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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생태학: 시장 전성시대에 있어서의 발전, 지속가능성,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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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사회이론] 해방 생태학: 시장 전성시대에 있어서의 발전, 지속가능성, 환경

공간환경학회 생태환경분과 1998.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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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해방 생태학 - 시장 전성시대에 있어서의 발전, 지속가능성, 환경  
Richard Peet & Michael Watts

출전: Peet, R., Watts, M., 1996, Liberation Ecologies- Environment, development, social movements, London: Routledge
발제: 허남혁

  중대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와 다가오는 전지구적 생태위기에 대한 종말론적 시각에 의해, 환경문제가 원한을 가지고 중심 무대로 복귀하였다. 흔히 듣는 말인 ‘지속가능성’과 ‘지속가능한 발전’은 매우 논쟁적인 단어들이지만, 어쨌건 빈곤이 인간 삶의 모든 단계에 그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WHO 보고서(1995)를 보더라도, 지구적 환경위기’와 다시 등장한 ‘지구의 인구’에 대한 우려는 지구적인 경제적 불평등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렇게 세계 소득의 양극화 증대의 맥락에서 자연-사회 관계에 대해 새롭게 강조하는 것은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신보수주의적 헤게모니 등장, 지구적 관점에서의 환경문제 부활, 그리고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자원관리와 환경보존에 대한 맑스적 분석을 제공하는 정치생태학의 부흥 등의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전이 갖는 모더니즘적이고 유럽중심적 성격에 도전하면서 “발전에 대한 다양한 대안”과 발전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담론을 제시하였다. 이 책에서 증명하듯이 그들은 지식-권력, 제도와 진리 체제, 문화적 차이 등과 관련된 후기구조주의적 관점이 발전이론과 정치생태학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추동하였다.
  이러한 지적, 정치경제적 지형에 입각하여, 이 책은 다양한 지역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발전과 환경에 대한 논쟁을 다룬다. 분명히 우리는 환경과 자원을 둘러싼 현 정치적 활동들이 갖는 해방적 잠재력에 주목하고, Shiva, Escobar, Toledo 같은 제3세계의 지성 및 활동가들이 행하는 발전과 근대성 비판을 다룬다. 즉 이 책은 한편으로는 정치생태학과 후기구조주의와의 이론적 관련을 강조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존의 발전, 정치, 민주주의, 지속가능성 개념에 도전하는 시민사회의 새로운 운동, 조직, 제도에 대한 실제적인 정치적 관여를 강조한다.
  1장에서는 세 가지 넓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정치생태학에 대한 것으로, 정치생태학이 어떻게 서구 이성과 담론이론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비판을 통해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둘째는 후기구조주의와 담론에 대한 의존의 양상을 검토하면서 특히 발전 이론에 관련된 것을 다룬다. 마지막으로는 환경정치, 특히 사회운동 및 여타의 정치 형태 (생계를 위한 투쟁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생태적 필요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목적을 표출하는 점에서 생태적인)를 다룰 것이다.

정치생태학: 90년대의 발전 담론?

  지속가능성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현대의 환경주의가 60년대와 70년대 초반의 반복이라고 보기 쉽겠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확연히 다르다. 첫째, 서구 자본주의의 재구조화로 인한 탈규제, 지구화, 시장통합 등의 경향이며, 둘째, 주변부 포디즘의 성장과 신공업국(브라질, 한국, 대만)의 등장으로 인해 중대환 환경적 피해자들이 나타났고, 사회주의권의 환경문제도 부가되었다. 셋째, 장기적으로 파국적인 지구적 추세(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생물자원 고갈 등)에 대한 인식으로 다각적이고 초국적인 제도적 규제와 지배구조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왔다는 점이다.
  또한 지성적으로도 그 당시와는 너무도 달라졌다. 아마도 환경과 발전에 대한 최근의 사회과학적 사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생태학”일 것이다. 이 용어는 토지이용 관행과 지역-지구적 정치경제학을 통합하려는 이론적 필요에서, 그리고 환경의 정치화의 증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다. 이는 Blaikie(1985), Blaikie and Brookfield(1987)과 가장 밀접히 관련되는데, 이들의 시각에서는 정치생태학은 생태학을 광범위하게 저의된 정치경제학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정치생태학은 70년대 후반 생태인류학과 “문화생태학”적 비판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는 지역환경에 대한 ‘인식모형’과, 모든 생물군과의 구조적 유사성의 효과라는 점에서의 토착사회의 적응력에 주의를 기울인다. 의례적 관습이나 사회구조 같은 문화는 환경적 안정성이라는 점에서 항상성 또는 규제자로 기능하며, 즉 환경에 대한 진화적 수요가 갖는 생태 기능적인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제3세계의 농촌 농업사회를 연구하면서, 지역의 민속과학적 지식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문화적 관습과 자원관리와의 관계를 밝혔다.
  70년대 후반에 맑시즘과 정치경제학 및 급진적인 소농(peasant)사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생태적인 관심을 가진 사회과학자들은 지역사회가 어떻게 지구경제에 통합되고 변화되는가(“경제적 변화”)에 대한 의문을, 지역 자원관리 및 환경규제와 안정성과 결합하였다. 이러한 통합시도는 80년대 동안 환경운동의 두 번째 국면을 맞았으며, 관습적 형태의 자원관리가 시장통합, 상품화, 해체되는 양상이 - 적응과 항상성 보다는 (즉 안정보다는 변화양상이: 발제자주) - 낡은 문화(인간)생태학에 대한 비판적 대안의 흡인자석이 되었다.

