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누군가 목숨 걸고 나를 지켜줘야 하는 나라는 싫다”
ㆍ‘헬조선’서 온 이방인에게 말했다…“우린 꼭 행복해야 해요”
지난해 12월5일,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의 어린이박물관 앞에서 카를로스(47)는 딸 케렌(10), 여자친구 베레니스(45)와 함께 박물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코스타리카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라라고 해서 왔다”고 하자, “푸라 비다(Pura Vida)”를 외치며 활짝 웃었다. “인생은 좋은 것” “다 잘될 거야”라는 뜻의 인사말이다. 카를로스는 “행복을 찾아온 거라면 정말 잘 왔다”고 했다.
‘군대가 없으니 두렵지 않으냐’고 묻자 카를로스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는 이웃끼리도 싸우지 않는다. 그런데 왜 다른 나라와 싸우게 될까 두려워해야 하지?” 곁에 있던 베레니스도 거들었다.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화려하지만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베레니스는 정육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늘 첫손가락에 꼽히는 나라, 국토의 4분의 1이 국립공원인 나라, 평화와 인권이 국가브랜드가 된 나라. 코스타리카는 외침과 내전이 끊이지 않던 라틴아메리카 한가운데서 1948년 군대를 없앴고, 국방비를 교육·복지 등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연간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만 보건·의료·교육·친환경에너지 같은 ‘사회적 지출’에 GDP의 20%를 쓰는 덕에 삶의 질이 높고, 국민들의 생활 만족도도 세계에서 가장 높다.
‘헬조선’이란 자조가 공공연한 한국에선 ‘행복’이라고 하면 무엇을 먼저 떠올리는가. 한국은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세워 산업화의 성공사례가 됐고, 민주화도 이뤄냈다. 교육수준은 어느 나라보다 높고 모든 인프라가 세계 상위권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들 모두 살 만한가. 자연과 미래는 안녕한가.
경향신문 ‘행복기획’ 취재팀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행복의 나라’를 찾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누구나 웃음 짓는 나라 코스타리카, 일과 가족의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스웨덴과 덴마크, 가난한 이들을 끌어안는 브라질과 콜롬비아, 여성들이 사회 재건의 주역을 맡은 르완다, 척박한 자연 속에서 느리고 안정된 삶을 사는 아이슬란드 등을 찾아갔다. 거기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길’과 ‘다른 삶’을 들여다봤다.
■ “누군가 목숨 걸고 나를 지켜줘야 하는 나라는 싫다”
산호세의 후안 산타마리아 공항에 내리자마자 깨끗한 도화지처럼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 대신 알록달록 색색깔의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적도에서 1000㎞ 정도 북쪽에 있는 코스타리카는 ‘풍요로운 해안’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햇살은 눈부셨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들 큰소리로 떠들며 웃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 짐보따리를 들고 줄을 선 사람들도 소풍 가는 관광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처럼 보였다. 도로는 삐뚤빼뚤했고 인도는 울퉁불퉁했다. ‘행복한 나라’를 취재하러 온 한국의 기자들이 “이렇게 낙후된 나라가 어떻게 행복하다는 것이냐”며 볼멘소리를 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거대도시 서울의 화려함과 인구 30만명이 조금 넘는 산호세 거리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유난히 빨갛고 노란 원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표정은 신기할 정도로 밝았다.
