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선생님,,시대의 지성을 보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 남겨,,

2016. 1. 16. 11:07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시대 지성' 신영복 별세…'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 남겨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15일 별세했다. 향년 75.

고인은 2014년 희소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이날 오후 9시30분 서울 목동 자택에서 운명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1963∼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6∼1968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20년 만에 출소한 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감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한과 고뇌를 230여 장의 편지와 글에 담아 삽화와 함께 실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를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수많은 이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출간 10년과 출소 10년을 맞은 1998년, 더욱 새로워진 형식과 내용으로 재출간됐다.

출소 이후 발견된 메모 노트와 기존 책에 빠진 편지 글들을 완벽하게 되살려냈다. 1998년 3월13일 사면 복권되면서 1998년 5월1일 성공회대 교수로 정식 임명됐다는 점에서도 당시 재출간의 의미는 각별했다.

고인이 옥중에 있을 때 출간됐던 기존 책은 1976년 2월의 편지부터 실려 있었다. 재출간된 책에는 '청구회 추억' 등 1969년 남한산성육군교도소에서 기록한 글들,1970년대 초반 안양·대전교도소에서 쓴 편지들까지 누락 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담겼다.

20대 사색의 편린들과 어려웠던 징역 초년의 면모까지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남한산성육군교도소에서 휴지에 기록한 사색노트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근무한 어느 헌병의 친절이 아니었더라면 영영 없어져 버렸을 소중한 기록이다.

또한 그가 교도소에서 그린 그림,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휴지와 비좁은 봉함엽서 등에 철필로 깨알같이 박아 쓴 일부 편지의 원문을 그대로 살렸다. 기존 책이 수신자별로 구성됐던 것과 달리 이 책은 시기별로 구성돼 발신자인 저자의 입장이 더욱 잘 드러난다.

이후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 1·2(1998)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등 깊은 사색과 폭넓은 사상이 담긴 책을 펴냈다.

'엽서'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동안 수감돼 있으면서 고인이 보냈던 감성적이고도 지성적인 편지들을 그대로 영인해 묶은 책이다. '나무야 나무야'는 20년을 복역 후 가석방된 그가 전국의 사연 있는 곳을 두루 답사하면서 느낀 점들과 국토와 역사에 대해 사색한 24편의 글에 그림, 사진을 곁들여 엮은 책이다.

'강의'는 성공회대에서 '고전 강독'이란 강좌명으로 진행됐던 고인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고전 강독을 토대로 과거를 재조명하며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고전 독법에서 과거에 대한 재조명이 가장 중요하다"며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2006년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을 붓글씨로 그려주고 받은 1억원을 모두 성공회대에 기부했다. 2007년 그의 글씨, 그림, 삶의 잠언을 한데 모은 베스트 에세이집 '처음처럼'이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뛰어난 서예 솜씨는 감옥에서 정향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로 전해졌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을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줬다.

【서울=뉴시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왼쪽) '담론' 2016-01-16

고인은 영어의 몸으로 겪어낸 20년20일간의 옥중 삶을 원망하기보다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 '나의 대학 시절'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2006년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다.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했으나, 2014년 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해 겨울학기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떠났다.

지난해 4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단 '담론'을 펴냈다. 신 교수의 강의 녹취 원고와 강의노트를 토대로 쓴 베스트셀러다. 그는 "앞으로 강단에 서지 못하는 미안함을 이 책으로 대신한다"고 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리고, '강의'에서 동양고전을 이해하는 법을 탐색한 그는 '담론'에서 이 둘을 합쳐 동양 고전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제시했다. 자전적인 글도 포함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검열 당하는 편지에 미처 쓰지 못한 말과 '청구회 추억'을 쓸 당시의 심경, 스스로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표현하는 기나긴 무기징역수의 삶 등이다.

신영복 , 영원한 대화와 마음으로

 

신영복 선생님(성공회대 석좌교수)께서 어제(15일) 오후 서울 양천구 자택에서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향년 75세. 2014년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셨습니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끝내 숨졌습니다. 너무 슬픈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00년 아름다운재단 설립 기획실장(이후 초대 사무처장)으로 일할 때, 신영복 선생님(이하 선생님)의 도움(서체 등)을 받기 위해 여러 차례 만났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그 이후 많이 찾지 못했습니다. 작년 선생님이 펴낸 '담론'. 어찌 잊겠습니다. 지난 시절, 아니 잊을 수 없는 시절. 선생님은 감옥에서 20년을 보내면서 생각과 담론을 담은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일반 시민들이 가장 많이 읽고 사색했던 책.
2015년 11월 중순 웹진 00(가칭) 창간호(1호) 인터뷰를 통해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이 마지막 인터뷰이...선생님. 이른 새벽에 바깥에 서서 눈을 잠시 감아봅니다.

선생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웹진에 수록된 텍스트 원고를 공유합니다. 발췌해서 공유할려고 했는데...전문을 공유합니다. 웹진 링크는 추후에...내용이 길더라도 마음으로 오랫동안 내용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웹진 편집인/ 밥이야기(가칭) 드림



" 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 "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창간 인터뷰

세상에,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예쁘고 고즈넉한 공간이 있었다니….” 신영복 선생이 인터뷰 장소로 정해준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 뜨락에 막 들어섰을 때, 일행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선생의 안내로 성당 뒤켠으로 들어서자 한옥으로 단아하게 지어진 사제관과 잘 가꾸어진 앞마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오랜 가뭄으로 푸석해진 마당을 적시던 10월 26일 저녁, 옅은 어둠이 사제관을 둘러싼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건축물들 사이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둠 때문일까? 이국풍의 주변 건축물들이 전통 한옥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제관과 마주하고 있는 성가수녀원 건물 1층 휴게실에서 신영복 선생과 마주 앉았다.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이 주 1회 강의실로 쓰는 건물이다. 선생은 인문학습원 초대 원장으로 5년 넘게 일하다 2013년 같은 대학 신문방송학과 김창남 교수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줬다. 항암 투약 탓인지 조금 수척한 모습의 그는 그러나 1시간 넘어 진행된 인터뷰 내내 특유의 소년 같은 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인터뷰어)병마와 싸우고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디가 아프고, 최근 병세는 어떠신지요?
(인터뷰이:신영복) “지난해 가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미 그 때, 여러 군데 전이가 되어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더군. 의사인 후배 교수 두 분이 아주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증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실험 프로그램에 들어가 집중 치료를 받고 있구요.”

-어떤 암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흑색종암이라구요.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암이라고 하더군요. 햇빛을 오래 못 받으면 걸릴 수 있다는 거지요. 통상적으로는 잘 발병을 안 한데요.”

-혹시 감옥생활, 특히 독방에 오래 계시면서 햇빛을 잘 못 받아 그런 것 아닐까요? 최근 상태는 어떠십니까?
“임상 실험 프로그램을 시작한 뒤에는 한동안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7~8개월 지나고 약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서 다시 조금 안 좋아지고 있네요. 지금은 다른 치료법으로 바꾸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빠른 호전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음 굳게 잡수시고 투병 생활 잘 하시길 바랍니다.
“하도 고비를 많이 넘긴 사람이라, 가족들이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제일 담담합니다.”(웃음)

-몇 년 전 방송인 김제동씨와 했던 인터뷰에서 20년의 감옥생활을 견딘 힘이‘깨달음’이라고 하셨더군요. ‘하루하루 찾아오는 깨달음’이라구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깨달음은 어떤 것이길래 그리 큰 힘이 되었습니까?
“깨달음은 바깥으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성찰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런 깨달음이란 게 우리가 느끼는 가장 깊이 있는 행복이지요. 감옥 가니까 일반수들이 저한테 무기수가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많이 보냐고 물어요. 그 사람들한테는 징역 만기날짜를 기다리는 게 생활의 전부입니다. 돌멩이로 벽에 달력을 그려놓고는 하루 지나가면 금하나 긋고 또하루 지나면 또하나 긋고, 그런 식이지요. 오늘이란 게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 하나로 살아가는 겁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지루하니까 오전에 금 하나 긋고, 오후에 거기에 반대 방향으로 금을 그어서 X자를 그리기도 하구요.

-무기수는 사정이 다른가요?
“많이 다릅니다. 무기수는 하루가 빨리 간다고 별로 좋을 게 없잖아요. 다만 오늘 하루가 보람 있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지요. 그 보람이란 게 사람마다 다 다르긴 하지만 제 경우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스스로가 아주 새롭게 변하는 걸 경험했습니다. 기약 없는 세월 속에서 유일한 보람이었지요.”

-바로 그 보람이 감옥생활을 견디는 힘이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폴 에르되시라는 헝가리 수학자가 있었어요. 세계적인 수학자인데,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이렇게 묘비명을 써 놓았다고 해요. “마침내 나는 더 이상 어리석어지지 않는다.” 하루하루 깨달아가면 모르는 게 더 많아지거든요. 점점 깨달을수록 어리석어진다는 말이 실감 나게 됩니다. 그런데 죽으면 더이상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그런 식으로 한 것이지요. 이 무한한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아주 미미하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공부하고 성찰할 게 엄청나게 많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기약 없는 무기징역을 견디는 힘이였지요.

-방금 말씀하신 것들은 감옥에서 읽은 책들의 영향인가요?
“나는 감옥에서 책 몇 권 읽고 나왔다, 뭐 이런 얘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책이 중요하지 않고,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자기 재구성 능력이 훨씬 중요하지요. 감옥에서는 전혀 예상치도 않게, 자기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들, 밖에 있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들과 만나게 되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 많은 사연들을 접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팔만대장경이지요. 기상 한 시간 전인 새벽에, 옆 사람 깨지 않게 무 뽑듯이 몸을 뽑아서 벽에 기대면 냉기가 온몸에 확 퍼집니다. 몸서리가 처지고 정신이 깨어나지요. 바로 그 시간에 어제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던 팔만대장경 같은 수평적 사연들을 수직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다양한 수평적 정보들을 수직화하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절대로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깨닫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혼란만 더하지요. 그 많은 정보를 수직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재구성 능력을 높여가는 게 바로 공부이고 학습입니다.

