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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와 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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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28)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입력 2015.10.13. 23:01


90년대 환경·여성 '신사회운동' 부상..전통 좌파 "개량주의" 비판

1987년 이후 민주화시대에 우리 사회를 이끈 힘의 하나는 사회운동이었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양대 축을 이뤘다.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여연(한국여성단체연합), 환경련(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의 대표주자였다면,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노동운동의 구심점을 이뤘다. 이런 사회운동이 진행된 곳이 곧 시민사회다.

시민사회란 국가·시장과 함께 사회를 이루는 세 주체이자 영역 가운데 하나다. 미국 정치학자 진 코헨과 사회학자 앤드루 아라토는 시민사회가 가족, 결사체, 사회운동, 공공 의사소통 형태로 이뤄져 있다고 봤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사회라면 먼저 시민단체인 자발적 결사체와 환경·여성·평화운동 등의 시민운동을 떠올린다. 시민사회와 시민운동 시대가 활짝 열린 시기는 1990년대였다. 당시 시민사회론이 각광을 받게 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대내적으로 1987년 6월항쟁 이후 노동운동과 통일운동 이외에 환경·여성·지역·문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됐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론을 거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신사회운동론에 이르는 다양한 시민사회론이 이러한 운동들의 이론적 기반으로 주목받았다. 둘째, 대외적으로 1980년대 후반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고,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극복하는 이론적 대안의 하나로 시민사회론이 부각됐다.

2002년 1월 삼성전자 주주총회장에서 당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을 맡았던 장하성 고려대 교수(왼쪽)가 삼성전자 이사와 감사 명단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1994년 출범한 참여연대는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며 주목받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민사회 논쟁의 이슈와 내용

시민사회 논쟁의 대표격은 1992년에 진행된 김세균(서울대 명예교수·정치학)과 강문구(경남대 교수·정치학)의 논쟁이다. 먼저 김세균이 ‘시민사회론의 이데올로기적 함의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시민사회론을 비판하자, 강문구는 ‘민주적 변혁운동 지반의 심화, 확장을 위하여’를 통해 그람시적 관점에서 반론을 펼쳤다. 이에 김세균이 ‘그람시를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로 재비판했고, 이어 강문구가 ‘변혁 지향 시민사회운동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일 전망’을 통해 재반론을 제시했다. 유팔무(한림대 교수·사회학)와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이 논쟁을 정리 <시민사회와 시민운동>(1995)을 펴냈다.

김세균의 주장은 시민사회론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함몰돼 가는 잘못을 범하기 쉬워 시민사회를 대신해 ‘민중사회’라는 말을 써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문구의 반론은 시민사회론을 개량주의로 파악하는 논리가 생산적이지 못하고, 변화된 현실에서 개혁 대 혁명의 이분법은 지양돼야 한다는 점에 맞춰진다. 논쟁을 정리하면서 유팔무는 시민사회를 계급투쟁·계급타협·비계급적 생활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영역으로 파악하고, 우리 현대사에서 시민사회가 ‘바깥에서 안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형성·발전돼 왔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시민사회 논쟁의 배경에는 6월항쟁 이후 시민운동의 부상이 놓여 있었다. 1989년에 등장한 경실련과 1993년에 창립된 환경련, 1994년에 출범한 참여연대는 각각 금융실명제 요구, 동강 살리기 운동, 소액주주운동 등을 펼쳐 큰 관심을 모았다. 조희연(서울시 교육감)이 주장했듯, 우리 민주화는 ‘사회운동으로서의 민주화’라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이런 시민운동의 부상은 시민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학계 안에서 논쟁의 초점을 이룬 것의 하나는 시민운동이 갖는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으로서의 성격을 둘러싼 것이었다. 신사회운동이란 1970~80년대 서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한 환경·평화·여성·문화운동 등의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지칭한다. 그것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불린 것은 전통적인 노동운동과 비교해 가치와 조직과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신사회운동은 무엇보다 자아실현과 인권증진,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가치를 지향했다. 우리 시민운동에 대한 전통 좌파적 접근은 대체적으로 개량적인 부르주아 사회운동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시재(가톨릭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우리 시민운동을 ‘시장 밖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신사회운동으로 파악했고, 김성국(부산대 명예교수·사회학)은 탈자본주의·탈산업주의·탈국가주의·탈중앙집권적 권위주의와 같은 서구 신사회운동 이념과의 동질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희연은 경실련·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종합적 시민운동’이 노동운동과 대립되는 점에서 신사회운동에 가깝지만 개발독재의 민주적 전환을 요구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구사회운동과 유사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와 더불어,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시민권력 과잉론’, ‘시민 없는 시민운동론’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기도 했다.

