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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름’이 되어야 할 때와 ‘추수’에 나서야 할 때 - 파시즘 집권 전야의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4. 1. 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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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름’이 되어야 할 때와 ‘추수’에 나서야 할 때
- 파시즘 집권 전야의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

장석준(중앙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국민적 위인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혁명가이며 사상가다. 그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나서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무언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역사의 경작자가 되고 싶어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싶어했다. 아무도 역사의 ‘거름’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먼저 땅에 거름을 주지 않고 경작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경작자와 거름은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으로는 모두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름’은 희미한 그림자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옥중수고Ⅰ?, 103쪽)
역사의 ‘경작자’로서의 당,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져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있고 나서 서유럽 노동자정당의 상당 부분은 저마다 역사의 추수(秋收)에 나서겠다며 당명을 바꾸거나 새로운 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의 ‘거름’으로서의 당이라?
당장 ‘세계혁명’이 일어날 것 같던 상황이 반전되자, 열에 들뜬 젊은 좌파정당들에게 곧바로 새로운 문제가 닥쳐왔다. 노동자?민중운동의 수세기를 헤쳐나갈 길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교훈들이 당시에는 숱한 희생과 패배를 통해 새로이 배워야 할 낯선 진실이었다. 한때 혁명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다시 파시즘의 반격에 내몰려야 했던 이탈리아의 사회당과 공산당은 이 값비싼 수업의 첫 번째 학생이었다.  

불안정한 나라의 불안정한 노동자정당

여러 소국과 오스트리아령으로 찢겨 있던 이탈리아 반도는 1860년 북부 피에몬테 왕국의 주도로 통일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 통일은 영토상의 통일에 그쳤다. 북부와 남부는 언어조차 크게 달랐고, 북부의 도시와 남부의 농촌 사이의 차이는 거의 ‘한 나라’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정도였다. 통일은 이러한 차이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북부의 자본가들과 남부의 지주들이 결탁해서, 북부에서는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남부에서는 토지 소유의 모순을 온존시켰기 때문이다.
1870년대 유럽의 경제위기가 이탈리아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자 불완전한 통일은 금새 문제를 드러냈다. 반도 곳곳에서 바쿠닌을 추종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봉기가 빈발했다. 대규모 산업화가 추진된 1870년대 후반부터는 민중봉기가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조금이라도 생활상의 위기가 닥치면 자발적 대중행동이 벌어지는 분위기 자체는 지속됐다. 이 점에서 이탈리아는 다른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 러시아 같은 저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1880년대부터 조직노동운동이 등장하면서 바쿠닌주의의 영향력은 수그러들었다. 대신 선거 참여 노선을 선택한 사회주의자들이 점차 지지를 얻었다. 각 지역별로 이뤄지던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1892년 <이탈리아 노동자당>으로 통합됐다. 3년 후에 이 당은 <이탈리아 사회당>(PSI, 이하 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회당에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공제회 등이 집단적으로 가입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집단가입제도가 이탈리아 사회당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도 당 초기에는 노동자 단체들의 집단가입을 통해 당원을 충원했다. 사회당의 성장에는 이러한 집단가입제도 외에도 ‘노동회의소’라는 독특한 기관이 큰 역할을 했다. 노동회의소는 지역 노동자 단체들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지역 노동자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노동자회관에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사회당 지구당, 당 기관지 지사 등이 입주해 있었고,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과 술집, 진료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각 노동자 조직들은 이 회관에서 일상적으로 접촉하며 ‘노동회의소’라는 이름 아래 회의를 갖고 공동 행동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동회의소는 1902년까지 전국에 걸쳐 76개소가 건설되었다. 
