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지수에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두가지가 포함된다.
행복 지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스스로 측정하는 지수이다.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과 인생 상담사 코언(Cohen)이 만들어 2002년에 발표한 행복 지수가 대표적이다.
로스웰과 코언은 행복이 인생관 · 적응력 · 유연성 등 개인적 특성을 나타내는 P(personal), 건강 · 돈 · 인간관계 등 생존 조건을 가리키는 E(existence), 야망 · 자존심 · 기대 · 유머 등 고차원 상태를 의미하는 H(higher order) 등 3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3요소 중에서도 생존 조건인 E가 개인적 특성인 P보다 5배 더 중요하고, 고차원 상태인 H는 P보다 3배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하여 행복 지수를 P+(5×E)+(3×H)로 공식화하였다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 지수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는 2012년 5월 각국의 생활 환경과 삶의 질을 측정해 수치화한 '행복 지수(The Better Life Index)'를 발표했다. 이 지수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주거, 고용, 소득, 교육 등 11개 항목을 평가했다.
각 항목의 평균 점수에서 1위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차지했고, 노르웨이와 미국, 스웨덴, 덴마크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는 36개 회원국 가운데 24위를 차지했다.
항목별로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교육, 치안 등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공동생활, 일과 생활의 조화, 보건 등에서는 최하위 그룹에 속했다.
전체 항목 중 가장 높은 순위에 오른 교육 부문에서는 높은 학력 수준으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24세에서 64세 인구 중 79%가 고졸 또는 이에 준하는 학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다.
사회적 유대를 측정하는 공동생활 항목에서는 35위를 기록했다. 전체 항목 중 가장 낮은 순위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80%로, 이는 OECD 평균인 91%에 크게 못 미쳤다.
삶의 만족도 부분에서는 특이한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년 전 조사에서 34개 나라 중 27위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이번 조사에서는 36개 국가 중 17위를 기록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감하는 행복 자체가 많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 OECD 행복 지수(www.oecdbetterlifeindex.org) -
지구촌행복지수(영어: Happy Planet Index, HPI)는 영국의 신경제재단이 2006년 7월에 도입한 지수로 사람들의 행복과 참살이 지수를 말한 것이다. 삶의 행복지표, 환경오염지표, 기대지수 등을 반영한 것이다.
지표는 각국의 개발지수인 GDP, 인간개발지수 등을 반영하지만 지속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특별히 GDP는 포함 지표로 적절치 못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목표가 궁극적으로는 부유함보다도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1]
2006년 178개국 중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는 바누아투,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연방, 파나마 등이다. 2009년에는 코스타리카가 1위국이 됐으며 자메이카, 과테말라, 베트남이 상위국에 올랐고 탄자니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등은 하위국이었다.
2012년 151개국이 포함됐고 코스타리카가 연속 1위, 베트남, 콜롬비아, 벨리즈, 엘살바도르가 상위국이었고 반대는 보츠와나, 차드, 카타르였다.[2][3]
바사노 ‘부자와 병든 거지’와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서양의 사고방식은 상당 부분 기독교 도덕률과 연관이 있다. 로마 시대가 막을 내린 후 시작된 중세만 치더라도 1000년에 걸친 기독교 승리의 시대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 도덕률이 30~40세대 이상 이어지면서 삶의 구석구석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철학이 목표로 한 행복한 삶의 문제에서도 《성경》의 메시지가 지배적 역할을 했다. 그 가운데서도 〈루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병든 거지 이야기는 성직자들이 입이 닳도록 행복한 삶의 지름길로 강조했다.
바사노의 〈부자와 병든 거지〉는 예수가 전한 일화를 바탕으로 한다. 먼저 ‘부자와 라자로’로 알려진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거지 라자로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앉아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웠다. 부잣집의 개들조차 거지를 무시해서 종기를 핥곤 했다. 얼마 뒤에 거지는 죽어서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으로 갔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라자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불길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애원했다. 아브라함은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건너가지도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대답했다.
