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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콜라레 운동| 말씀과 묵상

문매당 | 조회 21 |추천 0 | 2004.06.19. 14:46

Chiara Lubich

포콜라레 운동 창설자, 현 회장

 

이 사업회가 이렇게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시간이 경과하면서, 여러 상황을




사업 회는 점차 우리 앞에 그 모습이

 

나타냈습니다

.

이 사업회의 구조까지도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하느님의 선물인

 

특은에 의해 더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

"

-끼아라 루빅-

 

1940년대 초, 끼아라 루빅은 20대 초반의 꿈 많은 처녀였습니다. 끼아라는 고향인 이태리 트렌트의 초등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베니스대학의 철학과를 등록을 했습니다. 그때는 2차 세계 대전 중이었으므로 폭력과 증오의 분위기가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도시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무너지지 않을 진리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이상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끼아라가 발견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은총으로 비추어 주셨고 그녀와 그녀 주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사랑은 너희들을 서로 하나되게 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온 인류를 한 가족으로 일치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점차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사업회의 초창기 이야기들 안에서 사업회가 발전해온 방향이 담겨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50년이 지나는 동안 매일의 생활 속에서 복음 말씀을 실천해온 경험으로부터 현재의 "일치의 영성"이 태어났으며, 영성적이며 사회적인 혁신운동인 포콜라레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생을 바칠 가치가 있는 이상


나는 23살이었고 나의 친구들은 동갑이거나 더 어렸었습니다. 우리는 이태리 트렌토에서 태어나 트렌토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아름다운 가정을 갖고자 전쟁에 간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친구는 그녀가 아끼는 집을 예쁘게 꾸미기에 바빴습니다. 한편 나는 철학공부를 통해서 이상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약혼자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다른 친구의 집은 폭격으로 무너졌습니다. 나는 전쟁으로 대학에 다닐 수 없게 되었으므로 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물었습니까?
폭탄도 무너뜨릴 수 없는, 우리의 일생을 값있게 보낼 수 있는 그런 이상은 없는가?
한순간 갑자기 빛이 왔습니다. 그렇다! 그런 이상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는 전쟁과 증오의 순간에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이 진정한 사랑이심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삶의 이상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작은 예수가 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와 믿음을 통하여 이미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밖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습니다. 보다 더 완전히, 또 하나의 예수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몫을 완전히 하자고 ...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진실하시다.

전쟁은 무자비하게도 쉬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심지어는 밤중에도 공습을 피해 방공호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공습사이렌이 울리면 즉시 뛰어가야 했으므로 작은 성경 한 권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방공호 속에서 우리는 성경을 펴 읽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지? 또 하나의 예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전에도 그렇게 여러 번 읽었던 말씀들이 모두 새롭게 보였습니다. 마치 빛이 우리 하나 하나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마음속으로부터 완전히 그렇게 살도록 강력하게 밀어줌을 느꼈습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하나에게 베푼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방공호에서 나왔을 때에는 하루종일 보잘것없는 형제를 찾아가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부상한 사람들, 어린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를 만나면 그들을 돕기 위해 이름과 주소를 적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가장 좋은 자리를 권하고는 식사를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결코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적지만 우리가 가진 것들을 모두 내주었고 그렇게 하였을 때 아주 많은 물건들이 우리 집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자루와 꾸러미들이 매일 매일 우리의 집을 채웠습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청했습니다. "가난한 형제 안에 계신 예수님 당신을 위해 42호 구두 한 켤레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체 앞에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리고 교회 문을 나왔을 때 한 부인이 42호 구두 한 켤레를 우리 앞에 내밀었습니다. "혹시 이것이 필요하지 않니?"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기를,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았고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복음의 약속은 항상 지켜졌습니다.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복음서의 모든 약속은 진실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적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방식의 삶