그림 ) 투라티를 기념하는 책자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당은 창당 당시부터 커다란 한계들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이후에도 좀체 극복되지 못했다. 우선, 사회당은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강력한 정당조직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주의?노동자 단체들의 연합에 가까웠다. 정파연합에서 출발했다가 장 조레스를 중심으로 중앙 지도력을 형성해나간 프랑스 사회당과는 달리, 이탈리아 사회당에서는 그러한 지도력이 형성되지 못했다. 의원단은 의원단대로 따로 움직이고, 공장 조직들은 공장 조직대로, 기관지는 기관지대로 독자 행동을 했다. 당대회와 기관지 <아반티(전진)>가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또한, 사회당은 이탈리아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남북모순을 극복하려 노력하기보다는 그 자신 그러한 모순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당세가 발전한 이후에도 사회당 의원들 중에서 남부 출신은 10%에 머물렀다. 사회당 의원단은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베른슈타인류의 개혁주의 노선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였던 필리포 투라티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의회를 지배하는 남부 지주와 북부 자본가 사이의 합의에 감히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남부의 희생을 대가로 한 북부의 산업화로부터 북부의 일부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얻어내려 할뿐이었다. 1890년대에 남부 시칠리아에서 빈농들이 대중운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사회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한계들로 인해 사회당은 역사의 적극적인 주도자가 되기보다는 역사적 모순의 수동적인 반영에 머물렀다. 대중의 불만이 주기적으로 폭발하는 이탈리아의 독특한 상황 때문에 사회당의 성장 과정은 대중투쟁과 함께 했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였다. 예를 들어, 사회당은 1900년 총선에서 13%의 지지를 받아 33명의 의원들을 당선시켰다. 당시 이탈리아는 아직 보통선거권이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2년 전, 밀라노에서 정부의 제분세 인상에 항의하는 격렬한 대중투쟁(‘밀라노의 4일’, 80명의 사상자를 냈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행동 중에, 당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거나 어떤 전술적 목표를 제시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당은 자발적 대중행동을 억누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방향을 부여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01년 지올리티 정부가 출범했다. 지올리티는 개혁적 부르주아 정치인으로서 북부 자본가들의 이해를 순수하게 대변하려 했다. 그는 북부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타협을 이뤄 경제성장의 견인차로 만들려 했다. 1900년대의 장기호황이 그의 정책을 뒷받침했다. 1906년 창설된 <노동총동맹>(CGL)은 겉으로는 프랑스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이념으로그림 ) 자유주의 정부를 이끈 지올리티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지올리티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북부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조금씩 확대하는 데 몰두했다. 이는 의회 내에서 투라티 등의 개혁주의적 사회당 의원들이 추진한 ‘자유주의-사회주의 연정’이라는 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대중투쟁의 주기적 폭발은 의연히 지속되었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던 1904년부터 1906년 사이에 대중 파업이 발생했다. 그리고, 1912년부터 호황이 주춤하자, 마치 러시아에서 1912년부터 파업 물결이 되살아난 것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도 1914년까지 노동자 투쟁이 급증했다.
사회당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반영돼, 당 기관지 <아반티>를 중심으로 당의 최대강령(사회주의 혁명)을 견지하자는 ‘최대강령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1900년대 내내 의원단의 개혁주의자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당내 투쟁을 계속하다가 1912년 당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 해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은 최초의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 하에서 79석을 획득했다.
파업 물결은 급기야 1914년 6월, 반전시위의 유혈진압에 항의하며 바리케이트전으로 발전했다. 이탈리아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혁명적 위기의 문턱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자유주의 국가의 위기, 사회당의 위기 
그림 ) 이탈리아 정부의 참전 선전 포스터

이탈리아는 다른 서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전쟁이 일어난 뒤 1년만에 뒤늦게 참전했다. 최대강령파가 당권을 장악한 사회당은 전쟁 발발 당시부터 줄곧 반전 입장을 견지했다. 전쟁 수행 위원회들에 의원단의 일부가 참여하여 이들의 제명 문제가 커다란 쟁점이 되긴 했지만, 투라티 등의 개혁주의자 다수는 당의 명령에 비교적 충실히 따랐다.
국내 위기를 전쟁으로 풀려 했던 자유주의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전쟁은 이탈리아 사회를 더욱 뒤흔들어놓았다. 한편에서는 군수산업의 호황으로 인해 거대 독점자본이 급성장했다. 토리노의 FIAT 자동차회사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다수 노동자?민중이 전시하의 식량난과 물가인상으로 고통받고 생활수준이 급락했다.   