바사노의 그림은 병든 거지가 부잣집에서 구걸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오른편으로 잔뜩 배가 나온 부자가 부인, 아들과 한자리에 앉아 막 식사를 하려는 참이다. 식탁 옆의 기둥만 봐도 얼마나 으리으리한 저택인지 짐작이 간다. 옆에서는 식욕을 돋우려는 듯 악사가 연주한다. 하인들이 식탁으로 하나둘 진수성찬을 나른다. 왼편으로는 음식 준비에 분주하다. 오리와 토끼 고기로 요리를 하려는 것 같다. 위에 있는 공작새와 벽에 가득한 은 접시는 부유함의 상징이다. 식탁 밑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가 부자가 식탁으로 뭐 버리는 게 없을까 간절한 눈으로 쳐다본다. 성경 내용대로 개 두 마리가 거지의 다리에 난 종기를 핥는다.
부자와 병든 거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부유함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생각을 질타하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루가복음〉에는 탐욕을 버리지 못한 부자 관원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날 예수에게 한 부자 관원이 찾아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 이에 예수는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한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았던 부자 관원은 근심 끝에 그만 돌아가고 영생이 주는 행복을 포기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나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라는 성결 구절은 누구나 여러 번 들어봤을 것이다. 그만큼 부유함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오랜 기간 도덕률로 자리 잡았다. 현실적으로는 부를 추구하지만 적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돈이 곧 행복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그런 주장을 노골적으로 하는 사상가나 정치가가 있었다면 여지없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리라. 이렇듯 드러내놓고 부자 되기를 권하면 바로 천박함의 극치라는 질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혀 다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돈이 곧 행복이라는 논리가 아주 공공연하게 인기를 얻는다. 이른바 ‘부자 신드롬’이 10여 년이 넘도록 각 영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예전에 어떤 신용카드 회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대체한 이후 부자를 행복한 삶의 지표로 삼는 현상이 사회 구석구석에 대중 코드로 스며들었다.
로또 등 일확천금을 꿈꾸는 복권 관련 전문 사이트 숫자가 이미 1000개를 넘는다. 심지어 부자가 되기 위한 학습 열풍이 대학가와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재테크 서적 및 부자 되기 비법을 전수하는 책들이 꾸준하게 상위권을 석권하는 현상도 여전하다. 인터넷에 회원이 10만 명의 넘는 부자 되기 관련 카페가 있을 정도다. 아예 노골적으로 ‘부자학연구학회’까지 만들어 ‘부자학’을 학문 영역으로까지 승격시켰다. 대학에서도 부자 만들기 관련 강좌가 수강생으로 넘쳐날 정도로 인기 강좌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 부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돈 버는 비법, 부자의 생활 습관을 다룬다. 부자 아빠가 되기 위해 아침형 인간이 되고 정보와 인맥을 관리하고 성격을 바꾸라는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 날로 늘어난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이상적 배우자를 꼽을 때 겉으로는 인간성, 속마음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제시했지만, 이제는 경제력이나 맞벌이가 가능한 조건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부자가 되기 위해 ‘부자 남편’이나 ‘부자 부인’을 찾는 일이 공공연하다. 이러다가 신흥 종교라도 하나 생길 판이다.
부자를 인생 목표나 행복의 기준으로 밝히는 것은 최근 몇십 년 사이의 경향이다. 인류 역사 기간 대부분은 바깥으로 드러내는 형식적 도덕률로 인간성이나 내면의 성숙을, 실제적 사고와 삶에서는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도덕률과 내면이 분리된 답을 내놓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렘브란트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술집의 탕자〉는 괴리된 행복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도 바사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루가복음〉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수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하고는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고 하셨다. 자기를 위해 재산을 모으면서 하느님에게 인색한 사람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렘브란트는 바사노와 달리 성경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예수의 비유를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한다. 금빛 장식의 화려한 옷을 입은 부자가 촛불로 방 안을 밝히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방 안에는 재산 목록을 적은 서류가 가득하다. 화가는 성경에 나온 곡식 창고 정도로는 세계 경제의 맹주로 불리며 엄청난 부를 축적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자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낀 듯하다. 부자는 밤늦은 시간에 남이 볼세라 은밀하게 재산 목록을 검토하는 중이다. 촛불을 비춰가며 손에 든 금화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촛불은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는 신의 언명처럼 얼마 남지 않은 부자의 목숨을 보여주는 듯하다. 책상에는 신의 심판을 상징하는 작은 저울이 놓여 있다. 신이 오늘 밤 목숨을 거두어갈 작정인지도 모르고 부자는 그저 돈에 눈이 어둡다.