복음서의 모든 말씀이 우리들을 매료시켰으며 특히 사랑에 대한 말씀이 우리를 매료시켰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이 우리들의 것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항상 빛 속에서 살면서 누구든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만이 아니고 모든 이웃을,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는 동안 다른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경험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전쟁의 위험은 더 심해졌습니다. 폭탄은 우리들의 방공호 위에도 떨어졌습니다. 우리들은 젊은이들이었지만 항상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소망이 우리 마음 안에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그분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실 말씀을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일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는 지금 그 말씀을 알아내어 그것을 완전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 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는 즉시 둥글게 둘러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어있어" "나도 너를 위해서".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삶의 바탕 위에서 일과 공부, 기도와 휴식 등 모든 것을 했습니다. 서로간의 사랑은 우리들의 삶의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부족함이 없었고, 설사 그런 일이 생겨도, 우리는 다시 건설했습니다. 물론,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곧게 가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습니다. 항상 이렇게 살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해의 영적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사랑의 절정

우리는 점차로 이런 방식의 삶을 더 잘 해 나갈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의 척도로 서로를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나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고통을 느끼셨을 때가 십자가위에 못 박히시고 성부께로부터도 버림받음을 느끼셨을 때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가장 비참한 느낌 속에서 그분은 이렇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성부의 어떠한 도움도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큰 관대함으로 사랑을 계속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의 길을 우리도 함께 따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버림받으신 그분을 그분의 방식으로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그분의 고통의 절정에서의 외침 안에서 우리는 우리사이에 그리고 모든 이와 항상 가득한 일치를 이루는 열쇠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무서운 불일치를 경험하셨습니다, 무서운 분열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망설임 없이 그분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내어 맡기셨습니다. 그분은 즉시 그분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내어 주셨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의 모범을 따르고 그 분의 도우심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멈추게 할 불일치와 분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서로간의 사랑은 언제나 놀랄만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위하여 태어났다.

한 번은, 폭격을 피해 어두운 지하실에 모여 촛불을 켜고 복음서를 펼쳤습니다. 그 페이지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기도가 담긴 엄숙한 페이지였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그 말씀을 위하여 태어났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치를 위해, 이 세상에 그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기여하기 위해 우리가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이 새로운 계명을 생생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생겨났고 아주 세밀하게 그 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일치는 특별하며 예외적이고 신비한 현실, 즉 예수님 자신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 둘이나 셋이 내 이름(이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라는 뜻입니다)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일치가 있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기쁨, 빛 그리고 평화

예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들 안에 함께 살고 계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기쁨을 느꼈으며 새로운 평화와 열정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빛으로 밝혀지고 인도되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일치해 있었고 예수님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하셨으므로 우리 주변의 세상이 변화되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가 되면... 세상이 믿을 것이다"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되었고 그 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분이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다양한 성소들이 이 생활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든 곳에 일치를 건설하기 위해 동정으로 그들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했으므로 포콜라리노들의 본부가 생겨났고 어떤 이들은 결혼을 했지만 온전히 하느님께 헌신 하고자 했으며, 어떤 이들은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어떤 이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세상의 증오를 경험하였으나 또한 그 분이 우리가운데 더 강하게 현존해 계신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결코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으며 경제와 정치, 직업, 사회체제에 빛을 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주위의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므로 우리들은 점점 그 수가 늘어났습니다. 처음 두 달 동안에만도 각계 각층의 다양한 직업과 성소를 가진 남녀 노소의 사람들이 500명이나 모였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단지 복음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평신도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주교님께 우리들의 경험을 말씀드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주교님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라고 하신 그 분이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여기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습니다."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초창기 그룹이 큰 운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초창기 그룹이 뻗어나가 큰 운동이 되어갔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운동은 폭발하는 것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태리전역으로, 다음은 유럽으로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운동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퍼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급속한 성장이 계속되는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우리 사이에 강한 일치로 인해 우리가운데 현존하시는 예수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을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교황님과 주교님들, 즉 교회의 교계제도에 아주 밀접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안에 또한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련과 결실

해가 지나면서 이 영성은 한 운동으로서 점차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굉장한 빛의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나무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필요한 시련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결실이 있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일하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사시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곳곳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랑이, 모든 곳에, 지구 구석구석에 불처럼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모든 곳에 일치를 가져가기 원합니다. 종교계에 그리고 개인과 단체와 민족들 사이에 일치가 커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모두와 함께 가며 협력하고자 합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 안에 생겨난 여러 교단들과 우리시대를 특징 지워주는 연대 활동들의 새로운 운동, 협회 등의 단체들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과 우리 운동의 강한 형제애에 매료된 모든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과 협력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비결은?

