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수도권이란 정점을 향해 모두가 소용돌이처럼 달려가고 똑같은 것을 욕망한다.
지방도 서울과 동등하게 존재할 수는 없을까?
‘또 다른 대한민국’인 지방사회는 수저와 출신지를 탓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열망하고 있다.
세종시 공무원들이 점심을 먹고 정부청사로 돌아가고 있다. 세종시는 자립형 도시로 점점 탈바꿈해나가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촛불집회에 다녀왔는데 뉴스에 광화문광장이 나오면 왠지 서운해요.”
무슨 말일까. 부산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토로한 내용이다.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백화점 앞 광장에서 매주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일수록 전국으로 송출되는 TV뉴스를 볼 때의 서운함과 허탈감이 크다고 권명아 동아대 교수가 전했다. 지역의 방송사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촛불집회를 적극적으로 보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한국에서 지방의 위상이다. ‘광화문광장’이 먼저 나온 다음에야 나오거나 ‘광화문광장’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방분권 공화국을 약속했다. 내년 개헌의 핵심은 지방분권이 될 것이라고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밝혔다. 혁신도시 사업도 대부분 1차 완공을 앞두고 있다. 지방은 서울과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촛불과 개헌 사이 전국 각지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봤다. 개헌의 핵심이 지방분권이라면 이들이 주인공이다.
5월 24일 오후 7시 땅거미가 완전히 깔리지는 않을 무렵, 경부선 조치원역에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원룸 주택가에 있는 치킨집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대학생이 대부분이나 간혹 넥타이를 매거나 정장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박성화씨(25)도 그 중의 하나였다. ‘충남’이란 지방은 타향이자 굴레였다. 인천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입학하면서 충남에 왔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다가 복학하니 원래 다니던 한국어문학과가 당연하다는 듯이 없어져 있었다. 원래 과를 복수전공으로 돌리고 농업경제학(환경자원경제학과)을 선택했다. 보통의 대학생처럼 취업준비를 위해 애썼다. 방학이면 인천의 집에 머물면서 서울의 토익 학원에 다니거나 유통 관련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시험도 준비했다. 2015년 충남도청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약 6개월간 하게 됐다.
굴레는 애정이, 애정은 기회가 됐다. 그는 지난 4월부터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아무래도 근처(세종시)에 공공기관이 있으니까 ‘이런 일자리에도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기회도 열려 있죠. 지역인재 추천도 있고, 기관이 여기 오면서 많이 관뒀다는데 지역 출신들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봤구요. 마음가짐도 달라지게 되더라구요. ‘내가 서울이 아닌 곳에 떨어져 있다’가 아니라, ‘내가 사는 곳에 이런 기관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막 애향심도 생겨나요.” 행정수도나 혁신도시로 서울에 있던 공공기관이 이전하면서, 서울의 사원들이 출·퇴근의 불편을 겪는다거나 반감이 높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에겐 희망이었다. ‘지리적 인접’은 그 자체로 정보였다. 그는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벌이가 좋았다고 만족해 했다. 이번 인턴근무는 오는 12월까지다.
박씨는 졸업하면 농산물 유통과 관련된 일을 할 생각이다. 제주의 한 감귤농장에서 악수한, 손이 거친 농민을 이야기하며 농민이 자신이 농민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천보다는 충남에 살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전 부모님이 인천에 산 덕을 많이 봤어요. 지방 친구들은 영어학원 다니면서 방값도 내야 하잖아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어학연수 이런 정보들이 훨씬 더 밝아요. 대학생에게는 지역도 ‘수저’ 같아요.”
