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 중

2016. 9. 8. 14:59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 중

내년부터 여러 나라에서 일제히 기본소득 관련 실험이 진행된다.

 네덜란드에서는 다양한 조건으로 기본소득이 인간의

노동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핀란드와 캐나다도 실험을 할 예정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6년 09월 07일 수요일 제468호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캐나다 등에서 내년부터 일제히 기본소득 실험이 시작된다. 이 실험들은 단지 새로운 복지 제도의 예행연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탐구에 가깝다. 예컨대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의무와 제재로 압박해야 겨우 일하는 시늉을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를 누려야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립할 수 있는 존재이긴 한가?

어느 나라에서든 어린이나 청소년 교과서들은, 인간이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바꿔나가며 창조의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일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역에 가깝다. 그래서 각국의 복지 당국은, 실업급여 수령자들이 공짜 돈을 받으며 놀고먹으려 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감시한다. 예컨대 자진 퇴사인가 해고인가 등 실업급여 수급 자격을 엄격히 심사하고, 수령자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취업원서 제출을 요구한다. 의무적으로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감시 활동에만 엄청난 규모의 재정이 지출된다. 영국 정치 전문지 <에이폴리티컬(Apolitical)>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부의 도시 네이메헌에서는 연간 복지 비용으로 1억1600만 달러 정도가 든다. 그런데 복지 업무를 관장하는 공무원들의 인건비가 2000만 달러 정도다. 한편 실업자들은 복지 당국의 심사와 감시에 순응하면서 적잖이 굴욕감을 느낀다. 실제로 잔꾀를 부려 실업급여를 부당하게 수령하다가 적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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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2013년 10월 기본소득법 국민발의안 통과를 축하하며 스위스 시민들이 동전 800만 개를 뿌렸다.
공짜 돈이 게으름뱅이를 만들 뿐이라면, 기본소득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내년(2017년) 1월부터 2년 동안 일부 시민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의 기본소득 실험은 매우 흥미롭다. 실험의 목적은 급여 수령자들이 감시당하거나 별도의 의무를 부과받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일하는지를 추정해보는 것이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위트레흐트 시는 기본소득제의 시행으로 엄청난 규모의 감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네덜란드 19개 도시에서 실험 예정


이 실험의 대상자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1인당 매월 970유로(약 120만원)를 지급받는데, 그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그룹은 매월 970유로를 받는 대신 새로운 직장에 대한 취업원서 제출이나 교육 프로그램 참석 등 실업급여 수령 의무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 다른 그룹은 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지급받는 돈만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보장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으려 한다는 고정관념을 검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다른 그룹은 당국이 지시하는 자원봉사(인근 학교 청소 등 간단한 일로 사실상 의무 노동)를 하는 경우, 월말에 125유로(약 15만원)의 보너스를 지급받는다. 월초에 자원봉사 조건으로 보너스를 선불로 받은 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125유로를 돌려줘야 하는 그룹도 있다. 마지막으로 급여를 받으면서도 자유롭게 다른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그룹도 있다. 이 모델은 기본소득의 원초적 모델이다.

위트레흐트 시는 이런 그룹들을 연구한 결과들을 비교해 가장 적절한 노동복지 모델을 찾아나갈 계획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와 비슷한 실험이 바헤닝언, 틸뷔르흐, 흐로닝언, 네이메헌을 비롯한 다른 19개 도시에서도 내년부터 동시에 진행된다.