아니나다를까, 전쟁 직전의 투쟁 양상이 다시 나타났다. 1917년 초 토리노 섬유공장 여성노동자들의 물가 항의 시위를 시발로 파업 물결이 되살아났다. 마침 이탈리아에 전해진 러시아 혁명 소식은 대중에게 변화의 열망을 부채질했다. 사회당 역시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19년 3월에 볼셰비키의 주도로 제3인터내셔널(흔히 ‘코민테른’이라 부른다)이 건설되자, 사회당은 10월 당대회를 통해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했다. 흔히 기존 유럽 노동자정당들 중 소수파만이 코민테른에 결합했다고 오해하곤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사회당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회당도 당대회를 통해 코민테른 가입을 통과시켰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노선은 당시 서유럽에서도 일정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탈리아 사회당이 좀 더 적극적인 혁명 정당으로 탈바꿈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코민테른 가입이나 혁명적 결의안의 반복은 자본가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스쳐는 기득권 세력을 자극하여 단결시키는 효과만 낳았을 뿐, 기득권 세력을 굴복시킬 광범한 세력을 결집하는 실천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림 ) 안토니오 그람시
1919년은 이탈리아 자유주의 국가의 위기가 한계 지점에 도달한 해였다. 노동자들의 파업뿐만 아니라 중간계층도 투쟁에 나섰다. 전선에서 돌아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제대 군인들은 이 해 6월 참전군인협회를 건설했는데, 애초에 이들이 내건 것은 무슨 극우 이념이 아니라 민주적 국가의 건설이었다. 남부의 빈농들은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토지점거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사회당은 이러한 중간계층의 움직임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은 이탈리아 사회 변혁의 구체적인 전략을 다듬지도 않았고, 당 조직을 적극적인 행동 조직으로 재편하여 하지도 않았으며, 제대 군인 정책과 농민 정책의 부재로 인해 이들 중간계층을 노동계급운동으로부터 소외시켰다.    
오직 토리노시지부(당원 1000명)의 젊은 활동가들만이 유일하게 어떤 전략적 전망을 수립하려고 시도했다. 1919년 메이데이에 안토니오 그람시, 팔미로 톨리아티, 안젤로 타스카 등 토리노의 당활동가들은 <오르디네 누오보(새 질서)>라는 새로운 주간지를 창간했다(발행 부수 5000부). 이 잡지를 통해 그람시 등은 공장의 전체 노동자가 생산 활동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대안 사회의 진정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은 1918년에 토리노에 등장한 ‘내부위원회’라는 틀에 주목했다. 이탈리아는 노조 조직률이 낮았기 때문에 현장의 전체 노동자들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산별 노동조합 이외의 대의 체계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내부위원회였다. <오르디네 누오보> 편집진은 임단협을 위한 대의 체계인 내부위원회를 생산 통제까지 추구하는 ‘공장평의회’로 발전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비록 그 시야가 토리노라는 지역적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사회당 내에서 처음으로 제출된 구체적인 전략적 제안이었다.
그러나, 사회당의 내부 위기에 대하여 가장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은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이 아니었다. 그 주인공은 <일 소비에트>라는 저널을 통해 청년 좌파의 전국적 조직화를 추진하던 아마데오 보르디가였다. 1919년 11월로 예정된 전후 최초의 총선을 앞두고 보르디가는 선거를 포함하여 일체의 부르주아 제도에 불참한다는 초좌파적 방침을 바탕으로 각지의 좌파 당원들을 규합했다(‘선거불참파’). 이는 “사회당의 다수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선거 등 대중접촉공간에 적극 참여하라”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18년 겨울에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호소를 조롱한 독일 공산당의 젊은 초좌파들과 마찬가지로 보르디가 등에게는, 대중과 접촉하고 이들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순수한 혁명 좌파 이념을 고수하는 활동가들을 규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 비록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만은 선거 보이콧 방침에 반대했지만, 신진 좌파 내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소수였다. 
총선 한 달 전인 볼로냐 대회에서 선거불참파의 극단적 노선은 물론 다수를 획득할 수 없었다. 총선은 예정대로 치러졌고, 사회당은 총 508석 중 156석을 차지했다. 또한 소농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 계열의 신생정당인 인민당이 100석의 농촌 의석을 차지했다. 정당 조직조차 갖추지 못한 집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였다. 전전(戰前) 2만 정도였던 사회당의 당원 수는 18만으로 늘었고, CGL 조합원은 25만에서 200만으로 증대했다. 겉으로만 보면 노동계급의 승리가 멀지 않은 듯했다.