-공부, 학습, 이런 말이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최근 들어‘평생교육’ ‘평생학습’, 이 두 말이 마구 뒤섞여 쓰이고 있습니다. ‘life long education’과 ‘life long learning’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셈이지요. ‘교육’이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학습’은 자발적이고 상호소통적인 측면이 더한 것 같아서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을 설립할 때 ‘평생학습진흥원’이 더 맞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육부에 유권해석을 의뢰했는데, 법적 용어가 ‘평생교육’으로 되어 있으니 ‘평생교육진흥원’이라고 해야 한다는 거예요. 공공 영역으로 갈수록 ‘평생교육’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 편이고, 민간이나 현장쪽에서는 ‘평생학습’이란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육’과 ‘학습’, 의미상 명료한 구분이 가능합니까?
“확연히 다른 말이지요. 논어 첫 구절이‘學而時習之’입니다. 여기서 ‘習’을 ‘復習’의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習’자를 보면 날개 ‘羽’자 두 개 밑에 휜 ‘白’자가 있지요? 부리가 하얀 어린 참새가 바깥의 엄마 도움을 받아 막 나르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실천’이라는 의미이지요. 이 구절에서 ‘時’도 ‘자주’, 혹은 ‘때때로’라는 의미라기보다 적절한 시기, 여러 조건이 성숙한, 딱 맞는 때라고 해석하는 게 옳습니다. 이렇게 풀이하면“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는 구절은 “주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실천하는 게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 되지요.

-결국 실천의 문제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단순히 배우기만 한다고 기쁜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적, 사회적 실천과 연결이 되어야 진정한 공부라는 거지요. 그래야 참된 기쁨이기도 하구요. 그런 맥락에서 ‘교육’보다 ‘학습’이 실천의 의미를 더 많이 함축하는 것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공부이기도 합니다.”
인터뷰가 꽤 오랜 시간 지속되는데도 선생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말은 명료했고, 말씨는 부드러웠다. 딱딱하고 낯선 개념어들도 선생의 부드러운 말씨에 실려 편안하고 쉽게 다가왔다. 하지만 ‘실천’과 ‘성찰’등 을 강조할 때는 어조에 힘이 느껴졌고, 표정에도 단호함이 묻어났다.
“감옥에 있을 때,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 아래서 책을 읽기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려고 했지요.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겁니다.”

-무작정 읽기, 목표 없는 지식 쌓기보다 읽은 것, 쌓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내면화하는 게 참다운 공부, 즉 ‘학습’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교육은 그야말로 어떤 대상을 일방적으로 키워낸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구요.

-감옥을 대학으로, 감옥살이 할 때를 ‘나의 대학 시절’로 표현하면서 그 안에서 참으로 많은 걸 배우고 깨우쳤다고 하셨습니다. 영락없는 ‘평생학습의 원조’인 셈인데요. ‘원조’입장에서(웃음) 우리나라 평생학습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랄까 가치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공부의 ‘工’자가 장인 공,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데, 하늘과 땅을 연결해서 통합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夫’자에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통합하는 주체가 사람으로 되어 있구요. 갑골문에는 호미 같은 게 ‘공’자이고, ‘부’자는 사람으로 표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농기구를 가지고 생산한다는 의미이지요. 결국 참된 공부는 사람이라는 주체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는 뜻입니니다. 근대적 세계관에서는 세계가 주체인 나와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그런 세계는 없어요. 나라는 주체가 먼저 존재한 뒤 세계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세계가 재구성되는 것이지요. ‘천지인’(天地人), 그러니까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통합되어야 참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은 진리를 뜻하는 ‘眞’이고, 지는 모든 걸 길러내는 땅으로 ‘善’에 해당됩니다. 이 두 개를 조화시키는 사람의 주체적인 능력이 아름다울 ‘美’구요. 이렇게 진선미를 통합하는 게 진정한 공부인 것입니다.

-<담론>에서 공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대목 역시 실천의 의미를 강조하신 겁니까?
“머리로 이해하는 게 소위 말하는 합리주의적 사고입니다. 그런 공부는 텍스트에 밑줄 치고 암기하면서 하는 건데 크게 어렵지 않은 것이지요. 가슴까지 와야 한다는 건 공부 대상에 대한 공감과 애정으로 나가야 진정한 공부라는 뜻입니다. 처음 5~6년 감옥살이할 때 함께 징역 사는 숱한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들을 대상화하거나 분석하곤 했지요. 그러다 차츰 ‘아, 나도 저 사람 부모 같은 사람 만나 저런 인생 역정을 거쳤으면 똑같은 죄명으로 감옥에 앉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라구요.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근대적 인식틀이 조금씩 깨져나갔던 것이지요. 그 사람들과의 공감과 애정, 이런 게 생기면서 내 공부가 가슴까지 온 것입니다. 스스로 대단한 발전이라고 여겼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담론>에도 썼듯이 감옥에서 집을 그리는데, 책을 읽으며 머리로만 공부했던 나는 지붕부터 그려나간 반면, 같이 징역을 살았던 노인 목수는 집을 짓는 순서 그대로 주춧돌부터 그리더군요.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노인더러 ‘당신은 주춧돌부터 그리세요, 나는 지붕부터 그립니다’ 하면서 ‘우리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고 평화롭게 공존하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그럴 듯 한데, 이건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서구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가 공존과 톨레랑스인데, 톨레랑스에는 강자의 패권적 사고가 스며 있습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존을 승인할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해서 자기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차이란 것은 자기 변화의 교본입니다. 이런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공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공부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스승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우리 시대의 스승, 우리 당대의 사표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개인에게서 전인격적인 사표를 찾으면 안 됩니다. 그것보다는 집단 지성이 한결 중요하지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 하나의 종합적인 지혜를 만들어 가는 것, 함께 공부하는 평생학습의 가장 뛰어난 점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함께 공부하고 학습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벗이며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모델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단 지성이 표출되면 바로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사표가 되는 것이지요. 중국 명나라 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친구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친구가 되지 못한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훌륭한 개인이 우리 시대의 스승 혹은 사표가 되어서 길을 밝혀주길 바라는데요?
“원래 ‘스승’ 혹은 ‘사표’는 당대 사회에는 없는 법입니다. 당대에서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계급의 이해관계, 혹은 집단간의 갈등,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다산 정약용도 당대에는 전혀 사표가 아니었어요. 연암 박지원도 마찬가지구요. 정약용 같은 사람이 역사에 실존했었다는 게 우리에게 큰 자산이고 교훈이지만 다산도 당대에서는 그냥 죄인이었거든요. 사표와 스승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은평평생학습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숨은 고수’라는 강좌가 있습니다. 실생활의 다양한 분야에서 고수가 된 분들이 자신의 경험과 기술, 지혜, 깨달음 등을 나누는 강좌인데, 아주 인기가 많아요. 이런 강좌야말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평생학습과 많이 닿아 있는 것 같은데요?
“필요한 강좌이고 좋은 아디이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유를 학습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부니까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강좌는 참된 공부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역시 이렇게만 끝나면 안 됩니다. 공부는 이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당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 변화시켜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있어야 되지요. 숨은 고수가 단순한 생활의 달인의 기술 전수이면 안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공부는 절대 실생활의 실용성에 머물면 안 됩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공부하게 되어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풀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공부는 생명의 존재방식이니까요. 국화 한송이가 뿌리를 뻗어가면서 어디에 물이 있는지 더듬어 가는 것처럼. 지난 여름 폭풍우 때 달팽이도 나뭇잎 위에서 생존을 위해 엄청난 공부를 했을 겁니다. 숨은 고수 프로그램처럼 실생활에 유용한 게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장 자기에게 무언가를 안겨주는 유익한 것을 찾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진짜 공부를 잘 하는 법이지요. 사람을 크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누기도 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기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이 그나마 변화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 때문이지요. 그래서 공부는 어리석게 해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을 쫒지 말구요.”

-거의 모든 대학들이 평생교육원을 개설하고 있지만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탓에 제대로 된 평생교육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평생교육원으로 뿌리를 내렸는데요. 인문학습원 설립자 입장에서 대학이 평생교육에 제대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교육하고 공급하는 기능도 대학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이긴 합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기능은 대학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기본적인 교육만 시키고 기업들이 비용을 들여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들면 되지요. 기업이 요구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배출하기 위한 대학 교육은 기업이 국가나 학부모한테 자신들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으로 교육 자체를 망치는 겁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하지 않아요? 진짜 대학 교육은 10년 뒤, 100년 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대안적 미래 담론을 만들어 내고 이를 가르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대학들이 당장 돈벌이 되는 것, 사회적 수요가 많은 것들만 뒤따라 가면서 이를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건 대학의 진짜 사명과 기능이 아니지요. 현재 우리 대학들은 기업들의 막강한 자본력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울뿐입니다.”

-‘감옥’이라는 대학에서 20년 동안 공부하다가 졸업한 지 어느덧 30여년이 가까워 옵니다. 출옥 후에도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학습하신 것으로 아는데, 공부 혹은 학습 장소로 감옥과 사회, 어느 쪽이 좋습니까?(웃음)
“당송 팔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한유라는 사람이 ‘성인은 무상사’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인은 정해진 스승이 없다, 성인,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한테는 모든 게 다 스승이라는 말이지요.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는 반면교사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한유의 말은 결국 ‘정해지 학교는 없다, 학교는 도처에 있다’ 뭐 이런 말이겠습니다. 공부란 이런 것이다 하는 데 대한 틀에 박힌 관념을 걷어내면 사람 살이 모든 게 공부가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곳이 다 학교구요.

-<강의>에서 <논어> 웅야 편의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설명하면서 ‘학습과 놀이와 노동의 통일’을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지, 호, 낙. 그러니까 알고, 좋아하고, 즐기는 세 가지의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 가지를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더군요?
“여기서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는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입니다. 반면,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지요.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 즉 일감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면서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런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의 차이를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일은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지요.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해서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일체가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주체와 대상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가 바로 낙인 겁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의 형식이라기보다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겁니다. 어쨌든 낙은 관계의 최고의 형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정작 중요한 것은 자에서 호로, 호에서 낙으로, 세계와의 관계를 높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일이지요.

-“자유의 의미는 ‘자기의 이유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진정한 자유란 무엇입니까?
“대량 소비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를 양적 측면에서만 접근합니다. 더 많은 자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게 자유의 확장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런 식의 양적 개념의 자유는 끝이 없습니다. 개인의 욕망 구조를 키우고 확장하는 이런 생각 속에서는 자유의 상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유의 최고치는 평등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정서와 삶의 형식 속에 자신이 뭔가 공감하고 연대한다고 느낄 때, 바로 그럴 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2013년에 제정된 평생교육법에는 ‘평생교육’을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조직적인 교육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법적인 개념이나 정의가 늘 그렇지만 평생교육, 평생학습의 다양한 내용에 비해 비해 너무 메마르고 단조로운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평생교육, 평생학습을 신영복 식으로 정의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마디로 ‘먼 길을 함께 가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공부는 여럿이 함께 하는 게 맞습니다. 혼자서 하는 공부는 참된 공부가 아니지요. 돌이켜보면 내 경우에도 선생님한테 배운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동료나 친구, 후배들한테 배운 게 훨씬 많구요. 사실 그게 선명하기도 하고 더 직접적입니다.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교환이나 충고, 공감과 교감, 이런 것들이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까? 여럿이 함께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게다가 먼 길을 함께 가는 사이라면 더욱 깊은 영향을 주고 받게 되구요.”

