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를 위하여 - 거버넌스는 운동이다|

2016. 3. 9. 13:46지속가능발전/지속가능발전활동




거버넌스를 위하여 - 거버넌스는 운동이다|

[미래국가로 가는 길 뉴거버넌스  공동저자]

김미경,김성균,김정수,김택천,
신창현,신철영,오수길,위평량,
이정화,이형용,지영림


살림(삶)의 지혜

이영희 | 조회 21 |추천 0 | 2012.11.29. 09:59

 

거버넌스를 위하여 - 거버넌스는 운동이다. 

 

김태현 (사회디자인연구소 이사/책임연구원)

 

 

 <미래국가로 가는 길, 뉴거버넌스>라는 책을 중심으로 짚어보기로 하겠다.

  

영어에서 거버먼트(government)와 거버넌스(governance)는 '다스림(政)'이라는 공통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대비되는 용어이다. 거버먼트는 공권력을 갖고 계층제적으로 통치를 하는 '정부'라는 뜻으로 자주 쓰임에 반하여, 거버넌스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여러 세력과 협동하고 합의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형태, 즉 '협치'(協治)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다시 말해 공공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와 시민사회, 전문가 집단, 이익단체, 직능단체, 등 여러 공사조직들과 공동조향(Co-steering), 공동결정(Co-governcing) 해나가는 '공화적 네트위크식 국정관리체계'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적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신뢰는 국민적 공통자본이다.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정책결과 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게 여기고 국민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놓고, '대화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절차에 따라 효율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네트워크형 시스템 국정운영'을 펼쳐나가야 한다.

 

<뉴거버넌스> 이 책은 2003년 6월 ‘참여정부 시절’ 민관협력포럼 창립과 함께 시작된 월례포럼에서 발표한 자료 중에서 선별해서 구성한 것이라 한다. 민관협력포럼은 공직사회의 현장성을 강화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민-관-산-학-시민사회 파트너십에 바탕을 둔 생산적인 협력모델을 만들며, 이를 통해 한국적인 새로운 거버넌스의 전형을 창출하고자 제안되었다고 한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확산․심화와 함께 정부-시민사회의 협력 경험을 사회적으로 조직화하여 사회에 환류하고,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제안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거버넌스 개념의 여러 차원과 철학적․이론적 기반, 그리고 전망과 과제를 중심으로 참고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구체적인 부문별 영역별 사례는 책을 통해서 확인하기 바란다.

  

 

 

1.“거버넌스는 운동이다 :

혁명이상의 혁명으로서의 거버넌스”

 

거버넌스’는 뚜렷한 사회적 흐름을 형성해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말깨나 하고 글줄깨나 쓰는 사람들 사이에 ‘거버넌스’는 최신 유행어 목록에라도 오른 듯 하고, ‘옴부즈만포럼’, ‘갈등포럼’ 등 이른바 거버넌스형 조직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처럼 전사회적인 특정 과제에 대한 거버넌스적 대응도 목도하고 있다. 노사정 대화기구는 진즉에 법제화하였고, 최근에는 ‘희망포럼’에서 일자리 창출을 기치로 사회적 대타협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참여정부는 들어서면서부터 국정 핵심 방향으로 참여와 분권을 설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거버넌스는 아직은 미약한 바람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거버넌스’는 몹시 낯선 말이다. 모 대기업 사회공헌팀장은 앞으로 서로 잘 협력해보고자 마련한 시민단체 중견 간부들과의 대화모임이 파한 후 간극 같은 두터운 벽을 느꼈다고 실토하고, 어떤 거버넌스형 포럼에서는 공무원 회원이 간사를 맡는 것에 오히려 공무원들이 과민한 피해의식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거버넌스가 함축하는 사회발전상의 의의, 위대한 진보적 의미를 미처 간과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거버넌스가 갖는 보다 포괄적인 성격, 단지 행정혁신 차원이 아니라 사회운동적인 성격과 그 철학적 사상적 기반 등을 대강이나마 짚어보고, 모두의 꿈이라 할 보다 인간다운 사회, 모두가 자유롭게 자아실현 하는 미래 사회를 향하는 장대한 운동으로서의 거버넌스를 제안하고자 한다. 새로운 국가사회 혹은 공동체 운영 패러다임으로서의 거버넌스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기를 희망한다.

  

□ 운동, 종말인가? 새로운 시작인가?