코스타리카에 가기 전에는 코스타리카를 몰랐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나라는 알아볼수록 낯설었다. 북쪽으로는 니카라과, 남쪽으로는 파나마와 국경을 맞댄 이 나라에선 1948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선에서 진 대통령이 정권을 내놓지 않으려 하자 카르타고라는 지역에 살던 농장주 호세 피게레스가 민병대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6주 새 2000명 넘게 목숨을 잃은 내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피게레스는 권력을 잡자마자 이상한 선언을 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대를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12월1일 피게레스는 망치를 들고 군 사령부 건물 벽을 직접 부쉈다. 군대는 사라졌고, 국방비는 교육과 보건 예산으로 쓰였다. 그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으나 피게레스의 약속은 지켜졌다. 단 한 번의 전쟁도 없었고, 이후의 어떤 대통령도 군대를 만들지 않았다. 동화 같은 스토리다.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다. 피게레스가 망치를 든 바로 그날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북미와 남미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처럼 그때 그 시절 우리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군대를 없애고 평화와 행복을 선택했다는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평화와 안전은 행복의 기본 조건이다. 행복을 배우기 위한 여행의 첫 목적지로 코스타리카를 고른 것은 이 나라가 ‘행복한 나라’ 1순위로 꼽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행복이 군대를 없앤 선택에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분단된 반도의 절반에서 늘 긴장 속에 살아온 우리로서는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코스타리카로 떠났고, 2015년 12월4일 산호세에 도착했다.
엿새 동안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오늘 이 동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은 순간들이 이어졌다.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는지, 살면서 부족한 것이 있는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는지 물으면 한결같이 “이 나라가 늘 지금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가는 한국과 비슷한데 소득은 적다. 하지만 한 달에 100만원가량 버는 아저씨도, 일자리를 아직 못 찾았다는 아가씨도 모두 작고 평화로운 지금의 나라를 자랑스러워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비비안(36)은 “태어나서 한번도 군인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비비안은 나보다 사흘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다. 우리는 둘 다 맏딸이고 경영학을 전공했다. 공통점이 많아 금세 친해졌지만 나와 비비안이 태어나 자란 세계는 참 달랐다. 비비안이 유치원 때부터 가장 많이 받은 것은 도덕교육이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1년씩 토론을 하는데, 예를 들면 어릴 때에는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고, 좀 더 크면 그것을 심화시켜 좋은 팀워크를 만드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반공 글짓기를 했던 나의 ‘국민학교’ 시절도 떠올랐고, 입시 교육과 경쟁 속에서 보낸 10대 시절도 머릿속을 스쳐갔다. ‘누군가가 우리를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경쟁에서 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내게는 유전자처럼 박혀 있다는 것을 비비안과 얘기하며 깨달았다.
비비안에게 1987년은 오스카 아리아스 당시 대통령이 중미 분쟁을 중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나이였는데도 정말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한국의 1987년은 대통령 직선제가 발표된 역사적인 해다. 비비안은 그때까지 한국의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어릴 때의 나는 군인이 아닌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군대를 없애기로 한 약속이 오랜 세월 지켜지는 것을 어느 한 지도자의 힘, 정부의 힘만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비결을 묻자 비비안은 뜻밖에도 “가족”이라고 했다. “우리 할머니가 젊었을 때에는 다들 남편이 군대에 끌려갈까봐 침대 밑이나 지붕에 숨겼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할아버지를 통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통해 들어왔거든.”
전쟁의 무서움에 대한 기억으로 치자면 한국만 할까. 코스타리카의 할머니들은 젊어서 남편을 군대에 빼앗겼지만 한국의 부모들은 지금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무사히 잘 지내나 노심초사한다. 비비안은 “군대가 있었다면 훈련 문화가 생기고 사람들이 좀 더 부지런해졌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줘야 하는 나라에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부러웠지만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렸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신동엽 시인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이라는 시에서 한반도의 무기들이 모두 쇠붙이로 변해버리는 날을 그린다. 그러면서 시인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라 읊는다. 그러나 이를 현실로 만든 나라가 지구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꿈은 더 이상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은 아니지 않을까.
산호세의 어린이박물관 앞에는 대포가 있다. 전쟁이 있었을 때 실제로 썼던 대포라고 했다.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가 놀고 있었다. 어린이박물관은 교도소를 개조해 만든 곳이었다. 보험회사 운전기사인 루이스(38)가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와 있었다. 그에게 군대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차근차근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이웃과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 대화를 해서 오해를 풀어야지. 다른 나라와도 대화를 많이 하면 돼. 기억해, 대화를 하면 싸움이 없다는 것을.” 루이스는 “벌이는 적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이 나라가 좋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실상 제3세계 국가들의 군대는 대부분 외국이 아닌 자국민을 억압하는 데 무력을 썼다. 아시아, 중동과 아프리카, 중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 정권이 득세해 장기집권을 했고, 학살과 억압이 반복됐다. 코스타리카는 다른 나라의 점령을 받지 않은 채 ‘군대의 덫’을 피한 사실상 유일한 나라다. 다른 나라들이 더 강한 무기를 갖기 위해 애쓸 때 이 나라는 ‘평화와 인권’을 브랜드로 만들었다.