무산된 역사의 ‘추수’

1919년 9월 초, <오르디네 누오보>의 전술이 드디어 현실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FIAT사를 비롯해 토리노의 30개 공장에서 5만 노동자가 내부위원회를 공장평의회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다. 그 해 말까지 토리노에서 공장평의회로 조직된 노동자는 총 15만명이었다. 12월에 당 토리노시지부와 토리노 노동회의소는 공장평의회를 공식 노선으로 승인했다. 12월 3일 토리노시지부의 집회 명령이 내려지자 공장평의회 체계를 통해 12만의 노동자가 1시간만에 집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사회당의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조직력이고 행동력이었다. 토리노시지부는 공장평의원들을 대상으로 12월 한 달 동안 대대적인 정치교육을 벌였다.
(그람시 등이 공장평의회를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관료화된 산별 노동조합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산별 노동조합 간부들과는 달리 공장평의원들은 현장에서 직접 선출되고 쉽게 소환 가능했다. CGL의 관료주의를 밑에서부터 허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기존의 노동조합에 조직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까지 포괄할 수 있었다. 테일러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늘어난 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더 나아가 그람시는 임단협에 매몰된 노동조합과는 달리 공장평의회가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당권파인 세라티가 공장평의회 노선을 맹렬히 반대한 것이 바로 공장평의회의 위와 같은 특성들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세라티가 보기에 혁명의 주역은 ‘조직’ 노동자이지 ‘미조직’ 노동자가 아니다. 당과 노동조합이야말로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 점에서는 보르디가도 의견이 일치했다. 다만, 그의 경우는 순수한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는, 좀 더 제한된 폭의 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뿐이다. - 분량을 줄이기 위해 생략될 수 있음.)  
공장평의회의 파업투쟁은 고용주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 3월 고용주들은 갑자기 섬머타임제를 실시하고는 이에 반대하는 내부위원들을 해고해버렸다. 눈엣가시인 내부위원회를 파괴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토리노의 공장평의회들은 공장점거파업에 돌입했다. 금속노동조합(FIOM)이 즉각 총파업을 선포했고, CGL도 4월 13일 형식적으로나마 총파업을 선언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투쟁은 토리노만 같지 못했다. 전국의 헌병대가 토리노로 몰려들었다. 세라티 등의 당권파는 토리노의 고립을 깨기 위해 다른 지역의 행동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토리노 금속 노동자들의 자제를 촉구했다.
6월, 황야에서 돌아와 다시 수상이 된 지올리티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경영참여’를 약속하면서 파업 지도부를 협상장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정부와 CGL 사이에 지루한 협상이 계속되던 그 해 여름, 모스크바에서는 코민데른 2차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탈리아 사회당의 범좌파에게 의견접근을 요구했다. 우선, 세라티의 구 좌파에게는 당명을 개정하고 개혁주의자 의원들을 하루빨리 출당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보르디가의 신 좌파에 대해서는 선거불참노선 등의 초좌파적 입장을 비판했다. 하지만, 두 세력 다 코민테른의 방침에 대해서 다른 복안들을 고수했다. 세라티는 투라티 일파와 선을 그을 생각이 없었다. 보르디가는 이미 사회당의 다수를 장악하기보다는 공산당을 분리 창당한다는 입장을 굳히고 있었다. 혁명적 상황에서 이탈리아 사회당을 혁신하여 그 지도력을 높이려던 코민테른의 노력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
그 여름의 끝(8월 31일)에, 지지부진한 노사협상에 참다 못한 노동자들이 공장점거파업을 재개했다. 50만의 노동자들이 4주간 공장점거를 계속했고, 공장평의회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토리노에서는 드디어 FIAT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접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매일 37대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생산으로부터 철수하는 고전적인 파업과는 달리 파업 중에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장악하고 자주관리한다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사회당 토리노시지부의 의식적인 활동이 없이는 불가능한 실험이었다.
