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나는 후보선수가 아니다" 강조...'국가 시스템 개혁' 포문

2016. 7. 10. 16:35지역 뉴스/서울시 뉴스





박원순 "나는 후보선수가 아니다" 강조...'국가 시스템 개혁' 포문

김재득 jdkim@joongboo.com 2016년 07월 08일 금요일
         

▲ 박원순은 누구?
출생지 : 경상남도 창녕
생년월일 : 1956년 3월 26일(만 60세)
학력
197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입학 후 제적
1985년 단국대학교 사학 학사
경력
1978년 제2회 법원사무관시험 합격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1983년 변호사 개업
1995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2001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2011년 제35·36대 서울특별시 시장

인권변호사에서 입지전적인 시민운동가, 시민운동가에서 또다시 재선 서울시장에 성공한 박원순(60) 시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야권내 주요 차기 대권주자다.

박 시장은 ‘소통을 가장 잘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보는 물론 보수와도 대화가 가능한 인사로 분류된다. 자신의 신념과 이념에도 매우 철저하다.

내년 대권도전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기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대권 요구도 있지만 그것은 대선전이 본격화된 이후에 판단할 일이고 지금은 서울시장을 맡고 있어 임기동안 최선을 다하면 기회도 주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면서 현 3당 체제 대권 후보 경쟁으로는 정권교체가 불가능한 만큼 대권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다.

박 시장은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불펜투수”발언에 대해 “나는 후보선수가 아니다”면서 대기선수가 아닌 본선에 나설 주자임을 우회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정치인의 덕목으로 내세운 시대를 읽는 통찰력과 강력한 추진력, 갈등 조정 능력은 자신의 최대 강점이다.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에 대해서는 ‘민생과 경제’를 꼽은 뒤 경제적 불평등 해소가 핵심이라고 밝혔다.

최근 정치권 이슈가 되고 있는 개헌론에 대해선 우리 사회에 닥친 큰 위기를 탈출하는 모멘텀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분권과 자치, 협치와 상생, 혁신과 변화의 정신을 개헌에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문제에 대해선 “정부가 기술혁신형, 창조경제형, 혁신기반형 경제와 정책을 이끌만한 부분을 굉장히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바뀌고. 이렇게 지속가능성 없이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시스템과 의지를 강조했다.

서울시장직 수행에 대해 국내외로부터 행정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로 송출되는 일본 공영방송 NHK의 위성방송 채널인 NHK-BS에서 영국 런던의 사디크 칸 시장, 프랑스 파리의 앤 이달고 시장, 미국 뉴욕의 빌 드블라지오 시장과 함께 환경문제 등 세계 주요도시들이 안고 있는 공통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약하는 ‘세계 개성파 시장’ 4인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렸다.

서울시의 혁신사례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나 LA타임즈 같은 해외 주요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전 세계 ‘공유도시’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수상이자 아시아에서도 두번째로 박 시장이 스웨덴 ‘예테보리 지속가능발전상’ 2016년 수상자로 선정돼 오는 11월 시상식에 참석한다.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박 시장이 대권경선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당내 막강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친노(친노무현)계를 대표하는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와 경쟁을 하기에는 세력이 너무 미흡하다. 지난 20대 총선서도 자신의 측근들 거의 대부분이 여의도 입성에 실패하면서 박 시장의 정치적 입지도 급속도로 축소됐다.

서울시장직을 유지한채 경선에 참여할 경우 운신의 폭에 한계가 있다. 서울시장직을 버리고 경선에 나서기에는 정치적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특히 지난 5월 28일 19세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구의역 사고는 ‘사람중심’을 강조해온 박 시장에게는 치명상이다. 시민운동가 시절 권력과 행정의 책임을 물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어떤 책임을 질지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등 리더십도 시험대에 올랐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인지도가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박 시장은 1956년 3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입학한지 3개월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나섰다가 투옥돼 4개월여를 보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서울대에서 제명처분을 받은 뒤 단국대 사학과에 다시 입학했고,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로 발령받았지만 적성이 맞지 않는다며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운명적인 故 조영래 변호사와 만나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구로동맹파업 사건’ 등을 함께 변호하면서, 조 변호사 등과 ‘정법회’를 결성했고,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 확대 개편했다.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다. 2000년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에 이어 아름다운 가게(2006년), ‘아름다운 커피’(2009년)를 연이어 설립했다. 살아있는 아이디어로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 실천하기 위해 대한민국 최고 싱크탱크 라는 ‘희망제작소’(2006년)도 설립했다.

2011년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행정가로 또다른 변신을 시도했고, 지난 2014년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했다.


▲ (사진 왼쪽부터) 이철희 의원과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 사진=연합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번 총선서 현역 광역단체장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전면에 나서지 못하면서 당내 세력 구축에 한계를 보였다.


 '박원순 키드' 10여명이 출마했지만 원내 진입은 기동민(서울 성북을), 권미혁(비례) 의원 두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거유세를 위해 박 시장과 사진을 찍고 간 인사가 3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함과 동시에 스킨십도 강화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과거 새누리당의 네거티브 공세 차단을 주도했던 '박원순지키기특별대응팀'에 참여했던 노웅래 박홍근 서영교 신경민 진선미 의원들도 '친박계'로 꼽힌다.

 비례대표 중에서도 민변 사무처장을 지낸 이재정, 과거 선거 캠프에 참여한 제윤경 의원은 친문(친문재인)인사로 분류되지만 인간적으로는 박 시장과 더 가깝고, 이철희 의원은 총선전부터 자주 소통하고 정치적 조언을 할 정도다.

 과거 선거캠프 대변인인 우상호 원내대표와 특보출신의 황희,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던 신경민 의원도 친한 인사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등을 만나 외연확대에 나섰다. 각계 외부 전문가 중심 포럼을 만들어 '국정 스터디'를 하는 방안이 검토중이다.

 박 시장의 가장 든든한 우군은 이른바 메피아(메트로 + 마피아)로 불리는 서울시와 서울시 산하기관 인사들을 꼽을 수 있다.

 이정원 서울메트로 사장, 지용호 감사, 오건호·김종원·이숙현 비상임이사 등은 박 시장의 정치적 측근들이다.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10명중 6명은 서울시 고위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민선 6기 박원순호의 'IT 싱크탱크'인 서울디지털재단과 함께 2011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구성된 '정책 자문단'도 물밑 지원군이었다.

 특히 박 시장은 그동안 운영하던 희망서울시정운영위원회를 폐지하고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시정계획자문단'으로 확대 개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