렘브란트는 넘쳐나는 부로 흥청망청하는 네덜란드 부자들을 비판하고자 했다. 그림의 메시지는 적어도 당시의 도덕률이 전하려던 바와 일치한다. 하지만 실제 렘브란트의 삶은 정반대로 〈술집의 탕자〉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이 그림도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사치와 방종으로 탕진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림 속의 남성이 렘브란트 자신이고 여성도 부인인 사스키아가 모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탕자로서의 렘브란트〉로 불리기도 한다. 술집을 배경으로 화려한 깃털 모자와 금빛 수를 놓은 옷, 금장으로 된 칼로 치장한 렘브란트가 술잔을 높이 쳐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탁자 위에는 부와 오만함을 의미하는 공작이 놓여 있다. 렘브란트의 무릎 위에는 부인이 접대부 모습으로 앉아 있다.
실제로 렘브란트는 사치와 방탕으로 유명했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렘브란트는 젊은 나이에 화가로 성공하여 명성과 부를 얻었다. 귀족 딸인 부인이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과 사회적 신분 상승은 화려한 생활을 뒷받침해주었다. 20~30대의 자화상을 보면 사치스러운 의상, 황금 목걸이, 이국풍의 모자를 과시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 미술평론가 데샹은 “그는 자유와 그림과 돈만을 사랑했다.”고 혹평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공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극도의 사치와 낭비로 빚더미에 앉았고, 부인과 자식들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질적 낭비벽과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고객과 관계가 소원해져 고립감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지냈다. 그 후 고작 붓 몇 자루만 남긴 채 60대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렘브란트가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다. 심지어 가난의 행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교하던 성직자, 그중에서도 상당수 교황이나 추기경은 사치를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신의 은총을 입어 공적으로 교회의 교리를 세우고 해석하며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는 데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교황의 방탕이야말로 행복에서 형식적 도덕률과 실제 삶이 어디까지 괴리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교황의 성직매매, 축첩, 간음, 사치, 방탕, 정적 살해 등은 다반사였다.
세르기우스 3세는 로마 집정관의 딸 마로치아와의 타락 생활로 유명하다. 마로치아 가족은 교회 원로가 되어 수십 년 동안 정부와 사생아들을 교황으로 밀어 올렸다. 베네딕트 9세는 교황직을 매입했다가 2명에게 교황직을 다시 팔아 부자가 되었다. 이들은 당연히 추기경이나 주교직을 매매했고 취임세를 부과하여 재산을 모았다. 요하네스 23세는 추기경으로 있을 때 수많은 남의 아내, 첩, 소녀를 능욕했는데 무려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파울루스 3세는 교황사절로 재직 시 명문 귀족의 아내를 능욕하고 자신의 둘째 누이와도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추기경 자리를 얻기 위해 교황에게 누이를 바쳤다. 알렉산더 6세의 탐욕과 방탕은 너무 유명해서 죽은 후에도 ‘구제받지 못한 더러운 영혼’이라는 평을 들었다. 로마 교외에 광대한 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들어서면 창부 출신의 여인들이 알몸으로 뒤를 따랐고, 마음에 드는 몇 명을 골라 쾌락의 시간을 즐겼다. 고위 성직자들과 상류계급 여인들을 초청해서 음란한 연회를 열고, 접견 명목으로 여성들을 강간했다. 살인범들을 사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돈을 챙겼고, 성직과 성물을 무단으로 매매했다.