 

사회 운동은 전통적으로 법, 제도의 변경을 통한 권력 구조 및 권력 주체의 변경․ 교체나 (집단적, 그것도 이른바 본질적인)사회경제적 이해관계 구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운동의 기본적인 동력은 피지배 혹은 피억압 집단의 정치경제적 및 사회적 권리 추구로 이해되어 왔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서구에서는 이른바 ‘신사회운동’이 등장하였다. 그것들은 계급지향적인, 혹은 계급 운동 중심의 구사회운동과 달리 환경, 평화, 여성, 인권 등의 가치지향적인 운동으로 분류하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90년대 이래 이른바 시민운동이 부쩍 성장하였다. 더러는 시민운동을 서구의 신사회운동과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섣부른 일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한국의 역사사회적 맥락에서 민주화운동의 맥을 잇고 있으며, 민중운동과 얽히고설킨 관계에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시민운동은 적어도 시민운동의 주류 운동관은 전통적인 운동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거나 대체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제안은 운동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운동 현실을 잘 반영하여 설명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나아가 운동의 지평과 전망을 확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이제 운동을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인간의 노력. 인간의 자아실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들을 거둬내고 자유를 고양하는 것, 이와 같은 방향으로 변화를 일구는 일을 만드는 것’으로 넉넉하게 바라보기로 하자.

 

□ 운동, 체제론에서 운영론으로

 

운동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현재 있는 문제를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거나 조금이라도 더 완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 현재가 지선(至善)이 아니라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사회 운동의 기본이다.

지금까지 사회운동은, 특별히 이른바 진보적인 사회운동은 사회 ‘체제’에 주목하여 왔다. 억압을 구조화하거나 혹은 불평등한 삶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는 거대한 구조 틀로 작동하는 사회 체제의 변혁 없이는 사회구성원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의 추구는 기껏해야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늘 이를테면 근대체제, 자유시장경제체제, 사회주의체제, 민족자립국가체제, 공화제, 의회제 등 체제 변경을 목표로 하여왔다. 오늘날 운동 주위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사회운동의 총노선의 부재니, 새로운 패러다임의 부재니, 대안적 사회상의 부재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맥락 속에 있다 할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사회 ‘운영’, 혹은 체제 운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체제와 운영, 운영과 체제는 전혀 별개로 분리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막연히, 거의 무의식적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체제 자체가 곧 운영 문제 자체를 결정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경우와 운영의 문제를 그 자체로 체제의 문제만큼이나 중시하는 것은 이미 사회인식론적인 기반을 달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시대가 흐를수록, 과거 운동의 성과의 축적을 토대로 하여 운영의 문제가 체제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며 나아가 운영의 문제 자체가 곧 체제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보다 인간다운 운영은 곧 보다 인간다운 체제를 일구는 길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운동 자체의 성숙에도 관련되는 문제이다.

이제 사회 운영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회의 운영, 즉 사회 혹은 공동체의 의사결정과 집행, 권한과 책임의 행사 등에서 사회 혹은 공동체 내부, 내부의 구성을 보다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고, 따라서 그 실체가 점점 더 엷어지는 듯한 ‘사회’에서 나아가 직접적으로 ‘사회 성원들’의 자아실현에 더 많은 밀착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회 운영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역사의 종말론이 현실로 힘을 행사하는 시대에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길이요, 어쩌면 종내 인간의 성숙, ‘류’로서의 인간 해방을 넘어 ‘실존’으로서의 인간, 개인의 성숙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 단계를 밟아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 운동, 완결에서 과정으로

 

운동은 지금껏 말하자면 ‘완결’을 추구하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운동은 그 결과 완결지어 나타나는 상, 새로운 상이 있었다. 있어야 했다. 그것은 특정한 체제이기도 하고, 특정한 제도이기도 하고, 특정한 권력관계의 변화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부르조아 체제, 보통선거 제도, 민중권력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실은 운동 자체는 과정이다. 끊임없는 추구 과정인 것이다. 이처럼 당연한 사실과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 또 다른 문제이다. 운동을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운동하는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여유롭고 편안하다. 그때라면 운동이나 사회나 인생을 바라보는 데서도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 선과 악의 이분법의 구속에서 많이 자유로와질 여지를 넓혀 준다.

