 생각해 영정사진을 찍었다"며 "준비되지 않은 사진이 마지막 모습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죽은 뒤 장례는 의미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생전 장례식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370명을 대상으로 생전 장례식에 대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9.7%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지난 8월엔 서울의 한 병원에서 호스피스 환자를 위해 지인들을 초대, 이별파티 분위기로 생전 장례식이 치러졌다. 하지만 국내 웰다잉 관련 시장의 규모는 아직 부족한 형편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맞았던 일본은 '종활'(終活·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 문화가 정착돼 있다. 유품 정리와 디지털 유산 상속, 사후 정리를 위한 보험 서비스 등 다양한 종활 상품이 등장했다. 일본 언론 등에 따르면 종활 산업의 규모는 연간 5조엔(약 5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박가영 기자 ━기본권엔 한 가지가 빠져있다… '죽을 권리' ━[웰다잉 시대②] 존엄사, 의사조력자살 등 인간에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시각 "나는 늙고 있습니다. 시력을 포함해 내 모든 능력은 퇴화했습니다. 이제 나는 집에 24시간 갇혀있거나, 양로원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아요. 죽고 싶어요. 슬프냐고요? 아뇨, 내가 슬픈 건, 죽어야해서가 아니라 죽을 수 없어서입니다." (故 데이비드 구달 박사, 이 같은 인터뷰 후 지난 5월9일 104세로 스위스에서 의사조력죽음 통해 사망.) 내년 3월28일부터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조건이 완화된다. 이전에는 연명치료(심장마사지·인공호흡·점적수액요법 등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의료행위 전반) 중단 조건 중 환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을 때 19세 이상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전원의 서명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손자·손녀 동의는 없어도 되는 것으로 바뀐다. 앞으로 가족의 동의가 부족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이어나가는 일이 크게 줄면서 존엄사를 맞는 이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품위 있는 죽음'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 이 같은 '연명 치료 중단' 요건 완화는 존엄사가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가능했다. 이들은 회생(다시 살아남) 가능성이 없는 이들이 마지막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을 위하여 온갖 기기를 매단 채 가족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보다,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게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이처럼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명치료중단은 '존엄사' 혹은 '품위 있는 죽음'의 한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법적으로 연명치료중단을 통한 존엄사가 실행됐고, 이제서야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엄사를 허용해왔다. 법적으로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는 네덜란드·벨기에·스위스·태국 등이다. 미국은 50개 주 가운데 40개 주가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다. 나아가 이미 많은 나라에서는 존엄사보다 한 차원 나아간 수준의 논의도 활발히 하고 있다. '의사조력죽음'(의사조력자살·PAS, Physician-Assisted Suicide)에 대한 논의다. 의사조력죽음은 환자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의사가 치명적인 약물(펜토바르비탈 등)을 처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익숙지 않은 개념이지만, 이미 오리건·워싱턴·뉴멕시코·캘리포니아·버몬트·몬테나 등 미국의 일부 주, 캐나다·네덜란드·벨기에·스위스와 같은 몇몇 국가에서는 합법이거나 처벌되지 않는다. 이 나라들이 의사조력죽음을 허용하는 이유는 우리에겐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이것이 일종의 '기본권'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호주 퀸즐랜드주에 거주하고 있는 홀리 워랜드(27)는 빅토리아주에서만 합법화된 의사조력죽음을 호주 전역에서 합법화할 수있게 해달라고 주장하는 활동가다. 그는 몇년 전까지만해도 남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퀸즐랜드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지대형 근육영양장애(LGMD)라는 유전질환이 심해지며 몸이 점차 굳었다. 이제 그의 몸은 딱딱히 굳어 샤워를 하거나 화장실에 가는 데도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질환 때문에 본인이 사실상 죽어있어 의사조력죽음이 필요하다며, 이것이 합법화돼야한다고 주장한다. 홀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내가 갖게된 신체적 장애가 자랑스럽지 않다. 내가 앓는 유전질환에는 치료제도 없다.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면서 "내가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어느 날, 내 인생을 스스로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내가 죽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온몸이 굳어버린 나는, 스스로 죽기를 시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그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삶을 이어가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스스로 죽음을 도모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그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힘겨운지 SNS(사회연결망서비스)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하고, 의사조력죽음에 대한 의식 개선을 추구한다. 한국에서도 지난 7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 아버지를 제발 죽여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오면서 '안락사'와 '의사조력죽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게시자는 "내 아버지는 지난해 7월 췌장암 3기 판정 이후 5월까지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이미 췌장암은 말기로 진행됐고 이제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있다"면서 "현재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고 말도 못하신다. 통증이 너무 심해 수면제와 진통제에 의지해서 하루 종일 주무신다. 1분 남짓 깨계실 때면, 아버지는 고통에 빠져계시다가 간신히 손을 움직여 '안락사'를 검색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제발 아버지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나도 한 번 죽어볼까"… '미끄러운 경사면' 이론 하지만 이 같은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어떤 원칙이 무너지면 연관된 다른 원칙들이 순차적으로 무너지는 현상)처럼,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이뤄지더라도 결국에는 타의에 의해 생명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환자가 불안, 공포 또는 죄책감에 휩싸여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수 있고, 우울증을 동반한 불치병 환자가 감정적·충동적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가족이 겪는 재정적·감정적·정신적 부담 때문에 자의 또는 타의로 떠밀리듯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의사조력죽음 합법화 반대 투쟁을 해온 응급의학전문가 스티븐 파르니스는 "필연적으로 부당하게 죽어나가는 이들이 생길 것"이라면서 "미묘하게 '죽으라'는 강요를 당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론자들은 구달 박사의 죽음 역시 '미끄러운 경사면'의 한 사례로 본다. 의사조력죽음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죽지 않아도 될 이들까지 죽음을 고민하게 되는데 구달 박사의 사례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구달 박사는 지난 5월9일 스위스 바젤에서 바르비투르산염 넴부탈을 투여받아 사망했다. 구달은 나이는 들었지만 위독한 병이 없고 건강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건강한 사람이 의사조력죽음을 택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는 "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고 말하며 죽음을 기뻐했지만, 호주 의사협회는 "더욱 더 많은 이들이 죽음을 바랄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와 안락사 등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며, 국가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우리는 아직 국민의 품위 있는 죽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미흡할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에서 환자의 의사가 잘 반영되지 않아 덜 수용적"이라면서 "유럽이나 북미처럼 우리나라도 안락사 논쟁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은 기자 ━나의 죽음, 누군가의 시작입니다 ━[웰다잉 시대③] 가치 있는 죽음 '장기기증' 관심…낮은 인식에 서약률은 제자리 나의 목적과 의욕이 정지했다고 선언할 때가 올 것입니다.(중략) 나의 심장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주십시오. 뇌세포를 도려내 말 못하는 소년이 함성을 지르게 하고, 듣지 못하는 소녀가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게 해 주십시오.(중략) 내가 부탁한 이 모든 것들을 지켜 준다면 나는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미국 시인 故 로버트 테스트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中) 회생 불가능한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조건이 완화되면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죽음을 마냥 두려워하고 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늘고 있다. 죽음을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장기기증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찾는다. ◇끝은 새로운 시작 지난 10월 수레를 끄는 노인을 돕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김선웅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웃을 돕다 사고를 당한 김씨는 떠나면서도 어려움에 처한 7명을 살렸다. 자신의 건강한 장기를 기증해 새로운 삶을 선물한 것. 선행을 좋아했던 김씨에게 걸맞은 존엄한 죽음이었다. 김씨는 생전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사망한 뒤 정상적으로 활동 가능한 장기를 가족이나 장기부전으로 고통 받는 다른 환자의 소생을 위해 기증하겠다는 약속이다. 심장, 간, 폐를 비롯해 골수와 인체조직까지 1명의 장기기증은 최대 9명을 살릴 수 있다. 나의 죽음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장기기증은 '웰 다잉'(Well-dying)의 한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쉽게 서약이 가능한데, 한국장기기증원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40여만명이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지난 9월에는 서울시 의원 83명이 단체로 장기기증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장기기증을 고려하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질병관리본부가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7%가 '장기기증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직장인 이모씨(28)는 최근 장기기증서약을 고려 중이다. 김선웅씨 소식을 접한 뒤 장기기증을 결심했다. 이씨는 "가치 있게 삶을 살고 싶은 것처럼 내 죽음도 가치있길 바란다"며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날 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의미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기기증에 대한 관심은 해외에서 더 높다. 일부 국가에선 기부행위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5월 글로벌 여론조사기업 '입소스모리'가 28개국 성인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1%가 '장기기증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스페인(72%)과 브라질(70%), 미국(65%), 영국(65%) 등은 특히 더 긍정적이었다. 최근 브라질에선 사망자의 자궁을 이식받아 출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갈 길은 여전히 멀어 '의미 있는 죽음'의 방법으로 장기기증에 대한 관심은 분명 높아졌지만, 그 속도는 아직 더디다. 여전히 장기기증을 약속한 사람들은 적다. 지난 4일 한국장기조직기증원 발표에 따르면 뇌사자 장기기증은 매년 500명대에 불과하다. 올해도 428명에 그쳤다. 3만명에 달하는 이식 대기자에 비하면 턱 없이 저조하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남녀의 '장기기증' 인지도는 98.1%에 달한다. 전국민 대다수가 장기기증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장기기증을 서약한 사람은 2.8%(140만명)에 불과하다. 해외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다.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센터 지난해 한국의 인구 100만명 당 뇌사자 장기기증률은 9.95명에 그쳤다. 반면 스페인은 46.9명, 미국은 31.96명에 달했다. 이에 대해 장기기증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반감, 기증자에 대한 부적절한 예우 등이 장기기증 서약을 망설이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보통 장기기증은 사후기증과 뇌사자 기증을 말한다. 이중 뇌사자 기증은 많은 장기이식이 가능해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뇌사 판정을 받은 환자가 호흡을 한다는 이유로 언젠가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 섣불리 장기기증을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뇌사는 식물인간과 달리 뇌간을 포함해 뇌 전체 기능이 중지돼 인공호흡기로 호흡만 연명할 뿐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신체훼손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유교적 분위기도 장기기증의 확산을 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실제 질병관리본부 조사에 따르면 장기기증 의사가 없다고 대답한 사람의 대부분이 '인체훼손에 대한 거부감'을 원인으로 말했다. 이 때문에 장기기증을 서약해도 가족이 동의하지 못해 기증하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기증서약을 하더라도 가족 1명이 동의해야 장기기증이 이뤄지는데, 올해 가족의 기증거부율은 60%에 달했다. 이에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윤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주요 선진국들이 실시하는 옵트아웃제를 비롯, 운전면허 취득 인원에게 장기기증제도를 안내하는 다양한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명백한 장기기증 거부 의사가 없을 경우 장기기증 희망자로 등록하는 '옵트아웃제'를 실시하고 있고, 미국과 영국은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장기기증 신청 여부를 묻는 등 인식 제고에 힘쓰고 있다. 유승목 기자 ━연명치료 중단 결단 떠안는 가족들…국회는 '고심중' ━[웰다잉 시대④] 20년 논란 '존엄사'…법 개정은 현재진행중 연명의료결정제도를 통해 연명의료를 중단한 사례 중 환자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남겨 연명의료를 중단한 사례는 34.9%에 불과하다. 10명 중 7명은 가족의 합의나 가족의 진술을 통해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환자 스스로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남길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자는 것이 국회의 최근 고민이다. ◇20년 사회적 논의 끝에 통과된 '존엄사법'…그 후 한차례 개정 ='존엄사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안)이 시행된 것은 지난 2월.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으로 우리사회에 존엄사가 화두로 오른 지 약 20년, 2009년 '김 할머니 사건' 이후 국회에서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지 7년만이다. 2008년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김 할머니의 가족들은 본인의 평소 뜻에 따라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했다. 소송 끝에 이듬해 5월 대법원은 최초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했다.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자발호흡을 통해 200일 이상 생존하다 2010년 1월 별세했다. 이 과정에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 필요성을 놓고 사회 각 층에서 논란이 일었다. 2013년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고 입법화를 권고했다. 이후 국회 상임위(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하는데에만 2년 5개월이 더걸렸고, 2016년 1월8일 마침내 존엄사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됐다. 그러나 법 시행 후에도 문제는 있었다. 연명중단은 △환자가 미리 작성한 사전연명의료 의향서가 있을 때 △임종을 앞둔 환자가 직접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했을 때 △가족 중 두 명 이상이 환자가 평소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동일하게 진술했을 때 등으로 한정한다. 모든 경우 환자 본인이 의사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환자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는 환자의 직계 존·비속 성인 가족 모두에게 동의를 받아야 한다. 환자의 배우자는 물론 자녀·손주·증손주 등 모든 직계혈족과 연락해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와 국회는 이같은 조건이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들여 지난달 법을 개정, 동의를 받아야하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 전원'에서 '배우자와 1촌 이내 직계 존·비속(배우자·부모·자녀)'으로 축소했다. ◇환자 스스로 연명의료중단계획서 작성한 비율은 10명 중 3명뿐 = 국회의 최근 고민은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때 환자 스스로 본인의사를 명확히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지위에 따르면 지난 2월 존엄사법이 본격 시행된 후 약 1만1528명이(7월 기준) 연명의료결정제도를 통해 연명의료를 중단했다. 이 중 병이 위중해진 뒤 환자가 의사와 상담 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경우는 34.9%로 10명 중 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7명은 환자가족이 환자의 뜻을 대신 진술(28.5%)하거나 환자가족의 전원합의(36.7%)를 이루는 등 사실상 가족이 연명치료를 중단했다. 이에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 등 국회의원 10명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 작성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주요 골자로 하는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을 지난 9월 발의 했다. 현재 국회에 연명의료중단과 관련해 유일하게 발의된 개정안이다. 이 법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의료기관을 의무적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8년 9월 기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등록기관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포함해 총 86개 기관이다. 지역보건의료기관 19개, 의료기관 46개, 비영리단체 20개, 공공기관 1개가 등록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법이 개정될 경우 지역보건의료기관(보건소)과 국립대학병원은 물론 국립중앙의료원, 서울대학교병원, 국립암센터, 지방의료원 등의 공공의료기관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 지정되게 된다. 다만 모든 공공의료기관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무실, 상담실, 온라인 업무처리시스템 등 시설과 인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또 동일지역내에 다수 기관이 지정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민우 기자 ━잘 사는 법보다 중요한 '잘 죽는 법', 책으로 읽다 ━[웰다잉 시대⑤] 출판계에서도 웰다잉 서적 봇물 이뤄…'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영원한 긴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 삶의 마침표를 제대로 찍기 위해선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지난 2월 '합법적인 존엄사'가 가능한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면서 '잘 죽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다. 출판계도 예외는 아니다. 죽음을 이해하는 관점과 태도를 종교‧철학‧의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한 '웰다잉'(well-dying) 관련 서적이 봇물을 이루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죽음에 대한 사유의 정수 '죽음에 대하여' 영생의 삶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라는 말이 있다. 즉,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가는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철학계의 독창적 아웃사이더로 불린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츠의 사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출간된 '죽음에 대하여'는 프랑스의 편집자 프랑수아즈 슈왑이 장켈레비츠가 죽음을 주제로 한 대담 4개를 묶어 저자 사후 10년 즈음에 출간한 책이다. 장켈레비치의 주저 중 하나로 평가되는 '죽음'(La mort·1966년)을 평이한 언어로 전달하고자 한 대중적 판본으로 죽음에 대한 사유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장켈레비치는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적 상태의 죽음이 위대한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열정과 열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설명했다. '존재했음'의 진실에 대해 그는 "언젠가 삶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해도 나는 적어도 삶을 알았던 사람이 된다"며 "삶을 잃게 된다는 그 이유에서 어쨌든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하지 않고 '맞이하는' 죽음…'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사람을 살리고 죽음을 한시라도 늦추는 일을 하는 의사들이 펴낸 죽음에 관한 서적도 발간됐다. 지난 8월 출판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는 '죽음학 전도사'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가 2007년부터 10여 년 간 저자가 대중을 상대로 해온 '죽음학' 강의 내용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의사로서 사람을 살리는 일만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많은 사람이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직면하고 사유해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충실하게 살다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라는 판단했다. 이 책은 저자가 2차례의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며 죽음에 대해 더욱 깊이 사색한 결과가 담겼다. 과학자 입장에서 사후세계를 연구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썼다. 안락사 제도와 자살문제 등 죽음 관련 사회적 문제도 다뤘다. 이 책에 따르면 죽음은 준비할 때 존엄할 수 있으며 죽음은 벽이 아니라 문, 소멸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데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며 "오히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람직한 죽음이란?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의학기술 발달로 수명은 길어졌지만 훨씬 많은 질병에 노출되면서 '유병장수'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제 쉽게 죽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 듀크대 심장학 전임의인 하이더 와라이치는 다년간의 연구와 현장경험, 환자 및 가족과의 인터뷰, 참고자료와 사례 등을 바탕삼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인 '죽음'에 대해 파헤쳤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죽음에 맞서기 위해 현대의술의 도움의 받지만 이는 단지 죽음을 지연시키고 죽는 과정을 연장할 뿐"이라며 "죽음에 대해 깊게 인지하고 더 많이 토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바람직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중점을 둔 부분은 '죽음의 질'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고통을 덜 겪고 외로움을 덜 느끼는 환경이 마련되기 위해선 환자와 가족이 소통할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며 환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치료와 임종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강조했다. 황희정 기자 ━내 나이 28세, 영정사진을 찍었다 ━[웰다잉 시대⑥] 2030세대 유행처럼 자리잡은 '영정사진 촬영' 직접 체험해보니 "실물보다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긴장을 누르려 애써 꺼낸 한 마디가 고작 이거라니. 스스로도 어이없단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바라봤다. 잠시 뒤 검은 휘장이 둘러진 사진 한 장을 받아들었다.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보던 얼굴이지만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기자 나이 28세, 그렇게 영정사진을 찍었다. ◇젊은 날에 유서 쓰고 영정사진 찍는 청년들 장례식에 갈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것, 바로 영정사진이다. 청년들에게는 낯선 존재다. '죽음을 앞둔 나이 많은 사람이 찍는 것'이라는 통념 때문. 영정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불길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대학생 김모씨(24)는 "젊은 나이에 영정사진을 찍으면 때 이른 죽음을 불러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런데 최근 20~30대 청년들 사이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9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의미 있는 장소에서 원하는 모습을 영정사진으로 남겨주는 '젊은 나의 영정사진'이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최근에는 '청년 영정사진' 전문 사진관도 생겼다. 청년들이 '영정사진'을 찍는 이유는 뭘까. 대개 팍팍한 현실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서다. 새로운 추억을 남기고자 찍는 이도 있다. ◇난생처음 써본 유서, 살아온 인생 되돌아보게 돼 젊은 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영정사진은 가족이나 지인들이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삼촌의 영정사진이 그랬다.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영정사진 속 삼촌은 열댓 살은 어려 보였다. 20대 시절 촬영한 증명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만 것. 문득 머릿속에 의문 하나가 스쳤다. '삼촌은 영정사진으로 저 사진을 원했을까?' 기자는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모습이 될 영정사진은 직접 고르고 싶었다. 몇 달 전 마지못해 찍은 취업용 증명사진이 장례식장에 놓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청년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스튜디오를 찾았다. '힙한 거리'로 떠오르는 문래창작촌과 한 블록 차이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인적이 드문 공장지대를 가로질러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사진작가 홍산씨(24)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홍씨는 "촬영 전 자유롭게 유서를 작성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며 "유서를 쓰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영정사진 촬영에 더욱 진지하게 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막상 유서를 작성하려니 첫 문장부터 막막함이 밀려왔다. 한 글자조차 쉽게 쓸 수 없었다. 누구에게 유서를 남길까 고민하다 하나뿐인 동생에게 쓰기로 했다. '네가 평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나무가 돼주고 싶었는데 먼저 가서 미안해. 대신 엄마 아빠를 부탁해. 언니 없어도 너무 슬퍼하지 마. 나쁜 마음 먹지 말고…' 한 줄 한 줄 써 내려갈 때마다 서글픔과 회한이 몰려왔다. 평소 막연히 생각했던 죽음이 비로소 바짝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렇게 눈물의 유서 작성을 마쳤다. ◇내 인생 마지막을 장식할 사진을 남기다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았다. '영정사진' 촬영이 주는 무게감에 자꾸만 표정이 굳었다. 답답한 마음에 평소 고객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묻자 홍씨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고객도 많고 평소 아끼던 물건과 함께 포즈를 취하는 고객도 있다"며 "너무 떨지 마시라"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덕분에 긴장을 덜어낼 수 있었다. 몇 번이나 표정을 바꾼 끝에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인생 마지막 사진'을 확인했다.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입가엔 미소가 살짝 어려 있었다. 영정사진으로 쓰기에 무난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며 "혹시 내가 내일 당장 죽으면 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써 달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넸다. 친구에게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면박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니… '살아있음'에 감사 이날 스튜디오에서 만난 '영정사진 촬영 동지' 김호연씨(26)는 영정사진 촬영을 두고 "힘들었던 일상을 재충전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홍씨의 스튜디오를 찾는 수많은 고객에게 영정사진 촬영은 그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또다시 찾아올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기자에게도 영정사진 촬영은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다. 문득 취업 준비생 시절이 떠올랐다.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스스로의 쓸모없음에 좌절했던 날들,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실행으로 옮길 정도의 용기는 없었던 날들이었다. 유서를 쓰고 영정사진을 찍으며 내일 당장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동시에 마지막 모습을 영정사진에 담고 나서야 주변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늘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후회 없이 표현하고 살아야겠단 다짐이 생겼다. 집에 도착하니 동생이 문을 열어줬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는 말에 어느새 눈가가 촉촉,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짐대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자 동생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 언니가 뭘 잘못 먹었나'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곤 서둘러 방에 들어가 서랍 깊숙이 비밀을 숨겼다. 젊은 나의 유서, 그리고 영정사진을. 김소영 인턴기자 사회 > E이슈 | 박가영 기자, 이재은 기자, 유승목 기자, 김민우 기자, 황희정 기자, 김소영 인턴기자   2018.12.10 06:30

  • 한국 남성은 왜 베트남 여성을 선호할까
    한국 남성은 왜 베트남 여성을 선호할까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①] 결혼중개업체 "베트남 여성 순종적" 광고… 속성결혼형태, 많은 문제 낳아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베트남 여성이 아주 많다. 한국 남성은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을 다른 나라보다 제일 선호한다." 지난 3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찡 딩 중 베트남 경제부총리를 만나 한국과 베트남 교류 협력 활성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발언이다. 덕담을 건네려던 의도겠지만, 발언 직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논평에서 '한국 남성이 결혼한 외국인 여성 중 베트남 출신 비중이 가장 높다'는 통계를 제시하면서 이 대표는 옳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며, 야당의 비판은 정치공세라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이 같은 해명은 사실이다. 베트남은 한국의 국제결혼 1위 국가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부모 출신국 중 베트남 비율이 6년 만에 4배로 늘어(29.1%) 1위를 차지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다문화 혼인건수 2만1917건 중 베트남 부인은 27.7%로 가장 많았다. 2000~2017년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 간의 국제결혼 누적건수는 9만3000여건이다. 그렇다면 사실을 말했음에도 비판이 잇따른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 중 다수가 매매혼 의혹을 받고 있어서다. 한국의 국제결혼 중개업체들은 '베트남 신부들의 장점'을 "정서와 가치관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웃어른을 공경하고… 한번 시집가면 일부종사한다는 우리 어머님 세대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등으로 광고하며 여성들을 쇼핑몰 상품처럼 전시한다. 결혼 과정도 인신매매적·인권침해적이다. 미인대회 선발 방식의 대규모 맞선 행위를 통해 여성을 고른 뒤 결혼 성립 전후 몇주~몇달간 여성을 기숙사에 넣고 관리한다. 또 현지에서 결혼식 전후로 합방이 강요되고 여성은 출산여부 검사 및 처녀막 재생 수술 시행 등의 산부인과 진료를 강요받는다. 즉 매매혼과 그 폐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 대표가 사용한 '선호'라는 표현은 여러 선택지 중 취사선택이 가능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여성 상품화 문제로까지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돈이 매개가 되는 결혼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한다. 우리 정부도 같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 규제에 나선 상태다. 정부는 2012년부터 결혼중개업의 관리에 관한 개정 법령에 의해 속성결혼형태를 주선하는 국제결혼중개업에 대해 18세 미만 소개 금지, 집단 맞선 및 집단 기숙 금지, 신상정보 제공 강화 등으로 여성을 상품화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속성결혼 형태에 대한 단속은 이뤄지지 않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인위적으로 제재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는 하다. 국제결혼이라는 사회적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인데, 이를 근본적으로 막아버리면 거대한 블랙마켓을 만드는 꼴이 될 수 있어서다. 필리핀은 외국인과의 결혼 중개를 법으로 전면 금지했지만, 상업화된 중개시스템을 이용해 배우자를 구하려는 남성의 수요와 결혼을 통해 이주하려는 여성의 공급이 줄지 않아 오히려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중개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베트남 여성을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현상이 더 큰 문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속성결혼 형태와 여성의 상품화는 베트남 여성을 국내 혼인시장에서 주변화된 남성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한국 여성의 대체자원이자 '2등 시민'으로 인식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궁극적으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양산한다. 또 촉박한 일정 속에서 외모와 인상만으로 '아무나' 선택하는 방식은 한국 남성에게 베트남 여성이 가진 생각들이나 이들이 왜 한국을 선택하게 됐는지 고려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는 한국 남성이 베트남 여성을 배우자 탐색이 필요한 개별적인 주체로 인식하지 않고, 이들의 가치체계와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반영하기도 한다. 이 같은 몰이해와 무관심 때문에 베트남 여성과 결혼한 남성들은 한국적 시각으로 이들을 해석하고, 한국 문화와 유교 문화에 이들이 종속되기만을 원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베트남 부인을 데려오는 남성과, 그 가족의 문제만은 아니다. 결혼중개업체들은 광고를 통해 베트남 여성을 유교문화권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가치를 가진 매우 이상적인 배우자감으로 소개하니 말이다. 결혼중개업체들이 설명하는 베트남 여성의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 여성은 유교를 바탕으로 교육을 받아 어른을 공경하고 대가족제도에 적응이 돼 있어 시댁식구와 문제가 없다 △모성애가 강해 자녀에게 헌신하는 한국형 여성이 많다 △한국 남성과 나이 차이가 있어도 신경쓰지 않는다 △오랜 전쟁을 겪어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잘 따른다 △한국 남성을 선호해 최고의 여성을 선택할 수 있다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아 농촌에 가는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여성의 몸매는 대부분 날씬하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다 등이다. 하지만 이건 한국 남성들의 이상적인 부인상일뿐,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베트남은 시부모까지 가족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부부중심 문화를 갖고 있으며, 함께 살며 시부모를 부양하는 것에는 익숙지 않다. 베트남은 대내외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은 편으로, 경제권도 대부분 여성에게 있다. 베트남은 아침밥도 짓지 않고 사먹는 문화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한 베트남 여성과의 결혼이 더 문제적인 건, 이 같은 문화적 차이를 수용할 수 없는 태도에서 나온다.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큰 돈을 지불한 만큼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남성들은 결혼 과정에서 보통 1400만원(±200만원) 남짓을 결혼중개업체에 지불한다. 여기에는 베트남 여성의 친정으로 가는 하례금(일종의 지참금으로, 베트남에는 본래 이 같은 문화가 있다. 100만원 내외)뿐만 아니라 항공권, 예식장비, 통역가이드비 등이 모두 포함된 가격이다. 매우 큰 금액인 만큼 남성 입장에서는 그렇게 '구매한' 베트남 여성이 본인의 마음대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베트남 여성 입장에서는 친정과 본인이 받은 돈이 아니므로, 이처럼 많은 돈을 지불했는지 모르고 역시 불만을 갖게 된다. '돈을 지불했으니 따르라'는 방식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낳는다. '자궁의 시댁화'라고 불리는 아이를 낳으라는 태도도 이중 하나다. 한국이주여성 인권센터가 지난 8월 발행한 "이주여성은 '아이 낳는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에 이 같은 문제가 잘 반영돼 있다. 필자이자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인 레티마이투는 글에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몸, 정확히 얘기하자면 자궁은 남편과 시집 가족의 것이 되곤 한다"면서 "이주여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집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 역시 아이가 없는 한국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으면서, 이주여성 가족에게는 '대체 왜 아이가 없냐'며 이를 문제시한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남편이 과하게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포르노를 보여주며 똑같은 성관계를 요구해서 이혼을 결심한 사례도 있다. 형부, 시아버지 등 시집가족에게, 결혼중개업자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도 있다"면서 "대부분 한국 남성이 결혼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결혼을 하기 때문에, 일부 가족들이 '이주여성을 돈을 주고 사왔다'고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라고 분석했다. 돈이 매개가 된 속성 국제결혼은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에 온 베트남 여성들을 모두 수동적 피해자로만 바라보는 건 곤란하다.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기존 삶의 기반을 버리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형태를 결정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는, 베트남 여성의 입장에서 이들이 한국을 찾아온 이유를 살펴보고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잘 융화되기 위해선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할지 모색해본다. 참고문헌 베트남 여성의 가족가치관에 대한 연구, 동국대, 이은주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인권 보호를 위한 법적 방안 연구, 이화여대, 박지영 국제결혼을 통한 송금이 여성 결혼이주자 본국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 전북대, 장지혜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의 부적응 요인에 관한 연구, 인하대, 레쑤언흐엉 다문화 가족의 이해 (한국과 베트남 국제결혼을 통해 본), 장서원, 남복현 외국인 배우자의 다양성과 국제결혼의 안전성, 집문당, 김두섭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2.10 06:05