아무리 실제 생활이 탐욕에 절어 있어도 표면적으로는 내면과 영혼을 통한 행복을 강조하던 위선조차 깨고 현세의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절대 가치로 정당화하려는 조짐은 이미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근대 사상에서 시초를 발견할 수 있다. 쾌락 증대를 행복의 기준으로 제시한 벤담(Bentham)의 공리주의가 대표적이다.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쾌락을 통한 행복의 증대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에게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또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두 주인의 왕좌에 고정되어 있다. ··· 공리성이란 이익 당사자에게 이익, 이득, 쾌락, 선, 행복을 낳거나 손해, 해악, 고통, 악, 불행이 발생하는 일을 막는 경향을 지닌, 어떤 대상에 들어 있는 성질을 뜻한다. ··· 공동체는 마치 그 구성원들인 양 여겨지는 개별 인간들로 이루어진 허구적인 실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동체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 이익의 총합이다. 개인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서 공동체 이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어떤 것이 한 개인의 쾌락 총합을 부가시키는 경향이 있을 때, 그것을 그 개인의 이익을 증진시키거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쾌락과 고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동일한 절차는 양자에 똑같이 적용된다. 좋은 것, 이익, 편리, 이득, 유리함, 취득, 행복 등은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쾌락에 대하여 적용된다. 나쁜 것, 불편, 불리함, 손실, 불행 등은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고통에 대하여 적용된다.
쾌락 중심의 공리성 이외의 다른 도덕원리는 없다. “쾌락은 그 자체로 선이다. 아니, 고통이 없음을 제쳐둔다면 유일하게 선이다.” 기존의 보편적 도덕원리 입장에서는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동기를 전제한다. 하지만 벤담이 보기에 보편적 동기는 편의적으로 갖다 붙인 구분일 뿐이고, 그 자체로서 나쁜 동기는 없다. 만일 동기가 좋거나 나쁘다면 오로지 결과 때문이다. 도덕은 동기가 아닌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제빵업자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제공할 때, 제빵업자의 동기는 금전적 이득을 보려는 상업 동기다. 그렇게 보면 제빵업자가 거래에서 어느 이웃 사람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추정할 근거는 별로 없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가능한 미래에 실제로 초래할 결과에서 찾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쾌락을 낳거나 고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 도덕적인 것이다.
단순히 쾌락 증대라는 막연한 주장이 아니다. 문맥을 잘 살펴야 진정 강조하려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공동체 이익이란 ‘구성원 이익의 총합’이라는 규정에 주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리’다. 최종적으로 공동체 이익이 어떻게 산정, 산출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구성원 이익의 ‘총합’으로 귀결된다. 이 총합이 아니고서는 공동체 이익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하다. 쾌락의 총합을 부가시키는 경향만이 개인 이익을 증진한다. 개인 이익 증가는 이익 총합이 증가할 때만 성립한다는 점에서 전체 이익이 우선한다. 결국 벤담에게 인간은 형식상으로는 개인이지만 전체화된 개인, 전체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개인이다. 특히 총합이라는 개념은 측정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경제적 부는 산술적으로 측정 가능한 대표적 지표에 해당한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사회 전체의 부 증가를 곧 행복의 기준으로 연결할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근대 영국 경험론 철학자 로크(Locke)는 물질적 부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보다 정교한 논리를 제공한다. 원래 자연은 신이 모든 인간에게 부여한 공유물이기 때문에 교리를 통해 사적인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기 곤란했다. 그는 《통치론》을 통해 소유권과 빈부격차를 성경의 권위를 빌어 정당화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물질적 풍요의 추구는 신의 뜻이고 일종의 자연법임을 강조한다.
