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촌, 철저한 준비가 답이다
서울에서 하던 인쇄업을 접었다. 그리고 부보님이 계시는 충남 공주로 내려갔다. 사실 고향이 공주라고는 하지만 대전과 더 가까운 곳이다. 부모님이 나이를 드셨기에 좀 더 정성껏 모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서울에서 하던 인쇄업이 지지부진하기에 더 늦기 전에 농사와 비육우 사업을 부모님께 배우기 위해서였다. 어찌말하면 마지못한 귀농이었다. 부모님께서는 평생 고향에서 비육우 사업과 병행하여 농사를 지으시는 농촌의 선각자시다.
“얘, 서울에서 잘 되지도 않는 사업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 고향에 내려와서 농사나 짓자.”
아버지께서는 늘 나를 고향으로 내려와 살라고 재촉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농사 채를 물려받아 잘 운영만 해도 잘 살지는 못해도 정도껏 생활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귀농의 결심을 굳혔던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 밑에 따로 집을 얻어 수리를 했다. 현재 농촌에는 빈 집이 많이 있다. 농촌에서 살다 돌아가신 분들의 집,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집 등이 빈 집으로 놀고 있다. 그런 놀고 있는 집을 얻으니 돈도 많이 들지 않고 거저였다. 몇날 며칠을 수리한 헌 집은 새집으로 바뀌어 시골에서도 살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영농 철이 시작되자 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농사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얘 감자는 씨눈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여러 조각으로 잘라 심어도 하나의 눈에서 싹이 나는 거란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일하는 곳에 오고가며 이것저것을 손보아주며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내 역시 진한 화장에 양산을 바쳐 들고 다니던 사모님의 모습을
완전히 벗었다. 모자를 쓰고 수건을 두르고 내가 하는 일을 뒤에서 거들며 농촌생활에 맛을 들이고 있었다. 못자리판에 나락을 뿌리고 물을 대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나락에서 파릇파릇 싹이 터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뿌듯했다. 이렇듯 풋내기 농사꾼이 고향에
정착하여 어느 하지가 지난 날 이었다. 아버지께서 경운기에 쟁기를 달고 오시더니 감자를 캐자고 하셨다. 1년 중 가장 먼저 심는 것도 감자고
가장 먼저 수확을 하는 것도 감자였다. 경운기 쟁기의 보습에 넘겨져 뒹구는 뽀얀 감자알은 땀의 열매였다. 중간 상인에게 감자를 넘기며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옥신각신 하는 것은 서울이나 시골이나 똑같았다.
“작년에도 고추 값이 좋았으니 올해도 고추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 농촌에서 돈 되는 것은 고추 밖에 없으니까.”
아버지
말씀에 전문가들이 싹을 틔워 파는 고추 모종은 값도 싸고 질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추 모를 종묘상에서 사다 심기로 했다. 밭이랑을
꾸며 놓고 비닐을 씌웠다. 농촌에는 일손이 부족해 풀을 매며 농사를 짓기에는 버거워 비닐을 씌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잡초를 매는 번거로움도
덜고 고추도 잘 자란다는 아버지 말씀을 교과서로 삼아 하나하나 농사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심어 놓은 고추 모의 줄은 잘 훈련된
고참병사의 줄처럼 그리 반듯할 수가 없었다. 반면 내가 심은 고추 모는 이제 갓 입소한 신병들이 줄을 선 모습과 비슷하게 비뚤었다. 이런 것이
40년 경력의 농사꾼과 햇병아리 농사꾼의 다른 점이었다. 역시 농사란 힘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쳐가고
있었다.
“더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는 김장을 위해 배추, 무의 농사를 준비해야 하느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 아직 더위도 가시지 않았는데 무슨 김장 준비를…….”
“도시에서도 가을 신상품을 위해서는 봄부터 여름까지 준비를 하지 않더냐? 농업도 마찬가지니라. 계절이 다되어서 준비한다면 이미 때가 늦느니라.”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역시 농사도, 장사도 한 계절은 미리 내다보며 준비를 해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도시에서 사업이랍시고 벌여 운영을 했지만 아버지처럼 한 계절을 미리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랬으니 사업이라고 해봐야 그 모양 그 꼴로 현상유지 하는데 급급했으리라. 역시 세상은 먼저 앞을 내다보는 사고를 가지고 살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농사에서도 깨우치고 있었다. 으레 사람들은 말한다.
“그깟 하다 안 되면 시골에서 농사나 짓지.”
이 말은 우리의 생각에 큰 오류가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농사도 앞날을 내다보아야 성공할 수 있는데, 다른 사업에서 실패한 사람이 과연 농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사업에 실패한 사람을 받아주는 곳이 농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농업에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우쳐가고 있었다.
추석을 얼마 안 남겨놓고 나에게 아버지의 특명이 떨어졌다.
“추석 때면 고기의 소비량이 늘어 비육우 값이 오르니 소를 한 마리 내다 팔아야겠다. 이번에는 네가 소를 우시장으로 끌고 나가 팔아 오거라.”