  • 승리를 만끽하는 방법, 성폭행… 전리품 된 사람들
    승리를 만끽하는 방법, 성폭행… 전리품 된 사람들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②] 1998년 화교 강간살해 사건으로 들여다본 여성 강간의 역사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바하루딘 유숩 하비비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임기 1998년 5월~1999년 10월)은 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전 국민을 대표해 밝힙니다. 1998년 5월 발생한 폭동 기간 중 화교를 살해하고 화교 부녀자를 성폭행한 사건(인도네시아 화교 강간살해 사건)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비인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98년 5월 군부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한 퇴진 촉구 항의가 화교 폭동으로 번졌다. (☞1998년의 기억…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는 자들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①] 참고) 이 폭동으로 수도 자카르타에서만 5000여개의 화교 소유 공장과 집이 불태워졌고, 170여명의 화교 여성들이 성폭행당했으며, 1200여명의 화교가 살해당했다. 수라바야, 빨렘방, 메단 등지에서는 더욱 격렬한 폭동과, 강간살해가 자행됐다. 이 사건에 대해 비극이 아니라고 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폭동 속 인종청소(제노사이드)의 전형적인 모습인 '여성 강간'이 다시금 나타났기 때문이다.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갈등에 따른 폭동, 전쟁 상황 속에서 제노사이드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된다. 학살, 약탈, 고문 등. 여기에 한 가지 형태가 더 있다. '전시 강간'이라고도 불리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다. 수전 브라운 밀러가 말했듯, 여성들은 '민족 말살'이라는 목표 속에서 군사적 응징 내지 보복의 수단으로 철저히 이용된다. 즉, 이 같은 여성 학살·강간의 기록은 특별한 게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에 의한 독일여성 집단강간이나, 1937년 12월13일부터 6주간 일본군이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뒤 30여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하고, 2만~8만명의 여성을 강간한 '난징대학살'(혹은 난징대강간) 역시 이 같은 사례 중 하나다. 그렇다면 전쟁이나 폭동 상황 속 패전국·패전민족 여성들에 대한 강간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전 브라운 밀러는 책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여성을 소유하는 것이 남성으로서 성공을 보증하는 징표였듯, 여성을 보호하는 일 역시 오랫동안 남성으로서 자부심을 보증하는 징표였다"면서 "점령군이 벌인 강간은 패배한 쪽 남성의 힘과 소유권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파괴한다. 강간을 통해 여성의 몸은 상징적인 전쟁터가 되며, 승리자가 개선식을 벌이는 광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역사 속 꾸준히 패배한 쪽의 여성의 몸은 승리한 쪽의 전리품으로 취급됐다. 수전 브라운 밀러는 이와 맞아떨어지는 사례도 제시했다. 콩고와 벨기에 여성들이 당한 성폭행 사건이다. 콩고 흑인 여성들은 벨기에 식민지 시절(1885~1908년) 벨기에 남성들에게 빈번하게 성폭행당했다. 이후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거쳐1960년 7월 자유 국가가 되자, 콩고 남성들은 독립해방의 기쁨을 표출하고 싶었다. 그 방법은 콩고 전역에 남아 있던 벨기에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이었다. 단순히 승리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만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하는 건 아니다. 슬프지만, 이는 제노사이드의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성폭행당한 여성은 본인의 민족에서 일종의 '걸레'라는 낙인이 씌워져 사회에서 제거되거나 추방되는 일이 잦았다. 성폭행당한 여성은 주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보였고, 여성의 가족은 이 같은 기억을 잊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즉 성폭행은,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파괴하며 민족 공동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했다. 여기에 여성이 혼혈 아이를 임신할 경우 여성의 민족성이 또 한번 희석되는 효과도 있었다. 태어난 아이는 성폭행 가해 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또 다시 인종 청소가 이뤄진다. 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된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때도 그랬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는 세 개의 인구 집단, 즉 보스니아인으로 불리는 무슬림(이슬람교),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세르비아 정교)과 크로아티아인(가톨릭) 간에 격한 영역 다툼이 일었다. 세르비아와 가까운 보스니아 동부(스레브레니차, 사라예보 등)에서는 특히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 간의 갈등이 심했다. 내전이 벌어지자,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내전을 인종청소의 기회로 삼았다. 이에 세르비아군은 UN이 안전 지역으로 선포한 피난민 주거지 스레브레니차를 침공해 이슬람 교도들을 학살했다. 특히 1995년 잔혹성이 극에 달했는데,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스레브레니차에서 여성과 노약자를 추방한 뒤 전쟁 참여가 가능한 연령대의 보스니아 이슬람계 남자 8000여명을 집단학살했다. 이렇게 남성을 제거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무슬림 여성들에 대해 계획적 집단 강간을 실시했다. 학교, 교회 등에 가임기 여성으로 판단되는 무슬림 여성(10~60세 사이)을 한 곳에 몰아두고 집단 강간을 해서 혼혈 아이를 임신시켰다. 성폭행을 통해 임신한 여성들이 낙태하지 못하게 감금했다. 이는 무슬림 말살에 효과적이었다. 무슬림 여성들은 명예를 더럽혔다며 가족, 사회로부터 유리됐고 아이들은 세르비아계 피를 이어받음으로써 무슬림계 민족성이 흐려졌다. 1994년 여름부터 약 3개월간 투치족 여성들에 대한 집단 강간을 통해 투치족을 말살하려했던 '르완다 집단 학살' 때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 약 80만명의 투치족이 학살당했고, 살아있는 모든 투치족 여성들은 후투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강간당했다. 25만~50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강간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여성이 전리품으로 취급되는 현상이나, 분노 표출의 수단으로 이용당하는 데 대해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전 편집장이자 소설가인 정미경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혐오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하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희화화(운전 못하는 김여사 등)하다가, 점점 조롱하고 낙인을 찍는다. (김치년, 창년 등) 이렇게 언어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지던 게 조건과 기회가 되면 개별적 폭력과 구조적인 폭력으로 나아간다. 그 끝엔 제노사이드가 있다. 여성을 집단 강간해서 죽이는." 사실 1998년 인도네시아 화교 강간살해 사건은 화교 몰살을 바라 자행됐다기보다는 화교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하도록 함으로써 부패한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려고 한 의도가 더욱 컸다.(군복 차림으로 화교 여성 1명을 성폭행 할 때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부는 6원의 장려금을 지불했다고 한다. 즉 당국의 막후조정과 사주 그리고 격려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제노사이드의 사례로 보지 않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 사건과 여타 학살의 사례를 짚어보고 왜 늘 여성 강간이 역사 한켠을 차지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되풀이됐는지 짚어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수전 브라운 밀러 인도네시아 화교사회 형성과 반화교폭동에 대한 연구, 중국인문학회, 홍재현 식민형 ‘중간시민’에서 동화형 ‘유사시민’으로, 신명직 동남아 화인디아스포라의 현지사회 정착과 화인정책,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김혜련 화교에서 화인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박경태 인도네시아의 화교와 화교 자본, 지역연구, 신윤환 군사주의는 어떻게 패션이 되었을까, 바다출판사, 신시아 인로 ☞[이재은의 그 나라, 베트남 그리고 국제결혼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2.03 05:57

  • 1998년의 기억…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는 자들
    1998년의 기억…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는 자들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①] 끔찍했던 1998년 5월 강간 학살 사건… 화교, 스스로 숨죽여 살게 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우리 멋진 여성들이 되자." 인도네시아인 친구와 나는, 만나서 놀 때면 늘 '멋진 여성'이 되자며 서로에게 약속한다.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자'거나 '좋은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 되자'는 내용의 약속인데, 이를 지키기 위해 가끔씩 서로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공유한다. 나는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가, 언젠가 '멋진 여성'이 되어 인도네시아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얼마 전, 그가 모처럼 한국에 놀러왔다. 친구와 삼겹살을 먹으며 '멋진 여성' 관련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농담을 던졌다. "너 대통령 할래, 장관 할래?"… 평소 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차이니즈 인도네시안이잖아. (인도네시아 화인, 화교는 중국 국적을 유지한 이들을 가리키고 화인은 국적을 거주지로 바꾼 중국인들을 가리킨다.) 난 장관이나 대통령 못 돼." 이웃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사례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민족 문제가 민감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인도네시아에서도 그렇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화인임을 한껏 드러내며 중국식 성(姓)을 유지하는 다른 나라 화인들과 달리(Li, Lim 등), 그간 만났던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름 마저 인도네시아 성을 갖고 있었기에 더욱 의심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화인들 수가 적으니까, 소수민족이니까 정치인으로 당선되기 힘들다는 뜻이냐" "말레이시아처럼 화인들에게 제도적인 차별이 있냐" 묻는 내게 친구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라며 입을 열었다. 제도적 차별은 없지만 화인들 스스로 자중해야하는 분위기라고. 그 뒤 친구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충격적이었다. "1998년 5월, 가족들과 숨어 산 적이 있어. 10살쯤 됐을 땐데… 폭도들이 화인들만 보면 강간하고 죽였던 일이 있었어." '인도네시아 화인 학살'이나 '인도네시아 화교 강간살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화인들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98년 5월, IMF 외환위기 당시 군부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한 퇴진 촉구 항의가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인도네시아 토착민들은 중국 이민자 부호들이 수하르토와의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다며 반발했다. 흥분한 폭도들은 화교들을 살해하고 화교 여성들을 강간했으며, 화교 가게를 불태웠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화교 12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기억은 끔찍했다.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은 모두 학살당했다. 친구 가족도 친척들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큰 돈을 주고 얼굴을 숨긴 채 이동했다. 그는 그의 고모도 학살의 피해자라고 입을 열었다. "고모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도들이 들이닥쳤어. 갑자기 남자 수십명이 쳐들어와서는 고모를 보고 달려든거야. 한 명씩 돌려가며 고모를 강간하고, 심지어 쇠 꼬챙이 같은 도구로 성 고문하고…"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우리 교민들도 간접적 피해를 입어 기억하고 있다. 한국 대사관은 교민들에게 외출을 삼가라고 당부했고, 교민들 스스로도 소지품에 태극기를 다는 등 자신이 중국인이 아님을 드러내며 몸을 지켰다. 이 같은 일이 발생한 뒤 일부 능력이 있는 화교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대로 삶의 공간인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대규모 강간 학살 사건 이후 인도네시아를 떠난 사람은 많이 잡아도 전체의 3.7%에 불과했다. 이렇게 남은 화인들은 스스로 자세를 낮춰 살게 됐다. 그 날의 끔찍한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인도네시아 화인들이 이 같은 학살 사건을 처음 겪은 건 아니었다. 이미 1965년에도 비슷한 기억을 겪었었다. 1965년 9월30일, 이른바 '9.30 사건'이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당시 수하르토 장관)은 1965년 공산주의 쿠데타를 진압한 후 6명의 육군장성을 체포해 살해했다. 또 수하르토 장관을 필두로 군부는 인니공산당이 주도한 공산주의 쿠데타를 강력 진화했다. 자연히 이들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되던 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실각했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비동맹 제3세계의 주요멤버 중 하나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내세웠으며 미국과 대립하여 UN을 탈퇴하는 등 서방진영과 각을 세운 사람이었다. 권력의 핵심으로 올른 수하르토는이후 32년간 집권(1966~1998년)하게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30만명에 이르는 화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됐다는 것이다. 수하르토를 필두로한 인도네시아는 쿠데타의 배후 세력으로 중국을 강력히 의심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중국 기관들은 수색을 당했고, 화교들은 대대적으로 탄압됐다. 중국은 관련이 없다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우파 군부는 나날이 불안해져갔다. "중국이 '9.30' 사건에 관여해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고, 군중을 조직해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국민들에게 반중국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인니군경의 반공·반화 활동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고 연이어 대사관을 습격했다. 군부의 선동이 더 잘 통했던 이유는, 이미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화교들에 대한 반감이 자리해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화교의 인구비율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지만 인도네시아 경제력의 70~80%를 장악하고 있다.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 97%의 현지인은 국가전체의 경제력 가운데 고작 20~30%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셈이다. 1965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같은 점 때문에 인도네시아 토착인들은 반감이 컸다. 더군다나 이들의 부가 자신들을 착취해 얻어낸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350여년간 이어진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 기간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화인을 토착민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고용해 큰 부를 안겨줬다. 즉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초에 현재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 지방에 정착해서 동인도회사라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식민지를 개척했는데, 돈벌이에 능했던 중국인들을 이용한다면 식민지 경영이 용이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동인도회사는 화인들을 중간인으로 하는 징세 도급제를 실시했다. 국가에 고정된 액수를 미리 지급하고 획득한 특정의 서비스를 행하거나 이윤추구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말한다. 이를 통해서 화인들은 식민정부에 일정한 돈을 내고 각종 활동을 했고, 현지인들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반대로 현지인들에게 화인들은 중간 착취자의 존재로 자리 잡게 됐다. 식민지기 이전부터 상업활동을 통해서 큰 부를 축적한 화인들은, 네덜란드 식민지배기에는 정 부와의 공생관계를 통해 강력한 경제적 지위를 구축함으로써 비중국계 주민들의 부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1965년 인도네시아 토착민들로부터 분노의 타겟이 된 화인들은 대량으로 학살됐다. 화교에 대한 약탈, 방화, 살육이 만연했다. 화교단체와 화교학교는 연달아 문을 닫았다. 이 사건으로 화교들은 인도네시아에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중국 국적을 버리고 인도네시아 국적을 얻었다. 화교에서 화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국적 뿐만 아니라 이름도 개명했다. 수하르토 집권 후 신질서(Orde Baru)시기 '정부령 1966년 12월 제127호'에 의해 중국 성씨를 인도네시아어식으로 바꿀 것을 요구됐다. 화인들은 중국계임을 숨기고 살고자, 이때 대대적으로 이름을 개명했다. 이어 부를 자랑하거나, 정치적으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도 자중하자는 여론이 생겼다. 친구가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건, 그러니까 제도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대신 화인들의 정체성, 혹은 끓어 오르기 직전의 뒤엉킨 민족 문제, 긴 역사와 문화적 배경의 문제다. 내가 인도네시아의 민족 갈등과 1998년의 강간 학살 사건을 더욱 주의깊게 바라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다음 편에서는 그 이유를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참고문헌 인도네시아 화교사회 형성과 반화교폭동에 대한 연구, 중국인문학회, 홍재현 식민형 ‘중간시민’에서 동화형 ‘유사시민’으로, 신명직 동남아 화인디아스포라의 현지사회 정착과 화인정책,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김혜련 화교에서 화인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박경태 인도네시아의 화교와 화교 자본, 지역연구, 신윤환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②]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1.26 05:41

  • 3개의 언어, 8㎏의 초콜릿, 1500개 맥주 브랜드의 <strong>나라</strong>
    3개의 언어, 8㎏의 초콜릿, 1500개 맥주 브랜드의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②] 다양한 매력 존재하는 '국제 국가' 벨기에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Bon Soir, Madame?"(좋은 저녁입니다.) "Uhm… Hello." "Ah, Hello." (아, 안녕하세요.) 벨기에 브뤼셀 슈만에서 식당과 카페를 방문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 같은 인삿말을 받았다. '프랑스어·네덜란드어·독일어'가 공용어인 벨기에인들은 내게 아무렇지 않게 프랑스어로 인삿말을 던지다가, 영어가 나오면 곧바로 영어로 전환해 응대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벨기에인들도 다양한 언어를 쓰게된 셈인데, 그럴 때마다 새삼 'EU(유럽연합)의 수도' 'EU의 심장'이라 불리는 국제 도시 브뤼셀의 명성을 깨닫곤 했다. (☞"너무 강해도, 약해도 별로"… 적당해서 EU 중심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①] 참고) 물론 브뤼셀이 EU의 수도로 기능하는 데 대해 벨기에 외부나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국외에서는 벨기에가 좋지 않은 과거를 가졌고(이에 크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인종차별이 심각한 국가인데 '평화'를 지향하는 EU를 대표해 수도로 기능하는 게 맞냐는 지적이 나왔다. 벨기에는 콩고에 큰 죄를 저질렀다. 1885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고무나무가 풍부했던 아프리카 중부 지역 추장들로부터 땅을 빼앗아 콩고자유국을 세우고 주민들을 착취했다.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목이나 팔뚝을 잘랐고, 가혹한 노동을 못 견디고 도망가면 가족을 인질로 잡아 일가족을 초토화했다. 1908년 레오폴드 2세가 사유지였던 콩고 소유권을 국가에 넘겼는데, 그 전까지 약 20여년간 희생된 콩고인은 최대 1000만명으로 추정된다. 벨기에의 심각한 인종차별도 'EU 수도 회의론'에 힘을 실었다. 벨기에는 인종차별이 심한 국가로 알려져있는데, 지난 9월 벨기에 국영방송 RTBF의 기상캐스터 세실 드중가는 페이스북에 동영상을 올려 벨기에의 심각한 인종차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한 여성 시청자로부터 '피부가 너무 까매서 옷밖에 안 보인다'는 전화를 받았다"면서 "지난 1년간 캐스터로 일하는 동안 지속해서 이런 공격에 시달려 왔으며, 심지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방송인 박준형도 벨기에에서 방송을 녹화하던 도중 현지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당해 화제가 됐었다. 벨기에가 EU의 중심국으로 기능하는 데 대해 벨기에 국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있다. 주로 EU 기관과 제반 시설·관료 유지를 위해 들어가는 세금을 우려하는 시각과, EU의 수도로서 상징적인 브뤼셀이 테러를 받게된 데 대한 불만이다. 이 같이 복잡다난한 이야기를 가진 벨기에지만, 현재 벨기에는 다양한 민족·다양한 언어를 가진 나라로서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 굵직한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미묘한 매력과 이야기가 있는 나라다. 이번 편은 벨기에 관련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마치려한다. 브뤼셀과 브뤼헤(Bruges·브뤼주. 서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운하 도시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서 음식을 먹으며 든 여러 생각들이다. ◇"생수 마시며 온천 생각 간절"…스파(SPA) 생수 벨기에에서 생수를 마실 때마다 온천 생각이 간절해졌다. 벨기에에서 인기있는 생수 브랜드 이름이 SPA(스파)라서다. 스파 생수는 세 종류로 판매되는데 빨간색 뚜껑에는 강한 탄산이 들어있는 탄산수, 민트색 뚜껑에는 약한 탄산수, 파란색 뚜껑에는 일반 생수가 담겨있다. 벨기에에서 스파 생수를 마실 때 마다 그 이름 때문에 '그놈 이름 참 특이하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이런 연상 작용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 스파가 그 스파의 유래였다. '스파'는 벨기에의 유명 온천휴양지로, 리에주 남동쪽에 위치한 한 시(市)의 이름이다. 이 지역은 14세기 초반부터 좋은 물이 나와 유명해졌다. 길버트 림보(리에주 주교의 개인 주치의)가 '아르덴 숲의 샘'(1559)이라는 저서를 통해 스파에서 나는 물을 강력 추천했는데, 이 책이 라틴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등으로 번역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1547년 영국 헨리 8세와 1654년 영국 찰스 2세, 1717년 차르 표트르 1세가 건강을 위해 스파에 머무르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벨기에 스파의 이름을 따서 영어 단어 'spa'(스파·목욕시설과 미용시설을 비롯하여 심신안정을 위한 다양한 시설 등이 갖추어진 곳)라는 일반 명사가 생기게 됐다. 영어 단어 'bath'(목욕)이 로마시대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 바스에서 비롯했듯이 말이다. ◇'프랄린'의 원조… "초콜릿 강대국 벨기에" 벨기에는 고디바·노이하우스·마콜리니·레오디나스·갤러·길리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를 다수 가진 국가다. 벨기에 소비자단체연구정보센터(CRIOC)에 따르면, 벨기에는 국민 1인당 연간 8㎏의 초콜릿을 소비한다. 스위스, 영국,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초콜릿 산업의 규모도 크다. 지난해 기준 초콜릿 판매량은 35억 파운드(약 5조1800억원)로 총 벨기에 식품 판매량의 9%를 차지한다. 벨기에 국내 초콜릿 생산량은 연간 73만톤이고 관련 분야 종사 수는 7600명, 관련 기업 수는 264개사다. 수출액도 연간 3조원을 훌쩍 넘는다. 벨기에에서는 편의점이나 슈퍼마켓보다 초콜릿 전문점을 더 찾기 쉽다. 아주 조그마한 동네에도 초콜릿 전문점은 두 세개씩 위치해있어서다. 경상남북도 크기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라에 초콜릿 상점수가 2000개를 넘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벨기에인들에게 초콜릿은 특별하다. 이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단순히 초콜릿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초콜릿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랄린' 덕택이다. 본래 아프리카 대륙의 카카오를 이용해 초콜릿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있던 국가는 스페인이었다. 하지만 1870년 찰스 노이하우스가 벨기에 최초 초콜릿 회사 '코트도르'를 설립하고 1912년 그의 아들 장 노이하우스가 '프랄린'을 만들면서 벨기에 초콜릿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영어권에서는 초콜릿 쉘, 불어권에서는 봉봉이라고 불리는 벨기에 프랄린은 견과류·누가·가나슈·크림·카라멜·버터·리큐어 등을 초콜릿으로 감싼 것이다. 장 노이하우스가 만든 프랄린이 유럽 전역에서 '대박'을 치면서 브뤼셀로 가는 열차는 항상 만원이었다고 한다. 프랄린의 성공으로 초콜릿 업체 '노이하우스'는 세계 3대 초콜릿 업체 중 하나이자 벨기에의 공식 왕실 납품 업체로 거듭났다. 재미있는 건 처음 장 노이하우스가 프랄린을 만든 이유다. 당시 유럽에서는 카카오의 약효적 성분에 주목했기에 초콜릿을 약국에서 판매했다. 카카오에 있는 '폴리페놀' 성분은 노화를 예방하고 혈관 및 심장 질환을 예방해준다. 브뤼셀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약사 장 노이하우스는 어떻게 하면 쓴 약을 환자들이 덜 쓰게 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프랄린을 개발했다. 입에서 스르륵 녹는 벨기에 프랄린을 맛보고 나면 벨기에인들의 초콜릿 자부심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벨기에인들의 초콜릿 자부심에 스크래치가 나고 있다. 아무리 국제화 시대라지만 진짜 '벨기에 초콜릿'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이제 몇 남지 않아서다. 1984년부터 벨기에 왕실에 납품하고 있는 '갤러'는 카타르 왕가에 팔렸다. 카타르 국왕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가 갤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코트도르'와 '뫼리스'는 오레오 쿠키와 리츠 크래커 등을 생산하는 다국적기업 몬델레즈 인터내셔널에 팔렸다. 뿐만 아니다. 길리안은 한국의 롯데제과의, 고디바는 터키의 대형 식품제조업체 일디츠 홀딩스의 소유가 됐다. 대부분의 회사는 그대로 벨기에에 생산 공장을 두는 등 바뀌는 게 없다고 주장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술이 담긴 리큐어 프랄린으로 유명했던 고디바가 무슬림 국가 터키의 것이 된 뒤 더 이상 이를 생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고디바는 지난 4월부터 이 제품의 생산을 중단했고, 이제 전 세계 80여국의 매장 500여곳 모두에서 리큐어 프랄린을 살 수 없다. ◇'식수 부족 사태'가 만들어낸 '명품 맥주' 벨기에는 맥주로 유명하다. 우리가 아는 벨기에 맥주만 해도 레페·스텔라아르투아·호가든 등 상당히 많다. 벨기에인들은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연간 80리터 수준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높다. 벨기에 곳곳에서 이들의 맥주 사랑을 느낄 수 있는데, 매 식사 때마다 맥주를 곁들여 먹고 시내에는 맥주 전문 마트가 즐비하다. 이렇다보니 맥주 맛에 대한 평가도 매우 까다로워서, (한국에서는 맛있는 맥주라고 평가받는) 네덜란드의 하이네켄도 벨기에에서는 호평받지 못한다. 다행히 벨기에에만 168개의 브루어리(양조장), 1500여개의 맥주 브랜드가 존재해 이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충족한다. 벨기에 맥주 중엔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진 게 많다. 벨기에는 독일의 맥주 순수령(1516년 독일의 빌헬름 4세가 맥주의 품질 유지를 위해 보리·홉·물 이외의 원료를 사용할 수 없게 규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허브·과일·약초·초콜릿·커피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벨기에인들이 맥주를 많이 마시게 된 경위다. 이는 벨기에의 수도원 맥주가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유와 맞닿아있다. 중세유럽에서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안전한 식수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14세기 식수가 더욱 절박하게 필요했다. 이에 당시의 지식인층인 수도원들은 당시 전통적인 방식으로 맥주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오염된 식수 대신 음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트라피스트 맥주'의 명맥이 현재까지 유지되면서 벨기에 맥주가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는 수도원은 전세계 12군데에 불과한데, 그 중 6곳이 벨기에에 위치한다. 시메이·아헬·로슈포르·오발·베스트블레테렌·베스트말레다. 벨기에 맥주는 명성대로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그 맛 보다 브뤼헤 '드 할브만' 양조장 관계자가 해준 이야기다. 그는 "우리 벨기에는 뛰어난 맥주 제조 기술을 갖고 있고, 전국에 양조장도 수백개에 이릅니다. 원래는 이 브뤼헤 한 곳에만 수십개에 달하는 양조장이 있었는데, 제 1·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모두 파괴돼 이제 브뤼헤에는 저희 양조장 하나밖에 남지 못했습니다"라며 맥주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강조했다. 뇌리에 남은 건 이 뒤의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맥주를 계속 마시려면, '평화'와 그 '평화의 상징' EU를 수호해야겠지요." 'EU의 심장' 국가 벨기에에 살고 있는 벨기에인 답게 매 순간 EU를 떠올리는구나 싶었다. 이제 맥주를 마실 때마다 EU가 생긴 이유(☞"너무 강해도, 약해도 별로"… 적당해서 EU 중심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①] 참고) 가 매번 떠오를 것 같다. ☞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①] 계속 사회 > E이슈 | 브뤼셀(벨기에)=이재은 기자   2018.11.19 06:00

