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 하승우 외, 2014 사는 이야기
'마을'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 하승우 외, 2014
시의적절한 책이다. 지금쯤 유행이 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에 관해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라는 책이 나왔다. 마을 만들기 '선수'들이 모여서 각자의 현장 경험을 통해 생긴 고민들을 나누고 토론한다.
시작은 '질문'이다. 우리가 왜 마을을 고민했지? 우리가 이 운동을 왜 했지? 답을 찾으려면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 때문에 수차례 토론의 결론은 다시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은 무엇일까?
마을공동체, 왜 '위기'를 이야기하는가?
20여 가구가 조금 넘는 작은 시골 마을에 귀촌을 해 살림을 꾸린지 6년이 넘어간다. 초창기 도시 생활에 익숙한 탓에 '마을'은 불편했다. 아침 저녁 안 가리고 불쑥 찾아오는 이웃들에 당황하거나, 마을 행사를 알리는 이장님의 확성기 공지에 나갈까 말까 안절부절 하기도 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했던가. 이웃들과 안면을 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느새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신기루같았던 마을이 구체적인 '관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관계를 맺지 못하면 마을에 살아도 외로운 섬 신세를 면치 못한다. 단절되고 파편화 된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 다를게 없다. 내가 사는 마을은 한때 초등학교가 있어서 면사무소 소재지 다음으로 규모가 크고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 지금은 하나둘 떠나고 초등학교 마저도 폐교된지 오래라, 60대 이상 고령 인구가 대부분인 작은 마을이 됐다 . 더구나 아이들은 아예 없어서 우리집 애들이 이 마을의 유일한 아이들이다. 내가 본 마을은 아이들과 청장년, 여성과 노인 등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부대끼며 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활력이 넘치는 대신 몰락한 농촌의 삭막함이 감도는 곳. 이웃들의 경조사를 챙기거나 마을 청소와 같은 공동 울력을 하며 공동체의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농촌 마을은 너무나 노쇠하다. 마을이 유행처럼 번지다보니 각양각색의 '마을'들이 출현한다. 도시와 농촌의 현실이 엄연히 다르고, 무리지은 사람들의 처지와 관심사에 따라서도 다양한 형태를 띤 '마을'들이 생겨났다. 다양한 형태의 마을공동체들을 보면 각자 '마을'에 대한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이란 시공간을 오랫동안 함께하며 사람들이 맺어온 관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느슨한 관계'를 선호하는 현대인들이 만드는 21세기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보인다. 농촌이 마을공동체의 전통적인 인프라를 상실한 채 점점 사라지고 있다면, 도시는 물리적 밀착도보다는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만남과 흩어짐이 유연한 '네트워크' 방식으로 마을에 접속 중이다. 농촌이든 도시든간에 현실이 이러하다보니 마을공동체는 '사업'이 되었다. 뜻 맞는 소수가 결사해 터전을 잡고 아예 공동체를 꾸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중적이지는 않다. 대신 민관 협력을 통해 자원을 조달하고 추진하는 마을 '사업'이 대세다. 부작용은 만만치 않다. 관에서 돈을 끌어들여 사업을 벌렸다가 오히려 공동체에 상처만 남기고 끝나버린 경우도 많고, 주민들의 살림살이와는 무관하게 외부인 유치에만 열을 올리는 전시용 마을 만들기로 전락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마을활동가들은 지금이 마을공동체 운동의 절제절명의 위기라고 본다. 애초에 '운동'이었던 것이 '사업'으로 바뀌면서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변질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치와 자급이 가능해야 '마을'이지 마을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랜 기간동안 함께 하면서 만들어진다. 마을은 한 가지 뜻과 한 가지 이상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가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마을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상향'도 아니다. 늘 좋을수만은 없다. 때로는 대립하고 반목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의 숙성이 곧 '마을공동체'다. 마을이 지속가능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마을에서의 삶'이 가능해야 한다. 자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마을에 자치적인 의사결정구조가 없고, 자급을 말하면서도 자원은 모두 외부에서 조달해야만 하는 신세라면 마을공동체를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마을은 주민들의 호혜와 협력으로 만들어가는 '삶의 터전'이다. 대부분의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농촌의 경우, 외부에서 자원을 조달하거나 도농 교류처럼 도시와의 연계를 모색하는 것도 마을공동체 복원의 방법이 된다. 자급하고 자립해야 한다는 명분만 앞세워 고립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이것이 한시적인 사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업 농촌의 재생과 마을공동체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다.