노동을 통해 공유물에서 배타적 소유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자연이 제공한 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를 보태면,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소유의 권리가 성립한다는 논리다. 만물이 공유물이더라도 자기 몸과 노동만큼은 자기 것임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배타적 소유권이 생긴다. 소유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의 독점이나 이에 따른 빈부격차도 문제 될 게 없다. “우리에게 소유권을 부여하는 동일한 자연법이 또한 그 소유권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주셨는가? 즐길 수 있는 만큼. 어느 누구든지 그것이 썩기 전에 삶에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주셨다.” 썩거나 파괴되지 않을 만큼 소유하는 것은 신의 원리에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면 화폐를 통한 부의 축적은 어떻게 되는가?
이미 17세기 유럽은 농업을 통한 부의 축적을 넘어 상업과 공업 활동을 통한 축적으로 조금씩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었다. 12세기 이후로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 전쟁을 매개로 하면서 자치 도시가 활성화되고, 생활 도구의 제작과 상거래가 지속해서 팽창했다. 토지와 물물교환에 기초한 기존의 사고방식은 점차 화폐경제에 자리를 내놓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화폐가 부의 상징이 됐다. 돈이 돈을 낳는 대금업도 성행했다. 마시(Massys)의 〈대금업자와 아내〉는 시대 변화를 잘 반영한다. 당시 사회적으로 빠르게 확대되던 상인과 수공업자 등 중간계층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금업자인 남편은 저울을 이용해 벌어들인 동전의 무게를 달고 있다. 아내는 성모자상 삽화가 그려진 성경을 잡고 있다. 두 손으로 책장을 잡고 있지만 눈은 동전에 고정되어 있어서 실제 관심은 영적 양식보다 물질적 양식으로 향했다. 이들은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돈을 주고 그림을 제작하게 했다.
로크는 썩지 않을 만큼을 소유권 제한의 기준으로 제공함으로써 썩는 작용과는 무관한 화폐에 대해서는 무한한 소유와 독점 가능성을 열어준다. “화폐는 인간이 상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인간은 상호 합의를 통해서 참으로 유용하지만 썩기 쉬운 생활용품과 교환하여 화폐를 받게 되었다. 근면함의 상이한 정도에 따라 사람들이 상이한 비율의 재산을 가지는 것처럼, 이 같은 화폐의 발명은 사람들에게 재산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기본적으로 화폐 소유는 노동을 통한 토지 소유의 연장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획득한다. 또한 곡물과 달리 화폐는 썩지 않기에 아무리 많이 축적해도 소유에는 제한이 없다. 화폐 축적이 대규모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부당한 것으로 취급받아야 할 이유가 이제 전혀 없다. 그것도 성경의 교리를 근거로 했으므로 과거처럼 종교적 도덕률과의 대립이라는 부담을 가질 필요 없이 마음껏 부를 축적하고 이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논리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더 많은 행복으로 여길 심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상당 기간 돈과 행복을 일치시키는 주장을 공공연히 내놓지는 않았다. 특히 돈 놓고 돈 먹기에 해당하는 투기적 행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대금업자 샤일록은 여전히 나쁜 인간의 본보기였다. 신이 금지한 죄악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면, 채권자같이 이자를 받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돈이 돈을 낳는 대금업은 현대사회에서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음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한 시간이 멀다 하고 고리대금업을 선전하는 TV 광고가 판을 칠 정도로 불법만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축적하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부자 신드롬이 얼마나 무인지경으로 우리의 사고와 삶을 점령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다.