우리의 비결은 초창기부터 우리의 삶을 큰 이상, 가장 큰 이상이신 하느님께 둔 것입니다.
우리의 비결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그분의 뜻에 우리자신을 매순간 맡겨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자신의 뜻을 하고, 우리자신의 계획대로 했다면, 오늘날 이 모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 각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신성한 모험에 맡겨 드렸던 것입니다.

 

관련

    

함께하는 기도, 일치의 기도 - 떼제공동체와 포콜라레 운동| ...말씀의 향기

사랑에니 | 조회 63 |추천 0 | 2005.03.28. 10:04

함께하는 기도, 일치의 기도
 

-화해와 일치의 표징 '떼제공동체'

만남의 기쁨은 평화로 영글고


「만남」 그 자체가 바로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만남의 기쁨은 자연스러운 대화로 이어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평화가 열매 맺는다.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한국 떼제공동체에서는 매주 금요일이면 알음알음 모여든 십여명의 젊은이들과 수사들이 저녁기도를 바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종교, 나이, 직업, 생활환경 등 모든 것이 다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이들도 함께 있다. 「종교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기도한다.


기도는 침묵과 성서말씀, 떼제기도라고 불리는 단순하게 반복되는 성가로 진행된다. 비신자들도 거부감없이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다.
떼제공동체 수도자들의 생활 모습은 「화해와 일치」의 표징으로 일컬어진다.


『그리스도인들끼리 갈라져 있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떼제공동체 창설자인 로제 수사는 제2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러한 고심을 시작했다. 이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와 화해, 신뢰를 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 프랑스 동부 떼제에서 초교파적인 공동체를 일궜다.


이 국제수도회에는 현재 30여개국 출신 100명의 수사들이 생활하고 있다. 개신교, 동방정교회, 성공회 등 출신종교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공동목표는 「신뢰와 평화」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를 나누고,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직접 나아가 돕는다.


화곡동 떼제공동체는 프랑스 떼제공동체의 한국 분원격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출신 수사 4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누구나 지극한 환영을 받는다. 일치주간을 앞두고 기자가 찾은 날에는 마침 「종교간 화해」를 화두로 이야기가 나눠졌다.


『함께 기도하면서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각 본당에서는 일치주간이 무엇인지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일반신자들은 여전히 개신교에 대해 거부반응부터 보이죠. 지역사회 안에서도 여러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길 기대합니다』


이날 모임에 함께한 안재선(안토니) 수사는 『그리스도께서는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교의 삶」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며 『사람들이 일치하지 못하는 것은 「대화」를 원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믿으라」고만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떼제공동체 수사들은 떼제를 찾는 이들에게 그들의 삶을 강요하지 않는다. 떼제 이름으로 그룹을 만들고 떼제 기도나 노래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것도 특별히 원치 않는다. 또다른 분파나 권력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단지 부활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살며 기도를 통해 서로 만나 대화하고, 화해와 평화가 널리 퍼지길 기대한다. ※떼제기도 및 모임문의=(02)2606-7079


-교회일치 노력 '포콜라레 운동'


종교넘어 있는 그대로 사랑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서로 사랑하라고 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산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 앞서」라는 말은 예배나 미사에 가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서로간의 사랑이 먼저 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할 때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가 있는 곳에 나머지는 저절로 오게 마련입니다』(끼아라 루빅).


마리아의 사업회(포콜라레 운동)는 창시자 끼아라 루빅이 강조한 바대로 자신들이 펼치는 교회일치 운동을 「삶의 대화」로 여긴다.


『모든 이가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 21) 말씀을 목표를 지니고 있는 이들은 그 가르침대로 만나는 이들과의 일치를 생활화하고 또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그런 면에서 회원 각자가 처한 사회 환경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교파나 종교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노력한다.


1960년대 루터교 신자와의 교류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다양한 교파 안에 번지게된 이들의 교회일치 운동은 복음에 따른 「생활 말씀」을 각자의 환경에서 어떻게 실천하였는지 그 경험을 나누는 삶이 특별히 개신교 신자들에게 충격을 주며 관심을 끌었다.


지난 1997년 4월 이태리 로마 카스텔간돌포 마리아뽈리 센터에서 열린 일치 모임의 경우 전세계 56개국에서 70개 교파 1200여명의 크리스찬들이 자리를 함께 했으며 이 자리를 통해 수십개 교파의 크리스찬들이 한 믿음 안의 형제애 경험을 나누고 초대 교회의 정신을 체험했다.