지역이 ‘수저’라는 말에 많은 청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꿔 말하면 계층이다. 충남은 수도권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중앙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정책으로, 대학생 기자단을 운영하고 외지에서 온 학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던 지방정부의 노력으로, 그리고 박씨 개인의 관심사와 마음가짐으로 괜찮은 ‘수저’가 됐다. 아산 순천향대를 졸업한 노주엽씨(26)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는데 이 과는 충남에서 취업하기는 정말 힘들다”고 말했다. 노씨는 천안에서 공공기관의 미디어 제작 외주일을 하다가 올 하반기 입대할 예정이다. 전국 10개 혁신도시의 의의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2016년도 12월 기준으로 이전 대상 공공기관 115곳 중 105곳이 이전을 완료했다. 그러나 진주, 진천, 울산, 나주 할 것 없이 금요일이면 수도권으로 향하는 셔틀버스가 줄지어 있고 상가는 불이 꺼진다. 가족 동반 이주 비율은 평균 약 27%다. 그럼에도 지역의 청년들은 자신의 지역으로 옮겨온 공공기관에서 전에 못 보던 희망을 보았다. 좋은 일자리이기도 했고, 중앙의 결정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존감을 세웠다. ‘균형발전’을 넘고 싶은 ‘분권’의 욕망이다.
수도권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원치 않는 경제적 불이익을 가져다준다. 광주에서 웹디자인을 전공한 노혜정씨(30·가명)는 굳이 서울에서 직장을 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인구는 약 150만명. 1980년 5월의 아픔을 간직한 광주 금남로의 옛 전남도청 건물 뒤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전남대와 조선대도 근처에 있어 상업지구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활력이 넘친다. 이런 도시에서 어째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는가? “경력사원만 뽑았거든요. 경력을 쌓으려면 서울로 가야 했어요. 그나마 거기엔 신입사원도 뽑는 곳이 있으니까.”
주거비를 절약하기 위해 서울의 동쪽 끝자락인 지하철 5호선 마천역 인근에 살면서 3년을 일했지만 손에 쥐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버티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행히 이번에는 일을 구했다. 나주 혁신도시나 광주형 일자리사업은 노씨의 후배들에게 좀 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사람이 많아지면 파생되는 일자리도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대구 수성구의 학원가. 수성구는 서울 이외 지역 중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학생을 많이 보내기로 유명하며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높다. / 박은하 기자
“경신고에서 작년에 수능 만점자를 4명 냈다고 합니다.” 대구 수성구 시지신도시에 거주하는 유지원씨(52)는 가끔씩 개인택시를 운전한다. 수성구는 대구의 남동쪽에 있다. 구시가지인 중구에서 수성구로 넘어가는 범어동에는 대구지방법원과 검찰청이 있다. 대구MBC도 있다. 서울 강남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발해 일찍부터 부유층이 자리를 잡고, 대구의 교육 메카가 됐다. 대륜고, 정화여고, 경북고 등 명문고들이 즐비해 대구의 8학군이라 불린다. ‘서울대 합격’을 내건 학원가도 즐비하다. 2000년대 이후 부동산 붐이 불면서 롯데 캐슬, 두산 위브 등 초고층 아파트가 무더기로 지어졌고 여전히 지어지고 있다. 경산에 더 가까운 시지신도시는 그보다 서민적인 동네다. 다른 경북지역에서 온 주민들이 선호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유씨 역시 포항 출신이다. 범어동은 서울 대치동과 흡사했고, 시지신도시는 분당과 흡사했다. 수성구의 북쪽에 있는 동구의 신서 혁신도시와 칠곡에 시지와 똑 닮은 신도시들이 생겨 경북의 젊은층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유씨는 주로 구미의 전자제품 공장에 인력을 소개해주는 업체도 꾸리고 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부수입을 벌고 싶어하는 중년여성들이 주로 지원한다. 주3일 일할 때도 있고 80~100만원 사이를 번다. 그러나 최근엔 한 달에 한 건도 인력을 구해달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대구의 택시기사 중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요. 공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까, 택시를 모는 거예요. 나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택시를 몰아봤는데 벌이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혁신도시의 효과는 글쎄요. 대구 인근의 혁신도시에서 대구로 돈이 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지역인재를 채용한다고 하는데, 우수 인재를 뽑는다고 하면 대구사람만 뽑지는 않겠지요?”
유씨가 산자락에 위치한 대구미술관에 데려다 주었다. 대구시내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근대 도시골목으로 재탄생한 구도심과 아파트로 잘 정비된 신도시가 흡사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보는 것 같았다. 대구의 강남에서는 서울에 갈 준비를 하고, 서울의 강남에서는 외국에 갈 준비를 한다는 점만 다르다.
