뺄셈 공약이 보고 싶다

2017. 5. 4. 22:11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뺄셈 공약이 보고 싶다

퍼주기만 하면 성장하는
부두 경제학, 현실엔 없다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닷새 후 탄생할 새 대통령에게 꼭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 대통령이 된 후가 아니라, 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이다. 뺄셈 공약이다.
 
이번 선거도 지난 대선과 비슷하다. 유력 후보들이 일제히 퍼주기를 말한다. 적어도 200조원, 많게는 500조원 넘는 재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어떻게’는 뺀 채다. 공약해 놓고 당선되면 막상 무르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아예 투표 전에 논란 많고 효과 의심스러운 퍼주기 공약을 빼달라는 것이다.
 
압도적 1위 후보인 문재인부터 솔선수범하면 어떨까. 대표적인 게 공무원 17만 명 늘리기다. 발표 때부터 같은 당 송영길 선대위 총괄본부장이 “문제 있다”던 논란 공약이다. 상대 후보들도 집중 공격하고 있다. 방어 논리도 신통찮아 보인다.
 
단지 5년 임기 내 들어가는 돈이 많네 적네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잘못 물꼬를 틀 수 있어 하는 말이다. 이런 공약이 표를 얻는 데 효과를 봤다고 생각해보라. 다음 선거 땐 더 많은 공무원 늘리기 공약이 쏟아질 것이다. 결과는 불문가지. 노동 인구 열 명 중 한 명이 공무원인 그리스는 어찌 됐나. 망했다. 우후죽순 늘어난 공무원의 ‘황제 연금’을 대느라 나라 곳간이 바닥난 탓이다. 요즘 그리스는 유럽연합(EU) 눈치만 본다. 지난 2일에도 3차 구제 금융을 받기 위해 추가 연금·재정 삭감을 약속해야 했다. 이제 EU의 긴축 결정에 토도 못 단다. 극렬 반발하던 민심도 주눅 든 지 오래다. 그나마 그리스는 뒷돈을 대줄 EU라도 있다. 우리 곁엔 제 잇속 챙기기 급급한 4강뿐이다. 사드 배치 비용까지 내놓으라는 도널드 트럼프에,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 한 치의 자비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아베와 푸틴이 주변 4강이다. 우리가 잘못되면 그리스와는 다르다. 한번에 물어뜯기고 거덜날 것이다.
 
재정 건전성은 외환 보유액과 함께 국가 위기를 막아주는 최후의 방패다. 누가 뭐래도 지켜야 한다. 우리 경제가 1997년 외환위기를 왜 겪었나. 견해 차이가 있긴 하지만, 펀더멘털(기초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정치 논리에 희생됐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 외환 방패가 뚫린 게 컸다. 외환 방패만 든든했어도 헐값에 수십~수백조원의 자산을 외국 자본에 갖다 바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금융권에서만 일거에 몇 만 명씩 눈물의 정리해고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2년 만에 위기를 극복한 힘도 나머지 방패, 재정이 튼튼했기에 가능했다.
 
이미 지난 대선 때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선심 쓴 무상시리즈 덕분에 그냥 놔둬도 20년 후면 대한민국은 그리스보다 더 고복지 지출사회가 된다. 여기에 이번 선거로 부담이 더 늘어나면 재정 방패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국가 부채 1430조 중 절반인 752조원이 공무원·군인 연금을 주기 위한 충당부채다. 증가세도 가파르다. 작년에 늘어난 국가채무 140조원 중 92조원이 연금 충당 부채다. 가계빚 1300조원도 뇌관이다. 터지면 결국 재정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몇몇 선거 캠프 인사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재정을 더 쓰라고 권고하고 있다”며 퍼주기를 정당화한다. 난독증도 이런 난독증이 없다. OECD의 권고는 재정을 경제 살리는 데 쓰라는 것이지 퍼주기에 쓰라는 게 아니다. 흡사 퍼주기만 하면 경제가 저절로 성장할 것처럼 큰소리치는 후보도 있다. “소득을 늘리면 저절로 성장이 된다”며 주술 같은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 후보의 지지율이 치솟는 걸 보며 포퓰리즘의 위력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올해 세계 경제는 낙관론이 지배한다. 우리 경제에도 훈풍이 불고 있다. 수출이 살아나고 깜짝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주가는 장중 사상 최고를 찍었다. 유일한 걱정은 정치다. 선거 한 번 치를 때마다 세력을 키우는 포퓰리즘이야말로 경제에 최대 적이다. 1위 후보의 뺄셈 공약이야말로 포퓰리즘을 막는 통 큰 정치, 책임 정치의 시작일 수 있다. 이번 선거가 뺄셈 공약의 원년으로 기록되기를 빌어본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