한국은 1969년 포콜라레 운동이 시작된 초창기부터 교회 일치운동이 병행됐으나 일치 모임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매년 일치기도주간을 맞아 회원들이 기도회에 참석한 것도 중요 활동 중 하나였다.


포콜라레 운동의 「일치의 대화」는 삶의 대화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면이 특징적이다. 행사 차원의 모임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랑으로 다른 교파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며 모든 이를 포용하게 한다는 입장에서다.


삶 속에서 이룬 사랑의 결실들은 그간 많은 개신교 신자들로 하여금 가톨릭 형제의 사랑을 믿게 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서울 모 종합병원 수간호사로 일하던 한 회원은 20년 가까이 자신을 적대시하던 개신교 동료를 한결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모임으로 이끌었고 그 자녀들까지 포콜라레 운동에 함께 하도록 만들었다.


포콜라레 운동 한 관계자는 『일치운동은 그리스도안에서 참으로 한 형제 자매임을 재발견하는 것』이라면서 『일치는 거룩한 것으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우리 각자는 단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 를 실천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말

▶떼제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와 화해, 신뢰를 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 프랑스 떼제에 설립된 초교파적인 공동체로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직접 나아가 돕는 활동을 한다. 사진은 서울 화곡동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는 떼제공동체 기도모임.


▶포콜라레(마리아 사업회) 운동은 「모든 이가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 21)란 말씀의 가르침대로 종교에 관계없이 삶 속에서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일치 운동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2일 서울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대강당에서 「누구를 찾느냐」를 주제로 열린 「슈퍼 3젠 대회(Supercongress Gen3)」.

 

 



떼제 공동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떼제 유럽 모임

떼제 공동체(The Taizé Community)는 프랑스부르고뉴 지방 남부의 손 에 로와르(Saône-et-Loire)에 있는 떼제(Taizé)에 위치한, 1940년 프랑스 개신교 수도자인 로제 수사에 의해 창설된 에큐메니컬 성격의 기독교 수도회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소개되어 가톨릭에 의해 운영되는 수도원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있으나, 창시자 로제 수사는 개신교인으로 가톨릭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 단체이다. 현재 공동체에는 25개국 출신의 남성 수도자들이 모여 기도와 묵상을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매주 프랑스 떼제에서 열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기도 모임은 전 세계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가 방문하여 참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떼제 공동체의 기도 모임에서 사용되는 기도 양식은 "키리에, 엘레이손(자비송)"처럼 짧고 간단한 가사가 붙인 곡을 반복하여 부르는 단순한 방식인데, 이는 예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그리스도인은 단순하게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로제 수사의 신학에 뿌리를 둔 전통으로 보인다. 떼제 현지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이를 활용한 예배 모임이 열리고 있다. 창시자인 로제 수사가 2005년 8월에 30대 여성에 의해 피살된 이후[1], 현재는 로마 가톨릭 수도자인 알로이스 수사가 원장을 맡고 있다.



공동체의 탄생 배경[편집]

개신교 수도자인 로제 수사는 그리스도인의 분열을 치유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통해 인류의 갈등을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면서 떼제 공동체를 시작했다. 1940년 8월, 스물 다섯 살의 청년 로제는 동부 프랑스의 작은 마을 떼제에 홀로 와서 정착했다. 당대의 고난 한복판에서 매일 매일 화해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우선 피난민, 특히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서 온 유대인들을 숨겨 주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독일군 포로들을 맞이했다. 그 뒤 차츰 다른 형제들이 동참하여, 1949년 이들은 공동체 생활과 독신,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자신들의 일생을 하느님께 드릴 것을 서약했다. 첫 수사들은 다양한 개신교회 출신이었지만 오래지 않아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도 입회했다. 오늘날 떼제공동체 형제들의 출신은 25개국 이상이며 모든 대륙을 망라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의 가난한 지역에 형제들의 작은 우애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한편 1962년부터 떼제의 형제들은 소리없이 동유럽을 방문하거나 준비된 젊은이들을 파견해서 고립된 이들과의 접촉과 나눔을 쉬지 않았다. 떼제의 형제들은 어떤 기부나 선물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일해서 번 정당한 수입으로 생활한다. 가족의 상속을 받게 될 경우 자신이나 공동체를 위해서 쓰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로 돌린다.