참여정부 시절 혁신도시는 획기적인 지방분권 개혁안으로 평가받은 동시에 전국에 부동산 투기붐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동구에 거주하는 사회복지사 박인규씨(43)는 “혁신도시 주민들이 대구에 정착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소수나마) 정착해서 자녀를 학교에라도 보내야 지역사회의 교육, 문화에 관심 갖지 않겠나”라면서도 “대구지역에 활력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 동별 투표율을 봤는데 혁신도시나 신도시 지역은 전국 평균과 투표성향이 비슷했습니다.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에요. 대구가 이번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40대들만 하더라도 논쟁하기 싫어 침묵했는데 이번에는 들고 일어나는 분위기였습니다. 비록 당장 서로 교류하지는 않더라도 젊은 인구가 오니까 정치성향이 바뀌고, 여론조사로 드러나고, 이것이 지역에 변화를 몰고온 것이죠.”
부정적 전망도 있다. 수성구가 대구 교육특구가 되듯이 혁신도시가 수도권에서 온 엘리트들의 특구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직원들의 지역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환경이 필수적인데 ‘그들만의 리그’에 해당하는 학교를 만드는 방식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구현할 수 있다. 천안의 북일고나 아산의 삼성고 등은 전국 단위로 모집하는 자립형 사립고다. 당장 수성구 초기 입주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대구의 명문고를 독점했다. 진주의 한 사립고교 교사는 “지방은 자사고 들어온 이후 완전히 교육이 망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들 자사고로 빠져나가고 전교에 5명 데리고 수업을 한다. 패배적 분위기가 짙다”고 말했다. 서울과 지방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문제적 DNA를 공유한다. 지방에 좀 더 파괴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지방을 보면 파괴의 문법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양극화다.
대구 수성구 대구시립미술관에서 바라본 대구 시내 전경 사진. 산 너머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동구의 신서 혁신도시이다. 한국가스공사 등이 이전해 있다. / 박은하 기자
대학뿐이 아니다. 교육부의 전교생 50명 이하 소규모 초·중·고 통·폐합 지침에 따르면 강원도에서는 45% 이상의 학교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초등학교는 절반인 220개가 사라진다. 지방교육청은 이에 맞서 ‘강원교육희망재단’을 지난 2월 출범시켰다. 강원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마을에 학교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이 아니니까 교육여건에 여러 가지 한계가 있지만 작은 학교들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실험이 있다. 그 실험을 간직하고 좋은 사례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권명아 교수는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도 중앙에 의한 지방의 주권침해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3년 부산은 영화와 해운 중심의 산업을 키울 것이라고 정부가 계획해 발표했음에도 블랙리스트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망가뜨렸습니다. 또한 대학 구조조정을 강요해 지방대 인문학은 당연하다는 듯 폐과되고, 학생들은 ‘지방대생이 무슨 인문학이냐’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서울 못간 내 잘못’이라는 자학으로 되돌아옵니다.”
모든 청년이 서울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공주대에서 문화재보존과학을 전공하는 김한슬씨(26)는 경주 출신이다. 그는 지방에 살면 가장 불리한 점으로 ‘기회’도 별로 없고 ‘시야’도 좁게 만든다는 점을 꼽았다. “주변에 일자리가 별로 없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모르고 잘 홍보도 안 해주는 거 같아요. 저도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다행히 관심사가 잘 맞았어요.” 김씨는 공주 혹은 경주에서 일자리를 잡을 생각이다. 굳이 대도시에 살고 싶지 않다.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고 소도시만의 장점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문화시설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화관광체육부는 해마다 지역별 예술활동 지수를 지표로 집계한다. 시각예술의 경우 부산이 서울 대비 절반 수준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차용수씨(32·가명)는 3년간 지방근무 뒤 기를 쓰고 탈출했다. 그는 “내가 근무했던 곳에 비하면 부산은 정말 문화적인 도시였다. 그곳은 술 없이는 시간을 보낼 줄 모른다”고 말했다. 산업단지만 있고 출판과 대학의 육성에 소홀한 결과 산업단지도 함께 무너져가고 있다. 다른 발전의 문법은 지역사회 스스로도 적지 않게 요구하고 있다. 마치 서면 촛불집회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대구에서는 시와 비영리단체(NPO)들이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를 지난 4월 출범시켰다.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공모해 에너지 자립이라는 공익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촛불대선’ 이후 한국 사회는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되돌아보게 됐다. 누구도 수저와 출신지를 탓하지 않을 세상은 ‘조명 받지 않았던 또 다른 대한민국’에서 열망하고 있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지방도 서울과 동등하게 존재할 수는 없을까?