  정치생태학과 그 한계
  정치생태학이 생태적 근원을 갖는 사회과학자들과 정치경제학적 원리 간의 합류를 반영한다지만, 그 이론적 정합성은 계속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갈등과 이질성이 Blaikie and Brookfield(1987)의 "Land Degradation and Society"에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빈곤과 degradation간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데, 결국 ‘인구가 자원에 미치는 압박’이라는 환경적 시각(pressure-of-population-on-resources view of environment)에 대해 급진적인 비판과, 보존과 발전 모두에 대한 재고찰 필요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생태학 저작들은 degradation에 대한 인구압박, 시장 왜곡 및 관리잘못이라는 설명을 비판하고, 빈곤을 생태적 파괴의 주요 원인으로 확인하였다.
  이는 분명히 자연-사회 관계에 대한 사고의 급진전이나, 몇 가지 문제들이 존재한다. 빈곤에 대한 초점은 농촌, 농업, 제3세계에 대한 편향을 반영하는 것이며, 다른 자원들에 대해 토지를 우선순위로 보는 점들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의 핵심은, 빈곤 중심의 분석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다. 노동자의 건강, 안전, 대기오염, 제3세계 도시들의 쇠락, 자본주의 재구조화 등등의 다른 이야기들도 많다. 그러면 빈곤은 기껏해야 환경악화의 가까운 원인에 지나지 않는다. 즉 특정한 토지 관리자들의 빈곤이 어떻게 결정구조와 특정한 생산관계를 통해 재생산되는가를 설명해 주는 이론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생태학이 갖는 정치경제학의 개념은 다소 혼란스럽고 산만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정치생태학(political ecology)에 정치(politics)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이 책 4,9,10장에서 다루는 문제). 즉 가정, 노동현장, 국가라는 정치영역 내에서의 자원에 대한 통제와 접근 및 소유권이 정의되고, 협상되고, 경합되는 수단들을 다루는 심각한 시도가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들과 광범위한 학제적 관점으로 인해 정치생태학의 영역은 중요하고 흥미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져 왔다. 이러한 발전은 후기구조주의, 성 이론, 과학 비판이론, 환경사, 맑스 정치경제학 등으로부터의 아이디어들 간의 대화와, 3세계에서의 환경운동 및 투쟁이라는 현실에서부터 그 동력을 얻어 왔다. 정치생태학이 자원 관리(규제기구, 지역적 지식체계, 새로운 지역사회 및 자원이용자 집단의 형태)가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인가를 다루어 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정치생태학도 90년대의 다른 발전이론들처럼 국가 및 시장 역할의 변화양상이라는 맥락에서 제도와 조직에 점차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새로운 방향, 새로운 질문
  1) 정치생태학의 영역 내에서 정치경제학을 정교화하려는 시도이다. 즉 자본주의 성장논리와 그 환경적 결과 간의 인과관계를 정교하고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맑시즘과 생태학에 대한 논쟁(Benton 1989; Grundmann 1991; Leff 1995), 그리고 J. O'Connor의 CNS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두 번째 모순”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정치경제학으로부터의 특정 개념들을 자연과 사회의 두 구조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또한 사회주의 정치경제가 가져온 파괴적인 생태적 결과에 대한 논의도 있다.
  2) 정치생태학에서의 정치의 결여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정치적 행위 - 일상적인 저항, 시민운동, 조직적인 정당정치 - 를 자원에 대한 접근 및 통제의 문제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특히 성공적이었다. 가정의 차원에서는 성과 국내정치, 환경을 둘러싼 투쟁에 초점을 맞춘다(이 책 8, 9장). 다른 차원(국가, 국가간, 다각적 기구, 지방, 지역사회)의 분석에서는 권력관계, 제도, 환경규제 및 생태적 결과 간의 분석적 연계고리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분석들은 D. Harvey(1993)의 말, “지구의 건강과 지속가능성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자원에 대해 행하는 통제...는 지구적 환경관리를 위한 서구에서의 많은 제안들의 표면과 그리 멀지 않다”이 맞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보호와 보존전략에 있어서의 참여, 지역사회의 권리, 지역의 필요에 대한 일반적인 의문이다. 또한 한 가지가 사회정의를 자연과 결합시키는 해방적 잠재력이라는 핵심적 주제이다. 즉 소유권에 대한 운동 및 투쟁, 국가관료제에서의 논쟁, 그리고 그러한 권리청구가 행해지고 협상되고 경합되는 방식에 대한 것들이다.