과정에서나 결과에서나 해방을 향해 가는 운동, 목표에서나 방법에서나 보다 더 평화를 향해가는 사회, 추구에서나 의미에서나 보다 더 충일을 향해 가는 인생, 이는 완결주의적 관점에서 ‘과정’에 대한 확고한 자각으로의 전환에 의해 더욱 잘 뒷받침 될 수 있다.

 

□ ‘거버넌스’의 차원들

 

한마디로 거버넌스라 하더라도 관점에 따라서 여러 차원, 층위에서 접근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강 보아도 이를테면 전사회 차원, 특정 영역 차원, 정책 차원, 일하는 방식 차원, 의식과 태도 차원, 그리고 운동 차원 등등.

이러한 층위는 주체나 관계자의 현재의 주된 관심에 따른 것이고, 그 모두가 다 걸려 있다. 그래서 거버넌스는 사회운동이요, 체제혁명 이상의 차분한 혁명 운동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관심에서 거번넌스는 일단 폭넓게 “(사회적) 의사 결정(그리고 집행)에서의 관련자들 혹은 구성 부문들의 (적극적) 참여”를 이르는 것으로 하고 가자.

 

□ 거버넌스 - 다원영역체제 휴머니즘 사회를 향하여!

 

거버넌스는 일차적으로 민과 관의 새로운 관계 모델, 파트너십 모델이고, 나아가 국가사회 운영 패러다임으로서 국가, 시장, 시민사회 혹은 정부, 기업, 시민단체 정립 모델로 이해한다. 이 같은 거버넌스를 확장, 확대하고 전 사회적 수준으로 전면화하면 ‘다원영역체제’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다원영역체제란 쉽게 말해서 행정, 경제, 산업, 문화예술, 교육, 복지, 과학기술, 봉사, 종교 등등의 사회 제영역이 동등한 위상에서 전체 사회 운영, 의사 결정, 자원 배분에 참여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같은 진전은 적어도 두 가지를 전제로 할 것이다. 첫째, 사회 각 영역, 부문들이 충분히 합리화할 것, 둘째, 사회 각 영역, 부문 즉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해와 욕구를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할 것이다. 전자는 영역들 간 소통을 위해 필수적인 전제이다. 예를 들어 문화 영역이 그 고유한 특성은 별도로 하고 이성의 언어로는 타영역과 대화할 수 없다면, 그리고 종교의 영역이 초월의 언어를 고집한다면 의미 있는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 전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물론 사회의 총 자원 내지 가치 생산력의 발달, 각 부문 및 각 성원들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의 보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 및 그 적절한 제도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부문, 성원들의 다수가 자신의 생의 의미를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추구하는 향상과 자유의 과정에서 찾을 정도로 ‘존재의 성숙도’가 함께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선후는 기계적이지 않을 것이다. 거버넌스의 확장은 거꾸로 주체의 변화와 성숙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다원영역제체론은 사실은 어느덧 ‘사회체제론’ 수준의 논의가 되는 것이고 ‘운동론’이 되는 것이다. 운동론 하고도 이 같은 지향은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체제니 사회주의체제니, 자유민주주의니 인민민주주의니 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체제 중심, 제도 중심 사고, 혹은 (정치경제) 권력 중심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사회경제혁명, 정치 혁명을 넘어서 ‘존재의 혁명’을 아우르는 보다 확장된 차원의 혁명, 혁명이상의 혁명, 그러나 차분한 혁명을 전망케 한다.

 

□ 거버넌스 -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활동의 통합을 향하여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활동 혹은 사회 발전은 서로 다른 차원의 일이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지난 시절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 대개 권력자나 큰 재력가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이나 사회 정의 같은 것은 곧잘 무시하였고, 일반인들은 일반인들대로 직장생활 따로 자기실현 따로 이고 심지어는 사회운동에서조차 경향적으로 그랬다. 그래서 활동가들은 사회운동을 위해 개인의 생활, 때로는 저 깊은 내면의 다독임까지 오롯이 희생해야 했다.

거버넌스는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 활동의 통합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동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관심을 내기만 하면 자기 일로부터, 자기 일을 통하여 바로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관계할 수 있다. 아니 거버넌스의 진전은 보다 많은 부문,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 전체 사회 발전과 성숙에 관심을 가지도록 촉진한다. 예를 들어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즉 기업사회책임이 일반화하고 확산되면 이제 기업 쪽 일을 하는 사람은 돈 버는 것, 이윤을 남기는 일만이 아니라, 소비자, 종업원, 거래처, 지역 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다양한 사회발전상의 문제 및 가치들, 예를 들면 환경, 인권, 반부패, 자기계발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혹은 가져야 하며, 달리 보면 그와 같은 이슈, 가치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거나 기여할 수 있게 된다.