‘또 다른 대한민국’인 지방사회는 수저와 출신지를 탓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열망하고 있다.
세종시 공무원들이 점심을 먹고 정부청사로 돌아가고 있다. 세종시는 자립형 도시로 점점 탈바꿈해나가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촛불집회에 다녀왔는데 뉴스에 광화문광장이 나오면 왠지 서운해요.”
무슨 말일까. 부산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토로한 내용이다.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백화점 앞 광장에서 매주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일수록 전국으로 송출되는 TV뉴스를 볼 때의 서운함과 허탈감이 크다고 권명아 동아대 교수가 전했다. 지역의 방송사들이 이해관계에 얽혀 촛불집회를 적극적으로 보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한국에서 지방의 위상이다. ‘광화문광장’이 먼저 나온 다음에야 나오거나 ‘광화문광장’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방분권 공화국을 약속했다. 내년 개헌의 핵심은 지방분권이 될 것이라고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밝혔다. 혁신도시 사업도 대부분 1차 완공을 앞두고 있다. 지방은 서울과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을까. 촛불과 개헌 사이 전국 각지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봤다. 개헌의 핵심이 지방분권이라면 이들이 주인공이다.
5월 24일 오후 7시 땅거미가 완전히 깔리지는 않을 무렵, 경부선 조치원역에서 약 5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원룸 주택가에 있는 치킨집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대학생이 대부분이나 간혹 넥타이를 매거나 정장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박성화씨(25)도 그 중의 하나였다. ‘충남’이란 지방은 타향이자 굴레였다. 인천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는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입학하면서 충남에 왔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다가 복학하니 원래 다니던 한국어문학과가 당연하다는 듯이 없어져 있었다. 원래 과를 복수전공으로 돌리고 농업경제학(환경자원경제학과)을 선택했다. 보통의 대학생처럼 취업준비를 위해 애썼다. 방학이면 인천의 집에 머물면서 서울의 토익 학원에 다니거나 유통 관련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시험도 준비했다. 2015년 충남도청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약 6개월간 하게 됐다.
지방으로 내려온 공공기관이 희망
“글 쓰는 연습을 학교에서보다 더 혹독하게 했어요. 마감을 앞두고 스트레스로 키보드에 이마를 찧을 정도로요. 로컬푸드 마켓처럼 제 전공과 연관된 현장도 많이 가보면서 재밌으니까 농업에 대한 관심도 생기구요. 무엇보다 도지사 앞에서 직접 발표를 했을 때 굉장히 떨렸어요. 무사히 발표한 이후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다음해 충남인재육성장학재단에서 장학금까지 받으니 충남이 막 내 고장이라는 생각마저 생기더라구요.” 굴레는 애정이, 애정은 기회가 됐다. 그는 지난 4월부터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했다. “아무래도 근처(세종시)에 공공기관이 있으니까 ‘이런 일자리에도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기회도 열려 있죠. 지역인재 추천도 있고, 기관이 여기 오면서 많이 관뒀다는데 지역 출신들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봤구요. 마음가짐도 달라지게 되더라구요. ‘내가 서울이 아닌 곳에 떨어져 있다’가 아니라, ‘내가 사는 곳에 이런 기관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막 애향심도 생겨나요.” 행정수도나 혁신도시로 서울에 있던 공공기관이 이전하면서, 서울의 사원들이 출·퇴근의 불편을 겪는다거나 반감이 높다는 소식은 그에게 큰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에겐 희망이었다. ‘지리적 인접’은 그 자체로 정보였다. 그는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공장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벌이가 좋았다고 만족해 했다. 이번 인턴근무는 오는 12월까지다.