-최근 우리 사회가 속도와 효율성, 경쟁과 성과주의 등 물량적, 비인간적 가치에 압도되면서 선생이 추구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협업적 인간관계가 크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이런 공세의 핵심에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자본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가 자기증식인데, 이게 거듭되다 보니까 자본주의 사회 안에 사는 사람들 모두 자본의 논리에 갇혀버리게 되지요. 집 한 채 소유하면서 잘 살고 있으면서도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도저히 만족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뭐가 진정한 삶의 가치인지, 어떤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사람인지, 헷갈려서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현실을 보면 우리를 압도하는 이런 비인간적 공세가 너무 무지막지한 나머지 이를 극복해 보려는 여러 노력이나 움직임들이 너무 나약하고 실효성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런 비인간적 가치를 확대 재생산하는 게 교육이고, 그게 학벌사회, 서열사회를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학습에 참여하게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좋은 실천일 수 있습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지배담론, 기득권세력에 대항하고 저항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음모의 작은 숲’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역설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붓글씨로 ‘더불어 숲’이라고 쓰고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더불어 숲이 되어 지켜주세요’라고 강조하고 다녔지요. 여기서 숲은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숨통을 틀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옛날에 며느리들이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수다를 떨었잖아요? 그러면서 가슴에 쌓인 것들을 풀어내고 카타르시스를 하는 건데, 그런 공간, 작은 숲을 생활 속에 계속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신 평생학습의 공간들은 아주 효율적이고 가치 있는 숲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숲들이 서로 만나면 상당히 중요한 사회적 역량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평생학습의 작은 숲들이 만나서 새로운 역량으로 증폭되는 곳이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서울 진흥원의 웹진 <다들>의 주요 독자층은 서울에서 평생교육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분들입니다. 정책 담당자들은 물론이고 자치구 일선 현장에서 땀 흘리는 평생교육사 분들, 평생교육을 전공한 학자나 교수 분들, 평생학습을 하고 있거나 평생학습을 통해 동아리 활동을 하고 계신 수많은 시민들도 독자이십니다. 이 분들께 선생님의 특별한 격려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평생학습이야말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중요한 작은 숲입니다. 평생학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깨닫고, 더불어 실천하는 것이 곧 작은 숲들을 확산하는 것이면서 질식할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숨통을 트는 일입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가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장시간의 인터뷰를 감당해 주신 선생께 스케치북을 슬며시 내밀었다. 몰염치하게도 <다들> 창간 축하 글씨를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나 자주 글씨 부탁을 받는지, 선생은 아예 속주머니에 붓펜을 가지고 다녔다. 붓펜을 꺼낸 뒤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더니 곧바로 써내려 갔다. “우리 사회를 보다 인간적인 사회로 만들어 가는 먼 길에 다들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일행이 가지고 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담론>, <강의>에 일일이 저자 사인을 해주는 선생께 슬쩍 물었다. “글씨는 어떤 태도와 자세로 써야 합니까?” 최종 질문이었다. “잘 쓰려고 해선 안 됩니다. ‘무법불가, 유법불가’이지요. 글씨 쓰는 법이 있어도 안 되고, 글씨 쓰는 법이 없어도 안 됩니다. 교육과 학습의 이상적 형태도 바로 이런 자유로움과 다양함입니다.”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

등록 :2016-01-16 01:16수정 :2016-01-16 10:38

 

 

지난달 24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만난 신영복 선생. 선생은 이날 인터뷰에서 “역사의 변화는 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서,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달 24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만난 신영복 선생. 선생은 이날 인터뷰에서 “역사의 변화는 쉽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서,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이 기사는 2015년 5월 9일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에 실렸던 신영복 교수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담론’ 펴낸 신영복

스물일곱의 신영복(74)은 육군 중위로,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1968년 8월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그는 “간첩”이 되었다. 대학의 독서회와 연합서클 세미나를 지도한 이력이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구성”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무기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로부터 20년 20일 동안 그는 수인(囚人)이었다. 스물일곱 음력 생일날 잡혀 들어간 그는, 마흔일곱 음력 생일이던 88년 광복절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같은 날, 그가 썼던 옥중서신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 고대설화 속의 바리데기 공주가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려고 저승길에서 생명수를 구해 왔듯이, 신영복은 자신을 유폐한 세상의 메마른 영혼들을 촉촉이 적셔줄 정화수(井華水)를 들고 돌아왔다.

2006년 성공회대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석좌교수로 강의를 계속해온 그가 최근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책 <담론>을 펴냈다. 그의 고전 해설을 묶은 <강의>를 펴낸 지 10년 만이다. 오랜만의 신간이 반가우면서도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투병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2014년 겨울학기를 끝으로 강단에 서지 않는다는 그를 어떻게든 꼭 만나고 싶었다. 신영복 선생의 서울 목동 자택으로 찾아간 날, 화창한 햇살 아래 철쭉이 눈부셨다. 그는 단정하게 재킷을 갖춰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암 선고받고 낸 책 <담론>에 담은 고백

-편찮으시다는 소식 들었는데 안색도 좋으시고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담당 의사의 말로는, 어떤 경로로 진행될지 아직 자기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고 하거든요. 조심스럽긴 합니다.”

지난해 말 암 진단을 받았다. 몇 군데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다행히 최근에 투약하기 시작한 약이 효과를 발휘해 기력도 회복되고 병세도 많이 호전된 상태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동안의 강의 자료들을 모아서 이런 책도 만들었죠. 그 약을 복용하고 난 후에 건강이 훨씬 좋아져서 다시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돌려받아서 교정을 한 번 더 봤어요.”(웃음)

그렇게 출간된 <담론>은 성공회대학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1부에서는 동양고전을 통해 본 세계 인식, 2부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있는데, 사형수 시절의 절망과 막막함, “반목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으로 “하루가 팔만대장경” 같았던 무기수 시절의 이야기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진솔한 고백들이 많이 실렸다.

남한산성(육군교도소)에서 만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사형수 중 다섯 명이 사형 집행되었고 한 사람은 그곳에서 타살되었습니다. 나도 물론 사형수였습니다.(210쪽)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만을 바라던 사형수가 막상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나서 자살하기도 합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는 막막함에 좌절했습니다.(218쪽)

-그간 신영복이라는 어른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이분은 우리 같은 세인들하곤 바탕부터가 다를 거야’ 하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나의 20년 수형생활은 실수와 방황,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는 대목을 읽으니 왠지 안도가 되던데요.(웃음)

“이 책에서 내 편지글이 그렇게 반듯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조금 밝혔죠. 본의 아니게 그런(늘 반듯하고 정제된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주게 되어 그간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어요.”

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긴 징역살이에서 어쩌면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 한 번 없이 반듯할 수 있었냐?’고 의아해하지만, 실제 그의 징역살이가 편지글처럼 차분하고 평화로웠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염려하는 가족들에게 애달프고 괴로운 사정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편지를 검열하는 교도소나 국가권력 앞에,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일체의 필기도구가 금지된 상황에서 그나마 글을 적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달에 한 번 엽서를 쓸 때뿐이다 보니, 한 달 내내 머릿속에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다듬은 글들이었다.

-감옥에서 후회한 적 없으세요? ‘난 통혁당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나 회한 같은 건?

“처음엔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가 없었어요. 중앙정보부에서 취조받을 때까진 경황이 없더니, 며칠 뒤 서대문구치소에 들어갔는데, 거기 ‘중앙’(사동 가운데 로비)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간수부장 발을, 재소자 하나가 씻기고 있더라구요.”

-(놀라며) 재소자가 교도관 발을요?

“노예지 뭐. 교도소 특유의 그 묵직한 악취, 회색 벽과 나이 많은 간수의 발을 씻기는 젊은 재소자. 그 옆에 내가 쪼그려 앉아 있으면서, ‘역사가 썩는 듯한 교도소 냄새, 이 끔찍한 풍경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나!’ 그런 암담함을 느꼈죠. 그때는 이게 내 ‘대학시절’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계몽주의 노인권력 바탕에 둔
그런 글쓰기는 지양돼야 해요
‘멘토’에 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사표나 스승은 당대에 없어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해요”

“역사의 장기성·굴곡성 생각하면
목표달성에 과도한 의미 부여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먹물이구나! 참혹한 반성

신영복은 감옥생활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표현한다. 감옥은 그에게 ‘사회학’과 ‘역사학’과 ‘인간학’을 가르친 교실이라는 것이다. 24시간 모든 것이 공개되는 감옥은 “목욕탕처럼 적나라하게” 서로의 실체가 드러나는 공간이며, “메끼(도금) 벗겨진” 인간의 민낯을 “어항 속 붕어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첫 5년여간 신영복은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존재였다. 그의 눈에 비친 다른 재소자들은 노동 의욕도 변화 의지도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일 뿐. 신영복은 최대한 친절하게 그들을 대했지만 동료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낌새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도 같이 있는 재소자들이었다. 신영복은 자신만 모르는 ‘왕따’인 채로 5년을 보냈다.

-5년이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죠?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서 만나고 그들 얘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죠. 그 과정이 그렇게 단선적이진 않아요. 방황하고 실패하고 우회도 하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 내 또래, 마흔한 살짜리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친구한테 누가 접견을 왔다는 거예요. 모두 깜짝 놀랐죠. 3~4년간 아무도 온 일이 없었는데.”

-누가 왔는데요?

“누가 왔냐고 물으니, ‘웬 재수없는 녀석이 왔다’고만 하고 말을 안 해요.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자기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자기를 삼촌네 맡겨놓곤 도시로 돈 벌러 나갔대요.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동네 사람들 얘기론 ‘너희 엄마 시집갔다’고 했다고. 근데 오늘 접견 온 남자가, 재가한 엄마가 키운 (의붓)아들이라고 그러더래요. 기분이 나빠서 ‘근데 여기 왜 왔냐? 남 징역살이하는 거 확인하러 왔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가 거기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죄송해서 왔다’고 하더래요. 아, 감동이잖아요. 그럼 나는 뭔가? 나도 쟤와 같은 부모, 그런 환경에서 컸다면 지금쯤 같은 죄명으로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나 자신에 대한 반성, 아주 참혹한 반성이 들었어요.”