  3) 정치생태학과 시민사회의 기구와의 분석적, 실제적 관련에 대한 것이다. 즉 환경운동의 성장에 따른 시민사회와 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다. 첫째는 환경조직의 기원, 발전, 궤적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지역적 지식과 생태적 민중주의에 대한 것으로, 사라져가는 지식과 관리관행을 복원하는 단순한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그곳에 내재해 있는 규제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지식 및 관행이 대안적 발전전략의 부분이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Ostrom 1990). 이 때 우리는 정치생태학에서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나, 지식과 관행이 코드화되고 협상되고 경합되는 좀 더 제도적이고 규제적인 공간으로(이 책 4, 7장), 그리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환경적으로 건전한 생계 간의 관계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4) 환경과 자원관리에 대한 인식과 정의의 다양함이라는 담론적 접근법이다. 첫째는 “규제적 지식”, 지식이 어떻게 제도화되는가, 사실이 어떻게 경합하는가의 정치를 탐색하는 방식으로서 과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인데, Beck(1994)의 위험 및 성찰적 근대화에 대한 연구가 있다. 둘쨰는 특정 제도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으로, 특정 지식과 관행이 오랜 시간에 걸쳐 어떻게 생산, 재생산되는가 살펴보는 것이다(이 책 10장). 셋째는 환경담론의 지구화, 지구적 환경governance와 관리의 제도적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5) 환경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다. 정치생태학에 역사적 깊이를 부여할 뿐 아니라, 장기적인 환경변화 연구에 대하여 중요한 이론적, 방법론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농업과 환경변화라는 단선적 모형으로 잡히지 않는 대안적인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즉 농업의 집약화와 환경과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Tiffen and Mortimore(1994)의 케냐에 대한 연구는 1930년에서 90년 동안 인구가 5배 늘었지만 환경은 같은 기간동안 향상되었다(토양구조의 개선과 땔감의 지속생산)는 것을 보인다. “전유”와 “대체”를 통한 자연의 장기적인 자본화와, 그 환경적인 분기를 고찰하는 것은 정치생태학자들에 의해 가능하고, 그러해야 한다.
  6) 정치생태학이 낡은 생태학적 시각과 개념들(안정성, 복원력, 체계이론)에 얼마나 순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60년대의 체계모형으로부터 혼돈의 생태학(혼돈적인 유동, 불균형상태, 불안정성)으로의 변천은 안정성, 조화, 복원력이라는 단순 개념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제기한다. 즉 생태학에 대한 재사고는 지역적 관리의 복잡성을 이해하는데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예를 들어 간작과 해충관리).
  이러한 새로운 경향들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치생태학을 후기구조주의와 담론이론으로부터 도출된 생각과 개념들과 관련시키려는 시도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경제, 권력-지식의 장, 생태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 간의 관련들을 반영하는 매우 특별한 활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해방생태학”이라 부른다. 이는 “환경적 상상력”이 갖는 해방적 잠재력을 인식하고, 사회적 행위자처럼 자연의 행위자가 과학, 사회, 환경정의를 섬세하게 다루는 방식에 순응될 수 있는 방식을 계획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관련이 일어나는 주요한 장소는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하는 조직과 시민운동의 폭발적 성장과 발전에 대한 암묵적 비판(그리고 대안적 시각)을 끌어내는 장인, 사회․환경운동에 대한 분석 내이다.