  • "너무 강해도, 약해도 별로"… 적당해서 EU 중심국 된 <strong>나라</strong>
    "너무 강해도, 약해도 별로"… 적당해서 EU 중심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①] 강대국간 이해 조정·힘의 균형 맞추는 역할 가능… 韓, 동북아의 벨기에 될까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운 좋게 '유럽연합(EU) 기자상'이란 상을 받게 돼 벨기에에 열흘 정도 머물게 됐다. 그런데 왜 하필 벨기에냐 하면, 수도 브뤼셀에 EU본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벨기에에서 뭘 그리 오래있느냐" "벨기에에선 뭘 즐길 수 있냐" "벨기에는 공식 일정 동안만 있고 주말에는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가라" 등으로 말이다. 벨기에는 이처럼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한 국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경상남북도 크기 영토에 인구 1000만명 정도의 소국이다. 그렇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불을 넘을 정도로 경제 강국이고, 교역량도 세계 10위권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다. 세계적으로도 벨기에는 소프트파워(정보과학·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연성권력) 강국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리고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생활 곳곳에도 벨기에가 스며들어있다. 한국인들 사이 인기 많은 소설·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 배경은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호보켄 마을이다. 한국을 비롯 전세계에 팬이 많은 ‘틴틴의 대모험’(벨기에 작가 에르제가 연재한 만화. 50개 언어로 60개국에서 판매되며 만화계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이나 ‘스머프’(벨기에 작가 ‘피에르 쿨리포드’가 완성한 애니메이션)도 벨기에산이다. 벨기에 곳곳에는 스머프나 틴틴 벽화가 그려져있고, 이로 된 관광 상품도 즐비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배우 오드리 햅번이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소설 파랑새를 쓴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도 벨기에 사람이다. 패션이나 디자인 부문에서도 벨기에는 뛰어난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가 그 선두에서 유명 인사들을 배출해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황재근 디자이너가 졸업한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 뿐인가, 우리는 벨기에 음식도 즐겨 먹는다. 와플반트, 베러댄와플 등 다양한 벨기에 와플 프랜차이즈는 한국에서 인기이고, 고디바·노이하우스·마콜리니·길리안 등 벨기에 초콜릿이나 레페·스텔라아르투아·호가든 등 벨기에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벨기에의 진짜 저력은 다른 데에 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는 세계 기구 및 유럽의 주요 기구가 모두 위치해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본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 EU 본부, 유럽 의회,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EU의 행정부) 등이 모두 브뤼셀에 위치한다. 단순히 기구들만 위치한 건 아니다. 벨기에는 EU 대통령이라 불리는 EU 정상회의 초대 상임의장도 배출해냈다. 바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꺾은 헤르만 반 롬푀이 벨기에 전 총리다. 분명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걸출한 유럽 대국들에 힘이 밀리고, 심지어는 베네룩스 3국이라고 함께 묶여 불리는 이웃 국가 네덜란드에 비해서도 국력이 약하다는 평을 받기도하는 국가인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이는 벨기에가 ‘적당한’ 파워(즉 상대적 소국)와 지명도, 매력있는 소프트파워를 갖춘 국가로서 이 같은 점들을 장점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영국·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라는 전통적 강대국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이 나라들은 세계적 슈퍼파워(강대국)다. 자연스레 고난도 많았다. 나폴레옹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때는 열강들의 싸움터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나치 독일에 점령되기도 했다. 원치 않게 다른 나라와 통합된 적도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주변 강대국들은 프랑스를 견제하고 세력균형을 꾀하기 위해 프랑스 바로 옆에 적당한 규모의 국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벨기에는 원치 않았지만, 강대국들의 논리에 따라 비엔나 회의(1814~1815년)에서 이 같은 내용이 확정됐다.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와 가톨릭 국가 벨기에는 여러모로 다른 특징을 가진 국가였기에 이 구상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네덜란드는 각종 네덜란드 우선 정책을 써서 벨기에인들을 분노케 했다. 예컨대 네덜란드어만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는 등의 방식이었다. 당시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등이 사용됐고, 브뤼셀의 상류계층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는데 이런 배경을 무시한 결정이었다. 이 같은 불만이 누적된 벨기에는 결국 1830년 '벨기에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해냈다. 이처럼 벨기에는 약소국의 설움을 아는 국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벨기에의 이 같은 '약소국의 설움'은 오히려 벨기에의 장점이 됐다. 벨기에가 변화의 선두에 섰던 점도 유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유럽은 당시 부흥하던 미국과 소련에 밀려 국제 무대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연히 유럽에서는 평화와 경제적 부흥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벨기에는 이 같은 흐름을 읽고 평화로의 변화에 앞장섰다. 벨기에는 1951년 4월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결성하는 파리조약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3국간 관세동맹을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로써 ECSC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룩셈부르크·벨기에 등 6개 나라가 참여하는 동맹이 됐다. 이 ECSC가 1957년 유럽원자력공동체를 설립하는 내용의 로마조약을 통해 유럽경제공동체(EEC)로 발전했고, 이어 1993년 11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유럽연합(EU)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현재 EU는 28개 회원국이 참여한 공동체다. 이 과정 벨기에는 핵심 EU 국가 6개국(ECSC를 함께 창설한 6개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적당하다'는 점 덕분에 본부를 갖게됐다. 1952년 7월23일 프랑스 파리에서 6개국 외무장관이 모여 어디에 본부를 설치할지를 논의했는데, 이들 모두 입을 모아 브뤼셀에 본부를 설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다른 굵직한 국가들 중 하나가 본부를 갖게되면 그 국가가 갖는 힘이 너무 커져 힘의 균형에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는데, 그렇다고 벨기에가 (룩셈부르크처럼) 너무 작지도 않아 더욱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점 때문에 벨기에 브뤼셀은 ECSC 창설과 함께 본부를 가져갔다. (사실 이 과정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벨기에 정부는 브뤼셀에 본부가 설립되는 데 반대했다. 그 이유는 브뤼셀 보다는 당시 벨기에의 철강 및 석탄 산업의 핵심 지역 리에주(Liege)에 본부가 설치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제란트 당시 벨기에 외무장관은 1952년 파리에서의 논의 당시 "절대로 브뤼셀에는 본부가 설치될 수 없다. 나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강력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결국 브뤼셀에 본부가 설치됐다. 1952년 파리에서 '본부 위치 결정'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았고, 1957년 3월 로마 조약 체결 당시에도 결정이 나지 않자 1958년 1월1일, '임시 해결책'으로 6개 국가가 돌아가면서 본부를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벨기에(België·Belgique)는 'B'로 시작하는 국가였기에 가장 먼저 본부를 맡게 됐다. 하지만 이후 'D'의 독일(Deutschland)로 옮겨갈 때는 이 이야기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됐고, 이 다음 'F'로 시작하는 프랑스 차례가 됐을 땐 모든 국가가 '유럽의 가장 큰 도시' 파리에 본부가 세워지길 원치 않았다. 결국 벨기에는 브뤼셀에 지속적으로 본부를 유지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이전에 사무실만 임대했던 것에서 벗어나 브뤼셀 베를레몽 수녀원(Berlaymont)에 본부를 크게 만들기로 결정했다. 수녀원에는 큰 정원이 있어 공간이 충분했고, 이미 많은 수의 건물이 있어 적합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베를레몽 빌딩'은 현재까지 EU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EU의 주요 기관인 유럽 위원회의 본부가 입주해있다.)이렇게 본부가 생기면서 중요 도시로 자리매김한 브뤼셀은 자석처럼 다른 주요 기관들도 끌어당겼다. 1997년 EU의 알짜배기인 유럽집행위원회도 벨기에에 생겼다. EU의 입법기구인 유럽의회 건물 중 다수도 브뤼셀에 위치한다.(본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벨기에는 '적당한 규모의 소국'으로서 EU에서 줄곧 강대국 간 이해 조정 역할을 맡아왔다. 비토권을 적절히 활용해 일종의 EU 대주주인 강대국들과 ‘소액주주'인 나머지 20여개 회원국들의 이해관계를 막후에서 조정해왔다는 평가다. (벨기에인으로서 연임에 성공해 5년 간 EU 정상회의를 이끌었던 헤르만 반 롬푀이 전 상임의장은 벨기에의 이 같은 국가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이로 여겨진다. 그는 임기 초기 '약한 나라의 총리여서 세력 균형을 위해 뽑혔다'며 조롱 받았지만, 이후에는 '조용한 리더십'을 보여줬다며 호평 받았다. 특히 유럽 재정위기 때 독일·프랑스 등 강대국들과 20여개 회원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연임에 성공했다.) 벨기에는 또 탁월한 위치(대부분의 EU 회원국에서 오고가기 편리한 교통의 요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민족과 언어(프랑스어·네덜란드어·독일어가 모두 공용어), 다양한 문화·강력한 소프트파워를 가진 나라로 누구도 브뤼셀이 EU의 수도인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도록 만들었다. 벨기에의 약소국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이를 승화해 장점으로 삼은 점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 상대적으로 약한 경제력, 상대적으로 약한 국력 때문에 힘든 역사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둘로 쪼개져있는 것도 이 같은 핍박의 역사 중 일부다. 하지만 한반도의 뛰어난 지정학적 위치와 ‘상대적으로’ 약한 국력, 뛰어난 소프트파워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면 오히려 한국이 가진 요소들은 장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화합을 원했던 유럽인들의 바람을 벨기에가 선두에서 추진했듯, 한국 역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앞장설 수 있다. 우리 외교 안보 전문가들이나 정책가들도 이 같은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국은 2013년 9월 '중견국 외교' 가능성을 주목하며 멕시코, 인도네시아, 터키, 호주와 함께 국가협의체 '믹타'(MIKTA)를 출범시켰다. 즉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전통적인 강대국들이 자국우선주의, 탈세계화행보를 보이면서 글로벌 이슈에 대한 리더십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한국을 포함한 중견국이 글로벌 현안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할 여지가 커지는 상황에 주목한 것이다. 벨기에가 세계적 흐름을 읽고 3국 관세동맹을 통해 ECSC에 앞장 선 것과 겹쳐보인다. 마침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벨기에를 비롯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는다. K-POP, K-Drama 등 한류 파워를 가진 국가가 우리나라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17~18일 ASEM(아시아유럽회의) 정상회의겸 브뤼셀을 찾아 앞으로 동북아 역시 EU같은 화합을 이뤄 번영을 이룰 것을, 또 이 점을 위해 '중견국' 한국이 노력할 것임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나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도 통합과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라며 "한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구도를 해체하는 과정은 유럽에서와 같은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라 말했다. 한국 정부의 의지는 어딘가 기대감을 갖게한다. 이 평화의 시류에 앞장선 중견국 한국이, 언젠가는 주도적으로 국제 여론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②] 계속 사회 > E이슈 | 브뤼셀(벨기에)=이재은 기자   2018.11.05 05:30

  • 꼬이고, 꼬이고, 꼬였다… 시리아 왜 여기까지 왔나
    꼬이고, 꼬이고, 꼬였다… 시리아 왜 여기까지 왔나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③] 이란·헤즈볼라·러시아·이스라엘·미국 등 모두 개입하면서 대리전·국제전 양상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비옥한 토지가 있는 나라. 시아 초승달 지대(Shia Crescent·시아파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초승달 형태의 지역,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바레인)에 위치한 나라. 그 위치적 중대성 때문에 시아파가 지중해쪽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사수해야만 하는 나라. 시리아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가 그러했듯, 이 같은 중대성이 언제나 장점으로만 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리아가 가진 위치적·종파적 중대성 때문에 각 세력이 개입하면서 '내전'으로만 끝날 수 있었던 싸움이 긴 싸움이 됐다. 여기에 시리아 내부적으로 오랜 기간 곪았던 민족·종교·종파 문제가 함께 터지면서 민주화 운동은 시리아 전체를 무너뜨리는 재앙으로 발전했다. (☞'활성단층' 시리아를 건드린 '아랍의 봄'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②] 참고) 이미 내전으로 치달은 이상 시리아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어느 한쪽이 승리해야 내전이 끝날 텐데, 양측의 힘이 균형을 이루면서 내전은 지단하게 진행됐다. 다음은 양측의 힘이 팽팽했던 이유들이다. ◇이란, 시아파, 그리고 헤즈볼라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서 지역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고, 중동에서 시아파 세력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이란은 자국에서 서쪽으로 이라크-시리아-레바논까지 시아파 세력을 지리적으로 연결해 지중해 쪽 출구를 확보하려는 야심도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아 초승달 지대 국가 중 어느 한 곳도 놓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이란은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때부터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알라위파·시아파의 소수 종파)을 돕겠다며 혁명수비대 군사고문단을 공식 파견했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오랜 기간 자금·무기·병력 등도 지원해왔다.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의 침략과 점령에 저항하면서 이란의 지원으로 결성됐다. 헤즈볼라는 이슬람 시아 강경파 종교조직이자 군대이며 사회단체이고 레바논의 합법정당이지만, 또 동시에 유서 깊은 테러단체다. (1983년 베이루트의 미 해병대 병영에 폭탄 공격을 가한 바 있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5일 헤즈볼라에 새로운 제재를 가하는 법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헤즈볼라는 '전쟁 무패'의 이스라엘을 꺾었을 정도로 강력하다. 이스라엘은 과거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지만,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헤즈볼라 민병대에게 졌다. 이 같이 강력한 헤즈볼라가 2014년 6월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자마자 효과가 나타났다. 시리아 반군은 2011년 3월부터 전략적 요충지 '쿠사이르'를 통제해왔다. 쿠사이르는 레바논 국경선에서 약 10km 떨어진 마을이다. 시리아 반군이 레바논에서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공받는 통로이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하지만 헤즈볼라가 개입하자마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시리아 정부군은 내전이 시작된지 3년 만에 쿠사이르를 탈환했다. ◇'골란 고원' 돌려줄 수 없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전을 다루면서 절대 빠질 수 없다. 이스라엘은 미국과는 아주 긴밀한 동맹 관계이고, 유럽과는 우호적 관계다. 반면 아랍국가들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 않다. 대부분이 무슬림인 아랍인들이 오랜 기간 살고있던 땅에 세속주의 성향의 유태인들이 나라를 세웠으니 당연한 이치다. 특히 팔레스타인·시리아·이란·이라크·레바논 헤즈볼라 등과는 주적 관계다. 위에서 설명했듯 레바논·이란과 이스라엘의 사이는 매우 나쁘다. 자연히 시아파 국가인 이라크·시리아도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다. 특히 시리아는 '골란 고원' 문제로 직접 이스라엘과 얽혀있다. 골란 고원은 시리아 영토지만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이 세력을 떨치고 있는 곳이다.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을 통해 시리아령인 골란고원 상당 부분을 점령했고 (국제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들 땅으로 편입시켰다.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군사적 요충지에 비옥한 골란 고원을 반환해줄 생각이 없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반 이스라엘파가 골란 고원을 되찾고, 이곳을 통제하게 된다면 최악일 것이다. 시리아 내전이 진행되며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와 헤즈볼라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정부군 등 반이스라엘파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내전 5년째인 2015년,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헤즈볼라는 시리아에 수백명의 대원을 파견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측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공군 출격 사실을 알리지 않은채 시리아 주둔 헤즈볼라 기지에 공습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골란 고원 내 헤즈볼라 테러 활동을 감독하고 있던 칸타르 헤즈볼라 사령관이 사망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시리아 내전 개입에 대해 이란은 강력 반발해왔다. 이란 측은 이스라엘의 개입이 미국의 허가로 이뤄진 것이라고 봤다. 이스라엘은 지난 2월10일에는 자국 내로 침투하는 이란 무인기를 격추한 뒤, 해당 무인기를 보낸 시리아 영토에 위치한 이란의 무인기 발진처를 공습했다. 공습 대상은 시리아 방공포대 3곳과 시리아 내 이란군이 설치한 군 시설 4곳을 포함한 12개 기지였다. 국제 사회에선 이스라엘과 이란·헤즈볼라와의 싸움이 시리아에서 치러지고 있는 데 대한 탄식이 나왔다. ◇'시리아 우방국' 러시아 vs '친 이스라엘' 미국 미국은 미국 내 유대인들과 공화당 내 친(親) 이스라엘 세력 등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편중된 행보(친 시리아 반군)를 보여왔다. 유럽도 아사드를 독재자로 보고 시리아 반군을 지지한다. 반면 러시아는 사회주의 정당인 바아스당과 그 정당을 기반으로한 아사드 정권에 우호적이다. 러시아와 시리아는 오랜 우방이다. 1944년 국교를 맺은 양국은 1971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하페즈는 반서방 친소련 정책을 펴며 이스라엘과의 대치 국면에서 소련에 의존했다. 무기도 소련제를 공급받았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 에너지 기업이 시리아의 석유·가스 개발, 석유화학공장 건설, 가스관 공사 등에 참여하는 등 우호 관계를 맺어왔다. 러시아 입장에서 시리아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은 가스인데, 카타르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이 자리잡을 경우 수출에 타격을 입는다. 이에 따라 그 중요 길목에 위치한 시리아를 구슬려 파이프라인 설치를 막아야만 한다. 만일 파이프라인이 설치된다면 2006·2007·2009·2014년 등 수 차례 천연가스관을 자원무기로 활용한 바 있는 러시아의 자원 외교도 기력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건 2015년 9월이다. 반군 조직이던 이슬람국가(IS)가 북동부를 완전 장악한 뒤 이라크를 전격 침입하자 러시아가 이들을 시리아에서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공습에 나선 것. 러시아는 연일 시리아 반군과 IS세력을 상대로 폭격을 퍼부었다. (물론 당시 러시아의 개입은 경제위기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뒤 서방의 경제재제가 지속되면서 루블화 가치가 절반으로 폭락했다. 더군다나 러시아 수출의 70%를 차지하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50달러 미만으로 떨어져 위기가 심화됐다. 러시아는 이 같은 원유값 폭락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 등 친서방 산유국들이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생산을 줄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를 지원해 반군을 공격했다. 그렇게 하면 반군을 돕는 사우디아라비아가 힘들어져 압박받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그동안 군사고문단만 파견했던 이란이 시리아에 지상군 전투병력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으로 하여금 보다 전향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들게했다. 2014년 9월 IS 격퇴 목표로 대대적인 시리아 공습을 개시한 바 있는 미국은 2015년 11월, 시리아에 특수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터키와 쿠르드족, 그리고 '올리브 가지' 작전 국가를 설립하지 못한 중동 최대 민족, 쿠르드족. 쿠르드족은 터키·이란·이라크 시리아 등에 걸쳐 거주하며 각 국에서 분리 독립 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리아(아랍족 90%·쿠르드족 10% 등으로 구성)에 쿠르드족은 200만명 정도다. 이들은 내전 전 자라불루스, 코비네 등 북동부의 터키 접경지 일대에 몰려 살았다. 하지만 내전 과정 쿠르드·아랍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시리아 내 이슬람국가(IS)를 소탕하기 위해 조작한 민병대. 시리아 내 쿠르드족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가 주축)이 시리아 북부에서 IS를 몰아내는 데 크게 기여하며 미군의 신뢰와 지원을 받게됐다. 이는 이들의 세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다. 문제는 터키가 시리아 내 쿠르드족을 자국 내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하는 위협세력으로 봤다는 것이다. 인구의 20%가 쿠르드족인 터키는 건국이후 꾸준히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 가능성을 경계해 왔다. 시리아 내에서 시리아민주군(SDF)의 세력이 커지자, 불안감을 느낀 터키는 쿠르드족 축출을 위해 시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터키(세속적 이슬람 국가, 수니파)는 정부군이 아닌 시리아 반군의 30%를 차지하는 수니파이자 세속주의 온건파 '자유시리아군'(FSA)을 지원해 쿠르드족의 시리아민주군(SDF)을 공격했다. 터키군은 지난 1월부터는 시리아 북서부 아프린시에서 쿠르드 민병대를 축출하는 군사작전 '올리브 가지'를 실행해왔다. 그리고 지난 3월에는 '아프린' 내 모든 구역에서 쿠르드족 민병대를 완전히 쫓아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아사드 정권과 반군 사이 내전이 거의 끝나감에도 터키의 불안감은 잠재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터키군은 최근 아프린을 넘어 시리아 북동부 만비즈에까지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올리브 가지' 작전이 시작된 이후 줄곧 터키에 자제해달라고 촉구해왔지만, 터키는 오랜 우방국 미국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악명 높은' IS까지 개입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악명 높다. 2003년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이라크 하부조직으로 출발해, 이라크에서 각종 테러활동을 벌이며 세력을 확장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거점을 시리아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세력이 급격히 확장됐다. IS는 시리아 동부 지역을 완전 장악하고 '락까'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IS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는 등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미국은 IS를 절멸하기 위해 시리아 공습 방침을 밝혔다. (2014년 8월19일 IS는 미국의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인 프리랜서 기자 제임스 폴리 참수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IS는 꾸준히 위세를 떨치다가 2017년 11월 시리아군과 동맹세력(이란·레바논 헤즈볼라 등)이 IS 최후의 도시 거점인 '알부카말'을 탈환하면서 영향력을 다했다. 이처럼 여러 세력이 개입하며 시리아 내전은 끝없이 복잡해져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러시아군이 정부군에 미사일 공습을 지원하기 시작한 2015년 9월부터는 정부군으로 판세가 기울면서 내전 종식에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군은 2016년 반군 최대 거점 중 하나인 북부 '알레포'를 탈환했고 지난 4월에는 다마스쿠스의 수도권 반군지역인 '동구타'도 탈환했다. 또 이달 초 IS가 통치중이던 수도 다마스쿠스 남부 외곽에 위치한 '야묵'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까지 탈환하면서, 수도권 전역을 정부군의 통치구역으로 삼게됐다. 지난 9월16일에는 내전 발발 이후 첫 전국 시의회 선거도 실시했다. 그렇다면 이제 '꿈의 여행지' 시리아엔 과거의 평화가 찾아올까? (☞'꿈의 여행지' 시리아는 어쩌다 지옥이 됐을까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①] 참고) 글쎄, 아직은 먼 꿈 같은 이야기다.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전 지역에 모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다. 지난 27일 러시아·독일·프랑스·터키의 정상들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진행한 '4자 회담'에서는 시리아 북서부 이들리브(반군 거점) 비무장지대를 상시화 하는 방안도 검토된 상태다. 참고문헌 시리아 분쟁 3년: 현황과 전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재은 시리아 내전 분석과 전망, 국방대학교 PKO센터, 임윤갑 시리아 바샤르 정권의 공고화 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외대, 김한지 시리아 소수집단 알라위파의 집권과 국민통합 정책에 대한 연구, 한국외대, 김한지 시리아 알라위 종파의 정치세력화 연구, 중동문제연구, 이종택 시리아, 한울, 구니에다 마사키 시리아 난민문제와 국제사회, 아시아연구, 이상환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0.29 05:30

  • '활성단층' 시리아를 건드린 '아랍의 봄'
    '활성단층' 시리아를 건드린 '아랍의 봄'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②] 무슬림 소수파 '알라위파'가 집권하는 시리아… '아랍의 봄' 혁명이 종파간 갈등으로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말했다. "중동은 다양한 민족, 종교, 종파로 구성돼있다"고.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서도 시리아에는 그러한 다양성이 특히 높다"며 "시리아는 중동 세계의 활성단층"이라고 설명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이어 "당신이 이것을 갖고 놀고자 한다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즉 시리아에서는 모든 게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그를 전복하고자하거나 그를 타깃으로 삼고자 한다면, 아사드 대통령이 아니라 시리아와 그 주변 지역 사회의 구성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미였다. 2011년 12월, 아사드 대통령이 미국 ABC TV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같은 발언은 이후 시리아에서 복잡하게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2011년 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아랍의 봄'이라는 바람이 불어왔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알제리·이집트·요르단·바레인·예멘·쿠웨이트·이라크·수단 등에서 연달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SNS(사회연결망서비스) 덕택에 인식이 높아진 시민들이 조직을 만들며 저항 운동을 벌였다. 이후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위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튀니지·이집트·예멘 등에서는 성공적인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아랍의 봄 시위'는 이후 '아랍의 봄 혁명'으로 불리게됐다. 하지만 유독 한 국가에서는 양상이 복잡하고 지단하게 진행됐다. 시리아다. 2011년 3월 반정부시위로 시작된 시리아의 '아랍의 봄'은 내전으로 발전했고, 현재까지 8년째 진행되며 시리아를 폐허로 만들었다. (☞'꿈의 여행지' 시리아는 어쩌다 지옥이 됐을까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①] 참고) 시작은 소소했다. 2011년 3월, 수도 다마스쿠스로부터 약 100㎞ 떨어진 농업도시 '다라아'에서 아이들의 낙서가 발견됐다. 범 아랍권 위성TV와 인터넷 등을 통해 '아랍의 봄' 현장을 접한 아이들의 낙서였다. 아이들은 '아사드 정권은 무너질 것'이라는 반정부 구호를 벽에 적었다. 일종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커진 건 정부가 반정부 낙서를 한 15명의 어린이를 감금·고문하는 등 과하게 처단하면서다. 시리아에서는 이전에도 '아사드' 부자를 언급할 경우 사복경찰 등에게 잡혀가는 일이 있었다. 2011년 3월15일, 여기에 분노한 다라아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면서 첫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을 기점으로 시리아에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리아에서는 40년 간 아사드 가문의 통치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국가 사정이 나아지지 않은 데 대한 일부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1971년 하페즈 알 아사드 전 대통령이 집권해 30년을 통치한 뒤 사망했고, 2000년부터는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이어 받아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엔 '시리아의 봄'도 민주적 정권을 부르짖는 민중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됐다. 바샤르 대통령의 말대로 시리아는 종파적·지리적·종족적 다양성이 내재된 나라로서, 내부 갈등이 오랜 기간 축적돼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봄'은 첫 민주화 시위 이후 7년이 흐른 지금까지 아사드 일가의 정권 퇴진을 불러오지 못했다. 무슬림의 종파나 이를 기반으로 한 아랍 세계의 알력 싸움, 시리아 내부 지역 간의 갈등, 다양한 종족 간의 관계 등… 이런 요소들을 덮어둔 채 '시리아의 봄'과 '시리아 내전'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시리아 정부는 서구 사회를 비롯 국제 언론이 이를 몰라서든 의도적으로든 민중 시위를 단순히 민주화 운동으로만 보도하는 데 대한 불만을 표출해왔다. 시리아 정부의 불만에도 일리는 있다. 국제 사회는 그동안 범 아랍권 TV로 국제적 명성이 있는 방송국인 알 자지라(카타르 국왕이 세운 아랍권 최대 위성방송국)·알 아라비야(사우디아라비아 국영 방송) 등의 보도를 받거나 참고해왔지만, 이들이 객관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고만 보기는 어려워서다. 카타르나 사우디는 대부분의 국민과 기득권층, 지배층이 모두 무슬림 종파 중 '수니파'인 국가로, '범 시아파' 정권인 시리아 아사드 정부를 세모눈으로 바라봐왔다. 시리아는 아랍족 90%, 쿠르드족 10%, 극소수의 아르메니아족, 투르크족 등의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다.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이 87%인데, 수니파 무슬림이 대다수로 74%, 시아파 무슬림이 13%, 드루즈파 무슬림이 3%, 기독교 10%, 그리고 극소수의 유대교인 등으로 구성돼있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교를 양분하는 두 종파다. 수니파(순니파·'무함마드의 모범(순나)을 따르는 사람들'을 뜻함)는 전 세계 무슬림의 약 90%가 소속된 이슬람 종파이고, 시아파(쉬아파·'예언자 무함마드의 정당한 후계자(칼리프)는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 뿐이라고 주창하는 사람들'을 뜻함) 전 세계 무슬림의 약 10%를 차지한다. 두 종파는 서로를 이단으로 볼 정도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어 사실상 다른 종교로 볼 수 있을 정도다. (알카에다, 다에시 등 수니파 테러 단체는 시아파를 멸절하고자 한다.) 수니파가 전 세계 무슬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만큼 아랍 국가 중 대부분이 수니파 국가다. 수니파 국가로는 사우디아라비아·터키·이집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알제리 등이 꼽힌다. 반면 이란·바레인·이라크·레바논 등은 시아파 국가다. 특히 이란은 90%에 이르는 국민이 시아파로 전세계 시아파의 구심점이 되는 국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리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수니파이지만, 범시아파 국가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는 시리아를 40년간 통치하고 있는 아사드 부자가 시아파의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 무슬림이어서다. 시리아의 군부와 정치권력도 모두 알라위파가 장악하고 있다. 알라위파(창시자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의 이름을 따 '누사이리' '누사이르파'로 불리기도 함)는 이슬람 시아파의 알리 숭배를 극단적으로 추구해 신격화한 종파로, 이들의 영적이고 비의적인 해석 때문에 '인간 알리를 신으로 과장해서 섬기는 자들'로 여겨지며 오랜 기간 주류 수니파 무슬림들은 물론이고 시아파 무슬림으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주류 수니파와 달리 알라위파는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더욱 멸시를 당했다. 오랜 기간 모진 박해와 차별을 받은 알라위파는 라타키아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은둔하며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왔다. 이들의 처지가 바뀐 건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다. 아랍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두려워한 프랑스는 소수 종파를 보호하고 나섰다.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알라위파에게 군인 자리를 주자, 박해받던 알라위파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많은 수의 알라위 남성들이 고향을 떠나 프랑스 점령군에 입대했다. 그 사이 알라위 여성들은 수니파 지주의 하녀나 첩으로 살았다. 그리고 1971년 2월, 알라위파의 처지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알라위파인 하피즈 알 아사드(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획득한 것이다. 이는 군부의 대다수가 알라위파로 구성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라위파가 정권을 잡은 건 알라위파 만의 행운이 아니었다. 소수파로서 주류 수니파로부터 함께 박해를 받던 드루즈파, 기독교인, 유대교인 등도 더 이상 차별받지 않게 됐다. (이 같은 이유로 이들 대부분은 현재까지 시리아 정부 측을 응원한다. 세속주의 알라위파가 권력을 잃고 만일 보다 근본주의적인 수니파가 권력을 잡게되면 이전처럼 소수파로서 차별받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어렵게 얻은 권력인 만큼, 하피즈는 알라위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의 바탕 위에 여러 전략을 구사했다. 알라위파가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주요 정권 안보 부서에는 알라위나 아사드 가문 친인척 만을 기용했다. 대신 정통성을 확보하고 다수인 수니파의 적대감을 줄이기 위해 내각·인민회의 의원·바아스당('부흥'이라는 뜻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시리아 집권당) 대표들의 약 60%는 수니파에서 등용했다. 수니파를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한 고위직에 임명하기도 했다. 더불어 몰락한 수니파에게는 재계 권력을 줘 그들이 상업으로 부를 증대시킬 수 있게 해 정치에 관여하지 않게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략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 보다 잃은 게 더 큰 수니파 유력자들의 불만은 잠재울 수 없었다. 이들은 바아스당에 소수파인 알라위파와 같은 수니파지만 가난한 가정 출신자들이 대두하는 데 대해 강한 위화감을 갖게 된다. 여기에 알라위파는 세속주의 성향을 보이는 데, 이것이 보다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수니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들은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슬림형제단'(가장 오래된 세계 최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문제가 된 지역은 시리아 북부 최대 상업도시 알레포였다. 수도 다마스쿠스에 이어 시리아 제 2의 도시로 꼽히는 알레포지만, 1941년에야 독립 국가로 묶였기 때문에 사실상 알레포의 기득층과 다마스쿠스의 기득층은 완전히 다른 세력이었다. 그런데 아사드 정권이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어나가고, 심지어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자 대대로 알레포에서 부유했던 지주 계층이 한번에 몰락했다. 이렇게 알레포의 유력자들도 몰래 '무슬림형제단'에 지원해왔다. 이 같은 배경 때문에 아사드 정권은 민주주의 운동으로 가장된 테러 세력이 있으며, 그 배후에는 '무슬림형제단'이 있다고 생각했다. 2011년 3월 이래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시리아 정부는 무장투쟁 활동을 한 이들 중 일부를 체포해 이들의 자백하는 모습을 방영했다. 자백은 이 같은 형태였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체제하고 있었을 때, 이슬람교와 관계가 없는 세속정권 시리아 정부를 타도하는 운동을 시작하려는 반정부 활동에 대한 참가를 제안받고,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시리아 정부 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시리아 정부가 유독 강력하게 시위에 대응해왔는지, 왜 시리아의 '아랍의 봄'이 다른 나라보다 복잡하게 전개됐는지 일견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처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범시아파'(그 중에서도 '알라위파')인 탓에 시리아 내전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달았다. 주변 아랍 국가들이 시아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수니파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즉 시아파 맹주 이란 주도로 레바논·이라크 등은 시리아 정부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사우디아라비아·터키·카타르 등은 반군을 지원했다. (심지어 이란은 레바논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까지 지원하며 시아파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이 펼쳐지며 시리아 내전은 일종의 대리전으로 변화했다. 어떤 이들은 시리아 내전을 일종의 종파 전쟁(시아파와 드루즈파 vs 수니파)으로 보기도 하고, 이데올로기 전쟁(세속주의 vs 이슬람 원리주의)으로 보기도 한다. 시리아 내부의 복잡한 상황과 주변 중동 국가들의 개입만 고려해도 이처럼 상황이 복잡한데, 여기에 IS가 등장하고 러시아·미국·프랑스·중국 등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시리아 내전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다음 편에서는 시리아 내전이 진행된 과정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진단해본다. 참고문헌 시리아, 한울, 구니에다 마사키 시리아 : 지구촌 문화충격 탈출기, 휘슬러, 콜먼 사우스 시리아 내전 분석과 전망, 국방대학교 PKO센터, 임윤갑 시리아 바샤르 정권의 공고화 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외대, 김한지 시리아 소수집단 알라위파의 집권과 국민통합 정책에 대한 연구, 한국외대, 김한지 시리아 알라위 종파의 정치세력화 연구, 중동문제연구, 이종택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③]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0.22 05:30