이후 신영복은 교도소 안에서 금지된 내기축구를 하다가 다른 재소자들과 ‘빠따’를 맞았고, 예배 후에 나눠주는 떡 위문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능청스런 ‘떡신자’가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인텔리의 완고함에서 벗어나니 도처에 스승이 있고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이 변화를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긴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가요? 언제나 쉽고 편안한 구어체나 서간체를 즐겨 쓰시는 이유가? 선생님 글은 여느 교수들처럼 딱딱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동네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아래서 들려주는 얘기처럼 물 흐르듯 편안합니다. 그런 문체도 감옥에서 갈고닦은 노력의 산물인가요?

“어려서 대학신문에 글 쓰고 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해서 반성 많이 했지요. 글 쓰는 필자들은 독자를 배려해야 해요. 자기 글을 쉬운 글에 담아서 공유하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영복은 낮은 곳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고 소통하는 방법을 부단히 고민하고 실험해 왔다. 서화(書畵)는 많은 사람과 깊이있게 교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였다. 그의 서화는 책으로도, 달력으로도 나왔고 손수건이나 티셔츠, 우산으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직접 그린 삽화에 그가 개발한 어깨동무체 혹은 민체(民體)라 불리는 글씨, 그리고 짧고 강렬한 우화와 잠언들은, 심오한 사상이 아름답고 친근한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의 실용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원효는 법당에 앉아 경전을 외는 대신, 마을마다 표주박을 두드리고 춤을 추며 불가의 가르침을 담은 노래를 퍼뜨리고 다녔다. 필요한 곳에 서화와 글씨를 헌사하고 토크콘서트로 전국을 돌아다닌 사상가 신영복의 족적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는 많지만 선생님처럼 대중과 직접 소통할 줄 아는 제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인들이 깨닫고 꾸준히 노력해야겠지요. 앞으로 계몽주의적인 노인 권력이 바탕에 깔린, 그런 글쓰기는 지양될 거라고 난 생각해요.”

-계몽주의가 왜 나쁩니까?

“허허, 그게 잘난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계급적 편견이라고 봐야 되죠.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타자(他者)를 끌고 들어가는 거잖아요. 계몽주의 프레임은 허물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전 ‘멘토’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

-왜요? 요즘 멘토와 힐링의 시대라는데요.

“멘토가 계몽주의의 변형이잖아요. 멘토라는 게 대개 연배가 좀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를 전하는 건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 20~30년 후에 살아갈 세계에 대해서 20~30년 전의 경험을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거 자체가 오히려 진보를 방해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이 시대의 대표적 스승, 대표적 멘토’라고 부르는데요.

“거대담론도 사라지고 존경했던 사람들의 추락도 많이 보고 하니까 뭔가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대상을 성급하게 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표나 스승이라는 건 당대에는 존립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개인의 인격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간 사표가 있다면 공부하긴 참 편하겠죠. 그렇지만 그건 낡은 생각이에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하고 집단지성을 위한 공간을, 그 진지를 어떻게 만들 건가가 앞으로의 지식인들이 핵심적으로 고민할 과제예요.”

한번도 안 바뀐 노론 권력

-이번 책에서 제시하신 ‘원형 인식모델’은 우리 사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음과 양, 화(和)와 동(同), 이상과 현실, 좌와 우를 둥근 원 안의 대칭선상에 놓으셨지요. 대비되는 것들은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그 말씀엔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막상 현실을 보면 이게 쉽지가 않아요. 카운터파트가 격이 너무 떨어져요.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상호보완이고 뭐고 하지 않겠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독선이 도를 넘은 지 오랩니다.

“차이라는 건 단순히 공존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고, 자기 변화의 시작으로 삼아야 해요. 차이를 자기 변화의 학습교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것, 그게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에 이은 ‘가슴에서 발(실천)로의 긴 여행’이지요. 근데 우리 현실에서 좌-우, 남-북, 진보-보수, 이런 대비 관계가 과연 상생적인 대비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냐? 너무나 비대칭적이어서 도대체 지양(止揚)을 할 수 있는 상생의 파트너가 아니지 않으냐? 그럴 수 있어요. 근데 어느 나라 역사에도 그렇게 이상적인,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는 대비 관계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만 하더라도 분단과 외세, 그리고 임란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노론 권력의 오래된 지배구조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 왔잖아요.”

-노론 권력이라고요?

“예, 임란 이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몰아내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배권력은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노론 세력이 한일합방 때도 총독부에서 합방 은사금을 제일 많이 받았지요. 노론이 56, 소론이 6명, 대북이 한 사람. 압도적인 노론이 한일합방의 주축이거든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도 행정부만 일부 바뀐 거지, 통치권력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그렇게 해왔지요. 대학, 대학교수, 각종 재단, 무슨 시스템 이런 것들 쫙 다 소위 말하는 보수진영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그 말씀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웃음)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마 이 선생보다 더 속상할걸요, 속으로는.(웃음) 근데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큰 아픔을 같이 짊어지고, 소소한 기쁨을 같이 나눌 이웃 만들기, 그게 신영복이 주장해온 ‘더불어숲’의 정신이다. 그 숲 속, 그의 너른 나무그늘 안에 우리 모두 오래오래 머물 수 있기를!

이진순.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사진으로 돌아본 신영복 교수의 생애

 

 

1995년 8월12일 자신의 한글 서예작품 “서울”을 조순 서울시장에게 전달하고 있는 신영복교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5년 8월12일 자신의 한글 서예작품 “서울”을 조순 서울시장에게 전달하고 있는 신영복교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감옥에서 20년을 보내면서 가진 생각과 소회를 담은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으로 유명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가 15일 밤 별세했다. 향년 75세.

신 교수는 시대의 고통을 사색과 진리로 승화시킨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옥살이를 한 신 교수가 1988년 출소 후 옥중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보여준 반듯한 모습은 같은 동시대 아픔을 겪은 이들의 위안이자 심적인 지지대가 됐다.

27세부터 47세까지, 옥 안에서 살아야 했던 새파란 젊은 시절을 그저 흘려보내는 대신 끝없는 자기 성찰로 채워나간 고인은 ‘87년 체제’와 함께 사회로 나와 정권교체와 외환위기 등으로 이어진 숨가쁜 30년을 지켜봤다.

경향신문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는 신 교수의 사진으로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봤다.

1993년 3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는 신영복 교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3년 3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는 신영복 교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4년 1월 신영복 교수와 한승헌 변호사가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신년대담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4년 1월 신영복 교수와 한승헌 변호사가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신년대담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영복 교수가 2006년 8월8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의를 하고 있다./김문석 기자

신영복 교수가 2006년 8월8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의를 하고 있다./김문석 기자

2006년 9월25일 경향신문 창간 60주년을 기념해 특집 대담을 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이상훈 기자

2006년 9월25일 경향신문 창간 60주년을 기념해 특집 대담을 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이상훈 기자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동료교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동료교수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8년 3월 자신이 복역했던 서대문 형무소를 찾은 신영복 교수 /서성일 기자

2008년 3월 자신이 복역했던 서대문 형무소를 찾은 신영복 교수 /서성일 기자

2008년 6월 성공회대 교수들의 소통공간인 새천년관 6층 교수휴게실에서 신영복교수(오른쪽)가 동료교수에게 붓글씨를 가르치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08년 6월 성공회대 교수들의 소통공간인 새천년관 6층 교수휴게실에서 신영복교수(오른쪽)가 동료교수에게 붓글씨를 가르치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08년 8월27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왼쪽)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주년을 맞아 열린 북콘서트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오른쪽은 ‘청구회 추억’(신영복 지음) 영역자인 조병은 성공회대 교수 /박민규 기자

2008년 8월27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왼쪽)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주년을 맞아 열린 북콘서트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오른쪽은 ‘청구회 추억’(신영복 지음) 영역자인 조병은 성공회대 교수 /박민규 기자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8년 12월29일 서울 경희궁터를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철훈 기자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8년 12월29일 서울 경희궁터를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철훈 기자

2009년 6월18일 신영복 성공회대 명예교수, 윤여준 한국지방발전 연구원 이사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회의실에서 좌담회를 열기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09년 6월18일 신영복 성공회대 명예교수, 윤여준 한국지방발전 연구원 이사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회의실에서 좌담회를 열기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서성일 기자

2011년 2월 방송인 김제동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신영복 교수/권호욱  기자

2011년 2월 방송인 김제동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신영복 교수/권호욱 기자

2011년 9월9일 신영복교수가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 학생들과 축구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2011년 9월9일 신영복교수가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 학생들과 축구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신영복 교수가 2011년 12월2일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한 뒤 문재인 당시 노무현 재단 이사장과 김경수 사무국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정지윤기자

신영복 교수가 2011년 12월2일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한 뒤 문재인 당시 노무현 재단 이사장과 김경수 사무국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정지윤기자

지난해 4월23일 10년만에 신간 ‘담론’낸 뒤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신영복 교수/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난해 4월23일 10년만에 신간 ‘담론’낸 뒤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신영복 교수/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신영복 교수 누구? 삶 자체가 드라마…“서로 위로하는 ‘작은 숲’ 되라”

등록 :2016-01-16 02:55수정 :2016-01-1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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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신영복 교수.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2년에 암투병 끝에 15일 신영복 선생 별세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 전달한 지식인

깊은 성찰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큰 반향
‘우리시대의 스승’ 찬사… 삶 자체가 드라마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즐겁게 만들어라”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단 그의 마지막 저서 <담론>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신영복 교수가 2년여의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만해문예대상을 받은 그를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그렇게 기렸다.

하지만 그의 삶은 기구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던 1968년 27살 나이에 그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수가 됐고 20여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2008년 7월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통혁당은 정식으로 결성되지도 않았다. 서울시당 준비모임이 꾸려져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나는 학생운동 차원에서 대학선배가 주도한 모임에 적극 참여했는데, 그 선배 삼촌이 북한에도 갔다 온 모양이었다. 당시 <청맥>이란 잡지에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글을 많이 썼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운동 차원이었다.”

재판 때 검사는 초등학교 꼬마 6명을 위해 지어준 노래가사 속의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의 ‘주먹 쥐고’조차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몰아세웠다고 그는 말했다.

20여년의 기나긴 감옥생활이 그에겐 사회학과 역사학, 인간학을 제대로 배우게 해 준 진짜 대학이 됐다.