 

□ 거버넌스 - 대의제에서 통의제(通意制)로!

 

지금까지 민주주의는 곧 의회를 중심으로 한 대의민주주의였다. 의회제는 민주주의 제도로서 그 빼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를테면 직업, 교육, 수입, 출신 등 주민구성이 다원화한 현대 사회에서 의원이 갖는 대표성의 ’내용’, 의사결정의 ‘질’ 등 대의제 자체의 한계는 이미 많이 지적되어 왔다.

현재의 대의제 아래서는 사회 각 구성부문 및 구성원들이 4,5년에 한번 있는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자기 일, 활동, 생활과 관계된 문제의 결정권과 집행권을 의사 대리 여부가 지극히 불투명한 ‘대리인’(정치인)이나 그 대리인의 대리인들(관료)에게 온전히 맡기고 스스로는 기껏해야 로비스트의 지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현실에서 주민 의사의 대의 노릇을 본령으로 하는 정치권력의 기이한 비대화와 위치 전도를 초래하고 있고, 이와 연결되어 선거를 준비하기 위한 자금 마련 때문에도 경제 권력이 정치권력과의 유착 속에 역시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는 환경을 만든다. 일반 국민들의 자기 결정성을 떨어뜨리고 사회 제 영역, 부문 간의 위상에 차등을 낳고, 그에 따라 각 영역 부문 사람들 간에 삶의 충일도에도 차등을 초래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셈이다.

거버넌스는 자기 영역 부문, 자신의 일, 자신의 적극적인 관심사와 관련하여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혹은 훨씬 더 가까이, 더 자주 혹은 더 일상적으로 참여를 촉진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 자신의 영역과 거의 무관한, 심지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을 경유해서가 아니라, 자기 영역, 자기 일을 통하여 사회적 의사결정과 때로는 집행 과정에 더 주체적으로 적어도 더 가까이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말을 만들자면 ‘통의제적’이라고나 할 것이다.

 

□ 차분한 혁명, 거버넌스 - 장기적이고 심층적이고 온유한 운동!

 

거버넌스는 그 자체 이미 상대적으로 과정 지향적이다. 그리고 참여와 합의, 조정과 통합, 실천과 협력 등을 그 성립의 원리로서 중시한다. 거버넌스는 따라서 이미 덜 요란하고 덜 파괴적이다. 그렇기에 거버넌스는 흔히 갈등 문제 논의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버넌스는 무엇보다 사회의 질적 발전 내지는 개인의 성숙과 함께 가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 지향적이고, 늘 신실한 자기 성찰에서 멀어질 수 없다. 아마도 높은 수준의 거버넌스는 궁극적으로는 이른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지향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거버넌스는 혁명이상의 혁명이면서 내재적으로 차분한 운동이지 않을 수 없다. 거버넌스는 내재적으로 경계 넘나들기 가로지르기,융합을 통한 새로운 장, 새로운 에너지 장, 활동 장을 권장한다. 경계 가로지르기, 넘나들기, 뒤섞기를 통하여 이른바 새로운 블루 오션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2. 거버넌스의 철학적 사상적 이론적 기반

 

1) 인간론

 

오늘날 근대 서구문명, 서구의 과학기술과 제도와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조류가 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 서구 문명의 바탕에는 물론 근대적 인간론이 자리하고 있다. 그 근대인은 알다시피 ‘합리적 인간’이다. 그는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유와 계산에 능하고, 무엇보다 이기적이다. 물론 객관 대상에 대해 주체로서 자기 정립하여 대개는 합목적적인 노동을 하며 때로는 부지런하다. 이와 같은 근대인끼리는 보편적인 이성의 언어에 기댄 소통이 가능하고 따라서 자기 책임 하에 계약을 맺어 상호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계약에 있어서 평등하다.

이 같은 근대인이 등장함으로써 인간은 이제 비합리적인 권위, 이를테면 종교적 권위나 전근대적인 봉건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금욕주의로부터 벗어나 공정한 경쟁의 조건 하에서 자신의 이해를 맘껏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개인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활동은 전체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적극 권장되었다. 그리하여 근대인은 정치적 자유와 재부 축적의 자유, 이익 추구의 자유를 구가하게 되었다.