  • '꿈의 여행지' 시리아는 어쩌다 지옥이 됐을까
    '꿈의 여행지' 시리아는 어쩌다 지옥이 됐을까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친절한 사람들이 가득했던 곳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앗살라무 알라이쿰"(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السلام عليكم)" "دمشق (시리아)·دِمَشقُ (다마스쿠스)·مملكة تدمر (팔미라)…" 한창 아랍어를 열심히 공부하던 때의 이야기다. 대학수학능력평가 제2외국어 영역에서 아랍어를 선택한 뒤 기쁜 마음으로 공부에 임했다. 명목상은 높은 표준점수를 얻기 위해서였지만, 머리 아픈 수리 영역 공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나아가 아랍어 공부는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이란 상상의 나래를 펼칠 기회를 줬다. '이제 곧 대학생이 된다… 배낭여행으로 아랍어권 국가 중 어디를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장기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꼭 필요하단 생각에 공부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아랍에는 많은 유적이 있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이 모두 아랍 문화권에서 탄생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요르단 페트라, 리비아 사브라타, 레바논 티레… 그 엄청난 유적들 사이 어딜 먼저 가볼까 생각하며 비교 분석하는 게 당시 나의 즐거움이었다. 틈틈이 블로그에서 여행 후기를 봐가며 최종 여행지를 낙점했다. '시리아'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시리아는 자타공인 관광국가였다. 시리아관광청에 따르면 2010년 시리아 국내총생산(GDP)은 연간 80억 달러(약 9조원)이었고, 이중 관광 산업으로 얻은 수입은 14%를 차지했다. 한국인들도 배낭여행이나 신혼여행으로 시리아를 찾곤 했다. 시리아에는 1980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동의 대표 유적 '팔미라'가 있다. 팔미라는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약 230㎞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여왕 제노비아 치하 1~2세기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교역도시로 번영했던 모습을 간직한 고대 도시 유적이다. 이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있어 일찍이 도시가 형성됐다. 팔미라는 중동의 대표 교역지로 로마제국에 흡수, 속령의 하나로서 막강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벨 신전을 비롯 아고라(시장), 극장, 공용 목욕탕 등 남은 흔적들은 272년 팔미라가 로마의 군인황제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년)에게 함락되기 전까지 얼마나 번성했던 도시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내가 시리아를 다른 국가들 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리아를 다녀온 사람들이 한결 같이 시리아를 찬양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학원에서 아랍어를 배웠는데, 학원 아랍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매 시간 "시리아를 가봐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리아에는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 저렴한 물가…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인정 많고 착한 사람들이 있다면, 시리아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인터넷에 올라온 여행 후기도 한결 같았다. 그 중 기억에 남는 후기는 이것이다. 한 블로거는 "시리아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현지인의 따뜻한 마음을 온 몸으로 느꼈다… 하마(시리아 도시명)에선 단 한 번도 버스나 택시를 이용한 적이 없다. 손짓만 하면 지나가던 차량이 멈춰 선다. 같은 방향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를 태워다 준다. 커피나 차를 돈 내고 마신 기억도 별로 없다. 거리를 걷다보면 발길을 붙잡고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상점 주인이 지천이다. 길이라도 물어볼라치면 서로들 데려다주겠다고 아우성이다. 아이들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흘끔거릴 뿐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수줍은 탓이다. 여정을 통틀어 가장 착한 민족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시리아인을 택할 것이다"라는 후기를 남겼다. 시리아 정보를 수집하던 중 시리아 장기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현지인들의 사심 없는 환대와 초대라는 것도 알게됐다. 현지인의 집에도 초대되는 일이 잦다기에 언제, 어떻게 초대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초대에 응하는 게 예절을 지키는 법인지 알아보기도 했다. 대부분이 아랍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예절이어서 알아두면 유용할 것 같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랍인들은 명예를 중시하는데, 타인을 냉대하는 건 아랍권에서 불명예로 여겨진다. 심지어 적에게까지 호의를 보이는 게 아랍인의 명예규범에 맞다. 이에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조금만 친밀해지면 초대하려한다. △따라서 받아들이기 절대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초대를 거절하는 건 무례한 일이다. △그럼에도 초청을 거절해야할 때는 오른손을 심장이 있는 부위 또는 이마에 댄다.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 거절로 인한 이들의 심리적 불쾌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특히 라마단 기간 저녁식사 '이프타르'(إفطار·라마단 기간 무슬림들이 일몰 직후 금식을 마치고 먹는 첫 번째 식사. 이 기간 저녁 식사를 통칭한다)에 초대되는 일이 잦다. △식사 동안 식탁 위의 음식이 없어질 때까지 내내 먹기를 권유 받는다. 집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실례이므로 천천히 식사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터질지도 모른다. △아랍인들은 신발을 매우 불결한 것으로 여겨 집에 들어가자마자 밖에서 신던 신발을 치운다. 따라서 아랍인의 앞에서 발을 보조의자, 커피 테이블 등에 올리면 안된다. △또 다리를 꼬거나 종아리를 다른 다리 위에 엇갈려 올리다가 아랍인들에게 신발 바닥을 보이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이다. 이건 그들이 신발바닥보다 못하다는 의미로 그들에게 '심한 욕'을 하는 것과 같다. △여성으로서 몇 가지 더 유의해야할 점은 외국인인 우리의 친절함이 성적인 방종으로 오해될 수 있으므로 여성이 아닌 남성과의 친교는 주의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시리아는 중동 국가 중 이런 경향이 덜하며 강간이 거의 없고 신체적 성희롱도 적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름대로의 계획도 짜봤다. 처음에는 수도 다마스쿠스로 들어간다. 다마스쿠스 국립박물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살펴보고, 시내 살라딘 광장을 가서 살라딘 동상을 본다. 살라딘은 이집트·시리아 지역에서 아이유브 왕조를 개막해 북아프리카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지배하면서 유럽인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한 인물로 아랍 문화권의 영웅이다. 올드 시티에서 우마이야 모스크(무슬림과 기독교도 모두의 성지로, 세례자 요한의 성소가 위치)를 구경한 뒤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한다. 이후 로마 제국 당시 아라비아 지역 행정구의 수도였던 '보스라'로 간다. 보스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했던 고대 로마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엔 또 다른 유네스코 세계유산 팔미라를 구경한 뒤 시리아 제 2의 도시 알레포로 향한다. 로마 시대 이후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계속해온 알레포에는 십자군 전쟁의 중요 거점이었던 알레포 성채는 물론이고 대모스크, 대중목욕탕, 대상들의 숙소 등이 남아있다. (이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이후엔 서부의 경제 중심지 '하마'로 이동한다. 여기엔 수차(水車·Norias of Hama) 유적이 있다. 수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때 농지 관개를 위해 발명됐다고 추측되는데,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차근차근 문화도 공부하고 역사도 공부해가며 여행 계획을 쌓아갔다. 그렇게 어느새 대학생이 됐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시리아 여행은 차일피일 뒤로 밀려났고… 이후 이야기는 알다시피다. '아랍의 봄' 여파로 2011년 4월, '시리아 내전'이 발발했다. 그리고 올해로 7년째 시리아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고 있다. 이제 시리아엔 아름다운 풍경도, 기꺼이 외지인을 집에 초대해 호의를 베푸는 현지인도, 잘 보존된 유적지도 없다. 7년간 지속된 내전에 따른 사망자수는 약 36만명이다. 영국에 본부를 둔 시리아내전 감시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SOHR)는 지난 9월 "2011년 3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 대한 반대시위가 벌어진 이후 현재까지 총 36만479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3분의 1인 민간인은 11만687명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위험한 고국을 떠난 시리아 난민도 지난해 500만명을 돌파했다. '아랍의 봄'으로 시리아의 내전이 촉발됐다지만, 튀니지, 이집트, 예멘에서는 정권교체를 이룩하며 나름 성공적인 혁명으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시리아가 유독 오래 아픔을 겪고 있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다음 편에서는 시리아 내전의 양상이 복잡해진 이유와 앞으로의 전망을 살펴본다. 참고문헌 시리아 : 지구촌 문화충격 탈출기, 휘슬러, 콜먼 사우스 시리아, 한울, 구니에다 마사키 시리아 내전 분석과 전망, 국방대학교 PKO센터, 임윤갑 시리아 바샤르 정권의 공고화 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외대, 김한지 시리아 소수집단 알라위파의 집권과 국민통합 정책에 대한 연구, 한국외대, 김한지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0.15 06:15

  • "모두가 평등한 곳은 없다"… 북유럽의 차별
    "모두가 평등한 곳은 없다"… 북유럽의 차별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②] 핀란드, 여성 40% 고용 쿼터제 있는 양성평등국가… 그럼에도 핀란드 여성은 남성의 82%밖에 벌지 못해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핀란드인 친구와 함께 강이 보이는 바에 앉아 휴식하던 중,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휴대폰으로 뉴스를 봤다. ''취업 성차별' 여전…여성 구직자 10명 중 7명, 구직시 불이익 경험'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였다. 문득 옆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너네 나라에서도 이런 기사 본 적 있어?"라고 묻자 그는 "아니"라고 답하며 웃었다.(☞"가진 건 언 땅 뿐"… 맨손으로 선진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①] 참고) 문득 '어이없는 걸 물었나' 싶었다. 그런데 내가 "그래, 핀란드는 성평등 국가니까"라고 말하자 그가 "성차별 없는 나라가 어디있냐"면서 "핀란드에도 성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7 세계 성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17)에 따르면 핀란드는 세계 3위(성 격차 지수 0.823)로, 1위 아이슬랜드(0.878), 2위 노르웨이(0.830) 등 북유럽 이웃 국가들과 함께 최상위권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친구는 "물론 여자를 많이 고용할 수록 '올바른 회사'라는 이미지가 있고, PC한(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회사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신입사원으로 여자를 더 많이 뽑긴해. 그래서 취업준비생 때는 여자가 유리한 것 같아"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이어 "그런데 막상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야. 성별 따라 버는 돈에 차이도 있는 것 같고"라고 말했다. 유수 컨설팅회사 직원이자 남성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충격이 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양성평등 국가 핀란드에서 취업시 여성이 겪는 차별은 거의 없다. 2013년 OECD가 25~64살 성인의 학력별 고용률을 비교한 결과, 핀란드에서 전문대 졸업 여성의 고용률은 83%로 23개국 중 4위였다. (1위 아이슬란드(91%), 2위 노르웨이(89%), 3위 독일(85%), 4위 핀란드·프랑스(83%) 등이었다.) 핀란드의 여성 노동 시장 참가율(72%)이 남성(76.2%)과 비슷하니 당연한 결과다. 참고로 당시 한국은 58%에 머물러 23위로 꼴찌를 차지했다. 또 2014년 우리나라 남성의 학력별 고용률은 △고졸 84% △전문대졸 91% △대학교·대학원졸 90%인 반면 우리나라 여성의 학력별 고용률은 △고졸 57% △전문대졸 60% △대학교·대학원졸 62%에 그쳤다. 핀란드는 일찍이 여성이 평등한 고용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여성쿼터제를 도입했다. 1995년 기존의 평등법을 개정하며 마련한 것으로 정부기관과 지방단체 등 일자리의 40%를 여성에게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제도였다. 2014년에는 여성임원할당제도 도입했다. 유럽연합(EU)이 회원국 내 상장사를 대상으로 이사회 여성할당제 의무화를 추진한 데 따른 것인데, 2003년 노르웨이가 최초로 공기업과 상장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을 최소 40%로 의무화한 이후 프랑스·스페인·네덜란드에 이어 핀란드도 이를 도입했다. '원칙준수·예외설명'(comply or explain)제도에 따라 만일 여성 임원 비율 40%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측은 그 이유를 설명해야한다. 이로써 핀란드에서 여성 임원의 비율은 2014년말 기준 32.1%에 달할 정도로 높아졌다. (같은 해 노르웨이 29.9%, 스웨덴 27.5%, 프랑스 28.5%다. 반면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국내 상장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1.64%에 불과했다.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기업도 89.5%였다.) 하지만 핀란드 내에선 아직까지 차별이 공고하며, 이를 철폐하기 위해선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장 잦은 지적은 '성별 임금 격차'다. 2011년 10월 핀란드 국영방송 일레(YLE)에 따르면 핀란드 여성은 남성의 82%에 해당하는 금액만 벌어들인다. 당시 일레는 "2011년 유럽 평균 성별 임금 격차는 17.5%인데, 이 보다 핀란드에서의 성별 임금 격차(18%p)가 크다"고 지적했다. 당시 핀란드 보건복지부 관계자 오우띠 비따마 떼르보넨(Outi Viitamaa-Tervonen)은 "이는 양성평등 국가 핀란드의 명성에 얼룩을 남겼다"면서 "앞으로 성별 격차를 최대 15%까지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이 목표가 제대로 이뤄진 것 같지는 않다. 지난 2월8일 일레(YLE)는 보도에서 "핀란드에서 남성이 1유로를 벌 때 여성은 83센트밖에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별 임금 격차는 왜 나타나는 것일까. 떼르보넨은 그 이유를 "여성이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남성 보다 적고, 육아 책임도 가족 내에서 불균등하게 분배돼있다. 또 여성들은 보통 남성 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는 직책에서 주로 근무한다"고 설명했다. 핀란드 보건복지연구원은 "핀란드는 노동환경에서 성별에 따른 분리 문제가 심각하다"며 "여성들은 여전히 육아, 건강관리, 사무, 청소, 간호 등의 분야에 집중 근로한다. 이 직업 집단에서 여성의 비율은 90% 이상이다. 반면 기계, 전기전자, 건설, 설치 및 수리, 트럭 운송 등의 분야에서는 남성이 90% 이상 근무한다"고 설명한다. 연구원은 이 같은 성별 직업구분은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축소하며, 능력의 효율적인 분배를 막는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연구원은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에는 낮은 임금이 지불된다며 이를 문제라고 봤다. 또 출산·육아 등으로 보통 남성 평균 경력보다 여성 평균 경력이 1년쯤 짧은 점도 여성 경력개발과 임금 상승을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핀란드의 모든 기업은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를 휴직 전과 동등한 직급에 배치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어 실직이나 승진차별 등에 대한 우려는 없다. (사실 이 또한 오래된 일은 아니다. 10년 전까지만해도 엄연히 차별이 있었다. 책 '핀란드 들여다보기'(2006년 발매)의 저자 이병문은 "핀란드에서도 기업이 편법을 동원해 출산·육아휴직후 돌아온 여성의 복직을 불허하기 위한 법정 소송이 일어나고,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역차별을 받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 때문에 핀란드 여성들은 기업 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취업하기를 선호하며, 실제로 이곳에선 여성이 전체직원중 각각 70%, 77%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출산과 육아를 마친 여성들이 다른 동료들에 비해 커리어 측면에서 불리한 건 핀란드도 마찬가지다. 친구는 "아무래도 회사 내에서 커리어 경쟁이 치열하니까, 아기를 안 낳는 여성들도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육아와 관련한 휴직 제도가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두 가지로 나뉜다. 핀란드의 출산 휴가는 총 4개월로 대개 출산일 5주 전에 휴가를 낸다. 기업에서 출산휴가 기간 임금 전액을 부담한다. 남편도 아내의 출산휴가 기간동안 최장 18일간 부성 출산휴가를 낼 수 있다. 이 기간도 임금이 전액 지급되므로 핀란드에서는 90% 이상의 아빠가 부성 출산휴가를 낸다. 출산 휴가 기간이 끝나면 부모 중 한 사람이 직후 6개월간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기간을 나눠 사용할 수도 있다. 육아 휴직 기간동안 임금은 60~70%가 지급된다. 기업과 정부가 나눠 부담하는데, 주로 여성 쪽의 임금이 적기 때문에 임금이 적은 엄마 쪽이 육아휴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핀란드 전체 근로자 중 남성이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비율은 약 32% 정도에 그친다. 아이가 생후 10개월이 됐을 때 육아휴직을 더 사용하고 싶으면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육아휴직을 추가로 사용할 수 있다. 핀란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서 세 살이 될 때까지는 한 사람이 키우는 게 아이 정서 발달에 좋다'는 분위기가 있어 엄마가 연이어 육아휴직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핀란드에서는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너무 짧게 사용하고 이점이 여성들에게 차별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1년 아르토 사토넨 핀란드 국회 고용평등위원회 의장은 "엄마들의 육아휴직 사용 기간이 아빠들보다 절대적으로 길어 여성들의 커리어가 손해를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2008년 그는 "성별 임금 격차가 매우 크며, 여성들의 임금을 남성 수준으로 높이도록 노력해야한다"고도 강조한 바 있다.) 그와 대화를 나눈 뒤 한동안 멍했다. '세계 최고 양성평등 국가에서도 아예 차별이 없진 않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핀란드는 완전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큰 문제가 없어보이는 데도 이를 문제로 인식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실 인구의 반인 여성이 가사와 육아에만 매달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복지 효율성 측면에서 좋지 않고 결국 이는 국가적 손실로 이어진다. 이미 우리보다 한참 앞선 핀란드는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핀란드, 가지, 데보라 스왈로우 핀란드에서 찾은 우리의 미래, 맥스, 강충경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 언어과학, 정도상 핀란드의 마음, 책과 나무, 방민수 핀란드 들여다보기, 매일경제신문사, 이병문 ☞[이재은의 그 나라, 시리아 그리고 꿈의 여행지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0.08 05:30

  • "가진 건 언 땅 뿐"… 맨손으로 선진국 된 <strong>나라</strong>
    "가진 건 언 땅 뿐"… 맨손으로 선진국 된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①] '차별철폐와 평등' 중요 이념으로 삼아 전후 빈곤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진짜 대단하다." 서울 을지로 근처에서 만나 함께 막걸리를 마시러 가던 길, 친구가 입을 열었다. 핀란드인인 친구는 내내 빌딩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야경이 멋지지. 진짜 대단한 나라야." 그가 한국의 발전상에 감명받아 한국으로 공부하러 온 지 딱 일주일 됐을 때였다. 그가 한국을 오기 전부터 우리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한국과 핀란드 중 어느 나라가 더 대단한가'였다. 한국인인 나는 "교육 강국, 복지국가 핀란드가 최고다"라고 치켜세웠고, 그럴 때면 그는 "핀란드의 이미지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 홍보됐는지 모르겠다"며 "한국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라고 답해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물론 그 뒤에 자국에 대한 자아비판(내가 "한국의 청년 실업률이 높다"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1위다"라고 말하면 그는 "핀란드의 청년 실업률이 최고다" "핀란드의 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1위다"라는 식)도 뒤따라왔지만. 내가 아무리 핀란드를 추켜세워도 그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가 전형적인 핀란드인이었기 때문이다. 핀란드인들의 무뚝뚝함과 겸손함은 널리 정평이 나있다. 2016년 JTBC '비정상회담'에서 핀란드인 레오는 "핀란드인은 무뚝뚝하다"면서 "여자친구에게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 바 있다. '무뚝뚝' 핀란드인들은 매우 겸손하기도 하다. 핀란드에 있다보면 '자기자랑'하는 이들은 외국인 뿐이라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핀란드인들은 '겸손'을 가장 큰 미덕으로 꼽는다. 생일은 여러 곳에 알려 함께 행복을 나누지만, 본인의 수상·합격·승진 등의 소식은 절대 먼저 알리지 않는 게 핀란드인이다. 하지만 이들과 더 깊이 대화해보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없던 신생 독립국이 이처럼 강국으로 거듭난 데 대한 자부심 말이다. (핀란드인들은 애국심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핀란드 시장에서는 '국산'(kotimainen·꼬띠마이넨)이라 적힌 농산물이 불티난듯 팔리고, 매년 20여차례에 달하는 국기게양일에는 해당 건물의 관리 인력이 시스템적으로 청색·백색의 핀란드 국기를 게양한다.) 친구는 내가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전후 빈곤국에 불과했던 핀란드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실 지금이야 핀란드는 명실상부 선진국이지만, 불과 100년 전 독립한 국가다. 1917년 12월6일 핀란드가 제정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무려 6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핀란드는 스웨덴의 속국이었다. 즉 스웨덴의 지배 650년과 제정 러시아의 지배 110년까지 총 760년을 피지배국가로 산 셈이다. 더군다나 신생 독립국 핀란드의 영토는 3분의 1에 달하는 부분이 북극이고, 노르웨이나 덴마크처럼 천연가스나 석유 등의 자원도 없었다. 인구라도 풍족했던 한국과 달리 당시 핀란드의 인구도 370만명에 불과했다. (현재도 핀란드 인구는 550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핀란드는 세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레가툼 번영지수 1위, 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 1위, 교육경쟁력 1위, OECD 학업성취도 국제학력평가 1위, 국제투명성기구 선정 반부패지수 1위, 미국 월드리포트지 선정 미국이 가장 배워야 할 나라 1위… 195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중심국가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 발전이다. 핀란드인들에게는 특유의 정신력 '시수'(sisu)가 있다. 시수는 역경과 시련을 견뎌내는 핀란드인들의 국민성으로, 척박한 땅에서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끈기를 가리킨다. '시수' 개념을 가진 핀란드인들은 '3억 달러'라는 소련핀란드전쟁(1939~1944년) 배상금을 갚기 위해 똘똘 뭉쳤다. 막대한 배상금을 갚기 위해선 경제적 발전이 뒤따라야했기 때문에, 산업화된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정부 주도의 대대적 투자프로그램이 실시됐다. 하지만 핀란드는 알고 있었다. 인력도, 자원도 부족한 핀란드가 살아남기 위해선 기술, 디자인, 창의력, 솜씨가 강조되는 제품에 주력해야한다는 것을. 그렇게 마리메꼬, 이딸라, 아르텍 등의 디자인 브랜드 제품이나 컴퓨터 제어 기계 시스템, 특수차, 휴대전화, 선박 등 기술지향적 제품들이 핀란드의 주력 수출품이 됐다. 핀란드인들은 그들의 발전 이유로 '시수' 뿐만 아니라 '평등'을 꼽는다. 페카 티모넨 핀란드 독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우리는 지난 100년간 표현의 자유, 교육, 자연 중시 가치, 그리고 평등을 통해 많은 걸 이뤄냈다"고 평가했다. 핀란드에서 '평등'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진다. 평등을 지키기 위한 정부 산하 전문기관이 있을 정도다. 차별금지 민원도우미(옴부즈맨)라는 전문 기관은 신체적 조건, 연령, 성, 종교, 이념, 언어, 피부색 등의 이유로 억울한 처우를 받거나 불이익이 있었을 경우 이를 조사하고 피해자를 지원한다. 핀란드는 인구가 작은 나라인 만큼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단 걸 일찍이 인정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는 저발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여성 노동력 향상을 통한 경제 부흥(우머노믹스)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핀란드는 국가 발전을 위해 이 카드를 일찍이 사용해온 셈이다. 자연히 핀란드에선 여성인권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꾸준비 법이 개정돼왔다. △1864년 25세 이상 독신 여성에게 법적 성년 지위 부여, 결혼법 개선 △1868년 이혼이 쉽도록 이혼법 개정 △1871년 여성에게 대학 진학 기회 부여 △1878년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상속권 인정 △1890년 교육기관에서 여성 교사 허용 △1906년 여성 참정권 허용 △1907년 최초 여성 국회의원 선출(200개 중 19석) △1916년 여성이 대학교수 될 자격 허용 △1922년 미혼모와 그 자녀의 권리를 공식적 규정 △1970년 낙태 허용 사유에 사회적 적응 사유 포함 △1986년 자식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부여 등이다. 변화는 이어졌다. △1990년 세계 최초 여성 국방부장관 취임 △1994년 여성에게 자원 입대 기회 부여 △1995년 지방자치단체 선출직, 지방행정부 및 정부위원회에 여성 비율 40% 할당 명시… 이 같은 노력으로 핀란드에서는 2000년 여성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이 당선됐고, 2005년 재선됐다. 2003년 세계 최초로 남녀동수내각을 구성한 것도 핀란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7 세계 성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17)에 따르면 핀란드는 세계 3위(성 격차 지수 0.823)로, 1위 아이슬랜드(0.878), 2위 노르웨이(0.830) 등 북유럽 이웃 국가들과 함께 최상위권이다. 한국은 성격차 지수 0.650으로 조사대상인 144개국중 118위에 머물렀다. 핀란드의 여성 노동 시장 참가율(72%)은 남성(76.2%)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나이지리아 저널리스트 오노메 아마와(Onome Amawhe)는 나이지리아 일간지 '뱅가드'에 "핀란드에서 평등은 국가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평등 중에서도 특히 양성평등이 그러했는데, 이를 통해 전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의 노동력이라는 잠재력이 모두 사용됐다"면서 "양성 평등은 사회, 경제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에 모두 기여했다"고 밝혔다.핀란드인들이 현재 자국을 바라보는 감정은 한국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감정과 유사한 것 같다. 여러 외세에 억압당했던 국가가 선진국으로 발전한 모습을 바라볼 때의 그 벅찬 감정 말이다. 1899년 작곡된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핀란드인들에게 '애국심의 표상'으로 사랑받는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 op.26)에는 그 감정이 압축돼 담겨있다. 핀란디아는 시벨리우스가 1899년 제정 러시아에 억압된 고국을 바라보면서 작곡한 곡이다. 느릿하게 시작한 노래는 점차 고조돼 의지와 투쟁의 자세를 독려하다가, 평화로운 핀란드의 찬가로 장엄하게 마무리된다. '차별 없는' 국가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핀란드. 다음 편에서는 '차별 없는'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차별을 짚어보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해본다. 참고문헌 핀란드, 가지, 데보라 스왈로우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 언어과학, 정도상 핀란드의 마음, 책과 나무, 방민수 북유럽 스타일 100, 페이퍼스토리, 배리 포셔 핀란드 들여다보기, 매일경제신문사, 이병문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10.01 06:40

  • '독재자의 딸'… 대통령 선거 필승 키워드?
    '독재자의 딸'… 대통령 선거 필승 키워드?

    [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 ②] 부자간 세습은 거부감 일으키지만, 딸의 세습은 부정적 이미지 희석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내가 볼 때 나의 페루비안(Peruvian·페루인) 친구는 전형적인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한국식으로는 '강남좌파')였다. 그는 집이 유복해 미국 명문대에서 유학중이었는데 그럼에도 빈민·소수인종·여성 등 비주류세력의 권익 증진에 관심이 많았고 본인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는 권위주의적 독재 정권을 증오하는 반(反) 후지모리주의자(후지모리 지지자)였다. (☞ 페루에는 예언자가 산다… "박근혜, 대통령 된다" [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 ①] 참고) 친구는 게이코 후지모리가 끝내 페루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게이코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피와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반여성주의자야. 뭐, 그래서 지지자가 많긴 하니까 대통령은 되겠지… 게이코가 당선되면 페루 민주주의와 여성인권은 크게 후퇴할 걸." 친구와 대화를 한창 나눈 2012년 9월은 우리나라도 제18대 대선을 석달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일 때였다. 특히 박 후보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 구호를 앞세워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표를 모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게이코와 박 후보가 꽤나 겹쳐보여서, 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후보도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여성들에게 표를 얻고자 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자 친구는 "응, 박 후보는 그래서 12월에 대통령으로 선출될 거야. 다만, 여성들 지지 때문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지지자들 덕택에 말야. 여성주의자들은 게이코와 박근혜를 싫어하니까"라고 답했다. 그 해 12월 박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비록 그는 비선실세 국정논란 등 여러 혐의로 2017년 3월 탄핵됐지만, 어쨌든 그 전까진 대통령으로서 △구미시 상모사곡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옆에 새마을공원을 짓는 사업 추진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새마을 운동 되살리기(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새마을운동은 개도국 개발협력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새마을운동으로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발판을 마련했듯이 이런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언급) 등에 나섰다. 이 같은 이유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을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꾀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미국 심리학자 모린 머독(Maureen Murdock)은 저서 '여성영웅의 탄생'(The Heroine's Journey)에서 '아버지의 딸'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아버지의 사랑, 인정, 보호를 받기위해 그와 최대한 유사해지려고 노력한다고 분석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종의 '유사 남성'이 된 이들은 아버지가 가진 남성성과 여러 특성을 우월한 것으로 보고 여성성을 열등한 것으로 본다. 주로 성공한 여성들 사이에서 이 같은 특성이 나타는데, 우리나라에선 박근혜가 이 사례의 전형적 인물로 꼽힌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자신을 아버지 박정희와 동일시했고, 아버지에게 일종의 분신으로 인정 받으며 영부인 대행과 대통령 직을 임했다는 분석이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사례는 많다. 페루 전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도 이 사례에 해당하고,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딸 마리아 이멜다 마르코스,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 파키스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르티 전 대통령도 이에 해당하는 사례로 꼽힌다. 딸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 알렉산드라 무솔리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그들의 남아있는 지지세력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렇다면 여성주의자들은 '독재자의 딸'이자 '여성 정치인'인 이들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바라볼까. 여성주의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만큼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의견은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 이들을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문화적·사회적 개념인 '젠더' 측면에서는 여성이 아니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모린 머독이 분석했던 유사남성처럼 말이다. 이들의 아버지들은 권위주의 체제하 비주류 세력의 권익을 묵살하고 오히려 인권을 탄압했다. 자연히 이들 체제에선 여성 역시 눈요깃거리나, 술자리에 필요한 장식 정도로 전락했다. 즉 이 같은 상황을 보고 자랐음에도 '독재자의 딸들'은 아버지에 본인을 투영했기에, 소수자로서의 여성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젠더로서의 여성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여성학자 정희진도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박근혜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면서 "그의 정체성은 '공주'이지 여성이나 시민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게이코 후지모리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수많은 여성 단체들이 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대표적인 건 '펠리그로 후지모리'(peligro·위험)와 '소모스 2074'다. 그의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재임(1990~2000년) 당시 '가족계획 정책'의 일환으로 원주민·농민에게 불임수술을 강제했다. 2002년 알레한드로 톨레도 페루 행정부가 의회 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들어간 결과,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최소 34만6000여 명의 여성과 2만4000여 명의 남성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한 것으로 추산됐다. 또 강제 불임수술은 사전 진료·진단 없이 이뤄졌고, 후지모리 행정부는 거부할 경우 의료혜택을 박탈하겠다는 협박까지 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페루의 안데스 및 아마존 원주민 여성기구(ONAMIAP)에 따르면 불임시술 과정에서 2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불임수술 정책으로 1990년 여성 1명당 3.7명이었던 출산율이 10년 뒤 2.7명으로 떨어져 후지모리가 원하던 성과는 얻어냈지만, 인권은 퇴보했다. 소모스 2074는 "게이코는 불임수술이 자행되던 때 영부인을 대행했다"면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여성인권은 퇴보할 것이다"라면서 허벅지에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 페인트와 자궁으로 디자인 된 벨트를 착용하고 거리를 행진했다. 후지모리주의자들은 그에게 아버지의 굴레를 씌우는 게 너무하다고 말한다. 특히 게이코가 수차례 사과한 만큼 계속해서 반성을 요구하는 건 일종의 연좌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6년 4월3일,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게이코 후지모리는 후보 토론회에서 아버지인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서명한 문서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인권, 언론의 자유, 민주적 기관을 탄압한 것을 인정하고, 이들을 존중하며 다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담겼다. 또 의회 감독 정보 위원회에 견제 권한을 부여하고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은 여성들에 대한 배상 약속도 포함했다. 물론 트위터 등엔 그를 비난하는 메시지가 잇따랐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게이코는 여성권을 비롯 인권 운동가들의 반대에도 3수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답은 2021년 대선에서 나온다. 그의 동생 겐지 후지모리 의원이 2021년 대선에선 누나에게 도전해 승리를 쟁취할 것이라고 선전포고한 상태지만, 무슨 일인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게이코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겐지 의원의 부패 스캔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인 정당 '민중의 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해왔는데, 지난 6월 겐지 의원은 부패 혐의로 의원 자격을 정지당했다. 그는 자신의 혐의는 누나 게이코의 공작이라며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게이코가 여성이라 반감이 더 적은 것도 이유다. 이에 대해 정희진 여성학자는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기 용이한 이유는, 부자간 세습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딸의 세습은 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첫 '생물학적' 여성 대통령이었다. 아마 페루에 탄생할 첫 생물학적 여성 대통령도 다른 누군가가 아닌, 게이코가 될 것같다. 젠더적 '여성' 대통령이 나오긴 어렵지만, '독재자의 딸'은 대통령 필승 키워드니까. 민주주의 불모지, 페루에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 참고문헌 페루 아시아계 이주민의 정치적 성공과 인종 갈등: 후지모리 사례를 중심으로, 중남미연구, 박윤주 페루 대통령 선거 결과와 향후 경제정책 전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미숙 페루 정당체제의 탈제도화와 민주주의의 지연, 라틴아메리카연구, 김유경 페루의 이중적 부패 구조와 반부패정책의 한계, 글로벌정치연구, 김유경 ☞[이재은의 그 나라, 핀란드 그리고 차별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9.17 05:00