무기수로 감형된 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그가 평범할 수 없었던 체험과 깊은 성찰을 특유의 문장에 담아내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또 다른 신영복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 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렇게 해서 좁은 엽서 한 장에 빽빽이 적힌 글들로 채워졌다. 우리 사회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을 받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심도 있는 담론들의 등장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세상변화를 실감하게 만든 하나의 징표였다.

사면복권을 거쳐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까지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담론> 출간하기까지 25년간 그의 삶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10여권 저서와 명강의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우리시대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2008년 50만부가 넘게 팔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돌 기념판을 냈을 때 그는 이렇게 자평했다.

“가끔 독자들을 만나 들은 얘긴데, 힘든 상황을 겪은 분들이 내 글에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일부에선 신영복의 이력에 비해 사색의 전투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했고 또 한켠에선 엄청난 전투성이 있다고도 했다. 여러 층위의 반응들이다. 대체로 인문학적 가치, 인간적 고뇌, 인간적인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그런 호응을 불렀다는 평이 많다.”

2015년 펴낸 <담론>에서는 사형수가 됐을 때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썼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그것이 그가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깨달음과 공부였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성찰이며, 그것을 토대로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실천이라고 했다. 세계인식은 왜 필요한가?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실천적 주체가 사람이다.” 그에게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인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변방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이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끝은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라고 신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 강의는 가슴의 공존과 관용(톨레랑스)을 넘어 변화와 탈주로 이어질 것이다.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이 ‘관계’야말로 신 교수의 인문학 특강 주제요 <담론>의 핵심주제였고 만년의 화두였다.

그는 “관계 없이 인식 없다”며 관계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이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를 흔히 알려진대로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하다”로 읽지 않고 이렇게 고쳐 읽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이 공자의 화동(和同) 담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한반도 통일론에도 적용됐다. 신 교수는 정치적 통일(統一)이 아니라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을 통해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화화(和化)로서의 통일(通一)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것은 한민족만의 과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라고 했다.

이런 화동 개념과 연관시켜 톨레랑스(관용)의 한계도 지적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자”는 톨레랑스는 근대사회 최고 수준의 가치지만, 그것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은폐된 패권논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이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니다.”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겨 둔 ‘씨 과일’을 가리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에서 그는 최고의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냈다.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준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지혜이며 교훈이다.”

나무가 뼈대를 드러내며 잎을 떨어뜨려 뿌리를 따뜻하게 덮는 이 석과불식의 요체를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뿌리라는 것인데, 바로 신 교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87년 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반동’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 2008년 인터뷰 때 그는 말했다. “20년 전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하고 불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사회변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운동의 구심, 지도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 진보적 정당들까지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를 키워 온 민주, 변혁 역량을 아우를 수 있는 탄탄한 구심체를 꾸리는 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불철저한 민주화’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 ‘국제금융자본의 진입과 수탈’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절대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패권질서에 우리 사회가 올인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진순 교수와의 인터뷰(▶‘담론’ 펴낸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에서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말했다.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홍구 교수,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하다

등록 :2016-01-16 11:02수정 :2016-01-16 11:04

 

[한겨레21]
민족주의자 교사 아들로 태어나 4·19의 충격을 맛보고 무기수가 되기까지…
올해 교수 정년을 맞는 그에게 한국 현대사와 통혁당 사건의 내막을 듣는다
* 이 기사는 2006년 5월11일 <한겨레21> 제609호에 실렸던 ‘한홍구의 역사이야기’입니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놓은 것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정년을 맞을 당시 사진. 20대의 청년 시절에 감옥에 들어가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정년을 맞을 당시 사진. 20대의 청년 시절에 감옥에 들어가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올해 정년을 맞는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조그만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의 삶을 정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뵙는 사이에 정색하고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부분도 캐물어야 하는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살아내신 한국 현대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 한명숙 총리의 지명을 계기로 그의 부군인 박성준 교수의 전력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서 박성준 교수의 ‘상부선’이기도 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군 장교 시절의 신영복 교수(왼쪽)와 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 군 법무사들은 사형을 구형하면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군 장교 시절의 신영복 교수(왼쪽)와 그가 옥중에서 보낸 편지. 군 법무사들은 사형을 구형하면서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버렸다.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1968년 11월28일 열린 통혁당 사건 공판. 당시 군 장교였던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의 주요 간부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1968년 11월28일 열린 통혁당 사건 공판. 당시 군 장교였던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의 주요 간부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로,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1998년 석방된 신영복 교수.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다시 정리될 필요가 있다.
1998년 석방된 신영복 교수.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다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신영복 "우직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다시 보는 강연] 고집 센 한국 사회, 바꾸는 힘은…"하방연대"
 
 
| 2016.01.18 10:13:56
 
 
 
 
 
 
 
 
 
 
 
 
 
성현석 기자
 
 
 
교육과 복지, 재벌 문제를 주로 취재했습니다. 복지국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내려고 김용철 변호사의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과학자, 아니면 역사가가 되고 싶었는데, 기자가 됐습니다. 과학자와 역사가의 자세로 기사를 쓰고 싶은데, 갈 길이 멉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4일 밤 지병으로 별세했다. 평소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지식인인 신 교수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그가 남긴 많은 가르침과 서예 작품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됐다. <프레시안>도 초대 고문이자 필자로서 생전에 신 교수와 깊은 인연을 맺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신 교수는 지난 2006년 본지 창간 5주년 기념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 강연에서 신 교수는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우직한 실천", 또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하방연대'"에 대해 얘기해 깊은 감동을 줬다.  

또 박인규 이사장이 2006년 진행하던 KBS 라디오 <집중인터뷰>에도 정년 퇴임을 앞둔 신 교수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박인규 집중인터뷰 바로가기 : 1편, 2편)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울림을 주는 본지 창간 5주년 기념 강연을 재소개하고자 한다.

 


ⓒ 프레시안


 


<프레시안> 창간 5주년을 축하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른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시작해서 5년 동안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소개할 수 있는 매체가 됐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창간 5주년을 맞는 <프레시안>에 대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신뢰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프레시안>이 앞으로도 이런 역할을 계속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나이든 사회, 그래서 고집이 세다  

사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듯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은 굉장히 답답합니다. 누가 이야기를 해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다룬 쟁점들을 되짚어 볼까요. 소위 전시 작전통제권, 한미 FTA 문제부터 심지어 헌재 소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서로 합의해내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 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저도 참 답답하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속 시원한 방도가 없어요.  

사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느끼게 된 것이 "나이 드신 분들은 굉장히 고집이 세다. 그리고 그 고집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결론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역사의 결론이라는 것이죠.  

한국 사회를 가리켜 흔히 젊은 사회라고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예요.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 온 사회거든요. 켜켜히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 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등 우리 사회에서 아주 열띤 담론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예정돼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는 앞으로의 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내용에 국한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조금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해관계만 놓고 대립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설 곳이 없다

제가 나눠 드린 유인물을 볼까요.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인문학과 소통의 장(場)'이죠. 며칠 전 고려대 교수 70여 명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어제(9월 20일)는 민교협에서도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도 좋은가?" "인문학이 이토록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이 지속가능할까?"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지요. 앞서 이야기한 교수들의 성명은 이런 공감대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우리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사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저 비싼 음식을 내놓기만 하면 대접을 잘 한 것이라는 생각, 일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오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물질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고 있는 사회거든요. 그리고 이런 사회를 뛰어넘게 해 주는 게 인문학의 역할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인문학은 사치? 천만에!  

인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꼭 소개하고 싶은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저희 학교(성공회 대학교)에서도 시도하고 있는 것인데요. 클레멘트 인문학 강좌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얼 쇼리스라는 분이 처음 시작한 것이지요. 

이 분이 뉴욕 형무소의 재소자들을 오랫동안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각종 마약, 폭력 사범을 대상으로 진행한 일종의 워크숍 같은 행사에서였지요. 행사를 진행하던 도중 이 분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20살이 채 안 된 여성 재소자와의 인터뷰에서였어요. 그 재소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왜 우리들은 연극이나 음악회, 오페라와 같은 예술적 경험을 할 기회가 없는 거죠"라고요. 

흔히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의 경제적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인문학은 그들에게 불필요한 사치라고 여기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당장 돈이 되는 내용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게 오히려 협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얼 쇼리스는 빈민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강좌는 지금까지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당장 돈이 되는 내용이 전혀 아님에도 말이지요.  

인문학이라는 게 물론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 소통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는 이해관계만을 놓고 다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앞서 이야기한 클레멘트 강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인문학, 사회적 소통의 전제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학교 공부는 보통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에 둔 것이었습니다. 당장의 경제적인 쓸모는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역사, 철학이 보다 완전한 인간을 기르기 위한 이상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게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대신 돈이 되는 공부, 잘 팔리는 학문이 대학을 차지하게 됐죠.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의 대립, 갈등, 소통의 단절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좀 생소한 말일지 모르지만 인문주의자를 영어로 휴머니스트라고 합니다. 휴머니스트가 없는 사회. 참 삭막한 사회지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회를 흔히 인문학의 본고장이라고 합니다. 아테네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 같은 필로소퍼 킹(Philosopher King), 즉 철인 군주를 갖지는 못 했죠. 하지만 필로소퍼 시티(Philosopher City), 즉 철인 도시를 세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런 배경에서 피어난 것이지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소통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통이 가능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하죠. 그게 바로 인문학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知), 즉 안다는 게 무엇이냐?"라고요. 그랬더니 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인(知人), 즉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요. 요컨대 앎이란 바로 사람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또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애완견에 대해, 또 어떤 친구들은 주식이나 아파트에 대해 전문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잘 알 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이 정작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데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이고요.  

빌딩과 다리가 아닌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그린 서울의 얼굴

제 경험 하나를 이야기할 게요. 제가 교도소에 참 오래 있었잖아요.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강에 제2한강교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지하철도 뚫리고, 63빌딩도 세워지고, 제3한강교도 놓였지요. '제3한강교'라는 노래도 제가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나왔어요. 그 시절에는 감방에 신입이 들어오면 감옥에 와 있는 사이 변한 서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한 일과였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은 방에 있던 젊은 친구 하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 서울의 발전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꼭 핀잔을 주곤 했어요. 서울에 새로 생긴 건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얼마나 높은지 아냐"라고 말하면 "임마 그게 네 거냐. 쳐다보면 고개만 아프지"라고 대꾸하는 식이지요.  