■논쟁의 평가와 전망

1990년대 후반 이후 시민사회론은 시민사회 내의 ‘사회적 자본’에 관한 논쟁, ‘온라인 시민사회’와 ‘지구 시민사회’의 등장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온라인 시민사회는 ‘오마이뉴스’ 등 온라인 매체의 등장에서 페이스북·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활성화에 이르기까지 공론장의 또 하나의 중심을 이뤘다. 오늘날 우리 시민사회는 오프라인 영역과 온라인 영역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고, 시민운동 역시 두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 진보적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보수적 시민운동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연대’를 비롯한 다양한 뉴라이트 시민단체들이 그들이었다. 뉴라이트 시민단체들이 등장하면서 보수적 시민운동 대 진보적 시민운동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고, 새로운 사회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두 운동 간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돌아보면 우리 시민사회는 국가·시장과 비교해 발전이 더뎠지만 민주화시대에 들어와 크게 성장했다. 1990년대 이후 시민단체의 폭발적 증가는 이러한 성장을 증거했다. 시민사회의 성장은 진보적 시민운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우리 시민운동은 자원봉사에서 준(準)정당적 역할에 이르기까지 정치·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갈등 구도에는 ‘보수 대 진보’ 못지않게 ‘국가 대 시민사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난 10여년 동안 ‘보수적 시민사회 대 진보적 시민사회’의 대립 구도가 등장했고 또 공고화됐다. ‘이중적 시민사회’라 부를 수 있는 이런 대립 구도는 우리 사회를 ‘두 국민(two nations)’ 사회로 나눠 왔고, 결국 치열한 사회갈등의 배경을 이뤄왔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사회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지나친 분열과 갈등의 과도한 비용 지불은 우리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에서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90년대 시민운동 대표 3인방…목사 서경석, 사회운동가 최열, 변호사 박원순 시민운동은 크게 ‘종합적 시민운동’과 ‘전문적 시민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종합적 시민운동을 대변했다면, 환경련과 여연은 전문적 시민운동을 대표했다. 경실련을 이끈 이가 서경석(현 나눔과기쁨 대표)이었다면, 환경련과 참여연대를 주도한 이는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과 박원순(현 서울시장)이었다.
서경석(왼쪽), 최열(가운데), 박원순
경실련의 금융실명제 요구, 환경련의 동강 살리기 운동,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세 사람은 1990년대 시민운동을 대표해온 인물들이었다.

특히 박원순과 최열은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통한 정치개혁을 모색함으로써 시민운동의 존재와 역할을 널리 알렸다. 낙천·낙선운동을 전후로 한 시기가 진보적 사회운동의 전성기였다. 미국에 랄프 네이더가, 독일에 페트라 켈리가 있었다면, 우리 사회에선 최열과 박원순이 있던 셈이었다. 이후 정치적 선택들은 달랐지만, 민주화 과정에서 시민운동가인 세 사람의 기여는 기억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세 사람의 직업이다. 서경석은 목사이고, 최열은 사회운동가이며, 박원순은 변호사다. 이런 사실은 시민운동 리더들이 종교계, 사회운동계, 법조계, 학계에서 주로 충원돼 왔음을 보여준다. 1988년 공추련(공해추방운동연합)과 1993년 환경련의 창립을 주도한 최열은 평생 환경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시민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학계에서 시민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조희연이다. 조희연은 진보적 시민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간의 적극적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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