  • 페루에는 예언자가 산다… "박근혜, 대통령 된다"
    페루에는 예언자가 산다… "박근혜, 대통령 된다"

    [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①]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꼭 닮은 페루의 알베르토-게이코 후지모리 부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이번 대선(제 18대 대통령 선거·선거일 2012년 12월19일)에서 누가 뽑힐 것 같아?" 2012년 9월, 아직은 더운 날이었다. 페루비안(Peruvian·페루인) 친구가 함께 비빔밥을 먹던 내게 질문을 던졌다. 페루를 떠나 미국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던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이슈에 꽤 관심이 있구나' 싶었다. 친절하게 "지금 박빙의 두 후보가 있어.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랑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근소하게 박 후보가 지지율이 높은 것 같긴 한데, 뚜껑은 열어 봐야 알지"라고 설명해줬다. 그런데 그 뒤 이어진 말들은 예상을 깨는 이야기었다. 친구는 환히 웃으며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될거야. 장담할 수 있어"라고 답했다. '한국 근대사를 잘 모를 수 있겠군'하는 생각이 들어 반박했다. "물론 박 후보가 될 수는 있는데… 박 후보에 대해선 과거사 공격이 끊이질 않아. 아버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인데, 독재자란 비판을 받고 있고 박 후보도 이를 옹호하는 발언을 수차례 한 적 있거든.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식이 강한 만큼 그리 쉽게 승패가 결정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야"라고. (☞"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참고) 그런데 친구가 "알고 있어, 그게 바로 현실 정치에서 국민들이 그 후보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야"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친구는 "페루에도 똑같은 사례가 있다"면서 "2011년 치러진 페루 대선에선 아주 근소한 차이로 '독재자의 딸'이 떨어졌는데, 아마 다음 대선에선 대통령이 되겠지. 한국에선 아마 이번에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거야"라고 답했다. 친구의 말처럼 박 후보는 득표율 51.55%로 대통령으로 뽑혔다. 반면 문 후보는 득표율 48.02%로 대선 재수를 해야만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게이코 후지모리 페루 민중의힘 대표는 여러 측면에서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박근혜는 이제 불명예를 안은 전 대통령이라는 점이고, 게이코 후지모리는 아직도 유력 대선후보라는 점 정도다. 두 사람은 모두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 독재자의 장녀로, 영애로서 영부인을 대행했다. 정치와는 그리 관련없는 삶을 살다가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하고, 아버지 지지자들의 힘을 받아 곧바로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한 점도 같다. 사소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동생과는 사이가 그리 돈독하지 않은 것도 공통점이다. '조국 근대화'를 외치며 경제개발에 집중한 박정희 전 대통령(제5·6·7·8·9대 대통령, 1963년 12월17일~1979년 10월26일 재임)과 '페루의 근대화'를 줄기차게 외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1990~2000년 재임)도 유사한 점이 많다.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페루에 대거 이주한 일본인의 이민 2세대로, 토착인 45% 메스티소(토착인과 백인 혼혈) 37% 백인 15% 그리고 흑인과 일본계 위주의 아시아인 등이 3%인 다인종 국가 페루에서도 소수자였다. 하지만 후지모리는 '변화 90'(Cambio 90)당을 만들고 '가난한 자의 혁명' 슬로건을 내세우며 오히려 소수자인 걸 선거에 이용했다. 페루는 15%에 불과한 백인이 사회 기득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 후지모리는 이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큰 것을 이용해 이 같은 구조를 강력 비판했고, 결국 대통령이 됐다. 후지모리는 임기 중 연 7000%에 이르는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고, 경제개방 등의 전략을 통해 -4.2%였던 경제성장률을 1994년 최대 12.9%으로 끌어올렸다. '빛나는 길' '투팍 아마루' 등 반정부 무장게릴라를 소탕해 고질적인 치안 불안도 안정시켰다. 안정적 경제 성장과 치안 불안 해소가 후지모리의 업적으로 꼽히면서 수 많은 후지모리주의자(후지모리 지지자)를 낳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전형적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1992년 4월 군부 지원을 받아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발령, 여소야대 국회를 정리했다. 1995년 12월엔 연임을 보장하는 새헌법을 제정했고, 좌파 무장조직 '빛나는 길' 소탕 명목으로 정적과 반대파 수천명을 학살했다. 비밀 정치범 수용소도 만들어 이들을 가뒀다. 언론을 통제하는 와중에 3선 연임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를 반대한 헌법재판관은 파면됐다. 후지모리는 그렇게 2000년 3선 대통령이 됐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후지모리의 끝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2000년 9월, 페루 언론이 비선 실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전 국가정보국 총수가 야당 의원을 대선 뇌물로 매수하는 장면을 공개하면서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첫 보도 이후 후속 보도가 이어지면서 몬테시노스가 그동안 비밀암살단을 조직해 후지모리의 반대파를 사살했고, 그 대가(代價)로 마약·무기 밀매에 관여해 엄청난 재산을 치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 이후 후지모리의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라 발생했다. 일본·페루 '이중국적' 소유자 후지모리는 의회에서 탄핵되자마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재기를 노리며 칠레로 입국하자마자 체포, 페루로 송환됐지만 말이다. 그는 2007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뇌물을 받는 등 각종 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2009년에는 암살부대를 운영해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등 인권을 탄압한 혐의가 인정돼 추가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2017년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이 그의 난치병을 이유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를 사면하기 전까지 쭉 옥살이를 해왔다. (여기엔 아들 겐지 후지모리가 관여해 쿠친스키 대통령과 일종의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 여기까진 흔하디 흔한 남미의 독재자 이야기 같겠지만, 장녀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박근혜 전 대통령과 게이코 후지모리는 거의 운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겹쳐보인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면서 22세라는 어린 나이 때 영부인 역할을 수행한 영애 박 전 대통령처럼, 열일곱 때 부모가 이혼한 게이코 후지모리도 영부인을 대행했다. 이후 두 사람이 정치에 발을 들인 건 모두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두터운 고정 지지층 덕택이었다. 박근혜는 1997년 12월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대위 고문으로 정계에 들어섰고, 1998년 대구 달성 재보선에서 61%의 압도적 지지율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게이코 후지모리도 2006년 총선에서 부친의 후광 아래 보수층의 지지를 얻어 정치에 입문했다. 2011년 대선에서는 오얀타 우말라 전 대통령(득표율 51.45%)에게 결선투표 끝에 48.55%의 득표율을 얻어 근소한 차이로 석패했지만, 전국적 대권 주자로 자리 잡아 2016년 대선에 다시금 도전했다. 물론 이때도 49.88%를 얻어 50.12%를 득표한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에 밀려 아쉽게 떨어졌다. 후지모리가 두 번의 대선에서 좌절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과거사' 문제였다. 박 전 대통령은 결국 대선에서 당선되며 언뜻 과거사 문제를 정면으로 이겨낸 듯 보이지만, 후지모리는 결국 과거사를 이겨내지 못했다. 현재 후지모리는 3번째 대선 도전을 준비중이다. 결국 권좌에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후지모리는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간단히 말해 '반성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대선 직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 박 전 대통령에 비해 조금 더 절박한 태도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9월24일 대선을 세달여 앞두고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과거사 문제 등)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물론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박 전 대통령이 해온 숱한 발언들 때문에 이를 진심으로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박 전 대통령은 △2004년8월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라는 얘기가 많은데 이미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했다. 그런데도 또 사과해라, 사과해라 하는 것은 순수한 뜻이 아니라 대표 헐뜯기다" △2007년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사실 아버지 시절에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에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족한 면도 있었다"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회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고, 유신체제는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 등 한결같은 발언을 해왔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결국 임기 중 국정교과서를 강력 추진하며 부친의 명예회복을 노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이코 후지모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에서야 내내 반성한다는 태도를 보이지만 후지모리도 처음엔 "(아버지의 3선 개헌은) 우리가 테러와 초인플레이션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특별하고 예외적인 상황이었다"거나 "대통령에 당선되면 아버지를 사면하겠다"는 발언을 끊임없이 했다. 물론 2011년 대선에서 과반을 얻은 후보가 없어 결선투표로 가야할 상황이 되자 '과거사 반성'을 필승 카드로 꺼내들었지만 말이다. 당시 후지모리는 "대통령에 당선돼도 아버지를 사면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재임 시절 일어났던 잘못을 인정하고 페루 국민들에게 사죄한다"고 밝혔다. 물론 후지모리는 아직까지 대선 승리를 얻지 못하며 이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게이코 후지모리가 당선되면 분명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사면할 것이고 (이 시점에선 이미 사면됐지만), 페루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자유에 대한 약속을 어길 것"이라고 강력 비판했듯이. 결국 게이코 후지모리는 끝내 대통령이 되어 박 전 대통령처럼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노리게 될 수 있을까? '반 후지모리주의자'라 할 수 있는 친구가 자조적으로 게이코의 당선을 확신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셋의 최후는 모두 다 좋지 않았지만 게이코 후지모리만은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는 물음에 대한 답을 강구해본다. 참고문헌 페루 아시아계 이주민의 정치적 성공과 인종 갈등: 후지모리 사례를 중심으로, 중남미연구, 박윤주 페루 대통령 선거 결과와 향후 경제정책 전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미숙 페루 정당체제의 탈제도화와 민주주의의 지연, 라틴아메리카연구, 김유경 페루의 이중적 부패 구조와 반부패정책의 한계, 글로벌정치연구, 김유경 ☞[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9.10 05:00



  • "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아시아 국가는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중국계 80% 화교국가 싱가포르, 특유의 성정 억제해야한다며 독재 통치 싱가포르를 비롯 동남아권 친구들은 약속이 있으면 본인 친구나 친구의 친구를 데리고 오는 일이 잦았다. 함께 쇼핑이나 식사, 혹은 페스티벌을 가기로 한 약속이 있으면 세 명에 불과했던 당초의 약속인원은 금세 10명이 넘는 대인원으로 늘곤 했다. '내 친구가 곧 너의 친구'이며 '여러 명이 함께 하면 더 즐겁다'는 인식 때문이었는데 덕택에 많은 수의 싱가포르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중국계였는데, 간혹 말레이계 친구나 인도계 친구가 올 때는 습관처럼 이들이 먹지 않는 재료(돼지고기·소고기 등)를 빼고 식사를 주문했다. 싱가포르가 중국계 74.3% 말레이계 13.3% 인도계 9.1% 기타 3.3%로 구성된 다인종국가인 만큼, 다문화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만큼 치킨 라이스는 좋은 선택지였다.(☞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그런데 중국계 싱가포르인 친구들은 나와 중국계들끼리만 있을 때, 즉 아주 친밀하게 비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중국계와 한국인은 성실하다' 등 신체적 특징이나 성향을 두고 '어떤 민족은 어떠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했다. 그럴 때마다 싱가포르에서 인종을 다루는 방식은 미국·캐나다·호주 등에서 인종을 매우 민감하게 취급해 일상에서 언급을 자제하는 방식과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이는 싱가포르가 다인종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나라와 다른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싱가포르는 인종을 숨기는 게(동화주의) 아니라 드러내는 방식(다인종주의)으로 다문화를 구현, 인종과 민족을 사회적 분류의 한 수단으로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전략을 채택했다. 즉 싱가포르는 1965년 8월 신생 독립국으로 출범하면서 '아시아의 멜팅폿'(melting pot·인종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 동화되는 현상)을 국가 정체성으로 삼았다. 다양한 민족 정체성은 아시아에서 싱가포르 만이 가진 유일무이한 특질이 됐고 오히려 사회통합의 자원으로 등극했다. '멜팅폿' 싱가포르의 공용어는 영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인도) 4개이며 모든 국민은 기본어 영어와 모어(중국어·말레이어·타밀어 등) 등 최소 2가지 언어를 구사한다. '다인종주의 멜팅폿' 싱가포르에서는 국가가 진행한 모든 곳에 인종이 중요 요소로 등장한다. 신분증과 주택이 그 예다. 1954년부터 도입된 신분증에는 인종기록이 명시돼있다. 또 싱가포르 HDB(주택개발국·Housing Development Bureau)가 임대하는 주택(23개 지역 국유지에 88만호를 지어 99년간 장기임대)에는 인종 할당이 있다. 그 구성비는 철저히 지켜지는데, 예컨대 중국계가 나온 집에는 중국계만 들어갈 수 있고, 말레이계가 나온 집에는 말레이계만 들어갈 수 있다. 싱가포르 정부가 임대 주택에서 인종 구성비를 지키도록 한 것은 과거 영국 식민지 하 구도심에 몰려있던 인종별 집단 거주지가 유지될 경우 같은 인종끼리만 뭉치는 걸 우려, 새로 지은 주택에 분산 배치해 여러 인종이 섞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인종은 더욱 실체적인 무엇으로 인식됐다. 싱가포르 전문가 김성건은 '싱가포르의 인종과 민족문제'에서 싱가포르인들은 인종을 현실적으로 뚜렷하고 객관적 양상을 갖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인종을 매우 의식해서 '인종'을 계급, 나이, 교육적 성취보다 중요한 요소로 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曜·1959~1990년 총리, 1990~2004년 선임장관, 2004~2011년 내각고문)를 비롯 싱가포르 정치지도자들도 인종·민족을 국가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무엇으로 인식했다. 리콴유는 1994년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미국의 정치외교 전문 매체) 편집인과의 인터뷰 '문화는 숙명이다'(Culture is Destiny)에서 "세계각국의 민주화 전망에 대한 최근 세계은행의 결론은 미국문화의 일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같다'는 잘못된 가정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같지 않다, 유전자와 역사는 만난다"면서 문화와 생물학 간에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으며, 민족과 인종의 특질은 바뀌지 않는 것으로 유전자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중국 하이난에서 유래한 음식 치킨라이스가 싱가포르 국민음식으로 거듭날 만큼 싱가포르에는 중국계가 많다. 리콴유는 중국계가 대다수인 싱가포르를 강국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중국인 특유의 성정과 나쁜 습관을 규제해야한다고 여겼다. 리콴유는 이에 껌 씹기, 식당에서 입 닦은 휴지를 내버려 두고 일어서기, 거리에 침 뱉기 등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규제했다. 범죄는 태형으로 다스렸고, 사형도 흔하게 집행했다. 다른 나라에선 가장 혼란스러운 곳으로 꼽히는 차이나타운이, '경찰국가' 싱가포르에선 커다란 위생등급표가 달려있는 깨끗한 곳으로 거듭났다. 리콴유는 국가를 강국으로 이끌기 위해선 이 같은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독재도 나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리콴유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나눴던 대화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박 전 대통령 암살이 있기 일주일 전인 1979년 10월, 리콴유는 박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 만찬회에서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지도자는 오직 일하는 데만 정력을 집중하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 박 전 대통령이 언론의 평가 등 눈 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사람이었다면 대한민국의 이 같은 놀라운 성장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국회는 일당 독재로 국회의원 89석 중 83명은 리콴유의 자치정부 수립부터 59년째 집권 중인 여당 인민행동당(PAP) 소속이다. 여당은 야당에 대해 죄를 추궁하고 벌금을 물려 파산을 유도하거나 추방, 망명을 떠나게 한다. 리콴유의 정적으로 꼽혔던 조슈아 벤자민 제야레트남도 보다 큰 자유를 요구하다가 리콴유와의 법정 싸움 끝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해 파산했다. 정부를 비판한 언론도 명예훼손이나 국가 기밀 유출, 안보 위협 등의 죄목으로 고소당한다. 리콴유는 평생 한 개의 작은 빨간 가방(Red Box·외국 정상과 주고받은 편지, 각종 정책에 대한 구상과 서류, 회의 녹음 테이프·메모 등이 들어있는 가방으로, 리콴유 사후 국가유산으로 등재)을 곁에 가지고 다녔을 정도로 청렴하고, 국가를 강국으로 키워내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선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줄곧 유지했다. 앞서 언급한 '문화는 숙명이다'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그는 "외국의 제도가 적용될 수 없는 곳에 무차별적으로 강요하지 말라"며 "아시아와 서구 유럽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서구 개념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시아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포린어페어에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제목의 기고글을 보내 반박해 학계를 중심으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김 전 대통령은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로크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로크의 이론보다 2000년 앞서 중국 철학자 맹자는 비슷한 사상을 설파했다"면서 "맹자의 왕도정치는 '왕은 하늘의 아들로서 좋은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임무를 하늘로부터 위임 받았다. 왕이 악정을 하면 국민은 하늘의 이름으로 봉기하여 왕을 권자에서 몰아낼 권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 한국의 토착신앙 동학은 '인간이 곧 하늘'이며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고 가르친다. 동학정신은 1894년에, 봉건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착취에 대항해 약 50만 농민들이 봉기를 하도록 동기를 제공했다. 유교와 동학의 가르침보다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사상이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아시아적 가치가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는 리콴유의 말은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개념이다. 민주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결국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면서 프러시아 독일과 메이지 일본,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를 사례로 들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민주적 자본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실천한 국가들은 비록 일시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모두 다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처럼 민주주의가 없는 싱가포르는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될까? 현재 싱가포르는 이제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인프라부문 경쟁력 2위 국가(2016~2017년), 1인당 명목 GDP 세계 9위 국가(2018년 IMF 발표), 국제투명성기구 선정 국가청렴도 순위 7위 국가(2016년), 보아오 포럼 선정 아시아 경쟁력 1위 국가(2017년), 국제협회연합 선정 국제회의 개최 1위 국가(877건·2017년)로 자리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이 현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싱가포르 젊은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확실하다. 싱가포르 정치블로거 로이 응어잉(34)은 리셴룽 총리(李顯龍·리콴유 아들, 2004년부터 싱가포르 총리)의 국민연금제도(CPF)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정부로부터 고소를 당해 명예훼손 혐의로 40만 싱가포르 달러(약 3억26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유튜버 아모스 이 팡 상(19)은 2015년 3월 유튜브에 리콴유를 조롱하는 영상을 올렸다가 실형을 산 뒤 2016년 12월 미국으로 망명 신청했다. 키쇼어 마흐부바니마흐부바니(Kishore Mahbubani) 전 싱가포르 유엔대사는 뉴욕타임스(NYT)에 "젊은이들은 사회 정치 경제 이슈 전반에 걸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길 원한다. 싱가포르는 변곡점에 서있다"고 말했다. 포스트 리콴유 시대, 앞으로의 싱가포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참고문헌 아시아 세기의 도래와 아시아적 가치, 아시아연구, 김성건 싱가포르의 인종과 민족문제, 지역연구, 김성건 싱가포르 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강승문 싱가포르에 길을 묻다, 매경출판, 강승문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 리수, 이순미 싱가포르 화교 회당공사의 사회적 영향력 고찰-19세기를 중심으로, 중국학연구회, 조원일 19세기 싱가포르 지역의 화교 조직 연구, 인문학연구, 조원일·김종규 ☞[이재은의 그 나라, 페루 그리고 박근혜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9.03 06:05

  • 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
    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 독립당한 싱가포르… 화교가 80%인 다인종 국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여유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언제나 음식이다. 떡볶이, 알탕, 제육볶음, 김치찌개…. 문턱이 닳도록 한식당을 찾아다니던 내게 싱가포르인 친구들은 한식에만 국한하지 말고 음식 저변을 좀 넓혀보라며 자국 음식 '치킨 라이스'를 파는 곳으로 데려갔다. 치킨라이스는 하얗게 삶아낸 닭고기에 데친 숙주, 밥, 그리고 국물이 나오는 일종의 정식이다. 평범한 겉모습처럼 맛도 그저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입 먹자마자 의심은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육즙이 가득한 닭고기에 데친 숙주를 올리고 알싸한 고추소스와 간장을 찍어 먹으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닭고기 식감이 사라지기 전 서둘러 판단잎·생강 향이 가득한 밥을 입에 밀어 넣고, 거기에 삼계탕 국물처럼 걸죽한 닭국물까지 머금으니 맛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후 우울할 때마다 싱가포르인 친구들이 알려준 '파파리치'(치킨라이스 전문 프랜차이즈, 동남아시아·호주·뉴질랜드 등지에 여러 지점이 있다)를 찾았고, 타국 친구들을 만날 때도 '파파리치'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레이시아인 친구들과 만나 저녁 식사한 날의 일이다.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이야기하다가 내가 '파파리치'를 가자고 말하니 친구들이 화색을 보이며 "너도 말레이시아 음식을 좋아하는구나?"라고 묻는 게 아닌가. 내가 "싱가포르 음식 아니었어?"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표정의 친구들이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관계는 복잡해"라고 말한 뒤 "분명히 하자면 '치킨 라이스'는 말레이시아 음식이야"라고 답하는 것이다. 식사는 맛있게 했지만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귀가 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파파리치'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정말 '말레이시아 음식점'(Malaysian Delights)이라고 써있었다. '그렇다면 싱가포르 친구들은 왜 그렇게 설명한거지?'하는 생각이 들어 '치킨라이스'를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웹사이트는 '싱가포르 음식으로 말레이시아를 비롯 동남아 국가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 어느 쪽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혼란이 가중됐다. 처음엔 그냥 인접국끼리의 음식 원조 논란인가 싶었지만, 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싱가포르 국가의 탄생과 발전 양상을 살펴보면 중국 남부 하이난성에서 유래한 치킨라이스가 왜 싱가포르의 대표적 음식으로 거듭나게 됐는지(치킨라이스의 영어 이름도 하이난성의 이름을 딴 하이난니즈 치킨라이스(Hainanese chicken rice)다), 그리고 말레이시아가 왜 '우리 것'이라고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19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 관심 밖 버려진 섬으로, 극소수의 말레이족(원주민, Bumiptra·부미뿌트라)만 살던 해적들의 은거지였다. 하지만 1819년 이 곳의 위치적 중요성을 파악한 영국 동인도 회사가 현 싱가포르 남부에 항구를 개발하고 동방무역 거점으로 키우면서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었다. 1858년부터는 영국 인도 캘커타 본부가 이 지역을 지배했고, 싱가포르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인도 총독 행정력 부족 등의 이유로 1867년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이후 싱가포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말레이시아와 통합된 채 영국 식민지배하에 있었다. 즉,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두 나라로 갈라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을 거치며 싱가포르는 상업적으로 번성했고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민사회를 형성하게 됐다. 이민자 대부분은 중국 출신 화교였는데, 남인도 출신의 인도인이나 영국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아랍인 등도 싱가포르를 찾아왔다. 1819년 1000명에 불과하던 싱가포르 인구는 이민 인구 덕택에 1940년 77만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늘었다. 싱가포르로 이민 온 이들은 크게 무역업자와 노동자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싱가포르 개발 초기엔 무역업자들의 상업 이민이 많았다. 영국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싱가포르에 상륙한 스탬포드 래플스 경이 무관세 자유항 정책을 쓰면서다. 중국 난양(南洋) 일대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중국인들, 인도네시아 동쪽 셀레베스(Sulawesi)섬의 부기인들(Bugis), 아랍 팔렘방의 부유한 상인 알쥬니에드 등이 무역업으로 번창할 싱가포르의 가능성을 보고 찾아왔다. 1840년대 이후부터는 일감을 찾아 노동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말레이반도의 농장개발을 위해서는 밀림지대를 개척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선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식민지를 운영하던 영국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민자를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로 맞이했다. 때마침 19세기 초기 중국에서도 청나라 조정이 대규모로 반청 조직을 진압하고 있었다. 진압을 피해 중국인들이 하나 둘 번영하는 싱가포르로 몰려들었다. 이때 하이난에 살던 중국인들 역시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이주했는데 '웡 이 구안'이라는 하이난 출신 이주 노동자가 하이난 도시 웬창의 전통요리, 웬창 치킨(Wenchang chicken·文昌雞)을 변주해 만든 게 지금 우리가 먹는 싱가포르 치킨라이스의 원형이다. 이후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싱가포르 또한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 독립을 추구하게 됐다. 1955년 4월 싱가포르는 '렌델 개정 헌법'에 의거해 입법의원의 50%를 선거에 의해 뽑았는데, 이를 계기로 정치활동이 더욱 발전하면서 반식민지 독립 투쟁에 나섰다. 중도우파 '인민행동당'(人民行動黨)을 결성, 총리에 오른 리콴유(李光曜)는 1959년 신(新)헌법에 의해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자치령이 되자, 싱가포르 자치령의 수반으로서 말레이시아 연방에 남아 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당시 싱가포르는 이민 온 이들만 바글대던 작은 섬에 불과했고, 마실 물도 없어 식수까지 말레이시아로부터 끌어와 연명하는 곳이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물적·인적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봤기에 어떻게든 말레이시아 연방에 남고자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연방에서 내쫓고 싶어했다. 인종 문제 때문이었다. 원주민인 말레이족이 대다수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말레이시아와 달리, 사실상 무인도처럼 방치되고 있던 말레이시아 끝 자락의 섬 싱가포르는 이민자들이 찾아와 대다수 인구 구성을 차지했고 화교가 주류인 지역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안 그래도 말레이시아 내 말레이족은 이미 화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화교는 중국이란 현실을 떠나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 자리를 잡은 만큼 의지와 추진력이 강했으며 성실했다. 자연히 돈벌이에도 능했다. 말레이족은 '이러다간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모든 자리를 화교에게 뺏기겠다'는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됐다. 나아가 화교가 대부분인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의 일부분이 된다면 '말레이시아가 열심히 키워놓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싱가포르로 더 많은 재력과 권력이 흘러들어가겠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말레이시아는 현재까지 이 같은 생각을 기반으로 부미뿌트라(토착 말레이족) 특혜 정책을 펴고 있다. 즉 부미뿌트라가 수적으로는 다수지만 경제적으로는 소수라는 것인데, 이 특혜 정책은 '말레이시아 헌법 153조'에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말레이족은 기업 설립과 취직이 유리하며 차나 집을 저렴하게 구매가능하고 보다 쉽게 공무원이 될 수 있다)으로 명시돼있다.) 결국 1964년 7월,1964년 9월 2차례 말레이 극우 민족주의자들 주도로 인종폭동이 일어나 상호간 수백명 씩의 사상자가 생기자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탈퇴시키기로 결정한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독자 생존이 어렵다며 연방 잔류를 다시금 고려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이미 여러 차례 미뤄준 것이라며 이 같은 요청을 거절한다. 1965년 8월 리콴유 총리가 말레이시아 툰쿠 압둘 라만 총리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고 우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리콴유는 축출 통보를 받은 뒤 "나는 일생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통합을 꿈꿔왔다"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끓어오르는 눈물을 닦는다. 원치않는 독립을 맞이한 신생 독립국 싱가포르는 지도자 리콴유와 함께 혹독한 생존기의 역사를 쓰게 됐다. 이후의 이야기는 알다시피다. 서울의 약 1.2배 크기 영토에 인구는 561만명인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꽉 짜여진 독재통치하에 고속성장을 이어간다. 1980년대부터 한국·홍콩·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 "너무 이기고 싶다"… 한국이 얄미운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①] 참고)으로 불렸던 싱가포르는 이제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인프라부문 경쟁력 2위(2016~2017년) 국가, 1인당 명목 GDP 세계 9위(2018년 IMF 발표) 국가, 국가청렴도 순위 7위(2016년 국제투명성기구 발표)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화교에 대한 걱정이 커서인지 싱가포르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대신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말레이시아의 부속 도시에 불과했던 싱가포르가 국제적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말이다. 림관엥 말레이시아 재무장관은 지난 6월30일 연설에서 "말레이시아는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제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경제적으로 경쟁에 나서야 한다. 우리도 싱가포르와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뿌리가 같은 국가였던 만큼, 공동의 유산이 모두 싱가포르의 것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갖고 있는 것 같다. 림관엥 장관은 같은 자리에서 "싱가포르는 마케팅에 능숙하다"며 "치킨라이스가 싱가포르의 것이냐"고 반문한 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언젠가 '차 콰이 테우'(char kuey teow·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에서 먹는 볶음 쌀국수로 말레이시아의 국민 음식)도 그들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치킨라이스의 나라, 싱가포르는 어떻게 이처럼 빠른 발전을 할 수 있었을까. 리콴유는 치킨라이스를 먹는 화교, 즉 중국계 아시아인이 대다수로 구성된 싱가포르를 통치하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선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우리가 배울 점이나 반면교사로 삼을 점 등에 대해 알아본다. 참고문헌 싱가포르 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강승문 19세기 싱가포르 지역의 화교 조직 연구, 인문학연구, 조원일·김종규 말레이시아 종족간의 갈등 원인과 현황 연구, 사회과학논집, 김종업·최종섭 싱가폴의 인종과 민족문제, 지역연구, 김성건 이민자가 중심이 된 싱가포르 교회, 가톨릭평론, 편집부 싱가포르 화교 회당공사의 사회적 영향력 고찰-19세기를 중심으로, 중국학연구회, 조원일 주류지만 지배하지 않는 싱가포르 화교, 포스코경영연구원 CHINDIA Plus, 왕왕버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8.27 05:07