지난 6월25일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발의자들이 상정한 기본소득의 규모는 매우 야심적이었다. 성인 한 사람에 매월 2500스위스프랑(약 282만원)을 지급하는 프로젝트(어린이는 625스위스프랑)였는데, 이 나라 1인당 GDP의 40~50%(평가 기준에 따라 차이 발생)에 달하는 규모다. 결과적으로, 23% 대 77%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발의안을 국민투표에 상정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다. 국민투표 발의자는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5년 전만 해도, 보편적 기본소득이란 용어를 아는 스위스인이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시민이 기본소득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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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펼쳐진 “당신 소득이 보장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대형 현수막.
만약 기본소득 급여의 규모가 낮았다면, 좀 더 높은 지지율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인당 2500스위스프랑으로 높게 잡은 이유는, 국민투표 발의자가 좌파 성향의 정치집단이어서라고 볼 수 있다. “전체 스위스인에게 인간적인 삶과 공적 생활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복지를 강화한다”라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정도의 기본소득이 제공되어야 저소득 노동자들이 단지 배를 채울 목적으로 일하지 않게 되어 사회적 임금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위스는 2015년 기준으로 GDP의 19% 정도를 복지 등 공공사회 지출 부문에 사용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최저 수준이고, OECD 국가 가운데서는 낮은 편이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논의를 촉발한 진영이 좌파라면, 핀란드에서는 우파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내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내용도 크게 다르다. 유하 시필라 핀란드 총리는 지난해 말 기본소득 실험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민들의 노동 의욕을 촉진하고, 사회보장 체계를 단순화해서 공무원의 개입을 줄이며, 공공재정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노동·육아·연금 등으로 세분화된 복지급여들을 기본소득으로 일원화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가운데 복지 관련 공무원 수를 줄여 재정지출을 삭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핀란드 우파 정부의 기본소득 계획은, 복지비용을 전반적으로 줄이고 간소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핀란드 정부는 당초 기본소득 급여 규모를 매월 성인 1인당 800유로(약 98만원)로 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여러 서구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내년부터 핀란드 시민 5000~1만명을 대상으로 시행될 실험에서는 1인당 월 500~600유로를 지급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캐나다 중남부의 온타리오 주 정부가 올해 내로 음식·교통비·의류 등 생활필수품비를 시민에게 제공하는 실험을 실시할 계획이다. 뉴질랜드의 거대 야당으로 1999~ 2008년에 집권했던 노동당 역시 다시 집권하면 기본소득 정책을 고려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가디언>(6월6일)에 따르면, 영국 노동당 역시 기본소득을 추진하는 시민단체 ‘콤파스’의 관련 보고서를 당 정책으로 내세울지 꼼꼼히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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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 초래할 ‘두 계급의 공멸’

기본소득은 경쟁력의 약화, 노동생산성의 하락을 초래해 경제성장을 정체시키고

 조세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경제적으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남종석 (부산대 경제학과 강사) webmaster@sisain.co.kr 2016년 09월 06일 화요일 제468호
             

‘기본소득’이란, 국가가 조건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현금 급여다. 더군다나 쥐꼬리만 한 기초연금이나 아동수당과 달리, 기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의 현금 급여를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사회의 시민들은 기본 급여를 사회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임금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본소득이 갖는 경제적 함의를 비판적으로 살필 것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당초 ‘개인의 독립된 삶을 보장하는 수준의 충분한 급여’를 주장했다. 직업을 갖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현금이어야 기본소득으로 불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떤 규모의 돈이면 기본적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1인당 월 50만원은 결코 충분한 금액은 아니지만, 한국 인구를 5100만명으로 볼 때 기본소득에만 연간 300조원의 예산이 편성되어야 한다. 지난해 보건·복지·고용 관련 예산이 120조원 수준이었다. 물론 기본소득이 제공되면, 기초생활급여·아동수당·기초연금 등 현재의 복지급여 가운데 일부를 폐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필요한 예산 규모가 지나치게 높다. 북유럽 국가들처럼 국민부담률(시민들이 내는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GDP로 나눈 것)이 50%에 가깝고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율도 20~30%라면 기본소득 역시 불가능한 제도는 아닐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어느 계급이 기본소득 재원을 부담할 것인가에 대한 쟁점은 여전히 남는다. 북유럽의 경우, 자본가 계급보다 노동자 계급이 훨씬 더 많이 분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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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인공지능 시대에는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업에서도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다. 위는 현대자동차 공장의 작업 모습.
또한 기본소득이 노동 공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좀 더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과 임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노동력의 판매 유무다. 한국에서 대다수 개인과 가구소득의 대부분은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이루어진다. 자산소득이 노동소득을 초과하는 인구는 상위 1% 가구에 한정되어 있다. 만약 개인이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기본소득으로 기초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노동소득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최저임금만 주는 직장에 다녀도 기본소득이 받쳐주는 만큼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파트타임으로 취업해서 짧은 시간만 일하고 남는 시간을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흔히 노동을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는 고된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간다. 현존하는 노동시장에서 양질의 일자리는 노동인구의 일부에게만 제공된다.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안정된 중소기업 등의 일자리가 모든 구직자가 선호하는 대상이다. 심지어 이런 일자리에서조차 노동자들의 주체성 및 자아실현을 보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중소기업이나 저숙련 서비스업에서 제공하는 저임금 일자리는 넘쳐난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과 인격적 상처,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삶을 꾸려나가며 심지어 자긍심과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만들어내고 만다. 이것이 중요하다.