담론, 합리성, 그리고 발전

  후기구조주의 이론이 담론에 매혹된 것은 진리에 대한 근대적 인식을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근대철학에서 진리는 외부화된 실재와 그 정신적 재현 사이의 정확한 대응관계에 자리한다. 따라서 모든 정신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진리는 보편적이고, 지식은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똑같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이론가인 Rorty는 재현으로서의 지식 개념은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의 반영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담화와 사회적 관행의 소재로서의 지식을 옹호한다. 푸코에게도, 각 사회는 진리의 정치경제학으로 통제되는 진리 레짐을 갖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적 시각에서 진리는 현실(reality)에 대한 목적적인 사실(fact)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담론 내의 진술(statement)이다.

  담론 이론
  "담론“은 특정한 관점을 표현하는 언어사용의 영역이며, 특정한 제도들과 관련되어 있다. 제한된 객체의 범위에 관심을 두면서, 담론은 다른 개념들을 포기하면서 몇몇 개념들을 강조한다. 담론은 서로 경합하고 갈등하는 문화적, 인종적, 성적, 계급적, 지역적, 기타의 다른 이해관계들 간에 서로 차이를 보인다.
  담론이론은 서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요약하면, 이성(Reason)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권력의 담론에 대한 강조가 공간에 투사되면 헤게모니 지역과 지배되는 지역 간의 담론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접근법을 만들어 낸다. Said(1979)의 "Orientalism" 이론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 가지 복잡하고 논쟁적이고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담론이론이 식민화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Guha와 spivak의 견해).

  지역적 담론 구성체 (regional discursive formations)
  담론이론의 잠재력은 사람들의 지리적 집단들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위치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데, 적어도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근거를 권력관계의 지리적 차원과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심지어는 해방적이라고 여겨지는 개념에 대해서도)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인간이 말하는 객관적 과학에 대한 근대적인 신념을 비판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이론은 광범위한 신념, 논리, 담론이 새롭게 가치로 정립될 수 있는 장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를 “지역적 담론구성체”의 관점에서 이론화한다. 특정한 사고방식, 논리, 주제, 표현양식, 비유 등은 지역적인 담론의 역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서 때때로 사라졌다가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지역적 담론구성체는 특정한 물리적, 정치경제적, 제도적 환경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담론 주제를 담론형성에 있어 강력하고 거의 근본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나중에 “환경적 상상력”이라 부른 것과 연결됨을 본다.

  발전 담론
  권력-지식, 담론, 공간에 대한 이러한 재개념화는 발전을 서구의 담론구성체에 있어 아마도 가장 중심되는 주제로 파악한다. 서구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발전적으로 이해되며, 즉 “모든 것들은 항상 나아진다”는 생각이다. 반면에 후기구조주의는 점차 발전의 노력을 “중심적 권력의 전략을 대신하는 홀로 효율적인 식민지배자” - 사물을 낫게 만드는 능력이 권력을 성취하는 주된 방법 - 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Escobar는 근대적 발전담론은 서구이성확장의 역사에 있어 가장 최신의 교활한 장(chapter)으로 파악한다. 헤게모니 담론들은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제1세계의 경제적, 문화적 행위에 순응할 것을 보장한다. 발전은 저발전의 형태를 창출했다. 그러한 권력은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규범화, 지식의 규제, 이슈들의 도덕화에 의해 활동한다. “제3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은 실증적이고 참인 것으로 여겨지는 발전과학에 의해 지배되는 권력의 새로운 장이다. 따라서 지구적 권력관계, 자연에 대한 통제, 과학과 기술의 중대한 변화 중에 형성된 서구의 근대적 담론구성체는 “발전”이라는 핵심개념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다양한 사회적 열망이 서구의 모방으로 대체됨으로써 통제되고, “담론에 의해 규제된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그러한 열망들을 해방시키려 한다.