  • 한국도 몰랐던 한국인 공자·쑨원… 반한감정이 낳은 오해
    한국도 몰랐던 한국인 공자·쑨원… 반한감정이 낳은 오해

    [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②] 대만에 널리 퍼진 '악성 허위사실'… "경제·문화 교류 통한 인식 개선 꾀해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대만인 친구들은 대개 친절했고 우호적이었으며 마음이 따뜻했다. 이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또 한 차례 의문을 품게된 일이 생겼다.(☞[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①] 참고) 대만인을 남자친구로 둔 홍콩계 캐나다인 친구와 밤을 새며 놀던 중, 그가 갑자기 내게 한 질문 때문이다. 친구는 내게 "늘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정말 한국인들은 공자(孔子)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해?"라고 물었다. 내가 아는 유교 사상가 공자가 아닌가 싶어 몇번을 되물었으나, 그 공자를 가리키는 게 맞았다. 내가 "한국인 중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더니, 이번에는 "그럼 한자(漢子)도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냐"면서 "(대만인) 남자친구가 한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설명해줬다"는 것이다. 설마 다른 대만인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싶어 친구들과 놀 때 이야기를 꺼내봤다. 그런데 내가 "혹시 이런 얘기 들어봤어? 진짜 황당해서…"라고 입을 떼니, 친구들이 "응, 한국인들 다 그렇게 생각하잖아" "한국은 교과서에서 공자를 한국인이라고 가르친다며?"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니, 친구들은 도리어 "너는 그 부분 공부를 해서 알고 있나?"라며 "다른 한국인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에겐 매우 놀라운 이야기지만, 많은 대만인들은 위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다. 그 내용과 종류도 여러가지인데, △한국인은 한자를 한국에서 먼저 사용했다고 여긴다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배운다 △한국인은 중국 혁명 선도자·정치가 쑨원(孫文·손문)이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등이다. 대만 사회 기저에 깔린 반한감정이 낳은 악성 허위사실이다. 이 같은 허위사실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퍼져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만 총통이 직접 나서 이를 해명한 적도 있었다. 2011년 4월10일, 마잉주(馬英九) 전 대만 총통이 타이페이에 위치한 성요한과기대학(台灣聖約翰科技大學) 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졌을 때의 이야기다. 간담회 도중 한국인 유학생 이진희씨가 손을 들고 한국에 대한 오해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대만에서 6개월간 유학하는 동안 많은 대만인들이 한국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만 사람들이 '한국인들은 공자를 한국인으로 생각한다'며 '공자를 빼앗아가려고 한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한국 유학생들도 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한국인들이 대만의 전통음식인 또우장(豆漿·콩국)을 한국이 발명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대만인들의 오해도 있는데, 이런 오해들 때문에 한국인들이 다른 나라 문화를 빼앗아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비친다"면서 "대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신뢰를 받고 있는 총통이 직접 오해를 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마잉주 전 총통은 "한국에서는 공자가 중국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인들은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이 같은 오해, 즉 '한국인은 남의 것을 빼앗아가길 좋아한다'는 이미지 때문에 불필요한 여타의 문제도 빈번히 생긴다. 힙합 듀오 '프리스타일'의 곡 'Y'를 대만 가수 판웨이보(潘玮柏·반위백)가 그대로 표절하고, 100억원대 저작인접권 소송까지 벌였는데도 오히려 '또 한국인이 우리 것을 빼앗아갔다'는 반응이 나왔던 것처럼 말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만 태권도 선수 양수쥔(楊淑君)이 실격했을 때 '한국이 양수쥔의 메달을 빼앗아가려한다'는 반응이 일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가장 큰 이유로는 대만 언론을 꼽을 수 있다. 대만 언론은 틈만 나면 사회 기저의 반한 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써 독자를 끌어모으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한국 유명대학의 모 교수가 공자는 한국인이라고 주장했다" 등의 허위사실을 진실인 것처럼 보도해 반한감정을 자극하는 식이다. '양수쥔 사건' 때 진보성향 매체 '자유시보'(自由時報)가 실은, '공자를 한국인이라 주장하던 한국이 이번에는 '대만 태권도의 보배' 양수쥔의 금메달까지 뺏어갔다' 사설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언론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겠지만, 대만이 수치상으로는 언론 강국이라는 걸 알게되면 그 놀라움은 더 커진다. 미국의 비영리 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는 매년 '세계 언론 자유지수'(국경없는 기자회가 집계하는 언론의 자유 점수로, 언론인과 미디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간접적인 압력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평가한다)를 발표하는데, 2015년 기준 대만의 언론 자유지수는 27점으로 '언론 자유 국가'로 분류됐다. 같은 해 '부분적 언론 자유 국가'(33점) 평가를 받은 한국에 비해 대만에서는 언론의 표현 자유가 더 잘 보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자유'를 가진 대만 언론이 매체끼리의 과도한 경쟁 끝에 '방종'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데 있다. 대만 언론이 이렇게 된 건 38년이라는 긴 계엄 기간 동안 나라의 표현의 자유가 극단적으로 억압됐고, 이에 따라 해엄 이후 일종의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장제스(蔣介石·대만 초대 총통~5대 총통)는 중국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1949년 대만으로 패주했지만, 경제적 힘을 키워 중국 대륙을 수복하겠다는 꿈을 끝내 놓지 않았다. 그는 국민당이 끝내 공산당을 이기고 대륙을 수복하려면 대만에서부터 국민당의 기틀을 단단히 다질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해 독재 통치를 자행했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해 백색테러(우익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테러)를 벌였고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만들어 헌법의 임시조항으로 끼워넣었다. 여기엔 총통의 연임을 허하고, 반란으로 규정된 좌익 활동을 탄압하기 위한 감시기구를 설치하며, 국민당 외의 정당 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당연히 언론도 통제됐다. 하지만 장제스 사후 자리를 물려받아 1978년 총통에 취임한 장징궈(蔣經國·제 6~7대 총통)은 달랐다. 장제스의 아들로 어린 시절 소련을 유학한 바 있는 장징궈는 보다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에 장징궈는 재임 중이던 1987년 7월15일 계엄 해제 조치를 단행하고, 연이어 정당 설립 금지나 신문 발행 규제 등도 해제했다. 이후 대만의 민주주의는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언론의 경우에는 과도하게 억압돼 있던 게 한번에 터져나오면서 늪에 빠졌다. 한마디로 여러 매체가 우후죽순 난립하게 됐고, 극심한 경쟁을 거치며 언론 신뢰도가 극단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대만의 방송·신문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인 시장이다. 방송의 경우 여러 영세 케이블 방송사가 난립하는 가운데 지상파 방송의 시청률은 점차 낮아졌고, 선정적으로 변했다. 이정기·황우념은 책 '대만 방송 뉴스의 현실과 쟁점'에서 "1998년까지 지상파방송의 매출액은 케이블방송의 15배에 이르렀지만, 2003년에는 케이블방송의 매출액이 지상파방송의 3.7배 수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과도한 시청률 경쟁으로 수익창출에 실패한 대만 지상파 방송국은 결국 최소한의 공영성을 상실한 채 결국 케이블 방송사들처럼 선정적이고, 사실에 재미를 가미해 왜곡·조작하는 등 오락만 꾀하는 곳으로 변했다. 신문 시장도 마찬가지다. 2003년 홍콩에 본사를 둔 타블로이드 신문 '빈과일보'(蘋果日報)가 대만에서 창간하며 전통적 신문 '연합보'(聯合報) '중국시보'(中國時報) 등의 입지가 약화됐다. 스포츠·연예신문 빈과일보는 돈이 되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보도해 대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빈과일보와 경쟁하며 여타 신문도 너도나도 선정적 보도만을 해댔는데, 결국 전반적으로 신문의 질이 낮아졌고 이는 곧 독자의 외면으로 이어졌다. 신문 시장은 이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게 됐으며, 제대로 교육 받은 이는 타 기업체에 비해 보수가 매우 적은 기자 직군을 외면하고 있어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대만에서도 점차 이 같은 언론의 행태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반한감정을 이용한다는 걸 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한국에 보다 친밀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에 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경제 협력이나 문화 교류 등 한국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통해 대만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만 전문가 최창근은 책 '대만·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에서 "중국은 '하나의 중국'(一個中國政策) 원칙을 정치·외교부문에서 강조할 뿐 경제·문화 관계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면서 "그럼에도 한국이 경제·문화 관계에서 비공식 실질관계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에 소극적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실제로 반한감정 때문에 경제적 실익을 놓치고 있다며 그 사례도 소개했다. 2011년 한국 두산중공업과 일본 미쓰비시-히타치 컨소시엄이 2조 규모의 화력발전소 수주 경쟁을 벌였는데, 시공 능력에선 두산중공업이 우위로 평가됐지만 반한 정서와 친일본 정서 때문에 결국 수주를 맡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규태 관동대 중국학과 교수도 논문 '한국과 대만의 관계'에서 "대만과 경제 협력을 통해 관계를 개선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실질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 중심의 한국과 중소기업 중심의 대만이 협력해 중국 대륙 진출에 나서면 경제적 이익 창출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대만은 중국 대륙과 특수한 정치적 관계에 있어 중국이 외자기업들의 특혜조치를 취소하는 등 규제할 때도 대만 기업들은 규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기업들은 이미 이 같은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왕진핑(王金平) 전 대만 입법원장(국회원장)도 이 같은 지점을 주목해야한다며 "한국의 대기업과 대만의 중소기업이 협력하면 서로에게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문화적으로는 한국이 한류를 다량으로 대만에 수출하고, 이에 대한 반감도 커지는 만큼 대만인들로 하여금 일방적인 교류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만 출신 트와이스 쯔위, 워너원 라이관린 등의 한국 연예계 활동은 대만 내부에서 좋은 반응이 나온 긍정적 사례다. 2013년 방영된 tvN '꽃보다 할배' 대만편도 마찬가지다. '꽃보다 할배' 대만편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대만으로 수출됐는데, 대만 학자 궈추원은 이에 대해 "대만인들이 한국인이나 나영석PD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한류 콘텐츠를 통해 양국 국민이 서로를 이해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또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외교적으로 대만을 우대하거나 인정하는 행위는 할 수 없지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줘 공분을 낳을 필요는 없다는 조언도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왕진핑 전 입법원장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했다가 직전에 급히 취소한 일은 최악의 사례였다. 그는 천탕산(陳唐山) 국가안전회의 비서장을 비롯 여야의 유력 축하 사절단을 이끌고 내한했지만 결국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에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왕진핑 전 입법원장이 인천공항 출국 전 울분에 차 성명서를 읽던 장면이 대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대만인들에게 상처로 남았다. 대만 여행이나 대만인과의 교류를 통해 대만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양국간의 관계도 그렇게 개선해나갈 수 있다. 외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경제·문화적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반감을 줄여나갈 때 양국 관계는 보다 친밀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과 대만의 관계-중화민국 100년: 한대관계의 역사와 현실, 한국중국문화학회, 이규태 대만 방송 뉴스의 현실과 쟁점, 커뮤니케이션북스, 이정기·황우념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리수, 최창근 한류의 대만 진출 역사 및 대만인의 한류 인식, 디아스포라연구 제12권, 궈추원 대만 한류의 양면성… 열광과 외면, 중국학연구회, 황선미 글로컬적 관점에서 본 한류에 대한 재평가, 인문콘텐츠학회, 김성수 뉴미디어의 도입과 정착과정… 대만 케이블 TV의 사례, 언론과 정보, 조항제 ☞[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8.20 05:00

  • "너무 이기고 싶다"… 한국이 얄미운 <strong>나라</strong>
    "너무 이기고 싶다"… 한국이 얄미운 나라

    [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①] 한류 열풍의 중심지 대만엔 뿌리 깊은 반한 감정…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 '배신의 국가' 이미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몇 년 전 호주에 있었을 때 대만(臺灣)인 친구들과는 유독 친해지기 쉬웠다. 아무래도 같은 아시안끼리 공유하는 정서가 유사한 데다, 친구들이 한류 덕택인지 K-Pop가수나 드라마를 많이 알고 있어 말도 잘 통했기 때문이다. 몇몇 친구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도 했다. 매일 같이 대만인 친구들과 가라오케(노래방), 한국 음식점, 대만 디저트점 등을 다니며 즐겁게 보냈다. 이때 친구들과 그래스젤리, 타로 떡 등이 들어간 대만식 바오빙을 자주 먹었는데, 그 매력에 빠져 지금도 가끔 찾아다니곤 한다. 그런데 웃음 가득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순간순간 친구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이것이다. 하루는 한국식 분식집을 갔는데, 함께 김밥을 먹다가 "일본에도 김밥과 유사한 음식이 있다" "원조는 어디 것일까"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대만인 친구 세 명이 내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묻기에 내가 "김밥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 것 같아. 일본 노리마끼에서 유래됐다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 김쌈에서 유래했다는 사람들도 있고…"라고 말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심지어 웃으면서 "일본 것이겠지"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이구나"라는 장난을 치는 친구도 있었다. 대만은 코트라(KOTRA) '2015년 한류의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한류지수 세계 11위로 올라올 정도로 한류 열풍의 중심지다. 하지만 동시에 '반한 감정'도 널리 퍼져 있다. 한국 제품과 한국 문화에 대해선 흥미가 높지만 한국 국가와 한국인에 대해서는 부정적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훗날 일부 대만인 사이에서는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마치 정설처럼 퍼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2015년 대만 학자 궈추원(郭秋雯)이 대만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조사한 결과 강한 민족성, 애국, 승부욕, 적극성, 체면중시 등의 키워드가 나왔다. 2017년 그가 다시금 조사한 결과 술, 체면 중시, 성형, 보수적, 단결, 급한 성격, 배타적, 이기적, 승부욕 등의 대답이 나왔다. 그는 '한류 열풍'에 휩싸인 대만에서 전반적으로는 한국을 싫어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개인으로서 한류를 좋아하더라도 집단의 흐름에 따라 집단의 반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반한 감정이 심한 세대는 40~50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만에 반한 감정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복합적 원인이 마구 얽혀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마움을 모르는 데 대한 일종의 배신감으로 보인다. 대만인과 대화하다 보면 '1992년 한국-대만 단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949년 중화민국(中華民國)이던 시절 수교해 장기 우방국으로 지냈던 한국이 갑자기 단교를 통보했고, 그 과정이 도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 다수는 "'하나의 중국'(一個中國政策) 원칙에 따라 중국의 압박이 거셌다"거나 "대만과의 단교가 도미노처럼 이뤄지는 판국이었기에 오히려 신의를 오래 지킨 편이다"라고 받아친다.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타 국가들과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대만이었지만, 이전까지 공산주의 국가들과만 교류하던 중국이 1978년 경제현대화를 기치로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해 국제사회로 나오면서 급격히 무력해졌다. 많은 국가들은 '중국이냐 대만이냐'를 선택해야만 했고, 대다수 국가는 수교와 통상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중국을 택했다. 한국 역시 이 같은 흐름에 따라 대만과 단교하고 '비공식 최고관계'로 전환했다. 불과 몇 달 전인 지난 5~6월에도 도미니카, 파나마 등이 연달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이제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는 20개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한국에게 특히 섭섭한 감정을 느낀 건 그전까지의 우호감이 상당히 컸고, 정치적 동맹이 굳세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지만, 대만(중국 국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당시 대한제국처럼 일본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대만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훙커우 공원 의거(4·29의거)에 대해 깊이 감명 받고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다.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는 의거에 대해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할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찬사했다. 하지만 타국의 망명정부 지원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국제 사회 눈을 피해 '중국국민당'이나 장제스 개인의 명의, 혹은 그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의 명의로 지원금을 지급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 선생은 "우리의 대중국 외교는 '구흘적 외교'(求吃的外交·얻어 먹는 외교)다"라면서 가족을 꾸릴 생활비나 사무실 유지비용 등을 모두 대만의 지원에 의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양측 독립 이후에도 한국과 대만은 모두 공산 진영과의 싸움에 돌입하는 처지에 처했다. 중국에서는 1946년 중화민국 정부를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내전이 펼쳐졌다. 결국 공산당이 승리해 국민당이 1949년 대만으로 패주, 중화민국을 건국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이 쪼개져 남측 만의 정부를 수립해야만 했다. 중화민국은 '반공' 차원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한국을 1949년 1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국가로 승인하고 서둘러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 같은 과정을 겪으며 대만은 항일·반공 동맹으로 엮인 두 나라의 관계가 바뀔 수 없는 공고한 무엇이라고 인지하게 됐으며, 이것이 유난히 한국과의 단교를 섭섭하게 생각한 원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이 같은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 한국'이라는 이미지가 공고해진 데는 일제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기여한 것 같다. 대만의 역사 교과서와 중국·한국의 교과서 사이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크다. 세 곳의 역사 교과서 모두 일본 식민지 기간 수탈과 억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저항이 거셌다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대만은 일제가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대만의 다수(80~85%)를 차지하는 내성인(內省人·중국 명·청시기 이주한 한족이나 원주민 등 대만 토박이) 중에는 일제 식민지 때 보다는 이후 외성인(外省人·1949년 국민당이 본토에서 패주하자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주한 대륙인)들이 대만에 들어와 내성인을 핍박했다고 생각해 이 시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 보단 일본에 대한 반감이 덜한 편이다. 이외에도 '한국에 대한 열등감'도 대만 반한 감정의 원인으로 꼽힌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대만과 한국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유사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은 국제적 힘이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으뜸으로 꼽혔다. 하지만 지금까지 삼성, LG 등을 필두로 세계 경제시장을 선두하는 한국과 달리 대만은 한국과 경쟁하는 반도체·전기 등의 산업에서 점차 밀렸다. 2004년에는 평균 국민 소득도 한국이 대만을 앞질렀다. 이제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한국은 대만을 앞선 현실이다. 대만인들은 역사적으로 내내, 그리고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해왔다. 대만 지리·역사 교과서는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지방 변방 정권 중 하나로 해석하면서 중국 중심적 사고를 보여준다. 또 중국의 선진문화가 지리적으로 근접한 국가들에게 문화적·정치적·군사적으로 영향을 줘 실질적으로 번속 관계(藩屬·속국)를 형성했다고 설명하면서 한민족에 대해 은연중에 우위적으로 생각하는 데 기여했다. 이 같은 생각 때문에 패배감이 더욱 컸다. 또 1990년대 말부터 하한(哈韓·한국 열기)이나 한류(韓流) 열풍이 생겼고, 2000년대 이르러 한류 열풍이 거세지면서 일종의 한류 백래시(backlash·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도 일었다. 한국의 대만에 대한 일방적 문화 진출이 불편하다는 여론이 생긴 것이다. 한류는 2004년 항공기 직항로 개설 등 민간 교류를 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만, 동시에 대만인들로 하여금 '우리의 고유 문화는 모두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도 일게 만들었다. 대만인들이 한국에 대해 여러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이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를 이용했다. 한국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크니 선거에서 "한국을 이기겠다"고 공언하면 당선에 유리하고, 언론에서도 한국을 비방·폄훼한 기사를 쓰면 잘 읽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태권도 선수 양수쥔(楊淑君)이 규정 위반을 이유로 실격패 당했는데, 심판이 한국계 필리핀이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이 악의적으로 대만을 지게 만들었다'는 여론이 생겼다. 대만 언론들은 선정적으로 이 같은 반한 감정을 부추겼고, 5개 직할시 시장과 시의원 선거를 맞이한 각 정당과 정치인들도 "한국을 꼭 이기겠다"며 선거에 악용했다. 이후 양수쥔 선수가 직접 나서 "내 실격은 한국과 전혀 관계없다"며 자제해달라고 인터뷰했으나 이미 달아오른 감정은 쉬이 식지 않았다. '양수쥔 사건'은 대만 사회 기저에 깔린 반한 감정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는데, 이에 대해 당시 코트라 관계자는 "양수쥔 사건 이후 대만 방송에 나온 패널들이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해 '기쁘다'는 표현까지 하는 데 대해 당황스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대만 시민들은 총통 청사 앞에서 태극기를 찢고 불태웠고, 한국산 컵라면을 밟아 부수고 불매 운동을 벌였다. 대만 경찰이 주타이페이 한국대표부와 한국 학교에 대한 경비를 강화해야 했을 정도로 반한 감정이 고조됐다. 이후에도 대만 언론은 틈만 나면 '한국을 너무 이기고 싶다(好想贏韓國)'거나 '한국을 이기면 통쾌할 것이다(打贏韓國就是爽)'와 같은 문구를 빈번히 사용하며 반한 감정을 북돋았다. 대만 정치인들도 대내적 문제를 대외로 돌리고, 국민을 단결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한국을 정조준했다. 중국은 건드릴 수 없고 일본과는 친밀하니 한국이 적절한 제물이었던 셈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종의 계기만 생기면 반한 감정이 다시금 불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2010년 EU가 한국의 LG디스플레이, 삼성전자를 비롯 대만 치메이(奇美) 등의 5개사에 LCD 가격담합 과징금을 부여했는데, 삼성전자가 이 같은 사실을 자진신고해 리니언시 제도(담합 자진신고자 감면제)로 과징금을 면제받은 일이 있었다. 그저 그런 기업 이슈 중 하나로 끝날 사안처럼 느껴지지만, 치메이를 합병인수한 세계 최대 EMS 업체 혼하이(鴻海)그룹의 궈타이밍(郭台銘) 회장이 "경쟁자 등 뒤에 칼을 꽂는 소인배"라며 삼성전자를 비난했고, 스옌샹(施顔祥) 대만 경제부장이 "기업은 상거래 도의가 있어야 하고 일반적 상업 관습을 완전히 저버리고 '밀고'하는 행위는 상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다"라고 공개 비난하면서 다시금 반한 감정에 불이 붙었다. 태극기가 찢어지고 불태워지는 장면이 대만 뉴스에 다시금 등장한 건 물론이다. 문제는 이 같은 반한 감정과 또 반한으로 인해 생겨나는 대만에 대한 반감 모두 장기적 관점에서 양국에 이득되는 게 없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대만에 퍼진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알아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본다. 참고문헌 한국과 대만의 관계-중화민국 100년: 한대관계의 역사와 현실, 한국중국문화학회, 이규태 대만 중·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 서술 특징, 사회과교육연구, 안지영 일본침략 및 강점기에 대한 주변국들의 역사인식- 한국·중국·대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한국역사교육학회, 안지영 한류의 대만 진출 역사 및 대만인의 한류 인식, 디아스포라연구 제12권, 궈추원 대만인의 국가정체성 변화: '중국화'인가? '대만화'인가?, 한국중국문화학회, 최강호 대만 한류의 양면성… 열광과 외면, 중국학연구회, 황선미 글로컬적 관점에서 본 한류에 대한 재평가, 인문콘텐츠학회, 김성수 대만의 반한감정… 이해하고 대응하자, 코트라, 타이베이 KBC 이민호 센터장 ☞[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②]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8.13 06:03

  • 무슬림 난민을 어찌할꼬… 佛로 비춰본 韓
    무슬림 난민을 어찌할꼬… 佛로 비춰본 韓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②] 佛, 이민자에게 무조건적 '동화' 강요… 통합 실패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먼 나라 이야기로만 느껴졌던 무슬림 난민·이민자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연일 사회면에 '예멘 난민' 문제가 보도됐고, '제주 예멘 난민 수용 반대' 국민청원에는 총 71만4875명이 동의해 역대 가장 많은 참여 인원을 기록했다. 청와대도 공식 답변했다. 답변자로 나선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청원에 나타난 국민들의 우려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도 "우리나라 국제적 위상과 국익에 미치는 문제점을 고려할 때 난민협약 탈퇴나 난민법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또 "허위난민을 막기 위해 마약 검사, 전염병, 강력범죄 여부 등 심사를 강화할 것이며, 난민으로 인정될 경우 우리 법질서와 문화에 대한 사회통합 교육을 의무화해 정착을 지원·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곧바로 인권 단체들은 난민신청자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한다며 '인종주의적'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문제를 차치하고, 가장 우려스런 대목은 '사회통합 교육'이다. 이슬람 국가인 예멘과 우리나라의 문화, 역사가 크게 다른 데 큰 고민 없이 자칫 통합 교육을 할까봐서다. 알다시피 난민이나 이민자를 받아들이면서 '우리에게 맞추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가 통합에 실패한 나라의 내상은 매우 깊다. 이민자 통합에 실패해 내상을 입은 대표적 나라는 '라이시테'의 국가, 프랑스다. (☞힙한 팔찌 보고 웃은 佛 친구…'라이시테' 때문이라고?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①] 참고) 1789년 대혁명과 함께 제1공화정이 선포되던 때의, '공화국의 단일성과 불가분성, 자유·평등·박애 아니면 죽음' 구호는 프랑스 공화국의 초석이 됐다. 공화주의적 전통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를 형성해온 프랑스는 불가분한 단일 주권체 국가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강조하고, 시민들이 자유를 실현하는 틀인 정치공동체의 보호를 중요시 여긴다. 프랑스 국민은 자유·평등·박애 그리고 라이시테와 같은 공화주의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며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프랑스는 그동안 이민 정책에 매우 열린 태도를 보여왔다. 국적도 여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얻기 용이하다. 외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모든 아이는 성년이 되는 시점 프랑스에 살고 있고, 11세 이후 프랑스에 5년 이상만 거주하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프랑스 국적을 주는 데 거리낌이 적었던 건 공화국의 주요 가치들에 동의한다면 프랑스 국민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18년의 프랑스는 다문화사회 이민자 통합에 '실패'한 대표적 국가로 꼽힌다. 마그레브(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의 총칭) 무슬림 이민자의 2세들은 각종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프랑스도 니캅·부르카 등을 금지하는 등 이슬람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반 이슬람 국가'로 찍혀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IS 등)로부터 집중 테러 공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왜 프랑스의 통합은 실패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공화주의적 태도'다. 프랑스 공화국의 주요 가치에 동의한다면 국민으로 인정해준다는 태도는 곧 "출신국의 인종·문화·종교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공화주의 원칙을 준수하라.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는 배타적 태도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이민자를 받아들였지만, 이들을 위해서 변화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고수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마그레브 무슬림 이민자들은 1950년대부터 프랑스에 유입됐다. 부족한 노동력을 메꾸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들 유입에 나서면서다. 이민 1세대는 프랑스 '동화주의'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민 2세가 문제가 됐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배제, 사회적 멸시, 저고용과 고실업 때문에 사회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1981년 7월, 이런 사회적 차별에 분노한 마그레브 이민자 2세들이 각 도시에서 고급 승용차를 절도하고 방화 사건을 일으켰다.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마그레브계 청년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자 사제와 목사들의 주도로 '뵈르(beur, 마그레브 젊은이)들의 행진'이 시작됐다. 이들이 마르세유를 떠나 파리에 도착했을 때 6만명에 이르는 프랑스인들이 이들을 맞이해 환영했고, 이렇게 인종주의가 철폐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1990년 보앙블랭, 1995년 낭테르, 1997년 퐁텐블로, 1998년과 2004년의 투르쿠앙, 2000년 릴과 에손, 2004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연달아 무슬림 이민자 2세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2005년 가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될 정도의 폭동이 파리 '방리유'(banlieue·도시 외곽 지역)에서 일어났다. 폭동 발발 12일 만에 차량 5800대가 불타고 1500명이 체포됐으며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작은 사회에서 배제된 데 대한 불만 표출이었지만 결과는 무슬림적 정체성 강화로 이어졌다. '단일 공화국의 이상'이란 이름으로 배제된 자신을 이슬람화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이다. 프랑스 공화주의의 엄격한 적용이 오히려 극단적 이슬람 공동체주의를 빚어냈다고 풀이할 수 있겠다. 폭동 이후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동화주의 정책이 실패했으며, 앞으로 사회통합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요구가 불거졌다. 하지만 결국 책임 소재는 이민자들을 평등하게 포용하지 못한 '프랑스 사회'가 아니라 '사회에 동화노력을 하지 않은' 무슬림 이민자에게 부여됐다. 정치인들은 이런 여론 양상을 놓치지 않고 '이민문제의 정치화'(정치권이 세력 확장을 위해 이민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 이민문제를 치안·경제위기·국가정체성 문제 등과 연계해 정치쟁점화)에 돌입했다. 공화국적 가치('단일한 프랑스' '라이시테' 등)가 다시금 강조됐고, 이에 반하는 듯 보이는 '무슬림적 가치'(무슬림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히잡을 쓰고 시간마다 기도를 하는 등 '라이시테'의 세속주의와 결이 다른 측면이 있다)는 국가적 배척의 대상이 됐다. 대표적 인물이 주류 보수 우파 정치인 니콜라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다. 그는 내무부 장관(2002~2007년 4월) 때부터 대통령(2007년 5월~2012년 4월) 재직 기간에 줄곧 무슬림 이민자들을 비판해왔다. 사르코지는 '2004년 학교에서 히잡 착용 금지법 제정' '2007년 이민·통합·국민정체성 및 동반발전부 신설' '2010년 공공장소에서 니캅·부르카 금지법 제정' 등에 주도적으로 찬성하는 등 반 무슬림 이민자 여론을 조성했다. 2005년 파리 방리유 폭동에 대해서 그는 "공화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폭력행위"라면서 "똘레랑스 제로(tolérance zero·무관용)"를 선언했고, 2011년에는 "다문화주의에 실패 선언"하면서 프랑스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무슬림 이민자'에게 돌렸다. 국민적 여론도 이와 유사했다. 좌파와 우파에 관계 없이 프랑스 정치인과 주류 시민들은 프랑스 내 무슬림이 라이시테 등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가치를 위협한다며 단호함을 보여줘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그 기저에는 유라비아 공포(Eurabia·유럽과 아라비아의 합성어. 급증하는 무슬림인구로 인해 '유럽이 급격하게 이슬람화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Le Monde)가 2013년 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4%가 "이민자가 너무 많다"고 대답했으며 62%는 "프랑스가 더 이상 프랑스답지 않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도 정책에 이를 반영했다. 세속적 삶에서 종교를 분리하라는, 공화국의 라이시테 원칙은 더욱 강조됐다. △2004년 라이시테 원칙에 준거한 공교육 기관에서의 히잡, 십자가, 키파 등 종교적 상징물 착용금지 △2011년 4월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이슬람 베일(니캅·부르카) 착용 금지 △2013년 하반기 프랑스 교육당국의 '학교에서의 라이시테 헌장' 공표와 모든 학급내 '헌장' 부착 △2015년 공공질서 위협, 수상안전 등을 이유로 30여개 지방자치단체 해변가에서 부르키니(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의 착용금지 등. 대혁명 때부터 1980년대까지 프랑스 라이시테의 주 타깃은 '주류'인 가톨릭이었지만, 이제 주 타깃은 '소수'인 이슬람으로 전환됐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가치관이 소수에 대한 폭력이며, 결국 무슬림 이민자를 적대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만 이용돼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은 꽤나 종교에 열린 태도를 보여왔다. 타인과 나누지 않아야 할 대화 주제로 '정치, 종교' 등을 꼽는 등 타인의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보듯 한국은 아직 무슬림들에겐 열린 태도가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우려되는 건 만일 국제적 기준을 맞추기 위해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문화우월적 시각에서 그들에게 '우리에게 맞추라'는 태도를 보일 경우다. 2005년 파리 방리유 폭동이나 2016년 니스 트럭 테러 등의 비극이 한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려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균형적 정책을 펴는 게 중요할 것이다. 참고문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지성공간,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이슬람의 시각으로 본 프랑스 히잡 논쟁, 조선대학교, 황병하 '히잡 금지'와 '부르카 금지'를 통해 본 프랑스 사회의 이슬람 인식, 프랑스사연구, 박단 프랑스의 이슬람포비아 확산 원인, 세계지역연구논총, 김승민 프랑스 국민전선의 라이시테 이념 수용: 이민자 배제 합리화 전략을 중심으로, 유럽연구, 오창룡·이재승 추천영화 증오(La Haine, 1995). 파리 외곽 방리유에 사는 세 명의 젊은 소수자 이야기. 유태인, 아랍인, 아프리카계 흑인으로 구성된 이 청춘들은 증오를 키워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간다. ☞[이재은의 그 나라, 대만 그리고 반한감정 ①] 계속 사회 > E이슈 | 이재은 기자   2018.08.06 05:58