자본가와 전문직은 일하고 노동자는 놀고먹는다?

이런 현실에서 모든 개인에게 인간적 존엄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현금 급여를 주면 노동 동기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당신이 직장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대가로 인간적 수모를 겪고 있다면,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경우, 당장 그 일을 때려치울 수 있다. 소비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다면 말이다. 결국 노동 과정에 대한 자본 측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노동조합의 협상력은 크게 강화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다른 생계수단(기본소득)을 보장받으면,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자본 측이 인력을 구하려면 더 높은 임금을 제공하고 작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두 시나리오를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자본 측이 실질임금 상승과 노동 측 협상력 강화에 설비투자 증가(기계를 도입해서 노동자를 대체)로 대응하는 경우다. 인공지능을 지닌 스마트한 기계들이 떠오르는 상황에서 제조업뿐 아니라 서비스업에서도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과정이 급속히 진행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노동절약적 기술 진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자본 측은 노동생산성(노동자 1인당 생산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의 상승 덕분에 단기적으로는 쾌재를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노동 수요의 감소에 따라 실업자가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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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기본소득은 대량실업 시대의 대안으로 언급된다. 위는 서울역 노숙자 모습.



기본소득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으면,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노동 측의 몫이 줄어들면서 불평등은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실업인구들이 기본소득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가계의 총소득 감소로 인해 유발될 수 있는 총수요 하락도 기본소득을 통한 가계지출로 어느 정도 완화될 것이다. 이 경우 노동소득이 있는 가구는 오히려 늘어난 임금과 기본소득으로 과잉 소비주의를 향유하면 되고, 실업자 가구는 기본소득으로 먹고살 수 있다. 결국 자본가와 중간계급, 전문직 종사자들은 일하고, 노동자들은 ‘놀고먹는 세상’이 된다. 이런 상황을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시나리오는, 시민들의 노동 동기가 대폭 추락하면서 경제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하는 경우다. 일하려는 사람이 줄어들면 실질임금이 올라간다. 이에 더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법인세율 상승으로 자본 측의 이윤율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자본 측이 투자 회피로 대응한다면, 기업 경쟁력이 장기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 자본 측의 경쟁력 약화는 노동생산성 하락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한국 자본주의의 대외 경쟁력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당장 기본소득을 통해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개인들은 행복하겠지만 경쟁력의 약화, 노동생산성 하락 등은 경제성장을 정체시키고 조세 기반을 약화시키며, 기본소득 자체의 지속 가능성까지 위협하게 된다. 현금이든 현물이든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면서 도입된 복지제도는 자본뿐 아니라 노동의 위기로도 치달을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두 계급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경제적으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어느 시나리오가 더 현실적일까? 필자는 두 번째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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