떼제와 젊은이[편집]

1957-1958년 이래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청년들이 떼제를 찾아오고 있다. 일요일부터 다음 일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연중 계속 열리는 젊은이 모임에는 매주 유른 대륙 35-70개국으로부터 참가자들이 모이는데 어떤 주간에는 그 수가 6천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하루 세 차례, 공동체의 수사들과 함께 ’화해의 교회’(1962년 건립, 1992년 증축)에서 공동기도를 드린다. 그동안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떼제의 언덕을 다녀갔다. 이들은 모임 동안 신앙의 원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일상 안에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여러 해 전부터 로마 가톨릭 국제 공동체인 성 안드레아 수녀회가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책임을 일부 나누어 맡고 있는데 최근에는 폴란드우술라 수녀회도 거든다.

떼제와 한국[편집]

60년대부터 유럽에 머물고 있던 한국인 성직자와 유학생들이 떼제를 찾았으며, 70-80년대에는 개인적으로 방문한 사람들과 서적을 통해 한국에도 차츰 알려졌다. 90년대부터는 한국에서 직접 떼제를 찾아오는 사람도 부쩍 늘었고 이제는 거의 매주 한국 순례자들이 떼제를 찾아 온다. 한편 1979년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떼제공동체의 형제들이 한국에 파견되어 현재 네 명의 수사들이 서울 화곡동에서 살고 있다. 현재 한국의 떼제공동체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 서울 화곡동 떼제 공동체에서 묵상 기도 모임을 열고 있다.[2] 떼제공동체는 로마 가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개신교 신학자인 서울신학대학교 이신건 교수(조직신학)은 기독교 사상에 로제 수사의 사상에 대한 글을 번역하여 기고하였다.



포콜라레 정신으로 정치 10년여야 없는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강한 기자  |  fertix@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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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16  08: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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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참가자들이 모여 한국에서 이 운동이 10년 넘게 이어진 것을 축하하고 형제애에 따르는 정치 활동을 다짐했다.

3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10주년 기념행사에는 전, 현직 국회의원과 포콜라레 회원, 청년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은 2004년 시작돼 지난해가 10주년이었지만, 이탈리아 정치인들과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키아라 루빅의 기일을 맞아 올해에 열렸다. 키아라 루빅(1920–2008)은 평화와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운동 단체인 포콜라레(마리아 사업회)의 창설자다.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한국본부 주신경 대표는 “외국에서는 포콜라레 영성을 살아온 정치인들이 이 운동을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분이 안 계셨고, 포콜라레 회원인 시민들이 정치인들을 찾아가고 초대해 이 운동을 알린 것이 시작이었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주 대표는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이 구체화된 것이 정치포럼과 사회포럼, 정치학교라면서, 포콜라레 회원이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현역 의원들은 18대 국회(2008-2012)부터 국회의원연구단체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으로 등록해 활동하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 41명이 회원이다.

  
▲ 3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10주년 기념행사'. 정치학교 수료생들이 발표하고 있다.ⓒ강한 기자

정치포럼은 2010년부터 정치언어 순화 캠페인을 벌이며 모범이 되는 의원들을 선정해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을 줬다. 같은 해부터 젊은이들을 위한 정치학교도 운영해 올해 6기째를 맞는다. 전직 국회의원들과 시민사회 각계 전문가들도 ‘일치를 위한 사회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이 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이날 기념행사는 한국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경과 보고와 축하 연주, 정치학교 수료생 젊은이들의 발표로 이뤄졌다.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곤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인사말에서 지난 몇 년간 국회에서 주먹다짐이 사라졌고, 다른 당 대표 연설에 박수를 치는 관행도 생겼다며 이러한 변화에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이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정말 감사해야 할 대상은 ‘일치의 영성’”이라면서 이 영성을 더 많은 정치인이 깨닫고 실천해 한국 정치가 온 국민에게 희망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치포럼 공동대표 길정우 의원(새누리당)은 이탈리아에서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은 가톨릭 신자 정치인들의 운동인 데 비해, 한국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길 의원은 서울과 대구에 이어 올해부터는 전라도에서도 정치학교를 열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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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경제’, 한국에서 가능할까국회 일치포럼, 성심당 등 EoC 소개

강한 기자  |  fertix@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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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3  15: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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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이 공유의 경제(EoC, Economy of Communion)를 소개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5월 20일 국회에서 ‘EoC,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을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는 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이탈리아 룸사 대학)가 참석해 발표했다.