하지만, 지올리티 정부는 사태가 더 발전하기 전에 노사협상을 타결짓는 데 성공했다. 정국은 신속하게 그 해 11월의 지방선거 준비로 전환되었다. 선거 결과는 사회당의 약진이었다. 하지만, 힘의 중심은 이미 노동운동 세력에게 있지 않았다. 일단 노동자들의 공세가 한 풀 꺾였다고 생각한 자본가?지주계급은 극우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노동자 세력에 대한 테러를 시작했다. 정국의 주도권이 급속히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페라라 시청에 붉은 깃발이 게양된 그 순간, 볼로냐 시청 광장의 사회당 승리 기념대회 석상에서는 파시스트 테러단의 폭탄이 투척돼 1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공산당의 창당 - 한 걸음 전진, 혹은 두 걸음 후퇴?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1921년 1월, 리보르노에서 사회당 당대회가 열렸다. 세라티의 당권파에 한없이 실망한 당내의 모든 신진 좌파 세력은 이 당대회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이들은 그 전 해 11월, 이몰라에 모여 ?공산주의 분파 선언?을 발표했다. 보르디가의 선거불참파를 다수파로 하고 토리노의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을 소수파로 하여 ‘공산주의 분파’가 건설된 것이다.
처음에 그람시 등의 구상은 사회당에 잔류하여 당내 다수 세력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보르노 대회에서 당권파의 9만8천표에 대해 공산주의 분파가 5만8천표만을 획득한 것으로 드러나자, 공산주의 분파는 보르디가의 주도 아래 당대회에서 철수하여 곧바로 <이탈리아 공산당(PCI)>을 창당했다. 4만명의 사회당원이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한 마디로 전광석화같은 분당이었다. 이것은 과연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전진이었던가? 보르디가 등이 보기에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그람시는 일단 공산주의 분파의 결정에 복종하긴 했으나, 그러한 확신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작년의 쓰라린 경험이 보다 효과적인 당운동의 필요성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새로 구성된 이 당이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혹시 대중의 상당 부분과 단절된 좌파 집단의 고립화는 아닌가? 후에 그람시는 이 때를 회상하면서 “반동의 승리”라는 극단적 표현도 꺼리지 않았다.  

반동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 창세기의 상태로 되쫓아 버리려 한다. 분산시키고 고립시키고, 자기를 통일체로 실감하고 권력을 희구하는 계급이 아니라 흩어진 개개인으로 되돌아가게 하려 했다. 리보르노의 분열(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 다수파의 코민테른으로부터의 이탈)은 의심할 여지없이 반동의 일대 승리였다.
- 그람시의 언급, 주제세 피오리의 ?그람시? 193쪽에서 재인용. 

그 해 5월 총선에 참여한 공산당은 29만표를 얻어 15석을 획득했고, 사회당은 150만표을 얻어 123석을 확보했다. 이탈리아를 신호로 해서 서유럽의 혁명적 상황은 급속히 극우 세력의 반격과 노동계급 측의 수세 국면으로 바뀌었다. 파시스트들의 테러 공세 속에서 CGL의 조합원은 200만에서 80만으로 급감했고, 사회당 당원 수는 2만5천까지, 공산당 당원 수는 5천명까지 떨어졌다.
코민테른 3차대회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주도 아래 이러한 급격한 상황 전환에 걸맞는 전술을 제시했다. 그것은 ‘공동전선’ 전술이었다. “공동전선 전술의 목적과 의미는, 필요하다면 제2인터내셔널과 2.5인터내셔널 지도자들과의 공동투쟁을 통해서라도 더욱 더 많은 노동자 대중을 자본에 대한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레닌). 공동전선 전술의 슬로건은 “대중 속으로!”였다. 이 전술에 따른다면, 이탈리아 공산당은 사회당과 재통합하지는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공동행동에 나서야 했다. 코민테른은 더 나아가 사회당이 투라티 일파를 출당할 경우 공산당이 사회당과 재통합해야 한다고까지 권고했다. 그러나, 보르디가가 주도하던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과거의 쓰디쓴 경험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미래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가로막았다.   