왜 부자 만들기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토록 극성을 부리는 걸까? 왜 대부분의 사람에게 사실상의 인생 목표였지만 수면 아래 있던 부자의 꿈이 행복의 절대적 기준으로, 유행의 전면으로 솟아오른 걸까? 왜 부자 신드롬이 만들어내는 부자 이미지는 바사노 그림처럼 기름진 음식으로 배가 불뚝 나온 추한 모습이나 렘브란트 그림처럼 돈 모으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수전노 모습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소비를 통한 삶의 여유처럼 문화적 이미지로 나타나는가? 정말 부자 신드롬이 약속하는 행복한 삶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부자 신드롬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부자 신드롬이 문화적 이미지로 나타나는 양상은 역설적으로 경제 영역에서 부자 되기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표어는 반대로 부자가 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과거 한국의 경제 개발 시기에는 자수성가를 통한 신분 상승 기회가 조금이나마 열려 있었다. 자본주의 형성 과정이었기 때문에 빈틈도 있었고, 조그만 가게나 아이디어를 통한 대박 신화가 통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 자본주의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포화를 넘어 과잉 상태에 도달했다.
신규 자영업자나 사업 진출자들이 퇴직금이나 융자를 통해 마련한 투자금을 날리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옷이나 음식, 심지어 커피숍까지도 대자본의 대형 매장이나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IT 분야조차 후발업체는 선발업체를 추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어떤 분야든 돈이 된다 싶으면 대기업이 진출하여 잠식해버린다.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막혀버린 사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대중적 불만을 부자 신드롬이라는 문화적 이미지를 통해 무마하려는 허구적 이데올로기 성격이 강하다.
또한 부자 신드롬은 다분히 소비 영역에서 판매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명품 판매에 매출과 수익 확대의 명운을 건 대형 백화점의 이해와 맞물려 있다. 가격 중심의 제품으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중국의 추격에 대응할 수 없는 현실에서 대기업이 앞다투어 추진하고 있는 고가 제품 개발과 판매 전략에 맞물려 있기도 하다. 국내시장에서 고가 제품의 대량 판매를 유도하기 위해 가공된 신드롬 성격이 강하다. 부자 신드롬이 TV 광고나 재벌과 고수익 전문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등을 통해 유포된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 내용이 시청률 경쟁을 통한 광고 수익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광고주 대부분이 대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부자 신드롬의 진원지가 어디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아가서는 복지가 거의 바닥 수준인 한국의 사회구조도 직접 연관이 있다. 한국은 육아, 교육, 주택, 의료, 노후대책 등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세계 10위권이라는 무역규모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취약한 복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이 때문에 모든 영역에서의 금전적 대비를 개인 수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서 상당한 재산을 지원받거나 상속받지 않는 경우 육아와 교육, 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하면 매달 저축할 돈도 마땅하지 않은 현실이다. 월급을 모아 서울에서 중소형 아파트 하나 마련하는 데만 평균 20년 가까이 걸릴 정도다. 샐러리맨의 국민연금 수준으로는 퇴직 이후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우려해야 한다. 그나마 정년퇴직까지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가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다. 사회적 안전장치의 취약으로 개인의 수익 증대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사회에서 대박의 꿈 확대는 자연스럽다. 그래서 부자 신드롬은 부동산 투기, 주식 투기처럼 일확천금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결국 한국사회에서 10여 년이 넘도록 잦아들 줄 모르는 부자 신드롬은 실체가 없는 이미지 성격이 강하다. 마치 무지개를 찾아가려는 허망한 시도이기 때문에 실현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다. 각종 서적이나 강좌에서 선전하는 부자 만들기 프로젝트를 평생 따라가다 허망한 결과에 망연자실해야 한다. 부자 신드롬은 행복은커녕 상실감과 절망감을 키울 뿐이다. 그리고 현실의 고통을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과 행복은 별개의 관계고, 무소유의 삶이나 정신적 만족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전 세계 행복지수 조사에서 바누아투와 같은 빈곤국들이 상위권을 차지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도의 성찰과 해탈에 이른 사람이 도달하는 경지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정이 자녀 학원비와 주택대출 융자금의 이자, 원금상환 등 당장 생활에 필요한 돈과 퇴직 이후에도 20~30년을 지내야 하는 고령사회에서 필요한 노후대비에 허덕여야 하는 현실에서 정신적 만족의 강조는 부자 신드롬보다 허무하게 들린다. 