  발전 담론의 도표화: 권력의 지도학
  제3세계 정부들은 “근대화”를 위해 대쉬했다. 이들은 서구 모형을 본뜨긴 했으나 자신들에 맞게 바꾸지 못했다. 이러한 하향식 접근은 발전에 있어 가장 동원을 필요로 하는 보통 사람들의 동기부여를 못했다. 전략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외국 모형을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시각은 도전받고 있으며, 대안적인 경로가 제안되었다. 이는 농업발전을 우위에 두고, 시장, 가격 및 민간부문 뿐만 아니라 수용력의 확보, 풀뿌리 참여, 분권화, 건전한 환경관행 등을 강조한다. 이제 이들을 실천에 옮길 때가 왔다. (World Bank 1989)

  이러한 단어들이 전형적으로 지구적 자본주의 발전의 옹호자들와 관련된 어휘들은 아니다. 세계은행은 진정으로 “보통 사람들”의 에너지를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대안의 이름으로 포용하였는가? 이러한 새로운 세계은행의 전략은 여러 수준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즉 은행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맞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실패에 대해 책임성을 갖지 않으려는 성향(브라질 소농의 식민화 계획이나, 인도의 대규모 댐건설 계획); 환경에 대한 아직도 어설픈 수행; 지속가능성에 대한 편파적이고 제한된 해석 등이다. 50년대가 발전 사고가 아프리카와 다른 곳에 상륙한 역사적 분수령이라 믿는 세계은행과는 달리, 발전에 대한 이론화는 훨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핵심적인 발전 사고들이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상황변화에 따라 순환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새롭게 나타나는 과정을 갖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발전”의 계보
  발전의 계보는 1) "발전“은 18세기 영어 어휘가 되었다가 19세기 진화론적 사고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발전은 전지구적 규모에서의 근대성이었다. 2) 다른 설명에 의하면 18세기와 19세기의 진보(Progress)라는 개념에 근원이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 성장의 무질서와 분리에 대항하는 신학적 담론의 일종이었다. 고전적 정치경제학은 끊임없는 한편으로는 축적에 대한 열망과 다른 한 편으로는 악덕의 근원인 규제되지 않는 욕망 간의 긴장으로 가득차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발전’은 부분적으로 진보에 대한 문화적, 신학적 대응이었다.
  학문적, 정부사업으로서의 발전이론과 관행의 이러한 근원은 2차대전 후에 “식민지 세계”가 “발전도상국의 세계”로 재형성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독립운동의 위험을 협상하는 한 편, 식민지 임무를 영속화하는 수단이었다.

  발전의 지도 작성
  발전이론(특히 지배적인 표현으로서의 발전경제학)은 한 편으로는 45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가 증대되면서 구성된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식민주의 후의 지정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경제성장과 사회정치적 변환에 대한 훨씬 더 큰 역사적 사고의 근거 위에 놓여질 수 있다. 그 규범적 내용에 따라 발전담론들을 역사적으로 배치해 보는 간단한 방법은 경제성장, 사회복지, 환경적 지속가능성, 국가주권 같은 핵심 목표들을 확보하는 수단으로서의 발전을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중심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나름대로 발견적 의의를 갖는다(표 1.1). 첫째, 발전의 형태들을 역사회하는 것이다. 둘째, 발전담론은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규범적 시각에 대한 상대적 가중치를 중심으로 측정된다는 인식이다. 50년대에는 국가계획의 역할에 대한 광범위한 인정이 있었던 반면 80년대의 반혁명은 시장을 중심무대로 끌어올렸다. 셋째, 각 수직축(시장, 국가, 시민사회)는 내부적, 외부적 퍼즐 풀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70년대 이후 NICS의 성장은 규제된, 혹은 규제되지 않는 시장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한 논쟁에 있어 중요한 참고가 되었으며, 이들이 자유시장인지 “레닌주의”적 성공스토리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특정한 이론적 전통들 간에 단순하고 직접적인 관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맑시즘은 시장 연계가 특수하게 정의되긴 하지만, 시장 역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도 국가를 완전히 내버리지는 않는다. 즉 이론들은 발전의 규범적 내용을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특수한 지형(각각은 이론의 핵심명제들에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된다)과 결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발전 사고들은 항상 지역화되어 지역적 담론구성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강조될 필요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종속이론은 라틴 아메리카 경제 위원회 및 칠레와 브라질 대학들과 관련된 지성들과 활동가들이 그 형성과 성격에 관여한 특수한 지역적 담론구성체의 일부이다.