EoC는 포콜라레 운동 창설자 키아라 루빅(1920-2008)이 제안한 기업 경영 방식으로, 경제 전반에 인간다움, 나눔, 친교 같은 요소를 들여오려는 관점이다. 키아라 루빅은 1991년 브라질 상파울루를 방문하며 극심한 빈부격차를 체험한 뒤 EoC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한국 포콜라레 운동에서 EoC를 ‘공유의 경제’, ‘공유경제’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똑같이 우리말 ‘공유경제’로 번역된 sharing economy와 EoC는 다른 개념이다. 이날 강연회에서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 공동대표 김성곤 의원은 EoC의 한국어 표현으로 ‘모두를 위한 경제’가 최선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브루니 교수는 키아라 루빅의 요청으로 1998년부터 EoC 연구자로 활동했다. 전세계에서 EoC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기업은 2014년 통계로 810여 개다. 브루니 교수는 필리핀의 카바얀 은행, 이탈리아의 소액 대출 은행인 MECC, 사회적 협동조합 그룹인 타사노를 EoC 기업의 예로 들었다. 문병기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EoC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체의 수는 13개뿐이고 개념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 5월 20일 국회에서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가 'EoC,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모델'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

이날 강연회에서는 한국의 대표적 EoC 기업으로 대전에 있는 빵집 성심당이 소개됐다. 성심당 김미진 이사는 성심당에서는 EoC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7가지 색으로 분류한 ‘무지개 프로젝트’를 회사 지침으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고 밝혔다. 예컨대 ‘올바른 경제 활동’을 상징하는 빨강색에는 81개 시설에 빵 나눔, 회사와 직원 개인 차원의 기부, 봉사 활동, 투명한 회계 관리와 납세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한국의 사회적 경제와 EoC’를 주제로 발표한 문병기 방송통신대 교수는 “EoC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나눔과 무상성, 그리고 상호성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문 교수는 “인간이 서로 만나고 교감하는 삶이 시장경제 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기업가와 노동자, 경영자와 중간관리자, 생산자와 소비자, 경제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및 일반 시민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참여하게 하고, 또 다 함께 이상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EoC라고 덧붙였다.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는 유엔 세계행복보고서를 인용해 “최근 자료를 보면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58위였는데 GDP는 13위”라며 “소득이 반드시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타깝게 확인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행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 소득만이 아닌 다른 많은 요소가 작동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여기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제기된다”고 강조했다.

브루니 교수는 “키아라 루빅이 EoC를 처음 시작하던 때 기업가들을 불러 모으고 부탁했다”며 “기업가에게 새로운 사명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가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고 자본주의는 더 피폐하게 된다는 것이 키아라 루빅의 생각이었다.

  
▲ 5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와 김미진 성심당 이사가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


브루니 교수에 따르면 도박 사업이 너무 번창해 특히 가난한 이들의 도박 문제가 심각했던 이탈리아에서 EoC에 참여하는 많은 기업과 시민이 도박 기계를 없애는 주점에 상을 주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는 텔레비전 도박 광고 금지로 이어졌다며 성공적 활동 사례로 소개했다. 또 EoC의 활동으로는 빈곤층 지원, 문화 사업, 새로운 기업들을 위한 보호 육성 프로그램이 있다.

브루니 교수는 “오늘날 기업에게 요구되는 것은 ‘파이’를 만들면서 동시에 나눠주기도 잘 하는 것”이라며 “생산하고 나서 다음에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동시에 나눠주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범한 시민이며 소비자인 우리도 소비활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더 넓힐 수 있고, 나쁜 기업의 제품은 사지 않고 불매운동을 하며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브루니 교수는 “투표를 하듯 우리가 어떤 상품을 사느냐는 그 기업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강연회에는 300여 명이 참석해 발표자들과 의견을 나눴다.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와 주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도 참석해 발표를 들었다.