물론 비근대인 혹은 미개인, 야만인은 근대인과 공존할 자격도 권리도 없는 별종이었다. 대부분의 이타적인 인간 역시 웃음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소수자 혹은 약자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처치가 참으로 피곤한 불량품이거나 잘하면 관리대상이었다.

인간에게 ‘이성’이 유일한 척도인 만큼이나 세상에는, 인간사에는 늘 단일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른 객관적인 우열이 존재했고, 그 우열에 따른 차등 대우는 또한 너무나 정당했다. 세상에는 덜 이성적인 인간도 충분히 많았고, 한마디로 이성이라 하더라도 그 내부의 결은 그리도 풍부하건만 이 같은 섬세함은 이제 우연으로,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시되고 멸시된다. 어느덧 사람들의 인생에서 우주에 둘도 없는 자신만이 추구하는 고유한 생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타인들과 경쟁에서의 우월적 지위의 획득 혹은 성취가 들어서고 굳어져갔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점차 우열의 노예, 인정투쟁의 노예가 되어갔고, 어느 순간 충일한 삶의 의미, 혹은 존재의 자유는 사활을 건 끝없는 경쟁에 저당 잡혔다. 각자가 지닌 차이로 하여 더불어 우주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근원적 동근성에 근거한 열린 연대에 대한 관심은 자주 쓸모없거나 어리석은 연민 놀음으로 타일러졌다. 점차로 근대적인 이성은 암흑을 밝히는 빛일 뿐만 아니라 참 삶, 의미로 충일한 삶에서 눈이 멀게 하는 빛으로, 빛의 어두움을 짙게 드리우게 되었다.

만일 이 우주가 그토록 찬란하게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이성의 빛이 가득한 탓이 아니라, 가이없는 풍부함, 그 풍부함을 낳는 차이, 차이로 가득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 차이의 풍부함은 사람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이전에, 그를 포함하여 ‘자아실현 욕구’이다. 자아실현 욕구의 방향이나 내용은, 어느 정도 분류는 가능할지언정, 우리가 경험하는 한에서 이미 천차만별이고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진리를 좇는 자. 선의 실행에 편안한 자. 미의 발견에 환희하는 자. 또 타인에 대한 영향력 행사, 명예의 추구, 풍족함과 편리함에의 올인, 모험 그 자체 등등. 그것은 마치 사람들의 생김새나 피부 빛이 천차만별인 것에 유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좇는 자아실현의 길, 의미로 충일한 삶의 길은 무수히 다양한 갈래가 있고, 그 같은 다양성, 혹은 풍부함을 보장하고 발현하고 구현하기 위한 제반 장치, 조건, 환경, 태도와 의식을 확장해 가는 것은 미래를 여는 사회운동으로서 중요한 지점들이다. 이 지점에서 거버넌스는 사회운동의 정체성의 확장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고, 또 그 이전에 역으로 다원성, 부문들의 차이와 존중을 원리적 기초로 하는 거버넌스가 이미 다원적인 인간론을 요청하고 있다.

 

2) 민주주의론

 

서구 근대체제의 가장 큰 성과의 하나는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 민주주의 사상의 일반화, 보편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민주주의는 신의 주권, 왕의 주권, 가문 주권 들을 대체하여 인민주권론을 확립하였다.

한편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주로 권력과 제도의 문제로서의 민주주의에 집중되었다. 그것들은 선출을 통한 정부 구성이며, 의회제도며, 보통선거제도며, 사유재산제도며, 자유기업제도며, 법치주의며 등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관 역시 주로 권력관계 및 제도 변경에 초점이 맟추어졌고 그 큰 판이 사회체제 변경이었을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를 보다 인간다운 사회, 모두가 자유롭게 자아실현 하는 사회에 대한 지향으로서, 그 같은 것으로서 휴머니즘으로 직접 등치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이것들로는 부족하다. 민주주의는 이제 더 깊고 더 넓어져야 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라는 말로 담아내는 내용이 더 풍부해지고 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간다운 삶, 혹은 인간다운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이제 인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하는 권력과 제도의 문제를 넘어 ‘모든 사람의 자아실현과 향상’의 문제로 확장, 재정의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심화 확장된 민주주의의 발전, 구현이라는 지점에서 거버넌스는 매우 유력한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3) 사회 인식론