표 1.1 발전담론 지도

  80년대와 90년대의 발전이론
  80년대는 불황과 채무위기로 인해 단기적인 관리(불균형상태)에 초점을 맞춘 긴축과 재구조화의 시기였다. 안정과 조정 문제에 열중하고, 신자유주의 교리가 이를 주도했다. 역설적인 것은 시장 중심, 국가 중심 이론들이 발전경제학적 분석에 있어 거래비용, 집단행위이론 등의 “신제도경제학”에 의해 서로 수렴했다는 것이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냉전의 종식, 채무문제의 완화, 새로운 사회주체의 증장 같은 환경의 면화에 따라 발전은 국가, 시장, 시민조직 간의 균형을 중심으로 자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론적, 실제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제도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시기였으며, 이는 농업적 사회관계, 국가-사회관계, 신사회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권위적인 관료제적 발전 양자의 실패에 대한 비판은 시민사회 내의 제도 - 특히 협상, 협력, 설득에 기반한 계약 - 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중대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시민사회조직, 시장, 국가 간의 상호보완관계를 구축하는 발전전략이 특히 관심대상이었다. 이에 따라 문화와 발전 간의 관계, 국가쇠퇴와 시장팽창 시기의 풀뿌리조직의 역할, 국가와 시장의 사회적 배태성, 발전제도와 사회규범의 내생성, 지역지식체계와 자원관리의 증진 등에 있어 새로운 사고가 진행되었다. 결론적으로, 분석 맑시즘의 관점으로, 신제도주의적 계약이론의 관점으로, 공동소유의 규제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의 관점으로 표현되든 간에, 제도에 대한 분석이 중심적인 문제로 수렴되었다.

  환경, 발전, 시민사회: “민중주의”와 지속가능성
  UNDP(1992)에 따르면 지구적 부의 양극화가 1960년에서 89년에 이르는 동안 줄어들기는 커녕 배가되었다. 따라서 제3세계의 지성들과 활동가들은 발전담론을 가혹한 장난(cruel hoax)이며 지구적인 몫에 대한 약탈로 보기 시작했다(Sachs 1992). 90년대의 역설 중의 하나가, 자유시장 전성시대에 있어서 서구적인 근대화 기획과 합리성에 대항하는 반발전적 사고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계은행 쪽이나 급진적 대안 쪽이건 간에 시민사회, 참여, 보통 사람들을 다음 세기에 있어서의 발전에 있어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담론에 있어 시민사회를 강조하는 경향은 다양한 계통의 민중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발전담론에 있어 민중주의의 재생은 역사적 연속성(발전정책에 있어서 ‘사람’과 ‘평범한 것’이라는 순환적 모티프)과 역사적 차이(민중주의적 요청은 항상 특정한 지역적 정치지형 및 이데올로기 담론과 실천에 뿌리하기 때문) 모두를 포함한다. 민중주의의 특징적인 모습은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실용적인 의제를 만들어 내는데 있어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에 의존할 수 있는 유연성이다.
  현재의 민중주의적 발전사고는 더 큰 역사적 캔바스 위에 놓일 수 있고, 그래야만 되는 것이나, 그 특유한 성격과 특수성은 냉전종식, 국가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현실정치와 이기적인 개인들의 신자유주의적 반혁명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주의는 풀뿌리 환경운동,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토착적인 기술지식, 지역자원관리에 있어서의 행정 분권화 요청이라는 관점에서 표출되든 간에, 발전-환경 논쟁의 중요한 요소이다. 시민사회와 민중주의적 사고는 이 책의 많은 이슈들에서 만나게 된다(4,5,9,10장).

정치, 운동, 시민사회: 해방생태학?

  발전은 그로부터 영향받는 사람들이 정책 제안에 참여하고, 시행되는 모델이 지역주민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일때만 나타나는 것이다...아마존 토착민들은 그 곳에서 계속 살아왔으며, 아마존은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는 아마존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 그 한계가 어떤지 하는 비밀을 알고 있다...(아마존 유역의 토착조직을 위한 협력체가 만든 진술서, 1989)

  고전 맑시즘 비판
  맑시즘이 갖는 사회에 대한 경제적 이론은 “역사의 철칙”, 인간을 사회관계의 담지자로 축소, 다른 사회관계를 배제하고 계급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비판들을 받아왔다. Gramsci(1971)은 자본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생활의 몇몇 영역에서 새로운 전략을 통한 다양한 영역에서의 반헤게모니 운동을 통해서만 자본주의가 변혁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다양한 “네오-, 후기” 맑시스트들도 고전 맑시즘에 비판을 가했다. 대개 맑시즘 이론은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을 경제를 우위에 두는 단일한 생산 논리로 관통시키면서, 계급관계를 지배구조와 저항의 핵심으로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 Cohen(1985)의 (비맑스적) “자원동원이론” 비판과 Habermas의 생활세계론.

