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획 - 7대 폐습 이젠 결별하자]성장만 보고 달려온 사회…일제강점기로 퇴행한 ‘빈부 격차’

2015. 9. 4. 16:35도시와 혁신/대한민국, 혁신이 살 길이다(연재)

 
 
 
[광복 70주년 기획 - 7대 폐습 이젠 결별하자]성장만 보고 달려온 사회…일제강점기로 퇴행한 ‘빈부 격차’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ㆍ(6) 바로잡아야 할 ‘불평등’

▲농업서 제조업…IT까지
사회 골격·관계 변했지만
계층 상승 더 어려워져
청년·노인 빈곤은 더 심화


최창수씨(58·가명)는 1997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에 사내하청 노동자로 입사했다. 그해 12월 외환위기에 빠져들었지만, 경기는 그 전부터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공장 노동자로 취업한 최씨는 ‘몇 달만 있으면 경기가 풀리겠지’ ‘정규직이 될 날이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자영업을 접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상황과 기대는 모두 빗나갔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박에 직면한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제 도입을 골자로 한 사회협약을 발표했고, 사회적 논란 끝에 입법화됐다.

그후 최씨는 1999년 현대차와 현대정공이 합병된 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로 옮겨졌다. ‘명함’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최씨는 “사내하청 회사에서 현장관리자 승진 얘기도 나왔지만 안됐다”며 “돌이켜보면, 현장반장이 됐다면 내 몸 편하자고 ‘월차 쓰지 마라, 화장실 가지 마라’며 비정규직 동료를 괴롭게 했겠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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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째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그는 중소기업 비정규직보다는 나은 처지라면서도 딸과 손주들의 미래는 더 걱정된다고 말했다. “울산에는 마흔 넘기고도 결혼 못한 비정규직이 많아요. 비정규직이라고 하면 아예 소개가 안 들어오는 거죠. 손주들이 취업할 때쯤 비정규직이 없어져야 할 텐데, 부려 먹기 좋은 비정규직이 과연 없어질까요?”

숫자로 새겨지는 ‘불평등’

해방 70년, 한국 사회는 최씨의 ‘비관적 물음’이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각종 통계 숫자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 척도는 일제강점기 수준으로 퇴행했다. 프랑스의 토마 피케티 교수가 주도하는 ‘세계 상위소득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2012년 한국에서 상위 5% 소득집중도는 30.09%로 파악됐다. 1979~1997년 사이 19~20%를 유지하고, 외환위기 첫해인 1998년 18.44%의 최저점을 찍은 뒤 꾸준히 높아져 일제강점기였던 1940년(29.55%)보다 높아졌다. 농업사회에서 제조업-정보기술(IT) 사회로 바뀌고, 지주-소작 관계가 노사나 정규직-비정규직 관계로 대치됐지만, 경제·사회적 불평등은 지속·심화되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소득불평등이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선 부동산·금융 자산의 불평등이 소득불평등보다 높다. 계층간 격차도 심해 2013년에 최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45%를 점할 때 최하위 10%는 부채가 더 많은 마이너스 0.4%였다. 부동산 자산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2005년 도입된 종합부동산세는 2008년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아 무력화된 상태다.

교육도 계층 상승보다는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바뀌고 있다.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부자 365쌍(아버지 평균 출생연도 1946년, 아들 1976년)을 조사해 지난 4월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최상위 25% 부모의 자녀 4명 중 3명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간 반면 최하위 25% 부모의 자녀는 이 비율이 5명 중 2명에 불과했다. 지난해 11월 국민대통합위원회 보고서도 비슷한 추세다. 저소득층 가구가 저소득층으로 유지될 가능성은 2005~2006년 68.3%였으나 2011~2012년에는 76.6%로 높아졌다. 반면 저소득층을 탈출해 중산층으로 상승할 가능성은 29.18%(2005~2006년)에서 22.97%(2011~2012년)로 급감했다. 계층이동의 벽이 더 높아진 것이다.


고령·청년층 모두 빈곤 심화

한국인들의 미래 전망은 갈수록 부정적이고, 젊은 세대일수록 더 비관적이다. 2013년 ‘KDI 행복연구’ 조사를 보면,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운이나 연줄보다 노력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비율이 60대는 75.5%였으나 20대에선 51.2%로 나타났다.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요즘 불평등 같은 사회 문제를 고민하는 청년들은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찍혀 취업이 안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은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한국은 ‘원래 그런 나라’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구조화·심화되는 요인을 세 가지 변화에서 찾는다. 우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분된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초점이다. 2001년 360여만명(26.8%)이던 비정규직 노동자는 2014년 600만명(32.4%)을 돌파했다. 노동계는 이미 2008년부터 7년째 800여만명(45%)으로 추산하고 있다. 임금 수준이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복지혜택은 더 열악한 값싼 노동자들이 양산되고 있는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해온 비정규직은 갈수록 직접 고용되는 계약직보다 파견·용역직 비중이 커져가는 구조다. 어느덧 한국은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 됐다.

고령층의 빈곤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한국 노동자의 평균 퇴직연령은 2014년 기준 53세이고, 정년 이전에 퇴직한 사람이 67.1%를 차지한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가 2001~2011년 사이 한국 남성들의 계층 이동을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2001년 30대였던 정규직 중산층 남성이 10년간 중산층을 유지한 비율이 65.13%였으나 50대에서는 이 비율이 26.81%로 격감했다. 노후 세대 진입을 앞둔 50대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불안정해지고 있는 셈이다.

급증하는 1인 가구도 절대빈곤율을 높이고 있다. 1990년 전체 가구의 9%였던 1인 가구는 2013년 25.9%로 급증했다. 네 집 가운데 한 집이 1인 가구지만, 연 1인 가구 절대빈곤율은 41.3%에 달했다. 65세 이상 고령층과 ‘실신(실업+신용불량) 세대’로 통칭되는 청년층의 1인 가구 비율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 신 교수는 “불평등이 커지는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나중에는 추세를 반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며 “정부가 성장률 하락에는 즉각 대응하면서 궁극적으로 성장률도 떨어뜨리는 불평등에는 정책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실질적 소득재분배 정책, 갑론을박…실행은 요원

학계 “사회적 대타협이 해법”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 기조가 무엇인가’를 놓고 한국사회는 갑론을박을 계속해 왔다.

크고 작은 선거나 사회적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학계나 시민사회에서 ‘모범 답안’이 여러 축으로 제시돼 왔다. 최저임금 인상(노동소득 강화), 비정규직 해결(고용구조 개선), 토지·주택·금융 등 자산 불평등 완화, 재벌 독점체제 개혁, 증세 등 조세개혁, 복지와 소득재분배 기능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관건은 실행 가능성이다. 학자들의 전망은 밝지 않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경제학)는 “성장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분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며 한국은 복지 지출이 본격적으로 전개돼야 하는 단계”라며 “그러나 앞으로 저성장이 불가피하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어 불평등 해소를 위한 여건은 비관적”이라고 말했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노동시장의 극심한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복지제도도 제대로 작동하는데 재벌들은 정규직 보호를 약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며 “정치가 이걸 조정해야 하는데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선 ‘사회적 대타협’이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 커지고 있다. 다만 “정부는 격차 해소에 앞장서고, 노조는 미조직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기업은 최저임금을 끌어올리는 식으로 3자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여전히 정부의 역할이 크고 자본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정부”라며 “지금처럼 정부가 기업과 같은 입장에서 노조의 양보만 요구해서는 대화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