 

신화와 신학의 시대를 지나 근대학문이 성립한 이래, 그것도 사회과학이 성립한 이래, 그 토대가 되는 사회인식론적 준거 틀은 토대-상부구조론이었다 할 것이다. 이는 다 아는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류에서는 강령수준으로 정식화되기까지 하였다. 토대-상부구조론이라 하면 물질토대, 즉 사회경제 제관계가 전체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동력, 동인이 되고, 그 위에 주로 정치 및 권력 제도가 자리하면서 토대와 조응 및 길항 관계를 형성하고, 그 상부의 상부에 정신문화적 영역이 미약하게 자리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토대-상부구조 인식틀은 전체 사회체제의 작동원리를 규명하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서 관념적인 도덕적 교설이나 당위적 구호의 미망에 빠지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적 조건을 만들고 진전을 이루게 하는 데 위력적인 역할을 하였다 . 오늘날에도 ‘정치에서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그리고 자주 종교인들조차도 내밀하게 정치권력에 줄을 대는 것에서 보듯,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상당한 정도로 사회 전체의 생산력이 고도화하고, 민주주의 진전에 따라 권력의 절차적 정당성이 일반화해가는 시대상황에서, 이 토대-상부구조론의 위력은 약화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토대-상부구조론에서 다원영역체제론으로 사회인식론의 전환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고 있고, 그 같은 필요를 제기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는 고유한 의미를 추구하는 성숙한 인간들의 인식 지평의 확장과 차이에 대한 감수성과 조정 능력의 성숙이 연동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영역체제론은 사회 인식론이면서 뚜렷이 가치론이기도 하다. 새로운 국가사회 운영 패러다임으로서의 거버넌스는 이같은 다원영역체제론과 함께 가는 것이다.

 

4) 현대 사회론

 

국민 의식과 행동양식 측면에서, 권리의식의 증대와 참여 문화의 확산은 이미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 또한 진작부터 권위주의의 위기와 대의제의 한계를 불러오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국민들/주민들은 자기 권리문제에 예민하고 그 권리를 주장하는데 서슴이 없다. 거의 모든 정책 추진에서 나타나게 되는 이른바 NIMBY현상이나 PIMPY현상들은 달리 보면 이 같은 권리의식이 만개하여 표출되는 현상들이다.

또한 일상화한 네티즌 정치와 체험프로그램의 상한가 현상에서 보듯 참여의 문화 역시 구석구석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 기반의 1인 매체 시대를 맞아 대중들은 사회 제반 문제와 영역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데 주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은 하물며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두고서 하염없는 대기자나 기껏해야 로비스트의 지위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대중들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거버넌스의 주체가 될 의지로 넘치고 있다. 설사 나서기를 원치 않는다 하여도 기회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경제 발전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디지털화가 주도적인 양상이다. 또한 물질토대의 규정력 약화도 주목할 경향이다. 디지털화는 경계 혁명, 시공간 혁명을 불러온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시각, 청각, 촉각, 등 감각 경계와 리얼과 사이버의 경계를 허물어뜨릴 뿐만 아니라 인문적으로는 지리, 문화의 벽을 무너뜨리고, 사회적으로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제 영역의 독자성을 허물어버리고 있다.

이 같은 디지털 시대에 관건적으로 요청되는 역량은 멀티 창의성에 기반한 융복합 능력의 고도화 내지는 변통자재력이고, 사회 심리적으로는 ‘소통’ ‘관용’ ‘존중’ ‘조정’ ‘무애’ 등이 대단히 중요하다.

한편 물질 토대의 규정력이 약화하는 데 따라 사람들은 삶의 질에 관심을 갖고, 감성, 영성의 계발에 눈뜨고, 고유한 삶의 의미와 자아실현에 점차로 눈을 돌리면서 차이를 존중하고 또 존중받고자 한다.