박씨는 졸업하면 농산물 유통과 관련된 일을 할 생각이다. 제주의 한 감귤농장에서 악수한, 손이 거친 농민을 이야기하며 농민이 자신이 농민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천보다는 충남에 살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전 부모님이 인천에 산 덕을 많이 봤어요. 지방 친구들은 영어학원 다니면서 방값도 내야 하잖아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어학연수 이런 정보들이 훨씬 더 밝아요. 대학생에게는 지역도 ‘수저’ 같아요.”
지역이 ‘수저’라는 말에 많은 청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꿔 말하면 계층이다. 충남은 수도권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중앙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정책으로, 대학생 기자단을 운영하고 외지에서 온 학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던 지방정부의 노력으로, 그리고 박씨 개인의 관심사와 마음가짐으로 괜찮은 ‘수저’가 됐다. 아산 순천향대를 졸업한 노주엽씨(26)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는데 이 과는 충남에서 취업하기는 정말 힘들다”고 말했다. 노씨는 천안에서 공공기관의 미디어 제작 외주일을 하다가 올 하반기 입대할 예정이다. 전국 10개 혁신도시의 의의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2016년도 12월 기준으로 이전 대상 공공기관 115곳 중 105곳이 이전을 완료했다. 그러나 진주, 진천, 울산, 나주 할 것 없이 금요일이면 수도권으로 향하는 셔틀버스가 줄지어 있고 상가는 불이 꺼진다. 가족 동반 이주 비율은 평균 약 27%다. 그럼에도 지역의 청년들은 자신의 지역으로 옮겨온 공공기관에서 전에 못 보던 희망을 보았다. 좋은 일자리이기도 했고, 중앙의 결정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존감을 세웠다. ‘균형발전’을 넘고 싶은 ‘분권’의 욕망이다.
수도권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원치 않는 경제적 불이익을 가져다준다. 광주에서 웹디자인을 전공한 노혜정씨(30·가명)는 굳이 서울에서 직장을 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광주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인구는 약 150만명. 1980년 5월의 아픔을 간직한 광주 금남로의 옛 전남도청 건물 뒤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 전남대와 조선대도 근처에 있어 상업지구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활력이 넘친다. 이런 도시에서 어째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는가? “경력사원만 뽑았거든요. 경력을 쌓으려면 서울로 가야 했어요. 그나마 거기엔 신입사원도 뽑는 곳이 있으니까.”
주거비를 절약하기 위해 서울의 동쪽 끝자락인 지하철 5호선 마천역 인근에 살면서 3년을 일했지만 손에 쥐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버티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행히 이번에는 일을 구했다. 나주 혁신도시나 광주형 일자리사업은 노씨의 후배들에게 좀 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사람이 많아지면 파생되는 일자리도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서울 강남 닮아가는 대구 신도시
‘분권’의 전망이 전혀 와닿지 않는 경우가 있다. 부산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는 최승혁씨(29·가명)는 동남권을 강타한 조선업 구조조정의 영향을 받고 있다. 거제와 울산의 조선소에 일이 끊기면서 창원과 부산의 부품업체들도 함께 일이 끊겼고, 그들의 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해야 하는 최씨의 일도 끊겼다.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친구들도 연락이 잘 안 된다. 뉴스를 볼 시간도 없다. 월급 140만원이라도 언제 받아봤는지 아득하다. 서울에 가려고 해도 방세가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혁신도시나 기업도시의 신설이 딱히 그에게 희망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가혹한 구조조정은 벌어지지만 무언가를 배울 기회는 도무지 얻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의 직업교육원은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으며, 들어간 사람들도 ‘고졸’의 낙인을 벗기 위해 별도로 대학에 가는 경우가 많다. “결국 공부 열심히 안 해서 서울 못간 내 잘못이죠.” ‘공부 못했다’고 자학하는 그도 대학시절 등록금을 한 해 500만원씩 냈다. ‘수저’ 위에 ‘수저’가 있다. 