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개헌 운동에 참여하자

2017. 9. 22. 16:40경제/기본소득 이야기





[홍세화 칼럼] 기본소득 개헌 운동에 참여하자

등록 :2017-09-21 18:17수정 :2017-09-21 20:22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는
 “모든 사람은 기본소득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를
개정 헌법의 최소요구안으로 정했다. 기본소득의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명시하려는 것이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지난 8월30일 광화문 광장에서 기본소득 개헌운동의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개정 헌법에 기본소득 조항을 넣기 위한 시민운동 주체로서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의 발족을 알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그냥 지나쳤다. 정치를 다만 통치와 행정으로 인식하는 언론한테 시민의 주체적 정치행위는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언론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촛불이라는 ‘사회정치적 기포’는 최고의 통치권자이며 행정 수반인 대통령을 뽑는 일정이 가시화되자 곧바로 잦아들었다. 정치는 통치와 행정으로 수렴되었고 촛불로 뜨거웠던 광장은 다시 시장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시민은 소비자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87년 6월 항쟁으로 획득한 참정권 확대 개헌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개헌 일정에서 시민의 자발적인 움직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국민의 처지가 개헌 발의조차 할 수 없는 현행 헌법 아래 청와대와 국회를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자유한국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가령 자유한국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쉽게 받아들일까? 어림없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절반 가까운 새누리당 의원이 찬성했던 것은 촛불의 힘 앞에 마지못해 택한 일로서 박근혜 탄핵은 실상 수동혁명적 성격이 강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주권, 지방분권을 위한 개헌은 충분히 공감대를 이루었다”고 말했지만, 정치공학적 싸움으로 시끄러울 지방선거 시기에 촛불에 버금가는 시민의 압력 없이 개헌이 가능할까? 더욱이 엄중한 북핵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터에 과연 어떤 개헌이 가능할까?

그런데 촛불 이후 이 땅에 상륙한 것은 시민혁명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한국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2016년 1월 다보스 경제포럼의 한 보고서에 처음 나온 ‘4차 산업혁명’은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2017년 2월 문재인 대선 후보의 연설문 ‘미래를 위한 담대한 도전, 4차 산업혁명’에 등장했다. 그사이에 삼성과 현대 등 재벌기업 경제연구소의 관련 보고서가 있었다는 건 우연에 지나지 않을까? 설령 4차 산업혁명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한 면밀하고도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데 장밋빛 전망만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4차 산업혁명은 차라리 조지 오웰이 <1984>에 그린 전체주의 세계를 전망케 하는 편이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과 3차원(3D) 프린터 등으로 표현되는 4차 산업혁명은 무엇보다 자본의 집중, 그에 따른 노동의 질적, 양적 실추를 가져올 것이다. 디지털 기반의 생산체계가 분리 쪽에서 융합 쪽으로 옮겨간다고 하지만, 융합은 집중의 다른 이름이다. 자동화, 정보화, 전산화가 확산되면서 마르크스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중요한 협상 요인으로 보았던 숙련노동이 기계와 컴퓨터,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는 지 오래다. 이미 줄어든 일반사무직과 제조업 기술자는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다.

한편, 기계나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기술은 소수에게만 허용될 수밖에 없는데, 생산 영역과 소비 영역 사이에 엄청난 비대칭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때 화려한 전망이 구가됐던 정보기술(IT) 정보화가 가져온 일자리는 택배기사와 텔레마케터 말고 무엇이 있을까? 그 반대편에 당대에 억만장자가 된 몇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서비스 노동자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면서 중산층이 붕괴되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한국에서 ‘괜찮은 일자리’는 이미 특권화되었다. 2012~13년 신입사원 518명 중 493명이 청탁자와 연결돼 있었다는 강원랜드를 ‘낙하산랜드’라고 규정하고 분노하지만 청탁할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공무원 시험이 높은 경쟁률을 보이는 것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반영한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반대한 전교조가 어떤 논리를 제시했든 그 배경에 ‘괜찮은 일자리’로서 교사의 특권적 지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노동 없는 미래? 이제 품 팔 데가 없는 존재들은 어떻게 생존하나? 국가인권위원회가 헌법 34조 “모든 인간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기본소득에 관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이라고 권고한 것은 인권 소관 국가기관으로선 최소한의 역할 수행이었다. ‘온국민기본소득운동본부’는 “모든 사람은 기본소득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를 개정 헌법의 최소요구안으로 정했다. 기본소득의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명시하려는 것이다.

구조적 대량 실업 상태에 빠진 남아프리카에서 노동 기반이 아닌 분배가 점점 더 그 역할을 확장한 방식을 고찰한 제임스 퍼거슨은 그의 저작 <분배정치의 시대>(원저명: 물고기를 줘라, Give a man a fish)에서 남아프리카의 한 노인에게서 들은 얘기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집에 대한 권리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집을 원합니다.” 우리 헌법 34조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권리’ 또한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퍼거슨은 “임금노동은 점점 생산과 소비, 자본과 ‘대중’을 연결하는 보편적인 전달수단으로 기능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전세계의 정권들은 도시든 농촌이든 자신의 생계가 농업과 임금노동 둘 다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새로운 인구를 끌어안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강조한다.

이미 시대적 소명을 마친 ‘완전고용-복지국가’의 기대에 갇혀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부보조금을 줄이거나 없애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정부보조금과 병존하는 ‘존재의 몫’으로서의 기본소득의 성격과 지속성을 고려하지 못한 탓이다. 빈곤 문제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에게 생존 필수품과 서비스의 결핍 상태가 ‘지속된다’는 점에 있다. 기본소득은 이 문제에 직접 ‘지속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송파 세 모녀에게, 곰팡내 나는 집에서 시들어가는 94만명의 아이들(<한겨레> 9월20일치 1면)과 그 가족에게 일인당 매달 30만원씩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는 것을 상상하자. 지금까지 매달 기본소득이 주어졌듯이 앞으로도 계속 지급된다고 상상하자. 벌금형을 선고받은 한국의 장발장들에게 수년 전부터 기본소득이 지급되었다고 상상하자. 그들 중에는 이미 생계형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물적 소유만을 지향하면서 인간성은 훼손되었고 인간관계는 그악스러워졌다. 불안은 인간 영혼을 잠식하는데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불안이기 때문이다. 그 불안 요인을 최대한 줄이자.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국내총생산 10%면 가능하다. 토지, 금융, 지식재산, 전파, 빅데이터 등 공유재로 논의를 진전시키지 않아도 현재 한국의 국민부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여서 기본소득 재원으로 10%를 더해도 오이시디 평균 수준이 될 뿐이다.

물론 상상에 멈춰선 안 된다. 참여하고 행동해야 한다. 광신자나 사익추구세력, 극단주의자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http://bit.ly/BasicincomeUP)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12020.html#csidx9e569da50d9c4779793a1676b524a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