마을의 정체성이란 곧 그 마을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을을 마을답게 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의 자각된 힘이다. 따라서 마을에 주민들의 의견과 힘을 소통하고 모아내는 구조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마을의 지속가능성 또한 마을 주민들 속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운동과 사회운동,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마을이 마을 다우려면 어떠해야 하는가'와 더불어 중요한 질문은 '마을은 과연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나'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보여지듯이 세상은 엉망진창인데 마을만 유독 '장미빛'일수는 없다. 마을은 평화로운데 노동 현장이 전쟁터라면 이것도 모순이다. 마을이라는 틀에 갇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담 쌓고 사는 것도 문제지만, 주류운동의 아집만을 내세우며 마을공동체와 같은 대안운동을 여전히 터부시하는 것도 안될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마을운동과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삶터의 이야기가 일터로, 일터의 이야기가 삶터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신영복 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스스로 시대의 복판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시대와 역사의 대하로 향하는 어느 가난한 골목에 서기를 주저해서도 안되리라 믿습니다"라고 했다. 마을운동과 사회운동은 각각의 영역에서 고유한 사명을 갖고 있다. 의도적인 거리두기 대신 적극적인 소통과 연대를 꾀한다면 진보의 파이는 더욱 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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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
이 책에는 마을만들기 사업이라든가, 지역활동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내공을 가진 일곱명이 네 번의 만남을 통해 나눈 이야기와 글들이 엮여있다. 처음에 몇번은 조금씩 힐끔거리다 엊그제는 하루종일 손에 쥐고 밤늦게까지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덮고서는 쌩쌩에게, 우리 뭔가 해보자, 라고 했다. 내가 여기에 살고있음으로 인해 이곳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도록 하는 일들을 찾아보자고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살면서 어떤 문제들을 만났을때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말고 해결해보려는 시도를 해보자는 거다. 그 과정들을 겪어보는 것! 예를 들어, 내가 어제 이음이와 집앞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고 손을 씻으려는데 거기에 있는 수도의 꼭지가 없어져 물을 틀 수가 없었다. 불편했지만 그냥 대충 넘겼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왜그런지 알아보고 수도를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들에서 놀이터안에 있는 노인정할머니 할아버지들이나, 놀이터 수도에 대해 문의할 수 있는 관계자와 어떤 관계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민원', 또 누군가에게는 '참견', '오지랖', 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들을 해보는 것이다. 앞으로 상일동에서 8개월을 더 살터인데 그동안 그런 일들을 찾아서 해보자! 내가 이곳에 살고있음으로 인해 이곳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도록하는 일들. 말은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은 생활 속의 사소한 문제들을, 특히 공공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좀 더 집중해 살펴보자는 것이다. 거기까지 얘기를 하고 밤이 늦어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나서 새벽녘에도 자다 깨어 한참동안 곱씹었다. 뭔가 나의 모지란 생각을 넓혀주는 책을 오랜만에 만나 들떠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왈가왈부하기보다 나를 친 이야기들을 옮겨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지막 좌담을 하는 가운데, 어렵게 정치의 문제를 꺼내들었다. 정치라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을 뜻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마을은 정치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한다. 22, 정치를 품은 마을, 울퉁불퉁한 마을을 꿈꾼다, 김상철
또 사랑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당연히 동성애와 같은 다른 형태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못해요. 동성애는커녕 사실 10대의 연애도 못 받아들이죠. 아이들에게 유기농 농산물로 건강한 밥을 먹게 해주고 공부를 잘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좋은 어른, 좋은 마을, 좋은 공동체가 되죠. 노동이 감추어지고 사랑을 상상하지 않는데도 따뜻하고 넉넉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가 있다면 그건 대체 누구의 마을일까요? 50, 한채윤
하지만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다고 반드시 옳다는 확신은 버려야 하는 거지요. 일을 시작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에 의해 제어될 것이냐가 중요해요. 그것은 지역사회 공동체이고, 그 공동체의 공론장이어야 합니다. 62, 권단
공원에서도 문제가 계속 생겨요. 새마을부녀회가 꽃을 심어놓으면 할머니들이 꽃을 뽑아버리지요. 자기 집에 옮겨 심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니 주민들은 싫어합니다. 종이박스를 서로 가져가려고 싸우기도 하고요. 그 꼴 보기 싫다고 모아서 다른 골목에 버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데도 마을 주민들이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러시는지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아예 눈에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117, 박영길