  • [MT리포트] "뚱뚱한건 <strong>나라</strong> 탓?"… 비만의 실체
    [MT리포트] "뚱뚱한건 나라 탓?"… 비만의 실체

    [뚱뚱한국, 비만과의 전쟁](종합) 흡연, 음주 다음은 ‘비만’이다. 정부가 연간 10조원 이상 사회적 비용을 일으키는 비만과의 전쟁에 나섰다. 편견을 만들고, 소득에 따라 양극화되고, 다음 세대에까지 대물림되는 비만의 실체는 뭘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자기관리 문제로만 치부돼온 비만을 사회·경제·영양학적 측면에서 깊이 따져봤다. ━"게으르니 살찌지"…뚱뚱한게 죕니까? ━[뚱뚱한국, 비만과의 전쟁-①]독박육아에 살쪘더니 "자기관리 못하니?"…면접서 "의지 약한 것 아니냐" 핀잔도 "여태 안 일어났니? 그렇게 게으르니 살이 찌지." "또 먹어? 그래 가지고 언제 살 뺄래. 그렇게 자기관리가 안되서. 쯧쯧." 고등학교 2학년인 한승주양(17·가명)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그의 키는 162cm, 몸무게 75kg. 신체질량지수(BMI)는 28.58로 '비만'이다. 고1 때 학업 스트레스로 살이 10kg 이상 쪘다. 특히 습관처럼 달고 산 편의점 야식, 탄산음료는 지방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반에서 중상위권 성적으로 공부도 곧잘 하지만, 1년새 자신감은 급추락했다. 이런저런 편견의 말들 때문이다. 어디서 "돼지야~"라고 부르면 돌아볼 만큼 이 소리는 일상이 됐다. 또 주위 사람들은 많은 일들을 '비만'과 연결 지었다. 몸살로 아플 때도 "살 쪄서 자주 아프고 그런 것"이란 말을 들을 땐 서럽기까지 했다. 한양은 "공부한다고 독서실·학원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살이 쪘는데,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취급한다"며 "게으르고 못났고 자기관리도 안되고 한심한 사람이 됐다"고 토로했다. 살찐 사람을 고개 숙이게 하는 사회 편견이 서럽다. 대다수가 '비만'을 여전히 개인 문제로 치부해 차별하는 것. 뚱뚱한 사람들은 자기 절제를 못하고 능력도 떨어지고 심지어는 성격까지 나쁘다며 색안경을 끼고 본다. 하지만 이를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로 여기고 정부 차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2일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의 지난해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19세 이상 성인 중 BMI 25 이상인 '비만유병률'은 2005년 31.3%에서 2016년 34.8%로 늘었다. 국민 3명 중 1명은 '비만'인 셈이다. 체질량지수가 30이 넘는 고도비만율도 2011년 4.3%에서 2016년 5.5%로 높아졌다. 특히 남성 비만율은 2005년 34.7%에서 2016년 42.3%로 꾸준히 증가 추세다. 흔한 질병이 됐지만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살찐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그것. 이에 '비만' 보다 '비만을 바라보는 시선'과 싸우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주부 유은정씨(34·가명)는 지난해 말 첫 아이를 출산한 뒤 몸무게가 8kg 불었다. 이후 육아에 전념하느라 밤잠도 설치고 끼니도 맘 편히 챙겨먹지 못했다. 운동은 그야말로 사치였다. 유씨 시어머니는 그런 그에게 "애 낳고 살이 많이쪘네. 자기관리를 못해서 그런다. 요즘 출산하고도 날씬한 애들도 많던데"라며 핀잔을 줬다. 그 말을 들은 뒤 유씨는 펑펑 울었다. 그는 "독박 육아 시달리는 것도 힘든데 뚱뚱해진 것도 한심하다 나무라니 서러웠다"며 "운동할 시간도 없고 밥도 그야말로 아무거나 막 먹는다. 비만이 왜 내 탓이냐"고 하소연 했다. 취업준비생 서모씨(27)는 지난달 다이어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빠듯한 생활비를 아껴 식욕 억제 한약까지 처방 받았다. 그야말로 살과 독한 전쟁 중이다. 다이어트 결심 계기는 한 기업 면접에서 들은 질문이었다. 한 면접관이 "본인이 왜 살을 못 뺐다고 생각하느냐. 의지가 좀 약한 것 아니냐. 회사 일은 잘할 수 있곘느냐"고 물어본 것. 이에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다"고 포부를 밝혔지만 면접은 낙방했다. 서씨는 "살이 쪘다고 의지가 약한 게 아닌데 그렇게 보는 시선 때문에 속상했다"며 "살쪄서 불행하다고 처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 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비만에 대한 편견은 사회 문제다. 관련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코네티컷대학 연구팀은 지난 2015년 미국·캐나다·호주 등 286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아이들이 왕따를 당하는 가장 큰 이유가 '비만'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응답자 50%가 '비만'을 꼽았다. 비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뚱뚱해지면 안된다"는 불안을 증폭 시킨다. 그래서 정상체중임에도 뚱뚱하다 인식하게끔 한다. 권진원 경북대 약대 교수와 박수잔 서울대 보건환경연구소 연구원으로 구성된 연구팀이 19세 이상 성인 4만3833명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남성 60.5%, 여성 66%가 정상 체중이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비율은 각각 39.5%, 40.6%에 불과했다. 닐슨이 발간한 '건강과 웰빙에 관한 글로벌 소비자 인식 보고서'에서도 자신이 과체중이라 인식한 한국인은 60%로 세계 평균(49%)보다 10%포인트(p) 더 높았다.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무리한 다이어트로 이어지도록 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비만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비만을 더욱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비만->안 좋은 인식->편견·차별->대인기피, 운동부족->비만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다. 코네티컷 대학 러드 센터 레베카 M. 펄 박사가 비만 여성 24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응답자 79%가 '비만'으로 낙인 찍힌 뒤 과식을 하는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응답자 75%는 다이어트를 거부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비만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편견과 차별이 실제 안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강재헌 백병원 교수는 "비만인은 자기절제 못하고 맨날 누워만 지내는 사람 그렇게 보는 인식이 있는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며 "잘못된 인식과 편견이 실제 차이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비만인이 능력이나 노력이 떨어지지 않음에도, 진학·입사, 배우자를 만날 때 편견이 작용해 불이익이 온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개인 문제로 치부되는데, 그렇게 하면 해결이 안된다. 비만은 사회적 문제"라며 "많은 선진국들이 국가 차원서 관리를 하고 있고, 우리 정부도 비만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남형도 기자 ━'먹어서 찐다'?…가난해서 찝니다 ━[뚱뚱한국, 비만과의 전쟁-②]비만은 자기관리 실패? 소득 낮을수록 비만율↑…"비만은 사회문제, 인식 바꿔야" 서울 강남구 23.6% vs. 강원 철원군 40%. 지역과 소득에 따라 비만율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만은 단지 자기관리의 문제로 여기던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2017 비만백서’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의 성인 비만율(체질량지수 25 이상)은 28.6%였다. 정부는 현재 5% 내외인 고도비만율(체질량지수 30~35)이 2030년이 되면 9%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저소득·농촌 비만율↑…'비만의 대물림'도 뚜렷 전반적으로 비만율은 소득이 낮을수록 높이지는 경향을 보였다. 소득과 재산을 반영한 건강보험료 분위와 비만율을 대조해 보면,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1분위의 고도비만율(BMI 30∼35)은 5.12%로 전체에서 가장 높았다. 반면 고소득층에 속하는 19분위는 3.93%를 기록해 가장 낮았다. 초고도비만율(체질량지수 35 이상)도 1분위가 가장 높았으며, 20분위로 갈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비만율은 지역에 따라서도 큰 편차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평균 소득이 높은 도시 지역이 낮은 비만율을 보였고, 농촌지역은 비만율 상위권을 차지했다. 2016년 기준 비만율이 가장 낮은 기초단체는 △서울시 강남구(23.6%) △서울시 서초구(23.7%) △경기 성남시 분당구(24.4%)가 차지한 반면 가장 높은 곳으로는 △강원 철원군 (40%) △강원 인제군 (39.3%) △인천시 옹진군 (39.1%)이 꼽혔다. 비만율은 한 도시 안에서도 지역별로 차이를 보였다. 서울 25개 자치구 중에서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가 나란히 최저 비만율을 기록한 반면 상대적으로 평균 소득이 낮은 금천구(29.2%), 강북구(28.3%), 중랑구(28.2%)는 비만율 상위권을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경제적 격차가 만들어낸 식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강재헌 백병원 교수는 "영양이 많고 열량은 낮은 건강한 식품은 정크푸드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며 "식비에 여유가 없는 계층은 불균형한 식사를 하기 쉽고, 자연스레 높은 비만율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또한 운동에 드는 비용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저소득층의 운동 부족도 비만을 부추긴다고 덧붙였다. '비만의 대물림'도 계층간 비만율 양극화를 강화한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부모가 모두 비만인 자녀의 비만율은 14.4%로 부모가 모두 비만이 아닌 자녀(3.16%)의 4.55배에 달했다. 비만도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셈이다. 강재헌 교수는 "자녀는 부모의 식습관 등 생활습관 전반을 공유하기 때문에 영향을 받기 쉽다"면서 "비만이 될 경우 의료비가 높아지고, 경제활동에도 지장을 받기 때문에 저소득층을 빈곤의 악순환에 빠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만=개인 문제' 인식 바꿔야…저소득층·아동 대책 집중 비만이 단순한 건강 문제를 넘어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계층 양극화를 일으킨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정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달 25일 발표한 '국가 비만관리 종합대책'을 발표한 정부는 비만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2015년 기준 9.6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며 심각성을 분석했다. 특히 정부는 저소득층과 아동·청소년에 대한 비만 예방을 집중해 각종 예방·검진·치료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비만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강재헌 교수는 "지금까진 비만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자기관리 실패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며 "비만은 사회경제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치는 질병이라고 볼 수 있는 만큼 적극적으로 예방하고 관리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선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 비만세(Fat tax. 포화지방 함량이나 설탕 함량이 높은 식품에 부과하는 세금)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비만을 유발하는 식품을 담배·술 같이 해악이 큰 제품으로 간주해 소비를 억제하는 정책이다. 2011년 덴마크가 세계 최초로 포화지방에 세금을 부과하는 비만세를 도입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 인도, 헝가리 등에서도 비만세를 도입했다. 다만 비만세는 이번에 발표된 종합대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소득층이 주로 소비하는 식품에 부과되는 세금이기 때문에 계층간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비만세를 통해 걷은 세금을 저소득층이 더 영양가 높은 식품을 구입하고, 비만을 치료하는데 쓰지 않을 경우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비만세를 도입했던 덴마크는 식품 물가 상승 등 부작용이 커지자 시행 1년 만에 철회했다. 남궁민 기자 ━소아비만, 아빠의 유전자 때문?…편식에 운동은 뒷전 아니야? ━[뚱뚱한국, 비만과의 전쟁-③]매년 증가하는 '소아비만'…불규칙한 생활습관·운동부족이 원인, 가정에서 관리해야 남달리 우람한 살집을 가진 어린이·청소년들이 늘고 있지만 '어릴 때 살이 쪄야 키도 큰다'는 생각에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비만은 유전이라 어쩔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비만은 엄연한 질병으로 특히 소아비만은 성인비만과 각종 성인병으로 이어질 수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소아비만, 성인병에 자존감 하락 불러= 1996년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비만을 '질병'으로 규정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비만율을 줄이기 애쓰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가 심각한 현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2017 비만백서'에 따르면 2016년 한국 성인 비만율은 28.6%에 달한다. 비단 성인 비만만 문제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비만으로 자라는 청소년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소아청소년(만 6세~18세) 비만율은 2013년 10%에서 2016년 13.3%로 증가했다. 영유아(5~6세) 비만율도 7.68%로 매년 상승하는 중이다. 성장기 어린이·청소년들에게 가장 흔한 질병인 셈이다. 소아비만은 언뜻 보면 뚱뚱하다는 것 외에 큰 문제 없어 보이지만 성인병을 낳고 원활한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심각하다. 한국건강관리협회에 따르면 성인 비만은 지방세포의 크기만 커지지만 성장기에 발생하는 소아비만은 지방의 세포 수까지 늘어나 소아비만 청소년 80%가량이 성인비만으로 이어진다. 성인 비만에서 흔히 생기는 고혈압과 고지혈증 등 대사중후군과 골관절 합병증 등 성인병도 쉽게 나타난다. 성장과 발육에도 치명적이다. 어른들이 으레 '살이 키로 간다'고 말하지만 사실 소아 비만은 성장판과 관절에 무리를 가해 성장호르몬 분비를 방해한다. 게다가 여성의 경우 초경을 빨리 시작하는 등 '성조숙증'을 불러 성장을 일찍 마치게 하기도 한다.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인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에 비만인 학생이 성장이 끝날 시기에 오히려 더 작은 경우가 많은 이유다. 단순히 '살이 쪘다' 정도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사춘기 시절의 비만은 정서불안과 자존심 하락을 낳기도 한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연구팀의 지난 2015년 발표에 따르면 소아는 비만을 '게으름', '둔함' 등 부정적 특성과 연관시키고 놀림과 차별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때문에 소아비만 청소년들은 또래에 비해 자신감이 떨어지고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우울증, 식이장애 등의 문제를 겪는 등 삶의 질 자체가 하락하기도 한다. ◇비만이 유전 때문?= 이같은 소아비만의 원인에 대해 유전의 영향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비만 유전자를 타고 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 실제 건보공단에 따르면 부모가 모두 비만일 때 자녀가 비만을 보이는 경우가 14.4%에 달한다. 부모가 비만이 아닐 때 자녀가 비만인 경우(3.16%)보다 약 5배나 많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유전자 차이는 비만에 어느정도 영향을 준다. 2016년 한정환 성균관대학교 교수 연구팀은 체내 신호전달물질인 S6K1이 유전자 변화에 따라 지방세포 수를 증가시켜 비만을 유도한다고 규명한 바 있다. 1994년 제프리 프리드먼 미국 록펠러대학교 교수는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인 '렙틴'을 생성하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른데 이는 부모에게 물려 받는 유전자의 차이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비만을 꼭 유전자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꼭 유전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자녀의 비만에는 부모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습관이 큰 몫을 차지한다. 비만의 유전 요인과 가족 구성원의 환경 요인이 합쳐져 비만이 발생하는 것이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식사 속도가 빠른 소아비만 자녀의 부모가 비만인 비율은 43.56%에 달했지만 부모가 비만이 아닌 경우는 2.7%에 불과했다. 빠른 식사 속도, 긴 TV시청 시간과 낮은 활동량 등 소아비만을 부르는 습관들은 대체로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부모가 만드는 환경적인 요인도 소아비만에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짐작할 수 있다. 강재헌 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자녀는 부모의 식습관 등 생활습관 전반을 공유하기 때문에 영향을 받기 쉽다"고 말했다. ◇생활습관과 운동이 가장 중요= 불균형적인 영양과 의자에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사회환경 이야말로 소아비만을 만드는 주범이다. 서구화된 식습관은 물론 각종 패스트푸드에 노출된 환경에서 운동 부족까지 이어지니 소아비만 유병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아동 및 청소년 비만 대책 연구'에 따르면 가공식품, 패스트푸드 섭취는 간접적으로 비만을 유도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홀로 식사하는 습관이나 스트레스를 음식으로 해소하는 습관도 비만의 위험도를 높인다. 최근 아침을 거르고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간편하게 식사를 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의 지난해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패스트푸드 섭취율은 초등학생 68%, 중학생 78.5%, 고등학생 80.47%로 나타났다. 과도한 학업으로 인한 운동 부족과 스트레스, 수면 부족도 아이들을 비만으로 만든다. 인제대학교 상계백병원 연구팀의 '소아청소년 비만의 관리'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권장 운동량(주3회 이상 격렬한 운동) 실천율은 초등학생(52.0%), 중학생(31.4%), 고등학생 (22.0%)로 매우 낮은 편이다. 이처럼 적은 신체활동으로 인한 에너지소모량의 감소는 비만의 원인이 된다. 수면 부족 역시 체지방 분해를 감소하는 작용을 하는 '코티솔'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켜 비만 발생률을 높인다. 소아비만은 결국 올바른 식단 관리와 운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 가정에서 자녀가 배달음식이나 단순 당류의 간식섭취를 줄일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TV 시청과 스마트폰 등 스크린을 바라보는 시간을 제한하고 신체활동을 통해 규칙적인 에너지 소모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6세 이상 소아·청소년은 매일 60분 이상 수영, 자전거 등 평소보다 심장박동이 조금 증가하는 중등도 이상 신체활동이 권장된다. 유승목 기자 ━'먹방규제'…비만세·설탕세까지? ━[뚱뚱한국, 비만과의 전쟁-④]19대 국회서 '비만세' 발의…20대 국회는 신체활동·건강한 식습관'유도'에 초점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7일 폭식을 조장하는 미디어(TV, 인터넷 방송 등), 이른바 '먹방'(먹는 방송) 등을 규제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복지부에서는 '가이드라인'일뿐 강제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실제 19대 국회에서는 '비만세' 부과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20대 국회들어서는 식습관 개선과 신체활동 '유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5일 보건복지부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른바 국민의 비만을 관리하는 식생활·영양·신체활동 관련 법령은 △국민건강증진법 △국민영양관리법 △아동복지법 △식생활교육지원법 △국민체육진흥법 △생활체육진흥법 △학교보건법 △교육기본법 △학교급식법 △학교체육진흥법 △어린이식생활안전관리특별법 등 11개다. 각 법안에 대한 소관부처 역시 역시 복지부와 농림축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으로 분산돼 있다. 각각의 법안은 국민의 식생활과 신체활동을 규제하고 강제한다기 보다는 사실상 '유도'하는 법안들이다. 복지부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국가비만관리 종합대책(2018~2022)'을 발표한 후 먹방규제 논란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을 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먹방규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먹방'과 비만과의 상관관계를 가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올바른 식습관 형성을 위한 교육을 강화하고 건강한 식품소비 유도하 겠다는 것이 복지부의 입장이다. 관련 법령 역시 건강한 식습관 교육, 신체활동 활성화, 건강 친화적 환경조성,고도비만자 적극 치료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회에 발의된 법안들도 이같은 흐름과 유사하다. 19대 국회에서는 고열량 저영양 식품에 부담금을 부과하는 이른바 '비만세'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다. 그러나 20대 국회들어 발의된 관련법안들은 사실상 비만 관리를 위해 식습관과 신체활동을 강제한다기보다 '유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국민영양관리법 일부개정안은 영양불균형을 막기위해 '영양소 섭취기준'이 국민건강증진사업, 학교급식 등 영양관리, 식품 영양표시 분야에 적극 활용될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식생활교육지원법 일부개정안 역시 지자체가 초·중·고등학생의 식습관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기위해 아침간편식을 제공하도록 하고 국가가 이에 필요한 재정적·행정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일부 강제적 규제를 가하는 법안들도 일부 발의돼있다. 성일종 자유한국당 의원은 어린이들이 올바른 식생활습관을 갖도록 하기 위해 초콜릿·사탕 등 고열량·저영양 식품에 대한 계산대 진열을 금지토록 하는 내용의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다만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은 해석에 따라 '먹방규제'의 법적 근거로 이용될 수도 있다. △인터넷 개인방송의 선정적·폭력적 영상 등을 규제하기 하기위해 사업자는 유통된 정보를 일정기간 보관토록 하는 법안(김성수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 △선정적, 폭력적 방송에 대해 인터넷개인방송사업자가 유통을 차단토록 하는 법안(이은권 자유한국당 의원 대표발의) 등이 발의 돼있다. '먹방'을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라고 규정할 경우 먹방도 규제 대상이 되는 셈이다. 이에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규제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다"며 "국민 건강 증진 차원에서 먹방 콘텐츠의 기준을 정립하고 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김민우 기자 ━"먹방 간섭 말아라" vs "한국판 비만세 필요"…찬반 논란 ━[뚱뚱한국, 비만과의 전쟁-⑤] 복지부 "비만율 줄이려 먹방 가이드라인 개발"… "국가주의적 발상" vs "적극적 문제 해결" 논쟁 비만의 사회경제적 손실이 높아지자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먹방' 등 폭식조장 미디어·광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개발해 규제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지난 26일 보건복지부는 국민건강증진정책심의위원회를 개최해 '국가 비만 관리 종합대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그 일환으로 폭식을 조장하는 먹방(먹는 방송의 줄임말·출연자가 직접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방송 프로그램) 등에 대해 모니터링 체계를 2019년까지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비만 해결에 팔을 걷어붙인 건 비만 증가율이 심상치 않아서다. 우리나라의 2016년 기준 비만율은 34.8%였는데, 2022년 추정 비만율은 41.5%에 달한다. 자연히 비만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도 꾸준히 늘고 있다. 2015년 기준 추산 손실액은 9조2000억원으로 10년 전인 2006년 4조8000억원보다 약 2배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리나라 고도 비만인구가 2030년 9.0%로 2015년 5.3%의 2배 수준에 이를 것이라 전망한다. ◇"먹방 규제? 국가주의적 발상" 정부의 '먹방 가이드라인' 정책이 발표되자마자 비판 여론이 줄을 이었다. 비만 대책은 필요하지만, 먹방 규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만 방지를 위해 먹방 시청을 금지한다는 건 국가주의적 발상이고, 먹방 시청과 폭식 사이 상관관계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은 "'먹방' 때문에 뱃살이 나온다고요? 그걸 규제한다는 정부가 국가주의 정부가 아니면 대체 뭡니까"라면서 "지금 시대는 개인과 기업은 자율적이어야 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국가의 모세혈관이 돼야 하는 시대입니다. 남이 뭘 먹든 말든 놔둬야 합니다"라며 비판한 바 있다. 온라인에서도 김 위원장과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누리꾼 wmin****는 "먹방을 시청할 자유와, 먹방을 방송할 자유가 개인에게 있다"면서 "이런 자유를 국가가 침해하는 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담배와 술을 규제하는 건 그것들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해악이 명확하기 때문"이라면서 "그런데 먹방이 이 두 가지처럼 악영향을 끼치나? 어떤 관련성이 있나?"라고 물었다. 즉 국민에게 해악이 명백한 경우 국가가 나서서 제한할 수는 있지만, 먹방의 해악이 증명된 바 없다는 논리다. 10만~30만명의 시청자를 보유한 먹방 BJ 양혜지씨도 같은 입장이다. 그는 27일 SBS 김성준의 시사전망대에 출연해 먹방이 비만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양씨는 "'먹방'에서 BJ가 먹는 걸 보며 먹는 즐거움을 대리만족하는 이들이 많다. 그냥 BJ가 먹는 걸 보는 것 자체에 만족한다. 먹방이 폭식을 야기하기보다 오히려 대리만족을 줘서 식욕을 조절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만인 분들이 먹방을 봤기 때문에 비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먹방을 규제한다고 비만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먹방 가이드라인, 해외 설탕세·비만세와 유사 반면 이 같은 정부 가이드라인에 대한 찬성 여론도 적잖다. 세계 30여개 국가들이 비만세·설탕세 등을 도입하는 등 비만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규제에 나선 것처럼 우리 정부도 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주장이다. 지난 4월 청량음료 대상으로 설탕세를 도입한 영국을 비롯, 핀란드·프랑스·태국·멕시코 등 전세계 30여개국은 이미 설탕세를 도입했다. 설탕을 비만의 주범으로 봐 비만율을 줄이기 위해서다. 비만세를 도입했던 나라도 있다. 앞서 덴마크는 2011년 세계 처음으로 비만세를 도입했다. 2.3% 이상 포화지방산을 함유한 식료품에 포화지방 1㎏당 16크로네(약 3000원)의 세금을 부과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소비자들이 가격이 저렴한 인접 국가에 원정쇼핑을 가는 등 실효성이 없어 1년 만에 폐지됐지만 세계 각국이 비만을 줄이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데 본보기가 됐다. 먹방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은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위해 제도를 마련하는 게 긍정적이라고 본다. 누리꾼 cbts****는 "식습관이 잘못되면 건강에 크게 해가 된다"면서 "정부가 국민 개개인이 사적으로 먹는 것을 간섭하는 것도 아니고, 방송으로 찍어서 내보내는 것을 간섭한다는 것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재은 기자 사회 > 일반 | 남형도 기자, 남궁민 기자, 유승목 기자, 김민우 기자, 이재은 기자   2018.08.06 05:30

  • 힙한 팔찌 보고 웃은 佛 친구…'라이시테' 때문이라고?
    힙한 팔찌 보고 웃은 佛 친구…'라이시테' 때문이라고?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①] 핵심 정체성 '라이시테'… 공적인 자리서 종교 드러내는 것 엄격 금지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수년 전 여름, 한창 멋 부리기에 관심 많던 때의 이야기다. SPA 브랜드 숍에서 산 예수 성화 팔찌를 왼팔에 끼고, 오른팔엔 불교식 염주를 찼다. 그때나 지금이나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그냥 예뻐서 구입했고, 예뻐서 착용했다. 젤네일도 받고 양 팔에 찬 팔찌까지 예뻐서 맘에 들던 찰나,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인 친구가 내 심기를 건드렸다. "한국에선 이런 팔찌를 다들 차나? 종교 국가인가? 아무튼 특이하네"라는 것이다. 당황한 내가 "음, 무교인데 그냥 예뻐서 찼어"라고 답하자 그는 깜짝 놀라면서 "굳이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다고? 새롭네"라고 답했다. 이 일은 내 뇌리에 한참 남았다. '뭐가 특이하지? 착용할 의무가 없는데 '굳이' (사회적 편견 감내하며) 착용한다는 식의 발언은 왜 나온 거지? 프랑스도 가톨릭 성향이 강한 나라 아니었나' 등의 생각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프랑스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2011년 4월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이슬람 베일(니캅·부르카) 착용이 금지됐으며, 2015년 30여개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질서 위협, 수상안전 등을 이유로 해변가에서 부르키니(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의 착용을 금지했다. 그런가 하면 2016년 8월 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 국사원(Conseil d'Etat)은 부르키니 착용 금지가 개인의 자유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라며 무효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굵직한 이슈들이 국제면을 장식하는 사이 주변에선 '프랑스가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개중엔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똘레랑스(tolérance·관용, 이해)와 싸데팡(Ça dépend·'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뜻으로 프랑스 특유의 포용력을 상징하는 말)의 나라, 프랑스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며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팔찌에 대한 친구의 반응이, 프랑스발 국제뉴스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라이시테'(laïcité) 개념을 알게 돼서다. 그는 "그러고보면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 중에 십자가 액세서리나 묵주 반지, 아니면 무슬림 상징물을 차거나 갖고 다니던 친구들이 없었던 것 같애. 라이시테 때문인가"라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이 자유, 평등, 박애에 이어 프랑스의 핵심적 국가 정체성으로 꼽는 '라이시테.' 라이시테는 여러 프랑스적 함의가 담긴 말로 한국말로 번역하기 꽤나 까다로운 개념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세속성' 또는 '비종교성' 정도로 거칠게 설명할 수 있겠다. '라이시테'는 1905년 제정된 제3공화국 '정교분리법안'과 1937년 제정된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을 금지하는 법'에 근거하는데, 공적인 장소에서 종교를 드러내는 걸 엄격히 금지한다.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이든, 종교를 가질 자유를 허용하지만 동시에 종교로부터의 자유 또한 허용한다. 즉 종교가 세속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종교에 대한 포용성이 꽤나 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왜 프랑스인들이 종교를 공적인 자리에서 숨기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프랑스의 종교적·문화적·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본래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가톨릭의 맏딸'로 불렸다. 5세기 프랑크족의 초대 왕 클로비스 1세가 정통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으면서 프랑스는 공식적인 가톨릭 국가가 됐다. 이 같은 흐름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탈 가톨릭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이어졌고, 가톨릭은 프랑스 민족이 공유하는 가치로 여겨졌다. 균열이 생긴 건 16세기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18세기 중반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다. 프랑스 남부에는 가톨릭(구교)에 저항하는 신교도들(위그노·Huguenot)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이 상공업에 종사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나가자 가톨릭 세력과 싸움이 벌어졌다. 바로 위그노 전쟁(1562~1598년)이다. 지난했던 위그노 전쟁 기간, 수만명의 위그노가 학살된 '성 바르텔레미 학살'(1572년)을 포함, 수많은 위그노가 희생됐다. 36년간 지속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던 이 종교내전은 위그노들의 지도자 격이던 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 1598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을 내리며 종결됐다. 하지만 동등한 승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가톨릭은 주류 종교였으며, 프랑스 왕조의 정치적 계산식에 따라 위그노는 안전했다가 위기 국면에 처했다가를 반복했다. 훗날 가톨릭 신자들은 1685년 신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해 루이14세를 압박해 '낭트칙령 폐지'에 해당하는 퐁텐블로 칙령(The Edict of Fontainebleau)을 내리게 했다. 신교의 전면적 금지, 신교 예배처 파괴, 신교 목사 추방 등을 담은 칙령이다. 이로써 20만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인접국으로 이탈하게 됐다. 기술과 부를 가진 상공인 위그노들이 다수 빠져나가면서 프랑스는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연이은 종교 관련 분쟁으로 사회적 갈등과 피로감이 높아질 때쯤, 한 방이 등장했다. 18세기 중반 볼테르, 샤를 드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등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당시는 상업자본주의의 발달로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피지배 평민계층의 비판의식이 한껏 고조된 때이기도 했다. 이들의 주도로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부패한 왕실과 항상 연합했던 가톨릭 교회는 대혁명 과정 가장 큰 타도 대상이 됐다. 1789년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탈가톨릭 절차를 하나씩 밟아갔다. 1789년 국민의회는 국가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국유화했다. 1791년에는 신성모독죄를 철폐하고,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가능케 했다. 이어 1792년에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 대신 해오던 행정적 절차들(호적 등록과 보관, 이혼 절차, 결혼식과 장례식 집전 등)을 행정부로 이전했다. 이 과정 권력을 장악한 로베스피에르가 1790년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가톨릭 이외 모든 종교를 박해한 사건은 탈가톨릭 가속화에 힘을 더했다. 대혁명이 프랑스 공화국 정부에는 탈가톨릭화를, 신교와 유대교 신자에게는 해방의 선언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런 흐름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제3공화정 초기 페리법(1881~1882) 제정을 낳았다.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맡아온 교육도 이제는 국가가 설립한 공립 학교만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쥘 페리 총리는 아이들이 '의무·무상·비종교(라이시테)'의 교육을 받을 때만 프랑스가 민주 공화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제 종교는 교육도, 행정도, 사회사업도 주도적으로 할 수 없는 위치가 된 것이다. 여기에 드레퓌스 사건(1898~1906년)까지 더해지면서 프랑스 공화국은 라이시테를 법으로까지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유대인 출신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간첩죄를 둘러싸고 프랑스는 반으로 쪼개졌다. 독일과의 전쟁(1870~1871년) 이후 민족주의가 고취되던 당시,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제공했다는 게 이유였다. 좌파 정치인들은 민족주의로 인한 반유대주의적·반유대교적 편견이라면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반면 군부·교회·온건 공화주의자들(우파)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다.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지목되며 사건이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군부가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몰고 사건을 은폐하려했던 게 밝혀졌다. 드레퓌스 가족도 적극적으로 재심을 요청하고, 여기에 좌파 지식인 에밀 졸라가 사설 '나는 고발한다'를 쓰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끝내 1906년 최고법원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선언하면서 급진 공화파(좌파)가 승리했다. 이 사건은 반드레퓌스파에 속했던 가톨릭과 우파 세력이 몰락하고 좌파 세력 중심으로 프랑스 공화정의 세력을 차지하는 사건이 됐다. 동시에 정치에 종교를 기반으로 한 편견이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라이시테적 생각을 강화했다.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멈추고 국가가 화합할 수 있도록. 주류 세력인 가톨릭이 다시는 정치를 휘둘거나 비가톨릭 국민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모든 국민이 법 아래 평등할 수 있도록 1905년 세속주의 정신을 담아 정교분리법이 제정됐다.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엄격한 분리(라이시테)를 선언함으로써, 이 법에 따라 프랑스는 어떤 종교도 국교로 인정하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 국가가 됐다. 공적인 자리에서 종교성을 드러내는 행위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프랑스의 저명한 종교사회학자 장 보베로는 라이시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에서 가톨릭은 자신이 유일하게 보편적 진리를 담보한다고 생각해 타 종교에 배타적이었다. 결국 종교의 자유와 시민종교를 공존시키기 위해서 시민 다수가 믿는 '가톨릭 교회'를 추방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프랑스는 다양한 시도, 갈등, 타협 끝에 라이시테라는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참고문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지성공간,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유럽의 나르시시스트 프랑스, 민연, 이선주 '2004년 법'과 프랑스 라이시테 원칙 적용의 문제점, 유럽연구 제32권, 박선희 종교적 중립성에 관한 고찰, 경북대 법학연구원 법학논고 제41집, 전훈 샤를리엡도 사건과 프랑스 내 소수자들, 이주사학회, 박단 여전히 지속되는 라이시테를 둘러싼 갈등, 이주사학회, 박단 공화주의적 통합과 프랑스 민주주의, 홍태영 추천영화 여왕 마고, 영화 초반부의 '성 바르텔레미 학살' 장면을 비롯해 가톨릭과 신교가 대립하던 끔찍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이재은의 그 나라, 프랑스 그리고 라이시테 ②] 계속 국제 > 일반 | 이재은 기자   2018.07.30 05:30