지역이 ‘수저’인 이유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곳, 즉 서울이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대구 수성구의 학원가. 수성구는 서울 이외 지역 중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학생을 많이 보내기로 유명하며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높다. / 박은하 기자
“경신고에서 작년에 수능 만점자를 4명 냈다고 합니다.” 대구 수성구 시지신도시에 거주하는 유지원씨(52)는 가끔씩 개인택시를 운전한다. 수성구는 대구의 남동쪽에 있다. 구시가지인 중구에서 수성구로 넘어가는 범어동에는 대구지방법원과 검찰청이 있다. 대구MBC도 있다. 서울 강남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발해 일찍부터 부유층이 자리를 잡고, 대구의 교육 메카가 됐다. 대륜고, 정화여고, 경북고 등 명문고들이 즐비해 대구의 8학군이라 불린다. ‘서울대 합격’을 내건 학원가도 즐비하다. 2000년대 이후 부동산 붐이 불면서 롯데 캐슬, 두산 위브 등 초고층 아파트가 무더기로 지어졌고 여전히 지어지고 있다. 경산에 더 가까운 시지신도시는 그보다 서민적인 동네다. 다른 경북지역에서 온 주민들이 선호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유씨 역시 포항 출신이다. 범어동은 서울 대치동과 흡사했고, 시지신도시는 분당과 흡사했다. 수성구의 북쪽에 있는 동구의 신서 혁신도시와 칠곡에 시지와 똑 닮은 신도시들이 생겨 경북의 젊은층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유씨는 주로 구미의 전자제품 공장에 인력을 소개해주는 업체도 꾸리고 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부수입을 벌고 싶어하는 중년여성들이 주로 지원한다. 주3일 일할 때도 있고 80~100만원 사이를 번다. 그러나 최근엔 한 달에 한 건도 인력을 구해달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대구의 택시기사 중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요. 공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까, 택시를 모는 거예요. 나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택시를 몰아봤는데 벌이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혁신도시의 효과는 글쎄요. 대구 인근의 혁신도시에서 대구로 돈이 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지역인재를 채용한다고 하는데, 우수 인재를 뽑는다고 하면 대구사람만 뽑지는 않겠지요?”
유씨가 산자락에 위치한 대구미술관에 데려다 주었다. 대구시내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근대 도시골목으로 재탄생한 구도심과 아파트로 잘 정비된 신도시가 흡사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보는 것 같았다. 대구의 강남에서는 서울에 갈 준비를 하고, 서울의 강남에서는 외국에 갈 준비를 한다는 점만 다르다.
지방의 대도시는 서울의 복제품들
지방의 대도시는 한국형 성장방식의 DNA를 품은 서울의 복제품이다. 동구 혁신도시 인근에서 만난 조명호씨(70)는 “혁신도시는 아직 다 안 생겨서 모르겠다. 다들 일만 하다 주말에는 가버리고. 그렇지만 대구가 실업률 최고라는데 젊은 사람들이 취업할 데나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혁신도시는 획기적인 지방분권 개혁안으로 평가받은 동시에 전국에 부동산 투기붐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동구에 거주하는 사회복지사 박인규씨(43)는 “혁신도시 주민들이 대구에 정착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소수나마) 정착해서 자녀를 학교에라도 보내야 지역사회의 교육, 문화에 관심 갖지 않겠나”라면서도 “대구지역에 활력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 동별 투표율을 봤는데 혁신도시나 신도시 지역은 전국 평균과 투표성향이 비슷했습니다.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에요. 대구가 이번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40대들만 하더라도 논쟁하기 싫어 침묵했는데 이번에는 들고 일어나는 분위기였습니다. 비록 당장 서로 교류하지는 않더라도 젊은 인구가 오니까 정치성향이 바뀌고, 여론조사로 드러나고, 이것이 지역에 변화를 몰고온 것이죠.”