그 젊은 친구는 서울역에서 13살 먹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동생을 10년 뒤에 만났어요. 어디에서냐 하면 서울의 어느 사창가에서요. 처음에는 이 친구가 동생을 못 알아 봤대요. 그런데 동생이 먼저 오빠를 발견하고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 쫒아갔지만 결국 동생을 놓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서울을 증오해요. 서울은 그에게 순진한 13살 소녀를 창녀로 만든 곳이었던 것이지요. 그 친구에게 만약 '서울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과연 어떤 모습을 그릴까요. 순진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낯선 창녀의 모습이 아닐까요.  

개인적 비극 때문에 너무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에 대한 그 친구의 생각이 매우 인문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회에 대해 빌딩의 높이나 교량의 숫자로 판단하는 이들과 달리 그 사회의 오갈 데 없는 한 소녀가 10년 뒤 어떻게 성장했느냐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인문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화폐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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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가치가 전면화되면 인간의 정체성도 사라져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제는 "화폐 가치의 전면화"입니다. 상품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를 잃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지요.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단 하나의 가치, 즉 화폐 가치로 단일화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쌀 한 가마가 구두 한 켤레와 같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왜냐고요? 당연하지요. 밥을 짓는 쌀과 발에 신는 구두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상품이 되면 달라집니다.  

쌀이 상품이 되는 경우, 그냥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파는 상품이 됩니다. 그런데 시장에 팔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치 형태로 표현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등가물이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구두라는 등가물, 즉 가치가 같은 물건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쌀은 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쌀이 구두로서 표현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구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시장에 나오는 순간 쌀은 밥과 관계없고, 구두는 발과 관계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품의 가치표현 형식입니다. 만약 여기에 있는 사람 한 명이 구두 한 켤레와 가치가 같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요. 그런데 만약 구두 한 켤레가 아니고 연봉 1억의 가치가 있다고 하면 대개는 기분 나빠하지 않겠지요.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요. 사람 역시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의 등가물이 무엇인지를 판가름하는 가치가 화폐 단위로 환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순간 화폐단위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또 사람을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예는 어떻습니까. 남편이 아주 뛰어난 변호사인데 그 부인은 매우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반응들이 나와요. "아 부인의 친정이 잘 사나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천박해졌을까요.  

모든 노동에 대해 "얼마짜리"인지 묻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됩니다. '출산'을 예로 들어봅시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 이게 과연 상품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람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출산' 행위를 상품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산모는 '환자'로 규정되어 산부인과 병원에 보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사의 손을 거쳐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됩니다. 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사회는 어느새 노인을 '환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노인은 오랜 경륜을 갖고 삶을 마무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종 서비스 상품의 소비자가 돼 버립니다.

얼마 전에 앨빈 토플러가 새 책을 냈습니다. 거기서 '프로슈머'라는 개념을 제시했지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 인상적인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비(非)시장적 영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시장은 비시장적인 부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앞서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병원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는데요. 병원에서 병을 치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꼭 그런 게 아니지요. 의사에게 처방을 받는 것만으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장 외부의 노력, 그러니까 약을 잘 챙겨 먹는 것부터 주위 사람들의 배려와 치료를 위한 자신의 의지가 병을 낫게 하는 데에 70~80%의 역할을 차지하지요. 그런데 시장 중심의 사회는 이런 영역을 무시합니다.

토플러의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2002년 한해 동안 미국의 현금 지급기에서 입출금한 횟수가 120억 번이라고 합니다. 한번에 2분씩 걸린다고 치면 280억 분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죠. 미국인들이 총 280억 분의 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동은 시장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노동이 없었다면 현급 지급기를 통해 작동하는 시장은 굴러가지 않았겠지요. 결국 시장이 작동하기 위해서도 시장 바깥의 영역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 바깥에 있는 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화폐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지식이나 기술, 노동은 가치가 없는 게 돼 버립니다. 이렇게 모든 게 화폐 가치로만 환산돼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습니다. "이게 얼마짜리냐"라는 기준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 그리고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많은 것들은 대개 이렇게 "얼마 짜리"라는 기준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애정', '우정' 이런 것들을 어떻게 화폐 단위의 시장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고 팔수 없는 것들, 시장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은 어느새 주변으로 밀려나버리곤 합니다.

계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치만이 존중받고, 그 외의 것들은 도무지 배려받지 못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대립과 갈등은 상당 부분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경영학과에 다니다 경제학과로 전과한 분이 있습니다. 왜 전과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경영학 수업 첫 시간에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을 하더라. 그런 말을 들으니 '아니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뒀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고요.  

저는 경제학과를 나왔는데 제 경우에는 경제학 수업 첫 시간에 들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게 경제학의 원칙이다"라는 말이 두고두고 고민을 안겨 줬습니다. 그것도 꼭 도둑놈 심보 같았거든요. 남들 보다 일은 덜 하고 더 많이 챙기겠다는 것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라 정말이지 이런 생각이 일반화되면 사회가 굉장히 천박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존재가 위협을 받기도 하고요. 상품 생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 자체가 부정돼 버리거든요.  

실업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상품을 만들지 못 하거나 상품으로 거래될 수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 못 받는 사회. 이런 사회는 결코 인간적인 곳이 아니지요.

'도로의 논리'와 '길의 철학'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들은 어쩌면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라는 오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화와 정서처럼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의 중요성을 꼭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게 보면 그런 것들이 진정한 소통을 위한 바탕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들은 화폐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들만이 목표가 된 사회, 혹은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도 좋다는 사회에서는 종종 외면되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세 번째 주제는 목표와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부릅니다. 또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의 달성으로 모든 수단이 합리화되는 사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사라집니다. 그런 게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옛날 시골에서는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돈 벌이'라는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은 통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도시에서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는 곳이거든요. 얼마나 빨리 목표에 다가가느냐, 즉 속도와 효율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든 목표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 즉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논리를 '도로의 논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철학을 '길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도로의 논리'에 의해 빚어졌습니다.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길의 철학'이 필요한 때가 됐습니다.

'도로의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쿠테타를 해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니. 말도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이상한 논리를 오랫동안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 기득권 집단의 논리이기도 했지요. 어떤 방법으로건 기득권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는 것이죠.

일단 이기고 보자는 '도로의 논리' 속에서 소통은 요원해져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사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장난도 많이 쳐서 선생님께 벌을 참 많이 섰어요. 지금도 초등학교 가서 보니까 복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띄더라고요. 거기서 의자를 들고 벌을 섰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의자를 들고 벌을 서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게 우리 사회를 아주 전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의자를 만들 때는 그것을 깔고 앉기 위해 만든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위에 앉아야 할 것을 오히려 머리 위에 들고 있어요. 아주 거꾸로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다 합의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요.

"일단 성장하고 나중에 분배하면 되지 않느냐." "과정이 비합리적이더라도 좀 참자. 그래서 나중에 분배해 주면 될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어요.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일단 이기고 보자는 논리. 이런 논리가 판을 치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은 아주 요원한 이야기가 되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 아주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자꾸 괴롭힘을 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괴롭힘 당하던 친구를 계속 격려해서 괴롭히는 친구와 한판 싸우기로 했어요. 저와 괴롭힘 당하던 친구가 한편이 되고 괴롭히던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다른 편이 돼서 방과 후에 학교 뒤편에 있는 강가에 가서 대판 치고 받고 싸웠어요. 하지만 저와 제 친구의 코피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졌지요. 이긴 친구들은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갔고요. 정말 괘씸하더라고요. 그때 강가에 앉아 코피를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놈이 이기는 경우도 있구나." 30년 뒤 감옥에 있을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이기는 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구나. 한 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매사를 '도로의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도로는 고속도로가 좋은 것이지요. 또 짧을수록 좋습니다. 최대한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소통을 배제하는 근대성, 이제 반성할 때  

하지만 '길의 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 위를 걷는 것 자체가 삶이거든요. 우리 삶을 무시하면서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삶을 희생하여 추구하는 목적이란 정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정한 목적과 수단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겠지요. 마치 사람이 깔고 앉기 위해 만든 의자를 머리 위에 들고 있는 모습처럼요.

도로의 논리. 그러니까 과정은 무시한 채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논리.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다름 아닙니다. 자본은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더 많은 이윤을 얻습니다. 또 자본은 그 속성상 적게 투자해서 많이 벌어 들이는 것, 즉 높은 효율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자본의 논리가 내면화 되면서 우리는 속도, 효율에 대해 거의 광신적으로 몰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바로 근대 사회의 속성이자 구성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근대라는 게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이니까요.  

결국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 과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길의 철학'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네 번째 주제는 '근대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근대 사회는 자본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증식을 거듭해야 하는 자본의 원리는 속도와 효율의 논리를 사회화한 것이거든요.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정말 진보된 사회다" 혹은 "사회의 근대화는 진보의 과정이었다"라는 이야기는 이제 다시 검토해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59학번입니다. 저희 세대는 '근대화'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세대였습니다. 아마 요즘 젊은 학생들은 하지 않는 고민일 것입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4.19를 겪었습니다. 3학년 때 5ㆍ16을 겪었지요. 당시는 1960년대 초였는데, 우리 것을 완벽히 버리고 미국과 유럽의 것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시대적 분위기였습니다. 그것을 근대화라고 여겼고, 이런 근대 기획이 국정의 기본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물론 이런 근대 기획은 일제 식민지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근대 기획에 대해 이제 반성할 때가 됐습니다. 앞서 인문학의 위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사실 이런 것들이 바로 근대의 결과물입니다.

근대화는 우리 현대사의 국가적 기획이었으며 당연히 근대성의 존재론 논리가 대화와 소통의 문화를 배제해 왔습니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이 진정한 소통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는 관계론 원리를 기조로 하는 인문학적이고 공동체적인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제입니다.

근대가 어떤 역사였는지,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살펴보면 근대사의 핵심 내용에 대해 알게 됩니다. 강자가 계속 자신을 키워 온 소위 '강철의 철학'이지요. 그것을 제 논리 체계에서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강화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것이지요. 개인이건 집단이건, 국가건 자기 존재를 강화하고 키워내려는 욕구가 근대성의 핵심 원리로 작동해 왔습니다.

거울에 비친 시대, 사람에 비친 시대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이런 패러다임이 근거하고 있는 패권적 질서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을 모아서 <강의>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에서 묵자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묵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서로를 계속 흡수 합병하여 덩치를 키워가던 시대입니다. 주나라 말기 수많은 나라로 갈라졌던 중국은 춘추시대를 거치며 12개의 나라로 줄어들고, 다시 전국시대에는 7개로 줄어든 뒤 결국 진나라 하나로 통일됩니다. 한 국가의 패권으로 정리가 된 셈이지요.  