코스타리카 외에도 군대가 없는 나라들은 있지만 유독 이 나라는 평화를 세계에 전파하느라 애쓴다. 코스타리카는 1987년 중미 5개국 평화협정(에스키플라스협정)을 이끌어내 분쟁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1990년에는 이웃한 파나마를 설득해 군대를 폐지하게 했다. 2013년에는 세계의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무기거래금지조약(ATT)을 만들어 유엔에서 통과시켰다. 권태면 전 코스타리카 대사는 “코스타리카는 남한의 절반 크기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지만 유엔에서 평화와 인권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고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나라”라고 말했다.
이 모든 일이 손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전쟁과 경쟁 대신 평화와 공동체를 새기기 위한 시민교육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루이스를 만난 어린이박물관은 선거 때면 투표소로 변신한다. 코스타리카에서는 다섯 살부터 투표를 한다. 물론 총선이나 대선 결과에 반영되는 성인들의 표와는 다른 ‘모의 투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투표하는 곳과 똑같이 만들어진 투표소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만든 투표용지에 비밀·보통·평등·직접선거를 한다. 정치와 선거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즐기고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정당들은 지방 아이들도 산호세의 투표소에 올 수 있도록 무료 버스를 제공한다. 개표방송에서는 어른들의 투표뿐 아니라 아이들의 투표 결과도 한 화면에서 발표한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청소년들은 선거 서너 달 전 학교에서 투표를 한다. 선거의 모든 과정을 선관위가 공정하게 관리하고, 결과도 각 정당에 보고된다. 여고생 다니엘라(18)는 2013년 대선 때 청소년 투표에 참여했다. 다니엘라는 “줄을 서서 투표용지를 받고 누구를 찍을까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의미 있었다”며 선거의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전직 교사인 다니엘라의 엄마 라우라(49)는 “청소년 선거 결과에는 정당들도 굉장히 민감하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몇 년 뒤면 유권자가 될 것이고, 집안 어른들의 분위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선거 당일에도 큰 몫을 한다. 투표소 안내와 정당별 선거운동 지원, 투표용지 교부 같은 일을 청소년들이 한다. 코스타리카의 가족들은 축구팀을 응원하듯 각자 좋아하는 정당 색깔의 옷을 입거나 머리띠를 하고 투표에 나선다. 한 가정에서도 각자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나오는 일이 많다. 이런 경험 속에서 아이들은 민주주의를 배운다.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도 그저 여러 직업들 중 하나일 뿐이다. 대통령도 경호원 없이 다니며, 동네 공원에서 혼자 운동을 한다. 대통령 관저를 지키는 사람이 경비원 2명뿐이라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러나 놀라는 내 모습이 코스타리카 사람들에게는 더 놀라운 일인 모양이었다. 관저 앞을 지나가던 할머니는 “누가 대통령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내게 이렇게 반문했다. “무엇이 두렵기에 여러 겹으로 경비를 하지? 누가, 왜 대통령을 공격하려 하기에?” 국회 담장은 다른 여느 건물들처럼 그라피티로 덮여 있다.
코스타리카는 지난해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발표한 지구행복지수(HPI)에서 151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이 지수는 국내총생산(GDP)이나 소득 대신 얼마나 지속가능한 행복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기대수명과 삶의 만족도, 경제적 평등, 친환경 측면 등을 고려해 국민들이 평생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를 측정한 지수에서 한국은 60위였다.
