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2017. 9. 22. 16:42경제/기본소득 이야기




[홍세화 칼럼]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

등록 :2017-07-27 18:31수정 :2017-07-28 19:54

크게 작게

홍세화

다른 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추구권 확장 가능성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동성결혼은커녕 시민결합 등 동성커플의 그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선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을 배제했다. 결국 ‘나중에’는 다시금 ‘나중에’로 남을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아무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리란 것이다.

아홉 사람 중 한 명은 왼손잡이라고 한다. 선택이 아닌 자연의 이치다. 다수인 오른손잡이가 ‘바른(=영어의 right, 프랑스어의 droite) 손’을 가진 사람일 때, 왼손잡이는 ‘틀린’ 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수와 소수의 관계가 서로 ‘다른’ 관계가 아닌 바름/틀림, 정상/비정상의 관계로 치환될 때, 다수는 다수에 속하는 것만으로 바르고 정상적인 자리에 설 수 있으므로 소수로 하여금 틀리고 비정상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도록 작용한다.

소수자를 어두운 곳에 밀어넣고 어둡다고 비난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사회 구성원은 이미 옳고/그름, 정상/비정상으로 자리매김되었으므로 자기성숙의 모색과 실천에서 멀어지게 된다. 선거민주주의 아래 정치는 ‘다수의 횡포’에서 자유롭기 어려운데, 과학과 인권법이 시민사회와 정치에 부단히 발언해야 하는 이유다.

두 손을 바른손과 왼손으로 구분한 인류사에서 소수에 속하기 때문에 차별과 배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사회에 따라 적게는 4%, 많게는 12%(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이 열려 있는 유럽에서 소개된 수치)까지 비율이 나오는 성소수자들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이라는 시민의 당연한 권리를 획득하기까지는 실로 지난하고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인권법의 진전과 과학의 발전이 시민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주어 이룬 변화다. 21세기는 성소수자들에게 해방의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아무리 부정해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며 이미 지구촌 곳곳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아일랜드는 가톨릭 전통이 강한 나라인데, 인도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오 버라드커가 서른여덟살에 중도우파 정권의 총리가 되었는데 그는 성소수자다. 앞서 말했듯이, 정치에는 과학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소수자들이 그렇게 태어난 존재임을, 그래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도 과학이 역할을 할 수 있다.(나로선 과학의 힘을 꼭 빌려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성애자인 나에게 동성애를 강요한다고 가정할 때 그 불가능성을 성소수자의 자리에서 역지사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튼 과학자의 압도적 다수(97%)가 진화론에 찬성하는데도 일반인의 21%만이 지지하는(대니얼 A. 벨의 <차이나 모델>) 미국도 2015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지난 5월24일 대만 헌법재판소는 동성간 결혼 금지를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함으로써 28살 청년 시절부터 59살이 되기까지 31년 동안 동성결혼권을 위해 싸워온 치자웨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만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대만 의회에 2년 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도록 민법 수정을 요구했고 만약 2년 내 수정하지 않을 경우 동성결혼을 유효로 하는 등재를 법원이 직접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치자웨이의 변호사는 “재판관들도 시대 분위기에 민감했으며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재판관들은 결정문에서 이 부당성에 관해 특히 강조했다”며 이 재판에 임한 헌법재판관들의 분위기를 전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권을 갖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법은 개인의 결혼권과 평등권을 옹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 동성결혼권은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다. 가장 앞선 톨레랑스의 나라답게 네덜란드가 가장 앞서 2001년에 동성결혼권을 법제화한 뒤 벨기에, 스페인, 캐나다, 프랑스 등이 뒤를 이었고, 신앙인들에게서 종교세를 걷는 독일도 지난 6월30일 유럽연합 국가로는 열두번째로 동성결혼권을 합법화했다. 독일 의회는 단 40분 만에 찬성 393표, 반대 226표로 동성결혼권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사민당, 녹색당, 좌파당이 당론에 따라 찬성표를 던졌고, 보수연합인 기민당-기사당은 자유표결에 따라 304명 중 7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 법안 의결과 관련하여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특출한 정치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법안 상정에 앞장선 그는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독일 헌법 조문을 빙자하여 반대표를 던졌는데 동성커플의 입양권에는 찬성한다는 모순된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 동성커플은 2001년부터 ‘삶의 동반’ 계약에 따라 ‘시민결합’권이 이미 있으므로 동성커플의 입양권에 찬성한다는 것은 동성결혼권에 찬성한다는 것과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이 시민결합 형태의 동거권에 머물지 않고 결혼권을 획득하여 아이를 기르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입양권을 갖기까지 “부-모-자식”의 가족구성을 통해서만 아이를 잘 기를 수 있다는 기존의 사회통념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에 관한 학자들의 결론은 명료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이 아니라 사랑을 받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이제 국내로 시선을 돌려보자. 나 같은 관심자의 눈에 띈 것은 문재인 정권의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2012년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 개신교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도 동성애, 동성혼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했던 김진표씨가 위원장으로 있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따르면, 그 이유가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내용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긴 2016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신년하례회에서 “남성 동성애자 간의 성접촉이 에이즈의 주 매개체”라고 주장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말했던 이혜훈씨가 자유한국당도 아닌, 합리적 보수를 표방한 ‘바른정당’의 대표로 있는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논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본디 소란스러운 것이며 사회적 갈등이 공론의 장에서 표출, 토론되고 조정되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차별을 금지하는 것, 이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아닌가.

남들은 차별을 넘어 다른 토론을 하고 있다. 가령 남성커플에게 자기(들)의 정자로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가질 권리를 갖게 할 것인가. 이때 프랑스처럼 대리모를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법화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이나 캐나다, 그리스, 미국의 몇몇 주처럼 대가나 보상을 전제로 쌍방 간에 자유롭게 계약한 경우 합법으로 인정할 것인가. 또 여성커플이나 독신여성에게 정자를 제공받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권리를 갖게 할 것인가. 이때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뿌리를 알고자 할 때 정자 제공자의 신분을 알려주어야 할 것인가. 또 점점 늦어지는 결혼 연령 등의 이유로 아이를 갖기 어렵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젊은 여성에게 미리 난자를 냉동 보관할 권리를 갖게 할 것인가. 또 이 모든 경우에 비용을 공공의료보험으로 충당할 것인가 등….

이처럼 다른 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추구권 확장 가능성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는데, 동성결혼은커녕 시민결합 등 동성커플의 그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에선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100대 국정과제에서 차별금지법을 배제했다. 결국 ‘나중에’는 다시금 ‘나중에’로 남을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그 나중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며 아무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으리란 것이다.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4596.html#csidx4d52a5fbfe9cccf844db75949c88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