그들(사회당)과 결별한 뒤, 그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조직적 투쟁은 계속하면서도 반동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관계는 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 당의 지도적인 사람들은 이 노선에 접근하려는 인터내셔널의 모든 행동을 마치 리보르노 분당의 묵시적 부인이나 후회의 표명인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 그람시의 회상, 위의 책 210쪽에서 재인용. 

1922년에 철도노조는 모든 노동자 세력을 모아 파시스트들에 대항할 ‘노동동맹’을 결성하자는 시의적절한 제안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주로 자유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파시스트들을 제압할 방안을 모색하던 CGL 지도부마저도 동참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끝내 불참했다. 공산당의 유아적 태도로 인해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파시즘을 물리칠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런 와중에 파시스트 세력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고, 1922년 10월 8일 드디어 ‘로마 진군’이라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당수인 무솔리니를 수상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총파업을 통해 이에 대항하자는 호소는 사회당과 CGL의 소극적인 태도로 계속 불발로 끝나버렸다. 다른 한편에서 보르디가의 공산당은 여전히 공동행동 자체를 거부했다. 심지어는 사회당에서 결국 투라티 일파가 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4차 대회의 합당 권고를 거부했다.
보르디가는 “파시즘은 단순히 부르주아 지배의 연장(延長)일 뿐이며 반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돼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파시즘의 성공이 중간계층의 지지와 동원에 기반한다는 점을 주목하자”는 그람시의 주장은 묻혀졌다. 코민테른 4차대회가 끝나고 그람시는 코민테른 파견자로 모스크바에 남았다. 그의 고국 이탈리아에는 이제 똑같이 힘을 잃은 세 개의 작은 노동자정당들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 공산당, 사회당 그리고 통일사회당(투라티 일파가 새로 만든 당). 

뒤늦게 파시즘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공산당은 파시즘과 거의 동시에 탄생했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을 권좌에 앉힌 혁명의 썰물은 공산당의 발전을 지체시켰다. 공산당은 파시즘의 치명적 위험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혁명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공동전선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감을 보였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종류의 소아병에 걸려있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태어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의 눈에는 파시즘이 “자본주의 반동”으로만 보였다. 노동계급에 대항하여 소자본가 대중을 동원하는 파시즘의 특수성을 공산당은 인식할 수 없었다. 그람시를 제외하고 공산당 지도부는 파시즘의 권력장악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이탈리아 동지들이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 L. 트로츠키, ?다음에는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독일 노동계급의 운명이 걸린 문제들?, ?트로츠키의 반파시즘 투쟁?, 박성수 옮김, 풀무질, 2001, 201~202쪽.

무솔리니 집권 직후 공산당은 면책특권이 없는 지방의원들을 포함하여 당원의 1/4이 검거되었다. 보르디가 역시 구속되었다. 당의 유일한 합법 공간은 이제 의원단 활동뿐이었다. 
지도부 공백 상태를 메우기 위해 러시아에 있던 그람시가 귀국을 준비했다. 그는 귀국하기 전 우선 과거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의 일원이었던 톨리아티 등을 설득해 ‘신중앙’을 형성했다. 그리고 신중앙의 새로운 전략 노선을 제출했다. ― 첫째, 사회당 내의 세라티파와 제휴하여 공동의 노동계급 대중신문을 창간한다. 둘째, CGL의 관료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다시 내부위원회를 활용한다. 셋째, 이탈리아 사회의 변화는 오직 남부 농민층의 동참을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노농동맹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들을 위해, 노동자 당원들을 공장세포로 조직하고, 당원 정치교육을 강화한다.