등수가 행복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며, 군대를 없애고 평화를 택했다는 슬로건이 그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구호와는 다르게 실제로 국민들은 개발과 성장을 바라지 않을까, 강한 나라가 되길 열망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 갔지만 코스타리카에서 나는 계속 무너졌다. 통계로만 보면 코스타리카가 ‘행복한 나라’이고 한국이 ‘자살률 1위’ ‘헬조선’일 이유는 전혀 없다. 구매력 기준 1인당 연간 GDP는 한국이 3만5400달러, 코스타리카는 1만4900달러다. 이 나라는 빈곤율이 25%에 이르고, 실업률은 8%대다. 한국의 자살률이 높다고 했더니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과 우리의 삶의 만족도에서 큰 차이가 나는 데는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은 곧 70년 가까이 쌓아온 가치관의 차이였다.
우리는 늘 강대국을 닮고 싶어 했다. 남의 침략을 받지 않는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국민을 더 잘살게 만드는 길이라 믿어왔다. 행복이나 복지나 환경 따위는 먼저 군사력을 키운 뒤에야 생각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것들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런 내게, 국립박물관 앞 광장에서 만난 10대 커플은 “군대가 있다고 전쟁을 막을 수 있느냐, 전쟁이 터지면 피해를 입는 것은 시민들 아니냐”고 되물었다.
군대와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나흘을 돌아다닌 끝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리디엣 할머니(73)는 1948년에 다섯 살이었다.
“내전 때 북쪽의 과나카스테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밤에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들었어.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고 부들부들 떨었어. 군대가 전쟁을 막아줄까? 오히려 전쟁이 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해. 군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잖아.”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곧 무슨 일이 터질 듯한 긴장이 몇 년에 한 번씩 반복되는 나라에서 군대를 없애자고 하면 누가 고개를 끄덕여줄까. 내게 이들의 말과 삶은 모두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도 부럽고 탐났다. 이들의 확신과 지혜와 평안이.
그런 나라의 출발점을 만든 호세 피게레스 전 대통령의 ‘시민농장’이 카르타고에 남아 있다고 해서 찾아가기로 했다. 산호세에서 남동쪽으로 차를 타고 2시간 넘게 달려갔으나 농장을 찾기는 힘들었다. 표지판 하나 없었다. 차를 멈추고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이 마을이 피게레스 가족이 농장과 공장을 만들어 사람들을 먹여살린 곳”이라고 할 뿐 아무도 시민농장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30분 넘게 고불고불 길을 따라 헤매는데 비가 쏟아졌다. 잠시 동네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길을 물으러 간 사이 자동차 문이 열리더니, 한 할머니가 영어로 “헬로!”라고 인사하며 올라탔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더니 악수를 청했다. “내 남편이 대통령을 지낸 피게레스예요. 내 아들도 대통령을 했고, 딸은 프랑스 파리에서 지구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오늘 오전에 남편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는데, 당신이 오는 줄 알았더라면 초청했을 것을. 미안해요.”
피게레스의 부인 카렌이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가게에 가서 한국 기자가 찾아왔다고 하니, 잠시 비를 피하고 있던 카렌이 자동차로 달려온 것이었다. 반가움에 손을 맞잡고 카렌에게 남편 자랑을 해달라고 했다.
“군대를 폐지한 거죠. 이라크, 시리아를 봐요. 군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고 다치게 하나요. 전쟁이 아닌 교육을 택한 것은 옳은 일이었고,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마을에는 피게레스 집안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게레스가 살았던 마을 전체가 바로 시민농장이었다. 카렌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딸 크리스티나는 유엔환경계획(UNEP)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지난해 12월 파리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196개국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고, 영국 가디언이 뽑은 ‘2015년을 빛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한 여성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거나 전쟁을 준비했다. 우리는 한번도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어쩌면 다르게 사는 법을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 버렸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우리한테 물어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멋대로 역사를 바꾸지 말고. 지금 물어봐.”
카렌은 헤어지기 전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행복해야 해요.” 갑자기 왜 이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어졌다.
특별취재팀
구정은 김세훈 장은교 김보미 박은하 정희완 김정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