지금과 닮았습니다. 지금도 거의 모든 국가들이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지향이었던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고 사활적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패권으로 귀결되고 있고요.  

진나라의 패권으로 끝난 춘추전국 시대의 치열한 경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혹자는 이런 경쟁을 통해 국가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춘추전국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묵자는 그런 이들의 주장을 "만 명에게 약을 썼는데 서너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어버린 것"에 비유합니다. 이런 약을 결코 좋은 약이라 부를 수 없겠지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치열한 경쟁은 소수의 국가, 결국은 한 개의 국가만 승리자로 남기고 모두를 몰락시켰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승전국에 주목할 게 아니라 다수의 패전국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소수의 승전국마저도 종국에는 패망하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상을 지켜본 묵자는 "불경어수(不鏡於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거울이 없어서 맑은 물을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았던 시절입니다. 결국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묵자는 이어서 "경어인(鏡於人)"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물이 아니라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것이지요.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전쟁을 일삼는 패권적 질서의 외양은 잠시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울(물)에 비춰보면 이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하지만 거울(물)이 아닌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 비춰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전쟁 승리의 혜택을 보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압도적으로 많을 테니까요. 아마도 사람에 비추어본다면 전쟁의 그늘에서 피폐해진 삶이 드러날 것입니다.  

묵자의 말은 부국강병의 화려한 면모가 아닌, 그것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 시대를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거울에 비친 화려한 모습이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힘을 과시하며 약소국을 계속 병탄해 가던 국가가 결국 약소국의 연합전선에 부딪혀 무너지는 것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지요.

묵자의 "불경어수(不鏡於水)"라는 말은 훗날 유학자들에 의해 "무감어수(無鑑於水)" 등처럼 개인 윤리를 강조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갑니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 대신 사람들의 삶에서 드러난 모습을 통해 시대를 파악하라는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가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닮지 않았는지  

산업자본주의는 어쨋거나 가치를 창출하기는 합니다.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요. 비록 그 과정에 투입된 노동력과 자연에 대해 제대로 갚아주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금융자본주의는 가치 창출과는 아예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흡수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코 지속가능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춘추전국 시대와 마찬가지로요.  

패권적으로 쌓아올린 부와 영광,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공적에 대해서는 이제 보다 냉정하게 평가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가 한 말 중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가 주의해야 할 점"이라는 게 있습니다.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가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쪽 문화권에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지칭하는 '히말라야 래빗'이라는 표현이 있나 봅니다.  

우리가 혹시 이런 '히말라야 래빗'을 닮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높은 곳에 서 있는 이가 정말 그 아래에 있는 이들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여기고 있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반성을 통해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또 이렇게 겸손해지면 존재론적 패러다임 속에서 자기 것을 무턱대고 끝까지 추구하는 무식함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속에서 서로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죠.  

하지만 근대 사회는 우리가 계속 "히말라야 산에 사는 토끼"를 닮아가도록 추동합니다. 심지어 자녀를 교육할 때조차 우리는 경쟁력을 강조합니다. 남보다 더 강한 존재로 크기만을 바라는 것이지요. 이런 사회에서 소통은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소통의 가장 큰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름이 뭐냐?"…우리 문화의 관계론적 전통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것과 달리 굉장히 아름답고 인간적인 문화가 많이 있습니다. 관계론적 원리에 따른 인문학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전통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제가 이런 것입니다. 먼저 제 감옥살이 경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 같은 사건으로 한 30명 정도가 징역살이를 했습니다. 저는 대법원까지 올라갔다가 파기 환송되고, 다시 재판 받느라 좀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소했습니다. 그랬더니 누가 "조금 일찍 왔더라면 고암 이응노 선생님을 만날 뻔 했는데…"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이 선생님과 함께 지냈던 분을 찾았습니다. 한 젊은 친구가 감방에서 함께 지냈더군요. 그 친구에게 이 선생님에 대해 물었더니 "괴팍한 노인네"라는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왜냐? 자꾸 이름을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쪽 팔리게 말이죠. 교도소에서는 이름을 잘 안 부르거든요. 수번으로 불러요. 저도 제일 잊어 버리지 않는 숫자가 교도소 수번이거든요.  

그런데 이응노 선생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이 뭐냐고 묻고 다닌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켜서 어떻게 번호로 부르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 친구가 자기는 응일이라고 대답했더니 "아 뉘집 큰 아들이 징역 들어왔구만" 그러시더래요. 자기가 맏아들이 맞다더군요. 그 친구는 이 선생님에게서 이런 대답을 듣고 밤새 한잠도 못 잤다고 하더군요.

이 선생님 세대의 분들은 사람을 결코 따로 떨어진 개인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들여다 봅니다. 누구의 자식인가. 누구의 형제, 누구의 친구인가라는 틀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관점이 아주 삭막하기만 한 근대의 존재론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관계론적 원리라 할 수 있지요.  

조화와 균형의 예술, 붓글씨에서 관계론적 원리를 찾다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제가 붓글씨를 잘 쓰는 편입니다. '처음처럼' 소주도 있잖아요. (웃음) 그 외에도 제가 붓글씨 써서 크게 걸어놓은 게 제법 많습니다. 한문도 잘 쓰고요. 그런데요. 붓글씨, 즉 서도라는 것은 서양에는 없는 예술 장르예요. 제가 서도의 관계론에 관한 책도 쓴 적이 있는데요. 서도는 동양의 관계론적 원리가 아주 잘 녹아 있는 장르입니다.

붓글씨를 쓸 때는 처음에 쓴 획의 각도가 비뚤어졌다고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쓰지 못 합니다. 그 다음 획을 통해 결함을 교정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안 되면 다음 획으로, 또 안 되면 다시 다음 획으로…. 또 글자가 틀리면 역시 다음 글자로 고쳐야 하죠. 한 행의 잘못은 그 다음 행으로 보완하고요. 이런 식으로 고쳐가면서 쓰다 보면 글씨를 쓰는 내내 굉장히 여러 곳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그래서 붓글씨를 쓸 때는 굉장히 긴장해야 합니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전체를 동시에 봐야 하거든요.  

그리고 붓글씨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굉장히 큰 종이에 조그만 글씨를 쓰면 안 되죠. 조화가 안 되니까요. 저 정도의 수준이 되면 붓글씨 쓸 때 까만 건 안 봅니다. 하얀 게 어디에 얼마나 남았나를 봅니다. 디자인 전공하는 분들이 제가 붓글씨 쓰는 것을 보더니 "선생님은 네거티브 스페이스만 보시는군요"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까만 것과 하얀 것만으로 붓글씨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요. 전체적으로 하나의 글씨가 완성되면 빨간 낙관도 들어가고 정서도 들어가서 최종적인 균형을 이룹니다.

이런 하나 하나가 모여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이 동양 미학의 절정이라고 하는 서도의 미학입니다. 글자 한 자, 획 하나 잘 쓴다고 좋은 글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글씨를 가져오길래 저는 "서구 시민적 질서는 잘 잡혀 있구만"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웃음)  

서도는 관계론의 예술인데, 그것은 어떤 배타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란 없다는 생각에 바탕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 공유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절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지극히 기계적인 곳이 돼 버립니다.

면벽 명상으로 건진 기억…"왜 1월1일을 특별하게 여기나요?"

또 징역살이 이야기를 할 게요. 제가 징역살이를 20년 정도 했는데, 그중 독방에 있었던 기간을 다 합치니 5년 정도 되더군요. 그 5년 동안 제일 열심히 한 것이 명상, 면벽 명상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오늘의 주제도 소통인데, 그렇게 면벽 명상을 열심히 하다보면 뭔가 소통된다는 것이에요. 우주의 정보진리체계와 통한다는 것 아닙니까. 갇혀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솔깃한지 모릅니다. 단전호흡하면서 아주 열심히 해 봤는데, 절대로 소통이 안 되더군요. 

그래서 제가 명상의 방법을 바꿨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하나씩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들까지 다시 떠올려 보는 것이죠. 단지 기억만 떠올리는 게 아닙니다. 당시의 경험을 추체험하면서 나이 든 상태에서 다시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감옥에서 다시 겪어 보면 굉장히 많은 것들을 새로 발견하게 됩니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제가 4살 때부터 기억이 나더군요.  

또 굉장히 저와 가깝고 함께 오래 지냈지만 제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잠깐 만나고 말았지만 제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학교에서 1월 1일에 학생들을 소집했습니다. 신년식을 한다는 것이죠. 당시에는 학교에서 그런 행사를 하곤 했어요.  

신년식을 마친 뒤 선생님께서 신년을 맞이하는 각오에 대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다들 뻔한 이야기를 했지요. 저도 심부름 잘 하고, 숙제 잘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순서가 중간쯤 가니까 한 친구가 독특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 친구는 공부도 못 하고, 집도 가난해서 별로 주목받지도 못 하고 학교에서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 하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일어서더니 자기는 시간은 원래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굳이 1월 1일이라고 특별하게 여기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 교실이 조용해졌어요. 저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요. 물론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죠. "내가 저런 이야기를 할 걸." (웃음)  

만약 제게 조금이나마 사색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신년식에서 들었던 강물 이야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합니다.

5년 동안 독방에서 지내며 면벽 명상을 한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란 뭐냐? 결론은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들, 내가 겪은 모든 사건들. 이 모두가 나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과 내가 살았던 사회, 우리 시대의 파란만장한 사건들과 아무런 상관없는 나의 고유한 배타적인 정체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가장 훌륭한 사람은 자신을 살고 있는 시대를 삶 속에 가장 깊숙이 끌어들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가 오랫 동안 진행해 온 근대기획의 결론으로 내면화된 존재론적 문화, 존재론적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습니다.

자신이 겪은 것이 유일하다고 믿는 데서, 또 자신의 존재성을 강화하려는 데서 모든 대립과 갈등이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여지가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물론 존재론적 문화에 기반한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게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우직한 이의 세상 보는 법 배워야…"머리에서 가슴으로 향하는 여행"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여섯 번째 주제는 "2개의 가장 먼 여행"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에 태어나서 학습과 포섭에 의하여 기존의 문화와 의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기존의 사회의식에 대한 우직한 독법을 키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문화, 즉 근대성과 자본의 원리, 존재론적인 원리에 던져져서 세상의 기존 질서를 부지런히 배우기만 한다면 사회의 변화, 발전의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반대로 사회를 자신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만 있다면 그래서 누구나 사회에 자신을 발빠르게 맞춰가기만 한다면 사회가 변화할 계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우직한 사람, 좀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회를 지금보다 인간적인 곳으로 바꿀 수 없을까 하면서 노력하는 가운데 사회는 조금씩 바뀌어 왔습니다.