  • [MT리포트] 데이터스캔들·갑질제재…'동네북' 자초한 페북
    [MT리포트] 데이터스캔들·갑질제재…'동네북' 자초한 페북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종합) 우리가 눌렀던 ‘좋아요’, 우리가 맺었던 ‘친구’가 여론조작과 정치공작의 밑천으로 악용됐음이 드러나면서 페이스북이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페이스북 덕분에 연결될 수 있었고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 대신 데이터를 내주었고 페이스북은 그 데이터로 돈을 벌었다. 그런데 이 공생이 한계에 직면했다. 민주주의까지 망치려 하고 있다. [MT리포트]'플랫폼 갑질' 韓 정부 페북 제재…사면초가 '페북 공화국'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 방통위, '임의 접속경로' 바꾼 페북에 과징금 세계 최대 SNS 서비스 페이스북(이하 페북)이 사상 최악의 위기국면를 맞고 있다. 5000만 페북 사용자 정보가 미국 정치 선거에 무단 악용됐다는 '데이터 스캔들' 의혹으로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플랫폼 시장 지배력을 악용한 갑질 혐의로 과징금 제재까지 받았다. 페북이 플랫폼 영향력을 악용한 사례로 해외 정부로부터 제재를 받기는 이번이 사상 처음이다. ◇페북, 자사 이익 위해 '韓 접속경로' 변경… 과징금 제재= 방송통신위원회는 21일 전체회의를 열고 한국 통신사들과의 망이용료 협상 과정에서 서비스 접속경로를 바꿔 이용자들의 불편을 초래한 페북을 상대로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3억9600만원을 부과했다. 앞서 페북은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사들과 페북 전용 캐시서버 설치와 이용료 부담 문제로 갈등을 빚다 2016년 말부터 지난해 초까지 일부 통신사 이용자들의 접속경로를 사전 고지 없이 바꿨다. 이후 해당 사이트 접속이 느려지거나 끊기는 등 적잖은 이용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방통위는 하루 평균 국내 접속자가 1200만명에 달하는 페북이 국내 통신사들과의 망 이용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임의로 접속경로를 바꿔 이용자들의 불편을 끼쳤다고 판단했다. 방통위 조사결과, 접속경로 변경에 따라 발생할 문제를 사전 인지하고도 10개월간 이를 방치했다는 것이 근거다. 이번 방통위 제제는 페북이 사익을 위해 이용자들을 볼모로 삼았다는 해석도 가능해 서비스 신뢰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美·英·EU, '데이터 스캔들' 조사 착수… 페북 시총 53조 증발= 5000만명분의 페북 이용자 정보가 2016년 미국 대선 트럼프 진영 관련 기업에 넘겨져 활용됐다는 이른바 '데이터 스캔들' 파문도 확대일로다.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은 즉각적인 사실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뉴욕·매사추세츠주 검찰이 공동수사에 착수했고, 영국 정보위원회(ICO)는 데이터 스캔들의 중심에 선 영국 데이터 분석업체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이하 CA)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스캔들 여파로 페북 주가도 급락했다. 19일 6.8%, 20일 2.6% 떨어졌다. 이틀간 급락으로 페북 시가총액 중 약 500억달러(53조원)가 증발했다. 일부 투자자들은 이날 페북을 상대로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에 투자 손실을 보전하라는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페북 사용자 이탈도 본격화되고 있다. 분노한 이용자들은 'DeleteFacebook'이라는 태그(#)를 달고 페북 삭제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해당 태그를 단 게시물들은 트위터를 통해 빠르게 퍼지고 있다. 페북에 인수된 모바일메신저 왓츠앱 공동창업자 브라이언 액튼마저 해당 태그를 달고 "페북을 지울 시간"이라는 게시글을 달았다. "이용자들의 데이터로 장사에 나섰다"는 비난의 화살은 페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 CEO로 향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의회는 저커버그 CEO가 의회로 나와 직접 소명하라고 요구했다. 에이미 클로버샤 민주당 상원의원은 "미국인 5000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이라면 저커버그 CEO가 출석해 해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검찰도 페이스북이 주요 광고주인 CA의 불법을 알면서도 방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형남 웹발전연구소 대표(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는 "페북과 같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체계적인 데이터 관리와 보안 정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이번 사태와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며 "무단 정보 유출 관련 처벌을 강화하고, 포털 등 관련 업체들은 이번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유사 사고를 예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진욱 이해진 김은령 기자 [MT리포트] 데이터로 돈 벌기 위해 페이스북이 했던 위험한 실험들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 공짜인 줄 알았더니 팔리는 건 '나'였다 페이스북 수익의 원천은 이용자들의 데이터이다. 이용자 프로필과 좋아하는(싫어하는) 콘텐트를 분석해 뽑아낸 이용자 성향, 그리고 감정까지 분석해 광고주에 판매한다. 광고주는 이를 토대로 맞춤형 광고를 한다. 2017년 매출 406억달러(43조5000억원) 가운데 98%가 바로 광고매출이다. 한마디로 페이스북은 데이터를 자본으로 만든 거대한 데이터 공장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은 이용자들로부터 더 많은, 더 정교한 데이터를 뽑아낼수록 더 많은 돈을 번다. 이를 위해 페이스북은 2004년 창사 이래 수많은 실험을 해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표현에 따르면 이용자들이 "실험용 쥐"가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 대표적인 것이 2012년 심리조작 실험. 페이스북은 70여만명 이용자에게 의도적으로 우울한 내용의 콘텐트를 노출시킨 뒤 감정변화를 관찰했다. 이들 이용자의 타임라인은 순식간에 부정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페이스북이 이런 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2년 뒤인 2014년 밝혀졌는데 당시 거센 비판을 받았다. 페이스북은 "페이스북을 통해 감정이 전염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했지만 가디언은 "이용자들이 페이스북 실험실의 기니피그(실험용 동물)가 됐다"며 "이용자들의 감정까지 조작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페이스북이 이 실험결과를 토대로 2015년에 기존의 ‘좋아요’ 버튼 외에 ‘화나요’ ‘최고예요’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등 5개 감정 버튼을 추가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좋아요’만으로는 난민 문제, 가족의 죽음 등에 위로나 공감을 표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IT(정보기술) 매체들은 “특정 콘텐트나 광고에 대한 이용자의 감정 변화를 정교하게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인별 최적의 맞춤형 광고를 노출해 광고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리퍼블릭은 "감정 표현의 선택을 넓힌 것은 이용자들의 감정을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자본화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감정버튼과 함께 댓글 기능, 기념일에 추억앨범으로 만드는 기능 등도 이용자의 심리와 행동을 조작하기 위해 설계됐다는 내부자들의 폭로도 있다. 페이스북 공동창업자였던 숀 파커는 지난해 11월 인터넷매체 악시오스의 콘퍼런스에서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이나 댓글이 일종의 도파민 역할을 한다"면서 "나와 저커버그는 '어떻게 하면 이용자에게 도파민을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도파민은 짜릿한 쾌감을 주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이다. 그는 "이런 도파민과 같은, 페이스북의 여러 기능 때문에 이용자 참여도가 높아지고 더 많은 광고를 보게 된다. 이것이 페이스북 비즈니스 본질"이라고 말했다. 페이스북 전 부사장 차마트 팔리하피티야도 지난해 12월 스탠포드대경영대학원 강연에서 "인지를 못하겠지만 여러분 행동은 프로그래밍 되고 있다"며 "여러분이 얼마나 지적인지는 페이스북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의존하고 있는 소셜미디어를 중단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5000만명 개인정보가 트럼프 대통령 캠프의 여론조작에 악용된 이번 데이터 스캔들은 페이스북의 비즈니스모델인 데이터 장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CNN은 "이번 스캔들은 페이스북의 DNA(본질)가 걸린 문제“라고 경고했다. 이해진 기자 [MT리포트] 대선 스캔들에 33살 저커버그 '대통령 꿈' 좌초 위기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 지난해 '민생투어' 시작했지만 위기…샌드버그 부상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2004년 페이스북을 창업해 14년 만에 시가총액 5000억달러(약 535조원)의 '공룡'으로 키운 마크 저커버그. 올해 만 33세,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젊은이이자 차기 미국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그가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페이스북이 러시아의 여론조작 방조와 탈세 의혹, 개인정보 유출 등 갖가지 논란으로 흔들리면서 저커버그 리더십도 큰 상처를 입었다. 각종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최고경영자(CEO)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까지 제기됐다. ◇ '민생행보'까지 나섰던 저커버그… '대통령의 꿈'도 좌초 위기 페이스북 의결권의 60%가량을 보유한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주가가 오르면서 세계 5위의 부자가 됐다.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그의 목표는 '돈'에만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을 연결하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해왔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게 대권을 염두에 둔 그동안 그의 행보. 그는 지난해 초부터 미국의 모든 주를 돌고 있다. 이른바 '민생 투어'이다. 지역 경찰관을 만나 격려하고, 소도시 주민들과 함께 텃밭을 가꿨다. IT업체 CEO라기보다 정치인 같은 모습이었다. 저커버그가 정치적 야망을 내비치기 시작한 건 2015년 말부터다.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 주식의 99%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위해 아내 프리실라 챈과 자선재단 '챈-저커버그 이니셔티브'를 설립했다. 재단 운영자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선거 운동을 지휘한 데이비드 플루프를 영입하면서 저커버그의 정계 진출설이 불거졌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각종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저커버그의 꿈도 좌초 위기에 몰렸다. 특히 최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측이 고용한 영국 데이터 분석 회사 '캠브리지 애널리티카'에 50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면서 저커버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CNN은 "수치로 계량하기는 힘들지만 이번 사태로 저커버그의 정치적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면서 "그는 관계와 소통의 미래를 전하던 메신저에서 온라인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교훈 사례가 될 처지에 처했다"고 평가했다. ◇ 침묵하는 저커버그…CEO 교체 여론까지 제기 저커버그는 지난주 캠브리지 애널리티카 사태가 터진 이후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IT매체 더버지는 20일(현지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 최고운영책임자(COO)가 오는 23일 오후 1시 사내 질의응답 시간을 이용해 정보 유출 사태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실제로 저커버그가 입을 열지, 연다면 어떤 말을 할지는 모두 미지수다. 페이스북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저커버그와 셰릴이 가장 적절한 대응책 마련을 위해 쉴 틈 없이 일하고 있다"며 "회사 전체가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며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강조하기 급급했다. 일각에서는 저커버그가 CEO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제프리 소넨필드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저커버그 CEO를 "종신 황제"라고 부르며 "저커버그 대신 페이스북 이사인 전 아메리칸익스프레스 CEO 케네스 체놀트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인 어스킨 보울스가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 제이슨 칼라카니스도 "저커버그가 이번 위기에 끔찍할 정도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면서 "(회사를 이끌기에) 저커버그보다 샌드버그 COO가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유희석 기자 ☞읽어주는 MT리포트 [MT리포트] '인수와 베끼기'로 만든 SNS 왕국, 페이스북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 사진, 영상, 메신저 앞세운 경쟁자들의 도전 → 그때마다 인수, 베끼기 '전 세계를 서로 연결한다'(Connect the world)는 사명을 내건 페이스북의 시작은 사실 좀 거칠게 말하면 하버드대에서 예쁘고 잘생긴 대학생들의 점수를 매기던 '얼굴평가 사이트'였다. 같은 학교에 누가 다니는지, 누가 나랑 같은 수업을 듣는지 찾아보고 담벼락에 안부를 남기던 수준이었다. 그랬던 페이스북이 이제는 전 세계에서 매달 20억명 이상이 사용하는 글로벌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가 됐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경쟁 서비스의 도전이 있었지만 'SNS 왕국'을 건설하고 굳건히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인수 혹은 베끼기' 전략의 영향이 컸다. 페이스북의 품에 안기지 않으면 집요하리만치 똑같이 따라해 장점만 쏙 흡수해버리는 무차별 공격이다. # 1. 트위터에서 베껴온 해시태그(#)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던 페이스북이 일반인도 이메일만 있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개방한 건 2006년. 트위터가 서비스를 시작하던 때와 거의 비슷하다. 초기 두 SNS는 사이좋게 빠른 성장을 이어가며 '짝꿍 앱'이라고도 불렸다. 이미 아는 친구를 연결해주고 안부를 주고받는 페이스북과 낯선 사람과의 대화, 속보성 뉴스 공유에 최적화된 트위터는 서로 다른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곧 트위터를 넘보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최고경영자)는 트위터 공동 창업자인 비즈 스톤, 잭 도시 등을 만나 5억달러(약 5357억원)에 인수 제의를 했다. 몇 달 동안이나 이들을 설득하던 저커버그는 "트위터를 팔지 않으면 당신네 서비스를 복제(clone) 해버리겠다"는 공격적인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2013년 6월 페이스북은 트위터 주요 기능이던 해시태그(#)를 따라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트위터의 역할을 잠식해나갔다. 트위터의 성장세가 주춤해지기 시작한 시기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2014년 1월에는 트위터의 핵심 기능이던 트렌딩(trending) 기능을 고스란히 따왔다. 페이스북 내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주제를 키워드로 나열해 주는 기능이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페이스북 멘션' 앱을 선보이며 트위터를 정조준했다. 멘션은 유명인사가 대중들의 질문에 좀 더 쉽게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트위터 기능 중 하나였는데, 페이스북 역시 유명인사가 자신이 언급된 게시물을 모아 보면서 답변을 해줄 수 있도록 했다. # 2. 강력한 경쟁자 인스타그램·왓츠앱 인수 '셀피'(셀프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SNS의 트렌드도 글이 아닌 이미지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10년 출시한 사진 공유 앱으로 시작한 인스타그램은 아이폰 앱 출시 한 달 만에 사용자 수 100만명을 확보했다. 페이스북은 같은 수의 사용자를 모으는 데 10개월이 걸렸다. 물론 페이스북이 사진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플랫폼이었지만 PC(개인용 컴퓨터)를 기반으로 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시작부터 모바일 앱이었던 인스타그램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곧바로 공유하는 데 최적화돼 있었다. 일찌감치 위협을 감지한 저커버그는 2011년 인스타그램에 인수를 제의했다. 하지만 창업자 케빈 시스트롬은 회사를 매각하기보다 서비스 확장에 주력하겠다며 고사했다. 1년 뒤 저커버그는 더욱 공격적인 구애에 나섰다. 직접 전화를 걸어 시스트롬을 주말 동안 자신의 집에 초대한 뒤 속전속결로 M&A(인수합병) 계약에 사인을 해버렸다. 인수금액은 10억달러(약 1조원). 인스타그램은 당시 창업 2년도 채 되지 않고 직원이 13명뿐이었다. 매출도 한 푼 나오지 않았다. 페이스북이 이런 회사를 거액에 인수하자 당시 시장에서는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최근 소셜미디어 지형에서는 젊은 층이 나이 많은 세대가 주로 사용하는 페이스북을 피해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가는 추세가 뚜렷하다. 페이스북이 이용자를 빼앗아 갈 가장 강력한 적을 손에 넣은 셈이다. 2014년 모바일 매신저 '왓츠앱'을 190억달러(약 20조원)에 인수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분석이다. 왓츠앱은 10대부터 20·3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다. 젊은 층을 붙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페이스북이 왓츠앱 인수를 통해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10대 사용자층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 3. 인수 거절한 스냅챗 집요하게 베끼기 10초 후 내용이 '펑' 하고 사라지는 메신저로 유명한 스냅챗은 10대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들이 페이스북을 떠나 스냅챗으로 옮겨가는 경향은 해가 갈수록 가속화되고 있어서 페이스북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스냅챗이 창업 2년째이던 2013년 11월, 저커버그는 30억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창업자 에반 스피겔은 단칼에 거절했다. 퇴짜를 맞은 페이스북은 철저히 스냅챗 기능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2014년 6월 사진과 영상을 상대방이 읽으면 사라지는 '슬링샷'을, 2016년 8월에는 자회사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유한 사진과 비디오가 24시간 내 사라지는 '스토리' 기능을 출시했다. 지난해 2월에는 왓츠앱에도 사용자 상태 메시지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기능을 추가했다. 모두 스냅챗이 이미 출시했던 서비스와 똑같았다. 페이스북 메신저에 스냅챗 특유의 카메라 필터 기능을 추가하기도 했다. 움직이는 필터나 스티커를 추가할 수 있으며 사진이 24시간 안에 사라지는 게 특징인데 스냅챗 카메라와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스냅챗 창업 이후 페이스북이 모방한 기능만 총 11가지에 달한다. 나아가 스냅챗이 2016년 9월 웨어러블 선글라스 '스펙터클스'를 공개하며 자신을 '카메라 회사'로 정의하자 저커버그도 질세라 두 달 뒤 11월 페이스북에서 카메라의 역할을 강조하고 나섰다. 기능을 베끼다 못해 정체성마저 베끼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페이스북의 무자비한 공격에 스냅챗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인스타그램 스토리 일간 사용자 수가 먼저 2억명을 돌파하며 스냅챗의 1억6000만명을 넘어섰다. 배소진 기자 [MT리포트] '페북 마니아'에서 '안티 페북'으로 돌아선 내부자들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 공동창업자부터 초대 회장까지…"부정적기능 간과할 수 없다“ 페이스북 창업 공신들이 하나둘 페이스북을 등지며 '안티(anti) 페이스북' 세력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들은 최근 잇달아 페이스북 플랫폼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로저 맥나미 엘리베이션파트너스 공동창업자는 20일(현지시간) 미국 국영방송 NPR과의 인터뷰에서 "페이스북 사태는 (경영진이) 개인정보 보호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플랫폼에 위탁된 정보를 주의 깊게 다루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꼬집었다. 빌 게이츠의 조언자로도 알려진 그는 페이스북 초기 투자자다. 마크 저커버그 CEO(최고경영자)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도움을 준 인물이다. 저커버그의 '오른팔' 셰릴 샌드버그 COO(최고운영책임자)를 추천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2016년 미국 대선을 전후로 둘 사이는 멀어졌다. 맥나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당시 페이스북에 넘쳐나는 '안티 힐러리' 게시글을 본 뒤 저커버그와 샌드버그에게 "현재 페이스북의 알고리즘과 경영 모델로는 선량한 이용자의 개인정보가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페이스북은 플랫폼이지, 미디어 기업이 아니다. 제3자가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저커버그의 하버드대 룸메이트인 크리스 휴즈 페이스북 공동창업자도 이번 사태가 불거지기 직전인 지난 9일 미국 IT(정보기술) 전문매체 테크크런치와의 인터뷰에서 "페이스북은 때때로 정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중립적이지 않다"며 "(페이스북은) 거대 플랫폼으로서의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립적이지 않은 사례로 사용자들에게 원하는 게시글만 보이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과 러시아 정부가 페이스북 가짜 계정을 만들어 미국 대선에 개입한 의혹 등을 들었다. 페이스북 서비스의 중독성에 대해 우려를 표한 이들도 있다. 션 파커 페이스북 초대 회장은 지난해 11월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주최한 행사에서 "페이스북의 목표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생각을 플랫폼에 쏟아붓게 만드는가'였다"고 밝혔다. 그는 "바로 이 때문에 '좋아요' 같은 기능이 만들어졌다. 이용자들은 '좋아요'가 눌릴 때마다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이 분출되는 것을 느끼며 더 많은 콘텐트를 생산하게 된다"며 "이것이 우리 아이들의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신만이 안다"고 덧붙였다. 주목할 건 이들이 저커버그 등 특정 경영진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페이스북 플랫폼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회사 요직에서 멀어진 데 따른 보복성 발언으로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최근에는 페이스북 이외 다른 IT 회사들의 엔지니어들까지 나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지난달 4일 페이스북, 구글, 애플 등 실리콘밸리 주요 IT회사 전직 임직원들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 부작용 해결을 위한 단체인 '인도적 기술 센터'(Center for Humane Technology)를 설립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 부작용을 막기 위한 캠페인을 열고 거대 IT 기업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입법운동을 할 계획이다. 구유나 기자 ☞읽어주는 MT리포트 [MT리포트] 선거 개입, SNS 피로감, 가짜뉴스… 페북 떠나는 사람들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 악재 잇따른 페북… 전세계서 사용자 급감 세계 인구 4명 중 1명, 자그마치 21억명이 써오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이하 페북)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사용자 5000만명의 정보가 무단 활용된 정황이 드러나며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전세계 페북 사용자들은 '페북 탈퇴'(#deletefacebook)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페북에서 떠나고 있다. 국내에서도 '탈페북' 현상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개인정보 유출에 선거 개입 논란까지… 줄잇는 '#페북 탈퇴' 19일(현지시간) 영국방송 '채널4'는 데이터분석업체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CA)가 5000만명 넘는 페북 사용자들의 정보를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에 제공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유권자의 성향을 분석한 자료를 온라인 선거운동에 썼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페북 시가총액은 이날 하루에만 39조원 날아갔다. 미국 등 해외 페북 사용자들은 트위터 등 다른 SNS를 통해 '페북 탈퇴'(#deletefacebook) 해시태그를 공유하며 '탈페북'을 인증하고 있다. 이에 참여한 한 사용자는 "페북이 어느 지점에서 유용한지 모르겠다"면서 "페북이 보여주는 정보들이 싫다"고 탈퇴 이유를 밝혔다. IT 전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 말레이시아는 "페북 탈퇴는 트렌드"라면서 탈퇴하는 방법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SNS 피로감·선거 개입·가짜뉴스… 악재 잇따르는 페북 최근 사태가 더 부추긴 면은 있지만 페북 이탈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북미 페북의 일일 활성 사용자수(DAU)는 약 1억8400만명으로, 전분기(1억8500만명)보다 100만명 줄었다. 분기별 사용자수가 감소한 것은 페북 창사 이래 처음이다. 페북에 대한 싫증과 피로감이 사용자수 감소의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IT 전문매체 리코드는 "페북이 최근 몇년 간 젊은이들을 유인할 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만들지 못해 다른 대안들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국 시장조사기관 이마케터에 따르면 미국 페북 사용자 중 12~17세는 지난해 1년간 9.9% 감소했다. 이마케터는 "페북에서 이탈한 젊은층은 새로운 SNS인 인스타그램, 스냅챗 등에 유입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도 탈페북… "블루일베 떠난다" 지난해 국내 월 사용자가 1700만명이던 한국도 탈페북 현상을 보이고 있다. KT 디지털 미디어렙 나스미디어가 지난해 12월19일부터 지난 1월3일까지 SNS사용자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페북 사용률은 67.8%로 전년 동기(69.2%)보다 1.4%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인스타그램 사용률은 전년(36.4%) 대비 14.9%포인트 급등한 51.3%를 기록했다. 페북을 떠난 대다수 사용자들이 인스타그램으로 유입된 것으로 분석된다. 3년 전부터 페북을 안 쓴다는 직장인 한모씨(26)는 "광고가 너무 많고, 주변 친구들이 모두 인스타그램으로 떠나 재미가 없어졌다"며 "개인정보 노출 우려도 있다고 하니 곧 탈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페북은 '여성혐오' 이슈와도 맞물려 있다. 여혐 관련 게시물을 거르지 않아 '블루 일베'(파란색 로고+극우 성향 커뮤니티 일간베스트)라고도 불렸다. 직장인 김모씨(25)는 "페북에서 여혐 콘텐츠가 자주 유통돼 1년 전 페북을 탈퇴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페북이 한국에서 장기간 지배적인 SNS가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10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페북 메신저(페메)가 각광받고 있어서다. 페메는 '현재 활동 중인 친구'를 보여주고 단체 채팅방에서 어떤 사람이 메시지를 읽었는지를 알려준다. 시장조사업체 코리안클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페메 사용자는 519만3045명으로 네이버 라인(222만6100명)을 누르고 국내 2위 메신저 자리를 차지했다. 1위는 카톡 메신저(2931만1187명)다. 이재은 기자 [MT리포트] 통신사 손들어준 방통위…페북 과징금 제재 왜? ['좋아요'했던 페북의 배신]통신 사업자보다 힘 쎄진 플랫폼 규제 첫발 방송통신위원회의 페이스북 제재는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의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글로벌 사업자에 대한 불공정 행위 첫 제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울러 국내 인터넷 사업자들이 제기해왔던 해외 사업자들과의 규제 형평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손보겠다는 의지도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플랫폼 ‘공룡’ 규제 본격화되나=이번 방통위의 페북 과징금 제재는 무엇보다 해외 거대 플랫폼-통신 사업자간 분쟁 국면에서 정부가 통신 사업자의 손을 들어준 첫 사례다. 정부는 2012년 삼성 스마트TV 사용자들의 트래픽을 차단한 KT에 대해 제재를 내렸던 것처럼 정부는 플랫폼-통신 사업자간 분쟁 과정에서 매번 통신사업자들에게 불리한 정책적 판단을 내렸다. 통신 사업자의 시장 영향력이 훨씬 더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구도는 크게 달라졌다. 인터넷 포털·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동영상·앱마켓 등 플랫폼 사업자의 영향력이 통신 사업자를 추월하고 있어서다. 특히 유튜브, 페북 등 글로벌 사업자들은 전세계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망 중립성이 아닌 플랫폼 중립성 원칙이 제시된 이유다. 방통위 조사결과, 페북은 한국 통신사들과의 망 이용료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 임의로 국내 접속경로를 바꿔 해당 통신사 이용자들의 페북 서비스 접속을 지연시키거나 제한했다. 방통위는 국내 페이스북 접속자가 하루 1200만명에 달할 정도로 통신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데다 접속경로를 변경할 경우 발생할 문제점을 사전에 인지했음에도 페북이 10개월간 이를 방치했다며 이를 중대한 위반 행위로 판단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메꾸기 시작됐나=이번 페북 제재를 정부의 ‘기울어진 운동장 메꾸기’가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페북, 구글 등 해외 인터넷 사업자들이 국내 통신사들의 망을 이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비용과 세금을 물지 않아 국내 사업자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기울어진 운동장’론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가령, 네이버는 지난 2016년 734억원에 달하는 망 사용료를 국내 통신사에 지불했지만 구글과 페이스북은 이에 비해 턱없이 적은 비용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해외사업자들은 국내 매출을 따로 공개하지 않고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지난해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구글은 세금의 근거가 되는 국가별 매출은 공개하지 않는다”며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매출 규모를 밝히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매출을 밝히지 않는다”고 역차별 이슈를 공개 지적하기도 했다. 이같은 역차별 논란에 대해 방통위는 최근 구성된 인터넷 상생협의체에서 해외사업자 규제 집행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역차별 방지책 마련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해외 사업자에 대한 뚜렷한 규제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이번 과징금 제재 역시 페이스북이 국내에서 거두는 대규모 광고 매출에 비해 턱없이 적은 ‘솜방망이 처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국내 매출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관련 매출액 기준으로 과징금을 부과하기 어려워 정액 과징금(최대 8억원)을 부과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은령 기자 국제 > 국제경제 | 서진욱 기자, 이해진 기자, 김은령 기자, 유희석 기자, 배소진 기자, 이재은 기자, 구유나 기자   2018.03.22 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