부정적 전망도 있다. 수성구가 대구 교육특구가 되듯이 혁신도시가 수도권에서 온 엘리트들의 특구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직원들의 지역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환경이 필수적인데 ‘그들만의 리그’에 해당하는 학교를 만드는 방식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구현할 수 있다. 천안의 북일고나 아산의 삼성고 등은 전국 단위로 모집하는 자립형 사립고다. 당장 수성구 초기 입주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대구의 명문고를 독점했다. 진주의 한 사립고교 교사는 “지방은 자사고 들어온 이후 완전히 교육이 망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들 자사고로 빠져나가고 전교에 5명 데리고 수업을 한다. 패배적 분위기가 짙다”고 말했다. 서울과 지방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문제적 DNA를 공유한다. 지방에 좀 더 파괴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지방을 보면 파괴의 문법이 더 분명하게 보인다. 양극화다.
대구 수성구 대구시립미술관에서 바라본 대구 시내 전경 사진. 산 너머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동구의 신서 혁신도시이다. 한국가스공사 등이 이전해 있다. / 박은하 기자
고향에 남은 청년 “문화생활 어렵다”
강현수 충남연구원장은 “중앙의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한 것으로 중앙정부는 정말 어려운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지역을 혁신도시를 품은 공동체로 융화시키는 것이고, 이것은 지방정부의 몫”이라고 말했다. 조형제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혁신도시나 지방 산업단지가 독자적인 연구개발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본사나 대학의 연구역량은 어쩔 수 없더라도 중소기업의 역량이라도 갖추면 다양한 층위의 인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 양극화를 막아낼 대안들이다. 핵심은 교육이다. 이수연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미끼로 한 대학 구조개혁은 서울의 대형 종합대학에만 유리하고 지방대를 고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 유치가 절실한 지역사회에 산업단지는 보내면서 학교는 없애는 역설이다. 대학뿐이 아니다. 교육부의 전교생 50명 이하 소규모 초·중·고 통·폐합 지침에 따르면 강원도에서는 45% 이상의 학교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초등학교는 절반인 220개가 사라진다. 지방교육청은 이에 맞서 ‘강원교육희망재단’을 지난 2월 출범시켰다. 강원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마을에 학교가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이 아니니까 교육여건에 여러 가지 한계가 있지만 작은 학교들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실험이 있다. 그 실험을 간직하고 좋은 사례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권명아 교수는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도 중앙에 의한 지방의 주권침해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3년 부산은 영화와 해운 중심의 산업을 키울 것이라고 정부가 계획해 발표했음에도 블랙리스트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망가뜨렸습니다. 또한 대학 구조조정을 강요해 지방대 인문학은 당연하다는 듯 폐과되고, 학생들은 ‘지방대생이 무슨 인문학이냐’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서울 못간 내 잘못’이라는 자학으로 되돌아옵니다.”
모든 청년이 서울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공주대에서 문화재보존과학을 전공하는 김한슬씨(26)는 경주 출신이다. 그는 지방에 살면 가장 불리한 점으로 ‘기회’도 별로 없고 ‘시야’도 좁게 만든다는 점을 꼽았다. “주변에 일자리가 별로 없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모르고 잘 홍보도 안 해주는 거 같아요. 저도 이런저런 고민을 했지만 다행히 관심사가 잘 맞았어요.” 김씨는 공주 혹은 경주에서 일자리를 잡을 생각이다. 굳이 대도시에 살고 싶지 않다. 번잡스러운 것을 싫어하고 소도시만의 장점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문화시설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화관광체육부는 해마다 지역별 예술활동 지수를 지표로 집계한다. 시각예술의 경우 부산이 서울 대비 절반 수준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차용수씨(32·가명)는 3년간 지방근무 뒤 기를 쓰고 탈출했다. 그는 “내가 근무했던 곳에 비하면 부산은 정말 문화적인 도시였다. 그곳은 술 없이는 시간을 보낼 줄 모른다”고 말했다. 산업단지만 있고 출판과 대학의 육성에 소홀한 결과 산업단지도 함께 무너져가고 있다. 다른 발전의 문법은 지역사회 스스로도 적지 않게 요구하고 있다. 마치 서면 촛불집회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대구에서는 시와 비영리단체(NPO)들이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를 지난 4월 출범시켰다.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공모해 에너지 자립이라는 공익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촛불대선’ 이후 한국 사회는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되돌아보게 됐다. 누구도 수저와 출신지를 탓하지 않을 세상은 ‘조명 받지 않았던 또 다른 대한민국’에서 열망하고 있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