  도시사회운동
  일련의 저작들은 모순, 위기, 도시사회갈등 간의 연관을 탐색한다. 이들은 정체성의 정치에 중점을 두면서 노동계급조직 같은 구운동과 비교되는 “신사회운동”이라고 부른다. Castells(1977)의 초기저작에서 도시사회운동은 자본주의 체계의 구조적 모순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러한 항의운동들은 다양한 투쟁영역에서 공동의 이해를 중심으로 국가 및 다른 정치적, 사회문화적 제도에 대항하여 조직된다. “새롭게 부상하는 사회운동들은 국가권력과 자본의 이익에 우선하는 인간의 경험을 요청한다.”
  Laclau and Mouffe(1984)는 사회생활의 상품화, 관료화, 문화적 대중화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종속이 창출되고 있으며, 신사회운동(도시, 생태적,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 지역, 성적 소수)이 여기에 대응한다고 주장한다. Laclau(1985)는 ““계급투쟁”이 맞고 틀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현대의 사회적 갈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단순히 전체적으로 불충분한 것이다.“ 그는 신사회운동의 민주적 잠재성은 급진적으로 개방되고 불확정적인 시회에 대한 시각에 놓여있다는 것을 밝힌다.

  사회의 자기생산
  프랑스 사회이론의 전통에 근거하여 Castoriadis(1991)와 Touraine은 이론을 펼친다. Castoriadis에 있어서 역사는 사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사회의 자기전개(self-deployment)이다. 그의 개념은 사회-역사적 삶의 요소들은 시시각각  자신들이 속한 특수한 사회제도 속에서 창출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Touraine(1988)은 사회의 구성을 내부적 논리에 의해 추동된 체계로 보던 것을 “행위의 장”으로 대체하였다. Marcuse에서 Althusser와 Foucault, Bourdieu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삶은 단지 “끊임없는 지배의 기호 체계“였으며, 이러한 체계 내에서 급진적인 사회운동은 바로 주변부로 따돌려지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 사회에 대한 필수적인 해체, 하나의 문화적/사회적 장을 다른 장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통해 사회운동이 변혁능력을 지닌채 진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Touraine의 분석의 핵심에는 문화를 지배하는 혁신적인 지배계급과 그 지배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 간의 “문화적 지향”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사회갈등은 집단적 이해에 대한 경쟁적 추구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적 정체성의 재구성을 야기한다. 계급투쟁과 사회운동은 사회가 규범, 제도, 관행 등을 재창출하는 관점에서 그 자신에 수행하는 작업을 의미하는 “사회의 자기생산”에 대해 의식적으로 이의를 표출한다. 역사성에 대한 투쟁이, 사회의 기능과 사회가 창출하는 과정의 중심에 놓여있다.

  제3세계의 신사회운동
  지리적 초점을 갖는 연구들은 제3세계의 신사회운동,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 주목하게 되었다. 다양한 집단들에 의한 다각적인 운동들 속에서 급진적 이론가들은 대중의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구축되는 새로운 정치적 헤게모니의 잠재력을 발견하였다. 제3세계 국민들의 운동이 제1세계 노동자들의 운동보다 기존의 사회구조를 변혁할 수 있는 잠재력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사회운동은 아니지만, 몇몇 흥미있는 사고들을 Scott(1985, 1990)의 일상생활의 저항에 대한 저작에서 찾을 수 있다. 현상학과 민속적 방법론을 통해 그는 종속계급은 중산계급과 지식인들의 몫인 개방적이고 조직적인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사치를 거의 가져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는 농민들의 일상적 형태의 저항 - 농민들과 이들을 착취하는 자들 간의 끊임없는 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좀 더 후기구조주의적인 주제에 입각하여 Escobar(1992b)는 사회운동이 문화적 투쟁처럼 물질적 조건과 필요와 함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같은 것으로 본다. 그의 생각은 지구적 전환이라는 구조적 이론을 ‘주체의 경험을 매핑하는 것’과 관련시키려 하는 것이다.
  일상적 저항이라는 개념은 항의의 담론에 있어 후기구조주의적 관심과 결합될 수 있다. 지역 수준에서만 나타나는 다양한 범위의 민중적 진술들은 환경적 저항의 증거들로 읽힐 수 있다. 우리의 임무는 좀 더 강력한 차원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저항의 담론을 표면에 드러나도록 돕고, 이를 넓게 유통시키고, 사고의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것이다. 농민의식이 어때야 하는지 말하기 보다는 담론이 자기 스스로를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환경운동, 환경 안전
  자동적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산출하는 모순보다도 구조적 모순, 착취,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 행위 간의 매개가 이제 매우 의미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매개는 적어도 5가지 형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사람들이 직면하는 불리한 상황을 자신들의 의미체계에 위치시키는 지각과 해석; 2) 장소기반적이거나 환경적으로 구조화되는 집단적 정체성,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성; 3) 개인적인 저항에서 조직적인 사회운동에까지의 서로 다른 수준과 형태의 행위들로 착취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끄는 조건; 4) 광범한 기반의 정치적 힘을 창출하는 사회운동 간의 연계; 5) 구 사회운동의 신사회운동 참여 가능성
  이러한 많은 생각들이 제3세계의 “환경운동”의 분석에 활용되었다(Ghai and Vivian 1992). 토착권리운동, 보존정치, 식량확보, 지역 지식의 강조, 지역자원에 대한 접근 및 통제권 요청 등이 어떻게 환경-빈곤 축을 가로지르는지 하는 문제는 매우 인상적이다. Antje Linkenbach(1994)는 “생태운동이 현대세계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이는 지배적인 발전모형이 갖는 어려움, 단점, 제한된 범위 등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운동들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풀뿌리 생계운동의 존재는 신사회운동집단이 ”발전의 대안“을 위한 벽돌(building block)임을 나타낸다.