아버지께서는 아들인 나에게 소를 팔고 사는 방법을 배우라며 모든 책임을 맡기셨다. 나는 혹시나 소를 잘못 팔아 손해나 보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축산 농가에서 소를 팔려면 화물차를 불러 소를 싣고 새벽에 시장으로 나가야 했다. 우시장은 새벽에 개장을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우리에서 내 놓은 소는 한참동안 날뛰었다. 간신히 화물차 기사와 힘을 합해 날뛰는 소를 진정시켜 차를 실었다. 그리고 공주 우시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차에서 소를 내려 우시장 말뚝에 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소차에서 소를 내려 우시장 말뚝으로 끌고 가다가 소를 놓치고 말았다. 400kg짜리 소가 한 번 요동을 치자 고삐를 쥐고 있던 나는 질질 끌려가다 힘에 부쳐 끈을 놓고 말았다. 얼른 끈을 말뚝에 감아 버텼어야 했는데 경험이 없었기에 그랬다. 한번 놓친 소는 우시장을 가로질러 어물전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추석 대목장을 보기 위해 전을 벌려놓은 어물을 짓밟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장 사람들의 도움으로 소를 잡아 말뚝에 매긴 했지만 못쓰게 된 남의 어물 값을 모두 물어주어야 했다. 그래도 생선이 아까워 어물전에서 소에 덜 밟힌 고등어를 자루에 담아와 동네에서 잔치를 했는데도 고등어가 남았다. 그 이후 수일간 우리 집 반찬은 고등어였다. 그래서 그 이후 고등어에 질린 나는 10여 년간 고등어를 입에 대지도 않았던 에피소드가 가끔 나의 헛웃음을 몰고 온다.
한여름 고추 수확이 한창이었다. 하루에 너 댓 가마씩 고추를 땄다. 고추 건조기가 있었으나 이를 다 말릴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일부는 멍석을 깔고 햇빛에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들일을 하기 위해 논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집안에 널어놓은 고추가 걱정되어 논에서부터 달려왔으나 이미 고추는 소나기를 흠뻑 뒤집어 쓴 후였다. 한 번 물에 닿은 고추는 제대로 마르지 않고 곯는다. 힘겹게 봄부터 고추농사를 지어 이제 겨우 빨간 고추를 땄는데 소나기에 범벅이 되어 곯아가고 있으니 꼭 자식이 병들어가는 것 같은 아픔이 몰려왔다.
“벼를 베고 추수를 해야 하니 논에 물을 빼야 한다. 그래야 기계가 논에 들어가서 벼를 벨 수 있으니…….”
논에 물이 있어 바닥이 질면 기계가 논에 들어가 작업을 하기가 어렵기에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물고를 낮추고 며칠간 논에서 물을 뺐다. 그리고 내일은 벼를 베기로 했는데 오늘 저녁에 비가 억수로 쏟아진 것이었다. 정말 난감했다. 그렇다고 벼를 베지 않을 수도 없었다. 농기계를 날짜에 따라 맞추어 놓은 집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농사란 자신의 의지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날씨가 도와주어야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귀향을 해서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 농사일은 만만하게 보고 귀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추수가 끝나고 김장을 위해 심은 배추와 무를 출하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밭떼기로 배추를 살려는 업자들이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러나 준다는 값은 터무니없는 값이었다. 그들이 준다는 값이 억울해 농수산시장에 시장조사를 나갔지만 폭락한 배추, 무값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몇의 농가에서는 김장채소를 갈아엎는 극단적 조치로 자신의 울분을 토해냈으니 이 또한 농부의 삶이었다. 그런 일련의 사태를 보고, 듣고, 느낀 나는 농업을 함에도 연구하고, 기록하고, 조사해야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진리를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김장을 끝내고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해 일고 나면 농촌에서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농한기라 하여 이곳저곳을 어울려 다니며 화투로 겨울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얘, 애비야. 비닐하우스를 짓고 딸기를 심어야 하니 누구와 품앗이 좀 하거라.”
아버지의 엄명도 있었고 나 역시 남의 집을 일을 해주면서 농사일을 더 배우고 싶어 한겨울에도 품앗이를 하러 나섰다. 그래야 우리 집 딸기를 심을 때 그들이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즘 농촌에서는 일손을 구하기 어려워 농가들끼리 서로 품앗이로 간신히 영농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한 겨울에 특수작물이라도 재배를 해야 가을에 손해를 본 김장 채소의 비용을 복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겨울 내내 딸기를 재배해 출하를 끝내면 다시 봄이 온다. 그러면 다시 1년의 농사 계획을 세워 논과 밭으로 종종걸음을 쳐야 겨우 애들 가르치며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요즘 귀향을 하려는 사람들이 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경험으로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농촌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려거든 귀향을 포기해야 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산업의 한 부류 중 농업에 속한다. 농업이 하나의 직업이란 말이다. 그런 직업에 몸을 바짝 붙여 일하고 찬밥에 물 말아 먹어가며 아침에 신은 장화를 밤에 벗을 생각을 한다면 귀향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농작물을 심어 놓고 계절이 지나면 자라고 여물어 소득을 올려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는 귀향을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도시에서의 사업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기에 말로 하면 통하고 서로 이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작물은 말이 통하지 않고 가축을 기른다 해도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 모두가 나의 예측과 판단과 결정이 나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농촌으로 귀촌 귀향하여 농업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면 우선 마음부터 다잡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40년 경력의 사부가 있는데도 날마다 일머리를 몰라 허덕이고 있다. 이처럼 나는 오늘도 아버지께 지청구를 들으며 농사일과 축산을 배우고 있으니 귀농과 귀촌을 희망하는 이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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