지역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커뮤니티, 즉 몇 명이 살 때 자급과 자치가 가능한 공동체가 될까요? 사실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지요. 그냥 국가에서 정해준 행정구역대로, 통치자가 정해 준 통치구역대로, 우리의 삶터는 그렇게 구획되어 왔잖아요.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 평균 인구는 20만 명 가까이 됩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유례없이 많은 경우입니다. 155, 권단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활 권역이 어디까지인가 느끼는 거지요. 그것은 정서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첩되고 교차되는 지점을, 뭐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들끼리 동일하게 느끼는 공간에 대한 소속감 같은 것 말이지요. 162, 권단
대신 마을공동체에 대한 사례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좀 아프다. 진심과 열정을 가지고 마을공동체를 만들어온 과정을 존중해야 하고 감히 평가절하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은 충분한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두를 위한'이라든지 '소통'이라든지 '어울려 사는 꿈'이라든지와 같은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다고 상상을 하고 말하는지 너무 분명해서 소외감을 느낀다. 165, 우리의 상상력 부족으로 지워지는 존재들을 위하여, 한채윤
진행하는 워크숍 프로그램 중에 자치구 지도를 만들어 보기도 해요. '동'경계만 있고 아무 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지도를 가지고 자기 집을 표시하고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요일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가까운 이웃이나 자주 찾는 곳 등을 다른 색깔로 표시하며 동선을 그려보는 겁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공간에 모인 이들의 실제 마을의 크기가 딱 보여요. 169, 김정찬
저는 일터 안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조합이 있어야 비로소 아래로부터의 구심이 만들어지고 비교적 수평적인 의사구조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그러면 삶터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반상회든 마을 회의든 이 지속적인 공론장이라고 보았지요. 171, 권단
저는 우리가 소수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말하기는 조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용과 포용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왜 문제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어쨌든 이미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을 상정하는 거잖아요. 받아들여지는 사람과 받아주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면 그건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거지요? 177, 한채윤
문제는 지역사회, 마을의 체력이 허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반찬 가게, 문구점, 동네 서점, 이런 게 소중한 통로인데 점점 없어지고 있잖아요. 우리 동네에 좋은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곳이 망가져버린 상태, 자본은 계속 위험을 우리게에 떠넘기며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상태에서 생활 속의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까요? 191, 김신범
저는 여전히 마을은 '모임'보다는 '싸움'의 장으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3, 박영길
안전 기준을 만들고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를 주민이 아닌 전문가들이 확인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우리 눈으로 보는 게 훨씬 더 명확할 때가 많아요. 이 생각을 깨지 않는 이상 자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손으로 뭔가를 생산하려 해도 법이 정한 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불법이잖아요. 기준을 자본이 지배하고 자본이 지배하면서 국가의 관리 도구가 되고 이윤을 만들기가 쉽게 된거죠. 이걸 돌려놓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마을 만들기에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209, 김신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더 마을은 환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고보니 언제부터 마을이 회자된 거죠? 2000년대 후반에만 해도 분명 '지역'이란 말을 했었는데요.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이제 옛날방식의 운동은 끝났다, 지역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서 풀뿌리 운동이 재조명되고 '지역'이란 것 자체가 화두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인가 '마을'로 바뀌었어요. 지역이라는 개념을 갖고도 충분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마을로 가니 합법적운동하는 것 같고, 행정적 지원도 들어오고, 엄청난 공적 지원금도 들어오고.....지역은 중앙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는데 마을은 그런 설정조차 지워버리면서 뭔가 낭만과 환상만 남기는 거 같습니다. 222, 한채윤
결국 다양한 그룹들이 그들만의 심리적 이웃들을 만든 다음 그런 자신들의 마을이 어떤 공간 속에서 서로 겹치고 중첩되면서 마을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배척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지요. 서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직동이 왜 너네 마을이야, 라면서 서로를 배척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에요. '공룡'은 사직동을 우리 마을이라 생각하면 되고 또 다른 사직동의 그룹들은 또 사직동을 자신들의 마을이라 그러면 되고요. 서로 만나 교류하게 되면 교류하면 되는 거지요. (...) 그렇게 각자의 마을이 있는 거고 다만 사직동 안에 겹쳐져 있을 뿐이지요. 224, 박영길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자립이 가능한 생활권 중심의 지역사회이어야하지요. 그것만큼 불온한 것은 없습니다. 외부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치 않다는 것은 억압과 착취의 지배 하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언제든 그 자체로 독립할 수 있다는, 연대하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체제는 그 연결 고리들을 끊어내고 각각 경쟁의 대열에 서게 하려 합니다. 사실 사업 공모를 통한 마을'사업'은 줄세우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229, 권단
233-마지막. 공론장을 만들어라!