기존의 사회 의식이 얼마나 편견에 치우친 것인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어떤 특정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깃든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인식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지혜로운 이들이 아닌 어리석고 우직한 이들에게 생겨납니다. 세상에 너무 쉽게 적응하는 이들에게 이런 능력은 필요없는 것이니까요.

우직한 이들이 세상을 보는 법, 기존의 사회의식에 대한 우직한 독법은 원래 언론의 몫입니다. 언론의 역할은 단지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닙니다. 언론의 바른 역할은 이런 우직한 독법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독법으로 세상을 읽어내면서 자신을 완성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그것을 "2개의 먼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에 이르는 여행입니다. 첫 번째 여행은 프럼 헤드 투 하트(From head to heart), 즉 자신의 우직한 독법으로 깨우친 주체적 인식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간적인 애정과 결합시켜가는 과정이지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제가 실토할 게 있습니다. 몇몇 친구들에게 좀 미안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196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굉장히 능력 있고 진보적인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그들과 헤어져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한 직후에 제일 먼저 물어본 게 그 친구들의 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더군요. 다들 출세했더군요. 그 대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별 능력 없어 보였던 친구들, 사명감이 아니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참여했던 이들, 그런 사람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게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징역을 살아 놓고도 사람에 대해 이렇게 모르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레시안



사람을 예술품으로 빚어내는 사회…"가슴에서 발로 향하는 여행"

또 하나의 먼 여행은 가슴에서부터 발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발에 도달한다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의 인성 고양뿐 아니라 동 시대의 가장 많은 이들이 고뇌하는 현장에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슴이 나무라면 발이 숲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회는 한 인간이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이르는 여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제일 좋은 사회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처럼 그 속의 사람들을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훈도해주는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편달은 어떤 사람을 걸어가게 하고, 그 라인에서 일탈하면 그것을 채찍질해서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훈도는 큰 가마에 집어넣고 따뜻하게 구워낸다는 뜻입니다. 편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지요.  

이런 훈도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문화가 성숙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를 누가 만들까요. 인문학적 가치도 소멸되고 그 자리에 화폐 가치라는 계량적 가치가 들어서 있는데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집단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집단이 없는 사회는 매우 불행한 곳이지요.  

언론이 신뢰집단이 될 수 있으려면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일곱 번째 주제는 이런 신뢰집단과 언론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신뢰집단의 역할을 해야 할 곳이 바로 언론입니다. 언론은 진실과 비판을 본령으로 합니다. 진실은 사실의 창조적 구성이며 이런 창조는 당대 사회의 과제를 중심에 둔 비판적 기능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비판은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우직한 실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기관이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에 충실해야 사회 일반의 신뢰를 받는 신뢰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신뢰 집단은 소통의 중심이며 이항대립의 극단적 갈등을 지양하는 주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뢰는 사회성의 핵심이며 그 자체가 가치입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것은 희망이고 희망은 신뢰에서 나옵니다.  

최근 언론을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앨빈 토플러가 이야기한 프로슈머의 개념이 언론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언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나뉘어 있는 구도 속에서 언론권력이 자신들이 조직한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 프레시안>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처럼 독자들은 더 이상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프로슈머, 즉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존재가 돼 가고 있습니다. 이들과 언론의 쌍방향 소통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새로운 사회 문화를 어떻게 키워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것은 <프레시안>을 포함한 언론의 숙제가 될 것입니다.  

앞서 언론의 본령이라고 이야기한 진실과 비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단순한 사실은 작은 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닷물을 그릇으로 뜨면 그 그릇에 담긴 것이 바닷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다라는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못 합니다. 언론이 객관적인 사실을 얘기한다고요. 그것은 거짓말이지요. 어떤 사실을 헤드라인으로 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수용자에게 관여할 수 있습니다. 사상은 선택입니다. 수많은 사상 중 어느 것을 선택해 그 선택된 사실이 어떤 발언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언론 권력이 해 온 역할이었습니다.  

언론은 사실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사실을 진실로 창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진실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캐물어야 합니다. 사회를 우직하게 읽고 그래서 조금씩 바꿔내는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사실을 새롭게 선택하고 구성하고 조직하여 진실을 창조해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여럿이 함께" 모인 지혜의 힘  

언론의 역할에 대해 시사점을 주는 사례로 프란시스 골튼이라는 통계학자이자 유전학자가 겪은 일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분이 어느 날 시골 장터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황소 한 마리를 무대에 올려 놓고 그 소의 몸무게를 맞추는 퀴즈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얼마씩 낸 뒤, 각자 소의 몸무게를 종이에 적어 통에 넣고 제일 가깝게 맞춘 사람이 각자가 낸 돈을 모두 가져가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골튼이 지켜보던 날은 800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소의 몸무게를 얼마나 맞출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아마 아무도 못 맞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통을 열어 확인해보니 정말 맞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걸 조사해보니 13명은 무엇을 적었는지 판독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걸 빼면 787장이 남는데, 거기에 적힌 숫자들을 다 더해서 다시 787로 나눴더니 1197파운드라는 숫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소의 몸무게가 얼마였는지 아세요. 1198파운드였습니다.

어쩌면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였는지도 모르지요. 저울이 틀렸을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보고 프란시스 골튼은 크게 뉘우쳤습니다. 단 한 사람도 맞추지 못 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죠.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쌍방향 소통이 발달한 인터넷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요.  

제가 감옥에서 나와서 붓글씨로 처음 쓴 내용이 "여럿이 함께"였습니다. 다들 참 좋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한글 액자가 별로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잘 아는 후배 교수 한 사람이 여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어요. "여럿이 함께"라는 말에는 방법만 있고 목표가 없다는 것이지요. "여럿이 함께 어디로 가자는 거냐. 그건 방법이지 목표가 없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가 글씨 아래에 방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라고요. 여럿이 함께 가야 할 목표는 이렇게 생겨난 길 위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목표는 길 위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특히 언론은 이런 생각을 경계해야 합니다. 대중은 잘 알아요. 아무리 강조하고 크게 활자를 뽑아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그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인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때 대중에게 소의 몸무게가 1197파운드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언론은 비로소 신뢰받는 집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아래로 손내미는 연대…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 신뢰받는 집단이 있습니까. 대학? 대학교수? 전혀 신뢰받지 못 합니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 안 끼는 곳이 없어요. 최근 바다이야기 사태에는 끼어들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정치권, 종교계, 법조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신뢰집단이 없는 사회는 이항대립만 남아 있는 사회가 됩니다. "가위와 바위만 있는 가위바위보"가 됩니다. 보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낳기 마련이지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신뢰집단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이 어떤 것이지요. 상대방을 흠집 내서 자신이 신뢰 받으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내부 소모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소모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인간이 사회 속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언론이 담당해주길 바랍니다. 이런 역할이 제대로 이뤄질 때 진정한 사회통합도 가능해지겠지요.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여덟 번째 주제는 사회통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절실한 아픔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관대한 사람과 오만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관대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을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는 결코 오만하지않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관대한 사람인지 오만한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보다 약한 이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가장 잘 들여다보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사회 통합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자리에 설 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우리는 강물을 닮아야 합니다. 사회 통합은 강물처럼 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물은 항상 아래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바다가 됩니다. 가장 큰 물, 가장 낮은 물. 그것이 바다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니까 이름이 '바다'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래로 손을 내미는 연대를 하방연대라고 부릅니다. 한 사회의 역량은 내부 소모를 줄이고 통합의 외연을 확대함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의 통합은 낮은 곳, 약한 자와 연대해 나가는 하방연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 이처럼 아래를 향하지 않는 연대나 통합은 매우 위험합니다. 자신들보다 강한 세력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불안에 바탕한 연대는 자칫 자신들보다 약한 세력에 대해서는 매우 오만한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하는 통합과 연대는 추종이나 야합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찰의 힘에서 비롯된 당당한 자부심
 

오늘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주제는 '성찰과 양심, 그리고 주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언론 매체를 대할 때 그냥 한 번 보고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언론은 사회의 빠른 변화를 쫒아가며 표면의 출렁거림만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언론의 역할은 '사실 보도'가 아니라 '진실의 창조'입니다. 그리고 사실 보도를 넘어서 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문화를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성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역사 상 대표적인 성찰론자를 꼽으라면 장자를 들 수 있습니다. 장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개구리와는 바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메뚜기와는 얼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개구리는 우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고, 메뚜기는 한 철밖에 살지 못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찰은 바다와 얼음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지엽적인 한계에 갇혀 바다와 얼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개구리나 메뚜기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큰 시야에 바탕한 성찰을 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합니다. 또 양심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물질적으로 조금 더 잘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인간적인 자부심, 자존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과 자존심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과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오늘 강연을 마칠까 합니다.

또 감옥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우리 방에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가 신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주는 수의만 입고, 알루미늄 식기 2개와 숟가락만 갖고 들어온 거예요. 심지어 런닝 셔츠도 입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참 딱해서. 치약도 좀 나눠주고 런닝 셔츠도 하나 벗어줬거든요. 그랬더니 필요없다면서 바로 거절하는 거예요. 표정도 어둡고 말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이상한 놈이라고 했어요.

이튿날 세수할 때 제가 다시 치약을 좀 나눠줬거든요. 그랬더니 "필요없다니까요"라고 하면서 세탁비누를 집어서 그걸로 양치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 보는 데서 나눠주려던 제 행동이 좀 부족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새 치약을 하나 따로 사서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줬어요.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 다 듣게 큰 소리로 "필요없다고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랬는데 한 달 후에 제게 다가오더니 "선생님, 치약 하나 사줄 수 있어요? 선생님한테는 받아도 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받으면 안 그래도 좁은 잠자리를 제가 또 양보해야 하잖아요"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친구는 사람이 역경 속에서 살아갈 때 약간의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는 게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떳떳하게 자부심과 주체성을 잃지 않는 게 어려움을 견디는 데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젊은 친구는 저처럼 개념어로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실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터득한 것이지요.

자부심을 키우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언론이 앞장서야

이런 자부심과 주체성을 키워주고 존중해주는 사회, 다양성과 인간적 가치가 존중받는 문화는 이런 사회적 토양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토양을 만들어 가는 데 언론이 앞장서야 합니다.  

더구나 <프레시안>과 같은 인터넷 매체는 스스로 권력이 되어 일방적으로 주장을 전달하기만 하는 매체가 아닌 까닭에 이런 역할을 담당하기에 더욱 제 격이 아닌가 싶습니다.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