행사를 주관한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은 국회의원 연구단체로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국제 네트워크에 속해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4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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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라 루빅 시복 운동 시작포콜라레 운동 창시자, 젠도 시작

편집국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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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1.27  12: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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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톨릭교회의 종교간 대화와 평화운동, 평신도 운동에 큰 기여를 한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 키아라 루빅의 시복 청원이 시작됐다.

시복운동 시작 기념행사가 1월 27일 포콜라레 국제본부가 있는 이탈리아 프라카티에 있는 프라카티 대성당에서 열렸다. 프라카티 대성당에는 키아라 루빅의 묘도 있다. 포콜라레운동의 마리아 보체 회장은 “키아라 루빅이 주창하고 실천했던 집단적 성스러움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되라고 회원들에게 촉구했다.

  
▲ 키아라 루빅.(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키아라 루빅은 1920년 1월 22일에 이탈리아 트리엔트에서 태어났으며 2008년 3월 14일에 죽었다.

포콜라레 운동은 일치와 대화, 관계를 강조하며 현재 182개 나라에서 활동한다. 포콜라레 운동은 2차대전 중에 폭격을 맞고 있던 트리엔트에서 1943년에 과외로 학비를 벌며 공부하던 대학생 키아라 루빅이 강한 종교 체험을 겪으며 시작됐고, 모든 이들의 복음적 일치와 평화, 형제애를 추구했다. 가톨릭 단체이지만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나 타 종교와도 연계가 강하고 회원 중에 비종교인도 적지 않다. 키아라 루빅은 청년운동인 “젠”(Gen)도 창립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실비아인데 1943년 12월 7일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동반자인 성녀 클라라를 존경하는 뜻에서 이름을 키아라로 바꿨고, 이날이 포콜라레 운동의 창립일로 간주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 시절에 직장을 잃었고 그 시절 그녀의 가족은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포콜라레(Focolare)는 “(집안) 난로”라는 뜻이며, 이 운동은 “마리아사업회”로 불리기도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노래로 이루는 평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강한 기자  |  fertix@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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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08  17: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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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소도시 로피아노가 뿌리인 여성 음악 그룹 ‘젠 베르데’의 단원으로 거의 40년을 지낸 한국인이 있다.

2013년을 끝으로 현역 단원에서 은퇴한 민순신 씨(마리아 레지나, 62)다. 로피아노로 떠난 것이 스무 살이던 1973년, 민순신 씨는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젠 베르데의 한 사람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음악과 춤으로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나누고자 했다. 이제 젠 베르데의 ‘무대’에서는 은퇴했지만, 독신이지만 공동체 생활을 하는 ‘포콜라리나’로서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민 씨는 자신처럼 결혼하지 않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포콜라레 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는 여성 ‘포콜라리나’와 남성 ‘포콜라리노’는 한국에서 모두 합쳐 60여 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민순신 씨. ⓒ강한 기자

40여 년 동안 젠 베르데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 듣고자 포콜라레 한국 본부(여성)가 있는 서울 신당동에서 민 씨를 만났다. 그는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어가 조금 서투르다면서 기자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미리 적어 왔지만, 1시간 30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동안 직접 노래 한 소절이나 노랫말을 들려주고, 때로는 박수를 쳐 가며 경험담을 쏟아 냈다. 이 자리에는 문화, 미디어 콘텐츠 기획자로서 ‘기혼 포콜라리나’인 남은우 씨(클라라)가 함께해 인터뷰에 도움을 줬다.

민순신 씨는 10대 소녀였던 1960년대 중반에 포콜라레(마리아 사업회)를 만나 매료됐고, 그 영향으로 천주교 세례도 받게 됐다.