거버넌스는 이 같은 시대흐름에 조응하는 국가사회 및 공동체 운영 방식이자, 거꾸로 디지털 시대에 합당한 사회와 인간의 성숙을 촉진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글로벌 환경 측면에서 보자면, 지역화-세계화의 흐름과 이에 따른 인류보편가치 추구의 현실화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다. 세계화는 일시적인 경쟁의 격화와 국민국가적 위기를 동반하지만, 전인류적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인간다운 삶의 실현, 자유로운 자아실현으로서의 휴머니즘의 구현을 이제 전세계적 규모에서 직접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전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인간 해방과 인류 평화의 추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할 수 있다. 당일로 세계 각지를 찾아가 온갖 인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인터넷 등을 통해 세계 사람들과 직접 공적 사적 비지니스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단일한 이슈, 의제를 가지고 전세계 사람들과 캠페인을 조직할 수 있다. 불과 한 세대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전 지구적 캠페인 - 예를 들면, 반세계화 시위든, 반전 시위든, 혹은 자원봉사 캠페인이든 - 을, 낯선 나라를 돌아다니며 펼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지구화-지역화 테제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국가권력 혹은 정부, 혹은 기업, 혹은 시민사회 어떤 영역이든 일방적인 일의 진행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무기력하고 무의미해진다. 거버넌스는 지구화-지역화 시대가 평화와 성숙의 시대로 순진입하기 위한 자연스런 사회운영 철학이자 원리이자 이미 현실이다.

 

5) 한국 사회, 한국 사회운동론, 미래 대안 담론

 

여기는 한국이다. 우리는 무릇 사회에 대해서, 사회 운동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머리로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거버넌스를 이야기해도 한국적 거버넌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거버넌스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마당에 한국 사회론, 한국 사회운동론은 반드시 경과해야할 지점이다.

거버넌스는 객관적 사실의 설명만이 아니라 운동적 제안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른바 역사의 종말(?) 시대라고 한들, 새로운 역사를 모색하며 더 빛나는 전망과 대안의 활력을 창출하는 노력을 외면할 수 없다. 거버넌스는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기 마련인 미래 대안 담론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 운동은 대항 권력, 대체 권력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체제 건설을 모색하거나 혹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감시 및 대변을 부각하는 것이 주류 흐름이었다. 현재 어느 흐름도 정체 상황을 맞고 있다. 대안 체제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인가 하면, 정당의 변화와 합리화에 따라 이른바 대변형 운동 역시 역할 축소 국면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진단이다.

이 같은 운동 안팎의 상황에서 거버넌스는 거시적 전망과 미시적 대변 양 측면을 포괄하며 사회 운동의 정체성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는 미래 대안 담론으로서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담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3. 거버넌스 운동의 현실적 목표 혹은 과제

 

☐ 전사회적

 

첫째, 거버넌스를 통해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진화·심화시켜야 한다.

민주주의 문제는 인민주권의 원리에 따른 절차적 민주주의와 제도적 민주주의의 완성, 그리고 기본적 인권으로서의 생존권의 보장 등에서 한 단계 나아가 모든 이들의 자아실현과 향상으로서의 민주주의로 더 셈세하고 더 풍부하게 깊어져야 한다. 거버넌스 운동 역시 이에 기여하여야 한다.

둘째, 국가사회 발전역량의 통합 발현을 극대화해야 한다.

세계화 시대 일시적인 경쟁의 격화 속에서, 그리고 디지털 시대 융복합 국면에서 거버넌스를 통해 국가 사회발전 역량을 유연하게 통합적으로 발현하면서 사회 전체의 역동성을 창출하고 지속시켜야 한다.

셋째, 전지구적 거버넌스를 선도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세계사 및 세계 지리 속에서 우리 사회는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 사회는 전인류적 보편 가치의 창출·구현 및 인류사회의 발전과 성숙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유리한 지점에 있고, 그에 대한 요구도 있다. 이제 한국적 뉴거버넌스의 창출을 통해서 우리 사회 내부의 균형 잡힌 질적 성숙을 기하는 한편, 전지구적 거버넌스를 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부문별

 

여기서는 세부로 나누기보다 대략 정부, 기업, 시민사회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 간략히 짚어보는 것으로 하겠다. 다분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첫째, 정부로 말하면, 한국적 거버넌스 구현과 정부경영의 혁신, 선진화에 힘써야 한다.

이미 정부가 권위나 공공성을 독점하던 지위에서 밀려나 다른 나라, 다국적 기업, NGO, 지방정부 등과 일종의 경쟁 환경에 처한 마당에 오래 묵은 관료지배체제의 관성을 말끔히 극복하고 정부경영의 혁신과 선진화를 이룩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총자원의 배분 정책 결정과 집행의 일차 책임 단위로서 한국적 거버넌스 구현을 선도해서 좋을 일이다.

