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목표 파기 새 감축안 발표 뒤
한국 기후대응 평가 최하등급 강등
‘기후 불량국’ 꼽히던 미·중 아래로
정부, 주요국 압박에 목표상향 고심
한국 기후대응 평가 최하등급 강등
‘기후 불량국’ 꼽히던 미·중 아래로
정부, 주요국 압박에 목표상향 고심
평가는 냉정했다.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를 비롯한 유럽계 4개 주요 기후변화 관련 연구기관이 공동 운영하는 기후정책 평가·분석 기구인 기후행동추적(Climate Action Tracker·CAT)은 지난 15일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평가 등급을 ‘충분’에서 ‘불충분’으로 바꿨다. 한국 정부가 2020년 이후 새 기후체제에서의 ‘기여’(INDC) 계획 수립을 위해 4가지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를 발표한 지 나흘 만이었다. 이 기구가 한국에 매긴 평가 등급은 ‘모범적-충분-중간-불충분’으로 구분되는 4개 등급 가운데 최하위다. 기후변화 대응 모범생으로 국제사회의 찬사를 받던 한국이 순식간에 기후변화 낙제생으로 추락한 셈이다. 한꺼번에 두 단계나 강등되면서 한국의 평가 등급은 오랫동안 국제사회가 지구촌 기후변화 대응 노력의 진전을 막는 불량국가로 지목해온 미국과 중국보다 낮아졌다.
한국이 기여 계획용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를 발표한 날 이 기구는 미국과 중국의 등급을 최하위 등급에서 한 계단 위인 ‘중간’으로 올렸다. 미국은 지난 3월말 유엔에 2025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5년 대비 26~28% 감축하겠다는 기여 계획을 제출한 것에, 중국은 2014년 11월 늦어도 2030년 이후로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주목한 것이다. 2009년 발족한 기후행동추적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80%를 점유하는 32개국(유럽연합 포함)의 기후대응 수준을 평가해 인터넷에 공개해오고 있다.
이 기구는 누리집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이 발표한 2030년 대비 14.7~31.3% 온실가스 감축 계획안은 “한국의 기존 2020년 감축 약속보다 덜 야심적”이며 “(선진국들의 감축 기준연도인) 1990년 대비 98~146% 온실가스 배출량을 증가시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이 기구는 “한국의 계획안은 한국이 덜 줄인 만큼의 온실가스를 다른 나라들이 더 감축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대부분의 나라가 한국처럼 행동할 경우 지구 기온 상승폭은 섭씨 3~4도를 초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평가기구의 분석과 최하등급 평가로 미뤄볼 때 한국이 실제 발표한 감축 시나리오에 맞춰 기여 계획을 제출할 경우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에 무임승차하려는 불량국가로 규정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미국과 중국을 향했던 손가락이 한국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해외 수출로 지탱되는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국제사회에 선언한 2020년 감축 약속을 실제 파기할 경우 국가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면서 국제 환경단체들의 시위 대상인 불량국가로 떨어질 수 있다”며 “이런 국가 이미지 훼손은 유럽 등 선진국에서 시민사회가 문제 있는 기업·국가에 대한 연기금 투자를 막는 등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점에 비춰 실질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엔과 유럽연합,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한국을 상대로 기여 계획을 마감시한인 9월말 이전에 서둘러 제출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인 한국의 기여 계획 제출이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영향을 끼쳐 올해 말 파리기후회의에서 새 기후체제 협상을 타결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 발표는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한국은 2009년 국제사회에 2020년 감축 목표를 발표하고, 2012년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유치해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 기후변화 대응의 가교 역할을 자임해온 터여서 실망은 더욱 컸을 법하다. 일부 선진국은 정부 공식 발표 전에 나온 감축 목표 후퇴 가능성을 알리는 언론 보도를 보고 진위 파악에 나서고, 독일 본에서 열린 파리기후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을 상대로 사실 확인에 들어가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한국과 공식·비공식 접촉한 주요 나라들과 유엔은 모두 한국의 2030년 감축 목표가 기존의 2020년 목표보다 후퇴한 것에 초점을 맞춰 지난해 페루 리마기후회의에서 결정된 감축 목표 ‘후퇴금지 원칙’ 준수를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미국은 백악관에서 직접 한국의 기여 계획 수립상황을 점검하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에 공정하고 의욕적인 목표 설정을 주문했다.
전례 없이 구체적이고 강력한 국제사회의 압박에 당황한 정부는 이미 발표한 온실가스 4가지 시나리오 감축안뿐 아니라 이보다 강한 새로운 안까지 놓고 숙의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새로운 감축안까지 검토 대상에 들어가면서 애초 정부가 잡았던 기여 계획 제출 시한이 늦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장은 “유럽연합 쪽에서는 이번 새 기후체제에 주요 온실가스 배출국들이 공정하고 의욕적인 기여안을 내놓지 않으면 이들 나라에서 들어오는 제품에 국경탄소세를 붙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수출을 많이 하는 국가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