세례를 준비하며 포콜라레 창설자 키아라 루빅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탈리아어로 쓴 답장이 왔다. 한국에 포콜라레 운동을 소개한 심영택 신부의 도움으로 읽은 편지에서 키아라 루빅은 민 씨에게 ‘작은 마리아가 됐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마리아 레지나’라는 세례명을 줬고,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젠 베르데는 포콜라레 창설자 키아라 루빅에게서 비롯됐다. 얼마 전 미디어 종사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민순신 씨는 젠 베르데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보편적 형제애는 정말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소개했었다. 젠 베르데가 어느 나라 공연을 가든 그 나라의 언어로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서로가 다르다는 게 일치의 걸림돌이 아니고, 평화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무대에서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기억에 23개국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민순신 씨의 소개에 따르면 젠 베르데는 현재 14개 나라에서 온 20명의 여성이 참여하는 국제 음악 그룹이다. 그런 모임에서 노래를 공연하는 나라의 언어로 번역해 부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노랫말 번역에서부터 엄청난 관심과 정성이 들어간다. 원어민이 녹음한 것을 듣고 수없이 연습하며, 그들에게 연습한 노래를 들려주고 검증을 받는다. 민 씨는 음률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시나 이탈리아어 노래를 외국어로 바꾸는 일의 어려움을 예로 들었다.

  
▲ 공연을 하고 있는 민순신 씨.(사진 제공 = 민순신)

젠 베르데는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공연과 전국 투어로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졌다.

한국에서 공연할 때는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로 시작하는 박태준 작곡의 가곡 ‘동무 생각’을 한국어로 불렀던 게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수많은 관객이 노래를 따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동무 생각’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런 좋은 기억 때문일까. 어느 나라에 다시 가보고 싶은지 물으면 젠 베르데 단원 중 많은 수가 ‘한국’을 꼽는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깊이가 깊다고 느껴져서 좋았다는 것이다.

젠 베르데 단원들은 이탈리아어나 한국어가 상대적으로 ‘음악적’인 반면, 중국어나 네덜란드어, 독일어에 좀 더 어려움을 많이 토로했다고 민 씨는 말했다. 폴란드에서 열린 세계청년대회에서 폴란드어로 노래를 불렀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폴란드어는 정말 힘들어요. 왜냐하면 ‘츠’ 같은 발음이 많이 들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노래가 딱딱해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폴란드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부드럽게 나오는지 몰라요. 틀림없이 방법이 있다는 얘기죠. 한국인인 제가 폴란드말로 노래를 하기 위한 노력과 땀은 말도 못해요.”

그런 어려움에도 관객들의 언어로 노래하기 위해 젠 베르데가 노력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그 나라 사람들과 ‘다리’가 놓여 무슨 메시지든지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순신 씨는 폴란드어로 노래를 연습하면서 폴란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폴란드의 ‘얼’을 배운다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한 나라의 언어에는 얼이 들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 말로 노래하면 그 언어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노래가 직접 들어간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며 ‘왜 한국인이 폴란드말로 노래를 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묻는 폴란드 사람들에게 민순신 씨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라고 답했다 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의 변화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민순신 씨는 최근에 읽은 글이라며 ‘현대 한국인은 모두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을 인용했다. 신을 잃고, 자연을 잃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삶.

또 그가 최근 만난 한국은 바로 옆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소통이 안 되는 시대다. 모두가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서로 눈을 바라보지 않는 사회, 간혹 눈을 마주쳐도 쑥스럽고 할 말이 없는 관계. 민 씨는 “미디어 시대라고 하지만 오늘날처럼 소통이 어려운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으로 바쁘게 흘러가고 있는 고국을 바라보며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걱정도 많이 된다. 그는 그런 젊은이들을 보며, 무대 위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부르던 노래 ‘Who am I(나는 누구인가)?’를 떠올렸다며, 그 노랫말을 간추려 소개했다.

“거울에 비친 너는 누구인가? 나는 부모가 원하는 나야.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야. 부모는 몰라.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부모는 내가 변호사가, 의사가 되기를 원해. 나는 그게 싫어. 그리고 미래가 두려워. 너는 젊으니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고 하지만 사회에 나가면 자리가 없어. 너는 이것이 부족하고, 학벌은 이렇고, 집은 어떻고, 못 생겨서 안 된다고 해. 나는 별이 되고 싶은데 반짝이는 별이 있을 하늘이 없어. 어떤 때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핸드폰이야. 나는 명품이야. 나는 정말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너는 어디에 있나.”

민 씨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아주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나는 누구인가?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사회가 이러니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물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보기를 권하고 싶어 했다. 또한 민 씨는 “사람이 있어야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보잘 것 없는 핸드폰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메시지가 키아라 루빅이 젠 베르데에 준 지침이라고 소개하면서, ‘사람’과 ‘사랑’을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놓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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