둘째, 기업은 기업시민의 책임을 제고하고 기업의 사회적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

기업 환경도 빠르게 변화하여 일부 나라에서는 이미 주주자본주의를 넘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한참 논하는 마당이다. 무엇보다 기업 스스로 이윤 제조 기계 논리를 극복하고, 소극적 위상에서 탈피하여 적극적 위상을 확보해가서 좋을 일이다. 이를 위해 안으로 고유하게 일자리를 창출하고 좋은 가치를 생산하는 데 힘쓰는 한편, 밖으로는 기업시민으로서 전사회적 문제에 대해 합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응분의 책임도 다하려는 전환이 필요하다.

셋째, 시민단체의 혁신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지속적으로 촉진해야 한다.

이제 인터넷 환경을 포함한 시민사회 환경은 시민단체에 정의로운 감시․비판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과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정부와 기업측은 안팎의 도전과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막강한 자원을 투입하여 자기 혁신 작업에 나서고 있다. 시민단체들 역시 언제까지 예외일 수 없다. 우리 역사의 특수성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도덕패권주의와 운동우월주의를 극복하고, 운영과 사업활동 등 측면에서 합리성을 높이며, 나아가 생활인들의 참여 확대를 기반으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해 가서 좋을 일이다. 특별히 이 같은 시민단체의 강화와 시민사회의 성숙에는 전 사회적인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 존재 변혁의 근거를 북돋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

 

거버넌스는 민주주의 심화와 진화, 즉 모든 이들의 자유로운 자아실현과 향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접속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화하는 계기이자 동시에 그 주요 가늠자의 하나로 되는 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존재 즉, 생존 문제의 불안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한 사회적 기반에 대한 합의라고 본다. 이를 제도화하는 것은 이를테면 ‘신복지사회 협약’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구복지 개념이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최소 인권을 보장하는 차원인 데 비해,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사회적 토대와 조건을 만들어 가자는 전사회적 합의를 일컫는 개념이다. 이는 자아실현의 추구와 타인에 대한 존중, 절제와 성숙에 기초한 휴머니즘 사회를 향하는 중간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사회조정위원회의 구성

 

전체 사회적 의사결정을 위한 시스템의 한 축으로서 사회조정위원회와 지역위원회의 구성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다양한 영역, 세부 부문들로 섬세하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며, 지역차원에서는 그 실정에 맞게 지역 내 제 구성부문으로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위원회는 대의제 의회와 병존하거나 하면서도 다루는 사안과 역할 등에 따라 일종의 상하원 형태나 혹은 특별위원회 형태로도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조정위원회는 의회와는 출발 동기부터 달라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의사결정권이나 집행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사 조정을 보다 잘하여 그 전후 과정에서 사회의 통합력을 높이는데 주된 관심을 둘 것이다.

 

☐ 지구위원회의 구성

 

지구위원회는 거버넌스를 전지구단위로 구현하는 틀거리다.

맹아적인 형태로 글로벌 거버넌스 조직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지구위원회는 개념형성 단계에서는 그 자체 다양한 형태, 다양한 방식, 다양한 내용들로 존재하다가 전 지구적인 합리적 소통 흐름이 형성되고, 사회 발전 및 성숙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그 내포와 그림이 뚜렷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이 지구위원회는 국민국가가 존재하는 한, 혹은 지역연합이 존재하는 한, 이를테면 UN과 병행해서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도 지구위원회는 외교기구가 아니라 글로벌 수준의 의사조정기구로서 전인류적 차원에서 자아실현과 향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휴머니즘을 구현해 가는 거버넌스 기구의 역할을 해나갈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 거버넌스의 시대?

 

급할수록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거버넌스 운동을 요청하는 현대사회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인 디지털화는 ‘속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거버넌스는 과정적 운동이다. 장기적 운동, 어쩌면 하염없는 운동이다. 거버넌스 운동은 긴 호흡으로 한 세대 혹은 그 이상을 가는 운동일 때 비로소 성숙한 사회 발전과 휴머니즘의 구현에 돌이킬 수 없는 보람을 일구며 ‘운동’으로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부단한 자기 성찰과 혁신으로 하여 타자, 다른 부분의 감동을 솟구고, 그의 성찰과 자발적 혁신을 무연인 듯 이끌고, 그에 협력하는 공명(共鳴)의 행보는 역시 거버넌스스럽다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