결론: 돌아온 정치생태학  

  이 장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정치생태학의 기원과, 발전의 정치경제학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정치생태학을 근대성 자체의 속성에 관한 논쟁을 포함하는 넓은 맥락 속에 위치시켰다.
  사회이론과 정치생태학의 관점에서 우리는 투쟁 형태에 대한 넓은 개념(계급투쟁에서 사회운동 및 일상적 저항까지)과 투쟁하는 것에 대한 깊은 개념(생산자원의 소유권에서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통제까지) 모두를 발견한다. 환경 그 자체는 상상에 있어서 적극적인 구성물이며, 담론 그 자체는 자연환경적 조건에 의해 조직되는 지역적인 형태를 띤다. 맑스적 의식개념, 상상력과 담론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사상, 환경결정론 등에 의존하는 “환경적 상상력”의 개념은 정치생태학에 매우 다른 지평을 열어주는 관계로, 우리는 이를 기술하기 위해 해방생태학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다. 그 의도는 단순히 정치생태학에 정치를 더하려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아이디어의 해방적 잠재력을 높이고, 근대성 및 그 제도와 지식에 대한 논쟁의 지형에 직접 관련시키기 위해서이다.
  해방생태학은 자연에 대한 담론이며, 맑스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고, 최근 영향에 있어 후기구조주의적이며, 의도에 있어 정치적으로 변화를 꾀하면서도 격렬한 논쟁을 용인한다. 이는 근대성, 합리성, 해방에 대한 태도 같은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에 관심을 둔다. 우리의 입장은 합리성이 버려지기 보다는 논쟁되어지는 비판적 모더니즘을 지향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해방생태학은 교의라기 보다는 담론적 영역, 즉 우리 시대를 형성하고 특징짓는 광범위한 정치적 이슈들과 사고들이 환경적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자유롭고 대담하게 논의되는 장소라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발전-환경 관계의 지극히 복잡한 연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후기구조주의적 생태학은 근대성이 가져온 파괴적인 환경적 결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는 다양한 경로, 환경에 대한 서로 다른 지역적 담론을 주장함으로써(각가의 모순들과 교훈들을 갖는) 실제적인 비판을 심층적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 토지이용, 생태적 규제 및 관리에 있어서 토착적 담론의 복구가 사회와 자연에 대한 전자본주의나 비서구적 관계를 낭만화시킬 필요는 없다. 담론에 대한 의존이 갖는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미묘한 차이를 갖는, 풍부하게 짜여진 경험연구(정치-생태적으로 두터운 기술)이다.
  우리들은 환경과 발전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사회와 자연환경 간의 모순적인 관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며, 변증법이 모순, 위기, 변화에 대한 이론임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때의 변증법은 특별한 것이 갖는 자율성을 소모하지 않는 관계체계이다. 서로 다른 새로운 사건들에 의해 끊임없이 교란되고 해체되는 위계구조이다. 이는 독특한 측면들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전체화하지 않는 전체성의 이론이다.
  이 저작은 특수한 종류의 운동들을 생산 하에서의 위기가 갖는 갈등과 모순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 위치시키고, 그들의 반대 및 더 나은 삶에 대한 비전이 갖는 상상적 기반과 그 담론적 성격을 이해하고, 환경문제를 생계, 권리,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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