박영길: 옥천의 경우 면단위에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과 <옥천신문>, 이 둘을 빼면 다른 곳도 사정은 비슷해요. 결국 이 두가지가 어쩌면 핵심적이지 않나 싶어요. 사직동의 경우 이야기할 곳이 없어요. 주민자체센터가 부르지도 않고 동네에서 화가 나도 얘기할 데가 없어요. 실제로 마을 만들기 할때 청주시가 담장 허물기를 하면서 한때 공무원과 계속 얘기했던 게 반상회를 복원하라고 했어요. 마을이나 도시에 계속 문제가 생긴다, 이걸 풀어가는 방식, 계속 얘기할 수 있는 단위에 힘을 줘야 된다고요. 담장 허물기에 몇천만원 쓸거면 차라리 통반장이나 반상회 나오는 사람에게 월급을 주라고 말이지요(웃음). 그게 훨씬 더 잘된다는 거죠.
김정찬: 두 분 말씀의 핵심은 사람이 모이는 거잖아요. 도시 안에서 모이고 소통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참 많이 됩니다. 그래서 온라인 플랫폼 얘기를 계속 하게 되지요. 도시 안에서의 관계 범위는 결국 이 도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권단: 채널은 다양해도 좋은데 공론장은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생활공간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별적으로 부딪치면서도 상처를 최소화하고 갈등을 승화시킬 수 있는 완충지대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채윤: 우리의 이야기의 결론은, 마을만들기에 앞서 마을 공론장을 만들어라, 이건가요?
(...)
권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론을 공론장과 동일시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언론은 공론을 가장한 전혀 별개의 다른 힘으로 작동하고 변질될 여지가 가장 큰 또 하나의 권력이지요. 공론에 기반하지 않은 언론은 편집권의 독립만으로 모든 시스템에 대한 경제장치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자본과 체제에서 독립이 가능한 언론은 단지 편집권 독립이라는 소극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공론에 기반하는 적극적인 시스템을 가져야 합니다. (...) 언론은 기본적으로 이야길 하기보다 들어야 합니다. 훈련된 기자들의 모아진 힘이 아니라 주민들의 이야기들이 저절로 모아져 힘으로 발휘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언론 스스로 공동체의 바다로 거침없이 나아가려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스스로 수많은 견제장치를, 가령 독자위원회, 윤리위원회, 공정보도 위원회, 노동조합 등,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그 힘을 견제하고 분산시키는 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든 힘들은 파국을 향해 치달을 것입니다. 그래도 언론을 그냥 공론장과 동일시해버리면 안 됩니다. 언론은 공론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요. 그렇지 않은 언론들은 우리를 억압하는 무기로 작동할 것입니다. 공론장은 다른 게 대신할 수도 대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지요.
김신범: 그렇게 되어야 저같은 기술자들이 진실을 얘기할 수 있겠죠. 전문가에게 맡기지 말고 지역에서 해결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위험을 제어하는 좋은 방법은 스스로 결정하는 거거든요. 어떤 선택을 하는 대신에 또 다른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주민이 결정하는 게 가장 안전한게 사는 방법이에요.
김상철: 마을이라는 게 심리적인 친밀감, 정서적, 거리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저는 계속 종과 횡, 씨줄과 날줄, 마을과 마을들, 마을과 마을이 아닌 것들, 자꾸 빈 공간을 생각하게 돼요. (...) 마을 단위를 뛰어넘는 시 단위의 공론장, 중간의 스케일, 이런 걸 고민해야 한다고 봐요.
(...)
하승우: (...) 우리의 정치는 뭘까요? 자본을 비판하지만 대안적인 삶을 어떻게 살 건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요. 공론장을 어떻게 구성할 건지가 일차적인 관건같습니다. 그동안 좋은 얘기 고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참 고마울 것 같아요. 소중한 얘기를 이어갈 좋은 관계가 되면 좋겠네요.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
우리가 꿈꾸었던 마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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