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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지속가능’ 발전 이야,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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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시론] 이제는 ‘지속가능’ 발전 이야, 멍청아!

무분별한 발전보다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
빈곤 퇴치, 생명 종식
모두 인류의 손에 달려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It’s the economy, stupid!)’.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돼 버린 빌 클린턴의 1992년 대선 슬로건이다. 클린턴은 이 한마디로 유권자의 표심을 모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눌렀다. 우리나라 정치인도 선거 때마다 경제와 개발 부문의 공약을 내세운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경제성장이 진정한 행복을 주고,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일까.

소득이 늘면 행복도 커질까. 이미 40년 전 제기된 ‘이스털린의 역설’에 따르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더 이상의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한다. 또 행복이란 다분히 주관적이다. 절대적인 소득수준뿐만 아니라 빈부격차와 같은 상대적 수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소득수준이 높다고 반드시 사회 전체의 행복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대표적 최빈국인 부탄이 국민행복도 세계 1위인 것과 같은 불평등의 역설은 존재한다.

가난과 기아를 없애자는 ‘빈곤 퇴치’는 모든 국가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과제다. 최빈국이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울창한 산림을 경작지와 땔감으로 소진해도 비난하기 어렵다. 이들에게 환경보존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녹색경제를 요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구 시스템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물질적 소비수준의 향상만을 추구하는 외눈박이 성장정책이 인류문명에 가져오는 위험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근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 지구 인구는 지금보다 22억명이 증가한 92억명이 되고, 세계경제 또한 매년 3~4%씩 성장하여 소득수준은 지금보다 4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많은 인구가 더 높아진 소득을 누리며, 더 많은 차량을 소유하고, 건물을 짓고,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는 것을 과연 지구가 견뎌낼 수 있을까. 기후변화나 생물다양성의 파괴 등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지구환경은 지속가능한 지구의 수용 한계(Planet Boundary)를 벗어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80년대 말 등장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은 이제는 제법 익숙한 개념이 됐다. 그러나 이 용어는 ‘발전’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구가 견딜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전을 추구하는 ‘지속가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간단한 예로, 생수 생산을 위해 지하수 자원을 무분별하게 퍼내면 땅속에 공백이 생겨 지반침하가 일어나고 결국 모든 생수 공장이 문을 닫을 수 있다. 하지만 매년 지하수로 스며드는 지표수의 양을 기준으로 생수를 생산한다면 지속가능한 방식의 개발이 될 것이다. 지금 국제사회는 유엔을 중심으로 2030년까지 지구가 달성하고자 하는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확정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최빈개도국의 극한적 기아와 빈곤을 타파하는 것과 양성평등, 고용확대, 건강과 교육증진, 기후변화 완화와 생물다양성 보전과 같은 환경지속성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지속가능 발전목표’로 불리는 새로운 목표가 오는 9월 유엔총회에 제출되면, 앞으로 모든 국가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 이행계획을 세워야 한다. 2012년 우리나라는 유엔과 협정을 맺고 개발도상국의 효과적인 목표 달성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 지속가능발전센터’를 인천 송도에 유치했다. 국회도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최근 40여명의 의원이 참여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 포럼’을 설치했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우리나라의 국제적 리더십에 큰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50년 전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인류의 모든 빈곤을 퇴치하는 것도, 모든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도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라고 했다. 지구촌의 모든 눈이 금년 9월 유엔으로 향하고 있다.
윤종수 전 환경부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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