그람시의 신노선은 한 마디로 이제까지의 보르디가 노선에 대한 전면적 수정이었다. 파시스트의 압승이 예상되던 1924년 총선에서 대부분의 야당들은 선거 보이콧을 추진했으나, 이번에는 공산당이 오히려 적극적인 선거 참여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다른 정당들도 결국 선거에 참여하게 됐다. 공산당은 또한 사회당에 ‘공동 선거 블록’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회당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고, 세라티의 ‘통일공산주의파’만이 탈당하여 공산당에 합류했다. 리보르노 대회 이후 참으로 기나긴 여정 끝의 재통합이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공산당의 19명의 의원들(지지율 4%) 중에는 그람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원 면책 특권에 따라 그람시는 파시즘 치하의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한 그람시는 의원단과 각종 대중공간을 활용하는 공세적인 전술을 펼쳤다. 뒤늦게나마 공산당은 사기를 잃은 대중들과 다시 접촉하고 이들을 새로이 규합하는 활동에 나선 것이다. 당은 우선 1924년 2월에 <우니타(단결)>라는 대중신문을 창간해 2만5천부를 발행했다. 3월부터는 월간 이론지로서 <오르디네 누오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6천부). 보르디가는 이 모든 시도를 반대하고 의원 명단에 지명되는 것조차 거부했다.
1924년 6월, 뜻밖의 기회가 왔다. 사회당의 지아코모 마테오티 의원이 파시스트들의 폭력을 비난하는그림 0 파시즘에 희생당한 마테오티 의원
 연설을 하고 나서 납치?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항의하여 모든 야당이 의회에서 철수, 등원 거부 투쟁을 벌였다. 이 사건은 그 동안 파시즘을 지지하던 중간계층 대중들까지 흔들어놓았다. 등원거부투쟁의 초기에 공산당은 더 적극적인 전술로서 정치총파업을 벌일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연말에 들어서서는 의회 바깥에 ‘대항의회’를 건설하고 정면대결을 벌이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두 제안 모두 다른 야당들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 위기 동안에 공산당은 조직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당원이 2만5천으로 늘었고, 그 당원들이 모두 세포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자심감을 바탕으로 그 해 11월 공산당은 더 이상 무기력한 등원거부투쟁에 함께 하기보다는 의회 안에서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공산당 의원단은 파시스트 의원들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의회에 등원해 파시즘을 비난하고 그 범죄를 폭로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하지만, 역사의 ‘거름’이 되려는 선택은 시간의 추월을 이겨내지 못했다. 다음해 1월 무솔리니는 공공연한 독재를 선언하고 탄압을 강화했다. 공산당은 국내가 아닌 프랑스땅 리용에서 당대회를 갖고 반파시즘 공동전선, 노농동맹 등의 전략 노선을 확정지어야 했다(?리용테제?). 이제 보르디가를 추종하는 당원은 10%에 불과했고, 나머지 모두가 신중앙파의 지도에 따랐다. 무솔리니 측의 대답은 당 핵심의 검거였다. 1926년 11월 8일,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은 불법화되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원단까지 체포되었다. 그 중에는 물론 그람시도 있었다.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그의 저서 ?옥중수고?는 바로 이렇게 극우 세력의 반격의 속도를 추월하지 못했던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패배에 대한 뼈저린 비판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1920년의 ‘붉은 두 해’에 이탈리아 사회당은 노동자?민중운동의 전략적 전망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가장 앞서 있었던 토리노 당조직조차도 토리노를 넘어선 전국적인 대안을 제출하고 행동을 이끌어낼 능력은 지니지 못했다. 새로운 당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 등장한 새로운 좌파정당은 노동계급세력을, 똑같이 무능한 여러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 놓았을 뿐이다. 분당은 “너무 늦었으면서” 동시에 “너무 빨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기적인 공동행동이라도 모색되어야 했으나 그조차도 너무나 뒤늦게야 시도되었다. 이탈리아의 노동계급이 한 세대의 패배를 통해서 배워야 했던 이 교훈을 우리는 결코 망각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참고할만한 책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김현우?장석준 옮김, 2001.
- 장석준?김덕련, ?세계를 바꾸는 파업?, 이후, 2001.
- 정병기 편, ?이탈리아 노동운동사?, 현장에서미래를, 2000.
- 존 카메트, ?그람시와 이탈리아 소비에트?, 페리 앤더슨 외, ?안토니오 그람시의 단층들?, 김현우 외 편역, 갈무리, 1995.
- 주세페 피오리, ?그람시: 한 혁명가의 생애와 사상?, 신지평 옮김, 두레, 1991.
- 퀀틴 호어?제프리 노웰 스미스, ?서설?, 그람시, ?옥중수고Ⅰ?, 이상훈 옮김, 거름,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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