또한 한국사회는 바누아투를 비롯하여 높은 행복지수를 기록하는 후진국과 달리 매우 발달한 산업문명 속에 있고, 이미 극심한 빈부격차로 몸살을 앓고 있어서 단순 대비가 곤란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행복을 꿈꾸고자 한다면 먼저 허구적인 부자 신드롬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부자 되기에 쏟는 정성의 반만 한국사회의 복지 향상을 위한 움직임에 참여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무리한 욕심을 내자는 것도 아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국의 경제력 정도를 가진 국가의 복지수준만 갖춰도 일상의 불안함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한층 안정될 수 있다. OECD 평균 수준의 복지체제를 추구하는, 말 그대로 상식적 수준의 정책을 갖춘 시민, 사회, 정치 세력이 한국사회를 이끌어 나가도록 참여하는 일에서 행복의 전망은 열릴 것이다. 복지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불안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때 정신적, 문화적 성숙도 가능해질 것이다. 적어도 중단기적으로는 행복의 현실화를 위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복지로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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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한 나라에서 한 해 동안 생산된 모든 최종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를 그 해의 평균 인구로 나눈 값을 말한다. GDP를 통해 나라 전체의 소득 수준은 알 수 있지만, 국민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은 파악하기 어려운데, 이는 국민 총소득이 많더라도 인구가 많으면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소득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1인당 GDP를 통해 국민의 평균적인 생활 수준이나 삶의 질을 측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고소득 계층이 소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져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1인당 명목 GDP의 경우 각 국가의 물가를 고려하지 않고 환율 변동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실제 그 나라 국민의 삶의 질에 큰 변화가 없어도 한 나라의 순위를 매년 변동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국제 연합 개발 계획(UNDP)은 국가별 국민 소득, 기대 수명, 문맹률, 교육 수준, 유아 사망률, 평균 수명 등 206개 지표를 반영한 인간 개발 지수(HDI)를 매년 발표해 오고 있다. 인간 개발 지수는 소득, 교육, 빈곤, 실업, 환경, 건강 등 인간을 둘러싼 주요 생활 환경 요소들을 바탕으로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측정하는 것으로 일종의 행복 지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행복과 발전 정도는 소득 수준과 비례하지 않고 소득을 얼마나 현명하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지수로도 평가받고 있다.
1. 삶의 질을 측정하기에 더 적합한 지표는 어떤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 보자.
1인당 GDP는 경제적인 부의 측면에서 개인의 평균적 삶의 질을 측정한 값이다. 반면 인간 개발 지수는 국민 소득뿐만 아니라 건강, 교육, 환경 등 주요 생활 환경 요소를 바탕으로 인간의 행복감을 삶의 질로 측정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개발 지수가 삶의 질을 측정하기에 더 적합한 지표라고 볼 수 있다.
2. 1인당 국내 총생산(GDP)과 인간 개발 지수(HDI)의 국가별 순위를 비교해 보고, 두 지표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자.
1인당 GDP가 높으면 국민의 평균 소득이 높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행복감을 측정한 인간 개발 지수의 순위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행복 수준이 대체로 높은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우리나라는 1인당 GDP가 행복 순위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GDP를 보유하고 있는 룩셈부르크는 HDI의 상위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즉, 삶의 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요인이 대체로 크게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 밖의 요소들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의 질을 측정하는 다양한 지표
*행복 지구 지수(happy planet index, HPI): 기대 수명과 행복감, 생태적 척도 등을 기준으로 삶의 질을 평가하는 지표이다. 특히, 지속적인 성장을 평가하기 위해 환경적 요소를 반영한 측면에서 다른 조사와 차별성을 가진다.
*진정한 진보 지표(genuine progress indicator, GPI): GDP에 소득 분배 수준과 가사 노동의 가치를 더하고 환경 파괴, 자원 고갈, 범죄 증가로 인한 비용을 빼서 산출한 지표를 말한다.
*국민 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 GNH): 국민이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는지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로 생태계의 보호, 전통문화의 보존,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경제 발전 등의 요소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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